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이 빚어낸 약사
내가 고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 때 지금은 먹사로 있는 최영두의 집에 갔을 때 한통의 편지가 와 있었다.
영두네 집은 부모님이 모두 객지에 가 계시고 할머니와 삼촌 조카만 있어서 우리에게는 단골 사랑방 역할을 했다. 나와 태기는 거기서 살다시피 하면서 술, 담배는 물론이요 심심찮게 닭서리도 해먹고 여자애들과도 어울리는 등 나쁜짓은 다하고 살던 곳이었다.
청주에서 퇴학을 당해서 풍기고에 다니던 이병갑(혹은 병수) 이도 영두네 집에 방을 정하고 있었는데, 그 친구한테서 온 편지였다.
내용인 즉은 그 겨울 방학에 장가를 가니 친구들과 함께 결혼식에 참석해달라는 것이었다.
참으로 황당한 편지였지만, 또 한편 신나는 일이기도 했다.
그 당시 병갑이 아버지는 72살 이셨고, 어머니는 40대 후반이었다. 병갑이 뒷바라지를 하다가 고2때 봄에 돌아가신 어머니가 첫 번째 부인이었고, 그 뒤 두 번째, 세 번쩨 부인에게서 자식을 얻지 못하다가 병갑이는 네 번째 부인에서 났으니, 나이 일흔이 넘도록 손주를 보지 못하는 것이 조급해서 일찍 장가를 들도록 오창에 있는 색시를 주선해서 결혼을 시키는 것이었다.
실제로 그 아버지는 병갑이 결혼을 시킨 다음 해에 세상을 떠났으니, 간신히 손주보는 소원만 성취하고 가신 것이었다. 선견지명이 있었던가 보다.
병갑이는 구레나룻이 시커멓게 나서 신랑감으로 아울렸으나, 나나 영두, 태기 등 소위 신랑 친구라 하는 축들은 모두 까까머리라 참으로 우스웠다. 교복을 입고 결혼식에 가는 꼴이라니!
병갑이네 집은 청주 개신동 충북대학 안에 있는 마을 한쪽의 제법 큰 기와집이었다. 당시 대학 안에는 마을도 한켠에 있었고 작은 냇물도 흘렀다.
방을 여러 개 만들어서 학생들 하숙을 쳤으니, 그 집 하숙생 출신중의 하나가 금계중 체육선생으로 왔었는데, 병갑이가 금지옥엽으로 버릇없이 커서 학교에서도 짤리는 신세가 되었을 때 하숙생 인연을 찾아 풍기로 온 것이었다.
나도 나중에는 그 집에서 한 학기를 하숙했었다.
결혼식이야 어찌되었던 안중에도 없고, 우리는 그 많은 방 중의 하나를 잡아서 병갑이 여동생 병숙이 병애등과 어울려 몇 날 며칠을 술단지가 다 비도록 그 집에서 묵새겼다.
병갑이는 색시 품이 그리워서 고3은 다니지 않고 중도에 하차했다. 지금은 중기차를 운행한단다.
그리고 또 세월이 흘러 대학 입시철이 되었다.
나는 대학을 진학하리라 조금도 생각지 않았고, 더구나 약대에 가서 약사가 되리라는 계획은 털끝 만큼도 없었다. 그 작은 공간에 쳐박혀서 생활한다는 것 자체가 천지를 주유하기 좋아하는 내 천성과 맞지도 않을 터였다.
고3초에 이미 지금 기아자동차의 전신인 기아자전거에 입사 허락도 받아놓은 상태였다.
그러나 운명은 예측할 수 없는 것.
고3때 사귀던 여학생- 일방적인 내 짝사랑이었지만, 그 영주여고에 다니던 여학생이 ‘우리 대학에 함께 가서 캠퍼스에서 만나자’는 말에 솔깃하여 죽자고 공부를 해서 웬만한 대학은 갈 수 있는 실력은 있었다.
그러나 내가 지망했던 이문동에 있는 한국외국어대학은 2차였다. 영어는 얼추하던 터라 러시아어를 전공하여 미소 양대국어를 능통하면 다방면에 쓸데가 있을 것 같아서 러시아어를 전공하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당연히 1차 시험 때는 그냥 놀 수 밖에 없었는데, 그냥 놀기에는 심심해서 내 실력 테스트도 해볼 겸해서 1차 시험을 보기로 했는데, 그 때 마침 병갑이 생각이 났다.
우체국에 가서 시외전화를 신청하고 몇 십분을 기다린 끝에 병갑이와 통화가 이루어졌다.
“병갑아, 너 집있는데가 무슨 대학이냐?”
“충북대”
“그럼 거기서 젤 쎈데가 어디냐?”
“약대”
“그럼 그 원서 한 장 사서 보내라.”
내 개인의 성적을 측정할 방법이 흔치 않던 시절이라 그 시험에 떨어지면 떨어질 정도의 실력일 것이요, 붙으면 붙을 정도의 실력일 것이니 실력 테스트로는 참 좋은 방법이었다. 어차피 내가 가지 않을 학교니.
그러나 그건 핑계일 뿐으로, 속샘은 병갑이네 집에가서 병갑이 여동생들과 놀며 술 마시는게 더 큰 희망이었다.
당시 청주 막걸리는 순 쌀 막걸리로, 풍기 막걸리 처럼 한 잔 마시면 탁배기에 찌꺼기가 남아서 바닥에 털어야하는 그런 막걸리가 아니라, 색깔부터 포름하고 맛이 달짝지근하고 찌꺼기가 남지 않는 극상품이었다.
시험 치는 날은 눈이 많이 와서 제2본관 까지 가는데 죽을 애를 먹었다.
무엇 보다 나를 괴롭힌 것은 졸음이었다.
그전 날 과음도 했고, 눈길을 걸어오느라 진땀을 뺀데다가 촌놈의 학교에 장작 난로를 피워놔서 덥기도하고 해서 졸음이 무더기로 밀려왔다.
시험지를 받으면 후다닥 답을 써 놓고 나머지 시간에는 엎드려서 잤다. 50%는 단답식이었고, 나머지는 문제풀이 형태의 주관식이었다. 수학은 실제 그래프를 그려가면서 함수 문제를 풀었다. 미적분이 많이 나왔다.
제일 취약했던 수학은 뒤에 현대중공업과 삼호중공업 사장을 지낸 오병욱 선생의 친절한 지도로 흥미를 얻었고, 당시 정대영이네 집에 기거하던 서울 사대 중퇴생 백경남 형을 통해서 심화학습을 하는 행운으로 당당히 자신있는 과목으로 자리 잡았었다.
대영이네 집에서는 한편으론 영어를 가르치는 선생이었고, 동시에 수학을 배우는 학생이었다.
과목은 영수국 3과목이 필수고, 물리 화학 중 한 과목이 선택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영수국 3과목은 모두 만점을 받았고, 화학을 선택하였지만, 전혀 배우지 않은 과목이었으므로 10점을 받았다. 그래도 전교 11등의 성적이었다.
나는 한국 외국어 대학을 향한 2차 시험에 응시를 하지않았다. 안한 것이 아니라 못했다.
병갑이 동생 병애가 전보를 보내와서 합격 소식을 전해 듣고 집에 가서 자랑은 했지만, 나는 매일 근국이와 봉현 논에 얼려놓은 스케이트장에서 호떡과 오뎅과 막걸리 팔기에 바빴다.
하루 장사를 해서 이문이 남으면 그 날 저녁으로 재찬이 근국이 나 이렇게 셋이 어울려서 진탕으로 마시고 놀았다.
그러다가 2차 시험 원서를 쓸 기회를 놓쳤는데, 그건 하루를 원서를 사러 서울로 가고 다음 날 와서 다시 학교에 가서 원서를 쓰고, 그걸 다시 완행열차를 타고 서울 가서 접수 시키기에는 시간이 너무 없었다.
너무 먹고 마시다가 놓쳐버린 시간이었다.
할아버지가 형을 시켜서 청주에 있는 대학에 입학금을 낸 것은 나중에야 알았다. 39,200원.
그런 내가 지금 약사(藥事)를 평생의 업으로 삼고 있으니 참으로 술이 빚어낸 약사(藥師)가 아닐 수 없지 않은가?
甲午 3월 驚蟄後 10일
豊江
첫댓글 맞다.술이 빚어낸 약사가~ 중 고등생 시절부터 지금까지 술이라는 기호식품과 죽고못사는 관계 였으니 추측이지만 가믐에 남원천에 한 이틀 정도 흐르는 물 만큼 마시고 쌌을거라 짐작된다. 맞제?
그래도 이제는 많이 마시면 취하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