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무장으로 치르는 전쟁: 칼 피립스의 사랑 시
양 균 원 (시인, 대진대 영문과 교수)
I.
칼 피립스(Carl Phillips)는 《그러다가 전쟁 그리고 시 선집 2007-2020》(Then the War and Selected Poems 2007-2020)으로 2023년도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1959년생으로 미국 워싱턴 주 에버렛에서 태어났다. “미국의 가장 독창적이고 영향력이 강하며 생산적인 서정 시인 중 한 명”으로서 십여 권의 시집과 두 권의 산문집을 출간하여 비평가들의 찬사와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의 시는 종종 동성애자의 사랑, 인간의 취약성, 시간의 흐름과 같은 주제를 다루면서 경험의 복잡성을 탐구한다. 언어가 강력한 감정과 통찰력을 불러일으키도록 치밀하게 다뤄지므로 형식, 기교, 어조, 이미지, 어투 등에서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개인적이고 고유한 경험에서 발원하는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면서 독자들에게 억압된 열망, 자아의 고유성, 인간관계의 복잡성 등을 숙고하게 만든다.
시인의 이름 “Phillips”는 우리말 표기에서 통상적으로 “필립스”라고 할 듯하나 이곳에서는 발음 그 자체에 가깝게 “피립스”로 한다. 하버드 대학에서 학사, 매사추세츠 대학에서 교육학 석사(MAT), 보스톤 대학에서 창작 분야 석사를 취득했고 현재 세인트루이스에 있는 워싱턴 대학 영문과 교수이다.
피립스의 시집으로는 퓰리처상 수상 작품집 외에 《높은 들판의 창백한 색상들》(Pale Colors in a Tall Field, 2020), 《바람은 야생》(Wild Is the Wind, 2018), 《정찰》(Reconnaissance, 2015), 그리핀상 후보작인 《은궤》(Silverchest, 2013),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도서상 수상작이자 전미도서상 최종 후보작인 《이중 그림자》(Double Shadow, 2011); 전미도서상 최종 후보작인 《낮은 목소리로 말하다》(Speak Low, 2009), 《화살의 전율: 시 선집 1986-2006》(Quiver of Arrows: Selected Poems 1986-2006, 2007), 《서부로 말 달리기》(Riding Westward, 2006); 《사랑의 나머지》(The Rest of Love, 2004); 그리고 《록 하버》(Rock Harbor, 2002) 등이 있다. 전미도서상 최종심에 네 차례 오른 바 있다.
《시와 문화》 2023년 가을 호는 피립스의 시를 국내 초역하는 자리일 것이다. 시인과 시에 관한 정보가 한국 독자에게 거의 주어지지 않은 상황을 고려하여 우선 간략한 시인 소개와 함께 대표작 네 편을 통으로 번역한다. 번역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상실되는 영시 자체의 감각과 짜임새에 대한 접근을 돕기 위해 원문을 병기하고 해석을 덧붙인다.
II-1. 〈화살의 전율에서처럼〉(“As from a Quiver of Arrows”)
첫 시선집 《화살의 전율》은 2006년까지 발행된 8권의 시집에서 선별한 시를 담고 있는데 그 제호가 여기에 번역하는 〈화살의 전율에서처럼〉에서 기원하는 듯하다. 시 〈화살의 전율에서처럼〉이 원래 실렸던 곳은 1998년의 세 번째 시집 《헌신에서》(From the Devotions)이다.
우리는 시체를 어찌 처리하는가,
화장(火葬)하는가, 흙이나 돌
속에 안치하는가, 향유, 꿀, 기름을
발라 거즈로 감싼 후
뗏목에 실어 물에 맡기는가?
그의 몸에 대한 기억에 무슨 일이 일어날까,
우리 중 한 명이 당장 서둘러
그 기억을 기록하지 않는다면? 그 몸은
소금처럼 녹을까, 늦은 빛처럼 녹을까?
치실, 고무장갑, 그리고 어딘가 다른 곳에 있는
펜의 어느 씹힌 뚜껑—우리는 그의 물건들을
어떤 방식으로 고려하게 될까, 내버리는가, 아니면
닳아 없어지도록 사용하는가, 그 물건들이
유물이라고 말하고 유물로 대우하는가?
그의 때 묻은 리넨 옷은 중요한가? 그렇다면,
그걸 세탁한다면 잘못일까?
그걸 리넨 옷이 없는 사람들에게
보내야 할지 혹은 우리 자신이 밤이면
추모하는 마음으로 입고, 낮이면
텅 빈 그걸 접어서 선반에 얹어두고
되새겨야 할지 어떤 지침도 없다.
여기, 그의 침대 뒷바닥에 구겨진 사진 한 장이
놓여 있다—왜지? 그 둘은 연인이었을까?
그 사진이 뜻하는 것은 우리가 그걸 발견한 곳에서
그가 그걸 망각했거나 상실했다는 것일까,
아니면 안전한 보관을 의도했다는 것일까? 우리는
만나려 시도해야 할까? 이 다른 남자 역시
망자라면 어떡하지? 혹시 생존해 있으나,
기억하고 싶어 하지 않고, 인간적이라면?
인간적인 나머지 헌물(獻物)과 추모로부터
멀어지는 일은 괜찮을까, 우리가 망각한다면,
때때로 그럴 수밖에 없고 우리가 원하는 전부가
때때로 바로 그것일 뿐이라면? 그렇게 되는 데는 얼마나
숱한 새벽 혹은 새날을 알리는 수탁 울음이 필요할까?
우리가 원하는 것은 안식일뿐 그 밖의 어떤 것도
아니라면 어떻게 될까? 그것은 작아도 발견할 수 있는 것일까?
어떤 구멍 속에 그것은 감춰져 있는가? 그것은, 어쩌면,
한 나라일까? 우리에게 어떻게 하라고 말해줄
안내자가 필요할까? 우리는 나는가? 우리는
수영하는가? 내 두 손으로, 이제 나는 무얼 하게 될까?
What do we do with the body, do we
burn it, do we set it in dirt or in
stone, do we wrap it in balm, honey,
oil, and then gauze and tip it onto
and trust it to a raft and to water?
What will happen to the memory of his
body, if one of us doesn’t hurry now
and write it down fast? Will it be
salt or late light that it melts like?
Floss, rubber gloves, and a chewed cap
to a pen elsewhere—how are we to
regard his effects, do we throw them
or use them away, do we say they are
relics and so treat them like relics?
Does his soiled linen count? If so,
would we be wrong then, to wash it?
There are no instructions whether it
should go to where are those with no
linen, or whether by night we should
memorially wear it ourselves, by day
reflect upon it folded, shelved, empty.
Here, on the floor behind his bed is
a bent photo—why? Were the two of
them lovers? Does it mean, where we
found it, that he forgot it or lost it
or intended a safekeeping? Should we
attempt to make contact? What if this
other man too is dead? Or alive, but
doesn't want to remember, is human?
Is it okay to be human, and fall away
from oblation and memory, if we forget,
and can't sometimes help it and sometimes
it is all that we want? How long, in
dawns or new cocks, does that take?
What if it is rest and nothing else that
we want? Is it a findable thing, small?
In what hole is it hidden? Is it, maybe,
a country? Will a guide be required who
will say to us how? Do we fly? Do we
swim? What will I do now, with my hands?
(Quiver of Arrows 63)
시의 제목 “As from a Quiver of Arrows”는 어떻게 번역될 수 있을까? 시에 화살이나 화살통에 관한 언급은 등장하지 않는다. 단어 “quiver”는 명사적 용법에서 (1) 진동, 전율 (2) 화살통의 뜻을 지닌다. 그래서 처음에는 마치 “화살통에서 (어떤 현상 혹은 상황이) 일어나듯이”라고 번역해 본다. 그런데 이 시를 표제 시로 삼았을 시선집은 “Quiver of Arrows”를 제목으로 뽑으면서 “quiver”에서 부정관사 “a”를 생략하고 있다. “quiver”는 전율을 지시하거나 화살통을 뜻하는 경우 모두에서 가산명사로 사용될 수 있다. 그렇지만 후치하는 “of arrows”의 수식을 당하면서 부정관사 없이 쓰인 “quiver”는 어쩐지 화살통보다 전율을 뜻하는 듯 여겨진다. 시위를 떠난 화살의 전율, 이것이 뭔가 시적으로 강하게 다가온다. 어떤 해석이 더 바람직할지는 그것이 시의 내용을 얼마나 잘 대변할 수 있는지에 따라 정해질 수 있을 것이다.
이 시는 답 없는 질문이 주도하고 있다. 왜 그럴까? 첫 연에서 화자는 우리가 시체를 처리하는 여러 방식에 관하여 묻는다. 죽음을 대하는 방식과 시체를 다루는 방식은 문명과 역사에 따라 달라져 왔다. 세상에 알려진 시체 처리 방식을 열거하는 이유는 그중에서 답이나 결론을 찾거나 유도하려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왜 질문을 나열하는가? 혹시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고 말하려는 것일까. 혹은 우리는 관습에 따르고 있을 뿐 죽음 혹은 죽은 몸을 대우할 궁극적 방식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일까?
화자는 망자에 관해 어떤 사유를 보여주는가? 흥미롭게도 화자는 망자의 “몸에 대한 기억”이 사라질 것을 걱정할 뿐 그의 정신이나 업적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언급하지 않는다. 죽음이 화자에게 일으키는 상실의 두려움은 망자가 사후에 남기게 되는 소유물에서 극적으로 표현된다. “치실, 고무장갑, 그리고 어딘가 다른 곳에 있는 / 펜의 어느 씹힌 뚜껑”이 화자에게 (그리고 독자에게) 불러일으키는 정서는 무엇일까? 여기 언급된 망자의 유품은 영적이거나 지적이지 않다. 필생의 업적이나 성취 따위와 전혀 무관하다. 펜 뚜껑조차 씹힌 것이고 그나마 펜 자체는 현장이 아닌 다른 곳에 있다. 화자는 망자의 유품을 처리할 “어떤 지침도 없다”고 지적한다. 그는 누군가의 죽음에 직면하여 그간에 우리가 유지해온 죽음에 관한 관습적 인식을 철저히 불신하는 가운데 불안과 당혹 속에 처하게 되는 듯하다. 망자를 보내면서 우리는 영혼의 안식을 빌고 사후 세계의 구원을 기원하기도 한다. 이런 관습에 반하여 죽음 이후에 몸만 남는다는 사실을 냉정하게 받아들이는 관점이 있을 수 있다. 화자는 죽은 자의 몸이 영혼이 배제된 채 그마저 곧 사라지게 되는 상황에 관해 우려하고 있다. 누군가는 망자가 우리 곁을 떠난 후에도 우리가 그를 기억하는 한 그는 살아있다고 강변할 수 있다. 하지만 화자는 누군가 그 기억을 서둘러 기록하지 않는 모든 것이 사라질 것이라고 진단한다.
“때 묻은 리넨 옷”은 중요한가? 중요하다면 어떻게 그런 것일까? 더럽혀져 있다고 해도 그 옷은 그의 땀과 체취가 묻어 있다. 따라서 생전의 그를 느끼게 해주고 추억하게 해주므로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 옷을 세탁하는 것은 실용적이면서 위생적일 것이지만 그 정서적 가치를 망가뜨리므로 “잘못”일 수 있다. 그렇지만 뒤에 남겨진 자의 정서적 유대와 상관없이 망자는 이미 사라졌고 몸과 유품 또한 곧 사라질 것이다. 그의 리넨 옷은 세탁을 거쳐 필요한 사람에게 전해졌을 때 그 효용가치가 살아날 수 있다. 죽음에 관한 관습적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산 자의 길을 가는 것이 냉혹하나 마땅한 것일 수 있다. 두 가지 혹은 그 이상의 가능성 사이에서 화자의 사유는 불확실성 속으로 계속 빠져든다.
망자의 침대 뒷바닥에 놓여 있는 “구겨진 사진 한 장”을 중심으로 화자가 삶과 죽음 그리고 존재에 관해 어떤 사유를 전개하는지 살펴보자. 연인의 사진은 한때 그들이 사랑하는 사이였음을 알려준다. 그런데 그 사진은 침대에 가려져 있다가 유품 정리 과정에서 발견된 것으로서 구겨져 있다. 화자는 “침대 뒷바닥”이 망자가 생전에 사진을 버리거나 실수로 잃어버린 곳일 수 있고 또한 소중하게 숨겨둔 곳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사랑은 변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화자는 사랑은 변하는 것일 수 있다고 여기는 듯하다. 침대 뒷바닥에서 발견된 구겨진 사진 한 장은 화자에게 이별의 흔적이면서 또한 사랑의 기록으로 다가온다. 사랑이 이별에 이른다고 해도 그 사랑은 여전히 유의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죽음이 절대적이고 몸의 기억마저 무뎌질 게 엄혹한 사실이라고 해도 그에 앞서 진행되었던 삶, 생명의 시간은 여전히 의미가 클 수 있다. 그렇지만 이렇게 자신을 위로하는 가운데 화자는 망자의 옛사랑이 먼지 속에 방치되었다는 현실을 직시하고 있기도 하다.
화자는 “인간적”인 상태를 어떻게 설명하는가? “인간적”이라는 용어는 사람마다 다른 뜻으로 사용할 개연성이 크다. 화자는 사진 속 망자의 옛사랑이 이미 저세상 사람일 수 있으며 살아 있더라고 옛 기억을 되살리고 싶어 하지 않을 수 있다고 진단하면서 그러한 태도가 “인간적”이라고 말한다. 무상한 인생에서 망각은 필연적이고 “인간적”인 나머지 탓할 수 없다. 사랑 후의 이별에 망각이 스미듯 죽음 후의 이별에도 망각이 뒤따를 것이다. 삶에는 피할 수 없는 상실이 존재한다.
시의 마지막 문장 “내 두 손으로, 이제 나는 무얼 하게 될까?”에서 화자는 실존적 상실과 직면하여 자신의 다음 행보를 탐색하고 있다. 다행하게도 그는 운명론자나 관념주의자의 무기력에 빠지지는 않는다. 죽음, 사랑, 삶에 관한 다양한 사유를 이끌어가면서 “내 두 손으로” 행할 수 있는 일을 현실의 영역에서 찾고 있다.
이 시는 끝까지 질문이 나열되고 있다. 질문들 사이에서 화자는 어떤 선택을 감추고 있는가? 아니면 그 어떤 것도 선택할 수 없는 불확실성 속에 있는가? 아니면 여러 관점의 대립 혹은 나열 속에 모종의 특이한 태도를 은근히 내비치고 있는가? 화자는 낭만주의자, 사실주의자, 실존주의자 중에 어느 쪽에 가까운가? 낭만주의 시 문학 전통에 따르는 애도 시 혹은 추모 시 형식에서 죽음의 주제는 대체로 어떻게 다뤄지는가? 이 시에서 죽음의 주제를 다루는 방식은 이와 어떻게 다른가? 이 시는 독자에게 화자의 질문에 부응하여 여러 근본적 질문을 계속하도록 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이 시는 죽음에 관한 사색에서 일종의 애도 시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죽음을 미화하지 않는 방식에서 새로운 애도의 길을 개척하고 있다. 이 시는 옛사랑에 관한 사색에서 사랑 시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랑을 미화하지 않는 방식에서 새로운 사랑의 방식을 모색하고 있다. 죽음이든 사랑이든 상실의 고통을 안겨주나 그 냉혹한 현실을 직시하면서 우리는 삶을 이어가고 그 가치를 긍정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것이 시 안의 화자가 시 밖의 우리에게 던지는 최종의 질문일 것이다.
II-2. 〈은궤〉(“Silverchest”)
제목이 “은궤”(銀櫃)이나 본문에 은 상자 자체가 등장하지는 않는다. 피립스는 제목 설정에부터 행과 연의 구분과 배치 그리고 구두법 사용에 이르기까지 용의주도한 면을 드러낸다. 제목은 확장된 비유 혹은 환유의 방식으로 내용과 맺어진다. 제목은 본문과의 다소 멀게 설정된 관계가 여하히 구성되는 방식에 따라 여러 의미를 함축할 수 있다. 제목에 등장하는 은이 상징적으로 내포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제목에 등장하는 궤는 비유적으로 무엇을 내포할 수 있을까? 은과 궤는 서로 결합하여 본문과 맺는 모종의 관계 속에 무엇을 표상할 수 있을까?
우리의 옛 존재, 그건 두렵지 않다고, 난 생각해요, 그러다 두려워요,
거의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고 해도. 두 눈을 떴고,
보았고, 감았어요, 닫아버렸어요.
아침나절 평소처럼 눈부시게 아름다운 것들이
이제-완전히-거칠어진 호랑가시나무 강기슭을 뚫고 휘어 올라가요;
노래라면 귀뚜라미 떼, 매력이라면 모르포스 나비 떼, 그 매력은
고요하여―푸르고 고요하여 . . .
당신: 그 어떤 것도, 심지어 빛조차도 몰아낼 수 없는 어둠.
나머지 잎들 사이에서
뒤척임을 멈추지 않을
단 하나의 잎이었던, 당신.
당신을 위해.
Unafraid is what we were, I think, and then afraid,
though it mostly seemed otherwise. I opened my eyes,
I saw, I closed, I shut them.
The usual morning glories
twist up through banks of gone-wild-by-now holly;
crickets for song, morphos for their glamour, which
is quiet―blue, and quiet . . .
You: the dark that nothing, not even the light, displaces.
You, who have been the single leaf that
won’t stop tossing,
among the others.
For you. (Then the War 124)
“우리의 옛 존재”(what we were)는 과거 상황에 속하나 이것을 서술하는 “두렵지 않다고”는 현재 상황이다. 시 전체에서 과거는 현재에 영향을 미치고 있고 화자는 이것을 견뎌내면서 대응하는 목소리를 낸다. 화자가 과거의 기억에 직면하여 발휘하는 모종의 견인주의적 역학의 목소리에서 어떤 힘을 감지하는 것이 시의 이해에 핵심적이다. 첫 행에 “두렵지 않다고”와 “두려워요”의 이중적 상태가 함께 제시된다. 두려움을 모르던 상태에서 두려움을 지각한 상태로 옮겨와 있다. 무지 혹은 순수의 상태에서 벗어나 인생의 단맛과 쓴맛을 모두 경험한 자의 새로운 각성이 일고 있다. 그 밖의 다른 대조의 양상으로 빛과 어둠 그리고 소음과 고요가 발견된다. 특이하게도 이러한 이중적 요소들은 대조적 특성에도 불구하고 화자에게 반드시 대립과 갈등을 부추기지는 않는 듯하다. 시에 등장하는 긍정과 부정의 요소는 화자에게 선택을 요구하지 않고 어떻게든 서로 맺어지는 듯하다. 겉으로 보이는 것과 실재 사이에 차이가 있으나 그 둘은 화자의 내면에서 어떻게든 소화되고 있다. 두려움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다고 해도 항상 속에 존재해 왔다. 화자는 양면성 혹은 복잡성을 삶의 진행에 필수적인 것으로 수용한다. 과거의 고통은 극복되거나 해결되지 않더라도 화자가 견지하는 모종의 역학에서 현재의 균형에 이르고 있다.
“두 눈을 떴고, / 보았고, 감았어요, 닫아버렸어요”라는 문장과 “아침나절 평소처럼 눈부시게 아름다운 것들이”로 시작하는 문장 사이에서 행 바꿈이 이뤄진다. 여기서 뒤 문장은 (한 행 위에 있는) 앞 문장이 끝나는 곳 아래까지 여백을 두고 시작한다. 이러한 형식적 기교는 두 부분 사이에 일어나는 극적 전환을 효과적으로 구현한다. 앞 문장이 모종의 두려움을 드러내는 데 반하여 뒤 문장은 구체적 이미지를 통해 아름다운 분위기를 조성한다.
그렇다고 화자가 세밀하게 구성하는 풍경이 그저 아름답기만 한 것은 아닐 수 있다. “이제-완전히-거칠어진 호랑가시나무 강기슭”은 야성을 품고 있다.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눈부시게 아름다운 것들”에 포함될 수 있을까? “눈부시게 아름다운 것들”(glories)은 시의 전체 맥락에서 어둠과 빛, 소음과 고요 모두를 포함하는 어떤 것을 가리킬 수 있다. 귀뚜라미의 노래는 시끄럽고 모르포스 나비는 고요하고 푸르다. 화자의 마음에서 푸른 빛을 띠는 모르포스 나비는 귀뚜라미의 소란한 노랫소리를 배경으로 고요하게 날갯짓하고 있다. 대립할 수도 있는 두 가지가 화자의 마음에 어떻게든 공존하고 있다.
“닫아버렸어요”라고 자조하는 목소리는 “궤”의 뚜껑이 닫힌 상태를 떠올린다. 하지만 아침나절의 “강기슭을 뚫고 휘어 올라가”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것들”은 그 뚜껑이 열리는 것을 상기시킨다. 그 상자(궤)가 은인 것은 그만큼 아름답기 때문일 것이다. 은(銀)은 종종 되비침 혹은 빛의 발산에 연계된다. 상자는 무엇인가를 품은 상태를 표상한다. 속에 품은 두려움을 반추하고 거기서 빛의 발산이 이뤄지는 역학에서 은궤는 빛과 어둠의 조화를 상징할 수 있을지 모른다.
“당신”은 화자에게 어떤 존재인가? “심지어 빛조차도 몰아낼 수 없는 어둠”인 “당신”에게 화자는 전력을 다해 다가가고 있다. 그 밖의 모든 잎이 꿈쩍하지 않는 사이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죽 흔들림을 멈추지 않은 유일한 잎인 당신에게 화자는 온 마음을 바치고 있다. 이 시는 마지막 행에 배치된 “당신을 위해”(For you)로 끝나고 있다. 어떻게 칠흑 같은 어둠과 영원한 흔들림을 사랑할 수 있는가? 아름답기 때문일 것이다. 단, 그 아름다움은 “이제-완전히-거칠어진 호랑가시나무 강기슭을 뚫고 휘어 올라가”는 종류의 것이다. “휘어 올라가”는 모양은 영어 단어 “twist”를 번역한 것이다. 그 단어는 뭔가 비틀려 있는 상태를 함축할 수 있다. 은궤는 화자의 가슴 혹은 마음을 상징할 수 있다. 그 안에 뿜어져 나오는 어느 특별한 아름다움은 순수와 경험, 빛과 어둠, 소음과 고요를 어떻게든 조화할 수 있는 어느 역학에서 생성되는 게 아닐까.
II-3. 〈당신이 가진 모든 사랑〉(“All the Love You’ve Got”)
〈당신이 가진 모든 사랑〉은 2019년의 소책자 시집 《전투 인형이 있는 별자리표》(Star Map with Action Figures)에 담겨 있다. 시인의 주석에 따르면 이 시집은 《높은 들판의 창백한 색상들》(2020)에 앞서 출간되었으나 실제로는 이후에 써낸 작품들을 품고 있어서 이에 따라 두 번째 시선집에서는 창작 시대순에 따라 《높은 들판의 창백한 색상들》 이후에 배치된다. 결과적으로 〈당신이 가진 모든 사랑〉은 퓰리처상 수상 작품집인 두 번째 시선집의 맨 마지막에 위치해서 시인의 관심을 대표적으로 함축한다는 기대를 품게 한다.
이제, 바라는 대로 모든 사람을 해산했으니
그는 밤마다 불안하게 만드는 자신의 꿈을 해산할 수
있을 것이다—그 흔들림 없이 한결같이 알고 있는 것, 그리고
그 가치에 대한 믿음, 이곳에서 그가
왕이라는 것, 이것이 뜻하는 바는,
최소한 겉으로는, 가장 적은 의심의 흔적에 대해서조차
낯선 사람이라는 것—이 모든 일 이후에, 왕은
왕족의 텐트에서 나와, 물의 소리를 향해,
강이 마땅히 있어야 할 곳으로, 걸어가고 있다. 강이 있어,
남쪽으로 강이 되어가고 있다,
여러 강이 그런 경향이 있듯이. 강가에는,
두 남자가 떡을 치고 있다. 젊은 남자들. 너무 어려서
떡을 치는 일에 관해 거의 알지 못할 거라고, 왕은 생각한다, 왕은
두 남자가 그들 사이의 볼일에 어떻게든 어떤 우아함을 데려오는 것을
주목할 수밖에 없다—누군가는 사랑과 혼동할 수도 있는
어떤 우아함을. 하지만 왕은
좀처럼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다,
다시 말해, 그는 자비를 목격하게 될 때 그것을 알아차린다. 자비는
떡 치는 일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사랑은
우아함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기억이 제작법을 알고 있는
유일한 강들이 없다면 꿈이란 무엇인가? 일종의
음악이,
두 남자가 일상적으로 하지만 예측 불가능하게 서로에게
들어갔다 물러나면서 위치를 바꾸는 방식에 맞춰져 있다. 그건 마치 그들이
이렇게 진행될 듯한 어떤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왕이에요, 아니
당신이 왕이고 나는 강이에요, 아니 당신이 강이에요.” 그렇게
계속 이어진다. 그들을 내버려 두세요; 그들은 해를
끼치지 않아요. 더디게,
불면증에 시달리면서, 되돌아가고 있는 왕. 어두운 밤이지만 완전히 어둡지는
않다: 그렇다, 달이 뜨지는 않았으나, 소나무들 사이로, 충분한 별들이
여전히 보인다. 누구라도 그곳에 가면,
나를 통과시켜 주세요.
손으로 구슬 단추를 하나씩 꿰맨 양단 망토,
그 속에, 더 바람이 잘 통하고 더 가벼운 직물 망토,
그 속에, 왕의 가운뎃다리는 마치 유연성 그 자체처럼
왼쪽 허벅지에 늘어져 있다. 별빛은 얼마나 부드럽게 비추는지.
And now, having dismissed everyone as he
wishes he could dismiss his own dreams that make each
night restless—that same unswayable knowledge, and
the belief in it, that he is
king here, which means
being a stranger, at least outwardly, to even the least
trace of doubt—after all of this, the king has stepped
from the royal tent, is walking toward the sound
of water, where the river must be. There’s the river,
rivering south,
as rivers tend to. Beside the river,
two men are fucking. Young men. Almost too young
to even know about fucking, thinks the king, who can’t
help noticing how the men bring a somehow grace
to the business between them—a grace that some might
confuse with love. But the king
rarely makes mistakes,
which is to say, he knows mercy when he sees it. What
does mercy have to do with fucking? What does love
have to do with grace? What are dreams but the only
rivers memory knows how to make? There’s a kind of
music
to how the men routinely but unpredictably trade
places entering and withdrawing from each other. It’s as if
they’re singing a song that might go “I’m the king, no you’re
the king and I’m the river, no you’re the river.” On and on,
like that. Leave them; they do
no harm. The king making
his slow, insomnia-ed way back. The night dark but not dark
entirely: moonless, yes, but through the pines enough stars
still visible. Whoever goes there,
let me pass. Beneath
the brocaded cloak, each bead stitched to it by hand,
beneath the cloak of some more breathable, lighter fabric
beneath that, the king’s cock rests like tenderness itself
against the king’s left thigh. How soft the stars look.
(Then the War 193-94)
이 시에서도 제목과 본문 사이에 상당한 거리감이 작용한다. 시의 주인공은 제목의 “당신”이 아니라 본문의 “왕”이다. 강가에서 성관계를 맺는 두 남성 또한 이야기 구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리고 두 부류의 인물 사이에 그 관계에 관해 숙고하는 화자가 있다. 독자는 화자의 목소리를 분별하고 그에 귀 기울임으로써 시의 핵심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제목에는 뜬금없이 본문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당신”이 제시되어 있다. 화자는 시의 본문에 구현되는 모종의 사랑에서 “당신”의 사랑과 유사한 (혹은 대비되는) 요소를 발견하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화자는 자신의 사랑에 관한 입장을 청자 “당신”에게 전달하고 있는 셈이다.
“이곳에서 / 그가 왕이라는 것”에서 “이곳”은 어떤 곳인가? 구체적 지명이 지정되지 않은 “이곳”은 왕의 존재와 강의 존재가 함께 허용되고 심지어 상호 정체성 환류가 가능할 수 있는 어떤 공간인 듯하다. 시 전체에서 왕은 어떤 존재로 제시되는가? 왕은 “모든 사람을 해산”할 수 있는 권력을 갖고 있다. 또한 자신이 왕이라는 사실을 한결같이 확실하게 알면서 그 사실에 대단한 가치를 부여하는 인물이다. “가장 적은 의심의 흔적에 대해서조차 / 낯선 사람이라는 것”은 그가 자신에 대해 확신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해산은 계급이 높은 사람이 그의 지휘를 받는 사람들에게 지시하는 방식으로 행해진다. 화자가 주인공에게 이런 특성을 부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그는 왜 “모든 사람”을 해산하고자 원했을까? 왕은 한편으로 권위적이고 자기중심적 성향을 띠지만 다른 한편으로 다른 “모든 사람”의 견해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가치를 지키는 힘을 지녔다.
왕은 “두 남자”에 대하여 어떤 위치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 왕은 왕족의 텐트를 나와 물의 소리를 향해 가고 있다. “왕족의 텐트”는 왕이 거주하는 공간과 그 문화의 범주를 상징할 수 있다. 왕은 그곳을 나와 “물의 소리”를 향해 가고 있다. “물의 소리”가 대변하는 새로운 문화는 텐트 안의 그것과 충돌하는 속성을 띨 것이다.
두 남자가 강가에서 떡을 치는 행위에 관해 묘사하면서 화자는 “fucking”이라는 흔하게 접할 수 있는 비속어를 사용한다. 그는 이 “fucking”을 묘사하는 방식에서 어떤 태도를 드러내는가? 옹호나 비난의 측면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화자는 떡을 치는 행위를 두 남자 사이의 “볼일”(business)로 표현한다. 성행위를 굳이 “business”로 표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아함”으로 번역한 “grace”는 은총으로 번역될 수도 있다. 이후에 오는 “자비”(mercy)라는 용어까지 고려할 때 화자는 종교적 함축을 의도하고 있는지 모른다. “자비”로 번역한 “mercy”는 “다행한 일” 정도로 번역해서 종교적 함의를 희석해 볼 수도 있다.
두 남자 사이의 동성애적 성교에 관한 화자의 태도는 반드시 부정적인 것은 아닌 듯하다. 화자는 두 남자 사이의 성관계에 누군가 사랑과 혼동할 수도 있는 어떤 우아함이 있고 왕이 그런 사실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는 한편으로 “왕은 / 좀처럼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다”고 그의 확신의 자세를 인정하면서 다른 한편에서 그가 동성애의 우아함을 새롭게 인정할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이러한 관계 설정에서 화자는 동성애에 관한 세상의 편견에 변화가 일어날 가능성을 희구하고 있다.
이를 위해 화자는 떡 치는 일, 자비, 사랑, 우아함을 연결하는 논리를 도입한다. “유일한 강들”(the only rivers)이 상징하는 (뜻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the only”는 뒤에 단수 명사를 취하는데 여기서는 복수 명사 “rivers”가 따라온다. 모종의 강이 “유일한” 것으로 여럿 흐르고 있다. 그 강들은 화자에게 (나아가서 세상에) 희귀한 것이어서 “유일한” 것일 수밖에 없다. 화자에게 그리고 두 남자에게 그 강들은 “유일한” 해결책일 뿐이다.
화자가 두 남자의 성행위를 묘사하는 방식은 아름답고 음악적이기까지 하다. 노랫말에 등장하는 “왕”과 “강”은 둘 사이의 지위가 수시로 바뀌게 묘사된다. 남성성과 여성성이 수시로 정체성 환류를 이룸으로써 둘은 세상이 세운 경계를 허물고 있는지 모른다. 그런데 노랫말 전후에 등장하는 “왕”과 노랫말에 등장하는 “왕”이 같은 인물인지 아닌지에 대해 논해볼 필요가 있다. 두 왕이 다른 인물인데 그들 모두를 왕으로 통칭할 수 있는 때는 그들이 둘이면서 하나일 때일 것이다. 왕이 왕이면서 강이고 강이 강이면서 왕인 상황에서 왕은 남성적이면서 또한 여성적일 것이다. “누구라도 그곳에 가면, / 나를 통과시켜 주세요”라는 언급에서 화자는 그러한 유토피아적 공간을 향한 열망을 드러내고 있다.
마지막 부분에서 왕은 양단 망토 속에 직물 망토를 입고 있다. 겹겹이 옷을 입은 모양새는 그가 처한 관습과 격식의 현실을 대변한다. 강가를 벗어난 현실에서 “왕”으로 군림하는 인물은 형식과 제도 속에 꼭꼭 싸매져 있다. 그 억압에 짓눌려 있는 “왕의 가운뎃다리”는 “유연성 그 자체처럼” 힘없이 “왼쪽 허벅지에 늘어져 있다.” 왕의 가운뎃다리에 대한 냉소적 묘사는 마지막 문장 “별빛은 얼마나 부드럽게 비추는지”와 나란히 놓임으로써 상황의 아이러니를 이룬다. 권위적 남성성에 갇혀 왕의 음경은 무력할 수밖에 없으나 두 사내가 떡을 치는 강가에는 찬란한 별빛이 쏟아지고 있다. 이것이 화자가 “당신”에게 하고 싶은 말인지 모른다. 이 시의 화자는 성 소수자를 향해 “당신이 가진 모든 사랑”도 강가의 사랑과 같다고, 세상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더라도 주눅 들지 말라고, 왕도 언젠가는 변할 거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닐까.
II-4. 〈그 일이라면 다정한 면이 아예 없으니〉(“For Nothing Tender about It”)
제목에서 “그 일”로 번역한 “It”이 무엇을 지시하는지 알 수 없다. 본문과 연계하여 추론해 보지만 “그 일”이라 칭할 구체적 사건이 명시되지 않는다. 이런 제목은 본문의 내용을 그 자체에 국한하지 않고 그와 유추적 관계에 있는 모든 상황으로 확장한다. “그 일”은 시인 자신뿐만 아니라 세상의 편견에 맞서 사랑의 고통을 겪는 모든 이의 “그 일”을 내포하게 된다.
수치심이 기억에 따라다니듯이, 욕망 역시 그렇다면,
이것은, 내 둘레를 가까이 감싸고 있으나
내가 벗어던지기를 거부하고 있는, 이 그림자들의 망토는, 욕망인가?
하지만 호수는 끝이 없어 보인다.
내가 탄 배는 점점 더 그저 느려터진 수영자로서,
파도를 가로지르고―내가 뜻하는 것은,
내가 상처를 알고 지내왔다는 것; 난 죽 두려웠다. 때때로
포병대를 데리고 오는 것을 망각한 것과
의도적으로 비무장한 채 전쟁에
등장하는 것 사이의 차이는
그저 그런 것: 하나의 차이일 뿐이다. 잃어버린 어느 곡조는 때때로,
고려된 적이 없고, 획득되지 않았으나, 어떻게든 다시 표면에 부상한다. 그냥 그렇게.
나는 순전히 믿음만으로 내가 스스로 가능하게 만드는 동물이 아닐까?
If as shame is to memory, so too desire,
then is this desire, this cloak of shadows,
that I wrap close around me, that I
refuse to take off?
But the lake looks endless.
And my boat’s increasingly but a slowish swimmer,
across the waves―I’ve known
hurt, I mean; and I have been afraid. Sometimes
the difference between forgetting
to bring along artillery and showing up
on purpose to the war unarmed
is just that: a difference. Sometimes a lost tune,
unreckoned on, unearned, resurfaces anyway. Just because.
Am I not the animal by belief alone I myself make possible?
(Then the War 160)
시 전체에서 기억과 망각의 주제는 어떻게 다뤄지는가? 엘리엇은 《황무지》(The Waste Land)에서 4월이 “기억과 욕망”을 뒤섞어 “가장 잔인한” 달이고 겨울은 “망각의 눈”으로 감싸 우리를 따뜻하게 했다고 썼다. 피립스의 시에서 기억은 우선 수치심을 동반한다. 《황무지》에서는 성적 불능에 처한 자가 기억에서 욕망의 고통을 겪으나 피립스의 시에서는 세상으로부터 성적 차별을 받은 자가 기억에서 욕망의 상처를 입는다.
화자에게 호수는 명상의 장소나 안식의 장소가 아니다. 그곳은 힘들게 가로질러야 하는 고난의 장이다. 호수가 그에게 끝이 없어 보이는 이유는 고통이 해소될 여지가 없는 탓이다. 화자는 고통의 원인에 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뚜렷한 사건에 대한 묘사 없이 호수를 건너는 일을 그냥 전쟁이라고 간단하게 압축해 버린다. 그런데 그 전쟁의 형세는 처음부터 불공평하게 한쪽으로 기울어 있다. 저쪽은 중장비로 무장한 상태인데 이쪽은 무장해제 상태이다. 그는 자신이 치르는 전쟁의 여건을 “포병대를 데리고 오는 것을 망각한” 상태와 “의도적으로 비무장한” 상태로 요약한다. 두 상태 사이에는 “그저 그런 것: 하나의 차이일 뿐”인 차이가 존재한다. 이것은 어떤 종류의 차이인가? 결과가 같다는 점에서 사실 차이가 없는 차이라고 할 수 있다. 그에게는 자신을 지원해 줄 포병부대가 없다. 그런 지원부대가 있다고 해도 전장에 데려올 것을 망각해 버렸다. 세상의 편견에 무지하고 사랑의 열망에 불타오른 나머지 혼자서 해결할 수 있다고 믿어버렸는지 모른다. 찾아보면 둘의 사랑을 지원해줄 사람들이 없지 않으련만 그는 그들을 데려오는 것을 망각했다. 또한 그는 의도적으로 무장을 하지 않은 채 전쟁에 임하고 있기도 하다. 그는 피투성이 싸움을 치르지 않고서도 자신이 택한 사랑의 방식을 실현할 수 있다고 확신했을 것이다. 세상과 중무장 전쟁을 치르는 일은 세상에 큰 상처를 남길 것이므로 화자는 그 상황을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두 상황에 차이가 있지만 “그저 그런 ... 하나의 차이”일 뿐이어서 결과는 마찬가지로 패배일 뿐이다.
시인은 마지막 한 문장이 한 행으로서 한 연을 구성하도록 배치한다. “나는 순전히 믿음만으로 내가 스스로 가능하게 만드는 동물이 아닐까?” 이 결론적 반문에서 화자는 “순전히 믿음만으로” 그리고 “스스로” “가능하게” 만들어낸 “동물”이 바로 “나”라고 토로하고 있다. 나의 존재는 세상의 뒷받침 속에 있지 않다. 현실의 여건이 허용하지 않으므로 “순전히 믿음만으로” 그리고 오직 자신의 힘으로 나를 가능하게 해야 한다. 지원 세력 없이 홀로 비무장한 채 세상의 편견에 맞서 전쟁을 치르려 한다. 화자의 목소리가 단호하다. 예정된 패배에도 불구하고 화자는 어떤 승리를 꿈꾼다. 상실과 망각 속에 “잃어버린 어느 곡조”는 “어떻게든 다시 표면에 부상한다”고 믿는다. 이유는 분명하게 따질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냥 그렇게” 이뤄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 시를 읽으면서, 우리가 꿈꾸는 자유로운 사랑은 어차피 믿음의 방식으로 가능해지는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III.
피립스의 서정시는 사랑의 영토를 새롭게 확장하는 데서 이채롭다. 개인적인 제재를 다루나 자전적 요소를 세부적으로 명시하지 않는 방식이 눈길을 끈다. 성 소수자의 차별은 우리 시대에서 진보적으로 다뤄져야 할 문제일 것이다. 그 정치적 긴박성에도 불구하고 피립스의 언어는 구호와 주장을 내세우지 않는다. 정서적 효과를 강화하기 위해 언어와 형식을 능숙하게 다루는 솜씨가 엿보인다. 전통적 서정시의 위상을 견지하는 가운데 동성애자의 고통과 꿈을 보편적 차원에서 다루고 있기도 하다. 그의 시는 금단의 사랑과 같이 예민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넓은 독자층을 확보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이러한 성공은 시인이 인간성, 관계의 복잡성, 세상과 자아의 대립, 죽음, 몸 등과 같이 보편적인 관심사를 진술 대신에 탐색의 언어로 접근하는 데서 일부 기인한다. 사랑 시는 윌리엄 셰익스피어, 존 던, 낭만주의 시인, 고백파 시인 등의 시에서 다양하게 목격된다. 피립스의 사랑 시는 이 전통에 새롭게 독특한 목소리를 더해줄 것으로 기대된다. 위에 번역한 시만 놓고 보더라도 그의 사랑 시는 인생에 대한 실존적 탐색에 기반을 두고 금지된 소수자의 사랑을 옹호한다는 점에서 선대 시인들과 사뭇 다른 목소리를 들려준다.
출처:
Carl Phillips. Quiver of Arrows: Selected Poems 1986-2006. New York: Farrar, Straus and Giroux, 2007
_______. Then the War and Selected Poems, 2007-2020. New York: Farrar, Straus and Giroux,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