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281
10월17일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연중 제29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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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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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PjpTQGkcS7s (신웅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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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탐욕과 독점으로 상처 입은 우리 사회에 가장 좋은 치유제는 소욕지족의 신선한 바람입니다!>
살아생전 법정 스님께서 평소 각별히 존경하던 자운 스님께 장문의 문안 편지를 올렸더니, 스님께서는 아주 간단한 답장을 보내셨더랍니다. 그 답장이 유명합니다.
‘소욕지족(少欲知足), 소병소뇌(少病少惱)!’
해석하면 ‘작은 것에 만족할 줄 알며, 작게 앓고 작게 걱정하라!’입니다.
평소 우리가 언제 행복해 합니까? 물론 엄청나고 대단한 대성공에 행복해 합니다. 로또 당첨 같은 기적 같은 일 앞에 행복해합니다. 그러나 우리네 인생에서 그런 일이 발생하기란 벼락맞는 것 보다 더 힘듭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참된 행복은 작은 것에서 샘솟는 것 같습니다. 힘겨운 하루 일과를 끝내고 퇴근했을 때, 가족들이 건네는 따뜻한 위로와 격려의 한 마디에 우리는 행복해 합니다. 내 작은 성취와 작은 성공에 함께 기뻐해주는 동료의 모습에 우리는 행복해 합니다.
빡세고 피곤한 하루 일과를 끝내고 귀가하는 길에, 열차 시간이 많이 남아있길래, 이리 저리 산책을 하다가, 웬지 기품이 있어 보이는 커피집이 눈에 띄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사장님께서는 제대로 커피를 공부하신 전문가셨습니다. 그분의 해박한 설명을 들으며 조금 비싼 에티오피아 핸드 드립 커피를 한 잔 시켰습니다.
진한 품격이 느껴지는 한잔의 커피를 천천히 마시고 있다보니, 하루동안 쌓였던 피로가 한 순간에 확 가시는 느낌이었습니다. 너무 비싼 커피를 마셨나?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 나 자신을 위해 이 정도 투자하는 것 별로 나쁘지 않군! 나를 위한 품위있는 커피 한 잔, 하느님께서도 용납해주시겠지!
우리가 평소 누리는 행복이라는 것은 뭔가 엄청나고 대단한 것에서 보다는 작고 소소한 것으부터 온다는 것을 저는 확신합니다.
최근 복잡하게 돌아가는 시국을 바라보며 불교계에서도 던지는 말씀이 소욕지족입니다. 한 노승(老僧)께서는 자본주의가 낳은 폐해인 지구온난화의 원인은 끝도 없는 인간의 탐욕이라고 외치시며, 소욕지족으로 돌아가자고 외치십니다.
저 역시 오늘날 우리나라가 이토록 사분오열된 가장 큰 이유는 지나친 탐욕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 세상 그 무엇이든 과하면 모자람만 못하다는 것, 불변의 진리입니다.
권력에 대한 욕심이 너무 지나치다보니, 장기 독재자가 속출했습니다. 그 결과는 참담할 정도로 비극적이었습니다. 재물이란 것도 적당히 가지고, 너무 많다고 생각하면 적극적으로 공유하려는 노력이 중요합니다. 재물에 대한 과도한 탐욕의 결과 역시 불행하기 짝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내 가족과 자녀들에 대한 탐욕 역시 범국민적 자제와 절제가 요구됩니다. 다른 수많은 이웃 자녀들은 어찌되든 상관없이, 그저 내 자녀의 성공만을 추구하는 과욕과 탐욕이 극단적 교육의 위기 시대를 초래했습니다. 공교육은 붕괴되고 사교육은 기승을 부리게 된 것입니다.
성장 계발 시대 엄청난 국가적 지원과 혜택을 받으며 성장하고 큰 이윤을 남긴 대기업들, 그 이윤을 고생한 직원들과 하청업체들과 통 크게 나누려는 마음, 그리고 사회의 공익을 위한 환원의 마음도 절실히 필요합니다.
지나친 탐욕의 결과는 독점이요 부패, 그 결과는 공멸이요 죽음입니다. 이런 이유로 예수님께서는 ‘탐욕을 조심하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 복음 12장 15절)
다양한 분야에 걸친 탐욕과 독점으로 상처 입은 우리 사회에 가장 좋은 치유제는 범국민적 소욕지족 운동, 소욕지족의 신선한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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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믿음의 기도는 반드시 들어주신다?>
지나치게 기도의 힘에 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가시던 도중 잎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를 말려버리신 다음 그것에 대해 신기하게 여기는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에 희망을 겁니다.
“너희가 기도하며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그러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마르 11,24)
이미 받은 줄로 믿고 청하면 ‘무엇이든’ 반드시 하느님께서 들어주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무엇이든 청하는 것을 다 받았다고 믿을 수는 없습니다. 합당해야만 본인이 믿게 됩니다.
그래서 저도 책상 위에 연필을 놓고 마음속으로 ‘움직여라, 나는 믿는다, 연필아 움직여라.’라고 열심히 해보았습니다. 또는 촛불을 보며, ‘나는 믿는다. 촛불아 꺼져라. 촛불아 꺼져라. ...’라고도 해보았습니다. 그러나 연필은 손으로 움직여야 움직였고, 촛불은 입으로 불어야 꺼졌습니다.
저는 ‘기도해도 안 되는 것이 있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기도가 반드시 들어줄 것이라고 믿기 위해서는 먼저 그 기도가 하느님 뜻에 맞는지 살펴야 합니다. 요한은 자신의 편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그분에 대하여 가지는 확신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그분의 뜻에 따라 청하면 그분께서 우리의 청을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1요한 5,14)
요한은 무엇이든지 ‘그분에 뜻에 따라’ 청하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양심은 우리가 무엇을 청할 때 그것이 하느님 뜻에 맞는 것인지 아닌 것인지 분별해 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만약 손으로 움직일 수도 있는데 저절로 움직이는 기적을 바란다든지, 입으로 불어서 끄면 되는 것을 굳이 기적적으로 꺼지기를 원한다면 자신 안의 양심이 그것을 이미 받았다고 믿게 하지 못하게 만들고 그래서 그 청한 것을 받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에게 한 사람이 찾아옵니다. 그는 자신의 형이 부모의 유산을 혼자 다 챙겼기 때문에 자신에게 나누어 달라고 말해달라는 것입니다.
분명히 보통 사람의 입장이라면 말 한마디 해 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동생의 청을 거절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동생에게 탐욕을 경계하라시며 욕심 많은 부자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 돈은 유해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청하는 것은 들어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오늘 복음으로 왜 우리 기도가 어떤 것들은 들어주지 않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만약 2살 먹은 어린아이가 요리를 해보겠다고 칼을 달라고 한다면 칼을 쥐어줄 어머니가 어디 있겠습니까?
만약 유익하지 못하거나 해로운 것을 청한다면 예수님은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일지라도 그 청은 들어주시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복권이 당첨되었으면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우리나라 돈으로 3억 원 상당의 복권에 당첨된 사나이의 가족이 벌이던 자축 파티가 살인극으로 돌변하여 일가족이 패가망신하는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93년 9월 25일 스페인에서 있었습니다.
스페인 바로셀로나 경찰은 이날 현지의 한 청년이 복권이 당첨돼 4천 9백만 페세타(약 3억 원)를 타게 되자 지난 23일 기족과 함께 잔치를 벌이고 즐기던 중 가족에게 나눠 줄 액수를 놓고 17세의 여동생과 심하게 말다툼을 하다가 그만 칼로 찔러서 죽이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렇게 될 것이 뻔한 데도 복권을 당첨시켜 주시겠습니까? 이 사람들이 복권에 당첨되어 그렇게까지 될 것이라고는 자신들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아십니다. 그래서 우리 기도를 실망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생각은 인간이 헤아릴 길 없습니다.
어느 마을에 냉담자와 신부님이 살았습니다. 이 둘은 모두 나병이 걸리게 되었고 다 같이 나병이 낫게 해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날마다 기도로 생활하는 사제가 먼저 나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냉담자의 기도를 듣고는 하루 만에 바로 낫게 해 주셨습니다. 사제는 결국 나병으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와서 냉담자는 병이 나았는데 신부님은 왜 낫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신부님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냉담자는 이 병 때문에 다시 기도하게 되었는데 낫지 않게 해 주면 아주 많이 토라져서 돌아오지 않게 될까봐 하느님이 바로 낫게 해 주셨지. 나야 나병으로 죽어도 믿음을 버리지 않을 테니까 하느님이 내 희생이 필요하신 모양이야...”
바오로도 자신의 병을 고쳐달라고 세 번씩이나 청하였지만, 하느님은 들어주시지 않으셨습니다. 꾸준히 청할 줄은 알아야 하되, 기도를 잘 들어주시는 것이 믿음이 강하기 때문이라는 단순한 논리는 벗어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필요한 것을 너무 잘 아십니다. 우리는 청할 권리가 있지만, 무엇을 들어줄 지는 하느님에게 해당하는 권리입니다. 주면 받고 안 주면 그것이 더 유익하니 주시지 않는다고 믿으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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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1982년 신학교에 입학하면서 가장 즐겨 입는 옷의 색깔은 ‘검은색’이 되었습니다. 양복도 검은색, 넥타이도 검은색, 그리고 수단과 성직자 복장인 클러지 셔츠도 검은색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다른 색을 특별히 싫어하거나, 좋아하는 것은 아닙니다. 검은섹 옷을 40년 입고 다니니 이것이 편하게 된 것입니다. 사제복을 입으면 좋은 점도 있습니다. 운전면허 시험을 볼 때 감독관이 신자였습니다. 제게 강복을 청했고, 약간의 실수가 있었지만 웃으면서 대하니 긴장도 풀리고 합격할 수 있었습니다. 식당에서 식사 할 때도 사제복을 입은 저를 알아보는 분들이 식사비용을 대신 내주는 일도 있었습니다. 이민국에 가서 서류를 낼 때도 사제복을 입고 가면 직원들이 친절하게 대해주는 일도 있었습니다. 검정색이 저에게 필요하거나,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사제복이 검은색이기 때문에, 제가 사제이기 때문에 그런 도움을 받은 것입니다.
류시화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존감이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행복을 좇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행복을 갈구한다는 것은 지금 내면이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입증합니다. 행복을 발견하지 않는 한 외부에서 얻는 행복은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며 공허감만 더할 뿐입니다. 술을 마셔서 행복할 것 같지만 깨고 나면 아쉬움이 남습니다. 어떤 충동에 이끌린다면 자기 안에 무엇이 결여되어 있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그러면 자신이 갈구하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그것에 사랑을 기울일 것입니다. 물을 찾는다면 갈증이 있는 것입니다. 마른 입술은 물이 전하는 메시지입니다. 끝내 물을 얻지 못하면 영혼의 탈수증으로 고통받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들은 나의 내면에 존재하는 것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 하나 됨이 없는 한 내가 추구하는 것들이 나를 행복하게 해 줄 수는 없습니다.
마녀는 인어 공주에게 없는 두 다리를 줄 테니 아름다운 목소리를 달라고 유혹합니다. 목소리를 내준 인어공주는 남들처럼 걸을 수 있게 되어 사회적 위치를 얻습니다. 그러나 그 대가로 그녀의 정체성이었던 아름다운 목소리는 잃어버립니다. 13세기 페르시아 시인 사디 쉬라지는 한 아랍 상인의 일화를 전합니다. 그 상인이 사막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먹을 음식이 한 조각도 남지 않았습니다. 그는 죽음이 멀지 않았음을 알았습니다. 절망 속에서 낙타 등에 실린 짐들을 샅샅이 뒤졌으며, 마침내 곡식 낟알로 느껴지는 것이 가득 든 자루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그의 기쁨과 환희를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실망과 절망 또한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자루를 열자, 그 안에는 값비싼 보석이 가득 들어 있었습니다. “지금 타는 목마름에 처해 있는 사람에게는 금은보석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갈증을 덜어주는 한 모금의 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외부에서 채워지는 것들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내가 하느님과 하나 될 수 있다는 자존감을 채우는 것이라고 합니다. 부자가 창고를 새로 지어서 곡식과 재물을 채우려 하지만 그것은 부자에게 영원한 생명을 줄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그 무엇도, 그 누구도 가져갈 수 없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자존감’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지녀야 할 자존감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는 여러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인간의 행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니 아무도 자기 자랑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우리는 선행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선행하며 살아가도록 그 선행을 미리 준비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믿고, 그 믿음을 선행을 통해서 이웃들에게 나눌 수 있다면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이미 천국을 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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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불나방은 불을 좋아해서 불 속으로 날아갑니다. 불 속으로 들어가는 나방을 우리는 어리석다고 합니다. 죽을지도 모르고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나방만 불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도 ‘명예, 재물, 권력’이라는 불 속으로 들어가려 합니다.
‘도박, 마약, 도벽’의 불 속으로 들어가려 합니다. ‘욕망, 시기, 질투’라는 불 속으로 들어가려 합니다. ‘허영, 교만, 위선’의 불 속으로 들어가려 합니다. 평생을 힘들게 쌓아왔던 명성을 한 순간에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평온했던 가정이 깨지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기도 합니다.
정보가 넘쳐나는 세상입니다. 손가락으로 정보를 쉽게 검색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식별의 지혜가 더욱 필요합니다. 가짜뉴스와 거짓 뉴스의 불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짜뉴스와 거짓 뉴스는 자극적이고, 선동적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이 스스로 그릇된 뉴스의 불 속으로 들어가고, 다른 사람까지 초대하고 있습니다. 분노와 비방을 유발하는 뉴스를 검색하는 시간을 줄이면 좋겠습니다. 따뜻하고 아름다운 뉴스를 검색하고 이웃과 나누면 좋겠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머니의 장례에 함께 해 준 동창신부님들께 음식을 대접하고 싶었습니다. 뉴욕에 있어서 갈 수는 없고 동창회장 신부님께 송금을 해 드렸습니다. 기분 좋게 송금했는데 나중에 보니 동그라미가 하나 더 있었습니다. 순간 당황했습니다. 동창회장 신부님도 저의 마음을 받았고, 일부는 돌려주었습니다.
저도 예전에 지구장 신부님의 착각으로 적지 않은 금액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이왕 그렇게 되었으니 본당 건축기금으로 사용하라고 하였습니다.
신문사에도 후원금을 보내주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코로나19로 어려운 상황이지만 기쁜 마음으로 후원해 주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그분들은 선행으로 하늘에 보화를 쌓으셨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선행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선행을 하며 살아가도록 그 선행을 미리 준비하셨습니다.”
선행은 잘못 전달되는 경우가 없습니다. 선행은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선행은 누가 빼앗아 갈 수도 없습니다. 선행은 연옥에 있는 분들에게 나누어 줄 수도 있습니다.
식당 탁자 위에서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사람들은 늘 시간이 부족하다고 말을 하면서 마치 시간이 영원한 것처럼 산다.’
분명 우리는 우리에게 정해진 시간과 삶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끝이 예외 없이 누구에게나 주어진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아무 준비 없이 죽음을 맞이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착실하게 다가올 죽음을 준비합니다. 어떤 사람은 시간이 없어서, 여유가 없어서, 가난해서, 몸이 아파서 선행을 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선행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기도, 자선, 희생, 봉사, 나눔, 친절, 온유, 겸손도 선행입니다. 시간이 없어도, 여유가 없어도, 가난해도, 몸이 아파도 우리는 충분히 선행을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영원히 썩지 않고, 사라지지 않는 곳에 우리의 모든 것을 맡겨야 한다고 하십니다. 세상의 것들은 사라지고, 좀이 생기고, 남이 와서 빼앗아 가기도 한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신뢰하고,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갖는 사람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곳에 보물을 쌓아두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습니다. 길이와 순서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가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갈 곳을 모르는 우리에게,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하는 우리에게 가장 안전한 곳은 어디일까요? 가장 믿을 만한 분은 누구일까요?
그렇습니다. 죽음을 이기신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를 죽음 이후에도 이끌어 주시는 하느님입니다. 세상의 곳간에 쌓아놓는 것도 필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하느님을 믿고, 따라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에 감사드리며 선행으로 하루를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는 여러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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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2,13-21: 어리석은 자야!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15절)고 하신다.
탐욕은 사람들을 갈라지게 하고 사랑은 하나가 되게 한다. 그런데 ‘탐욕을 경계하는 것’이 ‘사랑으로 자신을 채우는 것’이 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겠는가? 사랑을 자기 몫으로 물려받은 우리는 그분을 성가시게 할 것이다.
그러나 청하는 내용은 전혀 다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이 좋은 신앙을 나누어 가지도록 일러 달라고 할 것이다.
탐욕은 악마의 함정이며 하느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말이다. 막대기와 돌을 섬기는 자들에게 어울리는 말이다. 탐욕은 악한 영들의 올가미이다. 그것을 인간을 옭아매어 멸망으로 끌어간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조심하여 크고 작은 모든 탐욕을 경계하라고 하신다. 이 탐욕은 그래서 결과적으로 하느님과 인류가 다 싫어하는 것이다.
어리석은 부자는 엄청난 소출을 거두고 근심에 빠져 한심한 말을 한다. “내가 수확한 것을 모아 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나?”(17절) 그는 미래를 내다보지 않았다. 가난한 이들을 생각하지도 않았고, 괴로워하는 이들을 동정하지도 않았다.
그는 땅에서 소출을 거두듯이 자기 목숨의 길이를 정할 수 있다고 착각을 한다. “나 자신에게 말해야지.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19절) 그러나 부자는 그것으로 끝나고 만다.
“재산은 사람의 목숨을 보장해 준다.”(잠언 13,8) 어리석은 부자에게는 그런 재산이 없다. 그는 최후의 심판 날에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다.”(마태 25,42)라는 말을 들을 것이다.
그는 가난한 이들의 굶주린 배가 자신의 곳간보다 더 안전한 창고라는 것을 몰랐다. 그 재산을 가난한 이들의 배에 쌓았더라면, 세상에서는 모두 없어졌겠지만, 하늘에는 안전하게 보관되어 있을 것이다.
재물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이 재물을 쌓아둔다. 우리가 가지고 갈 수 없는 것은 본래 우리의 것이 아니다. 사는 동안 모은 재물은 유산으로 상속된다.
선행, 덕행만이 죽은 사람의 동반자가 된다. 자비만이 우리를 따라온다. 그것이 우리를 하늘나라와 첫 번째 거처로 인도한다. 그래서 주님은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 그래서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거처로 맞아들이게 하여라.”(루카 16,9)라고 말씀하셨다.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사람이 참으로 복된 사람이며, 영광스러운 희망을 지닌 사람이다. 누가 그런 사람일까? 재물보다 덕을 사랑하는 사람, 그의 손으로 가난한 이들을 도와주며, 모든 힘을 다해 없는 이들의 슬픔을 달래 주는 사람이다.
그는 하늘에 있는 곳간에 보화를 쌓는다. 그는 덕행과 바른 삶에 대한 보상을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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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세상에 ‘돈’보다 더 민감하고 중요한 문제가 있을까요? 아무리 사랑하는 가족이라도 돈 문제만큼은 확실히 해야 한다고들 말합니다. 사실 오늘 복음 말씀도 가족 간에 벌어진 재산 문제에서 비롯됩니다. “스승님, 제 형더러 저에게 유산을 나누어 주라고 일러 주십시오.” 가질수록 더 가지고 싶어지는 돈의 마력을 우리 모두 경험합니다. 그저 돈 많이 버는 직업을, 돈 많이 주는 직장을 최고로 칩니다. 손해 보지 않는 방법이나 큰 이익을 거두는 방법을 아는 사람이 똑똑한 사람으로 칭송받습니다. 만일 조금이라도 손해가 되는 일이 생기면 분하고 억울해서 잠을 못 이루기도 합니다.
루카 복음은 다른 어떤 복음서보다도 부와 재산에 대한 탐욕을 강하게 경고합니다. 예를 들어 마태오 복음은 산상 설교에서 행복에 대한 선언들만 쭉 나열하고 있다면(5,3-12 참조), 루카 복음은 부자들을 향한 불행 선언들도 함께 소개합니다(6,24-26 참조). 우리가 잘 아는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 이야기도 루카 복음에만 나옵니다(16,19-31 참조). 그리고 오늘 복음 말씀도 그 연장선 위에 있습니다.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이어지는 비유에 등장하는 부유한 사람은 자기가 거두어들인 많은 소출을 어떻게 사용할지는 크게 고민하지 않고, 그것을 어떻게 쌓아놓을지만 고민합니다. 그저 모아 둘 생각만 하는 그의 고민은, 기존의 곳간을 허물고 더 큰 곳간을 짓겠다는 결심으로 끝나 버립니다.
혹시 우리에게도 비슷한 모습이 있지는 않습니까? 가진 재산을 어떻게 하면 가치 있게 사용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기보다는, 일단 모으고 보자는 마음으로 재산을 축적하는 데만 급급하여 살고 있지는 않은지요. 통장에 찍힌 잔고에 흐뭇해하기보다, 그것을 어떻게 의미 있는 일에 사용해서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사람이 될 것인지를 더 고민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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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교구 한재호 루카 신부님]
어느 선배 신부님이 성지 순례를 하러 간다고 하니 교우분들이 쌈짓돈을 챙겨 주었습니다. 고마운 마음에 그분들께 드릴 선물을 사려고 성지 주변의 성물 가게에 들렀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영어를 통 몰라 손짓과 발짓으로 의사소통을 시도하였는데, 주인이 잠깐만 기다리라더니 자기 아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하여 영어를 조금 할 줄 아는 아들의 친절한 도움으로 성물들을 구입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 선배 신부님은 ‘돈이 언어구나! 돈만 있으면 외국어를 몰라도 되는구나.’ 하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사실 돈이 있으면 참 편하고 당당해지는 세상입니다. 배짱이 두둑하려면 우선 지갑이 두둑해야 하는 것이 우리네 삶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 말씀처럼 우리의 삶을 지탱해 주는 것은 돈이 아니라 하느님이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어린이 미사 때에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무엇인지 아이들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아이들은 마음, 세월, 예수님, 우정, 부모님, 사랑, 하늘나라, 믿음 등 의외로 많은 것들을 대답하였습니다. 생각해 보면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런데도 현실에 부대끼며 살다 보면 우리는 이러한 가치들을 잊을 때가 많습니다.
제가 지도하는 제주교구 신학생들은 해마다 설이 되면 교구의 모든 신부님을 찾아가 세배하고, 이때 받은 세뱃돈을 모아 일 년 살림을 마련합니다. 그런데 이 가운데 적어도 십 분의 일 이상은 어려운 사람을 돕는 데 쓰고 있습니다.
탐욕에서 벗어나고, 돈이 삶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과, 나눔의 가치를 깨우치기 위해서입니다. 어리석은 부자가 되지 않는 법을 이렇게 신학생 때부터 배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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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이윤벽 프란치스코 신부님]
<나의 것을 남에게 베푼다는 것에서 기쁨을>
우리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형태를 보면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소유형태의 삶과 존재형태의 삶으로 나눌 수 있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달리 첫 번째 “소유형태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내가 어느 학교 졸업장을 가졌다’, ‘내가 살고 있는 집의 평수가 어떻다’, ‘유명한 사람과 친분이 있다’.....라는 식으로 자기가 소유한 양에 따라 삶의 성공여부를 결정짓습니다.
이러한 소유형태의 사람은 절대 무엇을 남에게 내어놓지 않게 됩니다. 낙타가 바늘귀를 빠져 나갈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한번 생각해 봅니다. 소유형태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형제들과의 관계에서도 자기가 사랑해야 할 가족이나 형제들을 제한하고, 감금하고, 통제하게 됩니다.
한마디로 자기식대로 상대방을 숨을 못 쉬게 질식시킵니다. 그리고는 ‘내가 너를 진심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거야’라고 합리화 시켜 버립니다. 요즈음 65세 이상의 황혼이혼이 급격히 는다고 하는데 소유형태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졌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두 번째로 “존재 형태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나의 것을 남에게 베풀 때 기쁨을 느끼고, 있는 그대로 존재 형태의 삶을 살게 되어있습니다.
즉, 나의 있는 그대로의 지금 모습이 좋고 상대방을 받아들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어느 화가의 이야기를 소개해 보겠습니다. 어느 날 화가의 집에 젊은 부부가 이사를 왔습니다. 짐을 다 내리고, 새댁이 안고 있는 아기를 보았는데, 그 아기의 한쪽 눈이 잘못되어 있는 겁니다.
태어날 때부터 그랬는지 사고로 그랬는지 그 이쁜 얼굴에 한쪽 눈이 흉측하게 감겨져 있는 겁니다. 며칠이 지나고 화가가 우편함을 정리하고 있는데 계단 위에서 새댁이 한 손에는 아기를 안고, 한 쪽 눈을 감고 쩔룩거리며 내려오고 있는 겁니다.
그 화가는 마음속으로 ‘참 이상한 여자도 다 있구나’라고 생각하면서 또 며칠이 흘렀습니다.
초인종 소리가 나서 문을 열어보니 새댁이 한 손에는 아기를, 한 손에는 사진을 들고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겁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사진은 잘못된 한쪽 눈을 감출 수가 없지요. 아기엄마는 자기 안방에 이쁜 아기 초상화를 달고 싶다며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잘못된 한쪽 눈도 이쁘게 그려 달라고 지극정성으로 화가에게 부탁하는 겁니다.
화가는 다른 그림과는 달리 아기의 초상화를 몇 날 며칠을 정성껏 그렸습니다. 마지막으로 잘못된 아기 눈의 눈동자를 손을 떨면서 그려 넣고 그림을 완성했습니다.
완성된 그림을 아기 엄마에게 가져다주니 그 엄마는 너무나 좋아하며 화가에게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이 아기가 조금 더 크면 저의 한쪽 눈을 아기에게 이식해주기로 했답니다. 그 생각만 하면 얼마나 행복한지 지금부터 길을 갈 때나, 밥을 지을 때나, 빨래할 때나 한 쪽 눈을 감고 살아가는 연습을 한답니다.”
형제 자매여러분!
준다는 것에서, 나의 것을 남에게 베푼다는 것에서 기쁨을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의 신앙은 거짓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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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탐욕과 사랑>
루카 12,13-21 (탐욕을 조심하여라,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
그때에 군중 가운데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스승님, 제 형더러 저에게 유산을 나누어 주라고 일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중재인으로 세웠단 말이냐?” 그리고 사람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어떤 부유한 사람이 땅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 그래서 그는 속으로 ‘내가 수확한 것을 모아 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나?’ 하고 생각하였다. 그러다가 말하였다. ‘이렇게 해야지. 곳간들을 헐어 내고 더 큰 것들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을 모아 두어야겠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해야지.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
<탐욕과 사랑>
내가 아닌
내 것에
마음 두는 것이
탐욕입니다
내 것이 아니라
나에게
마음 두는 것이
사랑입니다
네가 아닌
네 것에
마음 두는 것이
탐욕입니다
네 것이 아니라
너에게
마음 두는 것이
사랑입니다
탐욕과
탐욕이
만나니
다만 죽임입니다
사랑과
사랑이
만나니
비로소 살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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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하느님의 작품들>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자신과 에페소 신자들이 하느님의 작품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이 말에 시비를 건다면 하느님께서 창조하지 않으신 존재가 어디 있고, 그러므로 하느님의 작품이 아닌 존재가 어디 있습니까?
그러니 모든 존재가 다 하느님의 작품이지만, 다만 걸작인지 졸작인지 그것만 있을 것이고, 그리고 하느님 작품이 졸작일 리 없으니 졸작이 있다면 그것은 원래 걸작이 졸작이 된 것, 곧 우리의 죄로 망가진 작품일 것입니다.
그리고 앞선 바오로 사도의 말에 의하면 죄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은총의 거부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앞에서 육의 욕망에 이끌려 죄를 지었지만 하느님의 자비로 구원받았다는 뜻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자비가 풍성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으로, 잘못을 저질러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 ─ 여러분은 이렇게 은총으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니 걸작이란 하느님의 은총을 거부하지 않은 존재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은 존재이고, 졸작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아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은총을 거부함으로써 구원받지 못한 존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항상 그렇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거부하지 않고 받아야 합니다.
사랑을 줘도 거부하지 않고 받아야 받는 것이고, 선물을 줘도 거부하지 않고 받아야 받는 것이며, 구원을 줘도 거부하지 않고 받아야 구원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또 이렇게 얘기합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는 여러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세상에 사랑이 어디 있고 공짜가 어디 있냐고 믿지 못하고 하느님의 선물인 은총을 거부하면 구원은 받지 못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믿으면 은총과 구원이 선물로 주어집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사랑을 믿어 은총으로 구원받은 걸작들은 구원받은 사람답게 이제 하느님의 선업을 이어갑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얘기합니다. 우리는 선행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선행을 하며 살아가도록 그 선행을 미리 준비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거부한 졸작들은 선행을 할 사랑이 하나도 없어 아무런 선행을 할 수 없지만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받아들인 걸작들은 충만해진 사랑으로 하느님의 선업을 이어가고 무상으로 선행을 거저 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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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참된 부자가 되십시오>
부자가 되고 싶은 바람을 하느님께서 꼭 들어주시길 기도합니다. 많은 사람이 부자가 되기를 바라지만 참된 부자가 되기는 쉽지 않습니다. 부자가 되느냐 안 되느냐는 얼마만큼 돈을 버느냐에 달려 있지 않고 얼마만큼 잘 쓰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결코 많이 가졌다고 해서 부자일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 앞에 부자는 무엇이 중요한지를 깨닫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어떤 탐욕에도 빠져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제아무리 부요하다 하더라도 그의 재산이 생명을 보장해 주지는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재산을 쌓아놓고 다투며 사는 것보다 야훼를 경외하며 사는 것이 더 낫습니다.(잠언15,16)
“돈을 사랑하는 사람치고 돈으로 만족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욕심 부린다고 더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전도5,9) 재산에 욕심이 생기면 아무리 많은 재물을 소유해도 부족합니다. 그리고 제 재산을 가지고도 즐겁게 살 줄 모릅니다.(집회14,5)
그러므로 부자가 되려고 애쓰지 말고 그런 생각마저 버리십시오.(잠언23,4) 인간에게 주어진 욕구는 정당한 영역이나 이미 충분한데도 욕심을 내는 것은 탐욕입니다. 모든 탐욕은 우리를 멸망에로 이끌어 갑니다.
“재물은 조금도 믿을 것이 못 됩니다. 돈이 있다고 우쭐대다가는 나둥그러집니다.”(하바2,5) 그러므로 “옳지 못한 방법으로 부자가 되는 것보다는 진실한 마음으로 기도를 드리고 올바른 마음으로 자선을 행하는 것이 좋습니다. 황금을 쌓아두는 것보다는 자선을 행하는 것이 좋은 일입니다.”(토비12,8)
사실 생명은 지상의 재물이나 넘치는 부의 산물이 아닙니다. 생명을 안배하시는 분은 오직 하느님이십니다. 현대의 의학이 발달했다고 하더라도 생명을 일시적으로 연장할 수 있을지언정 영원생명을 주지는 못합니다.
그러므로 재물의 소유를 통해서 생명의 안전을 생각하는 그릇된 생각을 버려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을 염두에 두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했다 하더라도 결코 부자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하느님 안에서 만족할 수 있다면 그야말로 큰 부자입니다. 하느님을 차지하는 마음이 부유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자가 되십시오. 석가모니도 말했습니다. “만족함을 모르는 사람은 부유하더라도 가난하고, 만족함을 아는 사람은 가난하더라도 부유하다.” 물질뿐 아니라 학문이나 능력, 신앙에서도 저 자신이 부족하다는 것을 인정할 때 하느님께 의탁하게 됩니다.
자신의 능력만 믿고 자신이 옳고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리석습니다. 우리가 지닌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고 그것을 관리하는 권한만 있을 뿐입니다.
신명기 (8,17-18)의 말씀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이 재산은 내 손으로 뼛골이 빠지게 일해서 모은 것이다.’ 이런 엉뚱한 생각이 들거든, 너희 하느님 야훼를 생각하여라. 하느님께서 너희 선조들에게 맹세하신 당신의 계약을 이행하셔서 오늘 이처럼 재산을 모으도록 너희에게 힘을 주셨다는 것을 생각하여라.”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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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연애 6개월 차인 여대생에게 남자 친구 사진과 좋아하는 남자 연예인 사진을 보게 한 후 뇌의 활동성을 비교했습니다. 그 결과, 두 경우 모두 뇌의 다양한 영역이 활성화되었습니다. 이는 주의를 집중하고 높은 관심을 보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번에는 결혼한 지 15년이 된 부인에게 남편의 사진을 보여준 후 뇌의 활성화를 살펴보았습니다. 그 결과, 앞의 연구와는 달리 뇌의 활성화가 거의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뇌의 반응은 우리가 의자나 책상과 같은 사물을 인식할 때와 유사했습니다. 익숙해지다 보니 아무런 감응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따뜻한 관심과 사랑이 생겼을 때, 다시 뇌의 영역이 활성화된다고 합니다. 즉, 인간이 인간답게 살 때는 익숙하다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사랑할 때였습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서로 인간답게 살 수 없게 됩니다.
주님과 우리의 관계는 과연 어떨까요? 혹시 너무 익숙해져서 의자나 책상 같은 사물을 인식할 때의 뇌의 반응이 계속되는 것이 아닐까요? 이런 반응에서 변화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주님께 대한 사랑의 마음이 크게 일어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철저하게 실천하면서 우리는 주님께 대한 사랑을 키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산을 나누어 주라고 일러 달라는 어떤 사람의 말에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말씀해주십니다. 우선 부자는 죄인일까요? 아닙니다.
복음서에서 경고하는 부자는 탐욕스러운 부자, 돈에만 모든 것을 걸고 있는 인생관의 소유자를 말합니다. 부자 자체를 죄인이라고 했던 적은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돈이나 재물에 집착하지 않고 그보다 더 귀중한 높은 가치를 바라보며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정당하게 모은 재산이라도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특히 죽음이 언제 닥칠지 모르는데도 자기 재산에 모든 것을 맡긴다면 너무나도 어리석은 모습이라고 하시지요. 여기에 하느님께서 주신 재물을 낭비하는 모습이 드러납니다. 보통 기존의 곳간이 부족하면, 그 옆에 부족한 만큼 더 지으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기존의 곳간을 헐고 크게 새로 지을 궁리를 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새로운 곳간이 아니라, 남는 곡식과 재물을 이웃에게 나눌 생각을 먼저 해야 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사랑의 실천입니다. 사랑의 실천을 통해 우리는 매 순간 특별한 감응을 얻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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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 중심의 삶>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의’의 삶-
“너희는 알아라, 주님은 하느님이시다. 그분이 우리를 지으셨으니, 우리는 그분의 것, 그분의 백성, 그분 목장의 양 떼나라네.”(시편100,3)
오늘은 2세기 순교자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기념일입니다. 참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 중심의 삶에 항구했던 참으로 세상 탐욕으로부터 초연했던 사도교부였고 사도요한의 제자였습니다. 로마로 압송도중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는 여전히 감동적입니다. 그 일부만 인용합니다.
“나는 하느님의 밀알입니다. 나는 맹수의 이에 갈려 깨끗한 빵이 될 것입니다. 나의 간청입니다. 불필요한 호의를 나에게 베풀지 마십시오. 나를 맹수의 먹이가 되게 버려두십시오. 나는 그것을 통해서 하느님께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쾌락도 지상의 모든 왕국도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 세상 극변까지를 다스리는 것보다 그리스도 예수님과 일치하기 위해 죽는 것이 나에게는 더 좋습니다.
내가 찾고 있는 것은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바로 그분이며 내가 원하는 것은 우리를 위해 부활하신 그분입니다. 다시 태어나는 내 출생의 때가 가까웠습니다. 형제들이여, 나를 잊어 버리십시오, 내가 이 생명을 얻는데 방해하지 마십시오.”
예전 초등학교 교사시절 학교에서 일하던 씩씩하고 상냥했던 관리인 아저씨와의 대화가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합니다. 당시 소박하고 순수한 시골 출신의 아내와 두 어린 자녀를 거느린 가장이었습니다.
“저는 매달 봉급을 타면 우선 쌀과 연탄부터 사둡니다. 그래야 안심이 됩니다.”
아주 청빈하고 순수하게 사시다 선종하신 노수사님이 임종전 백사십만원을 아빠스님에게 내놓았을 때 깜짝 놀랐다는 일화도 생각납니다. 어떻게 청빈한 수사님이 이렇게 돈을 모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알고보니 만약을 대비하여 휴가비에서 쓰고 난 돈을 모아뒀다는 것입니다. 쓰던 안쓰던 돈이 있어야 마음 든든하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저희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쓰지 않고 모아 두었던 돈이 꽤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특히 노년에 안전을 위한 소유 욕구는 생존의 본능임을 깨닫습니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연노한 시아버지를 모시고 있던 어느 자매님 이야기도 잊지 못합니다. 몸이 불편하여 거동이 힘든 시아버지가 궁금하여 문을 열면 지갑의 돈을 꺼내 헤아려 보는 모습을 몇 번이나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보장된 환경중에도 수중에 있는 돈을 확인해야 마음이 안정됐던 것입니다.
제 경우도 예전 젊을 때 보다 확연히 달라진 집무실 분위기입니다. 예전에는 냉장고도 없어 먹을 것이 없어도, 수중에 돈이 없어도 전혀 부족함을 못 느꼈는데 이제 세월이 흐르면서 집무실에는 늘 먹을 것이 얼마간 마련되어있고 수중에도 얼마간 돈을 지니게 됩니다. 방문하는 분들도 먹을 것을 또 어떤 분들은 필요한데 쓰라 어쩌다 용돈을 주기도 합니다.
탐욕과 탐식이 문제이지 돈과 먹을 것은 생존을 위한 기본적인 욕구입니다. 젊음도 건강도 사라져 가는데 돈과 먹을 것까지 떨어지면 마음은 저절로 불안해지고 두려워지기 마련입니다.
어느 병석에 있던 노령의 수도사제가 병문안한 원장에게 종이와 볼펜을 달라 하시더닌 ‘30만원이 꼭 필요하니 마련해 달라’하셔서 즉시 마련해 드렸다는 일화도 생각납니다. 바로 이것이 노년의 인간 현실이요 진실입니다. 경솔하게 노욕老慾과 노추老醜라 판단하는 것도 삼가야 할 것입니다. 정국이 불안하고 전쟁 위험이 있을 때 생필품 사재는 것 역시 생존 본능 욕구입니다.
그러니 탐욕은 생존 본능이며 안전의 욕구 또한 생존 본능입니다. 탐욕의 뿌리에는 두려움이 있고, 돈도 재산도, 식량도 확보해 둬야 안심이 되기에 저절로 발동되는 소유욕입니다. 불안전의 불안과 두려움에서 벗어나고자 소유하려는 본능입니다. 그리하여 정치도 결국은 경제에로 귀결되고 민생문제가 전부가 됩니다. 문제는 끝없는 탐욕, 눈먼 탐욕입니다. 끝없는 건강에 대한 욕구, 끝없는 돈이나 재물에 대한 욕구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어리석은 부자는 무지한 인간의 보편적 전형적 모습입니다. 대부분 무지한 부자의 모습입니다. 어리석은 부자 예화 앞에는 탐욕을 조심하라는 예수님 말씀이 나옵니다. 탐욕과 어리석음, 모두가 무지한 인간의 실상입니다. 누구도 여기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바로 오늘 우리 모두에게 주는 예수님 말씀입니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이 말씀에 이어지는 어리석은 부자의 예화가 시공을 초월하여 무지한 우리를 일깨우는 참 좋은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어리석은 부자의 삶의 중심에는 하느님이 아닌 탐욕이, 재물이란 우상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 표현이 소출한 것들을 곳간에 쌓아 두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부자의 독백입니다.
“이렇게 해야지. 곳간들을 헐어내고 더 큰 것들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을 모아 두어야겠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해야지. ‘자, 네가 여러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하느님 중심이 없어 무지의 탐욕에 눈멀어 어리석어 질 때, 저절로 이처럼 땅에 보물을 쌓는 삶입니다. 하느님도 없고, 이웃도 없습니다. 시야도 완전히 차단 되어 근시안近視眼에다, 하늘로 열린 창도 없고 옆으로 이웃에 열린 창도 없이 완전히 고립단절된 혼자만의 이기적 삶입니다. 완전히 자기도취의 착각이요 환상입니다. 이어 예수님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며 부연 설명하십니다.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의 차지가 되겠느냐?’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
바로 오늘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어리석은 부자는 우리 모두의 가능성입니다. 한 치 앞도 내다 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참으로 인색했던 부자, 크리스마스 전날 밤에 꿈을 꾼후 다음날 회개하여 모든 것을 나누었다는 스쿠르지의 일화가 연상됩니다. 오늘 예화의 어리석은 부자도 아마 꿈에서 깨어 났다면 즉시 회개하여 하늘에 보물을 쌓는 나누는 삶으로 전환되지 않았겠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바로 오늘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가 목표하는바, 오늘 독자들인 우리의 회개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을 회복해야 비로소 무지의 탐욕과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 체험 없이는 무지의 어둠에서 벗어나기 힘듭니다. 무지의 어둠을 밝히는 은총의 빛입니다. 이런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사는 이들은 결코 탐욕의 유혹에 빠지지 않습니다. 소유의 종이 아니라 소유의 주인이 됩니다.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지혜로운 이들은 돈을, 재물을 선용하여 하늘에 보물을 쌓는 방편으로 삼습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에서 복음에 대한 답을 바오로 사도가 줍니다. 세상의 풍조에 따라 육의 욕망, 육과 감각이 원하는 것을 따르는 삶에서 회개를 통한 하느님 중심의 삶으로의 전환입니다.
“자비가 풍성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으로, 잘못을 저질러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그분과 함께 일으키시고 그분과 함께 하늘에 앉히셨습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으며 이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우리는 선행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무지의 탐욕과 어리석음에 대한 유일한 답은 하느님 중심의 삶뿐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늘에 보물을 쌓는 부단한 나눔과 자선의 삶입니다. 무지의 어둠을 밝히는 그리스도의 은총의 빛입니다.
기본적 의식주에 대한 욕구는 본능적이며 정상입니다. 문제는 과도한 욕심, 탐욕입니다. ‘지옥에는 한계가 없다’는 괴테의 파우스트에 나오는 말마디도 생각납니다. 눈 먼 욕심, 끝없는 탐욕을 분별하여 절제하게 할 수 있는 것도 하느님 중심의 확고한 삶입니다. 끊임없는 회개가 부단히 하느님 중심의 삶을 향하게 합니다.
인명은 재천입니다. 사람의 생명은 외적 소유의 재산이나 돈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달려 있습니다. 부단한 회개를 통해 하느님 중심의 삶에 항구할 때 비로소 영원한 생명의 구원이요,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이 됩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주님은 참으로 좋으시고, 그분 자애는 영원하시며, 그분 진실은 대대에 이른다.”(시편100,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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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루카12,20)
군중 가운데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스승님, 제 형더러 저에게 유산을 나누어 주라고 일러 주십시오." 하고 말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의 요청을 거절하십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이르십니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12,15) 그리고 이어서 탐욕으로 가득찬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루카12,16-21)를 들려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람의 생명은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삶 속에서 체험하고 있습니다. 만약 사람의 생명이 재산에 달려 있다면 재산이 많은 재벌이 그렇게 빨리 세상을 떠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부자들이 빠질 수 있는 유혹은 돈과 재물을 하느님보다 높은 자리에 놓는 '우상숭배의 유혹'입니다. 그리고 '먹고 즐기는 유혹'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입니다."(로마14,17) 라고 말한 바오로 사도는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와 가진 것에 만족한 삶'을 살라고 권고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으며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합시다. 사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따라다니다가 믿음에서 멀어져 방황하고 많은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 있습니다."(1티모6,7-8.10)
'가진 것에 만족한 삶'의 의미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즐기는 삶인 무위도식(無爲徒食)의 삶이 아니라, 가난에 구애받지 않는 삶인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삶의 의미로 다가옵니다.
돈과 재물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선(善) 중에 하나입니다. 그 좋은 것으로 '사랑의 나눔'도 하고, '하느님 나라 건설의 도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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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hFuNrO_lB6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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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 12, 15)
단풍의 시간은
짧습니다.
생명의
시간또한
너무나 짧습니다.
너무나 짧기에
허투루 쓰기에는
너무나 소중합니다.
하느님 앞에 있는
생명입니다.
생명은 하느님을
믿어야합니다.
살아 있는
이 시간이
소중합니다.
생명의 가치는
사랑의 가치입니다.
세상의 가치가 아닌
하느님의 가치를
따르는 신앙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재산증식이 아니라
진정한 사랑을
가르쳐주십니다.
재산은 영원하지
않지만 사랑은
영원합니다.
재산이 아니라
사랑으로 만나게되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생명이 의지하고
기댈 분은 오직
생명의 하느님이십니다.
생명은 하느님께
달려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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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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