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C버클리의 교수이자 저명한 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가 쓴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는 꽤 유명한 정치 관련 서적이다. 이 책은 우리의 머릿속에 있는 프레임에 대해 이야기한다.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는 요구를 들었을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코끼리를 생각하지 않기 위해 코끼리를 떠올리게 된다. 프레임은 우리 스스로 인식하지는 못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을 뜻한다. 우리는 진실을 보여주는 것을 통해 누군가의 생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미 프레임이 굳어진 사람에게는 자명한 진실이라고 해도 영향을 미칠 수가 없다. 정치적 문제를 두고 저소득층들이 보수 진영의 의견을 지지하는 것이 바로 프레임의 영향 때문이다. 프레임에 벗어나는 것은 그저 헛소리라고 치부하게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이렇듯 우리도 모르게 특정 ‘개념’과 '은유'들이 우리의 생각을 지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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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상적인 플레이를 선보여 전 세계의 눈을 사로잡는 리오넬 메시. 하지만 지구 반대편 스페인에 있다. 출처:UEFA챔피언스리그 홈페이지)
우리 K리그를 두고도 프레임이란 개념은 유효할 수 있다. 단순 프로축구연맹이나 구단의 관계자 뿐 아니라, K리그를 사랑하는 팬들, 유럽 축구를 즐겨보는 축구팬들 그리고 축구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까지 두루 퍼진 프레임이 있다. 바로 박지성, 이영표의 진출과 함께 시작된 유럽 축구의 유입 이후 널리 퍼진 ‘축구는 텔레비전으로 보는 것’이라는 프레임이 우리의 무의식 속에 자리 잡았다. 사실 인터넷이 널리 보급되기 이전, 그리고 유럽 축구 중계가 활성화되기 이전, 우리가 축구를 보려면 경기장을 찾아야 했다. 어느새 우리는 텔레비전, 컴퓨터, 스마트폰을 통해 쉽게 수준 높은 유럽 축구를 지켜볼 수 있게 되었고 이제 ‘중계’를 통해 축구를 지켜보는 것이 매우 당연해졌다. 축구는 더 이상 경기장을 찾아 즐기는 것이 아니라 주말 늦은 저녁과 새벽 졸린 눈을 부비며 봐야 하는 것이 되어버렸다. 현재 축구팬들이 가지고 있는 프레임이 변하지 않는다면, K리그는 재미있다는 말을 아무리 이야기해봐야, 그리고 K리그의 수준이 아무리 높아져봐야 유럽 축구의 인기를 당해내기 어려울 수 있다.
K리그와 유럽 축구의 인기를 보여주는 단적인 척도로 많이 생각하는 것이 중계 편성의 유무이다.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유럽 축구는 세계 최고의 선수들이 나서는 경기를 화려한 카메라의 움직임으로 촬영해서 우리나라 축구팬을 비롯한 전 세계를 공략했다. K리그의 인기몰이를 위해 많이 나왔던 이야기 중엔 카메라의 대수, 앵글 등 중계와 관련된 내용이 많이 있었다. 중계의 차원에서 K리그가 유럽 축구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중계가 재미있다면 분명 팬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축구 중계에 있어서 K리그가 유럽 축구를 이기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출전하는 선수들의 면면이나, 축구 중계에 투입되는 자본 등 차근차근 뜯어볼수록 그 가능성은 더욱 희박한 것 같다.
전국 어디서나 축구 동호회를 볼 수 있고 그 인구도 많지만, K리그 입장에선 수많은 동호인들을 K리그 관람에 유치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이다. 그렇다면 동호인들은 축구를 하는 것만 즐길 뿐, 보는 것 자체를 즐기지 않는다고 봐야할까? 아니다. 축구 자체의 중계의 열기는 높다. 심지어 축구를 직접 하진 않아도 보는 것을 즐기는 팬들도 많다. K리그는 중계로 보기 힘들지만 중소규모 클럽 경기까지 포함한 유럽 축구를 중계해주는 케이블 스포츠 채널이 흥하는 것을 보면 분명한 사실이다. 축구에 가장 관심이 많은 동호인들 중에서도 많은 수가 유럽 축구는 즐겨 보지만 K리그를 챙겨보지는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유럽 축구를 이겨야겠다는 생각 때문에 우리도 모르게 '코끼리'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축구는 텔레비전으로 보는 것.'이라는 프레임이 우리 속에 있지 않았던가. 축구장을 매번 찾아 K리그를 즐기는 팬들도, 더 많은 팬들을 유치하려면 K리그의 중계가 많아지고 발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K리그의 중계 기술이 발전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해봤자, 그것은 역으로 유럽 축구를 담은 중계 기술이 뛰어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을 뿐이지 않은가. K리그는 분명 유럽 축구와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유럽 축구가 강한 '축구 중계'의 영역에서 유럽 축구를 이겨보려고 하지 않았는지 돌아봐야 한다. K리그는 유럽 축구가 가진 컨텐츠와 경쟁하다보니 K리그 스스로의 장점을 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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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년 AFC챔피언스리그 우승팀 울산 현대. 보고 싶다면 가까운 경기장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K리그 선수들.)
K리그는 '중계'로만 접할 수 있는 유럽축구와 다른 매력으로 팬들에게 다가갈 수 있다. K리그는 우리가 직접 가서 볼 수 있다. 축구는 직접 볼 때와 중계의 차이가 매우 큰 스포츠이다. 화려한 카메라 워크와 세계 최고의 선수들이 있는 축구이지만, 우리는 절대 축구장이 가지고 있는 매력을 유럽 축구 중계에서 느낄 수 없다. 함께 하는 관중과 함께 내뿜는 열기와 함성소리, 텁텁한 실내 공기가 아니라 탁 트인 공간에서 느끼는 청량한 공기, 카메라 프레임 밖에서 움직이는 선수들의 움직임, 골대로 들어가는 공의 궤적 등 우리가 축구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것은 너무도 많다.
결국 유럽 축구 팬들의 꿈도 직접 경기장에 가서 경기를 지켜보는 것이다. 유럽 축구 중계를 보는 이들의 꿈도 결국 '직관(=직접관람)'에 있다. K리그는 중계를 통해 팬들을 만날 것이 아니라, 직접 경기장을 찾았을 때 주는 즐거움을 어필해서 팬들을 끌어들였어야 한다. 프로축구연맹과 구단들 역시 유럽 축구를 이겨야한다는 생각에, 우리도 모르게 유럽 축구가 확실한 강점을 가진 '중계방송'이라는 '코끼리'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K리그는 매경기 '직관'을 홍보할 수 있음에도 팬들을 '중계'로 끌어들이려 한 것은 아닌가. 연맹과 구단 등이 '직관'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고 해도 팬들에게 '축구는 직관이다.'라는 프레임은 아직 형성되어 있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프레임 형성이란 단기간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장기간에 걸쳐 우리의 ‘개념’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 이를 위해선 연맹, 구단, 선수, 언론, 팬 등 많은 당사자들이 축구는 경기장을 찾아 즐기는 것이라는 사실을 공론화시켜 새로운 이해와 담론의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조지 레이코프는 ‘슬로건으론 저인지를 극복할 수 없다. 지속적인 공론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라고 말했다. 물론 그가 K리그를 두고 한 말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누군가는 이것을 '조작'이라며 불쾌해할지도 모르겠지만 이것은 세뇌와는 다르다. 그저 축구는 텔레비전으로 지켜보는 것이라는 프레임 대신 직접 경기장에서 볼 때 가장 즐거운 것이라는 프레임을 사람들이 받아들이도록 하자는 것이다.
‘축구는 직접 보는 것’이란 프레임이 자리잡아도 메시와 호날두를 비롯한 세계 최고의 선수들은 여전히 우리에게 스타로 남아있고 대한민국 축구팬들은 UEFA 챔피언스리그를 챙겨볼 것이다. 하지만 평일 밤과 주말 낮과 저녁시간에 우리는 가까운 경기장을 직접 찾아 축구를 보는 이들이 늘어날 것이다. 최고의 선수들을 지켜보는 것은 텔레비전 중계로 볼 수 있지만, 진짜 축구를 보려면 축구장을 찾아 직접 경기를 지켜봐야하기 때문이다.
축구는 텔레비전으로 보는 것이라는 프레임을 갖고 있어 많은 축구팬들은 '축구 중계' 중 가장 훌륭한 유럽 축구 중계를 선택했다. 하지만 축구는 직접 보는 것이라는 프레임을 갖게 되면 본인이 가장 쉽게 갈 수 있고 즐길 수 있는 지역 프로 구단의 경기를 찾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프레임’을 바꾼다는 것은 우리나라가 축구와 K리그 자체를 대하는 자세가 변한다는 뜻이다. 구단 차원의 마케팅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광범위한 변화가 가능하다. 지역 팬들을 경기장을 많이 찾아 평균관중이 늘어나면 당연히 방송국의 중계는 따라오게 될 것이다. 또 경기장을 찾는 팬들은 평소 경기장을 찾아 응원하는 팀의 결과가 궁금해서라도 중계를 찾아볼 것이다. 이것이 바로 축구의 인기 상승과 중계 편성 증가라는 선순환의 고리를 시작하는 시발점이 될 수 있다.
KBO프로야구가 객관적으로 미국의 메이저리그나 일본의 프로야구보다 수준이 떨어지는 것은 야구 관계자도 인정하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수준 차이는 우리나라 야구팬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지 않다. 현재의 야구 인기는 2006년 WBC 이후 야구장이 재미있는 곳이라는 입소문을 타면서 더욱 빠르게 늘었다. 선수들의 뛰어난 실력과 프로야구 관계자들의 노력 등 다양한 원인이 있겠지만, 여성 팬을 포함한 관중이 이렇게 부쩍 늘어난 것은 야구장은 직접 가면 훨씬 재미있다는 일종의 '프레임'이 자리 잡은 이후이다.
현 상황에서 K리그 중계나 구단 차원의 마케팅을 시도하지 말라는 의미가 절대 아니다. 이러한 노력이 리그의 인기 상승에 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이고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방안을 찾아내지 않는다면, 앞으로 끝없는 노력과 시간을 들여야 할 것이다. 특히 최근 K리그는 중국과 중동의 자금력에 밀려 '선수 유출'이라는 부정적 프레임에 갇혀 있다. 이렇게 넋 놓고 앉아있다가는 대한민국 축구의 근간인 K리그의 자생력을 잃어버리지는 않을까 걱정된다. 'K리그 축구 중계'는 '유럽 축구 중계'에 비해 부족하다. 하지만 'K리그'는 유럽의 '축구 중계'보다 매력적이다. ‘축구 중계’가 아니라 눈 앞에서 펼쳐진 ‘축구’를 보여주기 위해 움직여야할 때가 아닌가 싶다.
http://blog.naver.com/hyon_tai
첫댓글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이 글을 읽어보니 중계에만 매달리지 않고 직관의 즐거움을 사람들에게 알려서 K리그를 홍보하는 것도 좋은 방법인 것 같네요
좋은 글이네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축구는 중계라는 '프레임' 을 변화시켜야겠다는 생각을 제 스스로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평소에 제가 지인들에게 하는 '축구는 직관' 이라는 말이 은연중에 그런 프레임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겠군요. 항상 글 잘 읽고 있어요!
오...잘읽었습니다~ 이제는 한 축으로 당당히 자리잡은 배구도 티비로 보니 재밌네요를 넘어서 경기장에서 보면 더 쩔어요 라는 말이 많이 나오네요. 우리 축구도 그런 페러다임을 구축하길...
좋은글 감사합니다
공감되는 글이네요. 저도 어릴때부터 다양한 스포츠를 직관해왔던 입장에서 야구의 인기는 글에서도 말한 그 프레임이 먹힌게 아닌가 싶네요.
제가 응원하는 팀의 경기도 중계로 보면 정말 지루하기 그지 없을때가 있는데 적어도 직관은 재미없어도 현장에서 느끼는 분위기때문에라도 가게되죠.
축구와의 차이는 이미 찾아오는 사람들이 입소문 때문에 어느정도 기대감이 형성되어 있고, 직관가면 나름의 기대감을 충족시켜준다는 점이겠지요.
물론 사람마다 차이가 있으니 다 결과로 나타나지는 않겠지만 글에서 말한것처럼 축구직관 자체가 재밌다는 프레임을 자리잡게 하는게 중요한거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