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3기 김춘식입니다. 어제 답사 강행군에 수고하셨습니다.
우리 부경문해 가족 여러분! 부경대학교 문화관광해설사과정에 온 것은
우리나라의 문화유적들을 배우고 공부하러 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우리는 다 공부하러 나온 학생입니다. 그런데 학생이 답사가는 걸 싫어하고,
문화유적과 역사공부를 재미없어 하면 안 되겠죠. ㅎ ㅎ
호기심과 관찰력으로 열심히 공부하여 우리 부경문해 동문들이 대한민국의 문화유적지를
점령하고, 해설은 부경문해 출신들이 지존의 자리를 지키고 있을 그날이 오길 기대합니다.
어제 합동답사에서 관심을 가지고 저의 해설을 경청해주신 부경문해 가족들께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좋은 분들과 좋은 날에 좋은 만남으로 하루를 함께 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고운사에 관한 내용을 카페에 좀 올려주셨으면 하는 분들의
부탁을 외면할 수 없어, 몇년 전에 다녀온 후 정리해둔 것을 어제 설명드린 내용들로 수정하여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옮겨 놓았습니다. 궁금해 하시는 여러 선생님! 참고가 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고운사(孤雲寺)는 경상북도 의성군 단촌면 구계리 116번지, 등운산(騰雲山) 자락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이며, 해동 화엄종의 시조인 신라의 고승 의상대사께서 신문왕 원년(681년)에 고운사(高雲寺)로 창건하였다. 부용반개형상(연꽃이 반쯤 핀 형국)의 명당에 위치한 이 사찰은 신라말 불교와 유교, 도교에 모두 통달하여 신선이 되었다는 최치원이 여지(如智), 여사(如事)대사와 함께 가운루(경북 유형문화재 제151호)와 우화루를 건축한 이후 그의 호인 孤雲을 빌어서 孤雲寺로 바뀌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특히 현존하는 고운사 석조 여래좌상(보물 제246호)은 9세기에 조성된 불상 가운데 대표작으로 꼽히고 있으므로 시대적으로 최치원과의 상관성도 매우 높아 보인다. 아울러 의상대사의 화엄사상을 높이 평가했던 최치원의 태도로 보아 의상스님에서 최치원으로 이어지는 고운사의 역사는 신라 화엄사상사 전체에서도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임진왜란 때는 사명대사가 승군의 전방기지로 식량을 비축하고, 부상 당한 승병의 뒷바라지를 하였으며, 석학(碩學)으로 이름난 함홍선사(涵弘禪師)가 이곳에서 후학을 지도할 때는 무려 500여명의 대중스님이 수행한 도량(道場)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여러차례의 중창과 중수를 거쳐오다 1695년에 대규모 중창 불사로 사찰을 크게 중수하였는데, 17세기 조선시대의 극렬한 불교 탄압에 시달리고 있는 상황 속에서 진행된 고운사의 중창 노력은 불교사적으로 매우 의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아울러 영조 20년(1744년) 어첩(御帖) 봉안각을 설치하고 이를 관리할 판사(判事)를 두었다는 내용은 이 시기 고운사의 사세를 유지해 가는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또한 188년(고종 21년)에 건립한 연수전(延壽殿)이란 건물은 조선 영조가 내린 어첩(御帖)을 봉안하던 건물이다. 현재의 건물은 고종 39년(1902년)에 새로이 지은 건물이고, 임금의 장수를 기원하였던 곳으로 우리나라 사찰에서는 볼 수 없는 건축형태로 독특하며, 외벽에는 여러 벽화들이 그려져 있다.
최근에 새로지은 고운사 산문(山門)을 지나면 맨 먼저 만나게 되는 조계문(일주문)이다. 민흘림기둥 2개를 세워 팔작지붕을 올린 조계문(일주문)은 세속의 번뇌로 흐트러진 마음을 하나로 모아 진리의 세계로 향하라는 상징적 의미가 담겨있는 일주문이다. 만법(萬法 : 모든 법)이 하나로 통한다는 법리를 담고 있어 삼해탈문이라고도 부른다. 기둥이 일직선상에 한줄로 늘어서 있다고 하여 일주문이라고 하는 이 문은 사찰로 들어 가는 첫 번째 문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고 한국적인 일주문(조계문)을 손꼽으라고 하면 고운사 일주문을 가리키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정면3칸에 맞배지붕의 건축양식인 천왕문은 불법을 수호하는 외호신 사천왕을 모신 전각이다. 원래 사천왕은 고대의 인도 종교에서 숭앙했던 귀신들의 왕이였으나, 석가모니에게 귀의하여 부처님과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이 되었다. 내부에는 각 천왕들을 봉안해 놓았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T'자 건물로 홑처마에 기와를 얹은 건물이다. 원래는 약사전이였으나, 현재는 고불전(古佛殿)으로 미완성된 석불(石佛)만을 모시고 있다. 광배(光背)를 갖춘 석불상으로 결가부좌에 선정인(禪定印)을 결하고 있는 듯 하다. 전체적으로 세부 조각을 하지 않고 형체만 조각되어 있는 이 불상은 미완성이지만 안정되어 보이는 석불상이다.
가운루(駕雲樓) 건물의 바깥 쪽에 걸려있는 "駕雲樓" 편액이다.
가운루(駕雲樓) 건물의 내부 쪽에 걸려있는 "駕雲樓" 편액인데, 글씨는 고려 공민왕의 어필입니다. 공민왕은 두 번의 내란과 노국대장공주가 죽자 실의에 빠져 전국을 유람할 때 고운사를 찾은 이후 학자로 구름에 몸을 싣고 만사를 잊고 선인(仙人)으로 돌아가고자 하여 가운루 현판을 어필로 남겼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51호 고운사 가운루이다. 최치원이 여지(如智), 여사(如事)대사의 도움을 얻어 계곡을 가로지르는 가운교(駕雲橋)를 놓고, 가운루와 우화루를 짓고 양루(兩樓)에서 도를 닦았으며, 가운루(경북 유형문화재 제151호)와 우화루를 건축한 이후 그의 호인 '고운(孤雲)'을 빌어서 孤雲寺로 바뀌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고려 정종 3년(948년)과 현종 9년(1018년)에 중창이 있었고 임진왜란 때에는 사명대사가 승병의 기지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조선 헌종 원년(1835년)에 소실되어 만송, 호암 수월선사 등이 중창하였다. 가운루는 계곡 바닥 가장 낮은 암반에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다시 나무 기둥을 올린다음 마루를 놓아 하층을 만들고 상층은 기둥위에 공포를 두고 지붕을 올렸다. 계곡을 가로지르게 건축한 것으로 봐서 계곡을 건너는 다리 역할을 한 것 같다.
우화루에는 현판이 두 개 달려있었는데, 밖에는 신선이 된다는 도교적인 우화루(羽化樓)라는 현판이, 누각 안에는 불교적 용어인 꽃비가 내린다는 뜻을 가진 우화루(雨花樓)라는 현판이 달려 있었으나 현재는 볼 수 없게 되었으며, 지금은 '孤雲寺(고운사)' 편액이 걸려 있다.
우화루 정면에 '고운사(孤雲寺)'라는 사액(寺額:사찰의 이름)이 걸려 있다. 신라 문무왕 원년(661) 의상대사가 창건하고 '고운사(高雲寺)'라 이름하였다가 최치원이 여지(如智), 여사(如事)대사 등과 함께 가운루, 우화루를 건립하고 기념하여 그의 호를 따서 '고운사(孤雲寺)'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우화루 서쪽벽면에는 유명한 호랑이 벽화가 있는데, 이리 저리 호랑이 눈빛에서 벗어나고자 자리를 옮겨봐도 호랑이의 매서운 눈길을 피할 수 없다. 위 그림은 모사본이다.
우화루 벽면에 원래 있었던 호랑이 벽화의 훼손을 방지하고 보존하기 위해 벽면을 떼어내어 후원 공양간 입구에 유리로 덮은 상태로 전시되고 있다. 누가 언제 그렸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조선시대 말기에 그렸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가구식의 높은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3칸의 익공계(翼工系) 형식으로 겹처마에 맞배지붕을 올렸으며, 측면에는 풍판을 달았고, 정면의 어간문과 좌우협칸 모두 사분합빗살문을 달았다. 천정(天井)은 우물반자로 마감하였고 마루도 우물마루를 깔았다.
극락전 내부에는 아미타삼존불좌상(阿彌陀三尊佛坐像)을 봉안하였다. 좌협시 관세음보살은 천해(天海)스님이 꿈에서 본 것과 똑같은 불상을 송도 대흥산에서 찾아내어 고운사로 옮겨 봉안하였다고 한다. 주존불인 아미타불과 우협시 대세지보살은 1695년에 도청(道淸)과 선조(禪照)스님이 봉안하였고, 후불탱은 적색과 녹색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앞쪽의 좌우협시는 관세음과 대세지보살이고 뒤쪽의 안으로는 문수와 보현보살이며, 바깥으로는 금강장과 제장애보살이다. 화기(畵記) 부분이 훼손되어 정확한 조성 연대를 알 수는 없지만, 고풍스럽고 솜씨도 뛰어난 편이다.
극락전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종무소가 위치하고 있고, 우측에는 만덕당(萬德堂)이란 편액이 붙은 요사채가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 겹처마에 팔작지붕의 건물로서 울타리를 만들어 별도의 공간임을 나타내고 있다.
종각(鐘閣)은 정면3칸, 측면2칸, 겹처마에 팔작지붕 건물이다. 안에는 불전사물인 범종(梵鐘), 법고(法鼓), 목어(木魚), 운판(雲板)이 있다.
|
종(鐘)은 시간을 알리거나 사람들을 모을 때, 혹은 예불이나 각종 의식을 거행할 때 쓰였다. 특별히 절에 있는 종은 불교를 의미하는 梵자를 붙여 범종(梵鐘, 梵鍾)이라고 부른다. 범종소리는 부처님의 말씀에 비유되기도 하며, 지옥 중생을 구제(제도)하기 위해 친다. 그런데 보통 한자로 종이라고 하면 쇠 금(金)변에 아이 동(童)자가 붙은 쇠북 종(鐘)자를 쓴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종을 지칭할 때는 쇠 금(金)변에 무거울 중(重)자가 붙은 술병 종(鍾)자가 쓰여졌다. 그 이유는 알 수가 없으나, 지금까지 전해오는 모든 종에 새겨진 글씨나 기록에 鍾(종)자가 쓰였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중국, 일본 종과 우리나라 종은 쓰는 한자(漢字)도 달랐으며, 그 모습에서도 많은 차이가 난다.
1992년에 새로 지은 대웅보전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구조로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앞면의 중앙 양쪽 주두(柱頭)와 지붕 용마루 끝에 용머리(龍頭)가 조각되어 대웅보전의 웅장함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창호는 빗살창 문살로 짜여져 있다. 내부에는 수미단을 길게 조성하여 우견편단의 가사를 한 석가모니불을 봉안하였으며, 좌우 협시보살은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구조에 겹처마이며 익공계(翼工系) 형식으로 맞배지붕을 올렸다.
약사전에는 보물 제246호 석조석가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는데, 대좌와 광배를 모두 갖춘 이 불상은 우견편단(右肩偏袒)의 법의(法衣)에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하고 있다. 육계가 불분명한 머리, 짧은 목, 각진 상체에 평행으로 흘러내린 옷주름선 등은 9세기 불상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또한 발달된 가슴에 잘록한 허리 표현과 섬세하고 화려하게 새겨진 문양의 광배(光背)와 3단의 높은 팔각연화대좌(八角蓮花臺座)는 이 불상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팔각연화대좌의 상대(上臺)에는 중엽연판(重葉蓮瓣)의 앙련(仰蓮)이 새겨져 있고, 아래에 2단의 받침이 돋을새김되어 있다. 중대(中臺)는 팔각으로 각 모서리마다 우주(隅柱)를 표현하였다. 하대(下臺)는 큼직하면서도 간결하게 복련(覆蓮)이 새겨져 있고, 위에는 중대석을 받치는 팔각의 받침이 2단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 불상의 상호(相好)와 옷주름 등은 8세기 불상의 양식과는 현저히 구별되는 9세기 불상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으며, 화려하고 섬세한 광배와 대좌에서도 그러한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맞배지붕의 솟을대문으로 이루어진 연수전(延壽殿)의 출입문이다. 문의 윗 부분에는 빗살을 만들어 용문양을 그려 붙였는데, 수호의 뜻이 담겨져 있다. 나무로 만든 대문에는 태극문의 흔적이 남아있다. 연수전의 출입문인 만세문(萬歲門)은 임금의 장수만세(長壽萬歲)를 기원하기 위한 뜻이 담겨 있다.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44호로 지정되어 있는 연수전은 조선 영조 20년(1744년)에 왕실의 계보를 적은 어첩(御牒)을 봉안하기 위하여 건립되었으며, 1884년 극락전 등 다른 전각들과 함께 중수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고종 39년(1902년)에 새로 지은 건물이며, 숭유억불시대에 사찰내에 왕실과 관련된 건물이 지어졌다는 점이 이채롭다. 연수전(延壽殿) 편액의 관지(款識)를 보면, 광무8년(고종 41년, 1904년)에 해사 김성근이 쓴 것이며, 연수(延壽)란 수명을 늘려 장수(長壽)를 바라는 뜻이 담겨 있다.
정면과 측면이 각 3칸의 익공계(翼工系) 형식으로 겹처마의 팔작지붕이고 안에는 정면과 측면이 각 1칸인 방이다. 겹처마 밑에 화반(花盤)은 귀면상(鬼面像)을 조각 후 단청하여 악귀의 진입을 차단하는 수호의 역할을 하고있다. 단아한 건물과 격조 높은 단청이 잘 조화를 이루고 있는 건물이다.
편액이 '연지암'이라고 붙어있으며, 건물양식은 정면 3칸, 측면 3칸, 겹처마에 팔작지붕이다.
명부전은 지장보살을 봉안한 법당으로 지장전 또는 시왕전이라고 한다. 명부전은 고려시대 말에서 조선 초에 각광받기 시작하면서 조선시대 후기에 크게 유행하였다. 원래는 대웅전이였으나, 새로 '대웅보전'을 건립하여 옮기고 현재는 명부전으로 사용하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외1출목(外一出目) 익공(翼工) 형식이며 맞배지붕이다. 자연석 막돌쌓기한 기단위에 자연석의 덤벙주초를 놓고 원주(圓柱)를 세웠다. 내부 천정(天井)은 연등천정으로 되어 있으며 바닥은 우물마루를 깔았다. 가구수법이 정교하여 조선시대 후기 건물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지옥에서 허덕이는 중생들을 다 구제한 다음 부처님이 될 것을 서원한 지장보살로서 아주 큰 서원을 세웠다하여 대원본존이라고도 한다. 좌우협시로는 젊은 수도승의 모습인 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문인의 모습인 무독귀왕(無毒鬼王)과 열분의 시왕상이 있으며, 문 입구에는 금강역사가 좌우를 지키고 있다. 주존의 지장보살은 목조(木造)로 제작하였고, 도명존자와 무독귀왕, 시왕상(十王像)은 소조(塑造)로 제작한 것이다. 후불탱(後佛幀)의 화기(畵記)에 의하면, 건륭 5년(1740)에 개금을 하였다고 한다.
지장보살 우협시 시왕이다. 향우(向右)로 부터 제2 초광대왕(화탕지옥), 제4 오관대왕(검수지옥), 제6 변성대왕(독사지옥), 제8 평등대왕(철상지옥)의 모습이다. 그리고 죽어서 저승의 염라대왕 앞에 가면 고운사 명부전 지장보살을 만나뵙고 왔느냐고 묻는다는 얘기가 전해올 정도로 지장신앙으로 유명한 도량이다. 없는 시간을 쪼개서라도 명부전에 들어가 자기 자신을 한번 돌아보고 지난 잘못을 참회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제물을 주는 '산신'과 자식과 수명을 관장하는 '칠성' 그리고 복락을 선사하는 '독성'을 함께 모신 삼성각이다. 불교 고유의 신앙이라기 보다는 도교나 토속신앙이 불교에 유입된 경우이다.
고요하게 앉아 깊이 생각하고 말이 없다는 뜻의 적묵당(寂默堂)
정면 3칸의 주심포(柱心包) 형식의 겹처마에 맞배지붕의 건물이다. 창호는 띠문살로 짜여져 있고, 중앙의 어간문은 3분합의 문이고 양쪽은 각 2분합의 문을 달았다. 안에는 석가모니를 주불로 모시고, 좌우에는 부처님의 제자들인 16분의 나한상(羅漢像)이 봉안되어있다. 부처님 제자중에 아라한과를 증득하여 마땅히 존경과 공양을 받을 만한 큰 성인이란 뜻으로 응공이라고도 한다. 보통 열여섯분의 나한을 모신 전각을 '응진전(應眞殿)'이라고 하며, 오백분의 나한을 모신 곳을 '나한전'이라고 하는데 이곳의 나한전에는 16분의 나한이 모셔져 있다.
나한전에서 내려다 본 극락전을 중심으로 한 사찰 전경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28호로 지정되어 있는 고운사 삼층석탑은 통일신라 후기 양식의 석탑으로 높이는 약 3.33m이다. 이중기단으로 상대석(上臺石)에는 우주(隅柱)와 탱주(撑柱)가 조각되어 있다. 기단부 위에는 한장의 갑석(甲石)을 깔았다. 약간 둔중해 보이는 탑신부(塔身部)의 1층 옥개받침은 4단이고 2층과 3층 옥개받침은 3단으로 조각되어 있다. 옥개석(屋蓋石)의 낙수면(落水面)은 완만한 편이다. 상륜부(相輪部)에는 노반(露盤)만 남아 있다.
고운사는 구름과 매우 깊은 인연을 가지고 있다. 전각 이름에 구름운자가 많이 있으니 한번쯤 생각하면서 관람하는 것도 좋다. 그리고 위에서 열거한 전각외에도 용왕각, 백련암, 대향각, 무설전, 아거각, 선원, 후원 등의 건물이 있다.
첫댓글 교수님 카페에서 또 만나뵙는군요. 어제 수고 많으셨습니다.![박수](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_23.gif)
를 보냅니다. 어제 답사길에 함께할 수 있어서
![즐](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12.gif)
거웠습니다. 항상 건강하세요.
교수님의 대단한 열정에
어제 찬바람 마시며 고운사 해설하느라 목을 상하게 한 건 아닌지요?
이 많은 자료를 올려 부경문해 회원들로 하여금 피드백을 하게 하시니 역시 김선생님은 불교사찰 해설하실 때 가장 돋보이는것 같습니다. ㅎㅎ
그날 주변 풍경에 넋을 놓고 옆길로 잠시 빠졌는데
그걸 알고 또 피드백까지 해주시니 감사 또 감사합니다
선배님의 해설을 들으면서 문화해설사의 중요성을 몸소 느꼈습니다.사전자료도읽고 차에서 교수님의 설명을 들었음에도 답사하는 동안 놓치는 부분이많았는데 고운사에서 선배님의 해설을 듣는 동안은 눈이 번쩍 귀가 번쩍 트이는것같았습니다.자부심을가지고 공부해야겠다느
귀에 쏙 들어오게 말씀하셔서 아주 많은 것을 느끼게 하는 시간이였습니다. 아는 만큼 온고지신 삼아 다른 사람에게 알리신 일에 정말 숙연해졌습니다. 항상 검손한 맘으로 더욱 노력하는 사람이 되어 저도 저 스스로가 만족하는 해설을 해 보고 싶네요. 그날 설명, 감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