서기 875년 - 신라 경문왕의 아들이자 태자인 김정金晸이 신라 헌강왕憲康王으로 즉위하였다.
그는 성품이 총명하고 민첩하였으며 책보기를 좋아하였는데, 눈으로 한 번 보면 입으로 모두 외웠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서기 875년 - 신라 헌강왕이 왕위에 오르면서 작은 아버지인 이찬 위홍(魏弘)을 상대등으로 삼고,
대아찬 예겸(乂謙)을 시중으로 삼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서기 876년 봄 2월 - 신라 헌강왕이 황룡사(皇龍寺)에서 모든 스님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백고좌(百高座)를 열어
불경을 강론하였다. 헌강왕이 직접 행차하여 들었다. 이는 다 중앙집권 강화를 위한 것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서기 876년 가을 7월 - 신라 헌강왕이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바칠 토산물과 함께 '입入'국시켰다.
秋七月 遣使入唐貢方物
-삼국사기 신라본기
서기 878년 여름 4월 - 당나라 희종(僖宗)이 사신을 보내 신라 헌강왕을 사지절개부의동삼사검교태위대도독
계림주제군사신라왕(使持節開府儀同三司檢校太尉大都督?林州諸軍事新羅王)으로 책봉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사신의 도착이 2년이나 늦어진건 황소의 난 때문인 것 같다.)
서기 878년 가을 7월 - 신라 헌강왕이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려다가, 황소(黃巢)의 난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중지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서기 878년 8월 - 신라 헌강왕이 일본국 사신이자 대신관大神官인 아자개(원선元善)를 친히 접견할 정도로
극진히 예우하였다. 이후 신라는 아자개를 신라 진흥왕의 후손으로 등록시켜 진골 대열에 참가시켰다.
당나라와의 교역이 황소의 난으로 중단된 위기에 처하자 신라는 일본과의 교역에 더욱 의지한다.
"일본국 사신이 신라에 오니, 신라 헌강왕이 조원전(朝元殿)에서 접견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 '이제가기李?家記'에 아자개가 신라 진흥왕의 후손 원선元善이라 나온다.
서기 879년 3월 - 신라 헌강왕이 포석정에서 아자개의 4명의 아들들의 '이상한 춤'을 구경하였다.
(진훤(견훤) 용개(龍盖)?보개(寶盖)?소개(小盖) )
헌강왕이 이들의 춤을 따라 추었다.
이 이상한 춤은 금관가야 건국 당시 금관가야의 아홉명의 신관들이 천손天孫 호노 니니기노 미코토를
맞이하며 춘 춤이다.
"임금이 나라 동쪽의 주와 군을 순행하였는데,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사람 넷이
임금의 수레 앞에 와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그들의 모습이 해괴하고 차림새가 괴이하여,
당시 사람들이 그들을 산과 바다에 사는 정령(精靈)이라고 여겼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서기 879년 여름 6월 - 일길찬 신홍(信弘)이 반역을 일으켰기에 신라 헌강왕이 그를 사형에 처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서기 880년 - 웅주(熊州)에서 신라 헌강왕에게 상서로운 벼이삭을 진상하였다.
신라 헌강왕 때 신라가 크게 경제가 좋아져 경주에 민가가 즐비해지고 노랫소리가 연이어 들리고
민가마다 모두 짚이 아닌 기와로 지붕을 덮고 나무가 아닌 숯으로 밥을 지어 먹었다.
신라 헌강왕이 즉위한 이후로 음양이 조화롭고 바람과 비가 순조롭고, 해마다 풍년이 들고 백성들은
먹을 것이 풍족하며, (일본과의 친교로 인해 발해와의 긴장이 완화되어) 국경이 안정되고
도시에서는 즐거워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서기 882년 여름 4월 - 일본국 천황이 신라 헌강왕에게 황금 3백냥 , 명주 10개를 일본인 아자개를 통해
통해서 교역을 실시하였다.
상으로 헌강왕이 아자개의 아들 처용(진훤=견훤)에게 미녀(공주일지도 모름. 혹시 선화공주?)를 하사하였다.
미녀가 견훤에게 시집와서 견훤의 아들들 셋(신검,용검,양검)을 자식으로 삼았다.
"일본국 왕이 사신을 보내, 황금 3백 냥과 명주(明珠) 10개를 진상하였다.
겨울 12월, 고미현(枯彌縣)의 여자가 한 번에 아들 셋을 낳았다." -삼국사기 신라 헌강왕본기
서기 882년 겨울 12월 - 신라 헌강왕이 순행하던 중 처용(진훤=견훤)의 아내(선화 공주 김씨)를 훔쳐
겁탈하여 자신의 아내로 하였는데. 이 여자가 왕자 '요'를 너무 빨리 낳았다.
왕은 '진훤의 아들이구나' 싶어 왕이 궁중의 사자(使者)를 시켜 출산하자마자 사자로 하여금 아이를
포대기 속에서 꺼내어 누마루 아래로 던져 궁녀로 하여금 무사히 가져가게 하였다.
궁녀가 왕자 '요'를 데리고 멀리 떠나 왕자 '요'의 어머니가 되어 은둔하여 살며 왕자의 요의 이름을 '궁예'라 짓다.
"일본국 왕이 사신을 보내, 황금 3백 냥과 명주(明珠) 10개를 진상하였다.
겨울 12월, 고미현(枯彌縣)의 여자가 한 번에 아들 셋을 낳았다." -삼국사기 신라 헌강왕본기
"처음에 헌강왕이 사냥을 관람하다가 지나는 길 옆에서 한 여인을 보았는데 그녀의 자태가 아름다웠다.
왕이 마음속으로 그녀를 사랑하여 뒤쪽 수레에 태우라 명하고 유궁(?宮, 장막을 쳐서 임금이
임시 거처하도록 만든 곳)
에 와서 야합하였는데, 곧 바로 임신하여 아들(요 왕자)을 낳았다.
그가 장성하자 체격이 크고 용모가 걸출하여 이름을 ‘요’라고 하였다. 진성왕이 이 말을 듣고 궁 안으로
불러들여 손으로 그의 등을 어루만지면서 말하였다.
“나의 형제와 자매의 골격은 남들과 다른데, 이 아이의 등에 두 뼈가 솟아 있으니, 정말로 헌강왕의 아들이다.”
곧 관리에게 명하여 예를 갖추어 높이 봉하였다." -삼국사기 신라 진성여왕본기
서기 885년 봄 2월 - 분노한 처용(진훤=견훤)이 궁궐에 난입하여 헌강왕을 암살 시도하나 실패하다.
아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피를 토하고 분노하며 신라를 반드시 멸망시키기로 결심하였다.
"서기 885년 봄 2월 호랑이가 궁궐에 들어왔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광계(光啓) 연간(서기 885~887) - 일본인 아자개가 농업으로 벌어들인 자금을 활용하여
사불성(沙弗城)[지금의 상주(尙州)이다.]을 점거하고 스스로 장군이라고 일컬었다.
일본인 아자개가 전라도 해적 능씨 가문과 혼인동맹을 맺여 능애(能哀)를 낳았다.
참고 사료 : 삼국유사 후백제 견훤
신라의 마지막 영웅 김요 왕자의 등장.
- 김춘추가 신라를 통일한후 200년 후 신라는 큰 위기를 겪고있었다.
백성들은 계속 되는 가뭄, 신라 곳곳에 할거하는 진골 성주들의 반역들, 조정 중앙정권을 넘보는 진골 귀족들로
신라의 대지는 혼란스러웠다.
이른바 영웅들의 출현을 알리는 춘추전국 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것이었다.
그들 중 훗날 한반도를 한사군漢四郡으로 만드는 미주랑 왕건은 송악 땅에서 조용히 세월과 물고기를 벗삼아 놀고있었다.
하지만 옛 침미다례 임나 땅인 전라도 지역에서는 헤이안 일본인 진훤이란 무사가 일어나
침미다례 임나의 후예들을 모두 모아 백제를 부활시킨다.
그 때 불과 10세의 어린 나이에 용감함과 능수능란한 용병술로 양길과 함께 의적을 일으켜
옛 고구려의 호방한 의적들과 함께 진골 탐관오리들의 군현들을 휩쓰는 용모가 걸출한 소년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궁예였다.
그는 강릉 강원도를 휩쓸며 그 무리는 수천에 달해있었고 불과 소년의 나이에 무리의 존경을 받았다.
소년은 어머니로만 알고있던 여종으부터
자신이 신라의 왕자 즉 헌강왕의 서자데 피치못할 사정으로 궁에서 출가되었으나
진성여왕이 지금 찾고있으니 더이상 의적을 하면 안된다하자 고민하다 의적들에게 잠시 근신하라 명하고
세달사에서 성인식을 치루고 진성여왕으로부터 옥좌를 물려받으니
이가 바로 신라의 마지막 전성기를 이끄는 정복자 효공왕 '김요'였다.
헌안왕 - 경문왕 - 헌강왕 - 진성여왕 대로 진골들을 닥치는대로 죽이고 당나라의 힘을 빌려
겨우 중앙집권을 다시 이룩하였다.
대학사 최치원을 기용하여 최치원의 책략에 따라 조정을 쇄신한 진성여왕으로부터 15세의 나이에 옥좌를 물려받으니
그는 뛰어난 용병술로 신라 땅의 중앙 왕조에 반란을 일으킨 군벌들을 견훤만 빼고 모조리 다 토벌하였고
신라에 불만을 품은 옛 고구려 세력, 의적들을 모두 품 안에 들였다.
그는 신라의 왕임에도 문무대왕이 세운 부석사에 들어가 대도大刀를 빼서 자신의 조상 신라 문무대왕의 초상에
단 칼에 베어버려 당나라와 신라에 공멸당한 고구려인들의 원한을 풀어주는 놀라운 단호,대범함을 보인다.
이는 곧 신라를 벗어나 새로운 집단으로서의 태동.. ...그랬다. 그것은 마하친MahaChin.. 대동방국의 시작이었다.
궁예란 이름 뜻이 바로 요(嶢)였다..
진성여왕이 자신만만하게 추대시킨 나이 15세 신라 효공왕의 이름은 '요(嶢)'였다.
'요(嶢)'란 글자에는 요임금 요堯가 있다.
궁예는 신라 왕의 서자인데. 효공왕 역시 헌강왕의 서자 요堯이다.
난 이미 여러 글로 통해
궁예가 헌강왕의 서자 요堯임을 밝혀냈다. 그렇다면 과연 그러한가?
더 명확한 증거는?
있다... 그것은 바로 효공왕의 이름 '요嶢'에 있다.
요堯임금 때 태양이 10개가 나타나 천하 대지가 모두 불타고 천하가 잔멸할 위기에 처했다.
예? 혹은 유궁후예有窮后? 란 자가 나타났는데. 활쏘기의 명수여서 해 10개를 1개만 빼고
모두 쏘아맞혀 천하가 구해졌다.
그렇다. 효공왕 요 = 궁예 란 증거는 바로 유궁후예有窮后?에 있다.
유궁후예에서 '궁' '예' 빼면 궁예란 이름이 된다.
이 궁예나 요 궁예나 둘 다 활 잘쏜다는 뜻이니 신기해서 미칠 것 같다.
궁예의 진실이 드디어 밝혀지다...
못되고 패악한 중국 남방 호족 해적이자 반역자인 왕건은 주인 궁예를 배신한 것도 모자라
고려 사관들로 하여금 궁예의 아버지가 누군지도 알지 못하게 철저히 조작하였다.
궁예에 대해 삼국사기 궁예 열전은 이렇게 적는다.
"궁예(弓裔)는 신라 사람으로 성은 김씨이다. 아버지는 제47대 헌안왕(憲安王) 의정(誼靖)이고
어머니는 헌안왕의 후궁이었는데 그녀의 성명은 전해지지 않는다. 혹은 48대 경문왕(景文王) 응렴(膺廉)의 아들
이라고도 한다. 5월 5일 외가에서 태어났는데 그때 지붕 위에 흰빛이 긴 무지개처럼 위로 하늘에 닿아 있었다.
일관(日官)이 아뢰었다.
“이 아이가 오(午)자가 거듭 들어있는 날[重午日]에 태어났고 나면서부터 이가 있으며 또한 광선과
불꽃이 이상하였으니, 장래 나라에 이롭지 못할까 염려되옵니다. 기르지 마옵소서.”
왕이 궁중의 사자(使者)를 시켜 그 집에 가서 그를 죽이도록 하였다. 사자는 아이를 포대기 속에서 꺼내어
누마루 아래로 던졌는데, 젖먹이는 종이 몰래 받다가 잘못해서 손가락으로 눈을 찔러 한쪽 눈이 멀게 되었다.
그길로 안고 도망하여 숨어서 고생스럽게 길렀다." -삼국사기 궁예열전
궁예는 신라인,김씨라고 분명 적고있고 그의 아버지는 신라 말기 왕이라고 하여 분명 궁예가 신라 왕족임을
분명시하고있다.
하지만 엄연히 왕조의 사관들이란 자가 궁예의 아버지가 누군지도 제대로 안 적는 태만한 짓을 저지르고있다.
아니. 고려가 세워지기전 궁예의 마진,태봉국 시절에 신하들 ,왕건이 궁예의 나이도 모른단말인가?
그들은 대충 짐작이 안간단말인가?
심각히 작위적 냄새가 느껴진다.
일단 헌안왕의 아들 중엔 궁예는 절대 없다.
삼국사기 신라본기가 적기를 헌안왕은 이렇게 말한다.
서기 861년 봄 정월 - 임금이 병으로 누워 위독해지자 측근들에게 말하였다.
“과인은 불행하게도 아들이 없이 딸만 두었다. 우리나라 옛 일에 선덕(善德)과 진덕(眞德)
두 여왕이 있었지만, 이는 암탉이 새벽을 알리는 것과 가까운 일이라 본받을 수는 없다. 사위 응렴은
나이가 비록 어리지만 노련한 덕성을 갖추고 있다. 그대들이 그를 임금으로 세워 섬긴다면 반드시
조종(祖宗)의 훌륭한 후계자를 잃지 않을 것이요, 내가 죽은 이후에도 나라에 해로운 일이 없을 것이다.”
-삼국사기 신라 헌안왕본기
헌안왕 스스로 아들 없다잖은가.
그리고 삼국사기 신라 경문왕본기에는 어떤 여인을 후궁으로 취했다할만한 정황적 기록이 안찾아진다.
그리고 경문왕은 화랑이 왕으로 올랐다는 약점을 가지고 있어 즉위 초부터 진골들에게 얕보임을 받아
당나라로 사신을 보내도 배가 침몰당하고 진골들은 왕이 당나라로부터 책봉받지못하게 방해했다.
그러자 경문왕은 일본 사신,일본 무사들의 도움을 빌어 당나라로 사신을 보내 책봉을 받게하고
당나귀 귀라고 불릴만큼 귀족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고 자신이 암살당할까봐 항상 밤잠을 못이루고
뱀들(일본군들)로 하여금 자신을 지키게하고서야 편히 자고 당나라로부터 책봉받은 후에는
당나라의 후광을 힘입어 까부는 진골들을 사정없이 죽이고 심지어 찢어죽이는 등 중앙집권을 다시 이룩해내는
쾌거를 이루는 강력하고 군주였다.
그러므로 경문왕은 궁예를 보호하지못하는 무능한 왕하곤 거리가 멀고 그럴만한 정황두 없다.
그런데 헌강왕본기를 보면 요런 기록이 나온다.
"8년(서기 882) 여름 4월, 일본국 왕이 사신을 보내, 황금 3백 냥과 명주(明珠) 10개를 진상하였다.
겨울 12월, 고미현(枯彌縣)의 여자가 한 번에 아들 셋을 낳았다." - 삼국사기 신라 헌강왕본기
'여자'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 것이다. 이건 특별한 암호적인 기록이다.
그리고 진성여왕본기를 보면
"처음에 헌강왕이 사냥을 관람하다가 지나는 길 옆에서 한 여인을 보았는데 그녀의 자태가 아름다웠다.
왕이 마음속으로 그녀를 사랑하여 뒤쪽 수레에 태우라 명하고 유궁(帷宮, 장막을 쳐서
임금이 임시 거처하도록 만든 곳)에 와서 야합하였는데, 곧 바로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다." -삼국사기 신라 진성여왕본기
헌강왕과 후궁이 된 미녀에 대해 나오는 것이다...!
그렇다. 삼국사기 궁예열전은 일부러 궁예가 헌안왕의 아들 '혹은' 경문왕의 아들이라고 말하고있다.
뭔갈 자꾸 피하는 것이다. 그렇다. 헌강왕이다. 그렇다면 이 헌강왕의 미녀 후궁은 바로 궁예의 어머니인 것이다.
궁예는 어찌됏든 신라 왕의 아들인데. 왜 왕건은 궁예가 헌강왕의 아들인걸 감추려 했을까.
그렇다. 반드시 피해야만 되는 결정적인 이유가 있는 것이다.
자.. 헌강왕의 아들의 이름은 무엇일까..
"처음에 헌강왕이 사냥을 관람하다가 지나는 길 옆에서 한 여인을 보았는데 그녀의 자태가 아름다웠다.
왕이 마음속으로 그녀를 사랑하여 뒤쪽 수레에 태우라 명하고 유궁(?宮, 장막을 쳐서 임금이
임시 거처하도록 만든 곳)
에 와서 야합하였는데, 곧 바로 임신하여 아들(요 왕자)을 낳았다.
그가 장성하자 체격이 크고 용모가 걸출하여 이름을 ‘요’라고 하였다. 진성왕이 이 말을 듣고 궁 안으로
불러들여 손으로 그의 등을 어루만지면서 말하였다.
“나의 형제와 자매의 골격은 남들과 다른데, 이 아이의 등에 두 뼈가 솟아 있으니, 정말로 헌강왕의 아들이다.”
곧 관리에게 명하여 예를 갖추어 높이 봉하였다." -삼국사기 신라 진성여왕본기
그렇다.. 궁예로 추정되는 헌강왕의 서자는 '요嶢' 즉 성씨와 이름이 김요金嶢였다.
"효공왕은 김요(金嶢) 이며, 헌강왕(憲康王)의 서자이다." -삼국사기 신라 효공왕본기
충격적이게도 김요는 신라 진성여왕의 대를 잇는 효공왕으로 즉위하는 인물이다....
김요는 진성여왕 말기 갑작스럽게 등장하는 미스터리한 헌강왕의 서자로 진성여왕은 그를 은둔하는 현자로 언급하고있다.
"“근년 이래로 백성의 생활이 곤궁해지고 도적들이 봉기하니, 이것은 내가 덕이 없기 때문이다.
숨어 있는 어진 자인 '요'에게 왕위를 넘겨주기로 나의 뜻을 결정하였다.” -삼국사기 신라 진성여왕본기
더욱 놀라운건 앞서 말했듯 헌강왕의 서자의 탄생은 헌강왕 제위 시기 중에서도,
서기 882년이라는게 암호적인 기록으로
삼국사기 신라 헌강왕본기에 나오는데.
진성여왕이 서기 897년 당시 당나라 황제에게 김요의 나이를 15살로 말한다는 점인데. 정확히 서기 882년이 된다.
"서기 897년 여름 6월 - ..... 그리고 왕위를 태자 요에게 물려주고,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표문을 올려 말하였다.
저의 조카 요는 죽은 형 정(헌강왕 김정)의 아들입니다.
나이가 열다섯 살 정도 되었고 종실을 흥하게 할 자질이 있기에, 밖에서 구하지 않고 안에서 선택하여
근일에 이미 나라 일을 임시로 맡겨 나라의 재난을 안정시키게 하고 있습니다.” - 삼국사기 신라 진성여왕본기
이 모든 자료들은 무엇을 말하고있는가.. 그렇다.. 궁예는 바로 신라 왕 新羅 王이었고 그는 역적 왕건에게 사료 조작을 당한 것이다...
그랬다. 그가 신라 왕이었기에 초창기부터 북방을 휩쓸어 옛 고구려 세력들을 모조리 다시 복속시키고
전라도의 엄청 강한 견훤 세력을 수군水軍을 동원해서 찍소리 못하게 해서 스피드하게 나주를 먹었다.
그런데 궁예가 세력을 확장하는 엄청난 대약진의 상황에서도 견훤은 신라의 대야성이나 좆발려 나주가 빈집털이당하는
견훤답지않은 이상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궁예는 초창기에 벌써 철원성을 짓고 중앙집권제를 정비하고 화려한 궁성을 짓는등 도적 집단으로선 하기 힘든 엄청난 일들을
척척 해냈다.
그렇다. 현재 남아있는 후삼국 시대 사료는 철저한 사료 비판을 거쳐야되는 것이다.
헌안왕 - 경문왕 - 헌강왕 -정강왕 - 진성여왕 - 효공왕 때의 신라 왕실 모습과 사회상을 다시 검토해야만한다.
왕건 고려에 의해 왜곡되어버린 신라 말기... 과연 신라 말기는 어떤 모습이었는가? 반란에 허덕이는 모습이었는가?
아니면 통일신라로서의 위엄을 보이며 당당하게 지방 반란 세력들을 모조리 토벌하는 막강한 신라였는가?
서기 885년 - 전촉 고조 왕건王建이이 38세에 장군의 칭호를 받았다. 이때 대당제국大唐帝國은 저물어가는 시기로,
황소黃巢의 난은 간신히 진정시켰으나 각지에 적군이 봉기하고 젊은 희종僖宗황제는 무위무력하였다.
서기 885년 3월 - 최치원(致遠還)이 신라로 돌아왔다.
서기 885년 겨울 10월- .신라 헌강왕이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황소(黃巢)의 난을 평정한 것을 축하하였다.
서기 885년 12월 - 장안이 반란군의 공격을 받아 희종 황제가 장안성을 탈출하다.
전촉 고조 왕건은 희종 황제를 보필하여 성도로 황제를 피신시켰다.
피신 도중에 전촉 고조 왕건은 적군의 잔혹한 추격에도 불구,
옥새를 지키고 불꽃과 연기 속을 돌파하며 황제를 지켰다.
무사히 성도에 도착하자 왕건은 희종 황제의 총애를 받아 벽주자사壁州刺使에 임명되었다.
--- 강대한 적군이 장안長安을 침공하여 희종황제는 간신히 도읍을 탈출한다.
겨우 자리잡은 곳은 남쪽, 촉蜀의 성도成都였다. 현종玄宗황제 이래 대당의 천자는 그곳에 피난하도록 되어 있었다.
왕건도 희종황제를 수행하여 성도로 향하였다.
적군의 추격은 재빨랐다. 희종황제의 일행은 이름 높은 촉의 잔도棧道에서 적군에게 따라잡혔다.
협곡을 북풍이 불어나가는 겨울밤이었다. 적군은 잔도에 불을 붙였다. 불은 강풍을 타고 잔도를 집어삼켜
황제를 수행하던 관리, 장병, 궁녀들이 차례차례 불에 둘러싸여 협곡으로 추락해간다.
희종황제는 말등에 달라붙은채 공포로 반쯤 실신해 있었다. 이때 왕건은 도보로, 등에 옥새를 담은 상자를 지고,
왼손에는 희종황제의 말고삐를 쥐고 오른손의 검으로 불타는 나무들을 베어가며 불꽃과 연기 속을 돌파한 것이다.
왕건이 없었다면 희종황제도 옥새도 불속으로 사라져 대당제국은 20년 빨리 멸망했으리라.
목숨을 구원받은 희종황제는 왕건에게 절대적인 신용을 주었다. 성도에 도착할 때까지 매일밤 왕건은
천자의 머리맡에서 무릎에 검을 얹고 경호의 역을 다하여 천자는 안심하고 잠들 수 있었다고 한다.
무사히 성도에 도착하자 왕건은 공에 의해 벽주자사壁州刺使에 임명되었다.
서기 885년 말 - 신라 헌강왕 김정이 병들어 시름시름 죽어가다. 그는 급히 숨겨놓은 아들 '요'의 탄생을
발표하고 885년부터를 요의 '출생'이라 정하고 요를 서둘러 찾게하다.
서기 886년 - 신라 헌강왕 '김정'이 죽다.
헌강왕 김정의 칙령으로 인해 서기 882년에 태어난 김정은 졸지에 885년 탄생으로 조작되었다.
요(嶢 : 헌강왕 김정의 아들 )는 태어나 아직 1년이 되지 않았다고 당시 신라 왕실은 착각해버리고 말았다.
그들은 요嶢를 찾으려고 애썼다.
그런데 경문왕의 둘째 아들 김황(金晃)이 요(嶢)는 신경도 안쓰고 권좌에 맘대로 올랐다.
김황이 경문왕의 둘째 아들 정강왕으로 즉위하다.
서기 887년 봄 정월 - 황룡사에서 백고좌를 열며 왕권의 위엄을 보이려는 신라 정강왕이
강론을 듣다가 김요(金?) 왕자의 자리를 가로챈 오빠를 치기위해 김요(金?)의 친숙모인 누이동생 만(曼)이
위홍과 화랑도들을 이끌고 혁명을 일으키니 정강왕이 순식간에 폐위당하다.
"황룡사(皇龍寺)에서 백고좌(百高座)를 열고 정강왕이 직접 행차하여 강론을 듣다가
한주(漢州)의 이찬 김요(金?)가 반역을 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서기 887년 - 신라 정강왕이 반란을 당해 폐위,유폐당하다. 누이동생 만(曼)에게 옥좌를 뺏기다.
만이 진성여왕으로 즉위하다.
만(曼) 즉 진성여왕은 헌강왕의 여동생이다. 그녀의 다른 이름은 탄(坦)이다.
정강왕은 진성여왕의 둘째 오빠 김황(金晃)이다.
서기 887년 - 신라 진성여왕이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고, 모든 주와 군의 1년간의 세금을 면제하였다.
황룡사(皇龍寺)에서 백고좌(百高座)를 열고 임금이 직접 행차하여 설법을 들었다.
서기 888년 - 진성여왕이 둘째 오빠 신라 정강왕을 소양리(少梁里)의 돌에 가둬 죽여버리다.
그녀는 실로 패역한 자를 처단한 여전사였다.
"2년(서기 888) 봄 2월, 소양리(少梁里)에서 돌이 저절로 움직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 삼국사기본기에는 서기 887년 정강왕 사망으로 나오지만 진성여왕이 당나라에 올린 표문에는
서기 888년 정강왕이 사망한걸로 나온다. 이런 차이점은 재빨리 파악하여 뜻을 파악하는 것이 사학자의 의무다.
서기 888년 - 진성여왕은 왕위에 오르기 전 각간 위홍(魏弘)의 애인이었다. 위홍은 경문왕 김응렴의 동생이다.
부득불 난국을 수습하기위해 왕위에 오른 후에도 서로 정을 끊지 못하여 이때에 이르러서는
늘 궁중에 들어와서 일을 보게 하였다. 여왕은 위홍에게 명령하여 대구화상(大矩和尙)과 함께
향가를 수집하고 정리하게 하였다. 이를 『삼대목(三代目)』이라 한다.
서기 888년 - 위홍이 죽자 혜성대왕(惠成大王)이라는 시호를 추증하였다.
이후로 진성여왕은 젊은 미남 (화랑) 두세 명을 몰래 불러들여 그들에게 요직을 주어 나라의 정사를 맡겼다.
여왕은 화랑들을 적극 기용하였고 무너지는 신라의 국운을 일으켜 안팎으로 애썼다.
서기 888년 - 대야주(大耶州)에 숨어 사는 거인(巨仁)이라 하는 논객이 감히 여왕의 정치를 비판하며 관청 거리에 방을 붙여댔다.
여왕이 수색하게 하였으나 잡을 수 없었다. 어떤 사람이 여왕에게 말하였다.
“이것은 반드시 문인으로서 뜻을 펴지 못한 자의 소행이니,
아마도 대야주(大耶州)에 숨어 사는 거인(巨仁)이란 자가 아닌가 합니다.”
임금이 명령을 내려 거인을 붙잡아 감옥에 가두고 그를 벌주려 하였다.
그러나 거인이 분하고 원망스러워, 감옥 벽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우공(于公)이 통곡하니 3년이나 가물었고,
추연(鄒衍)이 슬퍼하니 5월에도 서리 내리네.
지금 나의 깊은 시름은 돌이켜 옛일과 같지만
하늘은 말없이 푸르기만 하네."
진성여왕은 지혜로와 그 시를 듣고 그가 유언비어를 퍼트려 신라를 어지럽히는 자가 아니라 충언을 아끼지않는
자라는 것을 알아챘다.
이에 여왕은 거인을 풀어주고 돌려보냈다.
서기 888년 - 여전사 진성여왕은 2년 동안 너무 바쁜 공무로 몸져 누웠다.
여왕이 병들어 아프다가 나았다가를 반복하였다.
여름 5월 - 가뭄이 들었다.
서기 889년 - 가뭄으로 인해 나라 안의 여러 주와 군에서 공물과 세금을 감히 보내지 않아 창고가 비고
국가재정이 궁핍하여져 안타깝게도 여왕의 신라 중흥의 뜻은 어그러져가는 듯 했다.
서기 888년 -여왕이 사람을 파견하여 여러 주,군에 국가재정을 생각해달라고 부탁하니,
(여주불능선리女主不能善利라고 지껄여대며었으리라.) 도처에서 진골 탐관오리들이 반란을 일으키니
이에 대항하는 착한 도적들(의적들) 그리고 나쁜 도적들도 따라 봉기하였다.
서기 888년 - 이때 진골 귀족 원종(元宗)과 원종의 부하 애노(哀奴) 등이 사벌주(沙伐州)에 웅거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여왕이 나마 영기(令奇)에게 명령하여 그들을 치게 하였으나 영기가 (적들과 내통하여) 진군하지 않았다.
촌주(村主) 우연(祐連)만이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죽었다.
서기 888년 - 여왕이 칙명을 내려 영기의 목을 베어 군율의 지엄함을 보였다. 나이가 10여 세에 불과한
우연의 아들에게 아버지의 뒤를 이어 촌주가 되게 하였다.
서기 889년 - 일본인 견훤이 완산에서 거병하다. 무주 동남쪽 군현들이 항복해 견훤에게 붙다.
승주(순천)의 호족 박영규가 견훤에게 항복하고 견훤의 사위가 되다.
서기 890년 - 진성여왕이 황룡사에 행차하여 연등 행사를 보아 자신의 건재함을 신라 전역에 알렸다.
서기 891년 - 궁예('요' 왕자)가 불과 10세 나이로 죽주(竹州)의 도적 우두머리 기훤(箕萱)에게 투신하여
의적으로서 진골 탐관오리들을 벌하려 했다.
기훤이 '''업신'''여기며 예로써 대우하지 않자,(나이가 어려서)
궁예는 기훤의 휘하인 원회(元會), 신훤(申煊) 등과 비밀리에 결탁하여 벗을 삼았다.
서기 891년 겨울 10월 - 북원(北原)의 도적 두목 양길(梁吉)이 그의 11세 부하 궁예('요' 왕자)를 보내
기병 백여 명으로 북원 동쪽 부락과 명주(溟州) 관내 주천(酒泉) 등 10여 군현을 습격하여
진골 탐관오리들을 벌하였다.
궁예는 나이가 어림에도 용감하여 뭇 어른들 못지않았다. 당시는 사람들이 살기가 힘들어 어린애든 젊은이든
가리지않고 반란에 참가하거나 도둑,도적들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 이상한건 아니었다.
서기 892년 - 궁예('요' 왕자)가 11세 나이로 북원(北原, 강원 원주)의 도적 양길(梁吉)에게 투신하여 의적으로서
진골 탐관오리들을 벌하고자했다.
양길은 그를 우대하고 일을 맡겼으며, 드디어 병사를 나누어 주어 동쪽의 땅을 공략하게 하였다.
이에 치악산(雉岳山) 석남사(石南寺)에 머물면서 주천(酒泉), 나성(奈城), 울오(鬱烏), 어진(御珍) 등의
고을을 습격하여 모두 항복시켜 진골 탐관오리들을 벌하였다.
서기 892년 - 일본인 견훤이 반란을 일으켜 무진주를 함락시키고 신라서면도통지휘병마제치 지절도독전무공등주군사 행전주자사 겸 어사중승 상주국 한남군개국공 식읍 2천호 라 자칭하다.
무주(武州) 동남쪽의 군현이 그에게 투항하였다.
견훤이 무진주의 '지훤'을 자신의 사위로 삼다.
견훤은 금마(전북 김제)의 호족 '이의'에게도 딸을 주어 사위로 삼다.
서기 893년 - 전라남도의 일본계 신라 해적이 본격적으로 일본을 침략하다.
서기 893년 - 병부 시랑 김처회(金處誨)를 당나라에 보내 정절(旌節)을 바치게 하여 당나라의 도움을
얻으려 했으나 (전라도 후백제 해적의 습격으로) 바다에 빠져 죽었다.
서기 893년 5월 - 전라남도의 일본계 신라 해적이 다자이후(현 규슈 후쿠오카 다자이후)에 있는 비후국을 침공
하여 방화와 약탈을 벌이고, 비전국을 거쳐 돌아갔다. 토벌군이 도착하지만 이미 신라 해적은 떠난 뒤였다.
서기 894년 - 일본이 당나라로 사신을 보내는 견당사가 중지된다.
대외교류가 규슈의 다자이후에 제한되면서 국풍문화라고 불리는 독특한 귀족문화가 발달한다.
서기 894년 봄 2월 - 최치원(崔致遠)이 시국에 관한 의견 십여 조목(時務一十餘條)을 작성하여 바쳤다.
여왕이 기쁘게 받아들이고, 최치원을 아찬으로 삼아 왕권 강화 , 신라 내부 쇄신을 단행했다.
서기 894년 2월~3월 - 전라남도의 일본계 신라 해적이 다자이후와 근방 섬들을 침입하다.
4월 - 대마도를 침공하다. 일본 조정이 토벌군을 내려보내지만 이미 도망친 후였다.
신라 해적의 침공이 심해지자 일본 조정은 당나라가 신라해적과 연결되어있는게 아닌가 의심하여
견당사 파견을 계획한다.
9월 - '다자이후'가 220여명의 신라구를 쳐서 토벌했다. 일본 조정이 견당사 파견을 중지하다.
895년 9월 5일 맑은 아침 - 무려 2500명이나 되는 전라남도 일본계 신라 해적이 45척의 함선을 이끌고
대마도를 침공하다. 당시 대마도를 방비하는 장군은 '쓰시마노카미 훈야노 요시토모'였다.
12년전 간교의 난을 진압한 격력도 있고 군지(郡司)와 사졸을 격려할줄 아는 명장이었다.
강력한 무기 쇠뇌로 무장한 일본군은 유인책으로 신라 해적을 유인하여 격파한다.
도망치는 신라 해적 302명을 사살하고 배 11척을 나포. 막대한 병기를 빼앗고
도적 한 명 '현춘玄春'을 생포하다.
현춘이 말하길 "신라에 큰 흉년이 들고 굶주려서 왕(신라 해적의 수장)이 군사를
파견했다."라고 말하다. 또 말하길 자신들은 왕의 침공군 중 일부에 불과하고 당나라 출신 장군도
있다고 하였다. 당시 신라 해적의 군사력은 엄청났다.
이것을 마지막으로 신라 해적은 종적을 감춘다. 견훤이 등장하여 전라남도 일본계 신라 해적을 포섭하였기
때문이다.
이들은 후일 견훤의 정예 1만 갑사甲士의 많은 부류를 차지하게 된다.
9세기 말 - 일본이 본격적으로 쇠뇌를 사용하다. 신라 해적 진압은 물론 에미시족 반란 진압에도 사용되다.
서기 894년 겨울 10월 - 의적 대장 궁예가 북원으로부터 하슬라(何瑟羅)에 들어오니 따르는 무리가
6백여 명에 달하였다. 스스로 장군이라고 일컬으며 무리의 추앙을 받았다.
명주(溟州, 강원 강릉)로 들어가니 무리가 3천 5백 명이 되어 14개 대오로 나누었다. 김대검(金大黔),
모흔(毛?), 장귀평(長貴平), 장일(張一) 등을 사상(舍上)[부장(部長)을 말한다.]
으로 삼고 사졸과 고락을 같이 하며, 주거나 빼앗는 일에 이르기까지도 공평하여
사사로이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여러 사람들이 그를 마음속으로 두려워하고 경애하여 장군으로 추대하였다.
서기 895년 가을 8월 - 궁예가 저족(猪足)ㆍ성천(?川) 두 군을 빼앗고, 또한 한주(漢州) 관내의 부약(夫若)
ㆍ철원(鐵圓) 등 10여 군현을 격파하여 진골 탐관오리들을 모조리 토멸하였다.
서기 895년 - 궁예(신라 왕자 '요')가 진짜 나이가 아니라 왕실 발표 나이로 10여 세가 되도록 '장난(의적질)'을
하니 자 여종이 참다못해 그의 출신의 비밀을 폭로하여 말했다.
“왕자님이 태어나셨을 때 나라의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오늘날까지 몰래 왕자님을 길러 왔습니다.
그런데 왕자님의 장난이 이와 같으니 필시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왕자님은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니 이를 어쩌면 좋겠사옵니까?"
궁예가 울면서 말했다.
“만약 그렇다면 제가 여기를 떠나 어머니의 근심거리가 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삼국사기 궁예열전
궁예가 곧바로 세달사(世達寺)로 가니 바로 지금의 흥교사(興敎寺)이다.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스스로 선종(善宗)이라 이름하였다. 종宗은 당시 진골 왕족이나 붙일 수 있는 것이었다.
이것은 진성여왕의 부름을 받기위해 성인식을 치르고 종宗이라는 진골 칭호를 받는 그런 과정이었다...
-삼국사기 궁예열전
서기 895년- 궁예('요' 왕자)가 장성하자 한번은 재(齋)를 올리러 가는데 길에 진성여왕의 첩자가 보낸 까마귀가
무엇을 물어다가 궁예의 바리때에 떨어뜨렸다. 그것을 보니 상아로 만든 조각에 ‘왕(王)’자가 쓰여 있으므로,
비밀로 하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진성여왕이 부름을 알았다.
서기 895년 겨울 10월 - 진성여왕이 헌강왕의 서자 요(嶢)를 태자로 삼아 세웠다. 요의 나이 실제 나이 13세였다.
"그가 장성하자 체격이 크고 용모가 걸출하여 이름을 ‘요’라고 하였다. 진성왕이 이 말을 듣고 궁 안으로
불러들여 손으로 그의 등을 어루만지면서 말하였다.
“나의 형제와 자매의 골격은 남들과 다른데, 이 아이의 등에 두 뼈가 솟아 있으니, 정말로 헌강왕의 아들이다.
곧 관리에게 명하여 예를 갖추어 높이 봉하였다." -삼국사기 신라 진성여왕본기
서기 896년 - 백제 지방에서 대대적인 도적 집단 '적고적'이 일어나다. 신라 왕궁과 지척인 모량리까지 약탈하다.
이 때 견훤은 백제 지방을 전부 평정하지 못했다.
서기 896년 - 바지를 붉게 물들인 도적들이 전라도에서 봉기하였다.
신라인들은 무서워 떨며 그들을 적고적(赤袴賊, 붉은 바지를 입은 도적)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주와 현을 도륙하고, 서울의 서부 모량리(牟梁里)까지 와서 사람들을 위협하고
노략질하고 돌아갔다.
서기 896년 이후 - 도적 집단 '적고적'에 대해 기록이 사라지다. 견훤이 적고적을 포섭하였음이다.
서기 896년~900년 사이 - 견훤이 신라의 전주를 완전히 장악하다. 백제 지방을 전부 평정하다.
궁예는 무지막지하게 확장했으나 견훤은 좀더 건설적이고 차근차근 지역들을 장악해갔다.
그는 호남 지방 평야의 막대한 생산력으로 인해 백제를 강대국으로 만들었다.
견훤의 행보는 다혈질과는 거리가 멀며 후일 왕건까지 교묘한 수법으로 낚아버릴 정도니
당대에 군사 전략에 있어서 정말 당해낼 자가 없었다.
그는 전략적으로 이성적인 지도자였다.
그는 신중하고 참을성 많은 사람이었다. 후일 고려에게 대야성을 함락당했을 때도 즉각 반응을
안보이고 가만 있다가 경주를 부셔버리고 왕건을 연이어 팔공산에서 박살냈다.
서기 897년 6월 1일 - 진성여왕이 국왕의 임무를 간절히 밀어 '김요'에게 도맡아라고 하였다. -최치원 문집
서기 897년 여름 6월 - 임금이 측근들에게 말하였다.
“근년 이래로 백성의 생활이 곤궁해지고 도적들이 봉기하니, 이것은 내가 덕이 없기 때문이다.
숨어 있는 어진 자인 '요'에게 왕위를 넘겨주기로 나의 뜻을 결정하였다.”
그리고 왕위를 태자 요에게 물려주고,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표문을 올려 말하였다.
“신하 아무개는 아룁니다. 동방을 관장하였다는 일관(日官)인 희중(羲仲)의 관직에 있는 것이 저의 본분이 아닙니다.
(『상서』 요전(堯典)에서 유래)
연릉(延陵)의 절조(연릉은 강소성 무진현의 소재지로, 춘추시대 오의 계찰이 아버지의 지위를 받지않고
연릉에 봉해진 것에서 유래한다.)를 지키는 것이 저의 좋은 방도입니다.
저의 조카 요는 죽은 형 정(헌강왕 김정)의 아들입니다.
나이가 열다섯 살 정도 되었고 종실을 흥하게 할 자질이 있기에, 밖에서 구하지 않고 안에서 선택하여
근일에 이미 나라 일을 임시로 맡겨 나라의 재난을 안정시키게 하고 있습니다.” -삼국사기 신라 진성여왕본기
서기 897년 - 신라 진성여왕이 붕어하시다 시호를 진성(眞聖)이라 하고 황산(黃山)에 장사 지냈다.
서기 897년 - 궁예가 신라 효공왕(孝恭王)으로 왕위에 올랐다. 본래 이름은 김요(金嶢) 이며,
헌강왕(憲康王)의 서자이다.
897년 7월 - 당나라에 파견된 발해 왕자 대봉예가
“이젠 신라보다 발해 사신이 윗자리를 차지해야 한다”고 공식요청했다. 물론 당나라는 발해의 요청을 거절했다.
“국명의 선후를 어찌 ‘강약(强弱)’으로 따질까. 조제(朝制)의 순서도 ‘성쇠(盛衰)’를 근거로 바꿀 수는
없는 일이다.”(<고운집> ‘사불허북국거상표·謝不許北國居上表’)
이 글을 보면 당나라도 발해가 강(强)하고 성(盛)하며, 신라는 약(弱)하고 쇠(衰)했음을 인정한 것이다.
최치원은 당나라에 보내는 감사의 표문(‘謝不許北國居上表)’에서 발해를 맹비난한다.
“발해의 원류는 고구려가 멸망하기 전에는 보잘 것 없는 부락에 불과했습니다.~ 백산(백두산)에서
아경을 떨치며 떼강도짓을 했습니다.”
“신의 나라가~ 무식한 놈들과 함께 서있다는 것 자체가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습니다.
저 발해야말로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자갈과 모래 같고~ 삼가 제 본분을 지킬 줄을 모르고
오로지 웃사람들에게 대들기만을 꾀했습니다.~다시는 위아래가 뒤집히지 않도록 하게 해주소서.”
서기 898년 봄 정월 - 이미 죽은 임금의 어머니 김씨를 의명왕태후(義明王太后)로 추존하고,
서불한 준흥(俊興)을 상대등으로 삼고, 아찬 계강(繼康)을 시중으로 삼았다.
서기 898년 봄 2월 - 효공왕 김요가 겨울 11월에 팔관회(八關會)를 열었다.
"겨울 11월에 처음으로 팔관회(八關會)를 열었다." -삼국사기 궁예열전
서기 898년 가을 7월 - 효공왕 김요가 패서도(浿西道) 및 한산주(漢山州) 관내의 30여 성을 빼앗고,
송악을 복속시켰다.
서기 898년 - 겨울 11월 이후 - 아찬 최치원이 죄가 있어 면직되었다?
그는 반고구려,반발해 파였고 당나라를 사랑하는 사대주의가 심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면직당한 후 중국인 왕건(태조왕건)에게 "계림황엽 송악청송"이라고 편지보내어 교류를 맺으려한다.
효공왕 김요가 이를 듣고 꺼려하자? 최치원은 가야산 해인사로 가족을 데리고 은거하였다.
서기 899년 봄 3월 - 효공왕 김요(궁예)가 이찬 박예겸(朴乂謙)의 딸을 왕비로 삼았다.
가을 7월, 북원의 도적 두목 양길(梁吉)이 궁예가 '''다른 마음으로 배신한 것'''을 미워하여 국원 등
10여 성주들과 함께 그를 공격하기로 모의하고, 비뇌성(非惱城) 아래까지 진군하였으나 양길의 군사가 무너져 도주하였다.
서기 900년 - 일본인 진훤(견훤)이 완산주(完山州, 전라북도 전주)를 수도로 선포하다.
청룡,기린,주작,현무의 사신체계에 의해 수도가 세워졌다.
청룡 머리 고개, 기린 봉우리 , 주작 승암산 , 금암동 거북바위(현무)로 사신 체계를 삼아 음양술적 풍수지리에
의거하여 도성이 세워졌다.
고려,조선은 남북의 축을 도시 중심으로 삼았지만 견훤은 동서축으로 도시 중심을 삼았다.
이는 신라 수도의 영향을 받은 고려 수도, 고려 수도의 영향을 받은 조선 수도와 전혀 다른 이질적인 도시다.
이는 일본 헤이안 수도의 사신도에 의거한 음양술 풍수지리 수도 설계와 똑같다.
"헤이안 쿄는 당시의 종교가,주술가음양사들의 의견이 한데 모아진 천도 계획이다.
모든 원령들의 사악한 앙화를 퇴치할수있는 공간을 마련키위해,
북쪽 현무 , 동쪽 청룡, 남쪽 주작 ,서쪽 백호에 해당하는 풍수지리에 의거. 수도 건설"
-모로 미야의 헤이안 일본
서기 900년 겨울 10월 - 국원(國原)ㆍ청주(菁州)ㆍ괴양(槐壤)의 도적 두목 청길(淸吉)과 신훤(莘萱) 등이
효공왕 김요에게 성을 바치고 투항하였다.
서기 901년 - "궁예가 왕이라 일컬었다." (비로소 한반도의 3분의 2를 평정하고 진정한 왕으로 인정받은 효공왕)
-삼국사기 신라 효공왕본기
서기 901년 - 효공왕 김요가 옛 고구려인들의 분노를 누그러뜨리기위해 신라가 당나라에 군사를 요청해
고구려를 깨뜨려서 평양성이 황폐해져 풀만 무성해지게되었으므로 원수를 갚겠다며
흥주 부석사로 가서 옛 고구려 호족들,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문무왕의 초상을 베어버려
'원수를 갚다.' 이로써 통일 의식을 심을 수 있었다.
삼국사기 궁예얼젼은 이 부분에서 헌안왕,경문왕의 이름을 전혀 거론치않고 그저 '신라왕'이라고만 해서
말없는 침묵을 지키고있다. 그건 무슨 의미일까..
그렇다. 부석사는 문무왕의 의상대사보고 시켜 만든 절이다.
그러니 당연히 헌안왕,경문왕의 초상이 걸려있을리 만무하고 당연히 문무왕 초상화가 걸려있는게 당연하다.
“지난날 신라가 당나라에 군사를 요청해 고구려를 깨뜨렸다. 그래서 평양(平壤)의 옛 도읍이 황폐하여
풀만 무성하게 되었으니, 내가 반드시 그 원수를 갚겠다.”- 삼국사기 궁예열전
"서기 901년 ..... 한번은 남쪽을 돌아다니다가 흥주(興州) 부석사(浮石寺)에 이르러 벽에 그려진
신라왕의 모습을 보고 칼을 뽑아 그것을 쳤는데, 그 칼자국이 아직도 남아 있다." -삼국사기 궁예열전
서기 901년 가을 8월, 후백제왕 견훤(甄萱)이 대야성(大耶城)을 공격하였으나 함락하지 못하고,
금성(錦城, 전남 나주) 남쪽으로 군사를 이동하여 인근의 부락을 약탈하고 돌아갔다.
나주인들이 견훤에게 반감을 품었더라...
서기 903년 - 경주는 진골의 골육상쟁이 계속 벌어지고 견훤이 계속 경주를 노리므로 효공왕 김요는
자신의 의병들이 결집해있는 철원에 새로운 도읍을 두어 북방의 막강한 군사력을 결집시켜 후백제를 토벌키로
마음먹다.
"7년(서기 903), 궁예가 도읍을 옮기려고 철원(鐵圓)과 부양(斧壤)에 도착하여 산수(山水)를 둘러보았다.
七年 弓裔欲移都 到鐵圓斧壤 周覽山水" -삼국사기 신라 효공왕본기
서기 903년- 전촉 고조 왕건이 4주 전토를 통일하여 중국 조정으로부터 촉왕蜀王에 봉해졌다.
서기 904년 - 계속 신라에 반기를 두는 옛 고구려 세력들을 포용하기위해 신라 관직 제도에 고구려 관직 제도
혹은 독자적인 이름의 관직 제도를 많이 섞어 고구려 ,발해 , 신라를 모두 아우르는 새로운 국가 '마진'으로
국호를 바꿔 자꾸 분열되는 신라를
하나로 통일시키는 묘안을 내놓은 효공왕 김요(궁예).
국호를 마진(摩震), 연호를 무태(武泰) 원년이라 하였다.
라시드 앗딘의 집사를 마진은 마진摩秦이라고도 적는다. 이는 '큰 진秦나라'란 뜻이다.
태泰는 진秦과 비슷해서 서로 통용이 잘되는 글자다. 그래서 신라 법흥왕 모태泰는 모진秦이라고도 적히지않았는가..
무태(武泰)는 즉 무진武秦이다. 강한 진秦 나라란 뜻이다..
이에 패서도(浿西道)의 10여 주와 현이 효공왕에게 단번에 투항하였다.
- "8년(서기 904), 궁예가 백관을 설치하여 신라의 제도를 따랐다.
[제정한 관직 호칭은 비록 신라의 제도를 인용하였으나, 다른 것도 많이 있었다.]
국호를 마진(摩震), 연호를 무태(武泰) 원년이라 하였다. 패서도(浿西道)의 10여 주와 현이 궁예에게 투항하였다.
八年 弓裔設百官 依新羅制[所制官號 雖因羅制 多有異者] 國號摩震 年號武泰元年 浿西道十餘州縣 降於弓裔"
-삼국사기 신라 효공왕본기
서기 904년 - 중국 남부 지방 장,회 지역 호족의 자제이자 송악의 유력 장수인 왕건에게 철원군 태수의 직위를
주어 수도를 훌륭히 건축하도록 하였다.
"선종은 내심 무리들이 많으니 나라를 세워 임금을 칭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내외의 관직을 설치하였다.
우리 태조(太祖)가 송악군(松岳郡, 경기 개성)으로부터 와서 의탁하자 곧바로 철원군 태수의 직위를 주었다."
-삼국사기 궁예열전
서기 904년 가을 7월 - 마진국 효공왕 김요가 청주의 주민 1천 호를 철원성으로 옮겨 살게 하고 서울로 삼았다.
상주(尙州) 등 30여 주현을 쳐서 빼앗았다. 충남 공주장군(公州將軍) 홍기(弘奇)가 와서 항복했다.
후백제는 점점 고립되어갔다..
서기 905년 봄 2월 - 마진국 효공왕 김요가 철원으로 도읍을 옮겼다. 새로운 서울에 들어가 궁궐과 누대를 수축하였
으며 그 궁성의 크기는 대단했다. 모두 철원성 태수 왕건이 열심을 다하여 가꾸고 쌓은 공로였다.
연호 무태를 고쳐 성책(聖冊:성스런 계략) 원년이라 하였고, 패서 지역의 13개 진을 나누어 정하였다.
평양성주(平壤城主)인 장군 검용(黔用)이 효공왕 김요에게 항복하였고
증성(甄城)의 적의(赤衣)ㆍ황의(黃衣) 도적과 명귀(明貴) 등이 복속하여 왔다.
이 강한 추진력은 헌안왕 - 경문왕 - 헌강왕 - 진성여왕으로 이어지는 강력한 중앙집권 추진 정책과
귀족들 숙청의 결과였다. 또 김요가 왕위에 오르기전 길러놓았던
고구려계 의군義軍 세력은 기꺼이 김요를 따라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있었다.
효공왕 김요가 죽령 동북 지역 즉 함경도에까지 이르러 반란 군현들을 모조리 정벌하니 효공왕 김요는 실로
진흥왕의 부활이었다.
옛부터 신라는 문무왕비 때부터 춘추전국 진 목공,진시황의 진秦 나라 계승을 김씨 왕실 스스로 주장하였다.
라시드 앗딘의 집사를 마진은 마진摩秦이라고도 적는다. 이는 '큰 진秦나라'란 뜻이다.
효공왕.. 옛 진秦 나라엔 새로운 수도 함양으로 천도하고 상앙을 통해 중앙집권을 실시. 영토 확장을 욱일승천으로
한 '효공'이라는 진나라의 전성기의 기초를 닦은 걸출한 왕이 있었다.
그랬다.. 마진摩秦... 그것은 신라 말기 쇠퇴해가고 백제가 다시 부활하자 더이상 신라라는 낡은 국호론
통합이 힘들었다. 200년 통일신라는 진골 탐관오리들이 지방 곳곳에 임명되어잇고 옛 고구려 유민, 옛 백제인들이
있는 상태에서 깨져가고있던 것이다. 그걸 수습할 방법은 바로 신라가 아닌 다른 국호로서 한반도를 다시
묶는 것이었다.
한반도인들에겐 마진摩震은 '큰 동방 나라'란 뜻이다. 신라 안에선 마진摩秦. 즉 '거대한 진秦나라'...
"서기 905년 가을 7월, 궁예가 철원으로 도읍을 옮겼다.
8월, 궁예가 병사를 내어 우리의 변방 고을을 침탈하고, 죽령 동북 지역에까지 이르렀다.
임금이 국토가 날마다 줄어든다는 말을 듣고 매우 걱정하였으나 방어할 능력이 없으므로,
모든 성주들에게 나가서 싸우지 말고 성벽을 굳게 지키도록 명령하였다." -삼국사기 신라 효공왕본기
서력 907년 3월 - 주전충朱全忠이 당唐 왕조를 찬탈하자 왕건은 천하의 군웅에게 격문을 띄워
당唐왕조 부흥의 군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서력 907년 9월 -전촉 고조 왕건王建이 제위에 올라 국호를 대촉大蜀이라 하였다.
왕건은 무학이었으나, 문화예술을 무척 아끼고 문화인을 예우하였다. 많은 학자나 시인들이
전란을 피하여 성도로 이주하고 나라의 평화나 풍요로움과 맞물려 성도는 천하의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왕건은 성도에서 아내를 맞았는데 이 여성은 화예부인花蘂夫人이라는 미모의 여류시인으로,
「궁사宮詞」라는 작품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또한 왕건이 문화인을 예우한 것은 희종 황제의 문화인에
대한 태도를 본받은 것이다.
서기 907년 - 북진에 여념이 없는 마진국 효공왕 김요의 배후를 견훤이 쳐서
일선군(一善郡) 이남 10여 개의 성을 모두 견훤에게 빼앗겼다.
서기 909년 여름 6월 -마진국 효공왕 김요가 장군에게 명령하여 병선을 거느리고 진도군(珍島郡)을 함락하고,
또 고이도성(皐夷島城)을 격파하였다.
서기 910년 - 후백제 왕 견훤이 직접 보병과 기병 3천을 거느리고 나주성(羅州城)을 포위하여 열흘이 지나도록
풀지 않았다.
효공왕 김요가 수군을 보내어 그를 습격하니, 견훤이 군대를 이끌고 퇴각하였다.
서기 911년 - 폐위된 정강왕의 똘마니 박예겸의 아들인 박경휘(朴景暉)는 효공왕 김요의 장인이다.
그는 아달라 왕의 후예라 자칭하며
신라를 차지함이 하늘의 뜻이라며 신라 효공왕 김요에게 반란을 일으키다. 은영(殷影)이 동참하여
효공왕 김요의 애첩을 잡아 죽였다.
박경희가 당시 이렇게 말하였을 것이다.
"선조들이 대대로 써오던 신라 국호를 버리고 해괴한 마진이란 국호를 부끄럽지도않은가! 궁예!!!"
"당신의 아버지는 전북 익산의 사자사(師子寺)의 북쪽에 있는 진훤이 아닌가! 당신은
신라 왕의 자격이 없다!"
"서기 911년 봄 정월, 초하루 병술일에 일식이 있었다.
임금이 미천한 첩에게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대신 은영(殷影)이 충간하였으나 임금이 이를 듣지 않았다.
은영이 그 첩을 잡아 죽였다.
궁예가 국호를 태봉(泰封)으로 고치고, 연호를 수덕만세(水德萬歲)라 하였다.
十五年 春正月丙戌朔 日有食之 王嬖於賤妾 不恤政事 大臣殷影諫 不從 影執其妾 殺之 弓裔改國號泰封 年號水德萬歲
"서기 912년 효공왕孝恭王 김요가 죽고, 사자사(師子寺) 북쪽에 장사 지냈다.
十六年 夏四月 王薨 諡曰孝恭 葬于師子寺北 " -삼국사기 신라 효공왕본기
"신덕왕(神德王)이 왕위에 올랐다. 성은 박씨이며, 이름은 경휘(景暉)이고,
아달라왕(阿達羅王)의 먼 후손이다. 아버지는 예겸(乂兼)[‘예겸(銳謙)’이라고도 한다.]이다.
그는 정강대왕(定康大王)을 섬겨 대아찬이 되었다. 어머니는 정화부인(貞和夫人)이다.
왕비는 김씨이니, 헌강대왕(憲康大王)의 딸이다. 효공왕(孝恭王)이 돌아가셨으나 아들이 없어
나라 사람들이 추대하여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기 신라 신덕왕본기
효공왕이 반란당하자마자 바로 그 후 궁예가 국호를 태봉으로 고침.
그리고 연호는 신라의 금덕을 쳐부수는 '수덕水德'으로 고침.
은영(殷影)이란 자의 이름 뜻은 은殷나라여, 영광있으라. 는 뜻이다. 신라는 소호금천씨의 후예를 주창했으며 은나라가
바로 소호금천씨의 후예다. 소호,은나라의 오행적 덕德은 금덕金德이다.
반면 효공왕 김요(궁예)의 수도 철원은 북쪽에 있으니 오행적 덕으로 수덕水德이다.
신라 효공왕 김요(궁예)이 철원으로 수도옮겨 마진국이라 국호바꾸니까 신라 진골세력들이
대거 반란일으키며 금덕金德 복귀를 주창했던
것이다.
효공왕은 그들을 설득하는데 지치고 분노하여 신라 , 금덕 자체를 쓸모없다 여기고 마진 국호를 넘어서는
'태봉
' 국호로 바꾸고 수덕水德을 주창하며 군사적 열세에 있는 신라를 빠르게 밀어서
다시 통합시키려는 의도였던 거다.
서기 911년 - 마진국 효공왕 김요가 연호를 성책에서 수덕만세(水德萬歲) 원년이라 하였다.
수덕水德은 금덕金德을 이기는 것인데. 수水는 북방이다. 금金은 신라 금성金城을 말한다.
금성이 마진국 효공왕 김요에게 반란하니 노한 김요가 국호를 태봉(泰封)이라 고치고 연호를 수덕만세라
하여 수덕으로서 금덕의 반란군을 멸하라고 명령하였다.
옛 수도 금성은 더이상 도읍의 가치가 없는 멸도(滅都)라고 부르고 옛 수도 금성에서 오는 반란군 군대들은
모조리 격퇴시켜 죽여버리고 모조리 죽여버렸다.
태봉(泰封)의 뜻은 주역에서 ‘태(泰)’는 ‘천지가 어울려 만물을 낳고 상하가 어울려 그 뜻이 같아진다’는
뜻이라 하고, 봉(封)은 봉토, 곧 땅인데, 결국 궁예는 철원을 기반으로 ‘영원한 평화가 깃든 평등 세계’,
곧 미륵세상인 대동방국의 기치를 높이려 든 것이다.
"선종은 강성한 세력에 자만해져 병탄할 생각을 갖고 나라 사람들에게 신라를 멸도(滅都)라고 부르게 하였으며,
신라에서 오는 사람은 모조리 죽여버렸다." -삼국사기 궁예열전
★ 궁예열전을 자세히 보라. 궁예는 이상하게 신라를 멸국滅國이라 하지않고 멸도滅都 즉 멸滅할 도읍..이라고 한다.
나라 국國보다도 도읍都을 중요시하는 궁예의 말을 보라.. 유심깊게 보라.
"서기 911년 봄 정월, 초하루 병술일에 일식이 있었다.
임금이 미천한 첩에게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대신 은영(殷影)이 충간하였으나 임금이 이를 듣지 않았다.
은영이 그 첩을 잡아 죽였다.
궁예가 국호를 태봉(泰封)으로 고치고, 연호를 수덕만세(水德萬歲)라 하였다.
十五年 春正月丙戌朔 日有食之 王嬖於賤妾 不恤政事 大臣殷影諫 不從 影執其妾 殺之 弓裔改國號泰封 年號水德萬歲
서기 912년 - 수도 금성을 잃은 까치 신세이신 (효공왕 김요가) (태)봉(奉)에 동서 21칸의 집을 지었다.
"봉성사(奉聖寺)의 바깥문 동서 21간에 까치가 집을 지었다.奉聖寺外門 東西二十一間 鵲巢"
- 삼국유사 효공왕
서기 912년~914년 - 태봉국 효공왕 김요(궁예)가 옛 수도 금성의 반란을 뿌리뽑기위해 스스로 미륵불이라 칭하고
신라의 금관을 부활시켜 다시 쓰고 왕실 불교 문화를 부활시켜 중앙집권을 더욱 강행하며
백마를 타고 화려한 왕실 불교 행진을 하여 민심을 하나로 모았다.
승려 석총이 왕의 행차를 비방하자 철퇴로 쳐죽여 왕권의 지엄함을 보였다.
"선종은 스스로 미륵불(彌勒佛)이라 칭하여 머리에는 금고깔을 쓰고 몸에는 방포(方袍, 네모진 가사)를 입었으며,
맏아들을 청광보살(靑光菩薩)이라 하고 막내아들을 신광보살(神光菩薩)이라 하였다. 외출할 때면 항상 백마를
탔는데 고운 비단으로 말갈기와 꼬리를 꾸미고, 소년소녀들로 일산과 향화를 받들게 하여 앞에서 인도하고,
또 비구 2백여 명에게 찬불가를 부르며 뒤따르게 하였다. 또한 스스로 불경 20여 권을 저술하였는데
그 내용이 요망하여 모두 정도에 맞지 않는 것이었다. 때로는 단정하게 앉아서 강설을 하였는데 승려
석총(釋聰)이 그것을 두고 말했다.
“전부 요사스러운 말이요, 괴이한 이야기로 가르칠 수 없는 것이다.”
선종이 이 말을 듣고 노하여 철퇴로 그를 쳐죽였다. " -삼국사기 궁예열전
서기 913년 - 태봉국 효공왕 김요가 철원성 태수 왕건을 파진찬 시중으로 삼았다.
서기 914년 봄 3월 - 태봉국 효공왕 김요(궁예)가 연호 수덕만세(水德萬歲)를 고쳐 정개(政開) 원년으로 삼아
정치政를 열었다開 라고 선포하여서 중앙집권의 완비를 선포하다.
서기 914년 봄 3월 - 철원성 태수 왕건을 백선장군(百船將軍)으로 삼아 수군 총사령관을 맡겨 신라를 압박하게 하였다.
백선장군 왕건의 수군이 포항으로 비밀리에 이동해 상륙 작전을 벌였다.
서기 915년 - 태봉국의 성城이 34개. 신라국의 성城이 40개나 되어 서로 각축을 벌였다.
태봉국 효공왕 김요가 사실은 진훤(견훤)의 아들이라는 소문이 갈수록 퍼져 태봉국 민심이 이반되고
장수들이 등을 돌리기 시작하고 신라는 오히려 신라新羅라는 이름 아래 하나로 똘똘뭉쳐갔다.
"영묘사(靈廟寺) 안 행랑에 까치집이 34개나 되었고 까마귀집이 40개나
되었다." - 삼국유사 효공왕
마진,신라로 쪼개어지는게 절정이 된게 915년인데 이때 일을
삼국유사는 "까치 집이 40개 까마귀집이 40개"라는 이상한 문장으로 표현한다.
서기 915년 여름 6월 - 포항 신라 수군과 동해 태봉국 백선장군 왕건의 수군이 크게 격돌하기를 4흘 동안이었다.
신라가 크게 피해를 입었다.
"참포(?浦 : 포항시 흥해읍의 곡강(曲江) 추정)의 물과 동해의 물이 맞부딪쳐서
물결 높이가 20장 가량 되었다가 사흘 만에 그치다"
서기 915년 - 효공왕 김요의 부인 중 하나인 강씨(康氏)가 왕건과 간통한 의혹이 드러나
처형당하다. 박씨의 두 아들도 처형당하다.
왕건은 효공왕 김요(궁예)의 신망을 잃을 듯 해지다.
- "서기 915년 - 부인 강씨(康氏)가 왕이 그릇된 일을 많이 하므로 정색을 하고 간하였다.
왕이 그를 미워하여 말했다.
“네가 다른 사람과 간통하니 무슨 일이냐?”
강씨가 말했다.
“어찌 그와 같은 일이 있겠습니까?”
“내가 신통력으로 보아 안다.”
그리고는 뜨거운 불로 쇠방망이를 달구어 음부를 쑤셔 죽이고 그의 두 아이까지 죽였다." -삼국사기 궁예열전
서기 917년 - 효공왕 김요(궁예)에게 반란을 일으켰던 박씨 반역자 신덕왕이 사망하다.
서기 917년 - 신덕왕의 태자 박승영(朴昇英)이 신라 경명왕으로 즉위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의성왕후(義成王后) 김씨이다.
서기 918년 봄 2월 - 일길찬 현승(玄昇)이 신라 경명왕에게 반역하다 처형당하였다.
서기 918년 여름 6월 - 철원성 태수 겸 백선장군인 왕건이 효공왕 김요의 신망을 잃을 듯 하자
효공왕 김요에게 부하들과 함께 갑자기 반란을 일으키다. 충직스럽다고 여겼던 왕건의 갑작스런 반란에
여러 관료들이 놀라 달아나고 아비규환이었다.
효공왕 김요가 빠져나가 산성으로 들어간 후 세상이 덧없다 생각하며 통곡하고 부하에게 자신의 목을 치게하였다.
- "궁예 부하들의 마음이 ''''''갑자기'''''' 변하여 왕건을 추대하자,
궁예가 도망가다가(피난) '''''부하'''''에게 피살되었다.(사실은 자결)
왕건이 왕위에 올라 원년이라 일컬고 태조왕건이 되었다." -삼국사기 경명왕본기
"궁예가 축출될 당시 여러 관료들이 우왕좌왕하며 흩어져 달아났으나 홀로 소속 관청을
떠나지 않고 자신이 맡고 있던 창고의 물품을 온전히 지켰기에 특별히 광평시랑으로 임명했다."
-고려사 왕건세가
★ 산성으로 들어가 항전하다 통곡을 하고 자살했다는건 철원 지방 산성에 전해오는 뿌리깊은 전설
서기 918년 - 전촉 고조 왕건이 사망하다.
왕건이 죽자 이후 왕건의 아들과 양자 사이에서 계승권 다툼이 일어나 최종적으로 왕건의 막내 아들 왕연(王衍)이
뒤를 계승했다.
서기 918년 - 효공왕 김요의 복위를 위해 태봉국 기병대 장군 환선길이 역적 왕건을 치러 달려갔으나
(매복에 걸려?) 왕건에게 잡아죽임당하다.
"경신일. 마군장군(馬軍將軍) 환선길(桓宣吉)이 역모를 꾀하다가 처형당했다." -고려사 왕건세가
서기 918년 - 태봉국 기병대 총대장군 이흔암이 왕건의 계략에 패배하고 잡혀 저자 거리에서 참수당하다.
"마군(馬軍) 대장군(大將軍) 이흔암(伊昕巖)이 역모를 꾀하였다가 저자 거리에서 처형당했다." -고려사 왕건세가
서기 918년 - 왕건이 반란일으켜서 효공왕 김요(궁예) 쫓아내고 국호를 고려高麗라고 바꿔서
황해도의 낙랑대방계 고구려인들을 중심으로 뭉쳐서 수도 철원의 세력을 학살하여 환선길,이흔암,임춘길을
죽이는등 엄청난 내전이 벌어짐.
서기 918년 - 역적 중국인 왕건이 포정전(布政殿)에서 즉위하여 국호를 고려(高麗)라 하고 연호를 고쳐
천수(天授)라고 했다. -고려사 왕건세가
서기 918년 - 역적 중국인 왕건이 역적 주제에 감히 조서를 내리다.
"전 임금(효공왕 김요 궁예)은 사군(四郡)낙랑군,현도군,진번군,임둔군이 흙 무너지듯 붕괴할 때에
도적의 무리들을 제거하고 점차로 영토를 넓혀갔다.
그러나 천하를 아우르기도 전에 갑자기 잔혹한 폭정으로 백성들을 다스렸으며
간사함을 가장 옳은 것으로 여기고 위협과 모욕을 가하는 것을 주된 통치수단으로 삼았다.
요역과 부세가 번거롭고 과중하여 인구는 줄어들고 농토는 텅 비게 되었다.
그런데도 오히려 궁실만은 크고 으리으리하며 옛 제도를 준수하지 않고 힘든 부역은 그칠 날이 없으니
결국 원망과 비난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더군다나 함부로 연호를 정하고 황제를 칭했으며
처자를 살육한 죄는 천지간에 용납되지 못할 일이며 귀신과 사람이 함께 노할 일로서 왕업의 기반을 송두리째
추락시켰으니 어찌 경계하지 않으랴? 짐은 공들이 추대하는 마음에 힘입어 가장 높은 자리에 올랐으니
낡은 풍속을 고쳐 모든 것을 다함께 새롭게 만들려 한다. 마땅히 법도와 규범을 혁신하는 길을 쫓을 것이며
가까운 데서 얻는 원칙[伐柯之則]을 감계로 삼으리라. 임금과 신하는 물과 물고기처럼 서로 어울려
즐거움[魚水之歡]을
같이 할 것이며 온 천하는 태평시대의 경사[晏淸之慶)]를 함께 누릴지니 나라의 모든 백성들은
다 짐의 뜻을 잘 알도록 하라.”
이에 신하들이 절을 올리고 사례했다.
“전 임금의 통치 기간에는 선량한 사람들이 악독한 피해를 입고 죄 없는 사람들이 잔혹한
학대를 받는 통에 남녀노소가 모두 불만에 싸여 원한을 품지 않은 이가 없었습니다.
이제 다행히 목숨을 보전하여 성스럽고 현명한 임금을 만날 수 있게 되었으니
어찌 힘을 다하여 성은에 보답하지 않겠습니까?”-고려사 왕건세가
서기 918년 가을 7월 - 상주(尙州)의 도적 두목이자 후백제 진훤 왕의 아비인 일본인 아자개(阿玆盖)가
사자를 보내 고려 태조 왕건에게 항복하였다. -삼국사기 경명왕본기
서기 918년 8월 계해일 - 웅주(熊州 : 지금의 충청남도 공주시)·운주(運州 : 지금의 충청남도 홍성군) 등
10여 개의 주현이 (왕건의 반란에 분노하여) 반란을 일으켜 후백제에 붙다.
서기 918년 9월 을유일 - 순군리(徇軍吏) 임춘길(林春吉) 등이 왕건을 타도하려다가 처형당했다.
서기 918년 10월 - 청주장수(靑州將帥)인 파진찬(波珍粲) 진선(陳瑄)이 그의 동생 선장(宣長)과 함께
왕건을 타도하려고 꾀하다가 선제 공격당해 패하고 처형당했다.
서기 919년 봄 정월 - 자칭 고려 왕 역적 왕건이 전왕 효공왕 김요의 관제,법제 등 제도들을 거의 다 버리고
중국 당나라 제도로 전부 다 바꾸어 고려를 당나라의 기미주로 만들어버렸다.
완벽한 고구려 장수왕 당시 중국의 지방 정권 고려高麗의 부활이었다.
송악의 남쪽에 도읍을 설치하였다.
사실 이 모든 것이 계획된 것이었다.
원래 왕씨王氏의 선조는 과거 한漢나라의 낙랑군을 지배하며 귀틀무덤을 세우던 낙랑 왕씨王氏들이었다.
이들은 서기 313년 고구려에 의해 낙랑군이 망한 후 백제, 요서 모용선비족 , 중국 남조,
중국 북위로 가서 활동하며 대호족이 되었고 이것은 당나라 때에도 마찬가지였고 당나라가 망하고 난 후
오대 십국의 혼란기에도 촉나라는 물론 중국 남방 장,회 지역에 이르기까지 무역로를 장악하여 대종족으로 발전하였다.
이들의 멀티 거점인 송악 기지에 있던 수군 장수 왕건이 효공왕 김요의 용병으로 활동하다 반란을 일으켜
계획을 성공시키는 것이다.
한사군이 이제는 더욱 거대해져 한반도 전체를 다 차지하게되는 시대가 오는 것이다..
"송악(松嶽)의 남쪽에 도읍을 정하고 궁궐을 지어 삼성(三省)과 육상서(六尙書)를 두고 구시(九寺)를 설치했다.
또 시전(市廛)을 세우고 방리(坊里)를 구분하고 오부(五部)를 나누었으며
육위(六衛)를 두었다." -고려사 왕건세가
서기 919년 - 철원 세력과 너무 금이 가고만 왕건은 철원을 떠나 송악군(松岳郡)으로 도읍을 옮겼다.
서기 919년 - 신라 사천왕사(四天王寺)의 소상(塑像)이 잡고 있던 활줄이 저절로 끊어지고
벽화 속의 개에서 소리가 났는데, 개가 짖는 것과 같았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 사천왕사와 사천왕사의 오방신상(소상)은 신라 문무왕이 당나라의 침략을 물리치기위해 급히 짓고 만든 것이다.
그 활줄이 끊어졌다는건 제2의 당나라 세력 즉 중국인 왕검의 한사군 고려가 918~919년 세워졌으므로
신라의 국운이 기울어버렸다는 것이다. 참으로 슬픈 일이었다..
벽화 속에 그려진 개(왕건)가 들어와 왈왈 소리를 질렀다.
서기 919년 3월 - 고려 태조 왕건이 삼대三代 조상들의 시호를 추존하여 증조부를 시조원덕대왕(始祖元德大王)이라
하고 증조모를 정화왕후(貞和王后)라고 하였으며, 조부를 의조경강대왕(懿祖景康大王)이라 하고
조모를 원창왕후(元昌王后)라고 하였으며, 부친을 세조위무대왕(世祖威武大王)이라 하고
모친을 위숙왕후(威肅王后)라 했다. - 고려사 태조세가 제위 2년
이에 대해 백제,고려사 연구자 김성호가 논했다.
"왕건의 삼대 조상을 추존했다"고 한 다음 이른바 "삼대추존(三代追尊)"이 있을뿐이다.
즉 태조왕건의 부친은 세조(위무대왕)이고 조부는 의조(경강대왕), 그리고 증조는 시조(원덕대왕)으로 되어있다.
이것이 500년 왕업을 창건한 고려태조 왕건의 공식적인 족보 전부이다.
시호의 실체가 누구인지 공식적으로 기재된 바가 없으며 성도 없고 이름도 없다.
이것은 조상이 누구인지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누가 누구인지를 전연 모르게 일부러 짙은 연막을 뿌린 것과
다름없는 유령의 문패이다."
즉 왕건의 조상 추존은 신화 즉 허구 프로젝트다.
서기 919년 가을 8월 계묘일 - 청주(靑州)가 역적 왕건에게 귀부하지않고 기회만 엿보며
유언비어가 자주 떠돌았기 때문에 왕건이 친히 행차해서 청주를 위협하고 성을 쌓게 했다.
서기 920년 봄 정월 - 신라 경명왕이 고려 태조 왕건과 사신을 교환하고 우호를 맺었다.
서기 920년 2월 - 신라의 강주장군(康州將軍) 윤웅(閏雄)이 고려의 태조왕건에게 항복하였다.
신라마진태봉국의 분열을 겨우 수습한 왕건은 서기 920년 남쪽정권 경주(신라)와 사신을 보내 교류하고
강주(대야성 일대)를 지껄로 만든다. 하지만 후백제의 진훤(견훤)이...,
서기 920년 2월 겨울 10월 - 후백제 왕 진훤(견훤)이 보병과 기병 1만을 이끌고 대야성(大耶城)을
공격하여 함락하여 (강주 일대가 견훤의 수중에 떨어졌다.)
진례(進禮)로 진군하였다신라 경명왕이 아찬 김율(金律)을 보내 고려 왕건에게 구원을 요청하자,
왕건이 장수에게 명하여 군대를 내어 구원하게 하였다. 견훤이 이 말을 듣고 진례로 향하는
진군을 멈췄다.
서기 924년 - 신라 경명왕이 죽다. 경명왕의 친동생 박위응(朴魏膺)이 신라 왕에 즉위하였다.
이 자가 바로 신라 경애왕(景哀王)이다. 신라의 마지막 박씨 왕이 된다.
서기 926년 - 백두산 폭발로 발해가 멸망하고 요나라가 발해 땅에 무혈입성하여 발해가 병합당하다.
그 과정에서 많은 발해 유민이 고려로 유입되었다.
하지만 발해의 왕족과 귀족의 대부분은 요나라의 귀족,관리로 편입되고 국토의 대부분과 300만 정도로
추정되는 발해 백성의 대부분도 요나라로 흡수되었다.
서기 933년 3월 5일 - 후당後唐 명종明宗)이 고려 태조 왕건에게 사신을 보내 왕건을 책봉하고
책봉 조서에서 후당 명종이 왕건에게 말하기를 "자네는 장회(長淮)의 무족(茂族)이며
창해(漲海)의 웅번(雄蕃)이라"고 말하였다.
이는 왕건이 중국 남부 장강,회수 일대의 짱개 유력 호족 가문 출신이라는 뜻이다.
왕건은 후당 명종이 하사한 달력을 받아 천수(天授) 연호를 폐지하고 후당의 연호를 쓰기 시작했다.
장회란 중국 화이허(淮河:회하) 유역을 말하다. 무족(茂族)은 중국 화이허 유역의 명문거족을 말한다.
세력이 대빵 큰 호족이란 뜻이다.
창해(漲海)는 중국 남쪽 바다를 말한다.
후당 명종은 왕건이 왕을 칭하면서 건국한 것을 주몽의 고구려 개국과 기자의 입국,조선건국에
직접 비유하였다.
이것은 한반도 역사에서 이들 두 사람에 이어 또 한 사람의, 중국에서 온 통치자가
새로운 고려정권을 세워 고려의 군장이 되어 행복과 왕을 가져다 주었다는 의미이다.
즉 왕건은 중국 남방 회하 유역의 중국인으로 당나라 해적이다.
후당 명종이 왕건에게 "자네는 중국 남부 지방 짱개 해적이지 않은가?" 라고 말한 것이다...!
ㄷㄷㄷㄷ 천자가 보낸 편지라서 이건 뭐 지울 수도 없고... 고려 사관은 실로 난감하여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이를 고려사에 적을 수 밖에 없었다.
- 아! 권지고려국왕사(權知高麗國王事) 왕건(王建)은 웅위하고 용맹한 자질에 지혜는 기략에 통달했으며
변방에서 으뜸으로 특출하게 태어났고 장대한 포부를 품고 몸을 드러내었도다[閒出].
하늘이 국토를 내려주니 터전이 지극히 풍요롭도다. 주몽(朱蒙)의 상서로운 개국을 뒤쫓아 나라의
군주가 되고 기자(箕子)가 번국을 이룩한 자취를 밟아서 자애와 상서를 펼치고 있다.
풍속이 도탑고 글을 알기에 예의로써 이끌 수 있으며 기풍이 용감하고 무예를 숭상하므로 위엄으로써 인도할 수 있도다.
봉토가 이로부터 태평해졌으며 백성들은 이로써 안정되었다. 그리하여 다시 이웃과는 이와 입술같이 긴밀해지고
피부와 터럭같이 돈독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교활한 오랑캐가 요망한 짓을 일으키자 분노를 터뜨리며
이웃 나라를 걱정하고서 환란에서 구원했다. 또한 상국에 대해 진심으로 순종했으며 절의를 지키고 충성을 바치면서,
우리가 인덕을 베풀어 백성들을 장수케 하는 것을 흠모해 태평성세를 이루었으며, 우리의 경륜과 도덕[文思6)]을
본받아 시운(時運)을 누렸다. 깊은 바다를 건너고 험한 길을 넘어와 예물을 보내고 보물을 바쳤으며 의례에 따라
자기 나라 일을 빠짐없이 보고해옴으로써 상국을 받드는 정성을 크게 과시했다. 지극한 정성을 바치게 되면
풍성한 보답을 누리게 마련이니, 실봉(實封)을 정해주어 제후들의 나라를 현창하는 것이 올바른 예일 것이다.
경의 공로가 지극하니 짐은 아낄 것이 없다. 이제 정사(正使)인 태복경(太僕卿) 왕경(王瓊)과 부사(副使)인
대부소경(大府少卿) 겸 통사사인(通事舍人) 양소업(楊昭業) 등으로 하여금 짐의 신표를 가지고 예를 갖추어[持節備禮7)] 그대를 고려국왕으로 책봉하는 명령을 내리노라.
아! 착한 일을 행하면 하늘이 상서를 내리고 바른 도리를 지키면 신명(神明)이 복을 주는 법이다.
무기는 위태로울 때 신중히 사용하고 통일된 제도는 장구한 계책에 이바지하게 되니 길이 후당(後唐)의 신하가 되어
대대로 왕의 작위를 누리도록 하라. 이제 국왕의 지위를 주노니 그대는 공경히 받으라.”
경은 빛나는 재주를 가진 사람으로 하늘로부터 상서로운 조짐을 받아 동쪽의 땅을 영토로 차지했으며
해외 여러 나라의 영웅 가운데 으뜸이 되었다. 사대부들은 어루만져 돌보아 줌에 감동했으며
평민들은 다들 은혜로운 보살핌을 찬양했다. 또한 큰 나라를 섬기는 정성이 굳건했고 이웃 나라를 원조하려는
뜻이 있었으니 말을 잘 먹이고 무기를 잘 별러 전쟁준비를 착실히 함으로써 견훤의 무리를 꺾었고 옷을 나누고
밥을 덜어서 발해 사람들[忽汗之人]을 구제했다. 계속 배를 타고 건너와 글월을 바치고 매양 뜰에 가득하게
공물을 바쳤다. 금석(金石)처럼 굳은 성심과 아름다운 덕성은 해를 꿰뚫었고 풍운과 같이 높은 기개는 하늘을
능가하며 명성은 당대에 널리 알려지고 미덕은 사방에 전해졌다. 경의 진심어린 마음이 이와 같으니
어찌 의례대로 상을 주지 않겠는가?
경은 장회(長淮)의 무족(茂族)이며 창해(漲海)의 웅번(雄蕃)이라. 문무의 재주로써 그 땅을 다스렸으며
충효의 절의로써 만물을 기르는 우리의 덕화를 받아들였다. 변함없는 충절은 진작 기폭(旗幅)에 아로새겨지고
황제로부터 받은 관작은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천자가 내린 조칙에 전장에서 세운 공로가 기록되었으며,
부부가 화목하니 부인의 덕이 잘 드러나고 있다. 이제 탕목(湯沐)을 나누어 줌으로써
결혼을 경축하노니 길이 보좌의 공을 빛내어 나의 큰 배려에 삼가 보답하도록 하라.
경의 진실된 마음으로 짐작컨대 나의 큰 은총을 잘 알 것이다. 경의 처 유씨(柳氏)를
이제 하동군부인(河東郡夫人)으로 책봉하노라.”
또 삼군(三軍)의 장교와 관리들에게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짐이 생각하건대 왕건(王建)은 성운(星雲)과 같이 빼어난 자질로 금석(金石)과 같은 충성을 바쳤으며,
이웃과 화목하게 지냄으로써 신의를 나타내었고 상국을 섬김으로써 충효를 현창하였다.
삼한(三韓)의 낙토를 다스리면서 늘 주나라의 정삭[周正]을 쫓았으며, 아득히 먼 바다를 건너와 변함없이
공물[禹貢]을 바쳤다. 공훈과 명성이 이미 현저한데도 작위가 아직 높지 않으니 은총을 내려
평화가 찾아온 땅에 제후로 책봉해야 마땅하리라. 이제 왕건을 고려국왕으로 책봉하고 사신을 그곳으로 보내
예를 갖춰 책명을 내렸으며 노고를 위로하게 했으니 이 모든 것을 잘 알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또한 역일(曆日)을 내려주었는데 이로부터 고려 태조가 정한 천수(天授) 연호를 폐지하고 후당의 연호를
쓰기 시작했다. -고려사 태조세가 16년조
서기 934년 - 발해 왕자 대광현이 수만 명의 무리를 이끌고 고려로 망명하다.
태조왕건이 그들을 환대하고 대광현에게 왕계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당시 왕건 때 고려로 귀화해온 외국인들은 발해 유민이 12만여명, 여진족이 10만여명, 몽골인은 1만여명이다.
AD 935년 - 흉노스키타이 오랑캐 신라新羅가 드디어 좆망하다.
서기 4세기 흉노선비족 김씨가 한반도 들어와서 신라를 건국한 후
서기 660,668년 삼한,예맥족을 당나라와 함께 엿먹여 멸망시키고 200년 동안 식민통치하다가
후백제 대왕인 일본인 진훤에게 나라가 송두리째 털려 제2의 임나의 치욕을 받은 후
고구려의 후예라고 뻥까는 중국인 태조 왕건에게 냠냠 먹히다.
마의 태자는 분을 품고 금강산으로 들어가 다물군을 일으키다.
서기 939년 헤이안시대 중기후반 - 일본은 덴쿄의 난을 시작으로 도호쿠를 중심으로 변방에서
늘 반란이 끊이질 않았다.
서기 10세기 - 타이라노 마사카도(平將門)가 반란하다. 해적 후지와라노 스미토모(藤原純友)가 반란하다.
겐지(源氏)나 헤이시(平氏) 같은 무사씨족들이 이를 진압하여 공을 세우면서 점차 성장하였다.
서기 985년 5월 - 북송의 태종이 고려 성종 왕치王治를 책봉하고 왕치에게 책봉 조서를 보내
장회의 백제인을 편안하게 하고 번성하라고 교시하다.
당시 고려는 중국 장회 즉 중국 화이허(淮河) 유역에 근거를 둔 백제 해적,백제인들을 사용하여
해상왕국을 경영하며 송나라와 활발한 무역을 하고있었다.
옛날 삼국시대 백제 때 백제는 중국 남방 옛 월나라 땅에 백제 무역기지를 설치하여 백제의 영향력이
월나라 땅에까지 이르렀다. 이는 중국 정사 백제전에 "백제의 영토는 서로는 월越에 닿았다."라고 하여
증명된다.
-- 송에서 태상경(太常卿) 왕저(王著)와 비서감(秘書監) 여문중(呂文仲)을 보내,
왕에게 검교태부 식읍일천호(檢校太傅食邑一千戶)를 가책하였다
을유년 성종 4년(송 태종 옹희 2, 요 성종 통화 3, 985)
進彼侯封。常安百濟之民。永茂長淮之族
제후로 봉하니 백제의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장회의 족속을 번성시키도록 하라
- 고려사(985년 5월 미상 음력)
짤방 : 고려 왕의 왼쪽에 서있는 백제 관모 쓴 정체불명의 왕자급 인물.
중국 남방으로 파견되어 백제인들을 다스리는 고려 왕자다.
* 유물 발굴자 : 황룡
송나라 사신 서긍의 고려도경 왈曰 : 고려는 아직도 삼국시대 때 쓰던 고깔관을 쓰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