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시안[서안(西安)]에서 5일(2-2)
(2024년 4월 24일∼28일)
瓦也 정유순
2-2. 한성고성(韓城古城)
사마천 사당에서 버스로 약 30분 정도 달려 한성고성으로 발길을 옮긴다. 기온은 중국의 내륙답게 32도를 웃도는 뜨거운 열기가 거리를 메운다. 한성고성은 중국의 8대 고성으로 관광객이 많이 찾아온다. 특히 한성고성 삼묘(三廟)는 그 어디보다 고품격이라고 한다. 건물과 골목은 옛 모습의 멋이 비교적 청결하게 풍기는 것 같다.
<한성문묘 패관>
한성문묘로 가는 첫 문에는 중앙에 ‘德配天地(덕배천지)’라고 쓴 편액이 있다. 이는 ‘공자의 덕이 능히 하늘과 땅에 짝을 이룰 수 있다.’는 뜻 같다. 한성문묘(韓城文廟)는 중국의 국가중요문화재로 보호받고 있다. 들어가는 입구에는 문무관원군민인등지차하마(文武官員軍民人等至此下馬)라고 길게 쓴 하마비(下馬碑)가 버티고 있다. 첫 문으로 들어서면 수령(樹齡) 천 년 이상 된 측백나무 등이 오랜 세월을 이야기한다.
<덕배천지>
<하마비>
발걸음은 공자사당 문묘로 간다. 영성문 뒤편 유리로 만든 다섯 마리 용을 만인궁장(萬仞宮牆)이라 부른다. ‘인(仞)’은 깊이를 재는 단위로 심오한 공자를 상징한다. 황제의 거처에 구룡(九龍)벽이 있다면 오룡(五龍)벽은 공자에 대한 예우다. 노거수가 늘어선 마당 끝에 있는 대성전(大成殿)은 공자(孔子)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공자에게 가볍게 목례(目禮)로 인사한다.
<오룡벽>
대성전의 전각은 당대(唐代)에는 문선왕전(文宣王殿)이라 불렀고, 맹자는 공자를 집대성자(集大成者)라 칭하였다. 송(宋) 휘종(徽宗)은 공자를 집고성선현지대성자(集古聖先賢之大成者)라고 칭송하였다. 1104년인 송(宋)나라 숭녕(崇寧) 3년에 대성전으로 바꾸고 어필(御筆)로 쓴 편액을 하사(下賜) 받았다. 높은 축대 위에 세워진 지금의 대성전은 원나라 때 세워졌다.
<대성전>
대성전 편액 아래에는 ‘생민미유(生民未有)’라고 쓴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이는 맹자에 나오는 말로 ‘세상 사람 중에 공자를 능가하는 위대한 성인이 없다.’라는 뜻으로 공자가 성인의 최고임을 가리키는 말이다. 대성전 안의 중앙에는 공자의 입상이 ‘영원한 스승의 표본’이라는 뜻의 만세사표(萬世師表) 편액이 빛을 발한다. 공자의 4대 제자인 술성 은자(述聖 恩子)와 복성자 안자(復聖者 顔子)가 공자상 우측에, 아성 맹자(亞聖 孟子)와 종성 증자(宗聖 曾子)가 좌측으로 입상과 위패가 배향(配享)되어 있다.
<대성전 - 생민미유(生民未有)>
<공자 - 만세사표>
대성전 뒤의 ‘정의명도(正誼明道)’ 편액이 걸린 쪽문으로 나오면 명륜당이다. 정의명도는 ‘옳고 그름을 정확히 행하고 도를 밝힌다’는 뜻이다. 명륜당(明倫堂)은 유학(儒學)을 가르치는 강학당(講學堂)이다. ‘명륜(明倫)’이란 인간사회의 윤리를 밝힌다는 뜻으로, <맹자(孟子)>의 등문공편(滕文公篇)에 ‘학교를 세워 교육을 하는 것은 인륜을 밝히는 것이다.”라 한 데서 유래한 것이다. 명륜당 옆의 존경각(尊經閣)은 명나라 시대 유교 경전 십삼경(十三經)과 사서인 이십일사(二十一史)를 보관한 도서관이다.
<정의명도(正誼明道)>
<명륜당>
<존경각>
문묘 후문으로 나서면 명나라 때 지어진 동영묘(東營廟)다. 동서남북 그리고 중앙에 군대 주둔지가 있었는데, 군영마다 관우 사당을 설치했었고, 지금은 동쪽과 북쪽 사당만 남았다. 입구 편액은 관성묘(關聖廟)로 되어 있고, 출입문 좌우와 입구 좌우 벽에는 관우를 상징하는 충(忠)과 의(義)가 큼지막하게 적혀 있다.
<관성묘(關聖廟)>
<관성묘 내부 입구>
사당 안에는 중앙에 관우(關羽)가 자리한 위에는 충과 의가 영원하라는 뜻의 ‘충의천추(忠義千秋)’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이는 관우에 대한 영원한 찬사다. 관우를 중심으로 우측에는 부장인 주창(周昌)이 호위를 하고 좌측에는 아들인 관평(關平)이 지키고 있다. 삼공사에는 한날한시에 죽자던 도원결의(桃園結義)를 이루지 못한 유비(劉備)ㆍ관우ㆍ장비(張飛)가 한 자리에 모였다. 세 사람 각기 개성이 강한 눈동자로 세상을 바라본다. 소설 삼국지 속으로 빨려드는 느낌이다.
<관우>
<관성묘 내부 - 관우(중) 주창(좌) 관평(우)>
골목 하나 건너면 성황묘(城隍廟)다. 성황신은 성곽과 해자를 관장한다고 믿는 민간신앙이다. 백성을 안전하게 지켜주는 성에 대한 기원이다. 당나라 이후 신앙으로 번져 송나라 시대에 제례 행사로 정착했다. 명나라 주원장은 도교와 함께 성황묘에 대한 대중화를 주도했는데, 중국 전역에 꽤 많다고 한다. 한청의 성황묘도 명나라 시대인 1571년 처음 건립됐다.
<성황묘>
입구의 편액 창선단악(彰善癉惡)은 선행을 표창하고 악행은 증오한다는 뜻이다. 유불선(儒佛仙)보다 훨씬 권선징악(勸善懲惡)에 직설적이다. 안으로 들어서면 행상이 물건을 파는 장소인 정교방(政敎坊)이 있다. 성황묘는 늘 개방되는 광장이었다. 백성에게 개방돼 언제라도 기도가 필요하면 광천전(廣薦殿)에서 제사를 올리면 된다. 보다 공식적인 제사는 덕형전(德馨殿)에서 올려지며, 현령과 사대부가 참배하는 공간이다.
<성황묘 밖>
다음 행선지는 한성고성이다. 한성고성(韓城古城)은 615년 수(隋)나라 때 축조되어 618년에 완성이 되었다. 당초 토성(土城)이었으나, 1640년에 조정의 승인을 받아 토성 벽을 벽돌로 쌓았다. 그러나 1950년대와 1960년대에 벽이 잇달아 철거되었다. 현재 이곳에 남아 있는 것은 과거에 명(明)나라 때 쌓았던 모습이다.
<한성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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