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요셉 쉬넨스 추기경(Cardinal L. J. Suenens)은 1904년 벨기에에서 출생했다. 그는 철학, 신학 박사학위를 받고 41세에 주교로 서품되고 1962년 58세의 나이로 추기경에 서임되어 벨기에 브뤼셀 말린 대교구의 교구장에 착좌했다. 또한 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지대한 공헌을 한 신학자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성모신심과 성령신심을 조화시키고 결합시키는데 크게 이바지 한 분으로 평가받고 있다.
오랫동안 레지오 영적 지도신부를 역임하면서 레지오에 대해서 먼저 알게 된 그는 1951년에 오늘 공부하게 될 “사도직 신학”을 저술한다. 그리고 1년 후인 1952년에는 아프리카의 레지오 마리애 선교사인 에델 퀸의 생애에 대한 저서를 저술하기도 한다. 이후 성령신심에 심취하여 1976년 “성령은 나의 희망”을 저술한다. 이와 같이 성모신심과 성령신심을 넘나들면서 폭 넓은 활동을 전개했던 그는 1998년 94세를 일기로 선종했다.
2) 저서 소개
"사도직 신학”은 레지오 영적 지도신부로 오랜 동안 봉직하면서 저자가 레지오 선서문을 풀이하고 해석한 책이다. 레지오 선서문의 내용이 성령과 성모님 그리고 레지오 사도직 활동이라는 세 가지 신학적인 고찰이 녹아나 있는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책 이름을 이렇게 지었다.
3) 교본에 소개된 “사도직 신학”
교본 13장 128쪽에는 이 책을 아래와 같이 소개하고 있다.
“이 선서문의 해설서로는 쉬넨스 추기경의 <사도직 신학>이 있는데, 이미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되어 있다. 이 소중한 책을 단원들은 항상 가까이 지녀야 하며, 또한 책임 있는 가톨릭 신자라면 모두 읽어야 한다. 이 책에 크리스천 사도직에 관한 여러 원리가 훌륭하게 설명되어 있기 때문이다.”
창설자 프랭크 더프는 시토 수도회와 가르멜 재속회 회원이었다. 그래서 그는 수도회의 여러 규정을 레지오 조직에 도입한다. 레지오 초창기 모임에서 수도회의 수련기와 서원식을 본 따서 예비단원의 수련기간을 3개월로 정하고 정규 단원이 되려면 반드시 레지오 단기를 손에 쥐고 선서문을 읽는 봉헌식이 있어야 한다는 결의에서 선서가 나왔다.
레지오는 평신도 수도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선서는 레지오의 영성이 압축되어 있는 레지오 선서문을 구두로 엄숙히 낭독하면서 레지오 단원으로서 충실히 봉사할 것을 약속하는 일종의 서원식이다. 그러므로 준비가 철저히 된 상태에서 선서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선서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교본 13장 단원의 자격에 기재되어 있다. 선서문은 성모님께 의탁하면서 성령께 봉헌하는 기도문이다. 레지오 선서문은 성령신심과 성모신심을 결합시킨 기도문으로 프랭크 더프가 알코올 중독자인 조 가벳의 병을 고치기 위해 가르멜회의 봉쇄 수도원에 데리고 들어가 함께 지내면서 그 수도원에서 레지오 교본 초안을 잡았고 성령강림대축일에 갑자기 레지오 조직체계 안에는 선서 제도가 있어야겠다는 영감을 받아 선서문을 만들게 되었다. 그리고 레지오 창설 12년(1933. 2. 13)이 지난 다음에야 마침내 교회 당국의 승인을 받았다.
2) 성모신심과 성령신심의 결합 - 창설자의 성령신심, 성모신심
레지오의 선서는 성모님께 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성령께 드려야 하는 것이다. 레지오 마리애 단원은 성모님을 본받아서 성모님께 전적으로 의탁하고 단원들이 선서를 할 때마다 성령께 대한 봉헌을 새롭게 해야 할 것이다.
또한 창설자는 성령신심이 성모신심에서 우러나온 것이라고 하면서 단원들이 성령신심과 성모신심으로 무장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그는“성모님이 계신 곳에 성령도 계신다.”“성모님은 성령의 활동을 밖으로 보이게 하는 분이다.”“레지오는 성모님을 통해, 성령께 자신을 봉헌하는 선서문을 통해 성숙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그의 저서들에서 성령신심과 성모신심의 중요성을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선서문을 통해 성령신심과 성모신심이 결합된 신심을 가질 것을 당부한다. 그래서 입단식 때 성모님을 통하여 성령의 은총을 간절히 구하는 레지오 단원들은 많은 은총을 받는다. 성모신심과 성령신심이 결합되어 나타난 것이 벡실리움(원 발음은 벡실룸)이다. 벡실리움은 비둘기 모양의 성령님과 성모마리아가 함께 있다. 다음으로 뗏세라도 마찬가지다. 뗏세라의 그림은 성모님을 불기둥으로 성령님을 빛으로 표현하고 단원들이 이 두 분을 옹위하고 있다. 성모님, 성령님, 그리고 단원들이 긴밀히 결합되어 있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레지오 제대보에 인쇄된 Legio Mariae 의 색깔이 빨간 것은 성령을 의미한다. 또한 교본 색깔이 빨간 이유도 성령 때문이다. 그리고 시작기도를 할 때도 '오소서 성령님’이라 하면서 성령께 대한 기도로 시작한다. 이어서 묵주기도를 봉헌하면서 성모님께 대한 신심을 나타낸다.
3) 성령운동과 레지오 마리애
성령님과 성모님 사이에서 태어난 분이 성체이시다. 그러므로 성령신심, 성모신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성체신심도 가지게 마련이다. 성모님을 공경하는 동방정교에는 성체신심이 있지만 성모님을 공경하지 않는 개신교에는 성체신심이 있을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레지오 단원으로 충실히 활동하고 생활한다면 자연스레 성령신심과 성모신심이 생기게 마련이다. 우리는 이 두 신심을 떼어내어 생각할 것이 아니라 같이 합쳐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성령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성령가족이라 부르는데 그들에게 지속적인 활동을 위해서 봉사활동 단체인 레지오에 가입할 것을 권유하고 있다. 레지오 단원들도 성령으로 재 충전해야 할 필요가 있으므로 성령묵상회 등에 자주 참가해야 할 것이다. 레지오 단원들은 성모가족이라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들은 성령가족과도 화목하게 지내야 할 것이다.
저자는 "현대 그리스도교 문학에서 레지오 선서문과 같이 교리적 비중과 영적인 반향을 불러일으킨 기도는 별로 없다”고 고백한다. 이렇게 훌륭한 기도를 신자들이 더 자세히 알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선서문을 풀이한 것이다.
이 선서문은 몽포르의 성 루도비코의 영향을 받아 작성되었다. 몽포르의 루도비코 성인은 세례 받을 때의 선서가 신자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선서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신자들이 이 선서의 중요성을 잊어버리고 생활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이 세례 때의 선서를 갱신하고 성모님께 모든 것을 의탁하며 성모님과 일치하는 삶을 살 것을 강조한다. 성모님과 성령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므로 성령께 선서를 하며, 이를 끊임없이 갱신하는 삶을 살아가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이 선서문에 고스란히 들어 있다.
그러므로 선서문을 잘 알게 되면 성령과 마리아께 대한 레지오 신심을 잘 알 수 있고 레지오 사도직 활동에 대해서도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선서문은 모두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쉬넨스 추기경은 이를 열 한 부분으로 다시 편집하여 해설하고 있다. 아래에서 그 각각의 각론을 살펴보자.
지극히 거룩하신 성령이시여, 저(성명과 세례명)는(은)
오늘 레지오 마리애 단원으로 등록되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그러나 저 스스로는 합당한 봉사를 드릴 만한 능력이 없사오니
저에게 오시어 저를 당신으로 채워 주소서.
제가 하는 보잘 것 없는 일들을 당신의 힘으로 바쳐주시며
당신의 위대한 목적을 이루는 도구가 되게 해주소서.
선서는 성모님께 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께 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성모님을 통해서 성령께 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선서문은 성령을 직접 부름으로써 시작한다. 성령은 교회 안에서 성화의 원동력이다. 선서는 레지오 단원이 성령과 맺는 계약이다. 단원은 자신이 성령의 도구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이 성령의 도구가 되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래서 그 부족함을 고백하면서 성령께서 부족함과 빈곳을 채워주시기를 청하는 것이다. 성령은 겸손하고 겸허한 마음을 도구로 삼는 것이다. 겸허한 단원으로서 도구가 될 때 비로소 성령의 충만하심과 위대하심이 단원 자신의 비어 있음과 보잘 것 없음에 작용해서 인류구원이라는 하느님의 위대한 목적을 이루는 도구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단원들은 레지오 시작기도에서 '오소서 성령님, 믿는 이들의 마음을 채워주소서'라고 합송하는 것이다. 그런 성령 충만의 은총을 가져야 한다.
당신은 이 세상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하려고 오셨으나
성모 마리아를 통하지 않고서는 역사하지 않으시고
이 부분은 성령, 마리아 그리고 그리스도의 관계를 언급하고 있다. 성령과 성모의 관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맺어진 두 사랑의 계약이다. 성령은 인간 쪽으로 내려오는 하느님의 사랑이고 성모는 피조물 가운데 가장 순결한 사랑으로서 하느님께 올라가는 인간적인 사랑이다. 그 두 사랑이 만나는 지점에 그리스도가 있다. 따라서 우리는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시고’라는 사도신경의 부분을 아주 중요하게 여겨 고개를 깊이 숙이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성령으로 인하여 동정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시고”라는 사도신경 구절처럼 두 사랑이 만나는 지점으로서 계약의 매듭이다. 이처럼 예수님을 중심으로 이 두 사랑이 맺은 계약의 의미를 알게 되면 성령과 성모께서 우리를 예수님께 이끌어 그분과 하나 되게 해 주심도 알게 된다. 하느님은 우리가 그분을 우리의 절대자로 모시고 섬기고 흠숭 한다면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우리를 보호해주고 보살펴주고 구원해주는 분이다. 비록 현세에서는 힘들지라도 그 안에는 사랑이 숨어 있다. 어려움 속에서도 '하느님 감사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신앙이 되어야겠다.
저희 또한 성모 마리아 없이는 당신을 알아 뵈올 수 없고
사랑할 수도 없음을 아옵니다.
당신은 저희에게 모든 재능과 성덕과 은총을 내려 주시오나
성모 마리아를 통하여, 성모 마리아가 원하시는 사람들에게,
성모 마리아가 원하시는 때에, 성모 마리아가 원하시는 만큼,
성모 마리아가 원하시는 방법으로,
베풀고 계심을 제가 아옵니다.
이 부분은 예수 성명신심으로 유명한 베르나르디노 성인께서 하신 말씀이다.
마리아는 땅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중재도 하고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는 중재도 하시는 분이다.
레지오는 은총에 있어서 성모님의 보편적 중재를 교회와 함께 믿고 있다. 그래서 교황 베네딕도 15세께서는 1921년도에 모든 은총의 중재자이신 복되신 동정마리아 기념일에 미사와 성무일도를 윤허(允許)하고 5월 31일에 그 기념일을 지내도록 했다.
1964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때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신비 안에서 천주의 모친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역할을 설명했고 그리스도의 유일한 중재성에 예속된 복되신 동정녀의 중재의 덕과 힘을 밝혔다.(교회헌장 60항)
하느님과 인간의 중재자는 오로지 한 분밖에 없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님은 하느님이면서도 인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재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다.
성모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한 중재성에 예속되어 중재역할을 한다.
위에 대한 예로는 '가나의 혼인잔치'를 들 수 있다.
1971년에는 교황청 경신성이 ‘은총의 어머니요, 중재자이신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라는 호칭을 성모 미사 경문에 인준했다.
이 성모 미사 경문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충실하고 성모님의 모성적인 역할과 중재의 임무를 함께 기념하면서 축일을 5월 31일이 아니고 5월 8일에 지내도록 바꾸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공적으로 교황님께서 성모님을 "모든 은총의 중재자"라고 선포하지는 않았다. 또한 "구원의 공속자"라는 호칭도 신자들에 의해 많이 불리워지고 있지만 공식적으로 선포되지 않아 아쉬운 느낌이.
마리아는 하느님의 뜻과 배려에 의해서 모든 은총의 중재자요, 분배자가 되신 분이다.
그리고 은총과 결부된 완전한 레지오 봉사의 비결은 성령과 하나 된 성모 마리아께 온전히 결합하는 것임을 레지오 단원은 깨달아야 한다. 마리아와의 일치는 하느님께로 가는 길인 동시에 이웃에게 가는 까닭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과 하나 된 성모 마리아께 온전히 결합해야 한다.
또한 제가 레지오 단원으로서 충실하게 봉사하는 비결은
당신께 완전히 하나 되어 계시는 성모 마리아와 온전히 일치하는 것임도
잘 알고 있나이다.
이 단락은 마리아와의 일치를 이야기한다. 우리는 마리아의 자녀이고 마리아는 우리의 어머니이다. 자연적인 생활에서는 자녀가 성장하면 결혼해서 부모를 떠나 살지만 초자연적인 생활에서는 자녀가 태아가 된다. 태아처럼 어머니에게 절대적으로 종속되는 것이다. 물론 초자연적인 생활은 아버지한테도 종속되어 있다. 초자연적인 아버지는 하느님이시고 어머니는 성모 마리아이다. 그래서 영적 자녀는 마리아께 온전히 결합되어 있어야 한다.
성모님과의 일치는 하느님께로 가는 길이다. 마리아를 통하여 하느님께로 가야 하는 이유는 하느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마리아를 사랑하는 근본적인 이유 또한 하느님이 원하시기 때문이다.
마리아와의 일치는 하느님께 의탁하는 방법이다. 마리아께 의지하면 자연스럽게 아홉달 동안 성모님 안에 숨어 계신 예수님께 의지하게 되는 것이다. 마리아와 일치하면 구원된 사람들과 통공을 이룬다. 다시 말하면 ‘모든 성인의 통공’, '연옥 영혼들과의 통공'을 이루는 것이다. 하느님께 나아가기 위해 마리아를 통해야 한다면 사람한테 나아가는데도 마리아를 통해야 한다. 마리아와의 일치는 사람에게로 나아가는 길이다. 따라서 성모신심은 사도직 활동을 요구하는 것이다.
레지오 단원은 활동하러 갈 때 성모님과 함께 가야한다. 늘 강조하는 말이며 상훈에 나오는 말이다. 주회합에서 성모상을 가운데 모시는 이유 또한 성모님과 함께 해야 한다는 이유에서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성모님과 함께 가야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단원들은 사람 만나는 활동을 할 때 두드리기 싫은 문을 20번이고 두드려야 한다. 또한 열어주지 않으면 나중에 또다시 방문하기를 꺼리지 말아야 하겠다. 활동이 힘들더라도 하려고 노력하는 단원이 되어야 한다. 마리아와의 일치는 이웃사랑을 더 깊게 해주며 개인 성화를 가져온다. 이것은 단원들이 성모님과의 일치를 통해서 마리아의 모성애를 지니기 때문이다. 이런 변화는 꾸준히 단원 생활을 하는 중에 무의식적으로 생겨난다. 따라서 성모신심이 있다면 사도직 활동과 개인성화는 하나가 된다.
그러므로 이 모든 사실을 우리 눈앞에 드러내 보이는
레지오 단기를 손에 쥐고(선서하는 단원은 벡실리움 깃대를
자신의 오른손으로 잡고, 선서가 끝날 때까지 그대로 유지한다)
저는 지금 성모님의 병사요 자녀로서 당신 앞에 서서,
성모님께 온전히 의탁함을 선언하나이다.
성모님은 제 영혼이 어머니시옵니다.
이 부분은 단원들로 하여금 성모님의 용기와 겸손을 본받도록 한다. 단원은 선서 때에 이 대목에 적혀있는‘레지오 단기를 손에 쥐고’라는 부분을 읽으면서 실질적으로 오른손으로 단기를 손에 쥔다. 군사임을 뚜렷이 드러내는 행위는 군기를 손에 쥐는 것이다. 단기는 성모군대의 군기이다. 단원은 이때 마리아의 군사로서 또한 마리아의 자녀로서 마리아와 한마음이 되려고 마리아께 의탁함을 선언하는 것이다. 단기를 손에 쥐고 성모님께 의탁하는 행위는 선서식에서 뿐만 아니라 매년 레지오의 봉헌 사열식인 아치에스에서도 실시된다.
레지오 단원은 군사로서 용기가 반드시 필요하다. 용기는 성모님의 참된 특성이고 성모님의 덕행이다. 레지오 단원이라고 하면서 용기가 없다면 성모님의 군인이라고 할 수 없다.
성모님은 악의 세력과 싸우기 때문에 투사적인 동정녀라고 할 수 있다. 마리아는 사탄에게 승리를 거두기까지 하느님을 위해 싸우는 창세기의 여인, 묵시록의 여인이다. 창세기는 성서의 시작이고 묵시록은 성서의 마지막이다.
이것을 볼 때 마리아는 시작과 끝에 하느님을 위해 싸우는 여인이다. 그 이름은 진을 친 군대처럼 두려운 여인이시다. 마리아는 누구보다도 굳센 여인이시고 모든 순교자들보다도 더 용감하기 때문에‘순교자들의 모후’라고 불리운다.
용기는 성모님의 정신이다. 또한 레지오의 정신이다. 레지오 단원들에게 사도직 활동을 할 때 체면을 버리고 용기를 발휘하라고 강조한다. 또한 불가능하다고 느껴지는 일도 상징적 행위를 통해서 극복할 수 있다.
상징적 행위란 무슨 일이든 우선 시작하고 그 일을 한 단계, 한 단계 체계적으로 극복해 나간다면 다 해결된다는 뜻이다. 그것은 중간에 하느님께서 개입하시기 때문에 가능하다. 하느님을 믿고 성모님과 함께 일을 하게 되면 불가능하게 보이는 일도 가능하게 된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안 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성모님의 마음과 제 마음은 하나이오며,
이 하나인 마음으로
“주님의 종이오니”라고 다시 사뢰오니,
당신은 성모님을 통하여 큰일을 하시고자 다시 오시나이다.
지극히 거룩하신 성령이시여,
당신의 권능으로 저를 감싸주시고 제 영혼 안에 사랑의 불을 놓으시어
이 세상을 구하고자 하는 성모님의 사랑과 뜻에 일치하게 해주소서.
레지오 단원은 성모님의 겸손을 본받아야 한다. 겸손은 레지오 덕목 중에 맨 앞자리를 차지한다. 마리아의 영혼은 주님의 종, 즉 겸손으로 일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리아와의 결합이 레지오 활동의 뿌리라면 겸손은 뿌리가 박힌 땅이라고 할 수 있다. 땅이 메마르면 레지오는 시들고 말 것이다. 레지오에 입단했을 때 단원으로서 해야 할 일을 수용하는가 못하는가, 오래된 간부들은 계속 군림의 유혹을 받아들일 것인가, 이러한 것들은 겸손이 아니다. 겸손은 겉보기와는 달리 우리를 대담하게 해준다. 겸손하면 사람이 나약하고 힘이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르는데 겸손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당신의 권능으로 티 없이 되신 성모님 안에서 저 또한 깨끗하게 하시고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 제 안에서도 자라시게 해주소서.
그리하여 저 또한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과 함께
이 세상과 영혼들에게 그리스도를 모셔다 드리게 해주시고
그들과 제가 이 세상 싸움에서 이긴 다음 성모님과 함께
복되신 성삼위의 영광 안에서 영원히 살게 해주소서.
레지오는 단원들에게 성모님의 순결처럼 사도적 순결을 요구한다. 마리아와 죄는 이미 원수로 맺어져 있다. 원죄 없으신 성모님과 일치하고 성령의 인도를 따른다면 죄에 대한 혐오감과 악을 멀리하는 자세를 갖게 되고 이웃에게 순수하게 봉사하려는 사도적 순결을 실천하게 되는 것이다.
자신에게 맡겨진 일이 고상하면 고상할수록 영혼은 더 순결해야 한다. 영혼들과 접촉하러 가는 사도는 누구나 자신의 부당함을 느낀다. 어느 영혼이나 더러운 손으로 만져서는 안될 축성된 성합과 같기 때문이다. 단원들은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고 성장해야 하고 그리스도께서도 단원들 안에서 자라시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신앙을 남들에게 알리고 증거 해야 한다. 신앙은 보존도 해야 하지만 전파도 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쁜 소식으로 전해지지 않는 복음은 의미가 없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은 기쁜 소식이다.
오늘 저는, 당신께서 저를 받아 주시고 저를 써 주시며
저의 나약함을 굳센 힘으로 만들어 주시리라 확실히 믿으며 다짐하나이다.
저는 감히 레지오의 대열에 한 자리를 차지하여 충실하게 봉사하겠나이다.
저는 레지오 규율에 온전히 복종하겠나이다.
이 규율은 동료 단원들과 저를 하나로 묶어
군단을 이루도록하며,
또한 성모님과 함께 진군하는
우리의 대열을 가다듬어,
이 대목은 레지오의 규칙과 규율에 대한 순종과 선교활동과 믿음, 마리아와 세상에 대한 내용이다. 레지오는 단원의 충실한 봉사를 소중하게 여긴다. 레지오 단원은 믿음을 생활로, 이론을 실제로, 말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중요함을 알기 때문에 감히 레지오 대열에 한자리를 차지하여 충실하게 봉사할 것을 삼가 약속하게 되는 것이다.
단원이 성모님께 봉사할 때는 전력을 다해야 한다. 단원이 봉사에 충실하면 규율도 바르게 된다. 바른 규율로서 질서가 잡히고 단원이 결속되며 자신이 지닌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게 된다. 그래서 선서 때에‘오직 레지오의 규칙과 규율에 온전히 복종하겠나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순종은 단원 자신을 지켜주는 안전보장이다. 레지오는 인간이 항구하지 못하므로 주회합을 하도록 하고 상세한 활동 보고를 시킨다. 단원은 자기 생각대로 혼자서 아무데나 가지 않고 단장의 명령을 받아 하느님께서 보내주시는 곳에 마리아께서 안내해 주시는 대로 가게 된다. 가나 혼인잔치 집에서의 하인들처럼 성모님의 말씀대로 활동하는 단원은 복을 받는다. 레지오 규율은 선서자로 하여금 동료 단원들과 메이게 하여 한 군대를 이루게 한다. 레지오 규율과 규범은 수도자들의 생활 규범처럼 기도와 활동으로 요약되는 것이다.
레지오의 목적도 기도와 활동으로써 단원들을 성화하고 이웃을 구원하는 것이다. 단원은 기도에 있어서 까떼나 뿐만 아니라 미사참례, 성체조배, 묵주기도, 성무일도 등의 기도를 소홀히 하지 말아야겠다. 그리고 기도뿐만 아니라 선교활동에도 충실해야겠다.
성체는 사도직 활동의 목적인 동시에 방법이다. 성체는 극도의 그리고 최상의 사랑의 성사이다.
선교활동은 하느님의 뜻이요, 예수님의 지상 명령이다. 바오로 사도는‘만일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나에게 화가 미칠 것이다’라고 했다. 레지오 단원은 하느님께서 인류 구원을 완성시키려고 자신의 선교활동에 기대를 걸고 계심을 알아야 한다. 전교활동은 단원들의 의무이다.
① 중재의 새벽 - 성모님의 방문
② 중재의 여명 - 성령 강림
③ 중재의 대낮 - 신앙은 은총의 샘, 마리아와의 완전한 신앙, 마리아의 신앙과 일치
당신의 뜻을 이루고 은총의 기적을 일으키게 하나이다.
성모님의 중재활동이 시작되는 사건은 친척 엘리사벳 방문이다. 이는 성모님의 첫 번째 중재로서 은총의 첫 기적을 일으켰다. 성모님의 방문은 엘리사벳의 태중의 아들 요한이 기뻐 뛰놀게 했으며 엘리사벳은 마리아께 주님의 어머니라고 신앙고백을 했다. 성모님의 방문은 태중의 예수님과 엘리사벳 태중의 요한이 어머니들을 통해 서로 미리 만나게 된 사건이 된다. 요한은 출생하기도 전에 성화되어 그리스도의 선구자가 되고 증인이 되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 탄생 대축일이 있는 것이다.
성모님의 중재의 여명은 성령 강림이다. 성령을 받아야 믿음이 굳세지고 전교할 의욕이 생긴다. 성령 특은의 날인을 받고 기름 바르는 성사가 바로 견진 성사이고 이 성사를 받으면 사도가 된다. 성령 강림 때의 불혀와 바람은 사람을 가만히 있지 못하게 활동하도록 만들었다.
오늘도 성령 강림이 계속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산도 움직일 수 있는 신앙이다. 그런 신앙이 있다면 오늘도 은총의 기적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복음서에 나오는 첫 번째 복은 믿음의 복이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십니다'라고 루가 1장 45절에 나와 있다. 따라서 레지오 단원은 성모님의 믿음을 본받아서 선교활동으로서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야한다.
레지오 마침 기도문은 순전히 믿음을 간청하는 내용이다. 단원들은 활동하기 전에 그들의 신앙이 기적을 일으킬 수 있도록 바위와 같이 견고하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 용감한 믿음, 불기둥이 될 믿음, 평화의 길로 인도하는 믿음, 이런 믿음을 달라고 기도해야겠다.
그리하여 마침에 땅의 얼굴은 새롭게 되고
온 누리에 하느님의 나리가 펼쳐지게 될 것이옵니다.
땅의 얼굴을 새롭게 한다는 뜻은 온 누리를 새롭게 한다는 뜻이다. 온 누리를 새롭게 한다는 것은 온 세상을 새롭게 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일그러진 세상이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되고 개선된다는 뜻이다.
마리아와 교회는 불가분의 관계이다. 마리아는 교회의 어머니이시다. 마리아와 교회는 모두 동정녀이고 어머니이다. 마리아는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다음으로 뛰어나고 중요한 지체이다. 마리아께 대한 신심은 교회에 대한 신심이다. 교회의 창설의 3단계(강생, 수난, 성령강림)마다 성모님이 계셨다. 교회의 신비는 마리아의 신비이기도 하다. 마리아와 교회는 둘 다 성령에게서 출생의 힘을 받았다. 마리아를 사랑하는 것은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고 교계제도의 교황, 주교, 신부를 사랑하는 것이다. 레지오는 그들에게 합당한 존경과 순종을 더욱 더 나타내기를 호소하고 있다. 레지오는 마리아의 군단이고 교회의 군단이다. 레지오는 현대에 있어서 하느님을 위한 위대한 사업, 곧 적과 맞서는 최전선에 서기를 갈망하고 있다.
이 치열한 사업에 있어서 교회의 일치 문제에도 우리는 관심을 가져야 한다. 성모님 곁에 가야만 자녀들이 비로소 같은 형제자매임을 깨닫게 된다. 성모신심만 있다면 갈라진 형제들이 다시 일치될 수도 있다.
마리아는 레지오 마리애에게 바치는 유순한 영혼들을 성령께 드리고 성령은 그들을 도구로 삼아 하느님 나라를 온 누리에 펼치도록 할 것이다.
선서문은 성호경을 읽으며 손으로 십자성호를 그음으로서 끝을 맺는다. 십자성호는 세속적인 전장에 나가는 선서자에게 보이지 않는 갑옷을 입히는 것이다. 십자성호는 고통의 표징이다. 고통에 대한 인식은 예수님과 성모님이 아주 가까이 계신다는 인식을 가지게 한다. 레지오 단원은 성모님과 일치하여 완수하려는 사도직 활동이 십자가 밑에 계신 예수님의 공동 수난에 뿌리박고 있어야 함을 명심해야 한다.
십자가는 또한 희망과 사랑과 유익의 표징이다. 모든 성사는 십자가를 긋지 않고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교회에서 거행하는 모든 성무에서, 즉 세례나 견진 받는 이에게, 미사 때 봉헌하는 제병에, 고해하는 죄인에게, 혼배 성사와 성품 성사자에게, 위안의 병자 성사를 받는 이에게도 구원의 십자가를 긋지 않고 이루어지는 일은 없다. 심지어 미사 시간에 십자가를 그어야만 제병이 성체로 변하는 것이다. 또 음식이나 물, 기름에도 십자가를 긋는다. 이처럼 교회는 마귀를 이기는 십자성호를 자주 긋도록 한다. 십자성호는 축복과 구원과 승리의 표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전교활동을 할 때 이 십자표로서 굳세어져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성호경은 삼위일체 하느님께 대한 신앙 고백이다. 궁극적으로 성삼위와 일치해야 할 레지오 단원이다. 우리 신앙의 목표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 함께 사는 것이다. 그것이 구원이다. 따라서 레지오 단원은 성삼위 안에서 자신의 생활 전체를 향상시켜야 한다. 그리고 사도직 활동 전체를 성삼위에 이르게 해야 한다.
첫댓글 레지오마리애 단원 여러분들께 더 많은 도움이되고 묵상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데 참고가 될까하여 스크랩하여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