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
길윤형 국제부장
시절이 하 수상하다 보니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해가는 구한말-대한제국 역사에 자꾸 눈길이 간다. 이 시기를 되짚어보며 거듭거듭 깨닫는 것은 사소해 보이는 우리의 ‘판단 미스’가 복잡한 연쇄 작용을 일으키며 국가의 운명을 사실상 결정했다는 사실이다.
1881~1882년 고종-민씨 정권이 구식 군대에 제대로 봉급을 지급했다면, 1894년 봄 동학 농민군 진압에 실패한 고종이 청에 원병을 요청하는 대신 정치적 타협을 택했더라면, 1898년 독립협회가 주도했던 ‘입헌군주제’ 개혁이 조금씩 시행됐더라면, 우린 35년에 걸친 치욕스러운 일제 식민지배와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서러운 분단의 고통에 시름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이후 한세기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나라는 여전히 둘로 쪼개진 상태고 한반도가 세계열강의 힘과 힘이 충돌하는 치열한 각축장이라는 사실 역시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미-중 전략경쟁과 우크라이나와 중동에서 진행 중인 ‘두개의 전쟁’ 여파로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가 구한말-대한제국 시절만큼이나 살벌해진 느낌이다.
2024년의 대한민국이 당시 같은 약소국은 아니겠지만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 2위의 경제력을 자랑하는 중국, 거대한 영토를 가진 ‘핵 대국’이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인 러시아, 한때 우리를 식민지로 만들었던 전통 강국인 일본이 맞붙은 한반도의 지정학은 달라지지 않았다. 안 그래도 정신 사나운 이 ‘기본 구도’ 속에서 한-러 관계 악화, 북-러의 전략적 접근, 남북 관계의 파탄(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1월15일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남과의 화해와 통일을 포기한다고 말했다)이란 극히 우려스러운 변화가 목하 진행되는 중이다.
왜 상황이 이렇게 되었나. 원인은 ‘매우’(!) 단순하다. 윤석열 정부가 2023년 봄~여름께 러시아와 전쟁을 벌이고 있는 우크라이나에 미국을 통해 155㎜ 포탄을 ‘우회 지원’했기 때문이다. 윤 대통령이 그해 4월19일 로이터 통신 인터뷰에서 무기 제공 가능성을 언급하자, 마리야 자하로바 러시아 외교부 대변인은 이튿날 이를 “적대 행위로 간주”하고 “한반도에 대한 우리 접근법”을 바꿀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리고 러시아는 자신이 경고한 대로 1990년 한-소 수교 이후 30여년 동안 이어져온 한반도에 대한 접근법을 바꾸는 중이다.
앞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외교 책사’였던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은 2014년 펴낸 회고록 ‘칼날 위의 평화’에서 그를 괴롭게 한 현실 가운데 하나로 한-미가 갖는 “인식의 비대칭성”을 꼽았다. 즉, 한국엔 생사가 걸린 중대한 문제들이 미국엔 “고작 동아태 담당 국방부 부차관보의 소관”인 여러 옵션 가운데 하나였다는 것이다.
이 비대칭성은 한국이 우크라이나에 포탄을 우회 지원하는 과정에서도 똑같이 작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워싱턴포스트는 지난해 12월4일 당시 미국의 고민을 보여주는 장문의 기사를 공개했다. 2023년 2월3일,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주재로 우크라이나의 반격 계획과 관련한 중요 회의가 열렸다. 작전 진행에서 가장 큰 난제로 꼽힌 것은 우크라이나의 포탄 부족이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미국이 택할 수 있는 옵션은 두개였다. 첫째는 동맹국인 한국에 제공을 요구하는 것, 둘째는 자신이 가진 ‘집속탄’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논의 과정 가운데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이 ‘전쟁 윤리’ 문제를 지적하며 민간인에게도 큰 피해를 일으켜 국제법상 그 사용이 금지돼 있는 집속탄 제공을 강하게 반대했다. 결국, 설리번 보좌관이 이 의견을 받아들이며 윤석열 정부를 상대로 한 미국의 포탄 제공 요구가 본격화됐던 것으로 보인다. 흥미로운 것은 미국이 다섯달 만인 그해 7월 우크라이나에 집속탄 제공을 결정했다는 사실이다. 만약 미국의 포탄 제공 요구에 한국 정부가 좀 버텼다면, 동맹끼리 서로 얼굴 좀 붉히다 끝났을 문제이진 않았을까.
블링컨 장관의 윤리의식에서 시작된 한국의 포탄 지원은 윤석열 정부의 무모함과 연결되며 한반도에 돌이키기 힘들어 보이는 음침한 변화를 만들어냈다. 이제 거꾸로 미국에서 북-러의 전략적 접근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쏟아지고 있다. 윤석열 정부는 이제부터라도 극히 신중해야 한다. 자칫하면 100년 뒤 교과서에 분단을 되돌릴 수 없는 것으로 만든 ‘역사의 죄인’으로 이름이 오를지 모른다.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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