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유서생(無遊書生) 백무엽(白武葉)
천진부에서 가장 궁핍스러운 장소는 범어산(梵魚山)이라는 야트막한 구릉(邱陵) 위의 두 곳일 것이다.
한 곳은 다 쓰러져 가는 암자(庵子)였고, 또 한 곳은 군영각이라는 고아원이다.
향화객(香火客)도 찾지 않는 궁벽한 암자, 곧 허물어질 듯한 암자에는 눈이 먼 사태(師太) 하나가 있다.
그 곳의 주인은 주인인 동시에 암자의 하인이기도 하고, 제 먹을 것을 제 손으로 길러야 하는 처지이기도 하다.
천맹사태(天盲師太), 그녀는 늘 벽(壁)을 보고 산다.
이 날도 그녀는 면벽(面壁)을 하고 있었다.
"……."
천맹사태의 뇌리에는 어떠한 생각이 흐르고 있을까?
보이지 않는 눈으로 무엇을 보기에, 언제나 벽을 향해 닫힌 눈을 고정시키고 있는 것일까?
백무엽은 반쯤 열린 암자 문을 통해 천맹사태의 등을 보고 있었다.
지금 그의 손에는 종이 두 장이 쥐어져 있었다.
은자 백 냥(銀子百兩), 은자 천 냥(銀子千兩).
두 장의 종이 모두 전표(錢票)였다.
천하 어디에 가든 바꿀 수 있는 천진표행(天津票行) 발행의 전표 두 장.
백무엽이 은자 천백 냥을 어디에서 구했는지 꽤나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두 눈, 암자 안을 바라보는 두 눈은 떨리고 있었다.
'아아, 저 눈은 나를 쏘아보고 있다. 나의 피 묻은 손을 저주하고 있다.'
백무엽은 암자 안의 청동고불(靑銅古佛) 하나를 보고 있었다.
천맹사태는 눈이 멀었는데에도 늘 부처상 앞에 염원 불공을 드린다.
백무엽의 흰 손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나와는 상관도 없는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인문(忍門)이 나를 구해 준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자객(刺客)이 되고야 말았다.'
자객이라니?
무유서생 백무엽이 자객이란 말인가?
"누구신지 모르나, 극락왕생하기를……!"
천맹사태는 합장(合掌)을 한다.
방금 전 누군가 그녀에게 귓속말로 은자 백 냥을 족적으로 남기고 간다는 말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손아귀에는 전표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천맹사태는 손가락의 촉감으로 종이가 바로 전표라는 것을 아는 듯했다.
"이것이 바로… 피(血)로 얻은 은자전표라 하더라도, 부처님 앞에 바쳐질 때에는 고귀한 예물이 되는 것일 게요. 나무관세음보살……!"
천맹사태는 합장하며 불호성을 외쳤다.
그리고 보니 벌써 이런 일은 백여 회 있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천맹사태는 아마도 상당히 경악했을 것이다.
"백서생(白書生)이 며칠 오시지 않아 바둑판에 먼지가 쌓였소이다. 헛헛……!"
군영각주(群英閣主) 석노야(石老爺).
그는 두 다리가 없는 칠순노인이었다.
말이 각주(閣主)이지, 그의 생활은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걸치고 있는 옷은 누더기에 불과했으며, 매끼니로 먹는 것이라고는 거친 조밥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웃으며 산다.
-어이해 사람들이 노부를 비웃는지 모르겠군. 노부 슬하에는 사십 명의 고아가 있고 그들 모두 노부의 아들딸이거늘, 어이해 노부가 고독하단 말인가?
군영각은 고아들을 위해 세워졌다.
본시 이 곳은 운영이 어려웠는데, 백무엽이 간간이 거금(巨金)을 갖다 주는 통에 운영이 잘 되었다.
물론, 그 일에 대해 아는 사람은 백무엽과 석노야뿐이었다.
하여간 범어산(梵魚山)의 기슭에 자리잡은 군영각이야말로 백무엽에게 미소(微笑)를 안겨 주는 유일한 장소였다.
"오늘은 대국(對局)할 시간이 없습니다!"
백무엽은 차를 들고 있다.
그의 목소리는 청아(淸雅)하고 고아(高雅)했다. 매우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하더라도, 그의 목소리는 상대방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준다.
백무엽은 겉으로 보면 닭 모가지 비틀 힘도 없어 보이는 낙척서생(落拓書生)이다.
눈빛을 보면 담담하고, 손을 보면 연약해 보이기만 하다.
그러나 그에게는 타인이 상상도 하지 못할 두 가지의 비밀이 있었다.
웃음이 별로 없는 백무엽, 그는 차를 쭈욱 들이마신 다음 찻잔을 소리내지 않고 반상에 내려놓았다.
"앞으로는… 여기 올 기회가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
"왜 바쁜 일이라도 생겼소? 노부가 듣기로는 백서생은 무정태공(無情太公)에게 언제고 마음먹은 날, 놀 수 있는 허가를 얻은 것으로 아는데?"
석노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늘 어린 아이들과 함께 사는 노인, 그래서인지 그의 미소는 아이의 미소처럼 신선하기만 했다.
방 안은 단촐하기 그지없다. 일그러진 책상이 하나 있고, 딱딱한 나무의자가 두 개 있을 뿐이다.
백무엽과 석노야는 나무의자 위에 앉아 있었다.
석노야는 두 다리가 없는 노인인지라 그가 앉아 있는 나무의자에는 바퀴가 달려 있었다.
"글쎄요……."
백무엽의 대답은 늘 흐릿했다. 그는 누구와 말을 해도 정확한 대답을 하지 않는다.
그는 지금 가산(假山) 아래쪽을 보고 있었다.
가산 아래에는 하늘을 품고 있는 호수가 하나 있다. 그 호수 역시 천야농원의 열천과 연결된 듯, 겨울인데도 식물이 자라고 있었다.
개구리밥, 바로 부평초(浮萍草)가 거기 떠 있었다.
바람이 약간만 불어도 부평초는 자리를 옮긴다. 부평초란 본시 뿌리를 물 속에 두고 있다. 그러기에 부평초는 바람만 불어도 자리를 옮기는 것이다.
잔잔한 파문이 번지고 있다.
백무엽은 은자 천 냥짜리 전표를 석노야의 주름진 손에 쥐어준 다음, 목례를 하고 의자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가겠습니다. 시간이 나면… 오겠습니다!"
백무엽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신형을 틀었다.
그는 정원을 가로질러 갔고… 어디서 뛰어왔을까? 눈빛이 맑은 아이들이 대거 나타나 백무엽을 포위했다.
"와아아! 무엽대숙(武葉大叔)이다!"
"대숙, 우리 죽마(竹馬)놀이 해요."
"대숙은 어른이다. 우리들과 죽마를 타지는 않으신다. 그보다는… 우리들에게 연(鳶)을 만들어 주실 것이다!"
진청청(陳靑靑).
부모가 불에 타 죽어 고아가 된 소녀 아이.
나이는 열넷이고, 지난 봄부터 가슴이 봉곳해지기 시작한 소녀이다. 그녀는 백무엽의 황삼자락을 잡고 있다.
공야수(公冶修).
콧물을 빨아먹고 있는 어린아이는 백무엽의 손을 힘차게 잡아끈다.
가옥(加玉),
사마규(司馬珪),
왕칠(王七),
구양정(歐陽鼎)…….
아직 세상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고아들이다.
백무엽이 흰 이를 드러내고 웃는 순간은 그런 아이들과 더불어 일각(刻) 동안 즐겁게 지내는 시간뿐일 것이다.
아이들은 백무엽과 더불어 모퉁이를 지나쳐 갔다.
석노야는 연초 생각이 나는지 무릎 위의 가죽 주머니를 푼다.
그는 긴 곰방대를 입에 물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무엽, 자네는 남다른 청년이네. 우수(憂愁)가 자네 운명(運命)에 검은 장막으로 드리워져 있다네!"
석노야는 천천히 부싯돌을 꺼냈다.
"아아, 아마도 그것은 숙명(宿命)이겠지. 아무도 풀어 주지 못할… 그리고 그것이 숙명이 된 이유는 자네가 천하기재로 타인보다 월등한 지혜를 갖고 태어났기 때문일 것이고……."
곧 불이 붙고 매캐한 연기가 피워 올랐다.
* * *
새벽이다. 백무엽은 창(窓)을 통해 허공을 보고 있었다.
두 눈엔 어둔 새벽의 하늘이 그대로 가라앉아 있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지내야 할지 나도 모른다. 아아, 분명한 것은 내가 죽어야 할 때 그들이 나를 구했고… 나는 살인이 죄인 줄 알면서도 그들의 노예가 되어 잔혹한 살검(殺劍)을 휘둘렀다는 것인데… 아아, 이제는 참기 힘들 정도로 고통스럽다. 이런 나날이!"
백무엽은 중얼거리다가 눈가를 찌푸렸다. 새벽 빛 사이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 왔기 때문이다.
"설향(雪香)이……."
길이 휘어지는 곳에서 두 사람이 나타나고 있었다.
"훗훗… 지난밤 너의 나무(裸舞)는 정말 훌륭했다. 훗훗, 너의 젖이야말로 조화옹(造化翁)의 걸작이었다!"
음사한 목소리가 들리며 흑의노인이 하나 나타났다.
그는 몸집이 작은 기녀의 허리를 휘어 감고 있는데, 기녀의 검은 머리카락 위에는 한 송이 두견화(杜鵑花)가 꽂혀 있었다.
"호호호… 만사통(萬事通) 어르신네, 바쁘시더라도 곧 다시 오시어 소녀에게 재미나는 강호 이야기를 해 주십시오!"
여인의 입술은 꽃보다도 붉다.
바로 설향(雪香)이다. 쾌활화림의 기녀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목소리와 가장 탐스러운 몸뚱이를 갖고 있는 기녀.
그녀를 품고 있는 자는 육십 정도로 보였다.
설향을 품고 나타났다는 것만 해도 그의 지위는 상당한 것이다.
설향의 화대(花代)는 엄청나다. 설향의 손을 잡기 위해서는 은자 천 냥(銀子千兩)은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러한 자금을 쓰더라도 설향과 동침할 수는 없다.
거리에 나가면 설향과 잤다고 떠드는 파락호(破落戶)들이 많으나, 모두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설향은 어떠한 경우에도 몸은 팔지 않는다. 그래서 그녀를 찾는 객(客)은 여인의 몸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춤과 노래를 기다리는 사람이 되는 것이고, 거의 모두가 강호계의 거목(巨木)들이다.
그러한 소문은 이천 리 먼 곳까지 퍼져 나갔다.
설향은 화술이 지극히 뛰어난 기녀였다. 그래서 그녀는 강호방파가 타파의 우두머리를 접대할 적에 이용하는 역할을 자주 하게 되었다.
지난밤에도 그러한 일이 있었던 것인가?
설향은 만사통의 품에 안겨 가는데, 그들 뒤쪽에는 거탑(巨塔) 같은 자가 하나 따르고 있었다.
허리춤에 거대한 철도끼를 달고 있는 자, 그는 바로 철부(鐵斧)라고 하는 무사였다.
철부는 금강역사(金剛力士) 같은 완력을 갖고 있다.
하여간 셋은 함께 후정(後庭)으로 나섰고, 만사통은 취한 듯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흐흐… 너를 나의 소실로 삼는다면 강호계 친구들이 나를 부러워할 텐데!"
만사통은 설향을 데리고 떠나지 못하는 것이 못내 서운한 듯, 자꾸 설향의 고운 손을 움켜쥐었다.
설향은 몸을 교묘히 틀어 만사통의 몸에서 빠져 나오며 생긋 웃었다.
"호호… 저를 건드리시면… 호호! 당장 엄청난 소문이 납니다요. 그러니 자중하셔야 합니다."
"자고로 영웅호색(英雄好色)이라 했다!"
"호호… 그래도 만사통 어르신네는 백도계의 노명숙(老名宿)이 아니십니까? 정법오우(正法五友)가 혈화삼(血花衫)인가 마화삼(魔花衫)인가 하는 악마에게 죽은 후부터는 만사통 어르신네를 비롯한 정법 칠십이 장로회(正法七十二長老會)가 백도계의 구파일방(九派一幇)을 통솔한다고 소녀는 알고 있습니다!"
설향이 하는 이야기는 강호인이 아니면 모를 이야기였다.
정법오우(正法五友).
소림사(少林寺) 철목성승(鐵木聖僧),
무당파(武當派) 벽진자(碧眞子),
아미파(峨嵋派) 강룡사태(降龍師太),
무림제일의(武林第一醫) 마의화타(麻衣華陀),
개방십결제자(蓋幇十結弟子) 풍진취개(風塵醉蓋).
이들은 전대(前代)의 백도거성(白道巨星)들이다.
이들은 척마멸사의 기치 아래 뭉쳤고, 백도의 정기를 드높이던 중 마혼십가(魔魂十家)라는 악마의 집단에게 제거되었다.
백도는 그들이 사라진 후 그들을 정법오우라고 숭앙했고, 그들의 복수를 하기 위해 하나의 집단을 만들었다.
정법회(正法會).
당세 백도에서 가장 거대한 집단이다.
구파일방(九派一幇)이 정법회에 예속되어 있고, 칠십이 명의 강호명숙(江湖名宿)들이 정법회의 장로의 위치에 있다.
이들은 마혼십가를 위시한 강호의 악마 세력들을 격파하기 위해 뭉쳤다. 그리고 이들은 그 안에서 하나의 막강한 조직을 만들어 냈다.
정법일천열사(正法一千烈士).
천하 각지에서 모인 백도의혈한(白道義血漢)들의 집단이고, 천하 육대조직(天下六大組織) 중의 하나이다.
특징적인 것은 그 세력의 우두머리가 미모의 여인들이라는 것이다.
수정옥녀(水晶玉女) 단리음(段里音),
벽안아랑(碧眼啞娘) 음야홍(音也紅).
두 사람 중 정법회주인 단리음은 천년제일 재녀(千年第一才女)로 불리고 있고, 황실(皇室)의 화영군주(華影君主)라는 여인과 더불어 천하쌍미(天下雙美)로 불린다.
단리음은 무공이 입신지경(入神之境)인데다가, 지혜가 제갈무후(諸葛武侯)를 능가한다고 했다.
백도는 그녀의 지휘 아래 일로 세력을 신장시키는 중이었다.
만사통(萬事通)은 단리음이 이끄는 정법회의 칠십이 장로 중 한 사람이었다.
"큿큿… 노부, 비록 너같이 어린 여인이 이끄는 세력에 있으나… 큿큿, 여인을 존경하지는 않는다!"
만사통의 손은 꽤나 짓궂었다. 그는 자꾸 설향의 몸을 만지려 했다.
유방을 건드리려 하고, 토실토실 살이 찐 둔부를 매만지려 한다.
"아이, 이러시면 아니 됩니다. 호호……!"
설향은 자꾸 몸을 피하고, 만사통은 휘청이며 자꾸 설향을 껴안으려 한다.
평소 그의 결벽한 성품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의 이러한 행동을 매우 이상하게 여길 것이다.
만사통은 여인을 싫어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런 그가 설향에게 홀딱 빠지고 말았으니…….
"오늘따라 기분이 너무 좋다. 크크, 뱃속의 모든 것을 털어 내고 싶고… 크크, 노명숙이라는 허울을 벗고 젊은이처럼 분방해지고 싶다!"
만사통의 숨결은 점점 뜨거웠다. 그가 설향을 부둥켜안으려 할 때였다.
"노야(老爺), 체통을 지키십시오. 천하의 만사통 어르신네가 하룻밤 사이 술에 만취하시다니… 이 곳의 명물이라는 천일취(千日醉) 때문입니까? 아니라면, 명기 설향의 미색 때문입니까?"
만사통의 손을 잡는 대한(大漢)이 하나 있었다.
억세어 보이는 대한, 그는 만사통을 이 곳 쾌활화림으로 초대한 장본인으로 철부(鐵斧)라고 했다.
그는 신흥 강호파인 철부방(鐵斧幇)의 방주였다.
그는 자신의 세력을 천하에 인정받기 위해 수많은 방파들과 연락을 하는데, 그가 주로 이용하는 곳이 바로 이 곳 쾌활화림이었다.
거대한 철부(鐵斧)를 허리에 찬 철부방주.
그는 만사통의 완맥을 꽈악 거머쥐었다.
그는 한 달이면 다섯 차례 정도 쾌활화림을 찾는 이 곳의 제일고객이었다.
"곧 천병무각(天兵武閣)에서 사자(使者)가 와서 노야를 모시고 갈 것입니다. 정법회의 순찰장로(巡察長老)이신 만사통 어르신네를 천병무각의 연회에 초대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노야가 가지 않으신다면 제가 그들의 노여움을 살 것이니, 어서 가십시오."
그가 크게 말하자, 만사통은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으음, 하긴 그런 일이 있지. 노부는 자네의 환대를 받은 후, 천병무각에 갈 예정이었지. 자네는 철부방도를 위해 천병무각의 보검을 구매하고 싶다며, 노부를 부른 것이지!"
그는 말술(斗酒)을 마셔도 취하지 않는 고수이다. 그런 그가 취하다니,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자네는 부탁을 하며 은자 만 냥(銀子萬兩)짜리 전표를 소매 속에 슬쩍 넣어 주었고, 노부는 그 대가로 자네가 이끄는 철부방과 천병무각의 거래(去來)를 성사시켜 줄 예정이었지. 한데, 왜 이리 머리가 아픈지… 쿨쿨……!"
만사통은 중얼거리다가 결국 잠에 빠져들었다.
내가고수가 술에 취해 자다니… 그것이야말로 이 곳 쾌활화림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거한(巨漢) 철부(鐵斧), 그는 만사통을 등에 업고 설향에게 목례를 한다.
"낭자 덕에 거래는 잘 될 듯하오. 따로 화대(花代)를 두둑이 지불할 것이니, 이후에도 내가 모셔 오는 강호 귀빈들을 잘 접대하기 바라오. 그리고 여기 오시는 분들은 거의 소문나기를 싫어하시니, 왔다는 소문이 나지 않게 해 주기 바라오!"
철부는 그런 말을 한 다음, 훌쩍 몸을 날렸다.
그는 비룡재천(飛龍在天)의 경공을 발휘해 훌쩍 모습을 감췄다.
그의 모습이 탄지지간 사라지자, 설향은 몹시 허망한 표정이 되었다.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그녀는 고개를 휘휘 저으며 걸음을 내딛었다.
비단신에 눈이 밟힌다. 오만한 기녀 설향은 고개를 푹 떨구며 걸어가고 있는데, 하늘에서는 큼직한 눈송이가 떨어져 내렸다.
"몸을 깨끗이 씻자. 천 번이고, 만 번이고……!"
설향은 중얼거리며 걸어갔다. 퍼부어지는 함박눈 속으로…….
그리고 우연히 설향을 보게 된 백무엽의 눈에는 묘한 빛이 떠올랐다.
'나만 번뇌가 있는 것은 아니군. 후훗, 하여간 이 곳은 묘한 곳이다. 색(色)이 황금과 바뀌어지고, 청춘이 주향(酒香)과 더불어 날아가는 곳. 이 곳은 내가 깃들인 인문(忍門)만큼이나 역겨운 곳이다.'
인문(忍門), 백무엽이 인문 사람이란 말인가?
쾌활화림 깊은 곳, 무화과 나무가 울창히 우거진 곳에 벽돌담이 이어져 있다.
담장 밖은 눈으로 뒤덮여 있고 담장 안은 그렇지 않다.
부지런하기 이를 데 없는 제노인이 바로 눈을 모두 치운 탓에 쾌활화림의 뒤뜰에는 눈이 쌓여 있지 않았다.
아침이 될 때, 백무엽의 서재(書齋)에 나 있는 창이 오랜만에 닫혔다.
백무엽은 반듯이 누워 있었다. 그는 상의(上衣)를 벗고 누워 있는데, 그의 가슴에는 아주 기이한 문신(紋身)이 하나 찍혀 있었다.
<화(花)>
현란한 금빛의 꽃 한 송이가 심장 바로 위쪽에 피어 있었다.
백무엽 자신도 가슴에 피어난 그 꽃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언제 그 꽃이 새겨졌는지, 누가 그토록 섬세한 꽃을 수놓았는지 기억 속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것은 아무리 지우려 해도 지우지 못하는 매우 깊은 문신이었다.
백무엽은 반시진 전부터 합장하고 있었다.
'마음을 텅 비워야 한다. 무의식적으로 태청보결(太淸寶訣)과 감리진결(坎籬眞訣)을 외워야 한다.'
백무엽은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으음, 다시… 심마(心魔)가 나를 덮친다. 으음……."
마치 병을 앓는 듯, 그는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아아, 그는 바로 운기행공(運氣行功)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보통 무사들은 좌공(座功)을 한다. 그러나 백무엽은 와공(臥功)을 통해 진기(眞氣)를 단해(丹海)로 모으고 있었다.
한데, 이 순간따라 삼매지경(三昧之境)으로 들어가기가 지극히 힘들었다.
번뇌가 구름같이 일어나 구결에 따라 진기의 운행이 되지 않았다.
구슬땀이 얼굴을 뒤덮었다.
"으으, 으으… 나는 누구란 말인가?"
백무엽의 입매가 추악하게 일그러졌다.
정말 뛰어나게 생긴 용모였다. 용목(龍目)에 검미(劍眉), 주사(朱砂) 입술을 가진 백무엽은 하늘 아래 다시 찾아 보기 힘들 정도로 뛰어난 젊은이였다.
옷을 걸치면 조금 호리호리해 보이나, 옷을 벗으면 그의 앞가슴은 강철벽 마냥 탄력 있게 발달된 자태로 나타난다.
가슴에 금빛 꽃 한 송이!
백무엽이 자신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그것 하나뿐이었다.
삼 년 전이다. 눈이 많이 내리는 날, 백무엽은 대설(大雪) 가운데에서 발견되었다. 전신이 피투성이인 채.
특히 천령개(天靈蓋)에 심각한 외상(外傷)을 입은 채 그는 당시 그 근처를 지나던 인문제일좌(忍門第一座)에게 발견되었다.
당시만 해도 백무엽은 거의 백치(白痴)였었다. 그는 정말 악독한 수법에 머리를 다치고 만 것이다.
그 수법은 철혈세가(鐵血世家)의 철마쇄심수(鐵魔鎖心手)라는 것이었다.
펄펄 날리는 눈.
하늘에도 눈, 땅에도 눈, 보이는 것은 모두 눈이었다.
-안 돼! 나는 아니야, 나는 절대 아니야!
연(鳶) 하나가 하늘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어디론지 마음대로 날아가고 싶은데, 긴 줄이 묶여 있어 마음대로 날아오르지를 못하고 빙글빙글 돌다가 떨어지기 시작한다.
하늘과 땅과 바람과 숲과… 모든 것이 빙글빙글 돈다.
"으으으, 나는 누구란 말이냐!"
백무엽은 버럭 소리치며 눈을 번쩍 떴다.
칙칙한 색을 한 방 천장이 흐릿하게 보였다.
'아아, 또다시 악몽을 꾸었다. 운기행공을 해야만 하는데, 나도 모르게 이상한 악몽 속으로 들어갔다.'
백무엽은 악몽을 꾼 것이다. 운기행공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은 내가고수에게 있어 슬픈 일이었다.
운기행공이 되지 않으면 무공이 감퇴된다. 그런데 백무엽에게는 그것도 통하지 않는 것이었다.
백무엽은 특이한 체질을 갖고 있었다. 도검(刀劍)에 맞아 상처가 나도 곧 아물고, 막대한 진기소모를 해도 원상으로 회복할 수 있는 놀라운 체질. 그것은 가슴의 꽃송이와 더불어 백무엽의 비밀이 되어 있었다.
'훗훗… 나를 구한 조건으로 나를 살수로 부려먹고 있는 인문에서도 나의 정체에 대해 궁금히 여긴다.'
백무엽은 갑자기 실소를 흘렸다.
'인문십좌(忍門十座) 중 인문에 대해 알고 있지 못하는 사람은 나 하나이다. 다른 구좌(九座)는 내가 마혼십가(魔魂十家)의 밀정일지 모른다며, 내가 인문에 든 지 삼 년이 되었는데에도 내게 인문의 진면목을 일러 주지 않았다.'
백무엽은 인문 사람이었다.
이 년 전부터 갑자기 이름을 얻기 시작한 인문제십좌(忍門第十座) 무화령주(無花令主).
인문 사상 가장 강하고, 가장 날카로운 검으로 인식되고 있는 자, 단 한 번도 살행에 실수를 경험하지 않은 자.
그가 바로 쾌활화림의 백무엽이었다.
'나의 근골(筋骨)은 나의 사문(師門)이나 나의 가문(家門), 다시 말해 나의 과거(過去)가 주었다. 그리고… 나의 무공은 인문이 주었다.'
백무엽은 손으로 얼굴을 매만졌다.
"나는… 많은 사람이 있는 곳에 가서 차를 마시거나 술을 마셨다. 만에 하나, 과거의 나를 아는 사람이 나를 발견할 수 있도록!"
백무엽의 얼굴은 심하게 찌푸려졌다.
"그러나… 아무도 나를 발견하지 못했다. 사람의 자식이 아니라 허공에서 태어난 사람인 듯, 뿌리가 없이 떠도는 부평초인 듯, 과거의 나를 아는 사람은 단 하나도 없었다.!"
백무엽은 고개를 휘젓다가 손을 내저었다.
'목이 마르다.'
그는 서탁 위의 물 주전자를 쥐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은 여인의 손처럼 섬세했다. 그는 물 주전자를 쥐다가 갑자기 눈에서 살망을 쏟아냈다.
슷-!
창 밖에서 가는 파공성(破空聲)이 들리지 않는가?
'누군가 지붕을 스치고 지나가고 있다.'
백무엽은 귀를 쫑긋 세우며 눈을 반개했다.
바람이 흐르듯, 가는 소리는 점점 흐려졌다.
그 소리는 쾌활화림의 회랑(回廊) 쪽에서부터 시작되어 무화림 너머로 사라져 갔다.
일순, 백무엽의 눈빛이 섬광처럼 타올랐다.
"설마, 나를……?"
그는 중얼거리며 창 쪽으로 다가갔다.
끼이- 익-!
창문이 작은 소리를 내며 열리고, 백무엽의 눈길은 무화과 나무숲 쪽으로 향해졌다.
"있다. 이번에는 홍건(紅巾)이 아니라 청건(靑巾)이다! 매우 급한 청부(請負)임에 틀림없다. 청건을 내게 전하는 것으로 보아!"
백무엽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무화과 나뭇가지에 푸른 사건이 걸려 있었다. 그것은 필경 방금 전 파공성을 낸 사람에 의해 나뭇가지에 걸리게 되었을 것이다.
일순, 백무엽은 손을 휘저었고 무화과 나뭇가지는 뚝 잘려지며 청건은 가지와 함께 창 안으로 날아들었다.
바로 우회금룡수(迂廻擒龍手) 절기!
그것은 백도의 실전절예인데, 백무엽의 손에 의해 간단히 재현된 것이다.
인문은 그에게 천 종 절기(千鍾絶技)를 전했다.
그 중 오백은 정파절기, 오백은 사파절기였는데… 하나같이 가공무쌍한 강호의 최고절기들이었다.
인문은 최근 들어서도 열흘에 한 번씩 그에게 절기를 전했다.
백무엽은 무엇이든 받아들이는 대해(大海)가 되어 인문이 전하는 절기들을 아낌없이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있었다.
우회금룡수로 잘려진 나뭇가지는 바람에 의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가지가 베어진 부위가 둔탁하지 않고 아주 매끄럽다는 점이다.
마치 보검(寶劍)으로 베어 내기라도 한 듯이.
쿵-!
창문이 닫힐 때였다.
"무화령(無花令), 그의 무공은 너무도 무섭게 뻗어 나간다. 두려울 정도로 빠르게! 아아, 그의 무공은 지금만 해도 인문에서 세 번째이다. 아마도 반 년만 지나면 인문의 누구도 그를 꺾지 못할 것이고, 삼 년만 지나면 천하의 누구도 그를 꺾지 못할 것이다."
숲 안에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허름한 옷을 걸친 노인 하나가 비를 하나 들고 서재의 창을 보며 중얼거리는 것이다.
서재의 서탁 위, 푸른 사건은 활짝 펴졌고 그 위 한 잔의 독한 죽엽청(竹葉淸)이 부어지고 있었다.
술이 부어지며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흐른다.
"술이 천에 배어 들면, 글씨가 나타난다."
백무엽은 주호를 들고 마른침을 삼켰다.
보라! 서탁 위에서 김이 피어 오르는 것을.
무화문(無花紋)이 가득한 푸른 사건에서 김이 피어 오르며, 글씨가 나타났다.
<오늘 미시 말(未時末), 한 사람을 죽여라!
그의 이름은 만사통(萬事通)!
그는 사인교(四人轎)를 타고 철목교(鐵木橋)를 건널 것이다. 그는 반취(半醉) 상태이니, 아주 손쉽게 해치울 수 있다.
이후, 또 한 사람을 죽여라!
그의 이름은 천병무제(天兵武帝)!
살아 나오지 못하게 된다면 이빨 사이에 끼고 있는 독약(毒藥)을 깨물어 먹고 자결하거나, 지니고 있는 축융뢰(祝融雷)를 터뜨려 죽거라!
제일좌(第一座)>
아직 먹물도 마르지 않은 글이 나타났다.
사건 속에 보이지 않는 글을 적은 것은 인문이 갖고 있는 십여 가지 비밀 연락법 가운데 한 가지였다.
"철목교! 으음, 천진부에서 사람을 죽이기는 이번이 처음이로군. 훗훗, 인검(忍劍)을 쓰지 않고 육장(肉掌)으로 처리하는 것도!"
백무엽은 묘한 웃음을 흘리며 사건을 손에 쥐었다.
순간, 그의 손이 홍옥(紅玉)처럼 시뻘개지며 삼매진화(三昧眞火)가 일어났다.
사건은 찰나적으로 불꽃에 휘감기다가 하얀 재로 화했다.
재는 화병 속으로 털려졌고, 백무엽의 손은 다시 희어졌다.
"오늘은 휴가를 얻어야겠군. 이 일은 적어도 이틀은 걸릴 일이니까!"
* * *
꽈르르르- 릉- 콰앙-!
우레치는 소리가 요란하다.
하늘이 무너지듯 쉬지 않고 울려 대는 뇌성, 그것은 뇌(雷)가 아니라 강(江)이 토해 내는 소리였다.
철목하(鐵木河)는 천진부 외곽을 가로지르며 흐른다.
무서운 기세로 흐르는 천진부의 격랑(激浪), 그 위로 반달 같은 다리 하나가 걸려 있다.
철목교(鐵木橋).
사백 년 전 세워졌다는 석교(石橋)이다. 팔두마차(八頭馬車) 두 대가 나란히 지나간다 하더라도 다리는 흔들리지 않는다.
콰르르- 릉- !
철목하의 물이 유난히도 사납게 흐른다.
미시(未時)가 다 지나갈 때, 길이 휘어진 곳에서부터 이십여 기의 건마가 나타났다.
두우두두- 두두-!
운진(雲塵)을 일으키며 치달리는 천리마(千里馬)들.
한 마리 한 마리 모두 건장한 체격을 지니고 있고, 호화로운 안장으로 등판을 뒤덮고 있었다.
행렬의 맨 앞에는 번(幡)을 든 무사가 하나 있고, 좌우에는 쌍검(雙劍)을 어깨에 걸친 소년 검사들이 말을 몰고 있다.
<천병무각(天兵武閣)>
깃발 위에는 그러한 글이 적혀 있다.
천병무각은 운룡산(雲龍山)이라는 곳에 서 있는 강호대파(江湖大派)로 정파 중에서도 손꼽히는 방파였다.
그 곳은 보검(寶劍)을 연검(鍊劍)하는 비밀을 알고 있는 탓에, 대대로 천하 방파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어 왔다.
천병무각에서 나온 장검을 지니지 못하면 일류검사로 행세할 수 없을 정도였다.
두우- 두두- 두두-!
운진을 말아 올리며 철목교 쪽으로 들이닥치는 기마대.
이들은 천병무각의 외순찰당(外巡察堂) 소속 사자대(使者隊)였다.
얼마 후면 천병무각주의 회갑연(回甲宴)이 있다. 천병무각은 자신의 무명을 널리 알릴 요량으로 삼산오악(三山五嶽)의 고수들을 대거 초빙했다.
또한 천 명의 사자를 보내 강호의 명숙들을 자신의 거처로 모셔 오는 중이었다.
보라! 기마대 한가운데 둥둥 떠 가는 사인교(四人橋)를.
네 명의 거한이 사인교 하나를 떠메고 가는 중이었다.
하나같이 거웅(巨熊) 같은 튼튼한 체격을 지니고 있는데, 모두 비웃는 듯한 표정을 지은 채 운신술을 쓰고 있었다.
'강호고수라더니… 훗훗, 술에 취해 가마를 타고 가는 처지가 되다니…….'
'하여간 고수들이 부럽다. 제기랄, 우리는 언제나 가마를 타고 타인의 회갑연에 참가하러 가는 처지가 될 것인가?'
'만사통, 머릿속에 만 가지 소식을 담고 있다는 자. 훗훗, 그 자가 지난밤 어디서 마셨는지 모를 한 잔 술에 골아 떨어져서 두통을 느끼다니……!'
네 명의 거한은 천병정객(天兵丁客)이라 불리는, 천병무각 문하제자들 중 외공(外功)에 강한 사람들이었다.
외공에 단련된 이들의 피부는 도끼날이 떨어져도 잘려지지 않을 정도로 질기고 강했다.
천병정객들은 말과 같은 속도로 몸을 날렸다.
콰르르- 콰아-!
철목하가 흐르는 소리가 유난히 세차게 들려 왔다.
사인교는 다리 앞에 이르렀고, 기마대는 얼어붙은 교각을 들썩거리며 일사불란하게 치달려 나갔다.
얼음조각과 먼지 바람이 한데 섞여 휘몰아쳐 오른다.
슷-!
돌연, 다리 아래에서 흑영(黑影) 하나가 날아올랐다.
운진에 몸을 감춰 가며 사인교 쪽으로 달라붙는 작은 그림자.
그것은 거의 일순간에 사인교의 바닥으로 달라붙었고, 곧 사인교 속으로 사라졌다.
말과 사람과 구름이 한 덩어리가 되어 철목교가 흔들리고 있을 때, 사인교 바닥에 구멍이 뚫렸다.
그리고 또 하나의 그림자 하나가 사인교 바닥에 난 구멍을 통해 다리 아래쪽으로 빠르게 내던져졌다.
"흑……!"
철목하의 물은 큰 소리를 내며 흐른다. 물소 열 마리가 빠진다 하더라도 물소리는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모든 것은 운진(雲塵) 가운데 일어났다.
사실, 다른 곳은 빙판인데 이 곳만 황토(黃土)로 뒤덮인 것이 이상했다.
지난 아침, 누군가 다리 위에 황토를 뿌린 듯이.
한 시진 후, 기마대는 합포현(合浦縣)에 이르렀다.
그리고 사인교를 떠메고 가던 네 명의 천병정객은 거기 이르러서야 고역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다.
"헛헛… 미안들 하네. 헛헛, 늙다 보니 가끔 추태를 부리는 듯하구먼!"
사인교에서부터 주렴(珠簾)을 걷으며 나타나는 화복노인이 하나 있었다.
아래턱에 몇 가닥 염소수염을 기른 노인.
"이제 멀쩡하다네. 헛헛, 늙으면 자네들도 노부의 심정과 처지를 자연히 알 것이니… 구태여 변명하지는 않겠네."
모발을 동백유(東柏油)로 단정히 빗어 넘긴 깔끔한 노인으로, 무기는 허리에 차고 있는 한 자루 연검(軟劍)이었다.
바로 만사통(萬事通). 그가 웃는 얼굴로 사인교에서 내리는 것이다.
"이제부터는 말을 타고 가겠네. 헛헛, 천병무각 안으로 들어가는 마당에 가마를 타고 간다면 사람들이 비웃을 테니까!"
만사통은 조금 간사하게 웃었다.
사람들은 그의 말을 들으며 허리를 넙죽넙죽 숙였다.
만사통은 정법회(正法會)의 순찰장로(巡察長老) 지위에 있다.
그것이 무공에 의해 얻은 자리가 아니라 감언이설로 얻은 자리라 하더라도, 백도계의 젊은이들은 그를 무시할 수가 없다.
현재 정법회를 무시하다가는 마혼십가 무리로 오인받고 주살되기 쉽상이다.
그러니 누가 정법회 장로들을 비웃을 수 있겠는가?
"헛헛… 각주(閣主)가 연회가 벌어짐에 앞서 노부를 보고 싶어하니… 헛헛, 어서 가세. 사실, 각주와 노부는 죽마고우(竹馬故友)지! 회갑연이 시작되면 사사로운 밀담을 나눌 수 없으니, 미리 가서 즐거운 이야기를 나눠야 하지 않겠는가?"
만사통의 눈빛이 아주 강했다. 본래의 만사통보다도 훨씬!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그의 눈빛이 달라졌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왜냐하면 여기 있는 사람들은 기껏해야 지난 아침에야 처음으로 만사통을 봤으니까!
인자무언(刃者無言)
일월 십사일 새벽.
운룡산(雲龍山) 하늘이 오랜만에 맑아졌다. 며칠 내내 내리던 눈이 지난밤에 말끔히 걷혔기 때문이다.
두 눈(雙眼), 그 눈은 회갑연(回甲宴) 준비에 부산한 천병무각(天兵武閣)의 연무장(練武場)을 예의 주시한다.
만사통(萬事通)은 천병무각주의 회갑연에 초빙된 강호인사 중 하나였다.
그는 곧 천병무제 관천악을 정법회에 초빙할 예정이라 했다.
아주 묘한 눈길을 한 채, 만사통은 무사들이 부산히 오가는 것을 쓸어 보고 있었다.
'천병정전(天兵正殿)으로 가는 길은 세 곳, 그리고 그 길은 모두 기관에 의해 차단되어 있다. 기관을 넘는다 하더라도… 검진(劍陣)을 뚫어야만 한다.'
만사통은 접빈관 회랑 위에 서 있었다. 언뜻 보면 겨울의 설경(雪景)을 완상하는 듯한 모습이다.
'검진은 항상 완벽한 형태로 구축되어 있다. 그러나 완벽함 가운데에 허점이 숨어 있다는 것이야말로 고금불변의 진리이다.'
만사통은 자연스러운 눈길로 동서남북(東西南北)을 살폈다.
매의 눈이라고나 할까?
눈빛이 예리해질 때, 무엇인가가 그의 눈빛을 아련하게 만들었다.
눈, 눈발이 희끗희끗 내비치기 시작하지 않는가?
'눈(雪), 그렇다. 눈이 열쇠다.'
만사통은 입가에 묘한 미소를 지었다.
수북이 쌓인 눈이 지금 무사들에 의해 치워지고 있었다.
무사들은 연무장을 뒤덮은 눈을 담 쪽으로 치워 나가는 중이었다.
각주의 회갑연은 회갑 축하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바로 정법회(正法會)와 천병무각이 밀접하게 연관을 짓게 된다는 뜻이라고 할 수 있다.
'비조잠설어기신(飛鳥潛雪馭氣身)이라면 한숨 설풍(雪風) 가운데, 중인의 이목을 속이고 들어갈 수가 있다. 물론 왜 들어가서 죽여야 하는지는 나도 잘 모르는 일이나, 나를 구한 그들을 위해 다시 한 번 야수(野獸)가 되자.'
그는 무엇인가 마음을 굳힌 듯했다.
아주 천천히, 그는 손을 머리 위쪽으로 올려 두툼한 털모자 하나를 천천히 매만졌다.
휘이이- 잉-!
바람이 부는가 싶더니, 두툼한 털모자가 그의 머리 위에서 굴러떨어져 연무장 한가운데 쪽으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털모자 쪽으로 향해졌다.
"저기 무엇이……?"
"어엇? 털모자가 아닌가?"
"하하하… 모자가 춤을 추며 굴러가는구나. 하하……!"
눈을 치우고, 보초를 서고, 주위를 살피던 사람들이 일제히 웃었다.
웃음이란 전염성이 있는 것인가?
"하하하… 고것 참 재미나는데?"
"수레바퀴가 굴러가는 듯하지 않는가?"
"껄껄껄… 바람(風)의 장난이 심하군!"
사람들은 웃으며 털모자가 숲 쪽으로 떼굴떼굴 굴러가는 것을 바라봤다.
장검(長劍)을 쥔 손이 약간 느슨해졌고, 창을 움켜쥔 손도 조금 느슨해졌다.
주위를 살피던 눈빛도 예기(銳氣)를 잃는데, 귀빈들이 모인 전각의 허공으로 누런 그림자가 솟아오르는 것은 그러한 소란 가운데 감추어졌다.
가히 섬(閃), 누런 빛은 찰나적으로 눈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회랑(回廊) 위는 텅 비어 있었다. 거기 서 있던 사람은 어디로 갔는지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다.
"향차(香茶)를 갖고 왔는데, 대체 어디 가셨지?"
나이 어린 미기 하나가 옥반을 들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춘월(春月), 귀빈에게 딸려지는 몸종 중 하나이다.
춘월은 고개를 갸웃거렸고, 모자는 퍼붓는 눈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다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그것도 아주 알이 굵은 함박눈이 펑펑 쏟아져 내려, 천병무각의 모든 전각 지붕을 희게 뒤덮기 시작했다.
대전(大殿).
천병무제(天兵武帝) 관천악(關天岳)은 자신이 만든 검(劍)을 바라보고 있었다.
길이가 삼 척(尺), 아직 이름도 붙여지지 않은 검이다.
검신은 눈빛으로 희었는데, 검신에서는 이상한 기(氣)가 흘러 나오고 있었다.
천병무제는 검신을 자세히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를 일이다. 아아, 이 검에서 어이해 사기(死氣)가 흐를까? 검은 검 주인의 운명을 검기(劍氣)로 흘리는데… 으음, 설마 노부에게 악겁(惡劫)이라도?
천병무제는 명장(名匠)의 대명사였다. 그는 마혼십가에게 제거된 전대가인 마병지존(魔兵至尊) 이후의 명장이라고 했다.
그는 수 년 간 강호계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검만 만들었다.
무려 백팔 검(百八劍)을 그는 자신의 손으로 직접 만들었다.
"이 검은 소총사(少總師)의 출관(出關)을 기리기 위해 바쳐질 마검이다. 장차 이 검은 많은 사람을 죽이게 될 것이다.!"
천병무제의 미간에 그늘이 만들어졌다.
'어쩔 수 없다. 나의 문파를 지키기 위해서는… 그들은 너무 강하다. 굴복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천병무제는 검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돌바닥에는 그가 막 내려놓은 검과 똑같은 검이 백일곱 자루나 놓여 있었다.
<마화위(魔花衛)>
검자루에는 그러한 글이 정교한 솜씨로 양각(陽刻)되어 있다.
"이 검들은 십가(十家)에 기증된다. 그리고 이번 공적으로 인해, 나의 가문은 이후 십 년 간 평화로울 것이다. 후우, 이 마검들은 암중에 마화삼 휘하(魔花衫麾下)에 들기로 피로 맹세한 백팔 명의 고수에게 전해지겠지."
천병무제는 손을 머리 뒤쪽으로 갖고 갔다.
작은 비녀(釵) 하나가 만져진다. 그는 습관적으로 그것을 만지다가 고개를 쳐들었다.
'백도는 썩었다. 천하의 백도를 지배하는 정법회지만, 정작 정법회는 마혼십가에 장악되어 있지 않은가?'
천병무제의 얼굴에 짙은 고뇌의 그늘이 번진다.
"마혼십가는 너무도 영악하다. 노부의 정법회 입회를 축하하는 연회를 이용해서 만사통으로 하여금 검을 접수케 하니 말이다."
만사통이라니?
마혼십가를 치기 위해 모인 정법회의 칠십이 장로 중 하나인 만사통이 마혼십가의 밀정이란 말인가?
천병무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만사통, 그도 필경 노부와 같을 것이다. 그 역시 마혼십가의 외단(外壇)에 조정되고 있으리라. 허수아비들! 만사통이나 노부나 허수아비들이다. 비참한 일이나, 우리에게는 힘이 없다. 죽을 용기조차……."
그가 중얼거릴 때였다.
스으으……!
돌연, 눈앞으로 뿌연 안개가 피어 오르더니 불쑥 그의 눈앞으로 한 사람이 떨어져 내렸다.
"죽을 용기는… 내가 주겠소!"
아무런 소리도 없이 흘쩍 떨어져 내리는 한 사람.
그는 의당 접객소에 머물러 있어야 할 사람이었다.
"아… 아니? 만사통 그대가 어찌 천장 위에서……?"
바로 만사통(萬事通).
그는 유령허무환(幽靈虛無幻)이라는 신법으로 천장을 뚫고 훌쩍 떨어져 내리며 손을 내저었다.
"미안하오! 나도 허수아비일 뿐이오!"
차고 흰 손, 그 손은 정확히 천병무제의 미간(眉間)에 닿았다.
"정말 미안하오!"
스슷-!
흰 손이 천병무제의 얼굴을 휘감더니, 둔팍한 소리가 이어졌다.
천병무제의 머리가 정확히 수직으로 갈라졌다.
뿌연 뇌수가 폭포수처럼 흘러내리기 시작하는데, 천병무제의 표정에는 아픔보다는 경악이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천병무제가 죽기 직전 토한 말이 그가 죽은 후에야 입술 밖으로 흘러 나왔다.
"아… 아니군……?"
모든 일은 거의 찰나적으로 벌어졌다. 그는 고통을 느낄 짬도 없이 죽은 것이다.
만사통, 그는 진짜가 아니라 가짜였다.
진짜 만사통은 철목하에서 죽었고, 지금 여기 있는 사람은 백무엽이었다.
천병무제의 회갑연은 취소되었다.
놀랍게도 그는 삶에 회의를 느끼고 분신자살을 하고 말았다.
그의 거처는 화마(火魔)에 휘감겨 거의 일 각 안에 재로 무너져 버렸다.
불이 꺼진 후, 사람들이 발견한 것은 타다 남은 해골과 동강 동강 잘라진 백팔 자루의 마검 잔해라고 했다.
그러나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다.
누군가 다녀갔다는 사실을……!
-인문(忍門)이 대살겁(大殺劫)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들의 암살은 시일이 지날수록 지독해진다. 특히, 그들 중 하나는 어떤 곳이라도 들키지 않고 들어가 살인하는 재간을 지니고 있다.
인문제십좌(忍門第十座), 그는 아무도 막지 못할 자이다.
백도계의 노명숙(老名宿)들이 이번 겨울 들어 벌써 일곱이나 쓰러졌다.
천병무제(天兵武帝) 관천악(關天岳),
종산일로(鐘山一老) 사공후(司空侯),
비천신협(飛天神俠) 일지매(一枝梅) 감소우(甘少羽),
통비대협(通臂大俠) 하후성(夏候星),
화하일성(淮河一聖) 금철검(金鐵劍),
유성비협(流星飛俠) 배곡(裵曲).
이들 일곱 중 다섯은 한 가지 특징을 갖고 있는데, 그것은 모두 정법회(正法會)와 밀접한 관련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정법회주 수정옥녀(水晶玉女) 단리음(段里音) 소저는 일천열사(一千烈士)로 하여금 추적대를 조직케 했으나, 허사였다. 그 놈들은 절대로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곧 인문의 대대적인 암살극이 벌어질 것이다. 놈들을 막지 못한다면 이번 겨울은 피로 물들 수밖에 없다.
-인문의 살수들은 하나같이 악마들이다.
가공할 소문이 꼬리를 물고 퍼져 나갔다.
인문(忍門)! 그들은 대체 어떠한 조직이란 말인가?
철실(鐵室)이다.
안에서만 열 수 있는 하나의 문마저 닫혀 있는 지하의 철실에는 빛조차 흐르지 않았다.
완전한 어둠, 죽음의 탁한 공기가 가득 차 있는 장방형의 철실!
언제부터인가 아홉 사람이 원형으로 모여 있었다.
아홉 모두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데, 특징적인 것은 하나같이 꽃을 들고 있다는 점이다.
천일홍(千日紅),
갈대(葦花),
설중매(雪中梅),
연자란(燕子蘭),
황국화(黃菊花),
부평초(浮萍草),
혈잠화(血簪花),
두견화(杜鵑花),
묵죽(墨竹).
아홉 사람은 오랫동안 그들 가운데 있는 원탁(圓卓)을 바라봤다.
원탁은 매끄러운 대리석(大理石)으로 되어 있었다.
그 위, 큰 글씨 한 자가 쓰여 있었다.
<인(忍)>
인자가 쓰인 원탁, 그리고 아홉 사람.
침묵(沈默).
답답함 침묵은 나직한 목소리로 인해 깨어졌다.
"우리들이 알고 있는 마혼첩(魔魂諜)들은 제십좌(第十座)의 대활약으로 인해 거의 제거(除去)되었소! 암중에 마혼십가와 밀약을 맺었던 정파인들은 거의 다 처단되었소. 물론 마혼십가의 본체는 여전하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마혼첩들은 수없이 많소. 우리가 얻은 것 역시, 거의 없소. 타초경사(打草驚蛇)한 것밖에는."
그리고 또 한 목소리가 들렸다.
"마화삼(魔花衫)이라는 자는 근 사 년 동안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소. 혈화삼(血花衫) 역시 마찬가지요. 그리고 옥화삼(玉花衫)에 대해서는 밝혀진 것조차 없소!"
"놈들은… 대반격, 복수를 할 것이오. 물론 여기 모인 사람은 그들의 반격을 짐작하고 있으나, 짐작만 한다고 막을 수 있는 일은 아니오. 놈들은 천 년(年)에 걸쳐 세력을 쌓아 왔고, 그 힘은 가공할 수준이오. 특히 혈화삼의 친위마군(親衛魔軍) 일백팔 마왕(一百八魔王)은 하나같이 전설적인 악마들이오. 그 자들이 나서기 전에 우리의 뜻을 이루어야만 하오!"
차디찬 목소리들이다. 감정과 정서가 없는 목소리들, 화향(花香)과는 어울리지 않는 목소리였다.
그러나 철실에는 꽃 내음이 가득했다.
"본시 우리는 이십 년 대계를 세웠소. 그런데 제십좌(第十座)를 얻음으로 인해 우리의 힘은 놀라운 수준이 되었소!"
"그렇소!"
"그렇소. 지금은 제십좌에 대한 일을 처리해야 할 때요."
남자 목소리, 그리고 여자 목소리도 들렸다.
어둠에 빛나는 눈동자들이다. 아니, 무서운 침묵으로 인해 빛도 나지 않는 탁한 눈빛들이었다.
스며 있는 것은 한(恨)뿐! 그것은 바로 어둠의 빛깔이었다.
"제십좌를 완전한 우리 편으로 하든가, 더 이상 우리에 대해 알기 전에 제거하든가… 택일해야 할 때요!"
누군가 말하자, 다른 사람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놈은 천 일 간 타인이 만 일 간 할 일을 해치웠소. 가히 일당십(一當十)의 초살수(超殺手)요."
"더욱이… 최근의 살행(殺行)은 완전무결했소. 우리 중 다른 누구라도 그렇게 하지 못할 정도로!"
"놈은 천 일 전, 다 죽게 된 상태에서 발견되었소. 무공은 모두 사라졌고 뇌호혈(腦戶穴)을 다쳐 기억마저 없는 상태였소!"
"놈은 그 후 백 일 간 와병(臥病)하며 내공을 배웠고, 그 후 백 일 간 초식(招式)을 배웠소. 놀라운 것은 놈이 하나를 보면 백을 알고, 내공의 증가속도보다 빨리 초식변화가 는다는 점이오."
"놈은 피(血)를 혐오하고 죽음을 싫어하오! 하지만 놈은 분명 천살성(天煞星)이고, 잠재적으로 마성(魔性)을 지니고 있소. 아무래도 놈이 두렵소. 놈이 우리들 속으로 점점 끼여드는 것이 무섭소!"
누군가 침중히 말한다.
"으음, 아무도 막지 못할 놈이오. 그 놈은!"
"놈이 칼자루를 고쳐 쥐는 날이면… 우리도 놈에게 당하오!"
"아아, 놈은 한 마리 용(龍)이오. 왜 여의주(如意珠)을 잃었는지는 모르나, 놈은 분명 용이오. 마룡(魔龍)이든, 천룡(天龍)이든!"
탄식 소리가 흐른다.
인문제십좌(忍門第十座) 무화령(無花令)!
그는 이 곳에서도 탄식을 자아내게 하는 것이다.
차가운 눈빛들, 그러나 그 중에는 뜨거운 눈빛도 있었다.
"비록 놈은 과거가 밝혀지지 않아 미심쩍으나, 나는 놈을 믿소. 놈은 분명 배반하지 않을 진짜 무사요."
"노부도 마찬가지요. 그는 믿을 수 있는 자요. 이제는 우리가 그에게 정체를 밝힐 때요."
"아니오. 너무 모르오. 그의 무공과 인내심은 아나, 아직은 아니 되오. 아직은……!"
중인의 목소리가 고조될 때였다.
짝-!
한 차례 박수 소리가 울렸고, 이내 철실 내부는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두견화를 들고 있는 흰 손의 주인이 손뼉을 친 것이다.
두견화로 자신을 나타내는 사람, 그는 바로 신비에 가려진 인문의 주인이었다.
아주 차고 아름다운 두 눈이 중인을 세심히 바라본다.
차고 맑은 눈이 깜박거려지며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그의 무공(武功)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 믿습니다. 하지만… 그의 과거에 대해서 믿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눈빛만큼이나 차고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제부터는 진짜로 그가 꼬옥 필요하고, 이제는 그가 내막을 알고 보다 적극적으로 싸워야만 한다는 사실입니다!"
"으음!"
"그렇소."
차고 맑은 눈을 가진 사람의 말은 짬도 없이 이어져 나갔다.
"그가 믿을 만한 사람인가, 아닌가는 꼬옥 밝혀야 합니다. 천하대업(天下大業)을 위해서!"
"……!"
"으음, 그럼 그에게 장차 그 일을?"
중인은 조금 흥분하기 시작한다.
손(手)! 흰 손이 천천히 봉서(封書) 한 장을 꺼내고 있었다.
"이것은 우리의 희망입니다. 여기 적힌 것을 일순간에 붕괴시킬 수 있다면, 우리는… 필승(必勝)하게 됩니다.!"
손은 봉서를 천천히 펼쳤다.
봉서 안은 깨알 같은 글로 가득 차 있었다.
그 글은 일상적인 글이 아니었다. 지렁이가 기어가는 듯, 새가 날아가는 듯, 아주 기괴한 암호문이었다.
"이 글은 마혼문자(魔魂文字), 마혼세가 무리들만이 쓰는 글자입니다. 제가 아는 대로 그 뜻을 풀이하면 이러합니다!"
손은 봉서에서 떼어졌다.
일순, 손가락이 비파현(琵琶絃) 소리를 내더니 푸른 기류가 일어났다.
녹옥음살지강(綠玉陰煞指剛)!
절전된 것으로 알려진 천지문(天地門)의 절기이다.
츠읏- 츳-!
섬뜩한 파공성이 나더니, 둔팍한 소리와 함께 원탁 위에 글이 파여지기 시작했다.
파- 팟-!
돌가루가 피어 오르는 가운데, 한 치 깊이의 글씨가 파였다.
<마화삼(魔花衫) 소총사(少總師)의 천일폐관(千日廢關)은 곧 끝난다.
그분은 은거(隱居)하신 혈화삼(血花衫)의 뒤를 이어 전마가(全魔家)를 장악하실 것이며, 절대마가(絶代魔家)와 다른 구대마가(九大魔家) 사이의 알력을 조종하시는 가운데 천년대업(千年大業)을 성사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천하를 장악하시는 데 선봉이 될 것이다.
그분이 출관하시는 날, 사대외단(四大外壇)은 그분의 출관을 기리는 예물을 받쳐야만 한다. 그것은 충성의 표현이 될 것이다.
대리왕부(大理王府)에서는 천 개의 화탄(火彈)을 천 명 미인(美人)과 더불어 바치고, 화정신수궁(花精神手宮)에서는 백팔마도(百八魔刀)와 백팔마검(百八魔劍)을 어떻게든 구해 바쳐야 하며…….>
손의 임자는 글을 거기까지 파 내려간 다음, 지공발출을 거두었다.
내력소모가 꽤 클 텐데, 호흡 소리 하나 거칠어지지 않았다.
"마화삼은 곧 나타날 것이고, 그의 종복 중 하나인 마혼십가의 총호법(總護法)이 이런 글을 제이외단(第二外壇)에 보내는 가운데… 이것이 우리에게 접수된 것이오!"
목소리에는 한 점 흐트러짐도 없었다.
"우리가 칠 경우, 놈들은 숨을 것이오. 다시 말해, 우리는 한날 한시에 놈들을 쳐야 한다는 것이오. 그렇지 않다면 놈들은 비밀외단(秘密外壇)이 모두 발각되었음을 알고 지하로 숨을 것이오!"
"으음……."
"지독한 놈들! 뿌리가 그리 깊다니……!"
"어쩌면 놈들은 이미 구파일방을 다 얻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죽지 않았다. 빠드득-!"
여덟 사람은 주먹을 거머쥐었다.
그리고 흰 손의 임자는 말을 이었다. 느릿느릿, 그러나 조금도 끊어짐이 없는 강한 어조로.
"사대외단이 뿌리뽑힌다면, 마혼십가는 최소한 오 년 간 강호계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할 것입니다!"
눈빛은 지극히 강렬해졌다. 그 눈빛은 잔혹스러운 핏빛이었다.
"이 일에는 제십좌의 활동이 극히 중요합니다. 그래서 본인은 제십좌에게 두 가지를 시험하고 그를 버리거나, 그를 취하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할 것입니다! 그 두 가지는 그의 현재(現在)와 그의 과거(過去)입니다. 시험할 것은……!"
* * *
창 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다.
백무엽은 창을 활짝 열어 둔 채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아주 아름답고 신비했다. 어떤 때에는 호수처럼 맑았고, 어떤 때에는 안개나 아지랑이처럼 흐릿한 눈빛.
백무엽은 그러한 눈길로 눈이 쏟아져 무화과 나무가 눈발에 잠기는 것을 보며 따뜻한 차를 들고 있었다.
나의 집은 맹진에 있고,
대문은 나루터 쪽으로 열려 있다오.
배는 연일 강남에서 오는데,
집에 나의 편지를 전해 줄 수 없겠소?
家住孟津河,
門對孟津口,
常有江南船,
寄書家中否.
그대는 나의 고향에서 왔다 하니,
고향 일을 잘 알겠구려.
오던 날 나의 집 마당 창에,
매화꽃이 피었소이까?
君自故鄕來 應知故鄕事,
來日綺窓前 寒梅著花未.
그는 시(詩)를 속으로 옲조리는 것일까?
아니면 그냥 눈(雪)만 보고 있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는 것일까?
'……!'
그는 아무것도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대설천하(大雪天下).
모든 것이 흰 빛으로 물들어 있듯이, 지금 그의 마음 속 역시 깨끗이 닦여진 거울(鏡) 마냥 한 점의 상념도 갖고 있지 않은 것이다.
위이이- 잉-!
설풍(雪風)이 매섭다. 이런 날 창을 연다는 것은 몸에 좋은 일이 아니다.
백무엽은 홑옷만을 걸친 채 삭풍(朔風) 가운데 스치고 있는데, 그의 볼에는 추위로 인해 생길 듯한 홍조조차 없었다.
하나의 석상(石像)이라 할까?
그는 숨마저 쉬지 않고 있었다.
바람은 더욱 강하게 불며 창틀째 흔들렸다.
눈보라는 미친 춤을 추었고, 감정이 드리워지지 않았던 백무엽의 눈에 기광(奇光)이 떠올랐다.
"여전히…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았다. 아아, 나는 과거(過去)를 모두 잊어 버렸다. 대체 나는 누구란 말인가? 살수(殺手)이기 이전, 나는 누구란 말인가?"
백무엽의 눈에는 우수의 그늘이 떠올랐다. 고독하고 우울하다는 것은 그에게 숙명과 같았다.
적어도 지난 천 일 간은…….
그는 무공을 배우고, 그것을 이용해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죽이는 가운데 천 일을 보냈다.
살행(殺行), 그것은 백무엽에게 있어 정말 쉬운 일이었다.
그는 타인이 갖고 있지 못한 여러 가지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첫째, 부동심(不動心).
그는 백 년 입정(百年入定)한 노승(老僧)만한 정력(定力)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자객의 수법을 시전하는데, 정말 큰 도움을 주는 것이었다.
둘째, 인내심(忍耐心).
그것 역시 자객에게는 필수적인 능력이었다.
셋째, 선천(先天)적인 암기력(暗記力).
그는 어떤 난해한 문장이라도 쉽게 외우는 암기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한 암기력이 없었더라면 인문이 그에게 전해 주는 그 많은 비급을 모두 외우지는 못했을 것이다.
넷째, 금강옥체(金剛玉體).
도검(刀劍)에 베여도 상처가 나지 않고, 칠독(七毒)을 먹어도 장애가 없는 이상한 신체.
백무엽은 검(劍)을 쥐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다. 그러나 그 자신은 늘 농부(農夫)와 어부(漁夫)를 부러워하고 있었다.
"자객 생활은 지겹다. 이러한 일은 본래의 나는 해서는 아니 되는 일일 것이다. 본래의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모르나, 자객과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소림사(少林寺)의 지독?한 연공이 싫어 도망치던 사미승일 수도… 곤륜산(崑崙山)의 도사(道士)일 수도… 훗훗, 희대의 색마(色魔)일 수도……!"
백무엽은 자신에 대해 공상을 하며 묘하게 웃었다. 그의 웃음은 특이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마력(魔力), 그것은 악마의 힘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강한 흡인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가 흰 이를 약간 드러내며 입술 선을 일그리며 웃는 모습을 보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영영 그의 표정을 잊지 못할 것이다.
그가 웃고 있을 때였다.
스읏-!
돌연, 창 밖에서 이십 장 먼 곳을 스치고 지나가는 그림자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거의 일순간, 시야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백무엽은 자객의 이목(耳目)을 십분 발휘해, 그가 담을 넘어 쾌활화림 안으로 들어섰다는 것을 정확히 알 수 있었다.
"대체 어떤 자가 경공으로 담을 넘을까? 이러한 일은 여지껏 한 번도 없었는데!"
백무엽은 눈에서 강한 안광을 쏟아 내다가 눈을 스르르 감았다.
'나로서는… 상관할 일이 아니다. 나는 모르는 척하기만 하면 된다.'
그는 눈을 굳게 감고 석상이 되었다.
타인의 일에 절대 상관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은 바로 인문이 그에게 내린 명령 중의 하나였다.
그가 애써 눈을 감고 있을 때였다.
"으윽, 비적(匪賊)!"
"큭! 손만 휘둘렀는데 몸이 마비되다니……!"
꽤 먼 곳에서 고통에 찬 목소리가 들려 왔다.
무림고수가 쾌활화림 안으로 난입해 와서 두 사람을 잇따라 점혈하는데, 그 소리가 백 장 밖 백무엽의 신경을 건드리는 것이다.
'상관하지 말자, 모든 것을.'
백무엽은 청력마저 차단해 버렸다.
하나의 거석(巨石). 그는 하나의 죽은 사람으로 화하기 시작했다.
이각(刻) 후였다. 창을 통해서 한 사람이 슬며시 날아든 시기는!
"쥐새끼 같은 놈! 네가 누군지 모르나… 크크, 서기(書記) 신분으로 보아 은자가 있는 곳을 알 것이다!"
뭉클거리는 흑무(黑霧)와 함께 무엇인가가 난입해 들어왔다.
쿵-!
열렸던 창문은 닫혔고, 복면괴인 하나는 찰나적으로 방 안으로 들어와 백무엽의 오른쪽 곡지혈(曲池穴)을 쥐고 있었다.
모든 것은 거의 일순간에 벌어졌다.
"누… 누구요? 아프오!"
백무엽은 꽤나 아픈 표정을 지으며, 복면인을 올려다봤다.
아주 침침한 눈빛을 가진 자, 그는 누런 이를 드러내며 백무엽을 쏘아보면서 손아귀에 힘을 가하기 시작했다.
"젖비린내 나는 놈. 팔이 으깨지기 전에 말해라. 무정태공(無情太公)이란 자가 숨어 있는 곳을! 나는 그를 찾아왔다. 하인들이 말하기를 네놈이 그의 서기라고 하니, 놈이 있는 곳을 알지 않겠느냐?"
무정태공은 바로 이 곳의 주인이다. 그는 과거가 불투명한 사람이나, 하여간 천진부의 쌍부 중 하나였다.
'림주를 찾아왔군. 하지만 사람을 잘못 골랐다.'
백무엽은 지금 왼손을 거머쥐고 있었다.
곡지혈을 제압당하면 내공을 쓸 수 없는 법이다.
하지만 백무엽은 벌써 이혈대법(移穴大法)을 써서 혈도를 옮겼는지라, 왼손을 자유롭게 쓸 수 있었다.
'도적, 죽이겠다.'
백무엽은 불끈 살심을 일으키며 손가락을 퉁기려 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인문이 명하지 않는 경우라면, 죽는다 해도 무공을 쓰지 않겠음을 맹세한다!
돌연, 그의 뇌리 속으로 뇌정(雷霆)치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그 목소리는 바로 그 자신의 목소리였다.
'으으, 맹세를 어길 수는 없다. 절대로! 미워하나, 그래도 인문은 나의 사문이 아니냐?'
백무엽은 구부렸던 오른손 중지(中指)를 스르르 펴고 말았다.
"말해라."
"글쎄 말할 것이 별로 없소이다!"
"말해라. 말하지 않는다면 너는 죽는다. 아니, 죽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여길 정도로 지독한 형벌에 처해질 것이다."
"한 말을 반복하지는 않소. 모른다면 모르는 것이오."
창 밖은 눈에 휘감기고 있다. 보이지는 않으나, 눈바람 소리만은 역력했다.
그리고 갑자기 나타난 괴인과 백무엽의 입씨름은 도를 더해 갔다.
"빠드득, 연약하게 생긴 놈이 무림고수를 능멸하려 하는구나. 네놈이 정녕 노부의 비위를 거스린다면 네놈에게 극형을 내리겠다!"
"좋도록 하시오. 하나의 고집마저 버리면 지니고 있는 것이 하나도 없게 되는 낙척서생(落拓書生)일 뿐이니까, 나란 놈은! 그러기에 고집만은 버릴 수가 없는 것이오!"
"오냐, 네놈에게 천하에서 가장 악독한 고문(拷問)을 베풀겠다. 네놈은 고문이 시작되는 순간 살아 있다는 것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글쎄, 고문이 시작되지 않은 지금도 나는 살아 있다는 것을 후회하고 있는 사람이오. 만에 하나, 나를 죽인다면 나는 그대에게 저승에서나마 고마워할 것이오."
백무엽의 입가에 여릿한 미소가 번졌다.
웃다니? 그것도 아주 싱겁고 탈속하게…….
"우라질놈, 육시랄놈! 노부의 비위를 건드리다니… 노부 사제(死帝)의 맛을 정녕 보고 싶단 말이냐?"
복면인이 먼저 노기를 터뜨렸다.
사제(死帝).
그 이름은 강호계에는 알려지지 않은 이름이었다.
하긴 비밀이 많은 곳이 강호이니까.
이름을 날리고 있는 고수보다 더 강한 사람이 초야에 묻혀 있는 곳이 바로 당세의 중원천하(中原天下)이니까!
"다섯 가지 고문이 있다. 그 중 첫째는 착골수혼(錯骨搜魂)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강호의 아류(亞流)들이 즐겨 쓰는 분근착골(分筋錯骨)보다 위력이 세 배 더한 것으로, 경락(經絡)을 썩은 새끼 자르듯 잘라 버린다. 그러면 너는 벌거벗긴 채 개미굴에 떨어져 불개미에게 살점을 뜯기는 고통을 받게 된다!"
사제가 이를 드러내며 말하자, 백무엽은 피식 웃고 말았다.
"훗훗… 그렇다고 없는 말이 뱃속에서 나올지!"
"네놈은 미친 놈이다. 아니, 바보다!"
"그렇소. 나는 광인에 백치요. 노인은 처음으로 바른 말을 했소. 훗훗……!"
백무엽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사제는 그 천연덕스러움에 혀를 내두르다가 그의 상체에 지력을 빗발치듯 쳐내기 시작했다.
"오냐, 해 보자!"
제일 먼저 거궐혈(巨闕穴)과 미당혈(未堂穴)이 점혈되었고, 곧바로 관추(關椎)와 화개(華蓋), 심극혈(心極穴)이 점혈되었다.
사제의 손가락 놀리는 속도는 점점 빨라지는데, 백무엽은 하품이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는 듯한 표정이었다.
"시시하군. 그래도 가려움 정도는 있어야 하는데!"
"착골수혼을 써도 통증을 느끼지 못한단 말이냐? 네놈은 대체 어떤 놈이냐?"
사제가 도리어 자지러졌다.
일순, 그의 복면은 땀으로 인해 축축이 물들었다.
'두려운 놈, 이 놈이 점점 두려워진다.'
사제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다가 다시 웃었다.
"크크크… 좋아. 첫 번째는 너의 승리였다. 아무래도 네놈은 내공이라는 것이 없어 착골수혼 아래서도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가 보다. 좋아, 그렇다면 네게 지주혈인(蜘蛛血印)의 고문을 선사하겠다!"
사제는 음침히 말하며 오른손을 허리춤에 댔다. 그는 허리에서 작은 가죽 주머니 하나를 떼어 냈다.
"자금성비고(紫禁成秘庫)의 문도 연 노부다. 젖비린내 나는 네놈의 주둥이 하나 열지 못하겠느냐? 크크……!"
가죽 주머니 안에는 여러 가지 물건이 들어 있었다.
어떠한 자물쇠도 열 수 있는 만능시(萬能匙), 만능시를 쓰지 못하는 특이한 자물쇠를 열기 위한 하나의 호구은침(虎鉤銀針), 학(鶴)같이 생긴 독로(毒爐), 수많은 종류의 독분이 담긴 화장갑 하나, 여러 가지의 인피면구(人皮面具)…….
신투(神偸)의 주머니답게 수많은 물건이 들어 있었다.
사제가 꺼낸 것은 그 중 하나의 수정병(水晶甁)이었다.
"봐라, 귀엽지 않느냐? 이년을 잡느라 운남(雲南)에서 칠 일을 고생했다!"
사제는 수병을 흔들어 보였다.
안이 들여다보이는 수정병 안에는 아주 흉측하게 생긴 핏빛 거미 한 마리가 들어 있었다.
무려 칠백 살을 산 독지주(毒蜘蛛).
이름하여 인면혈주(人面血蛛)라는 것이다.
그 놈의 얼굴은 폭삭 늙은 노파의 얼굴을 닮았다. 만에 하나, 그 놈이 천 년을 살았더라면 그 얼굴은 아주 요염한 미녀의 얼굴로 변화할 것이다.
다리가 여덟 개, 크기는 아이의 손바닥만했다.
"암놈이다. 그래서 독성이 수놈보다 강하다. 이 계집년은… 이렇게 멋지게 자라기 위해 수거미 천 마리를 꿀꺽했다!"
사제가 그렇게 말할 때였다.
'아니다.'
백무엽의 눈빛이 약간 흐트러졌다.
'나는 이 사람이 인문(忍門)이나 인문에 연관된 사람인줄 알았는데… 아니다. 이 사람은 진짜 신투다. 저 물건은…….'
백무엽은 인면혈주를 바라봤다.
그것은 그가 인문이 전한 서적 안에서 읽은 바 있는 물건이었다.
<인면혈주(人面血蛛)는 고금십독물(古今十毒物) 중의 하나이다. 그것은 녹림대종사(綠林大宗師) 야유향(夜遊香)의 신표이기도 하다.>
x야유향(夜遊香).
그는 투도(偸道)를 걷는 사람에게는 신(神)으로 불리는 사람이다.
들어가지 못하는 곳이 없고, 훔치지 못하는 물건이 없으며, 그리 많이 훔쳤으면서도 늘 소박하고 가난하게 사는 도적의 신!
그가 무림을 떠난 지도 어언 이십 년이지 않는가?
한데, 그가 사제라는 가명을 쓰며 쾌활화림에 나타나다니…….
"잘생기지 않았느냐? 이년은 정말?"
야유향으로 보이는 복면인은 수정병 마개를 천천히 잡아뺐다.
'죽이자. 아니, 죽이고 싶다. 저 무례한 도적을…….'
백무엽은 불끈 살심을 일으키고 그를 암살하기로 결심했다.
그의 손가락이 흔들리기 직전이었다.
팟-!
수정병 안에서부터 피구름덩어리 하나가 튀어나왔다.
거의 동시에, 인면혈주는 백무엽의 눈썹 가운데에 딱 달라붙었다.
백무엽은 그 순간, 아찔함을 느꼈다.
'독(毒)이 아니라, 요기(妖氣)다. 으으, 점혈해도 제압되지 않은 나의 내공이 저주의 요기에 제압되었다. 이제는 죽이고 싶어도… 죽일 수 없게 되었다.'
백무엽은 몸이 급격히 뻣뻣해짐을 느꼈다.
한순간 몸 안에 충만해 있던 내공의 기운이 봄눈 녹듯 스러졌고, 인면혈주의 몸에서 냉기(冷氣)가 흘러들며 전신이 아득해졌다.
"으으… 으으……!"
"어떠냐, 애송이? 이제 입을 열 때가 되지 않았느냐? 인면혈주가 너의 뇌수를 파먹기 전에 말하는 것이 낫지 않느냐?"
복면인은 분명 야유향이었다.
도적의 신이라는 야유향, 그가 웃을 때 백무엽의 입가가 묘하게 찡그러졌다.
"조금… 재미있소. 하지만 내 신음 소리를 듣기에는… 조금 부족한 듯하오!"
"뭐라고?"
"거미는 독하나, 나는 더 독하단 말이오!"
"기가 막힌 놈이군!"
야유향은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러나 그의 비웃음은 이내 경악으로 화하고 말았다.
백무엽은 인상도 찡그리지 않았다.
'차라리 다행이다. 내가 무공을 쓸 기회를 놓친 것은!'
미간에 붉은 자국이 찍히는데에도 그는 신음 소리를 내지 않았다. 신음 소리는커녕, 그는 인상조차 찡그리지 않았다.
그냥 담담한 표정. 얼굴에 인면혈주가 달라붙어 있지 않은 듯 평온하기 그지없는 표정은 야유향의 머리칼을 송곳처럼 빳빳하게 했다.
'할 말을 잃게 하는 놈이다. 사람의 인내심이 이럴 수가……?'
야유향은 자신의 권위에 지독한 도전을 받은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좋아, 두 번째도 네가 이겼어!"
야유향은 고개를 쳐들었고, 그 순간 그의 손이 쳐들리며 수정병도 쳐들려졌다.
"와라, 이 못난 년!"
그가 욕설을 토할 때, 인면혈주는 백무엽의 미간으로부터 튀어올라 수정병 안으로 정확히 날아들었다.
인면혈주가 병 속으로 들어가는 그 순간, 야유향은 수정병을 치우며 대신 몸의 키를 낮췄다.
"못난 년, 그 곳이 아니야. 너는 죄를 지었으니, 소박을 맞아야 해!"
그의 입은 딱 벌어졌고, 번개처럼 날아가던 인면혈주는 바로 그의 딱 벌어진 입 속으로 쑥 빠져들었다.
"으득- 으득-!"
직후, 야유향은 입맛을 다시기 시작했다.
"맛은 괜찮군! 조금 노린 것이 탈이지만!"
야유향은 중얼거리며 인면혈주를 어금니로 부셔 목구멍 안쪽으로 밀어 넣기 시작했다.
야유향은 독거미를 설탕과자 씹듯이 먹어치운 후, 잔혹한 눈빛을 띤 채 음사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세 번째 고문은 금선능혼(金線凌魂)이라는 것이다. 금선(金線)이라 함은 바로 천년금사(千年金蛇)다. 이 놈은 노부가 갖고 있는 호각 소리만을 알아듣는 놈으로, 네 몸 속으로 파고든 후 노부가 부는 호각에 맞춰 춤을 출 것이다."
금선능혼(金線凌魂).
야향문(夜香門)이라는 강호의 비밀방파가 배반한 문하제자들을 처벌할 때 쓰는 방법이다.
그것은 너무나도 지독한 형벌이었기에 무림에서 금기가 된 고문법 중 하나이기도 했다.
금선사(金線蛇).
몸에서 금광이 흘러 나오는 뱀이다. 길이는 단 삼 촌(寸), 두께는 세필(細筆)보다도 가늘다.
그것은 또한 한철(寒鐵) 속으로도 뚫고 들어가는 침투력을 지니고 있다.
놈이 가장 즐기는 것은 바로 선혈(鮮血)이었다.
스르륵-!
금선사는 백무엽의 살 속으로 파고 들어간다. 코를 통해서!
백무엽의 인상이 묘하게 굳어져 갔다.
'아프다, 정말 아프다! 하지만 맹세를 지키기 위해서 나는 참아야만 한다.'
백무엽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꿈틀…꿈틀……!
그의 가슴살이 불룩 일어난다. 금선사는 그의 피하지방 아래를 헤엄치고 다니는 것이다.
능선(陵線)이 쭈욱 일어나고, 일순 둑이 길게 이어져 등판 쪽으로 간다.
백무엽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금사가 살 속을 마구 헤집고 다니는데도 그는 전혀 고통스러운 표정이 아니었다.
"조금… 간지러운데?"
그는 묘하게 웃고 있었다.
반면, 야유향의 눈빛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흔들렸다.
"너는 사람(人)도 아니야. 너는… 이미 죽었다. 너는 고통도 못느끼는 시체다. 아아, 네가 정말 무섭다. 네가……."
복면 아래 가려진 그의 얼굴은 이미 처참할 정도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의 전신은 땀으로 축축이 젖은 지 이미 오래였다.
'짐작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그가 낭패감에 빠져 곤혹스러워할 때, 백무엽의 입가에 핀 웃음은 더욱 짙어졌다.
잠시 후, 백무엽의 목 아래쪽에서 금선사가 기어나왔다.
"제기랄, 이러다가는 밑천이 바닥나겠는데?"
아랫배가 터지게 백무엽의 피를 먹은 천년금선사, 그것은 주춤하기 시작한 야유향의 소매 속으로 들어갔다.
네 번째 고문(拷問)도 곧이어 베풀어졌다.
그것은 화갈사(火蝎砂)라는 것을 피부에 뿌리는 고문이었다.
화갈사는 묘강(苗彊)에서 자라는 만년화갈의 가루로서, 바위와 쇠를 태우는 힘을 갖고 있다.
츠으으- 으으으-!
화갈사의 가루는 백무엽의 가슴살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백무엽의 콧잔등에는 송글송글 땀방울이 매달렸다.
"조… 조금 덥군!"
그러나 그의 입가에 맺힌 미소만은 사라지지 않았다.
땀(汗), 그것은 야유향의 이마에서 굴러 떨어졌다.
백무엽이 여전히 웃고 있기 때문이었다.
"또 하나의 고문은 뭐요? 이제는 궁금하구려!"
흰 이가 드러나며 맑은 목소리가 흘렀다.
"빌어먹을, 독한 놈인지는 알았으나 정말 독한 놈이구나! 너를 아프게 하기는커녕, 노부의 명예만 실추되고 말았다!"
야유향은 투덜거리기 시작한다.
화갈사의 화형(火刑)마저 백무엽을 쓰러뜨리지 못한 것이다.
그 때 백무엽의 입가에 일그러짐이 나타났다. 처음으로 그는 경악하고 마는 것이다.
"그, 그대는 바로… 총표행주(總票行主)가 아니오?"
백무엽이 입을 딱 벌리는 이유는 그를 네 가지 방법으로 고문을 한 사람의 목소리가 너무도 낯익기 때문이었다.
야유향은 백무엽의 지독함에 질린 나머지, 변성술마저 잊고 말았다. 결국 꼬리를 잡히고 만 것이다.
"제기랄, 알아봤군. 또 수치를 당했다. 꼬리 잘리고, 발톱도 잃고 천진(天津)에 숨어 지내는 처지를 발각당하고 말았으니!"
투덜거리는 야유향.
아아, 그는 바로 천진표행(天津票行)의 금적산 노인(金積山老人)이 아닌가?
혈도 마운(血刀魔雲)과 더불어 철책 뒤에서 사는, 백무엽과는 면식이 많은 노인.
일개 구두쇠요, 거부로만 알려진 그가 바로 야유향일 줄이야?
"제기랄, 다 틀렸다. 천진부를 떠나기 이전, 노부의 숙적인 벽진자(碧眞子)를 쳐죽이고 벽진자가 노부에게서 빼앗아 간 천색형구(天色形具)를 되찾으려 했는데… 네놈 때문에 망신만 당하게 되었다!"
야유향은 툴툴거리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벽진자(碧眞子).
그는 전대 무당 장문인(武當掌門人)으로, 죽은 것으로 소문나 있었다.
천색형구(天色形具)는 칠백 년 전에 무너진 기환술의 대가로 알려진 천색마교(天色魔敎)의 물건이다.
그들을 무너뜨린 방파는 동영(東瀛)의 인자조직(忍者組織)인 사막(死幕)이었다.
그런데 사막 역시 살아남지 못했다고 한다.
천색형구가 나타나는 순간, 그들마저도 쓰러졌다는 것이다.
백무엽의 표정은 어느 새 차분히 굳어 있었다. 금적산이 그를 고문했고, 금적산의 신분이 녹림의 대종사로 밝혀졌는데도 그는 어떠한 말도 묻지 않았다.
아니, 야유향이 또 다른 신분으로 변한다 해도 그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을 것이다.
인자무언(忍者無言)!
그것이야말로 그가 인문에서 배운 무수한 것들 중 가장 지독한 것이라 할 수 있으리라.
야유향은 몸을 일으키다가 백무엽을 응시했다.
"노부의 자존심을 꺾은 놈! 좋아, 승자(勝者)는 너다. 그것은 하늘도 부정하지 못한다!"
"그게 무슨 뜻이오?"
"클클… 별 말은 아니다. 사실은… 네게 손발 다 들었다는 말이며, 천진부를 떠나는 마당에 네게 물건 하나를 주겠다는 말이다!"
"떠나다니?"
"벽진자는 노부의 숙적이다. 그를 죽이기 위해 오랫동안 별렀는데, 기회가 오지 않았다. 놈은 잘도 노부를 피하고 있다. 제기랄, 피하려면 피하라고 하지. 그 진짜 도적놈! 잘 먹고 잘 살라고 해라!"
"……!"
"훗훗… 그 놈에게 그 말을 모두 전해라. 그러면 노부는 이것을 네게 주리라. 아니, 지금 이것을 내게 선금조(先金條)로 주겠다! 받아라!"
야유향은 중얼거리며 소매를 흔들었다.
소매가 펄럭이더니 금색선 하나가 날아갔고, 그것은 정확히 백무엽의 목 안으로 날아들었다.
바로 천년금선사(千年金線蛇)가 아닌가?
피를 빨아먹는 흉물(兇物), 그것은 단 하나에 약한데 그것은 바로 인간의 타액이라는 것이었다.
칵-!
금선사는 침에 닿는 찰나 죽었고, 바로 그 순간 물로 변해 버렸다.
"또 있다. 이것은 화갈내단(火蝎內丹)이라는 것이다. 정말 귀한 것이다. 네놈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이것은 주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죽은 노부의 마누라도 몰랐던 노부의 진짜 보물이다. 화갈내단을 먹게 되면 피부가 늘 우유처럼 희고 향기가 나게 된다. 큿큿, 그래서 화갈내단은 환락단(歡樂丹)이라고 불리지. 다시 말해, 방중(房中)의 능력이 십 배 좋아진다는 뜻이다!"
야유향은 키득거리다가 다시 소매를 흔들었다.
후륵-!
소매가 흔들리며 핏빛 구슬 하나가 백무엽의 입 안으로 들어갔다.
비둘기알만한 반투명 홍색 구슬. 그것은 찰나적으로 백무엽의 목구멍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으으, 뜨겁다!"
백무엽은 환락단이라는 것이 입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휘청이고 말았다.
혀가 한 꺼풀 벗어지고, 눈알이 타는 듯하더니 피가 마르는 듯한 열기가 느껴졌다.
그 고통만은 백무엽도 참지 못할 정말 거대한 고통이었다.
"이… 이긴 것 같지도 않군! 진, 진짜 아픈데? 으… 음."
그는 중얼거리며 아주 천천히 앞으로 쓰러졌다.
뱀과 거미와 사갈, 그리고 벌거벗은 여인(女人), 신명이 나는 춤사위, 비처럼 떨어지는 붉은 꽃잎사귀들, 그리고 뇌정(雷霆).
버어어- 언- 쩍-!
"아… 아니?"
백무엽은 땀을 흠뻑 뒤집어쓴 채 벌떡 일어났다.
그 순간 그는 활짝 열려진 창(窓)을 봤다.
창 밖은 폭설의 장막에 휘감기고 있었다.
무화과숲은 눈에 파묻혔다. 밖은 황혼녘이었다.
"이럴 수가? 나의 몸이 멀쩡하다니! 아아, 나의 근골이 특이하다 하더라도 약간의 상흔은 남아 있어야 하는데……!"
백무엽은 넋을 잃고 말았다.
야유향과의 일은 꿈이었단 말인가?
그는 서탁에 기대어 잠깐 잠들었다가 깨어나고 만 것인가?
옷매무새도, 속살도 모두 전과 같았다. 달라진 것이라면 살결이 조금 희어지고, 몸에 훈기가 가득하다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달라진 것이라면, 누군가 펼쳐진 책 위에 먹으로 이렇게 휘갈겨 썼다는 것이다.
<노부는 영영 금적산으로 환원되지 못할 것이다.
네놈에게 졌기 때문에 노부는 천진을 떠날 수밖에 없다.
다섯 번째 고문기구인 천색형구(天色形具)의 처리를 네게 부탁한다.
지금 너는 백년공력(百年公力)을 얻었고, 천하에서 가장 강한 남자를 얻었다.
바란다면, 훗날 만나 신투술(神偸術)을 전수하겠다. 곧 다시 보게 될 것이다. 네게 정(情)이 들었다. 이 말은 진심이다.
너를 찾은 것은 반은 자의(自意), 반은 우연이다. 한 가지 부탁이라면 무정태공(無情太公)을 찾아 물건을 달라고 하라는 것이다.
그가 바로 벽진자(碧眞子)이다.
사실 천진에는 인물이 많다. 물론, 그 중 최고는 너일 테지만.>
야유향(夜遊香), 그리고 천진표행의 금적산 노인.
그는 그러한 글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져 간 것이다.
"비밀이 있는 사람은 나뿐이 아니라, 다수로군. 하여간… 가 보자!"
백무엽은 입술을 질끈 깨물고 있었다.
첫댓글 항상 고맙게 읽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