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트페테르부르크로 향하며
저희는 오슬로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는 열차를 타고 떠났습니다. 서서히 밖의 풍경이 바뀌는 것으로 보아 차츰 러시아에 들어온 것을 알게 되었지요. 끝없이 펼쳐지는 자작나무 숲으로 이어져 있었습니다. 러시아의 공안이 패스포드를 정검하는 데 괜스레 겁이 나 드라고요. 시간도 많이 걸리고요.
이곳이 러시아구나 생각하며 상트페테르부르크 역에서 내려 가이드를 만나 호텔로 갔습니다. 호텔은 무척 크고 괜찮았어요. 패스포드를 전부 맡기고 나서 호텔에 투숙했지요. 호텔은 중국인 관광객로 북적였습니다. 우리 중의 반이 중국인들이 차지하고 복잡한 식당에서 아침을 했지요. 잘 몰라서요. 우리만의 식당이 있는 것을....
가이드는 여러 설명을 했지요. 가이드가 슬슬 욕을 섞어 말을 했지요. 예를 들어, 저보고 해욱이스키 라고. 뭐뭐스키. 대략 설명하자면,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의 북서쪽에 있는 연방시고 어떻고.... 네바 강 하구에 있으며, 그 델타지대의 형성된 자연 섬과 운하로 인해 생긴 수많은 섬 위에 세워진 도시입니다. 발트 해의 핀란드 만에 접해 있습니다.
예전에는 페트로그라드와 레닌그라드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1924년 1월 21일 레닌이 죽자 1924년 1월 26일 그를 기념하여 레닌그라드로 불리게 되었고, 1991년 9월 6일 다시 옛 이름을 되찾았습니다.
러시아 제국의 차르 표트르 대제가 1703년 설립한 이 도시는 1713년 모스크바에서 천도하여 1918년까지 러시아 제국의 수도였습니다. 1918년 수도는 다시 모스크바로 옮겨졌습니다. 2010년 기준으로 5,000,000 명이 살고 있으며, 러시아에서는 수도 모스크바 다음으로, 유럽에서는 네 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입니다.
모스크바에 이은 러시아의 대공업도시로 복잡한 정밀기계의 제조가 특색입니다. 다수의 학술 연구기관, 미술관, 박물관 등이 있어 학술·문화의 중심지이기도 합니다. 도심은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습니다. 레닌그라드 주와는 분리된 연방시를 이루고 있으나, 레닌그라드 주의 행정 중심 도시로 되어 있습니다.
1611년에 한번 스웨덴이 이 지역을 차지한 적이 있었으나, 표트르 1세가 북방전쟁에서 이 지역을 탈환하였습니다. 이곳의 수비를 목적으로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를 짓기 시작함으로써 도시건설의 기반이 마련되었습니다. 표트르 1세는 서구 문화를 받아들이기 위하여 장대한 도시계획을 세우고, 이 요새 근처에 자신의 이름을 따서 새로운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짓게 되었습니다.
새 도시를 짓기에는 이 지역의 자연환경이 좋지만은 않았습니다. 연 평균 기온은 4.2도에 일조량은 31일 정도입니다. 또 매년 한 번씩 홍수가 터져서 곤혹을 치르며 또 원래 습지였던 이 지역에 도시를 바로 짓는 것은 불가능하였습니다. 도시를 짓기 위해서는 석조 토대가 필요했는데, 이 때문에 도시를 지을 때 돌을 쏟아 부어 습지를 메울 필요가 있었습니다.
물론 습지를 메우는 데에는 어마어마한 양의 돌이 필요했습니다. 따라서 표트르 대제는 돌을 충당하기 위해 도시를 들어오는 모든 선박과 사람들에게 돌을 가져오라고 칙령을 내렸습니다. 선박은 크기에 따라 30kg이상의 돌을 10~30개 가져와야 했으며, 육로로 들어올 경우에는 15kg이상의 돌을 세 개씩 가져와야 했습니다.
수많은 노예들이 습지를 돌로 메우는 데에 이용되었으며 가혹한 자연과 고된 노동을 이기지 못하고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였습니다. 이때 죽은 노예를 습지로 던져버렸기 때문에 이 도시에는 뼈 위에 세운 도시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이 있습니다. 이 때는 석조 건축물을 짓는 것도 금지되었습니다. 각종 물건들에도 세금이 붙었고 교회의 재산도 국가에 귀속시켜 버렸습니다. 표트르 대제에 반하여 구 귀족 및 종교 세력의 편이었던 그의 아들 알렉세이 황태자는 1718년에 무자비하게 처형되고 맙니다.
18세기 초반부터는 러시아 최대의 무역항으로 공업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1851년엔 러시아 최초의 철도가 부설되기도 했습니다. 자본주의가 발전하고 교통이 편리해짐으로써 이 도시의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하였습니다. 이후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중반까지 각종 러시아의 혁명에서도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중심이 되었습니다. 여러분들, 기억하실 거예요. 피의 일요일 혁명이라고. 또 세계 2차 대전 당시 1941년 8월부터 29개월 동안 독일군에 포위당한 상태로 40만 명이 굶어 죽으면서 지켜낸 도시라고 하여 영웅 도시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등등 수많은 설명을 들으며...
아, 내가 드디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와 있구나. 생각했습니다. 네프스키 대로에 있는 수도원 주변에는 아치 형태의 문이 있는데 이 입구의 왼쪽에 있는 묘지가 라자레프 묘지입니다. 유명한 문학가와 차이콥스키, 무소르크스키 등 유명한 작곡가의 묘가 있습니다. 뭐뭐스키는 여전히 나오지요. 로스트랄 등대는 바실리옙스키섬의 구증권거래소 광장에 위치하고 있는 높이 32m의 등대입니다.
궁전광장은 수많은 정치적인 사건이 일어난 곳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1905년의 제1차 러시아 혁명의 발단이 되었던 ‘피의 일요일’날 시위가 있었던 곳이 이곳이며, 볼셰비키 통치기간 중 ‘단결된 평화시위’와 군사행진을 위해 사용된 장소도 바로 이곳입니다. 민주화된 오늘날에도 갖가지 종류의 정치적 집회 및 문화 공연이 이곳에서 행해지고 있습니다.
화려했던 18,19세기 제정 러시아의 수도이자 사회주의 혁명의 발상지인 성 페테르부르크는 역사의 영욕이 그대로 숨 쉬는 만큼 여행자에게 더 없는 기쁨과 만족을 주는 도시입니다. 특히 이사크 성당, 에르미타주 박물관, 네바강 등이 백야에 희미하게 비치는 여름 정취는 아름답기 그지없습니다.
서울이라면 밤이겠지만 이곳은 백야 햇살로 눈부셨고 거리엔 그 햇빛을 즐기는 사람들로 붐볐습니다. 러시아 제2의 도시 ‘성 페테르부르크’. 이곳은 항상 러시아 역사의 중심에 서 있던 탓에 흔히 모스크바와 비교되는 지역입니다. 하지만 모스크바와는 다른 독특한 매력과 분위기를 지닌 탓에 대부분은 이곳을 더 마음에 담는다고 합니다.
특히 잔잔히 흐르는 네바강과 18,19세기 바로크 양식의 화려한 건축물이 백야 햇빛에 반짝거리는 정취는 오랫동안 가슴 깊숙이 남아있을 정도입니다. 성 페테르부르크는 인구 4백70만 명의 대도시로 북위 60도상에 위치해 있습니다. 핀란드만을 향해 흐르는 네바강의 델타지역에 형성된, 약 1백여개의 섬을 365개 다리로 연결해 ‘북쪽의 베니스’로 통하는 물의 도시인 이 곳은 겨울도 아름답지만 이국적이고 독특한 여름 풍경이 저절로 탄식을 자아낼 정도입니다.
성 페테르부르크의 본격적인 여름은 6월 하순 ‘백야제’와 함께 시작됩니다. 백야엔 보통 밤 11시경 해가 지지만 밖에서 책을 읽을 만큼 밝습니다. 저희는 이미 7월 하순이라 10 시 전에 해가 집니다.
화려했던 러시아 제정과 혁명의 흔적들이 숨 쉬는 곳 페테르부르크라는 지금의 이름이 붙여진 것은 이 도시의 건설자인 표트르 대제에 의해서입니다. 18세기 초 러시아를 근대화하려는 의도에서 이 도시를 세운 표트르 대제는 러시아 정교의 성인인 성 베드로의 이름을 따 ‘성 페테르부르크’라 지었습니다. 그러나 이 이름은 1차 대전 중 적성국인 독일식이라는 이유로 ‘페트로그라드’로 개칭됐고, 다시 혁명이 끝나고 레닌이 죽은 뒤인 1924년에 ‘레닌그라드(레닌의 동네라는 뜻이지요.)’라는 새 이름을 갖습니다.
또 1백21.8m나 되는 높은 첨탑이 있는 아름다운 성당에도 유명한 전설이 전해 내려옵니다. 1830년 첨탑 끝에 있는 십자가를 든 천사 상이 기울어 아래로 떨어졌답니다. 그때 목수인 테르시킨이 무료로 수리를 자청하고 나섰는데, 그는 발판이나 사다리를 사용하지 않고 그물 하나로 탑 꼭대기를 완벽하게 수리했습니다. 이에 나라에선 그의 요청에 따라 평생 공짜로 술을 먹을 수 있도록 목에 증표를 하사했고, 그 후부터 그는 술을 먹은 후엔 돈을 내는 대신 항상 목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러시아 사람들 사이에선 한잔하자는 표시로 목을 두드린다고 합니다.
어제는 호텔이 네바 강에 가까운 곳에 위치했거나 도심에 위치해 있었더라면 야경이라도 보자며 몇 군데 돌아봤겠지만 호텔 주변은 볼거리도 없는 듯 했고 거리도 어두워 일찍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의 골목길을 벗어나려는데 군용 트럭이 길을 가로 막습니다. 다른 곳에서 이런 모습을 봤더라면 그러려니 했겠지만 이곳이 러시아인 탓에 예사롭지 않게 다가옵니다. 군사대국으로서 냉전 시대를 이끌었던 이미지의 구 소련이 연상됩니다.
여름 궁전 입구를 지나니 벌써 많은 관광객들이 들어와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드디어 여름 궁전의 모습이 눈앞에 다가왔습니다. 성당처럼 생긴 건물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여름 궁전은 1709년 스웨덴과의 폴타바 전투에서 승리한 표트르 대제의 지시에 의한 것인데 총면적 1000헥타르에 달하는 공원에 궁전과 작은 공원들 그리고 수많은 분수들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여름 궁전에 도착한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궁전을 돌아보는 것보다 궁전 앞의 분수들에 모든 시선이 쏠려 있는 듯 합니다.
여름 궁전은 규모는 물론이고 건물과 조형물 산책로 등 대부분이 프랑스 베르사이유 궁전과 비슷합니다. 이는 유럽을 방문했을 때 베르사이유 궁전을 둘러본 표트르 대제가 러시아 왕가의 위용을 과시할 목적으로 베르사이유 궁전보다 더 넓은 궁전을 건설하고 싶어 했기 때문이라는데 베르사이유 궁전 같은 느낌을 원해서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초빙해 지었고 직접 건물과 분수의 위치까지도 지정해 주었다고 하는데 전체적인 구성은 이탈리아의 유명한 건축가인 라스트렐리에 의해 완성되었다고 합니다.
여름 궁전은 수많은 아름다운 분수들로 인하여 분수궁전으로도 불리는데 이 분수들 가운데서도 130여개의 물줄기를 내뿜는 중앙의 대폭포분수는 완벽한 아름다움을 갖춰 분수궁전의 진주로 꼽힙니다. 대분수는 길게 이어진 운하를 통해 핀란드만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분수가까이에서 분수를 살펴보았습니다. 7계단을 따라 64개 분수가 설치되어 있다고 하고 제각기 붙여진 이름도 있고 나름 상징성도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각 분수 사이사이에는 황금빛으로 치장한 조각상들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가이드 말에 의하면, 분수를 구성하고 있는 각종 조각상들의 아름다운 모습들도 놀랍지만 현재와는 확연히 다른 방법으로 분수를 가동시킨다는 사실이 감탄을 자아내게 합니다. 인위적인 펌프 등이 전혀 없는 순수한 자연압으로 물줄기가 치솟게 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합니다. 조각상과 분수들이 각기 다른 모양으로 설치되어 있다고 하는데 대분수 제일 아래 부분의 연못 한가운데에 삼손 분수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표트르 대제가 삼손 조각상의 설치를 결정한 것은 스웨덴과의 폴타바 전투에서 승리한 날이 성 삼소니아의 기념일이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곳저곳이 온통 관광객들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드디어 러시아 국가가 울려 퍼지고 대기하고 있던 관리자가 분수에 연결된 밸브를 열자 서서히 물줄기가 치솟아 오릅니다. 삼손 분수의 물줄기가 하늘 높이 치솟아 오르자 계단 상층부에 위치한 분수들도 일제히 물줄기를 뿜어냅니다.
첫댓글 레닌그라드로 더 익숙한 도시 - 상트페트르부르크
아마도 70년대 대학을 다닌 사람은
마르크스 이후에 가장 위대한 혁명사상가인 레닌이라는 이름이 익숙해서......
헬싱키에서 기차를 타고 러시아로 들어가는 철도변의 풍경에서
자작나무 숲을 지나면서
말로만 듣던 그 소련으로 내가 들어가고 있음이 실감나며
20대에 만난 혁명가들의 삶이 떠오르고 가슴이 뛰기 시작하였다.
언변이 좋고 귀여운 인상의 가이드가
백야의 정취를 따라 네바 강변을 지나가면서
수많은 운하들이 자정 경에 들어져 열린다는....유람선으로 유혹을 했고
겨울의 도시 야경은 너무 매혹적이라는 등 ...
처음부터 설레임을 주던 그 도시 - 꼭 다시 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