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12:1-3 이러므로 우리에게
본장은 앞장의 계속으로서 실제적이고 실천적인 최상의 권면입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무수한 증인들과 우리 주가 계시니 인내로 경주하자는 권면입니다.
1. 본문 1절은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서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입니다.
1) 1절 상반은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입니다.
이 결론은 앞 장의 결론과 같습니다.
율법 아래서 신앙이 탁월했던 성도들에 관한 목록을 만든 사도의 목적은 각 사람이 모두 그들의 모범을 보고 단단한 신앙의 각오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사도는 많은 무리들을 은유적으로 ‘구름’ 이라고 부릅니다.
그리하여 그 빽빽한 구름을 엷은 것에 대조시켜 보여줍니다.
그들의 수가 적더라도 그들의 모범 신앙으로 우리를 격려하여 줄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큰 무리가 있을 경우에 우리는 더 큰 용기를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 군중 또는 무리에 둘러싸여 있다고 사도는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느 곳으로 눈을 돌리든 간에 우리의 눈은 곧 많은 신앙의 본을 보인 자들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증인들’ 을 마치 그들을 하나님의 순교자라고 부르는 것처럼 일반적인 뜻으로 해석하지 않고 그들의 신앙은 그들의 증언으로 아무 의심의 여지가 없을 만큼 충분히 입증된다고 사도가 말하는 것처럼, 지금 이 주제에 언급된 것으로 해석합니다.
성도들의 신앙의 미덕은 우리가 하나님께 열심히 더 나아가기 위한 우리의 안내자와 친구로서 그들에 대한 우리의 신뢰를 견고케 하는 증언과 같은 것입니다.
2) 본문 1절 중반은 “모든 무거운 것과” 입니다.
사도는 경주의 은유로 무거운 것을 벗어버리고 가볍게 하라고 권고합니다.
우리가 서둘러 가야 할 때 짐을 진 것보다 더 큰 방해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적 경주를 더디게 하고 방해하는 짐들은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이런 것은 현세에 대한 사랑, 이 세상의 안목, 육신적인 욕망, 세상의 염려, 세상 부귀와 명예, 기타 모든 종류의 것들입니다.
히브리서 12 장
그러므로 누구나 그리스도의 달려갈 길을 달려가기를 원하는 사람은 첫째, 모든 방해물을 다 떨쳐 버려야 됩니다.
우리는 이미 출발이 대단히 늦어서 어떠한 지연의 원인도 허용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사도는 부귀와 이 세상의 유익을 무조건 내던지라고 명령한 게 아닙니다.
사도는 그것들이 우리의 달려갈 길을 방해하는 한 그렇게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사단이 곤란한 장애물들을 가지고 와서 그것들로 우리를 결박하고 얽어맵니다.
경주에 대한 은유는 성경 말씀에서 종종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사도는 경주라면 아무 종류의 것이나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보통 일등을 쟁취하기 위하여 대단한 노력을 필요로 하는 달리기의 경쟁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 모든 것을 요약하면 우리는 이미 경기에 들어갔는데 가장 유명한 경기장이어서 거기에는 수많은 구경꾼들과 경쟁자들이 참석해 있고, 또 하나님의 아들이 인도자가 되셔서 우리를 격려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상을 받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달리는 도중에 우리가 피곤해지거나 게을러지거나 한다면 그것은 나와 그리스도를 위해서 큰 불명예입니다.
사도가 언급하고 있는 내용은 성도들이 다만 구경꾼들일 뿐 아니라 또한 우리와 똑같은 경주의 동료들이어서 우리에게 길을 가르쳐 주지만, 사도는 그들을 경기의 경주자라고 부르기보다는 오히려 증인들이라고 부르기를 좋아합니다.
그들이 우리에게서 상을 앗아가는 경기 상대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승리를 격려하고 갈채하는 자들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심판자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그 손을 우리에게 들어서 우리에게 힘과 능력을 더해 주시고 또 우리에게 준비시켜 주시고, 경주를 출발시켜 주시고 훈련시켜 주시며, 그의 능력으로 우리를 결승점까지 이끌어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3) 본문 1절 하반은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입니다.
이것은 우리를 방해하는 가장 무거운 짐입니다.
우리가 이와 같이 얽매여 있다고 사도는 말하는데, 이것은 이 얽매임을 벗어 버리지 않는 한, 누구도 경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사도는 외부적인 혹은 현실적인 죄에 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죄 자체의 근원, 즉 나쁜 욕심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나쁜 욕심은 모든 사람을 꼭 붙들고 있기에 사방으로 유혹의 덫에 걸린 느낌입니다.
4) 본문 1절 끝부분은 “인내로서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입니다.
사도가 우리에게 신앙에 대해 특별히 생각하게 한 것은 육신으로는 보지 못하나 우리의 모든 경험을 초월하는 주의 왕국을 영적으로 찾도록 권고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 장
이런 고찰을 하는 사람들은 지상적인 것들을 쉽게 경시할 수 있습니다.
사도는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왕국은 영적인 것이며 이 세상의 일들을 훨씬 초월하는 것임을 지도하기 위하여 신앙의 진정한 실천을 그들에게 상기시켜 줌으로서 유대인들이 가장 잘 범하는 의식들에서 분리시킬 수 있었습니다.
2. 본문 2절은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입니다.
라틴어 번역은 뜻이 좀 명확하지 않지만, 헬라어 원본에서는 사도의 말하고자 하는 의미가 명백히 나타나 있습니다.
사도는 모든 고통이나 고민에서 구출되고 모두가 복되고 선한 생애를 충분히 살 수 있는 것이 그리스도에게서 얻어진 자유이지만 그것은 그리스도가 무참하게도 치욕스러운 죽음을 기꺼이 참으신 데서 온 것이라고 말합니다.
‘즐거움을 위하여’ 라는 말은 ‘즐거움 대신에’ 와 똑같은 의미를 가집니다.
그리고 ‘즐거움’ 이라는 말은 모든 종류의 편의를 포함합니다.
사도는 즐거움이 그리스도 안에 준비되어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자신이 원하시기만 하면 그 즐거움을 사용할 능력을 가지셨기 때문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ἀντί(안티 ; ....을 위하여) 라는 전치사가 최종 목적인 결과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것에 그다지 반대하지는 않습니다.
그 의미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거절하지 않았는데, 그리스도께서는 그 결과가 즐거운 것임을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로서는 우리의 처음 해석을 주장하고자 합니다.
사도는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인내를 찬양할 것에 대해 두 가지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가 무참한 죽음을 참으셨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그리스도가 굴욕을 개의치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그리스도가 죽으신 목적은 영광이었기에 신자들이 그리스도를 따르기만 하면, 그들이 참고 견디는 모든 악이나 재난들은 구원과 영광으로 끝날것을 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약5:11). 그리하여 사도는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8:17)고 말한 것에 따라서, 우리의 환난의 결과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보는 것과 똑같은 영광이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늘 보좌 우편” 이라는 말이 쓰인 것입니다.
히브리서 12 장
3. 본문 3절은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입니다.
사도는 그리스도와 우리를 비교시킴으로 그의 권고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 의하여 숭경을 받아야 할 하나님의 아들이 이렇게 어려운 싸움을 기꺼이 스스로 싸웠다면, 우리들 중 그와 함께 견디기를 누가 감히 거절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의 친구라는 사실과 우리를 훨씬 초월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똑같은 위치로 내려오셔서 모범을 보여주심으로 우리를 격려하신 사실을 생각할 때 이 생각만으로도 우리는 모든 유혹을 극복하기에 충분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장하려는 것은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하여 새로운 용기를 얻게 하려는 데 있으며,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절망에 빠져 완전히 녹게 되고 맙니다.
히브리서 11장 14-16절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고 찾았다는 게 무엇이겠습니까?
산상보훈이라 일컫는 마5:1-12절에서 말씀하는 복과 상이 어디며,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 보좌 우편”으로 부르는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이 아니겠습니까?
본문 12장 1-3절을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히브리서 12 장
히12:4-8 너희가 죄와 싸우되
본문은 인내로 징계의 고난을 감수하라는 권면입니다.
1. 본문 4절은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입니다.
사도는 이제 한걸음 더 나아가서 불신자들이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우리를 박해할 때 그것은 우리가 죄에 대해 싸우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완전히 죄로부터 깨끗하고 죄책으로부터 면제되어 있었기에 이 싸움을 시작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것에 관해서는 그와 비슷한 점이 조금도 없습니다.
죄는 항상 우리들 안에 살고 있고 고난들은 이 죄를 길들이고 이기도록 하는데 이바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 우리가 알기로는 이 세상의 모든 악은 또 특히 죽음은 죄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가 여기서 죄에 대해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복음을 위하여 우리가 받고 있는 이와 같은 박해는 다른 방향에서도 죄를 멸하기 위한 해결책이 되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유용하다고 사도는 말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훈련과 규칙의 멍에 아래 묶어 두십니다.
그것은 우리의 육체가 방탕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때로 하나님은 성급함을 저지하시며 우리가 장래에 좀 더 주의를 기울이게 하기 위하여 죄를 벌하시기도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의 죄악을 중단시키기 위해서나 우리가 죄를 범하기 전에 미리 방지해 주시기 위해서거나 하나님은 죄에 대한 싸움에 우리를 참여케 하십니다.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은 우리가 그의 복음을 위하여 받는 고난들이 죄에 대한 형벌이라고 간주하시지 않는 영예를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사도에 의해 듣는 말씀이 우리와 관련된다고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죄와 더불어 싸우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불신자들에 대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증해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의 죄악을 고치기 위해서 사용하시는 치유법을 하나님의 복음을 변증하는데 사용하셨다는 사실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이중의 은혜입니다.
히브리서 12 장
사도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재산이 없어지는 것도 기꺼이 참았고 온갖 수욕을 이겨낸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는 그들을 게으르다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전투 도중에 일찍 지쳐버리고 죽기까지 용감하게 싸우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전투에 종사하였든지 주님께 우리의 방면을 신청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는 죽음을 정복한 자들을 제외하고 어떤 휴가병도 가지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2. 본문 5절은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의문형으로 읽습니다.
사도는 잊어버릴 때가 아니라는 뜻으로 벌써 잊어 버렸느냐고 그들에게 묻습니다.
사도는 여기서 ‘십자가로 말미암아 징계를 받는 것은 우리에게 유익하다’ 는 가르침을 시작합니다.
이 목적을 위해서 사도는 솔로몬의 증언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째 부분은 ‘우리는 주의 징계를 거절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주께서는 그 사랑하는 자를 징계하시기 때문이라’ 고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솔로몬은 ‘내 아들아’ 라는 말로 권면을 시작하고 있으므로 이 권면의 말씀이 이처럼 친절하고 감미로운 표현에 이끌려서 우리 마음 깊이 들어오게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또 솔로몬은 ‘만일 하나님의 징계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징계를 싫어하거나 미워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다’ 라고 말합니다.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징계를 달게 받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의 아버지 같은 사랑의 표적을 거부하는 자들로서 더욱 은혜를 모르는 자들입니다.
3. 본문 6절은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입니다.
이 추론은 정당한 근거가 없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불신자들과 택함을 받은 자들을 무차별하게 벌하시기 때문입니다.
징계는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하기보다는 가끔 진노를 더 선포하시며 성경 말씀에서도 그렇게 말하고 있으며 우리의 경험도 그 사실을 확인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가 느끼고 있는 징계의 효용과 결과에 대해서만 믿는 자들에게 언급하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히브리서 12 장
그러나 하나님은 불신자들을 벌하실 때는 언제나 그들에 대해서는 엄격하시고 격노하신 심판자로서 자신을 나타내시지만 택하신 자들을 대하실 경우에는 그들의 구원을 고려하시는 일밖에는 다른 목적을 갖지 않고 계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부성애의 증거이외의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뿐 아니라 불신자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손에 지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종종 재난을 당하거나 고통을 당하는 것이 우연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치 고집이 세고 반항적인 아들이 그 아버지의 집을 멀리 떠나서 방탕하다가 드디어는 굶주림과 추위와 온갖 불행으로 말미암아 기진맥진하게 되어 결국은 자신의 어리석음에 대한 당연한 징벌을 각오하게 되고 그가 겪은 환난으로 인하여 아버지에 대한 순종의 도리를 배우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럼에도 이것이 아버지의 징계인 것을 전혀 모르기에 불신자들은 하나님의 권속들로부터 떠나게 되며, 결국은 주의 손이 그들에게 미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벌하시는 매가 아버지의 매라는 것을 우리가 납득하지 않는 한, 징벌을 받을 때 하나님의 사랑의 아무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그러한 생각은 불신자들의 마음에는 전혀 떠오를 수 없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변덕스럽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심판은 하나님의 집에서 시작됩니다.
비록 하나님은 이방인들과 하나님의 권속을 똑같이 벌하시기는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의 권속들에게 손을 뻗치십니다.
그것은 그의 권속에게는 특별한 배려를 하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에 의해 징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또 납득한 사람은 즉시 그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기에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신자들이 징계를 받고 있는 한가운데서 하나님을 발견할 때, 신자들은 하나님의 사랑의 확실한 보증을 갖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시지 않다면 그들의 구원에 관해 관심이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이리하여 사도는 하나님의 징계를 참고 견디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아버지가 되어 주신다고 말합니다.
난폭한 말처럼 하나님의 징계를 차버리는 자들이나 또는 그것을 고집 세게 저항하는 자들은 이 대열에 설 자격이 없습니다.
사도는 ‘하나님의 징계는 우리가 하나님께 완전히 순종할 때만 나타난다’ 고 말합니다.
히브리서 12 장
4. 본문 7-8절은 “(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 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입니다.
여기서 사도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관습에 따라서 추론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의 징계를 면한다는 것은 적당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일 인간 중에 적어도 분별력이 있고 건전한 판단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자녀들을 징계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징계 없이는 자녀들을 진정한 신앙의 덕으로 인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물며 가장 선하시고 가장 지혜로운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어찌 필요한 징계를 참으시겠는가?
만일 누가 항의하여 이러한 종류의 징계는 인간들 사이에서 아이들이 어른의 시기에 이르자마자 중지된다고 말하는데, 우리는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 하나님 쪽에서 보면 어린아이들에 불과하므로 하나님의 회초리는 언제나 우리의 등에 가해져야 한다고 대답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사도가 누구든지 십자가로부터 자유를 얻기를 원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되는 권리를 포기한 자들이며 하나님의 자녀의 수효 중에서 스스로 물러나는 자들이라고 결론짓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징계를 회피하려고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양자가 되는 복을 정당하게 평가하지 않고 하나님의 모든 은혜를 완전히 거절하는 일이 됩니다.
고난을 침착한 마음으로 참고 견디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 이런 일을 범한 자들입니다.
사도는 왜 처벌을 회피하는 자들을 이방인들로 말하지 않고 사생자라 부르는가?
그 이유는 교회에 적을 두고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불리어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지적하기를 만일 그들이 아버지의 훈계 또는 징계를 회피한다면 그들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은 거짓되고, 진실한 것이 못되며, 그러므로 그들은 합법적인 적자(嫡子)들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사생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2 장
히12:9-11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본문은 징계의 고난을 감수하라는 권면의 계속입니다.
1. 본문 9절은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입니다.
이 비교는 여러 부분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첫째 부분은 ‘만일 우리가 육신을 따라서 우리를 낳은 아버지에게 그렇게 큰 존경을 표하고 그 훈련에 복종한다면 우리의 영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에게 훨씬 더 큰 영광이 돌려져야 한다’ 는 것입니다.
둘째 부분은 ‘아버지들이 그 자녀들을 가르치는데 사용하는 연단은 오직 현세를 위해서 유용한 것이지만, 하나님은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우리를 성결케 함을 목표로 하신다’ 는 것입니다.
셋째로는 죽을 운명에 있는 인간들은 자녀들을 자기들 마음대로 징계하지만 하나님은 가장 의로우신 목적과 가장 높은 지혜를 가지고 그 훈련을 적용하시므로 하나님의 훈련은 잘못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째로 사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차이를 인간은 육신의 아버지이며 하나님은 영의 아버지라고 단언합니다.
이 일을 사도는 육신과 영을 비교함으로 그 이유를 확대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 육신의 아버지는 아닌가라는 질문이 나올 수 있습니다.
욥이 그 자신의 이야기에서 인간의 창조를 하나님의 주요한 기적들 중에 아무런 까닭 없이 포함시키지 않는 이유에서입니다.
이 점에 관해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당연히 정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인간의 도움없이 영혼을 창조하시고 또 재생하시는 유일하신 분이기 때문에 영의 아버지라고 불리어지는 것이라면 바울이 그 자신을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을 통하여 낳은 자들의 영적 아버지라고 말한 것은 공연한 자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은 영혼과 육체의 아버지이시며, 달리 여기에 합당한 자는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이 정당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 이 이름은 영혼이나 육체에 관해서 하나님의 양보 또는 증여로서 인간에게 양도되어 있다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2 장
하나님은 영혼을 창조함에 있어서 인간의 도움을 받지 않으셨으며 영혼은 하나님의 영적 능력으로 말미암은 기적이나 중생의 역사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영의 아버지, 특별히 최고의 아버지라고 불려집니다.
“공경하였거든” 에서 사도는 사람들 안에 본래 가지고 있는 애정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자식들을 호되게 다루고 있을 때조차도 이 애정으로 우리의 존경을 받습니다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는 우리가 하나님이 그 부권에 의하여 우리 위에 가지시는 권위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살려 하지 않겠느냐”라는 말은 원인 또는 목적을 나타내고 있으며 καί(카이 ; 그리고) 라는 접속사는 ‘..... 하기 위하여’ 라는 분사의 뜻으로 해석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말에 의하여 자신을 완전히 하나님께 대한 복종에 내어맡기기를 거절하는 것보다 더 치명적인 위험은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줍니다.
2. 본문 10절은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 입니다.
이 구절 말씀은 앞에서 말한 두 번째의 확대 설명입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육신을 길들이고 억제하여 우리를 하늘의 생명으로 중생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이 일로부터 하나님의 징계의 은혜는 영원한 것이라는 사실이 명백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징계에서 이와 똑같은 것을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의 훈련이나 징계는 시민적 질서의 일부분이며(pais ordinis politici ; 정치적 질서) 따라서 오직 현세에만 국한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로부터 하나님의 징계는 하나님의 영적 성성(聖性)이 육체의 안락을 능가할 정도까지 훨씬 더 큰 은혜를 가져온다는 말이 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반박하여 아버지의 의무는 그 자녀들을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섬기도록 양육하는 일인데, 그들을 훈련하는 기간은 그렇게 짧은 기간이 아니라고 한다면 우리는 ‘그것은 사실이지만 우리가 보통 정부나 국가에 관해서 말하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사도는 여기에서 가정생활에 관해서 말하는 것이다’라고 대답하겠습니다.
비록 종교 문제를 돌보는 것은 행정관들의 의무라 할지라도 그들의 임무는 이 세상의 한계 내에 한정되어 있다고 말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 지상의 시민 정부와 그리스도의 영적 왕국 사이에 구별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2 장
또 하나님의 징계는 하나님의 성성을 얻게 하는데 유용하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 사실은 마치 하나님의 징계가 우리를 완전히 거룩하게 하였다고 함과 같은 식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다만 하나님의 징계는 우리를 준비하도록 하는 조력자라는 뜻으로 해석되어야 됩니다.
그것은 징계로 말미암아 육신을 억제하도록 주께서 우리를 훈련하시기 때문입니다.
3. 본문 11절은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입니다.
사도는 하나님의 징계를 우리가 목전의 감각으로 측정하지 않도록 이 말을 첨부합니다
우리는 마치 매를 무서워하여 한 회피하려는 아이들과도 같다고 사도는 말합니다.
아이들이 매를 무서워하는 것은 그것이 그들에게 유익하다는 것을 판단할 수 있는 나이가 되어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징계는 우리의 현재의 육신적 감각에 의하여서는 정당하게 평가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징계의 결과를 주시해야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서 우리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또한 징계의 목적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의의 열매’ 라고 말하는 것은 주를 두려워하는 일과 십자가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거룩하고 경건한 생활을 의미합니다.
사도는 그 열매를 ‘평강한’ 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역경으로 말미암아 두려워하고 또 불안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항상 불안하고 초조한 감정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징계를 받을 때 우리의 마음은 고요히 안정되고, 그리고 이전에는 가혹하고 고통스럽게 여겨졌던 것이 얼마나 유익한 것이었던가를 알게 됩니다.
히브리서 12 장
히12:12-17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본문의 첫 부분은 징계를 감수하라는 말씀의 총 결론의 말씀입니다(12-13).
둘째 부분은 교회 생활에 대한 교훈으로 신자들이 피차 두려워해야 할 일들에 관한 말씀입니다(14-17).
이를테면 신자가 아직 세상에 속하였다는 사실 때문에 주께서 참으로 주시기 원하는 것들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1. 본문 12절은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입니다.
사도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징계하실 때조차도 우리의 구원을 고려하시는 것이라고 말한 후에 계속해서 새로운 기쁨과 열심을 내도록 우리를 격려합니다.
그것은 잘못된 생각에 사로잡히는 일과 역경에 있을 때 하나님의 은혜의 흔적이 전혀 없다고 하는 것보다 더 우리를 약하게 하고 또 힘 빠지게 하는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통을 주실 때조차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를 위하여 배려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생각하는 것보다 더 용기를 주는 것은 없습니다.
사도는 이렇게 말함으로서 우리의 고난을 용기를 가지고 참고 견디어내도록 격려하고 있을 뿐 아니라 또한 우리의 의무를 행하는 것을 소홀히 하거나 게을리 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충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두려워하는 일이 하나님께 대한 올바른 봉사를 얼마나 방해하는지에 관해서 충분한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신앙을 기꺼이 표명하지만 그들은 박해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그들의 신앙심을 위하여서 손과 발을 사용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기꺼이 논쟁하기를 원하며 또 사적으로 또는 공적으로 선하고 올바른 목적을 위한 일들을 감당하기를 원하며 또 하나님과 그들의 동포들에 대해서 그들의 의무를 다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악한 자들의 미움을 받을 위험이 있기 때문에 또 그들에게 많은 어려운 문제들이 닥쳐올 위험을 느끼기 때문에 어떤 때는 팔짱을 끼고 조용히 방관합니다.
십자가에 대한 압도적인 공포가 우리 마음속에서 올바르게 정립될 수 있어서 십자가를 참고 견뎌낼 각오를 가질 수만 있다면 우리들 안에 있는 어느 부분도 하나님께 대한 그 의무를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부분이나 부적당한 부분은 없을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사도가 말하려 하고 있는 점입니다.
히브리서 12 장
사도는 ‘너희 손은 피곤하고 너희 무릎은 연약한데 그 이유는 역경에서의 진실한 위로를 모르기 때문이며, 그러기에 너희는 의무를 게을리 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 나는 너희에게 십자가의 훈련이 어떠한 유익을 주는가를 보여 주었으므로 이 가르침이 너희를 격려하여 지체 모두에게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서 그 결과 손과 발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소명에 신속하고 기꺼이 따르도록 해야 한다’ 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이사야 35장 3절에 있는 말씀을 지적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이 구절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거룩한 교사들에게 명하여 그들 앞에 은혜의 소망을 가짐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약한 손을 강하게 하고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라고 합니다.
사도는 모든 신자들에게 이렇게 하기를 명령하고 있습니다.
만일 이렇게 하는 것이 주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위로의 열매라면 마치 목사의 임무가 교회 전체를 견고케 하는 일인 것과 같이 각 개인의 임무는 이 가르침을 각각 자기에게 적용하여 그 자신을 견고케 하고 용기를 내게 하는 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2. 본문 13절은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입니다.
이제까지 사도는 강하게 되고 용기를 가지고 선을 행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위로에 의지해야 한다는 사실과 이것이 우리의 지탱이 된다는 사실을 말했습니다.
사도는 이제 다른 것을 첨부합니다.
사도는 우리가 조심성 있게 걷고, 올바른 길로 들어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분별없는 열심은 게으름이나 무기력 못지않게 해로운 것이 사실입니다.
사도가 권면하고 있는 곧은 길은 인간의 마음이 모든 두려움을 극복하고 오직 하나님에 의하여 인정된 길에만 관심을 갖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두려움은 참으로 교묘하게 샛길을 찾아내는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고약한 두려움에 말려 들게 되면 잘못되고 비뚤어진 길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렇지만 반대로 환난을 참아 견디려고 결심하는 사람은 누구나 어디든지 주께서 부르시는 곳을 똑바로 가며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게 걷습니다.
사도가 지적하는 요점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우리의 발걸음을 옮기고 두려움이나 이 세상의 유혹이나 기타의 어떠한 장애물도 우리를 방해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이 올바른 행위의 규칙을 만들어 놓고 있습니다.
사도는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라고 부언하는데, 이것은 ‘너희가 절뚝거림으로 인하여 길에서 너무 멀리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하라’ 는 뜻입니다.
절뚝거린다는 말은 인간의 마음이 이리저리 흔들려서 성심껏 하나님께 전심하지 않는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 장
이리하여 엘리야는 하나님의 예배와 미신을 혼합하고 있는 두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고 말하였습니다(왕상18:21).
이것은 참으로 적절한 표현법입니다.
헤매는 것은 절뚝거리는 것보다 더 나쁜 일이기 때문입니다.
비틀비틀 절뚝거리기 시작하는 사람은 즉시 길에서 낙오되는 것은 아니지만 차츰차츰 길에서 떨어져 나가다가 드디어는 죄악 속으로 빠지게 되고 사단의 미로에 둘러싸여서 그 가운데로 빠져 버립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우리가 어느 정도 절뚝거리거나 비틀거릴지라도 조속히 고쳐 잡도록 노력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것을 그대로 내버려두면 결국 그 절뚝거림이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나게 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또 이렇게도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점점 더 절뚝거리거나 또는 점점 더 옆길로 벗어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입니다.
그러나 그 의미는 똑 같습니다. 사도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길을 똑바로 걷지 못하고 조심성 없이 이리저리 길을 비뚤어지게 걷다가 결국 하나님께로부터 완전히 멀리 떨어지는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3. 본문 14절은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입니다.
인간이라는 것은 나면서부터 모두 평화와는 담을 쌓고 태어난 것 같습니다.
인간들은 모두 그들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고 자기 자신의 뜻에만 따르려고 하며 다른 사람의 의향에는 그 자신들을 맞추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꾸준한 노력으로 평화를 추구하지 않으면 평화를 유지해 나갈 수 없습니다.
매일 이와 같은 분쟁의 원인이 되는 많은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가 여기서 우리에게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을 좇으라’ 고 말하는 이유인데, 이것은 마치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평화(화평)는 우리가 편리할 때만 가끔 구해야 할 것이 아니라, 언제나 최대한의 열심을 가지고 노력하며 평화가 항상 우리 가운데 유지되도록 해야 한다’ 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수많은 모욕을 잊어버리고 여러 가지 일에서 서로 용서하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불경건한 자들과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는 그들의 악덕이나 범죄를 관대하게 여기는 것을 인정할 수 있기에 사도는 즉시 ‘화평과 함께 거룩을 좇으라’ 고 말합니다.
마치 사도는 우리가 불신자들과의 우정으로 말미암아 오염되거나 더럽혀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예외를 두고 화평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2 장
거룩함은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가 있는 일입니다.
온 세계가 전쟁으로 불타고 있더라도 우리는 거룩하게 되는 일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우리를 연결하는 끈이기 때문입니다.
요약해서 말하면 속담에도 말했듯이 오직 양심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고요히 사람들과의 평화를 유지하라는 말입니다.
사도는 ‘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새로워진 눈으로만 오직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4. 본문 15절은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입니다.
1) 본문 15절 상반은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또는 조심하고)” 입니다.
이 말이 나타내 주는 뜻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져 나가기는 쉬운 일이며, 그러기에 이 점에 관해서 끊임없는 주의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사단은 우리가 아무 걱정 없이 마음이 편하거나 마음이 느긋해진 것을 보자마자 그 순간에 우리를 둘러싸고 습격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물러 있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노력하고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사도는 ‘은혜’ 라는 말 안에 우리의 소명 전체를 포함시킵니다.
어떤 사람은 이 말씀에서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우리의 의지로 하나님과 함께 협동하지 않는 한 효력이 없다고 하는데 그 논의는 어리석습니다.
우리는 우리 육신의 게으름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육신은 끊임없는 격려를 필요로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경고와 권면을 가지고 우리를 격려하시며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권면이 헛된 것이 되지 않고 또 효력도 없이 떠내려가 버리는 일이 없도록 해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이 스스로 가지고 있는 힘이나 자유 의지를 교훈과 권면으로부터 결론지을 수는 없습니다.
여기에서 사도가 요구하고 있는 주의와 조심성은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2) 본문 15절 하반은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입니다.
사도가 신명기 29장에 있는 모세의 구절을 언급하고 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율법을 공포한 후에 모세는 백성들에게 어떠한 독초와 쓴 뿌리도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생기지 않도록 하라고 말합니다.
히브리서 12 장
그 후에 모세는 자기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설명하여 ‘아무도 형벌을 받지 않기를 바라는 소망 때문에 꾀임을 받아 그 자신의 영혼을 죄 속에 버려두거나 또는 술취한 자가 자신의 갈증을 자극하기에 익숙해 있듯이 자신의 사악한 욕망을 자극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가져오는 일이 없도록 하라’ 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사도도 여기서 똑같은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사도는 우리가 이와 같은 뿌리를 더 이상 자라나게 내버려 두면 그 뿌리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타락하고 손상을 받게 된다고 말합니다.
사도는 그들에게 명령하여 각각 자신의 마음에서 그와 같은 악독의 뿌리를 뽑으라고 말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 뿌리가 그들 가운데 자라지 못하게 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러한 뿌리가 하나님의 교회 안에도 있다는 사실은 어쩔 수 없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선한 사람들 사이에는 언제나 위선자들이나 불신자들이 섞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뿌리가 나왔을 때는 언제나 이것을 잘라내 버려야 합니다.
그러한 뿌리가 자라서 좋은 씨를 질식시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모세가 ‘독초와 쑥’ 이라고 부르고 있는 대신 사도는 ‘쓴’ 이라고 말하지만 어느 것이나 유독하고 치명적인 뿌리라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이 뿌리는 대단히 치명적인 악이므로 우리는 크게 조심해서 그것을 예방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뿌리가 성장해서 더 이상 퍼지는 일이 없도록 해야 됩니다.
5. 본문 16절은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입니다.
1) 16절 상반은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입니다.
이미 사도는 거룩함에 대해서 그들에게 권면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이와는 정반대의 더러움으로부터 그들을 피하게 하기 위하여 사도는 구체적인 한 실예를 보여주고 음행하는 자가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후에 사도는 좀 더 일반적인 주제로 들어가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고 말합니다. 이 ‘망령된’이라는 말은 ‘거룩함’이라는 말에 적절히 대비되는 말입니다.
주는 자신에게 복종케 하심으로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가 세상을 버릴 때 주께서는 이렇게 하십니다.
누구든지 그 자신의 더러움에 완전히 만족하여 그 속에 딩구는 자는 망령된 자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망령된 자를 일반적인 말로 ‘이 세상을 거절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아주 열심히 열망할 만큼 존중하지 않는 자들’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갖가지 방법으로 망령된 자가 되기 때문에 사단이 그의 부패로 말미암아 우리를 더럽히는 틈을 주지 않도록 매우 주의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12 장
또 헌신 없이는 진정한 종교는 없으므로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육신을 억제하며 경건을 완전히 훈련하는 일에 끊임없이 전진해야 합니다.
우리는 마치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는 망령된 자인 것과 마찬가지로 또한 만일 우리가 이 세상의 더러움 속에 딩군다면 우리는 성화의 은혜를 버리는 일이 됩니다.
2) 본문 16절 하반은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입니다.
이 보기는 ‘망령된’ 이라는 말의 의미를 설명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에서는 장자의 명분보다 한 그릇의 식물에 더 가치를 두어 복을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망령된 자라고 함은 이 세상에 대한 사랑이 그 마음 속을 지배하고 우세하여 하늘을 잊어버리는 사람들입니다.
이를테면 망령된 자란 야심에 마음을 빼앗기고, 금전이나 부에 열중하고 대식(大食)에 빠지게 되고, 기타의 쾌락들에 얽히게 되어서 그리스도의 영적 왕국에는 전혀 마음이 없고 조금의 신경조차도 쓰지 않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뿐 아니라 이와 같은 보기는 참으로 적절합니다.
주께서 그 백성들에 대한 사랑이 크심을 보여주시려고 원할 때 영원한 생명에 대한 소망으로 부르신 사람들을 하나님의 장자들이라고 부르십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대단히 귀중한 영예입니다.
이 영예에 비하면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부나 모든 이익이나 명예, 쾌락이나 기타의 복된 생활을 영위해 나가는데 으뜸가는 것이나 보통 그렇게 생각하는 모든 것이 다 값싼 한 그릇의 식물과도 같다고 봅니다.
거의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들을 그렇게 높이 평가하는 것은 타락한 욕망이 우리의 눈을 어둡게 하여 보이지 않게 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기를 원한다면 이러한 식물을 멸시하도록 배워야 합니다. 이 식물로 사단은 항상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을 꾀어서 그 함정에 빠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6. 본문 17절은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입니다.
1) 본문 17절 상반은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입니다.
처음에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판 행위가 어린아이들의 장난과도 같은 사소한 일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우 야곱에게 아버지가 축복을 하였을 때에야 비로소 에서는 복을 빼앗겨 큰 손해를 본 것을 깨달았지만 그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히브리서 12 장
이와 똑같이 이 세상의 유혹에 사로잡혀서 하나님을 멀리하고 그 자신의 구원을 팔아서 지상의 식물로 자신을 먹여 살리려는 사람들은 그 자신이 상실되어 간다고 생각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은 마치 자기가 가장 복된 자이기나 한 것처럼 생각하여 자신에게 만족하고 득의양양하다가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을 여신 다음에야 자신들의 악의 진상을 알게 되어서 자신이 파멸한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들은 이 파멸을 이전에는 염두에도 두지 않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에서는 배가 고팠을 때는 배를 채우는 일밖에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배가 불렀을 때 에서는 자기 식물을 기꺼이 준 아우를 비웃고 바보 취급을 하였습니다 우리는 말하거니와 불신자들은 타락된 욕망에 자극을 받거나 억제함이 없이 자신의 쾌락에 깊이 빠져들어 가게 되는 한, 그러한 어리석음을 저지르고 맙니다.
그 후에야 그들은 자신이 그렇게도 열심히 추구하였던 모든 일들이 얼마나 치명적인 해로운 일들이었던가를 깨닫게 됩니다.
2) 17절 하반은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입니다.
“버린 바가 되어” 라는 말은 ‘거절을 당하여’ 또는 ‘물리침을 받아’ 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에서가 자신의 잘못으로 잃은 복을 비록 눈물로 구하였지만 회개가 너무 늦었기에 에서는 아무것도 얻지도 못하였고, 또 소용도 없었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하는 자들은 모두 이와 똑같은 위험에 처해진다고 사도는 경고하기에 ‘만일 하나님의 은혜를 멸시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며, 하나님의 왕국을 거절하고 이 세상을 택하였다면 이제 용서받을 소망은 전혀 없을 것이 아닌가’ 라는 질문이 나올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사람들에 대해서 용서가 완전히 거부된다는 것은 아니지만,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경고하고 싶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망령된 사람들의 조소나 모욕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복수하시는 진노의 예를 우리는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내일이 되면 고치려고 결심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종종 새롭고 예기치 못했던 형태의 죽음으로 그들을 이 세상으로부터 추방해 버리며,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에 관해서 듣는 것을 꾸며낸 이야기라고 생각할 때 하나님은 그들을 추궁하여 하나님을 그들의 심판자로서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하고 그들의 양심이 죽어 있을 때 그들은 나중에 괴로운 양심과 죽음의 대가로 두려워할 만큼 엄청난 고뇌를 느끼게 됩니다.
이 일이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어날 위험은 있으므로 사도가 누구에게나 ‘주의하라’ 고 경고하는 것은 올바른 일입니다.
여기서 ‘회개가 주어진 죄인은 그 회개에 의하여 얻어지는 것이 무엇인가?’ 라는 또 하나의 질문이 일어날는지 모릅니다.
히브리서 12 장
에서는 그 회개에 의하여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었다고 사도가 말할 때, 이 구절을 말하고 있는 것같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의 ‘회개’ 는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회심의 뜻으로 해석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오랫동안 불의에 깊이 빠져 있는 불신자들을 치실 때 그들이 갖는 공포의 뜻으로 해석되어 있을 뿐이다’ 라고 말하겠습니다.
이 공포가 무익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놀랄 것은 없습니다.
그들은 그렇다고 다시 제정신으로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그들의 악을 미워하는 것도 아니며 다만 그들이 받을 심판만을 생각함으로서 고통을 당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눈물에 대해서도 똑같은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죄인이 탄식할 때는 언제나 주께서 기꺼이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자마다 누구나 그 자비를 얻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두드리는 이에게 열리기 때문입니다(마7:8). 그러나 에서의 눈물은 소망이 없는 인간적인 눈물이었고 하나님을 향하여 흘린 눈물이 아니었습니다.
불신자들은 자신의 운명을 슬퍼하고 한탄하면서도 하나님의 문을 두드리지 않습니다.
이 일은 오직 믿음에 의해서만 행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들의 양심이 그들을 쓰리게 찌르면 찌를수록 그들은 더한층 하나님께 반발하고 분노를 터뜨립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가까이 가기를 원하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사랑은 보지 못하고 진노만 보기 때문에 하나님의 면전을 피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종종 농담으로 말하듯이 ‘임종시에 회개할 기회는 얼마든지 충분히 있다’ 고 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러나 그 때가 오면 그들은 격렬한 죽음의 고뇌로 인해 고통 중에 소리 지르면서 ‘이제는 하나님의 자비를 얻을 시간이 없구나’ 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찾게 된 시간이 너무 늦어서 멸망으로 직행하게 됩니다.
때때로 그들은 겨우 입을 열어 ‘원하오니! 한번만이라도!’ 와 같은 말을 할 뿐입니다.
그러나 곧 절망이 그들의 모든 서원을 잘라버리고 더 이상 말하지 못하도록 그 입술을 닫아버립니다.
히브리서 12 장
히12:18-24 너희의 이른 곳은
본문 말씀은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섬기라는 권면입니다.
1. 18절은 “너희의 이른 곳은 만질만한 불 붙는 산과 흑운과 흑암과 폭풍과” 입니다.
1) 본문 18절 상반은 “너희의 이른 곳은” 입니다.
사도는 이제 자신의 논점을 다른 논법으로 논의해 나갑니다.
사도는 복음에 의하여 우리에게 공개된 은혜의 위대함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것은 우리가 진심으로 존경을 가지고 이 은혜를 받아들이기를 배우기 위해서입니다.
다음에 사도는 이 달콤한 은혜를 우리가 찬양하고 사랑하며 열망하도록 유도합니다.
사도는 ‘율법’과 ‘복음’을 비교함으로서 이 두 가지를 역설합니다.
그리스도의 왕국이 모세의 통치 시대보다 우월하면 우월할수록 또 우리의 소명이 옛 백성들의 소명보다 영광스러우면 영광스러울수록 또 우리는 더욱 더 우리에게 제공되어 있는 이 복을 합당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거나 또 이 세상에 나타나신 그리스도의 위엄을 진심으로 겸손한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의 배은망덕은 악질적이고 또한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이 됩니다.
또 하나님은 유대인들에게 하신 것처럼 무서운 자로 우리에게 나타나시지 않고 친밀함과 우정으로 우리를 초대하시므로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참으로 고마우신 초대를 진지한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중으로 망은의 죄를 범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여기서 복음과 율법을 비교하는데 이 비교는 두 부분을 가진 것을 우리는 기억합시다.
하나는 하나님의 영광이 율법에 있어서 보다도 복음에 있어서 더 명백히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의 소명이 이전에는 오직 두려움밖에 없었으나 지금은 친밀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2) 본문 18절 하반은 “만질만한 불 붙는 산과 흑운과 흑암과 폭풍과” 입니다.
이 구절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명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상의 산과 영적인 산이 대비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계속되는 “불붙는 산과 흑운과 흑암과 폭풍과 ......” 라는 말도 이 뜻을 가집니다.
하나님이 그의 율법에 권위를 부여하고 율법에 대한 존경심을 일으키기 위해 나타내신 이러한 기적들이나 표적들은 그것들 자체가 놀랄만한 것이요, 진실로 천상적인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왕국에 이를 때, 하나님이 거기에서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것은 모든 하늘보다도 우월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12 장
이 사실로부터 율법의 모든 위엄은 거의 지상의 것이 되어버린다는 결론입니다.
시내산은 손으로 만질 수 있지만 시온산은 오직 영에 의해서만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출애굽기 19장에서 읽은 것들은 눈에 보이는 표상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왕국 안에서 우리가 갖는 것은 육적 감각으론 이해할 수 없습니다.
만일 누군가가 반론하여 시내산에 나타난 것들에는 영적인 의미가 있었고, 또 오늘날에도 우리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하늘에까지 올라서게 되는 신앙의 외적인 실천이 있는 것이 아니냐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사도는 보다 큰 것과 보다 작은 것을 비교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라고 대답하겠습니다.
율법을 복음과 비교해 보면 복음에는 영적인 것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 율법에는 지상적인 상징들이 더 한층 뚜렷하다는 사실을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2. 본문 19-21절은 “(19) 나팔소리와 말하는 소리가 아니라 그 소리를 듣는 자들은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기를 구하였으니
(20) 이는 짐승이라도 산에 이르거든 돌로 침을 당하리라 하신 명을 저희가 견디지 못 함이라 (21) 그 보이는 바가 이렇듯이 무섭기로 모세도 이르되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 하였으나” 입니다.
이 두 번째 부분에서 사도는 율법이 선포되었을 때 모든 종류의 공포로 가득 차 있었기에 복음과는 아주 다른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출애굽기 19장에 기록되어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엄격하신 재판관이신 사실을 보여주려고 심판의 자리에 오르신다는 사실을 백성들에게 알리기 위함이었습니다.
해롭지 않은 동물도 우연히 너무 가까이 오면 죽이라고 하나님은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스스로 자신의 유죄함을 의식하고 또 자신이 율법을 통해 영원한 죽음에 정죄되었음을 안 죄인들에 대해서는 얼마나 더 큰 형벌이 목전에 박두하였을 것인가?
그러나 복음이 믿음으로 받아들여진다면 반드시 사랑을 포함하게 됩니다.
그 이상의 것을 더 알고자 하는 사람은 고린도후서 3장을 참조하면 될 것입니다.
백성들이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기를 구하였으니” 라고 말하는데, 이것을 사도가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고 말하려는 것으로 해석하면 안 됩니다.
그렇지 않고 백성들은 하나님 자신이 직접 말씀하시는 것을 듣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 없도록 간절히 원하였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모세라는 인물이 하나님과 인간과의 사이에 개재하여 그들의 두려움을 어느 정도 완화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는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는 말을 모세가 한 말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주석가들을 당황하게 하는 말입니다.
그 말을 모세가 했다고 말한 곳은 아무데도 없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2 장
모세가 백성들의 중개자로서 백성들의 요청을 하나님께 가져와서 백성들의 이름으로 이렇게 말했다고 생각한다면 그 해결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백성들 전체의 호소였으나 모세는 그들 전체의 대변자였기에 당연히 그들에게 포함됩니다.
3. 본문 22-23절은 “(22)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23)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입니다.
1) 본문 22절 상반은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 입니다.
본서의 기자인 사도는 이사야 2장과 이와 유사한 다른 구절에서 그의 복음이 시온산에서부터 나올 것이라고 약속하신 예언들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시온산과 시내산을 비교하면서 시온산을 ‘하늘의 예루살렘’ 이라고 부릅니다.
시온산을 이와 같이 부른 것은 유대인들이 율법을 받은 세상적 산을 더 이상 고집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에서였습니다.
그들이 율법의 멍에 아래서 종노릇하기를 계속 고집한다면 그들은 갈라디아서 4장 25절에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시내산으로 되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는 하늘의 예루살렘은 전 세계에 세워질 것이며, 또 스가랴에서 천사가 그의 경계를 동에서부터 서편까지 이르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2) 22절 하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을 복음으로 부르실 때는 우리가 족장들의 반열들과 더불어 천사들과 교제하게 되며, 하늘나라에서 복 받은 성도들의 반열들과 더불어 천사들과 교제하게 되며, 하늘나라에서 복 받은 성도들의 영 가운데 살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진정 아버지께서 천사들과 거룩한 신앙의 선조들을 포함해서 우리들에게 주신 값비싼 명예입니다.
‘천만 천사’ 라는 표현을 우리는 에라스무스의 표현을 빌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라고 주석하지만 그 말은 다니엘서에서 빌어온 것입니다.
‘장자들의 총회’ 는 성경에 가끔 나타나는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들을 구별없이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특히 족장들과 옛 교회의 뛰어난 인물들을 구별해서 말한 것입니다.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 이란 표현은 하나님께서 그의 책에 기록한 모든 택함받은 자들, 혹은 에스겔서의 기록에 따라 하나님의 비밀 장부에 기명된 자들을 의미합니다.
3) 본문 23절 중반은 “만민의 심판자이신” 입니다.
이것은 아마 두려움을 주기 위한 표현인 것 같습니다.
히브리서 12 장
사도는 이것을 마치 은혜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처럼 설명하려고 합니다.
사도는 우리가 더러움이나 신성모독의 요인을 간직한 채 무례하게 하나님의 성소를 침범했을 경우 우리의 심판자 앞에서 모든 것을 설명해야 된다는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사도는 온전케 된 의인의 영이란 말을 첨가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육체를 벗어버리고 세상의 온갖 더러운 것들을 떠난 거룩한 영혼들 가운데 속한다는 사실을 뜻합니다.
사도는 이제 그들이 육체를 떠나서 더 이상 육체의 약함에 종노릇할 필요가 없기에 성별된 혹은 ‘온전케 된’ 이란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결론지을 수 있는 것은 육체를 떠난 거룩한 영혼들은 하나님과 더불어 살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우리가 그들의 교제에 참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본서의 저자인 사도는 “중보이신 예수” 라는 표현을 부가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아버지와 화해할 수 있고, 그분만이 우리를 밝고 사랑스러운 얼굴로 맞이해 줄 수 있으며, 그리하여 우리는 두려움 없이 그분 앞에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사도는 그리스도께서는 어떻게 우리의 구세주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그의 피, 히브리적 표현은 “뿌린 피” 에 의해서 구세주가 되신 것입니다.
그 피는 우리의 속죄를 위하여 한번 흘리신 바 되었으므로 이제 우리의 영혼은 믿음을 통하여 그 피로 깨끗함을 받아야 합니다.
저자는 이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이미 설명한 바 있는 옛날의 율법 의식을 언급합니다.
4. 본문 24절은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 입니다.
이 말에 귀 기울이는 우리를 막을 수 없고 이 말 듣기보다 더 좋은 방법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아벨의 피보다 효과적으로 외치며, 또 하나님이 더 잘 들으십니다.
어쨌든 우리는 이 말을 축어적으로 해석합니다.
또 그 음성 자체가 더 좋은 것을 말하고 있다고 해석합니다.
즉 그리스도의 음성은 우리의 죄를 사함 받는 효력을 선포하기 때문입니다.
아벨의 피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살인자에 대한 복수를 호소했기 때문에 정당하게 외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피는 그 외치는 소리를 들음으로서 매일 속죄가 이루어집니다.
히브리서 12 장
히12:25-29 너희는 삼가 말하신 자를
본문에서는 같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모세로 주신 율법과 그리스도로 완성된 복음이 비교됩니다.
또 본문에서는 흔들림이 없는 그리스도의 왕국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 다음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왕국을 받았으니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경건히 하나님을 섬기라는 권면입니다.
끝으로 하나님의 친절하신 은혜를 거역할 될 때는 거역자들에 대한 위협도 선포됩니다
1. 본문 25절은 “너희는 삼가 말하신 자를 거역하지 말라 땅에서 경고하신 자를 거역한 저희가 피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하늘로 좇아 경고하신 자를 배반하는 우리일까 보냐” 입니다.
사도는 앞에서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말씀하시지 않기를 요청하였다고 말했던 것과 똑같은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사도는 그때와는 무엇인가 좀 다른 뜻으로 말한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말씀을 우리는 거절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는 바로 앞의 비교에서 그가 의도하였던 것처럼 역시 옛 사람들이 율법을 무시하였기에 형벌없이 무사하지는 못했으니, 지금도 복음을 멸시하는 사람들에게는 무거운 형벌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소(小)에서 대(大)에 이르는 논법을 써서 논의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사도는 그때에도 하나님이나 모세가 이 땅위에서 말하였고, 지금은 동일한 하나님이나 그리스도가 하늘에서 말씀하신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가 다 하나님과 관련 있다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사도는 하나님이 낮게 겸손한 방법으로 말씀하셨기에 지상에서 말씀하셨다고 말합니다
사도가 한 말은 율법의 외적 집행에 관해서라는 것을 우리는 항상 기억해야 됩니다.
이것은 복음에 비하여 무엇인가 지상적인 맛이 있었으며, 아직 인간의 마음을 하늘 위로 인도하여 완전한 지혜에 이르게 하지는 못하였던 것입니다.
동시에 율법은 똑같은 가르침을 담고는 있지만 다만 교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에는 완전성이 언제나 결여되어 있었습니다.
2. 본문 26절은 “그 때에는 그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거니와 이제는 약속하여 가라사대 내가 또 한번 땅만 아니라 하늘로 진동하리라 하셨느니라” 입니다.
히브리서 12 장
하나님께서 율법을 선포하실 때 땅을 진동시켰는데 이제는 더욱 굉장하게 말씀하신다고 사도는 선언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땅과 하늘 양쪽을 다 진동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사도는 선지자 학개의 증언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 문장을 사도는 문자 그대로 인용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선지자는 하늘과 땅이 장차 진동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기에 사도는 이것을 해석하여 복음의 소리가 땅위에 진동할 뿐 아니라 하늘 위에까지 꿰뚫는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선지자 학개가 그리스도의 왕국에 관해서 말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 동일한 문맥에서 “또한 만국을 진동시킬 것이며 만국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영광으로 이전에 충만케 하리라” 는 말이 뒤따르기 때문입니다.
만국이 오직 그리스도의 인도아래서만 하나로 모일 수 있다는 것이 확실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만족시켜 줄 욕망은 그리스도 이외에는 없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뿐 아니라 영광에 있어서 솔로몬의 성전을 능가하게 된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위대하심이 온 세계에 퍼졌을 때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가 그리스도의 오실 때를 말하고 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왕국이 처음부터 땅의 낮은 부분까지 진동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왕국의 능력이 하늘에까지 곧바로 꿰뚫어 올라가야 하는 것이면 복음의 가르침은 더 탁월한 것이며 모든 피조물은 더 명백히 드러나야 하는 것이라고 사도는 결론합니다.
3. 본문 27-28절은 “(27) 이 또 한번이라 하심은 진동치 아니하는 것을 영존케 하기 위 하여 진동할 것들 곧 만든 것들의 변동될 것을 나타내심이니라
(28)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 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입니다.
선지자의 말대로 ‘조금 있으면’ 이라고 해석됩니다.
선지자가 의미하고 있는 것은 백성들의 고통은 오래 지속되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구원하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는 이 말에 중점을 두는 것이 아니고 다만 천지가 진동한다는 말로 그리스도가 오실 때, 온 세계의 상태가 완전히 변할 것임을 추론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피조물들은 멸망에 복종하고 있지만, 그리스도의 왕국은 영원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피조물들은 반드시 좀 더 좋은 것으로 다시 창조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 일로부터 사도는 또 다른 권면을 합니다.
주께서 우리를 떨리게 하는 이유는 유리가 우리의 진정하고 영원한 토대를 그의 안에 발견하게 하기 위함이므로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 왕국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 장
그러나 우리는 오히려 옛 주석가가 제시한 ‘우리가 왕국을 소유한즉 은혜를 얻었다’는 이문(異文)을 택하고 싶습니다.
만일 이 문장을 긍정문으로 읽는다면 의미는 대단히 잘 통합니다.
즉 복음을 우리가 받아들일 때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에게 주어져서 우리로 하여금 존경과 거룩함을 가지고 하나님을 예배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이것을 권고문으로 해석해서 ‘하자’라고 한다면, 이 문장은 부자연스럽고 뜻이 분명하지 못한 말이 됩니다.
우리의 생각으로 사도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신앙으로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간다면, 우리는 참으로 헌신적으로 하나님을 봉사하는 데 열중해서 존재하는 것처럼 중생의 은사도 그렇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εὐαρέστως(유아레스토스 ;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즉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라고 말함으로서 하나님께 대한 봉사는 자진해서 기꺼운 마음으로 하는 것을 요구하지만, 동시에 겸손과 마땅한 존경이 동반되지 않는 예배는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사도는 육신을 좇는 잘못된 신앙과 거기서 오는 게으름을 항상 규탄하고 있습니다.
4. 본문 29절은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 입니다.
사도는 이미 하나님의 은혜를 감미롭게 설명하였습니다.
이제 사도는 하나님의 엄격하심도 선언합니다.
사도는 이 문장을 신명기 4장에서 빌어온 것 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들 자신에게 이끄시기 위해 아무것도 생략지 않았음을 압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꺼이 하나님을 따르도록 친절하고 부드럽게 인도하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부드러운 인도하심에 아무런 진전이 없을 때에는 하나님은 우리를 위협하시기도 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약속될 때는 위협을 동반한다는 사실은 당연하고 정당한 일입니다.
우리는 모두 너무나 자기만족에 빠지기 쉬우므로 이와 같은 자극을 받지 않으면 비교적 쉬운 가르침도 우리 안에서 고착되어 버립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별로 감동시키지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는 주를 두려워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그 자손의 천대에 걸쳐 은혜와 자비를 베푸시지만 그러나 자신을 거부하는 경우에는 삼사 대에 이르기까지 질투와 공의로 복수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