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에서 주고받은 편지
- 사랑하는 제자들아, 보고 싶다. -
박경선(대구대진초등학교장)
나도 얼마 남지 않았다. 정년을 맞아 하나, 둘 교직을 떠나는 교장들을 보면 만감이 교차한다. 교단 40년 동안 베푼 것보다 얻은 것이 너무 많다.
살아온 흔적들을 손으로 만져본다. 82년도부터 만든 학급문집 <색동> 22권! 76년도부터 <교단에서 받은 편지>철 29권! 보내온 향기들을 한 장 한 장 넘겨본다. 교사로, 작가로, 강사로 살아온 모습들을 담은 앨범 철, 그리고 고령 <베나(베풀고 나눔)의 집>을 찾은 사람들의 방명록 등이 향기로 남아 있다.
이 중에서 <교단에서 받은 편지>철들은 재산 목록 제 1호이다. 만약 우리 집에 불이 난다면 제일 먼저 대피시켜야 할 보물이다. 아동문학가 이오덕 선생이 돌아가시고 한참 지난 뒤 이오덕 선생과 권정생 선생이 주고받은 편지를 그 아들 이정우 선생이 보관하고 있다가 책으로 출간하였다. 구상 문학관에도 박정희 대통령과 시인 구상 선생이 주고받은 편지 원본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렇다. 사람은 가도 편지는 남는다. 그 사람에 대한 기억과 향기를 담고서.
내가 받은 편지들 중 서로 따스하게 주고받았던 편지 몇 장을 들추어본다.
「선생님, 진아 엄마 되는 사람입니다. 제 딸 진아는 어릴 때부터 경기를 많이 하여 발육도 늦고 모든 게 모자랍니다. 아이 아빠도 어릴 때부터 그랬고 저 역시 다리 불구자라 부끄럽습니다. 그런데 오늘 진아 일기장을 훑어보니 기대보다 너무나 나아져 희망이 반짝 보입니다. 저는 어미로서 완전히 포기하고 함께 죽자고 많이도 울었답니다. 그런데 진아 글을 학급문집에 올려주시고 방학 때는 편지도 보내주신 걸 보고 감동에 못 이겨 진아 대신 답장을 써봤지만 용기가 없어 부치지 못했습니다. 초등학교 밖에 나오지 않아 워낙 글이 짧지요. 이제 진아는 줄넘기도 잘하고 제 짝꿍 집에도 놀러 갔다나요. 대견스러워 오늘 밤엔 꼭 안아주었습니다. 선생님, 정말 고맙습니다.」
주위의 이해와 인정이 한 아이를 다시 태어나게 한다는 신념을 갖고 쓴 답장 흔적도 남아있다. 「진아 어머님! 진아에 대해 절망할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다만 그동안 주위에서 인정을 해주지 않았을 뿐입니다. 늘 희망을 갖고 진아를 잘 보살펴 주시길 빕니다. 학교의 진아 엄마 박경선 드림」
「선생님, 저 3학년 때 덕순인데요. 중학생이 되었어요. 저는 3학년 때 제 짝꿍 재훈이를 좋아해요. 언니는 ‘쪼그마한 게 하마부터’하고 놀리지만 선생님은 제 마음을 아시겠죠? 그래서 전근 간 선생님께 도움을 청합니다. 1987년 5월 27일 덕순 올림」이 편지를 받고는 재훈이랑 친할 수 있도록 재훈이에게 우편으로 동화책을 보내어 덕순이랑 꼭 함께 읽어보라고 한 기억이 난다. 그런데 재훈이는 선생의 잔꾀를 눈치 채지 못하고 이런 답장을 보내왔다. 「선생님, 보내주신 동화책 잘 읽었습니다. 덕순이와 함께 읽지는 못했지만 제가 다 읽고 덕순이에게 전해주었습니다.」멍청한 선생을 믿은 덕에 덕순이는 재훈이의 관심을 받기 위해 선생과 수차례 편지를 더 주고받으며 가슴 아린 마음들을 보듬어갔다.
「선생님이 편지에 ‘이젠 선생님을 잊고 현실에 만족해라’하셨지요? 하지만 전 선생님을 잊을 수 없어요. 지금도 수업시간이 되면 칠판 앞에 지금 저희 선생님보다 작년 담임인 선생님 얼굴이 아른거려요. 전 커서도, 아니 죽을 때까지 선생님을 잊을 수 없을 것 같아요. 선생님은 왜 선생님을 잊으라고 하셨지요? 1995년 3월 27일. 혜진 올림」그렇게 절절한 마음을 보내왔던 혜진이는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소식도 없다.
「저희 기억에 선생님은 또 하나의 어머니세요. 영환이가 선생님을 어머니라 여기고 있었던 것처럼 우리 모두의 어머니세요. 교실에서 소외된 친구들을 위해서도 선생님은 밤의 별처럼 빛나셨어요. <우리가 살다 힘들 때면> 시집을 읽어주셨을 때 우리 모두 또 하나의 선물을 받았습니다. 잊혀지지 않는 고마움입니다. 저 훌륭한 사람 못되더라도 나중에 찾아뵈면 반겨주세요. 1996년 12월 29일 제자 혜현 올림」혜현이도 지금쯤 40대쯤 되었겠다.
일류 대학에 수석 합격했다거나 대기업에 입사했다고 찾아오거나 편지 보내오는 제자들보다 살다가 힘들 때 찾아오라는 말을 기억해 군대 갈 때면 떼거지로 몰려오던 제자들이 더 정겨웠던 교단이다. 내년(2016년) 8월이면 정년퇴임을 맞기에 요즈음 들어 부쩍 제자들 이름을 불러본다. 허공에 대고 ......
“사랑하는 제자들아, 어디서 어떻게들 살고 있니? 보고 싶다. 고령 <베나의 집>으로 모여봐. 호박 선생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