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가슴아픈 역사의 현장 남한산성을 찾았다.
남한산성은 국가 사적 제57호로 조선왕조 제16대 인조임금 원년(1623)에 성의 축성을 시작하여 4년만인 1626년에 완성하였은데, 조선시대 뿐 아니라 삼국시대부터 천연의 요새로 중요한 역할을 하던 곳이다. 백제의 시조인 온조의 왕성이었다는 기록이 있고, 나당전쟁이 한창이던 신라 문무왕 12년(672)에 한산주에 쌓은 주장성이라는 기록도 있다. 고려시대에는 몽고의 침입을 격퇴한 곳이기도 하고 일제 강점기엔 항일운동의 거점이 되기도 한 곳이다. 그러나 남한산성은 결정적으로 병자호란으로 기억되는 곳이다. 조선 인조 14년(1636)에 청나라가 침입해오자 왕은 이곳으로 피신하여 항전하였으나, 왕자들이 피신해 있던 강화도가 함락되고 패색이 짙어지자 세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현재의 서울 송파구 지역인 삼전도에 내려가 치욕적인 항복을 한 역사적 장소이기 때문이다. 청량산(497.8m)을 중심으로 해발 500m 내외의 자연지형을 따라 둘레 12km가 넘는 성벽을 구축하여 많은 병력으로도 쉽게 공략할 수 없는 지리적 여건을 구비하고 있다. 현재까지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경영한 세계사적으로 보기 힘든 초대형 산성의 사례가 되었다.
*** 우리 민족의 삶을 바꿔놓은 전쟁, 병자호란 ***
청태종의 침공(병자호란)은 조선과 청나라가 군사력으로 부딪힌 동아시아의 대사건이다. 이 전쟁을 계기로 동아시아의 질서는 급격하게 청나라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우리 민족 역시 변화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이 병자호란의 중심에는 바로 남한산성이 자리하고 있다. 산성에서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각지의 근왕병과 지원병이 청군의 남한산성 포위를 풀지 못 한 채 모두 격퇴되고 말았으며, 설상가상으로 두 달 분의 비축물자가 바닥나자 결국 인조는 항복을 결심하기에 이른다. 패배의 결과로 인조는 송파에 위치한 삼전도로 걸어 내려가' 삼배구고두례'를 행하고 굴욕적인 강화조약을 맺게 된다. 이로 인해 조선은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고 이후 수많은 변화를 맞게 된다. 패배를 씻기위해 북벌론이 대두되기도 하고, 명분 만을 중시하던 사상체계의 변화가 일어나 수많은 실학자들이 등장하기도 했다. 민중 계층에서도 패배한 전쟁의 결과를 극복하기 위한 수많은 민담과 설화들이 창작되었다. 병자호란은 시대의 변화를 알리는 기폭제였으며 동시에 우리 민족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역사의 분기점이 된 사건이었다.
오늘의 산행은 5호선 마천역 2번 출구를 나와 남한산성을 오르는 들머리를 찾아 산을 오르다가 산성을 만나면 제5암문을 통하여 남한산성 내로 진입하여 - 서문 - 수어장대 - 남문 - 남한산성 주차장에 도착하는 코스를 선택했으며, 귀가 때는 남한산성 버스정류장에서 9번 또는 9-1번을 타고 내려와 전철 8호선 산성역에서 환승하여 귀가길에 올랐다.
마천역에서 출발하여 남한산성을 오른다. 눈으로 뒤덮힌 산야의 공기가 너무나 신선하다.
태풍에 쓰러졌을까...?
언덕길을 한참 올라오니, 쉬어갈 수 있는 장소와 나무의자가 있어 정겹다.
남한산성을 오르며 인증샷
암반지역도 오르고
남한산성에서 전방 관측이 용이한 돌출된 관측소로 연결된 길, 저 앞 언덕을 넘어 가면 전방 관측소가 있다.
제5암문
암문(暗門)은 성곽에 문루를 일부러 세우지 않고 뚫은 문을 말하며 산성에 18개가 있었다고 한다. 주로 일반인이나 적들이 알지 못하게 후미진 곳이나 깊숙한 곳에 위치하며, 전시에 적이 모르도록 비밀스럽게 물자를 이송하거나 사람이 출입할 수 있도록 하였다.
*** 군포 ***
군포는 성을 지키기 위한 초소 건물이다. 기록에 따르면 남한산성 내에 125개소의 군포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는 한 군데도 남아 있지 않다. 발굴조사 결과 군포는 약간 높고 평탄한 대지 위에 있었고,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로 건축했으며, 건물 모양은 맞배지붕에 기와를 얹고 토석벽을 두른 형태로 초소기능에 맞게 정면이 트여 있었다고 한다.
산성을 따라 걸으며
서문(우익문)
남한산성에는 4대문(동,서,남,북)과 비밀스런 암문이 있다. 그 중 서문은 4개의 대문 중 규모가 가장 작고, 산성을 처음 쌓았을 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조 3년(1779)에 다른 문과 같이 개축하며 우익문이라 칭하였다. 행궁을 중심으로 국왕은 남쪽을 바라보며 국정을 살피니, 서문이 행궁 우측에 있어 우익문이라 하였다. 서문은 인조 15년(1637) 1월 30일 왕이 세자와 함께 청나라(장군)에게 항복하기 위해 남한산성을 나간 바로 그 문이다. 비참했던 당시의 상황을 이 서문은 기억하고 있으리라. 남한산성 서문의 밖은 경사가 급해 물자수송이 어렵지만 한강의 광나루, 송파나루 방면에서 산성으로 진입하는 가장 빠른 길이다.
서문에서 남문을 향하는 산성 내 도로(1)
서문에서 남문을 향하는 산성 내 도로(2)
수어장대(왼쪽 건물)와 청량당(오른쪽 건물) 입구에서 촬영한 모습
수어장대와 청량당의 후문격인 조그만 문이 있다. 그 옆에 힘겨운 모습의 고목이 된 향나무가 정취를 더한다.
수어장대(1)
수어장대는 지휘와 관측을 위한 군사적 목적에서 지은 누각이다. 남한산성에 있던 5개의 장대 중 유일하게 남아 있으며, 성 안에 남아 있는 건물 중 가장 화려하고 웅장하다. 인조 2년(1624) 남한산성 축조 때 단층으로 지어 서장대라 불리던 것을 영조 27년(1751) 유수 이기진이 왕명을 받아 2층으로 다시 짓고 '수어장대'라는 편액을 달았다. 수어장대 2층 내부에는 '무망루'라는 편액이 달여 있었는데,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겪은 시련과 8년간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귀국하여 북벌을 이루지 못하고 승하한 효종의 원한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영조가 이름 지은 것이다. 현재 '무망루' 편액은 수어장대 오른편에 보호각을 지어(1989년)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보관하고 있다. 남한산성 수어장대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호로 관리되어 오다 2021년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승격되었다. 또한, 세계문화유산 남한산성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 중 하나인 군사 경관(장대)에 해당한다.
수어장대(2)
수어장대(3)
청량당
청량당은 남한산성을 쌓을 때 동남쪽 축성의 책임자였던 이회장군과 그의 부인 넋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사당이다. 이회는 공사비를 횡령했다는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했고, 이 소식을 들은 부인 송씨는 한강에 몸을 던져 따라 죽었다. 이회는 죽을 때, 자신의 죄가 없다면 매 한 마리가 날아올 것이라 예언을 했는데 과연 매가 날아와 그의 죽음을 지켜보았다고 한다. 후에 누명이 벗겨지고 그가 맡은 공사가 가장 잘된 것으로 알려지자 사당을 지어 초상을 안치하고 넋을 기렸다. 원래의 청량당은 6.25 전쟁 때 소실되어 다시 지었다. 서장대가 있는 산 이름이 청량산이므로 청량당이라 지었다. 죽은 뒤에 사당을 지어 넋을 기리면 뭐란 말인가? 억울한 죽음이 없도록 시시비비를 가리지 못한 그 잘못이 더 큰 것을...
남한산성의 밖에서 바라 본 남문(지화문)
남문은 성의 서남쪽 곡저부의 해발 370m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정조3년 성곽을 개보수할 때 개축하여 지화문으로 칭하였고, 4대문 중 가장 크고 웅장한 중심문이며, 유일하게 현판이 남아 있으며, 성남으로 통하는 관문 역할을 하는 문이다. 인조임금이 남한산성으로 피신할 때 이 곳 남문을 통하여 들어 온 곳이며, 45일간 항전한 유서깊은 곳이다.
남한산성의 안에서 바라 본 남문(지화문)
비석숲
남한산성 내에 산재되어 있던 각종 선정비를 한 곳에 옮겨 모아놓은 곳이다. 선정비는 선정을 베푼 수령에게 백성이 주는 선물이다. 하지만, 스스로(셀프 선정비) 또는 졸개들이 여론 조성몰이로 만든 것은 없을까? 라는 맹랑한 생각을 해 본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