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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장 달라진 세상
텁석부리와 흉터가 있는 장한은 아직 눈을 뜨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
은 느닷없이 동료의 비명소리가 들리자 크게 놀란 모양이었다. 미처 눈
을 뜨지도 못하고 그들은 황급히 병장기를 주워들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머리가 얻어터진 뱀눈의 사내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백방생은 그들이 멀리 달아나 버리는 것을 계속 누운 채 멍하니 바라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윽고 벌판위에 홀로 남게 되자 길게 한숨을 내
쉬며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의 화려한 의복은 이미 황토흙이 묻어서 엉망이 되어 있었다. 하지
만 그가 조금전에 발견한 자신의 능력에 비하면 그런 것은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다만 왠지 백방생은 맥이 빠지고 마음이 우울해 지는 것
을 느끼게 되었다. 그것은 그가 조금전에 내공을 약간이라도 운용하게
되어 신체에 무리가 왔기 때문일까?
백방생은 대강 몸의 먼지를 털고 나자 객점으로 돌아갈까 하다가 문
득 다시 신형을 돌려 걸어갔다. 그의 앞에는 어느덧 아까 그 백의소녀의
시신이 놓여 있었다. 백방생은 문득 생각했다.
(나는 과연 환각을 보았던 것이었을까?)
백방생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문득 백의소녀의 시신을 땅에 묻을까
하다가 생각했다.
(이미 식신(識神)이 육신을 떠나갔으니 남은 육신이야 상관이 없을 것
이다. 묻은 들 어떻고 묻지 않은 들 어떨 것인가?)
백방생은 다시 신형을 돌려 객점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헌데 그가 불
과 몇걸음 걷지 않았을 때의 일이었다. 갑자기 다시 그의 눈앞에 희끗한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이었다. 지금 주위는 매우 어두워져 있는 상황
이었다. 하지만 백방생은 순간 확실히 그 물체를 바라볼 수가 있었다.
(진낭자!)
백방생은 내심 소리치며 앞으로 내달렸다. 그가 거의 삼십여 장 쯤
달렸을 때였다. 과연 그의 앞에는 한 사람의 백의소녀가 서있는 것이
었다. 그녀는 바로 다름아닌 아까 백방생이 주루에서 보았던 그 소녀
였다. 그리고 또한 그녀는 백방생이 생각했던 대로 진소유가 분명하기도
했다.
백방생은 그녀를 보자 그만 왈칵 반가운 생각이 들어서 앞으로 달려
들면서 소리쳤다.
"진낭자! 정말로 그대였구려?"
진소유는 그러나 다소 냉담한 태도를 보였다. 그녀는 그저 백방생이 달
려드는 것을 보고 신형을 움직여 옆으로 피해버렸다. 허공을 움켜쥐게
되자 백방생은 다소 어색한 기분이 들어서 웃으며 말했다.
"진낭자, 내가 그대를 이렇게 빨리 만나게 될 줄은 몰랐소."
진소유는 그제서야 입을 열어 말했다. 그녀의 차림새는 과거보다 더욱
화려하고 우아해진 듯 해도 목소리만은 여전히 차가운 감이 있었다.
"저도 당신이 그렇게 빨리 건강을 회복하게 될 줄은 몰랐어요."
백방생은 역시 그녀의 진심을 알기가 어려웠다. 그는 어색한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모두가 그대들이 염려해준 덕분이오. 헌데 내가 보낸 서찰은 받았
소?"
진소유는 반문했다.
"서찰이라뇨?"
백방생은 진소유가 아직 그의 서찰을 받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하긴 그녀는 서찰을 받고 왔다면 이렇게 빨리 오지는 못했을
것이다. 필시 소림사의 사정을 살피고 있다가 미리 백방생이 강호에 나오
는 것을 알았던 모양이었다. 백방생은 웃으며 말했다.
"헌데 어째서 아까는 나를 피한 것이오? 나를 미처 알아보지 못한
것이었소?"
백방생은 문득 자신의 몸이 몰라보게 뚱뚱해진 것을 실감했다. 그런데
진소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예요. 그렇지 않아요."
진소유는 여전히 눈부시게 아름다운 소녀였다. 과거의 그 탈속적이고 청
순한 기질은 많이 사라졌지만 도리어 그녀는 더욱 아름다와진 것 같았
다. 백방생으로서는 그녀의 그러한 변화가 다소 마음에 들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그녀의 모습이 넋을 뽑아 놓기에 충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백방생은 의아해 져서 물었다.
"그럼 알고도 나를 피했다는 말이오?"
진소유는 이에 싸늘하게 냉소했다.
"물론이예요. 당신의 옆에는 바로 그렇게 아름다운 여자가 있었는데,
그래 나더러 거기에 비위나 맞추고 있으라는 말인가요?"
백방생은 어리둥절해 졌다.
"여자라니, 대체 누구를 말하는 것이오?"
진소유는 거듭 냉소했다.
"흥, 너무나 많아서 일일이 기억할 수도 없는 모양이로군요?"
백방생은 그녀의 냉소하는 모습을 보자 문득 고향에 온 것 같은 푸근
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이미 그녀와 적지 않은 인연을 쌓았고, 그러한
그녀의 성품은 그의 뇌리에 깊이 새겨져 있던 것이었다.
백방생은 웃으며 말했다.
"사실 나는 그간에 서른여섯명의 여자를 사귀었던 것이 사실이오. 그러
나 그대가 질투를 일으킬만한 사람은 없었는데 이게 대체 어찌된 영문
이오?"
진소유는 백방생이 장난을 치고있는 것을 보고 쳇, 하고 웃더니 다시 싸
늘하게 말했다.
"아마 그녀는 자신이 남자라고 당신에게 말한 모양이로군요?"
백방생은 그제서야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바로 그의 호위를 맡고
있는 황삼서생에 관한 것이었다. 그 황의는 본래 처음 만나면서부터 어
딘가 여자같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가?
단지 백방생은 미처 그가 여자일 것이라는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을
뿐이었다. 백방생은 지금 생각해 보니 확실히 그가 여자일 가능성이 아주
많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백방생은 말했다.
"낭자는 나의 그 임시호위에 대해서 많이 알고있는 모양이로군요?"
진소유는 손을 내저었다.
"그 남장여자에 대해서 내가 아는 바는 별로 없어요. 당신이 궁금하다면
나중에 직접 물어보면 될 일이 아닌가요?"
진소유는 이미 백방생과 황의의 사이를 새롭게 인식한 듯 했다. 백방
생은 그녀가 대답을 회피하므로 굳이 다시 묻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그래 그 동안은 어떻게 지냈소? 달마하원과 남해보타도가 멸문되었
다는 소식은 내 이미 듣고 있었소."
진소유는 그 얘기를 듣자 문득 표정이 다소 달라졌다. 그녀는 약간 멈
칫하는 듯 하다가 돌연 전음으로 말했다.
(그들이 와요!)
백방생은 그녀가 갑자기 전음으로 말하는 것을 보고 의아해 했다. 그런
데 그녀를 따라 시선을 옮기니 정말로 그쪽에는 일단의 사람들이 다가
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모두 다섯명이었다. 하나같이 화려한 비단옷을 입고 모자를 썼
으며 허리에는 한자루의 보검(寶劒) 을 걸었는데 아주 보기 드물게 인
물들이 수려한 모습들이었다.
백방생은 다가오는 그들을 살피다가 일시 너무 놀라서 숨이 다 막힐뻔
했다. 그 다섯명은 다름아닌 달마오수였던 것이다. 이제는 천상오룡(天
上五龍)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백방생은 문득 자신이 읽은 강호인물
록의 내용을 상기했다. 백방생은 이미 어느 정도 예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간 너무나도 변모한 그들의 모습에 백방생은 하마터면 자신의
두 눈을 의심할 뻔 했다.
아직 달라지지 않은 것이 있다면 그들의 특징적인 체구와 거기에서
느껴지는 웅후한 기도였다. 모자를 쓰고 있는 그들의 머리카락은 이미
상당히 자라나 있는 상태였다.
"오랜만이군!"
대인이 먼저 입을 열어 비교적 친근한 태도로 말했다. 백방생은 내심 이
렇게 생각했다.
(하긴, 나도 과거와 같은 모습은 아니라고 할 수 있지.)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니 무척 반갑습니다, 스님!"
백방생의 말에 문득 대지가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아니야, 우리는 이미 환속했네. 모두 이(李)씨 성을 붙여서 부르기로
했지. 나로 말하면 즉 이대지(李大智)가 되는 것이지. 스님이라는 말은
당치도 않네."
백방생은 문득 다시 한번 놀라운 기분이 들었다. 알고보니 그들은 하나
같이 정말로 환속한 모양이었다. 달마하원이 멸문했으므로 갈 곳이 없
어서 그랬던 것이었을까? 백방생은 조금전에 진소유의 달라진 모습을
보았지만 그녀의 변모는 이 사람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과거 달마오수는 비록 검소한 의복들을 걸치고 있었으나 그래도 입으
로는 연신 아미타불을 외우고 또한 기품이 느껴지곤 했었다. 지금의 천
상오룡은 그러나 더욱 화려해지기는 했으나 아미타불을 외우지는 않았
고 게다가 그다지 기품도 일지 않고 있는 것 같았다. 백방생은 그것을
보고 왠지 말할 수 없는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백방생은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저도 이미 소문을 듣고 있었습니다. 강호상에 이미 천상오룡(天上五龍)
의 명성이 하늘을 찌르고 있다고 하더군요."
이대례(李大禮)가 말했다.
"그건 과찬의 말씀이네. 그나저나 자네가 이렇게 빨리 몸이 회복하게
되었다니 축하해야 할 일이로군!"
백방생은 말했다.
"저는 아직 몸이 완전히 회복된 것은 아니지만 단지 소림사가 답답
해서 뛰쳐나왔을 뿐입니다. 앞으로 무능한 저를 여러분께서 많이 도와
주시기 바랍니다.
이대신(李大信)이 말했다.
"소림사의 법력(法力)은 과연 대단하군. 달마하원에서도 고치지 못했
던 그대의 상처를 그렇게 고쳐주다니!"
백방생은 이대신의 어조에 어딘가 비꼬는 듯한 느낌이 실려있는 것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다섯분의 법력은 더욱 높으신 것 같습니다. 석달도 채 되지 않
아서 강호를 제패하셨다니!"
이대례가 말했다.
"우리가 이미 강호를 제패한 것은 아니네. 강호에는 그야말로 뛰어난
기인이사들이 모래알처럼 많아서 우리들은 그저 한 구석의 자리를 차지
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야할 형편이지. 그건 그렇고, 앞으로 우리가 강호
에서 서로 적대시하지 않게 되길 바랄 뿐이네."
백방생은 말했다.
"아니 서로 적대시 하다니요?"
이대지가 말했다.
"우리는 이미 달마하원과 인연을 끊고 천상회(天上會)라는 조직에 가입
하고 있네. 이것은 물론 우리가 이미 선택한 일이니 자네가 왈가왈부
할 성질이 아니지. 따라서 자네가 만일 우리 천상회와 적대시한다면 그
것은 우리와도 적이 될 수가 있다는 것이네. 실로 강호의 일이라는 것
은 복잡하고 미묘해지는 것이니 말이네."
백방생으로서는 그들이 어째서 그렇게 환속을 하고 달라졌는가를 의아
해 하는 심정도 있었다. 그러나 사실 그로서는 그들에게 그것을 물어
볼 자격은 없었다.
백방생은 사실 달마오수를 친근하게 대해 왔었다. 하지만 달마오수는 그
렇지 않았었다는 말인가? 아니면 천상오룡으로 이미 변모했기 때문에
그렇게 대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들은 본래 어떤 모습이 진짜였
을까? 백방생은 도리어 지금 그들에게는 천상오룡의 모습이 더욱 어
울리고 있는 것을 보고 다소 가슴이 허전해 왔다.
백방생은 그들이 자신과 거리를 두려고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포권하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저 역시 앞으로 여러분과 함께 일하게 되기를 바라겠습
니다."
진소유는 천상오룡이 나타난 이후에 별로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이대
례가 말했다.
"자네도 이미 알고 있겠지만, 우리는 지금 낙양에서 진소저의 일을 도
와 주고 있네. 자네가 만일 그곳으로 가기를 원한다면 함께 가기로 하
지."
백방생은 진소유를 힐끗 바라보았다. 그녀는 역시 묵묵히 아무런 말도
없었다. 백방생은 이에 그녀도 수락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말했다.
"좋습니다. 저는 본래 그쪽으로 가려던 길이었으니까요. 헌데 객점에
함께 가기로 약속한 사람들이 있으니, 그곳에 잠시 들렀다 가는 것이 어
떻겠습니까?"
객점에는 백방생의 의복들도 있었다. 백방생의 말에 이대인이 선선히 고
개를 끄덕였다.
"좋네. 일단 그곳에 들렀다가 마차만 빌려서 밤새워 가도록 하지."
백방생은 천상오룡 등과 함께 객점으로 돌아왔다. 그는 진소유 등은 부
근에서 기다리게 한 다음에 혼자서 황의가 묵고 있는 객방의 방문을 두
드렸다.
"황형?"
그러나 왠지 안에서는 소식이 없었다. 진소유의 말에 의하면 그는 남
자가 아니라 남장을 한 여자라고 했다. 필시 그녀는 여자라면 대단한 미
인일 것이다. 백방생은 안에서 소식이 없자 즉시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
어갔다. 방안에는 촛불이 켜져 있었다. 하지만 사람의 모습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백방생은 잠시 생각했다. 황의는 갑자기 어디로 간 것일까? 그녀는
혹시 아까 백방생의 뒤를 따라서 벌판으로 갔었던 것이 아닐까? 그래서
혹시 그와 진소유와의 대화를 들었던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문득 촛불의 아래에 한 장의 종이가 놓여있는
것이 보였다. 그 종이에는 익숙한 달필로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이미 일행을 찾았으니 나는 필요없을 것이오.
나중에 다시 봅시다.>
그 글귀를 남긴 자의 서명은 없었다. 그러나 백방생은 능히 그 글귀를
남긴 자가 누구인지 추측할 수가 있었다.
글씨체는 매우 아름다운 모양이었고 또한 그 종이에는 아직 은은한
향기(香氣)가 남아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혹시 그녀가 자신이 남장여
인이라는 것을 드러낸 것이 아닐까?
어쨌든 황의는 필시 아까 백방생과 진소유의 대화를 어느 정도 엿듣고
서 떠난 모양이었다. 나중에 다시 보자고 했으니 아마 다시 보게 될 것
이다. 백방생으로서는 이미 일이 이렇게 잘 풀린 이상에는 그 까짓 삼
백냥의 황금은 별로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이미
엄청난 부자나 다름이 없겠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제 머지않아 망해사의
보물을 취해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백방생은 자신의 방안으로 들어가서 옷보따리와 기타의 물건들을 챙기
고 의복도 새옷으로 갈아입은 다음에 밖으로 나와 일을 처리했다. 객
점의 주인에게 모든 값을 치르고, 이어 내일 아침에 마부가 오면 전해주
라고 약간의 수고비를 남긴 다음에 진소유와 합류했다.
이미 천상오룡은 마차를 한대 준비해 놓고 대기하고 있었다. 백방생이
마차에 오르자 천상오룡은 마차를 몰며 빠르게 나아갔다.
마차의 안에는 백방생 외에 진소유만이 타고 있었다. 천상오룡은 밖에
서 마차를 몰거나 경신술(輕身術)을 펼쳤다.
무공이 고강한 그들에게는 차라리 그 편이 어울릴 것이다. 이러한 광경
은 일면 과거의 어떤 상황과 매우 흡사해 보였다. 하지만 과거는 다시 찾
아오지 않고 지금도 과거가 아니다. 백방생은 환자가 아니며 진소유도
그다지 순수한 것 같지가 않았다. 게다가 이제는 천상오룡이 백방생의
편은 아니라는 것이다.
진소유는 마차에 올랐었어도 별로 말이 없었다. 그녀는 싸늘한 신색을
하고서 그저 창밖만 바라보기만 했다. 주위가 어두우니 창밖의 풍경이
보일리가 없는데도 그녀는 마치 그 무엇인가를 열심히 주시하는 것 같
았다. 대체 그녀는 무엇을 그렇게 보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혹시 그
녀 스스로의 마음이 아닐까?
백방생은 침묵이 계속되는 것을 참을 수가 없어서 입을 열어 말했
다.
"진낭자, 그간 어떻게 지냈소? 그대는 그간 더욱 아름다와진 것 같구
려."
진소유는 백방생을 향해 고개를 돌리더니 입가에 기묘한 웃음기를
머금었다.
"그래요? 당신도 그런 것을 아나요?"
백방생은 그녀의 태도가 자못 냉소적인 것을 보고 다시 화제를 돌렸다.
"음, 이렇게 만나게 되니 꿈만같은 생각이 드는구려. 나는 미처 이렇
게 되리라고는 예상도 하지 못했었소. 마치 그러니까 우리가 매우 오
랜만에 만나는 것처럼...... 낭자는 혹시 그 약속에 대해서 기억하시
오?"
진소유는 의아한 표정이었다.
"약속이라뇨?"
백방생은 말했다.
"이전에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낭자는 당시 비구니가 되겠다고 나더
러 어떤 관심도 갖지 말라고 하지 않았소? 만일 그 약속을 어기면......."
진소유도 그 말뜻을 알았는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잘랐다.
"당신은 부자이니 그 약속은 어겨도 목을 내놓지는 않아도 되겠군
요?"
백방생은 말했다.
"나는 어째서 달마하원과 남해보타도가 동시에 멸망하게 되었는지
매우 궁금하오. 나중에 가서 조사해 보기는 하겠지만."
진소유는 그를 향해 냉소했다.
"그래요? 정말 그럴까요?"
백방생은 의아해 졌다.
"무슨 말이오?"
진소유는 말했다.
"당신과 당신의 부모는 어떻게 당하게 되었죠? 그런데도 전혀 모르겠다
고 할 수가 있나요?"
백방생은 문득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하긴 솔직히 그로서는 전혀 짐
작이 가지 않는다는 것은 거짓말이었다. 아마도 달마하원이나 남해보타
도도 그와 비슷하게 당했을 수도 있다.
백방생은 안색이 변해서 물었다.
"그럼 그 두곳도 세외오세(世外五勢)의 침략을 받았다는 말이오?"
진소유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직 저도 잘 모르고 있어요. 제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에는 온통 폐허
뿐이었으니까요.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이곳으로 오고 말았어
요."
백방생은 말했다.
"그러니까 남해보타도로 갔다가 그 참변을 보고 그만 다시 이 곳으
로 오게 되었다는 말이오?"
진소유는 말했다.
"그래요. 나는 당신의 그 돈을 밑천으로 하여 제법 사업을 벌이고 있는
중이죠. 하지만 이제 당신이 돌아왔으니 나는 그것을 당연히 모두 당신
에게 돌려드리도록 하겠어요."
백방생은 웃으며 말했다.
"그만 두시오. 내가 이번에 낭자를 찾아가는 것은 그저 보고싶었기 때
문이지 무슨 돈을 찾으러 가는 것은 아니오. 사실 그 돈은 당시 내가 낭
자에게 감사의 표시로 주었던 것인데 그것을 아직 몰랐단 말이오?"
진소유는 백방생의 얼굴을 쳐다보며 물었다.
"그게 정말인가요?"
백방생은 말했다.
"물론이오. 나는 당시 죽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핑계삼아 당신에게 그것을 주었던 것이오. 만일 그냥 주면 당신이 받지
않을까봐 그런 편법을 썼던 것이오. 지금 당신의 그 재산과 사업은 고스
란히 당신의 것이니, 앞으로 내게 주려고 생각도 하지 마시오. 나는 그
저 당신과 이렇게 친구가 되는 것만으로도 만족하오."
진소유는 잠시 생각하는 듯 하다가 말했다.
"좋아요. 나도 그렇다면 당신을 친구로 여기기로 하죠. 하지만 거기에
는 한 가지 조건이 있어요."
백방생은 그녀의 말에 얼굴이 환해져서 물었다.
"그 조건이란 무엇이오?
진소유는 말했다.
"당신은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할 거죠?"
백방생은 말했다.
"음...... 아직 정하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느긋하게 천하를 유람하면서
살아가거나...... 아니면 한 곳에 붙어서 살게 되겠지. 낭자와 이웃해서 살
아도 좋을 것이고."
마지막의 백방생의 말은 그의 진심을 은근히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가
있었다. 진소유는 눈살을 찌푸리다가 말했다.
"당신은 그럼 부모의 원수도 갚지 않을 생각인가요?"
백방생은 어리둥절해졌다. 그는 갑자기 진소유가 그런 말을 하리라고
는 생각지도 않았다. 그는 어리둥절하여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낭자도 마찬가지가 아니오?"
진소유는 차갑게 말했다.
"그건, 나의 경우는 약간 달라요. 나는 비록 사문(師門)이 멸문당하기는
했지만 그것이 나의 책임은 아니기 때문이예요."
백방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진소유는 비구니가 되려고 하기는
했으나 사문에 대한 관심은 별로 없었던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백방생은 말했다.
"하지만 나 역시 무슨 힘이 있어야 복수를 하든가 할 것이 아니오?"
진소유는 싸늘하게 코웃음을 쳤다.
"당신은 정말 사내가 아니로군요. 그렇다면 나의 친구로서의 자격이
없어요. 사내는 일단 자신의 책임이라면 힘이 부족하다고 해서 그것을
회피하지는 않는 법이죠."
백방생은 문득 어째서 그녀가 갑자기 이런 충동질을 하는가 하고 생각
해 보았다.
(혹시 그녀는 나를 부담스럽게 여기고 나를 떼어내려는 것이 아닐
까?)
백방생으로서는 만일 진소유가 자신을 버린다면 그 역시 그녀에게 어떤
부담도 주고 싶지 않았다. 백방생은 상황에 따라서 행동하기로 했다.
(그렇다면 앞으로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 지 좀더 생각해 봐야 하겠
군.)
백방생은 말했다.
"좋소. 나는 앞으로 부모의 원수를 갚는 일에 전력하겠다고 약속을 하
지. 그렇게만 한다면 앞으로 낭자와 계속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이오?"
진소유는 그 말에 비교적 만족한 듯이 웃었으나 흘러나오는 말은 여
전히 냉소적이었다.
"왜 당신은 나의 옆에만 붙으려고 하죠? 아까의 그 황의낭자도 무척
아름다운 미인인 것 같던데?"
백방생은 손을 내저었다.
"아니오. 내 이미 그녀는 잠깐 만난 사이라고 말하지 않았소? 게다가 이
제 헤어졌으니 다시 만나지도 않을 것이오."
진소유는 웃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흥, 과연 그럴까요?"
백방생은 다시 말했다.
"헌데 대체 당신들은 어떻게 또 이곳에서 만나게 되었소?"
진소유는 말했다.
"내가 이곳에 와서 그들을 찾았죠. 사업을 위해서는 사람이 필요한 법
이니까요. 그게 이상한가요?"
백방생은 그녀의 표정이 다시 딱딱해지는 것을 보고 더이상 질문하지
않고 말했다.
"아니오. 헌데, 당신은 내가 그동안 어떻게 해서 몸을 치료하게 되었는
지 아시오?"
진소유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그것을 어떻게 알겠어요."
백방생은 자신의 얘기를 시작했다.
"당시 나는 그 소림삼신승이 교대로 불문의 무상대법(無上大法)으로 개
정대법(開頂大法)을 시술해 주는 바람에 서서히 정신을 차리게 되었소.
들어보니 나는 그 때 혼절한 지 보름만에 깨어났다고 하더군. 나는 물론
그 뒤로도 정신이 영 맑지가 못했는데 그저 무의식적으로 내가 배웠
던 달마하원의 내공심법을 수련하게 되었지. 그것이 어느 정도 정신을
맑게 해 주었소. 헌데 당시 내가 누워있던 조사동의 천정에 무엇이 있었
는지 아시겠소?"
진소유는 유심히 듣고 있다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건 뭐죠?"
백방생은 말했다.
"바로 달마역근경의 원본비급이 조각되어 있었던 것이오."
진소유는 아미를 깊게 찌푸리며 물었다.
"그렇다면 결국 그 달마역근경 때문에 당신의 병을 치료하게 되었다는
말인가요?"
백방생은 말했다.
"그렇지. 나는 그 달마역근경을 수련하기 시작한 지 거의 한달만에
일어나 앉게 되었소. 즉 그 사이에 이미 몸이 많이 낳았던 것이지."
진소유는 다소 믿을 수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럼 당신은 그 신공(神功)을 대성하였나요?"
백방생은 말했다.
"그런 셈이지."
진소유는 문득 나직하게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흥, 그럴리가 없어요. 이제는 허풍까지 치는 군요. 만일 당신이 달마역
근경을 대성(大成)할 수가 있었다면 어째서 그렇게 아직 무공이 형편없는
거죠?"
백방생은 말했다.
"그것은...... 그러니까 내가 이른바 그것을 거꾸로 수련했기 때문이오."
진소유는 어리둥절해 졌다.
"거꾸로 수련했다니 대체 그게 무슨 소리죠?"
백방생은 말했다.
"그것은 마치 날개달린 새가 먼저 나는 법을 배운 다음에 걷는 것을
연습하는 것과도 같소. 나는 먼저 어려운 부분을 성취한 다음에 낮은
부분을 배우고 있는 것이오. 그러나 나는 지금 몸이 완전히 낫지 않았기
때문에 전혀 걷지도 날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오."
진소유는 가볍게 냉소했다.
"당신의 그 말은 정말로 믿어야 할지 모르겠군요."
백방생은 말했다.
"낭자가 믿지 못하겠다면 나도 할 수 없는 일이오. 하지만 내가이렇게
다시 살아나올 수가 있었던 것은 첫번째는 소림삼신승이 나를 다시 살
려놓은 것이고, 두번째는 달마역근경을 만났기 때문이었소. 나도 그
달마역근경이 그렇게 대단한 물건인지는 미처 몰랐었소."
진소유는 문득 생각하는 듯 하다가 웃으며 말했다.
"좋아요. 나는 그 얘기를 믿겠어요."
백방생은 내심 반가운 생각에 놀라며 말했다.
"정말이오?"
진소유는 말했다.
"물론이예요.그 달마역근경이라면 바로 천륭무가의 가주도 보려고 했던
것이 아니었나요?"
백방생은 문득 손뼉을 쳤다.
"그렇군!"
이어 백방생은 이렇게 생각했다.
(그 동굴속에 있던 천수자가 정말로 그 달마역근경을 이용하여 절맥증
을 치료했는지 모르겠군!)
마차는 밤새도록 빠르게 나아갔다. 천상오룡은 이미 무학이 대홍락의
경지에 올라있는 사람들이니 만큼 마차를 모는 것도 자연 어렵지 않
았다. 그들은 간혹 말을 쉬게 하는 시간 외에는 계속 마차를 몰아서 드
디어 다음날 새벽에는 낙양(洛陽)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백방생은 진소유와 얼마동안 얘기를 나누다가 이내 마차안에서 잠들었
다. 오랜만에 무공을 사용했기 때문에 약간 피로했던 모양이었다. 백방생
이 잠에서 깨어났을 때에는 마차는 이미 낙양성내에 들어와 있었다. 진
소유는 전혀 잠을 자지 않은 것 같았다.
"아니 이 곳은 어디요?"
"낙양성 안이예요. 당신은 우선 여기에 잠시 있도록 해요. 내가 일단
집을 정리한 다음에 다시 당신을 데리러 오겠어요."
그곳은 낙양성내의 대로변의 어느 한 주루의 앞이었다. 그 주루는 삼층
의 호화로운 건물이었는데 이름은 황금빛의 글씨로 단봉루(丹鳳樓)라고
새겨져 있었다.
"알겠소."
진소유의 뜻이 그러했으므로 백방생은 부득이 그 주루에 남게 되었다.
아직 이른 아침이었지만 그 주루는 이미 문을 열고 영업을 시작하고 있
었다.
백방생은 곧장 일 이층을 지나 삼층으로 올라갔다. 이 삼층은 상당히 분
위기가 고급스러울 뿐만 아니라 탁자들이 크고 널찍하여 드문드문
있어서 일견하기로도 매우 값비싼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침
백방생은 화려한 의복을 걸치고 있었으므로 점원들은 그를 환영하며
창가에 있는 한 자리에 앉혔다.
이 탁자는 마치 대청의 팔선탁처럼 넓고 고급스러워서 일면 어리둥절
한 느낌을 주었다. 사실 이런 곳에서 시킬 수 있는 음식은 아래층과는
다를 것이다.
"무엇을 드시겠습니까, 손님?"
아직 이른 아침이어서 그런지 실내에 앉아 있는 손님은 백방생 하나밖
에 없었다.
"여기는 어떤 음식들이 되오?"
점원은 옷차림도 단정했고 예의도 분명했으며 기억력도 좋은 것 같았
다. 그는 즉시 이삼십가지나 되는 음식들을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고
또한 거기에 자신의 의견도 덧붙여 주었다. 이를테면 지금은 어떤 음식
을 시키는 것이 나으리라는 것 등이었다. 과연 그 점원이 말하는 음식들
은 하나같이 허름한 현성에서는 구경하기도 어려운 값비싼 음식들이었
다.
백방생은 마침 배가 매우 고팠다. 그는 자신이 이곳에서 얼마나 기다려
야 하는지 알 수 없었으므로 점원이 말한대로 여러가지의 음식들을 주
문하고 또한 친히 세 병의 죽엽청을 주문했다. 백방생은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면서 창밖을 구경했고 이어 생각했다.
(정말로 진낭자는 나를 싫어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잠시 그녀를 다시
만나보고 다시 이곳을 떠나야지. 그럼 어디로 갈까? 음......복주로 가는 것
은 아직 위험할 것이고, 일단은 남창의 망해사로 가서 보물이나 찾아
볼까? )
비록 쉽게 생각은 하고 있었으나 백방생은 문득 가슴에 찬바람이 불
어오는 것을 느꼈다. 진소유, 그녀가 차지하는 비중이 그의 마음속에
이렇게도 대단했던가?
백방생은 왠지 가슴이 초조해 지는듯 하여 그 마음을 억누르기 위해
시선을 창밖의 풍경으로 집중했다.
창밖의 대로(大路)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말과 마차들과 함께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비록 이른 아침이었지만 그들의 행동은 하나같이 활기
가 보였다.
(모두들 열심히 사는 것 같군. 오직 나 혼자만 이렇게 비척거리고 있다
는 말인가? )
그때 문득 눈앞에서 멀쩡히 나아가던 마차를 끌던 말이 갑자기 시뻘건
피를 내뿜으며 나동그라졌다. 그와 동시에 마차가 심하게 뒤흔들리며 바
닥에 부딪쳤다. 그것은 조용하던 대로상에서 느닷없이 일어난 일이었다.
백방생은 갑자기 자신이 그런 특별한 사건을 목격하게 될 줄은 몰랐다.
"으아악!"
멀쩡히 길을 걸어가던 사람들은 갑자기 그런 일이 벌어지자 저마다
비명을 내지르며 달아나기 시작했다. 조용하던 대로상이 갑자기 아수라
장(阿修羅場)이 된 것 같았다.
갑자기 어디선가 날아든 서너개의 인영(人影)들이 빠른 속도로 바닥에
처박힌 마차를 향해 날아갔고 그들의 수중에는 병장기들이 들려있는
것 같았다. 얼핏 보기에도 병장기에 반사된 광채가 번쩍번쩍 살기(殺氣)
를 불러 일으켰다. 그들은 대번에 마차를 박살내려는 것 같았다. 그러
나 그 순간에 도리어 박살난 사람들은 그들 자신이었다.
느닷없이 마차의 내부에서 무엇인지 알 수 없는 황금(黃金) 빛의 광채
가 번쩍 일어나더니 일제히 그 서너명의 몸뚱아리를 베어버렸던 것이었
다.
일순 그들에게서 터져나온 피가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기이하게도
그들의 비명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다만 주위에서 지켜보고 있던 사람
들의 비명소리가 다시 울려퍼졌을 뿐이었다.
"으아악, 사, 살인이다!"
그와 동시에 마차에서 한 사람이 빠르게 위로 솟구쳐 올랐다. 그 사람
의 모습은 분명하지 않았다. 단지 그의 수중에는 어떤 황금빛의 물체가
들려있는 것 같았다.
백방생은 문득 그것을 보고 내심 놀랐다. 그것은 전에 백방생이 보았던
신병이기라는 신검(神劍)과 그 광채가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그
것은 수라교주 구양통(歐陽通)이 가져갔었다. 그런데 그것이 다시 강호
에 흘러나오게 되었다는 말인가?
백방생은 게다가 더욱 놀라게 되었다. 그 괴인은 다름아닌 그가 있는
주루의 삼층을 향해 올라오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백방생은 이제까지
방관자였는데 돌연 그 폭풍의 중심에 빠져 들게 된 것 같아서 안색이
변했다. 만일 저런 쟁탈전의 와중에 휩쓸리게 되면 비록 고의가 아니
라고 해도 화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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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