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장 궁전
밝고 따뜻한 겨울날이었다. 계절에 상관없이, 날씨까지 포함해서 제 계절이 아닌 것에 우리가 얼마나 비싼 대가를 치르는지 깨닫게 되는 날 중 하나였다. 머리 위에 있는 모든 것은 매우 천상적이기 때문에, 발밑은 더욱 지구적이 되었다. 지구적이란 말은 영어로 진창이다. 내 감정과 발 사이의 고통스러운 대비의 희생자인 나는 서울의 경복궁 입구를 지키는 두 개의 돌사자 사이를 지나쳐 버렸다.
이 두 마리의 거대한 짐승은 인상적인 화강암 기념비로 같은 재질의 거대한 받침돌위에 앉아 있다. 그것들은 어느 정도 권위의 상징으로 수입되었기 때문에, 외모보다는 예의상 중국 사자로 불린다. 그것들은 원래 중국에 속했지만, 표정이 너무 기뻐 보여 일본은 차례로 조선에서 그것들을 모방했고, 그래서 그것들을 조선개라고 불렀는데, 이는 그것들이 어떤 특정 동물과 닮았다는 묵약을 별로 신용하지 않는 다는 것을 보여준다.
게다가 중국에는 사자가 한 마리도 없었다. 그것들의 성격은 의심할 여지없이 이질적인 모양보다 더 유용하다. 그것들은 현재 위치에 배치되어 모든 사람을 훑어보고 사악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을 먹어 치운다. 그것들은 분명히 그것들의 임무를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나는 그것들을 지나갈 때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이 도덕성 검사를 무사히 통과하자, 나는 외무부 비서 중 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는 친절하게 경복궁을 보여 주겠노라고 제안했다. 그는 키가 크고, 수척한 남자였고, 조선 관복의 유행에 강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렌즈 대신 일반 유리로 된 커다란 동그란 알의 안경을 쓰는 것이다. 그는 안경이 만들어내는 당당한 효과를 위해, 안경이 그의 시야를 방해한다는 사실도 그에게는 유쾌한 고통이었고, 오히려 그가 보기 원하는 순간에만 안경을 벗었다.
그는 이제 외부관문 세 개 중하나를 열도록 명령했고, 우리는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오른쪽 홍예 아래를 지나갔다. 국가의 공식적인 통로는 가운데 홍예다. 현재 국가의 공식적인 행사는 경복궁에서 사라졌다. 지금은 버려진 궁전이다. 이곳은 과거 수년 동안 섭정이었던 대원군의 거주지였으며, 상하이 총독인 이홍장이 그를 폭력적으로 납치 한 후, 공허 속에 방치되었다. 현재의 왕은 왕실의 소수권력자로서 자신이 거주하는 궁궐에서 이사하는 것을 꺼려했다.
그의 아버지인 섭정과의 관계는 결코 유쾌하지 않았다. 그래서 갑작스런 재앙이 있은 후, 창덕궁으로 알려진 곳이 정궁이 되었다. 대원군과 실권을 가진 군주의 복잡한 관계는 나의 조선 왕실의 족보에 대한 시도를 크게 혼란에 빠뜨리곤 했다. 현재의 왕은 왕족의 직계로서 왕위를 계승하였고, 그가 어렸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아버지를 섭정으로 임명하였는데, 아버지는 그 자리가 너무 뜻에 맞는지라 그만 두기를 거부하였다.
그러므로 두 사람 사이에 잃어버릴 애정도 없었다. 사실은, 현재의 왕은 앞선 군주의 양자로 입양되었고, 그래서 그는 마음으로 유대감을 끊은 만큼, 법적으로는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다.
그곳의 모습은 슬프게도 방치를 시사한다. 궁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넓은 뜰이나 정원에 드문드문 잔디가 있을 뿐이다. 정원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약 60피트 넓이의 포장된 통로가 있고, 그 위로 풀들이 다시 자라기 시작했다. 이 통로는 우리가 들어갔던 홍예문에서 정원 반대편 끝에 있는 또 다른 비슷한 문까지 뻗어 있었다. 이 두 곳의 문이 모두 닫혀 있었기 때문에, 왕의 거처로 들어가는 입구의 완전한 위엄은 사라졌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그것은 가장 인상적이었을 것이다.
포장도로로 밖의 돌사자에서 출발하여 바깥문 쪽까지 완만한 오르막길이 세 개의 관문과 두 개의 정원을 차례로 통과하여 마침내 세 번째 건물에 이르니 중앙에 흙으로 된 토대 위에 근정전이 솟아 있었다. 길이 전체에 걸쳐 그것은 완전히 일직선이었고, 일반적인 도로와 정말로 대조적이었다. 포장되지 않은 길 쪽은 더 멀리까지 뻗어 나갔다. 밖에서는 사자 너머로 반마일 떨어진 곳까지 넓은 길이 펼쳐져 있다. 관문은 단순한 출입구가 아니라, 일반적인 형태의 의례적인 출입구로 일반적으로 동일한 형태의 도시의 문보다 세련되었다.
거대한 돌로 된 기초 위에 세 개의 문이 나고, 나무 건축물로 왕관을 썼다. 그 문들은 근정전 자체만큼이나 웅장했다. 처음에, 나는 통일성의 효과를 놓쳤다. 왜냐하면 우리는 너무 많은 작은 관문과 정원을 통해 한쪽 옆으로만 지나갔고, 너무 자주 방향을 틀었기 때문에 나는 모든 방향 감각을 잃었고, 마침내 근정전의 옆 출입구를 통해 나타났을 때, 광대한 경내의 어느 부분과 관련이 있는지 나는 아무런 개념조차 없었다. 이 마지막이자 가장 신성한 정원 주위를 둘러 싼 담장을, 더 좋은 말로 나는 회랑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것은 둘러싸는 순수하고 단순한 쌓인 담과, 시간이 흐르면서 조선에서 항상 하인들이 거주하는 공간으로 발전한 연속적 인 집 사이의 일종의 중간단계였다. 회랑에서 안쪽으로 가면 잔디가 있고, 이어서 돌로 된 난간으로 둘러진 흙으로 된 토대의 중앙에 근정전이 있다. 어떤 면에서 조선에서 가장 훌륭한 건물이며, 유일한 경쟁상대는 여름궁전이다. 그것은 세계 어느 곳에서도 훌륭한 건물이 될 것이다. 그것은 통일성의 웅장함을 가지고 있다. 내가 치수를 재지 않았으니, 나는 독자가 그 크기를 스스로 판단하게 하여, 밖의 계단에 서 있는 사람과 비교하겠다. 건물 전체가 하나의 방이고 그 안에 왕좌밖에 없다고 말하면, 곧 내부의 느낌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근정전은 건축에 관한 몇 가지 특이한 의례법칙을 예시하고 있다. 이층 건물이었다면 첫 번째 가 되는 층을 받치는 나무 기둥은 모두 원형 이다. 이것은 왕실의 건축물을 선언한다. 왕 외에는 누구도 그런 형태를 가질 수 없다. 다른 사람들은 사각형 기둥을 써야 한다. 고대 수학자들 중 일부는 이 관습에 주어진 이유에 기뻐했을 것이다. 원은 사각형보다 더 완벽한 형상이기 때문이다. 지구는 사각형이고, 하늘은 둥글기 때문이다. 왜 서까래에 반대되는 규칙이 있어야하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왜냐하면 사각형의 서까래는 왕의 몫이고, 원형의 서까래는 백성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 부조화의 이유를 발견하지 못했다. 여전히, 근거가 빈약한 원칙은 두 가지 모두를 설명하지 못한다.
넓은 돌계단은 왕실의 또 다른 전유물로 왕의 사회적 명성에 걸맞았다. 3은 평균적인 인간의 거주지로 올라가기에 충분하다고 여겨진다. 그보다 더 많으면 그는 죽임을 당한다.
안팎으로 근정전에 감탄한 후, 우리가 들어갔던 대문을 통해 다시 물러났고, 높은 벽 사이로 길게 트인 회랑 혹은 길을 걷다가, 가장 뜻밖에도 황량한 광경을 보게 되었다. 자연의 존엄한 외피를 덮지 못한 커다란 돌 벽돌 덩어리가 목적도 없이 쌓여 있었다. 다른 곳에는 벽돌 더미가 황폐화된 피라미드처럼 쌓여 있었다. 여기저기 뚫려 보기 흉한구멍들은 주의의 자연과 견줄 만하였다. 사실, 과거 화재로 인한 폐허에는 황량한 잔재가 그대로 있다. 마치 우리가 화재를 목격하는 것 같았다. 그 모든 것이 수년 전에 일어났다고 알고 있다.
이 장면에서 경회루라고 알려진 구역을 출입할 수 있는 작은 관문으로 바뀐 것은 큰 안심이 되었다. 이것은 조선에서 가장 훌륭한 연못의 예다. 연못의 가장 좁은 부분에는 두 개의 돌로 된 통로가 있어 중앙 섬과 밖의 땅까지 이어져 있다. 이 섬 위에는 나무가아니라48 개의 통돌 기둥으로 받쳐진 훌륭한 건물이 있다. 건물 자체는 훌륭하지만, 기초에 비해 상당히 초라하다. 이렇게 훌륭한 돌기둥은 기초에 불과하기 때문에 건물의 일부분이 될 수 없다. 서문만이 작품 자체의 주요 장점이었던 것은 아니다. 연못에는 다른 섬들이 있는데, 그 섬들 주변에는 모두 게으른 물이 잠을 잔다. 더운 여름 오후에 왕비와 그녀의 궁녀들이 닭벼슬산의 높은 봉우리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앉아 있다. 이 관습으로부터 그 장소는 그 이름을 얻었다. 그러나 지금은 얼음 정원이었고, 하얀 수의에는 지난해 갇힌 연꽃의 죽은 잎과 종모양의 씨방이 점점이 찍혀 있었다.
비록 그것이 단지 떠받쳐진 1층이지만 2층이라고 부르지 않을 수 없는 곳에 올라, 우리는 마루 광장을 둘러보며, 연못과 궁전, 그리고 저 너머로 원뿔형으로 솟아 있는 북악산을 바라보았다. 멀리 멀리 불모의 산맥은 마치 대답이라도 하듯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마루 광장의 측면은 조각된 나무로 되어 있고, 그 전체가 서울의 그 어떤 것 못지않게 정교했지만, 어떤 형태의 장식도조선 미술의 특징이 아니기 때문에, 언급할 것은 많지 않다. 왕실의 독점권이 이것의 원인일 것이다. 예를 들어, 나는 왕의 건물에서만 칠이 허용된다고 말할 수 있다. 조선은 일본의 멋진 맛이 많이 부족하다.
우리는 내려와서, 아침의 고요함이 정말로 잠들어 있는 것 같은 풀숲의 좁은 길을 헤매고, 거침없이 북악산의 산등성이를 오른 성벽에 둘러싸인 몇 군데의 진짜 정원을 구불구불 돌아, 다시 길을 되돌아가니, 놀랍게도 마침내 외문에 닿았다.
여기서 나의 친절한 안내원은 다 허물어져 가는 인력거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이것을 가장 훌륭한 가마보다 더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리고 그는 천천히 덜컹거리며 갈 때 가장 무자비하게 요동쳤다. 거대한 호박색 안경들이 무의식적으로 위아래로 흔들리는 이별의 기억을 나에게 남겨주고, 안경 주인은 불편하게 앉아 있으면서 편안하고 품위 있게 보이려고 최선을 다했다.
구궁에서 1마일 떨어진 곳에는 신궁이라 불리는 곳, 즉 현재 조선의 군림하고 있는 군주의 거주지인 부지와 건물들이 있다. 엄밀히 말하면, 두 부분 모두 잘못된 명칭이다. 이곳은 소위 말해 새로운 장소에 있는 것도 아니고, 서양의 관점에서 엄밀히 말해 궁궐의 양식도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조선인들은 두 가지 면 모두 새롭다고 생각한다. 그것의 나이는 단지 비교일 뿐이며, 그 자체로 사용 기간을 포함하고 있지 않은 나이임에 틀림없다.
이 경우, 현재의 경복궁과 비교된다. 하지만 이 경복궁이란 이름에는 어떤 절대적인 정의도 있다. 지금 있는 자리에, 경복궁보다 더 오래된 궁전은 있을 수 없다. 그것은 현 상태의 시작과 동시대의 것이다. 그것은 서울이란 도시가 설립된 때부터 시작되는데, 지금 곧 500주년이 되는 시기다. 새 궁전은 약 100년 후에 세워졌고, 따라서 현재 약 4세기 정도 된 것이다. 나중에 지어진 결과, 그것은 경복궁 보다 다소 덜 명예로운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조선에서는 지위에 따라 의식 절차가 할당된다. 북쪽, 동쪽, 서쪽, 남쪽 - 이것은 네 개의 주요 지점의 상대적 순위다. 예절상 군주는 항상 남쪽을 바라보며 관리들은 북쪽을 바라본다. 같은 규칙에 따라, 일반적으로 만찬이나 잔치 등 모든 의식에서 상석은 방의 북쪽 끝에 있다. 이 특이한 관습은 동서남북 현상에 비추어 네 개의 벽 안에서 행해지는 오락의 예절을 결정한다. 네 개 벽의 방향을 정할 수 없을 경우에는, 주인의 취향에 따라 어떤 방향도 무관하게 마주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서울이 세워졌을 때, 궁궐은 도시의 성벽으로 둘러싸인 공간의 북쪽 끝, 즉 명예의 자리를 얻게 되었고, 두 번째 궁전이 지어졌을 때, 가능한 한 북쪽에 배치되었고, 더 오래된 궁궐의 위치와 일관되게, 왼쪽 궁궐이 도시를 향하도록 배치되었다.
자기들끼리 서열을 정점에 두는 이 풍습의 기원이 정확히 무엇이었는지 알면 흥미로울 것이다. 한 가지 설명을 위해 어설픈 천문학에 눈을 돌려 보자. 피라미드처럼, 그것은 별에 대한 오래된 연구의 유물일 수 있다. 분명, 초기 인류는 천상의 모든 것들이 움직이는 반면, 북극성만이 위엄 있게 제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조선인들 스스로가 이 관습에 대해 땅의 기원을 더 제시하고 있다. 왜냐하면 남쪽은 밝고, 따뜻하고, 그래서 행복한 땅이기 때문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왕은 항상 그 땅을 마주할 수 있도록 앉는다. 극동 민족이 이주할 때 그들이 살던 땅, 이후 옮겨 온 땅, 그리고 현재 그들이 살고 있는 땅의 추운 겨울을 떠올리면, 우리는 생각도 그렇지만 남방을 향해 몸을 돌리는 것이 얼마나 본능적인 것인지 자연히 깨닫게 된다.
창덕궁은 원래 왕세자, 즉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후계자를 위한 거주지로 지어졌는데, 조선에서는 왕위 계승자를 왕이 생전에 선택한다. 누구도 반드시 왕위에 오르도록 타고 나지는 않지만, 왕이 큰아들을 지명하는 것이 관례다. 이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건축학적으로 고궁이 우월한 이유다. 그러나 창덕궁은 그 자체의 매력을 가지고 있는데, 첫째는 땅이 평평해 산책하기 좋고, 둘째는 훨씬 덜 인공적이다. 경복궁은 또한 터의 크기에서 창덕궁보다 어느 정도 더 크다. 높은 담이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데 약천 에이커다. 이 담에는 여러 곳에 문이 설치되어 있는데, 14개다. 그들의 배치에는 대칭이 없고, 담의 경계 자체에 어떤 것도 없는데, 결국 다시 만나게 되면 놀라움을 일으킬 정도로 목적 없이 구불구불하게 서 있다. 문, 즉 홍예문은 크기와 명예가 매우 다양하며, 이는 "광대한 지혜의 문”에서 ”달 보기 문”에 이르기까지 모든 등급의 존경을 받고 있다. 열네 개의 문은 바깥문일 뿐이고, 안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문들이 있고, 이름이 없는 문은 없다. 때때로 그 이름들은 단순히 미학적이다. 때로는 유교에서 따온 도덕적인 정서다. 조선 민족의 내면생활은 이론적으로 선과 미, 그리고 보편적인 이름에 대한 존경이라는 두 사상이 뒤섞여 있을 뿐이어서 구조물들은 평범하고 흔한 종류임에도 이름만은 고귀하다.
그리고 후반부 명칭인 '궁’에 대해서는 궁이라기보다는 궁궐의 집합체라고 할 수 있다. 그 안은 건물, 정원, 뜰로 이루어진 미로다. 왕과 후계자를 위한 강당이 있고, 그 다음에 그들이 각자 살고 있는 별궁이 있다. 왕비의 거처는, 수백 명의 궁녀들로 그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궁녀는 그 직위가 다양하며, 항상 왕비를 모시고, 왕을 제외한 어떤 남자도 볼 수 없다. 이 각각의 거처들 근처에 일련의 마당과 부속 건물들이 있다.
그러나 아마도 가장 크고 아름다운 장소는 반은 정원, 반은 뜰인 곳으로 건물이 설 수 없는 공간이다. 극동의 특이한 점은 자연을 집 안으로 들이는 것이다. 이 용어는 인간의 사적인 즐거움을 위한 인공적인 자연 조성을 가장 잘 표현한다. 이 작업은 우리에게는 흔한, 양극단 사이의 만족스런 지점에 놓는 것이다. 양극단의 한편으로는 거의 손대지 않은 공원이 다른 편으로는 너무 많이 틀에 맞춘 화원이 대표적이다.
이것은 아마도 일본에서 가장 잘 보여 진다. 일본인이 어슬렁거리기 좋아하는 곳은 실제 풍경의 특징을 각색하거나 모방하여, 그가 원하는 곳에 상황에 따라 편리하게 축소하거나, 자연 크기 그대로 옮긴 곳이다. 하지만 화원을 가꿀 때 우리가 채택하는 전통적 박물관식 배열은 결코 아니다. 아무리 개별적으로 아름다운 식물이더라도, 모아 놓았을 때 아주 부자연스러운 방식으로 배열된 것 이상으로 비예술적인 것은 그들에게 감흥을 주지 못한다.
그런 식물의 집합은 꽃집 마당에서만 볼 수 있고, 우리가 평범한 가게 진열장을 보는 정도에 그친다. 그 결과, 특히 꽃을 피우는 관목에만 관심을 보이고, 다년생 식물은 상대적으로 무시한다. 아마도 자연은 세계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관목의 가장 훌륭한 표본을 생산함으로써 식물들이 풍습에 맞도록 도왔을 것이다.
조선에는 일본인들의 인공적인 손길이 부족한데, 이 손길이 일본 섬의 흙을 거의 감정을 지닌 흙으로 바꾸는 것처럼 보인다. 일본에서 이 반(半) 인공적 풍경보다 더 감흥적인 것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조선에는 이것 대신에 다소 장엄한 분위기가 있다. 가장 훌륭한 정원에서는, 세월이 가면서 다소 황폐해진 석축이, 우리가 본 바와 같이, 전체의 주제가 되는 연못물을 감싼다.
따라서 후원에는 여러 개의 연못이 흩어져 있으며, 화강암으로 된 굴곡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섬들이 비슷한 모양으로 경계를 이루고 있다. 같은 방식으로 개울을 가두고 테두리가 둘러지고, 돌다리가 간격을 두고 걸쳐 있다. 작업이 너무 잘 되어 있어서, 주변 환경과 잘 맞는 것 같다. 특히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지는 모든 곳에서 여름별장이 보인다. 조선인들은 운동에 대한 생각과 자연의 즐거움을 결합시키지 않고, 차를 마실 수 있는 경관에서 동시 에 술을 마시는 것을 선호한다.
풍경 대부분에 걸쳐 방치된 예술적 손길이 보인다. 세월과 날씨가 돌을 서로 갈라놓았고, 한때 모든 것이 평평했던 곳이 지금은 길게 갈라진 틈새를 보여주고 있다. 잡초와 풀들이 그러했던 자리에 푸른 꺼풀을 던지려 하고 있다. 그 이름에도 불구하고, 그곳에 거주하는 인간들에도 불구하고, 막 시작된 폐허는 특이하게도 그 지점을 걸출하게 보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