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종 대왕(肅宗大王) 원년 을묘 ○ 선생 27세 (서기 1675년)
2년병진 ○ 선생 28세
○ 영동(嶺東)에 갔다.
3년정사 ○ 선생 29세
○ 3월에 다시 영동에 갔다. 선생은 오래 전부터 세상을 멀리하고 숨어 살 뜻이 있었는데 때마침 사람들이 북방의 변보[北報]가 염려된다고 함에 따라서 이형(姨兄)인 김 참판(參判) 몽신(夢臣)과 함께 강릉부 우계역(江陵府羽溪驛)에 이르렀다가 그곳의 그윽하고 조용한 것을 사랑하여 거주하고자 하였으나 후에도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4년무오
5년기미
6년경신 ○ 선생 32세
○ 여름에 영의정 김공(金公) 수항(壽恒)이 선생을 조정에 천거하였다. 상께서 조정에 선비를 천거하라고 분부하자 김공은 선생을경명행수(經明行修)로서 맨 먼젓번의 천망(薦望)으로 선정하여 올렸다.
○ 5월 갑진(16일)에 사포서 별제(司圃署別提)에 임명되었는데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김공의 천거로 이 직책에 제수되었는데 때마침 선생은 학업을 닦는 데 너무 애를 쓰고 밤낮이 다하도록 그칠 줄을 모르다가 드디어는 기(氣)가 허(虛)하여 병이 생겼으므로,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7년신유
8년임술 ○ 선생 34세
○ 12월 경자(27일)에 종부시 주부(宗簿寺主簿)에 임명되었는데 나가지 않았다. 이 해에 선생은 갑자기 병이 더욱 심하여 여러 번 위태롭게 되었으므로 손수 글을 써서 일신(一身)의 뒷일을 아우인 광주군(廣州君)에게 맡겼다. 그리고 남계 선생(南溪先生)에게 편지까지 올려서 고결(告訣)하였다. 어머니는 자주 탄식하시며 이르기를, “모(某)의 병은 실로 각고(刻苦)하며 공부하기를 숭상하다가 생겼다. 인정(人情)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또한 그러한 학업은 원치 않는다.”고 하였다. 선생은 몹시 어머님의 염려하시는데 근심이 되어 자못 스스로 몸을 아꼈으므로 드디어 점차로 온전하게 회복되었으며, 중년 이후부터는 근력(筋力)이 건강하여 소장(少壯) 시절보다 더 나아졌으며 드디어 대질(大耋 80세가 넘은 노인)을 누리게 되었다.
9년계해 ○ 선생 35세
○ 이 해 조의(朝議)에서는 대직(臺職)을 가지고 선생을 처우(處遇)하려고 했으나 이형(姨兄) 심 응교(沈應敎) 유(濡)가 때마침 삼사(三司)에 있었기에 선생은 병이 있고 또한 어머님이 늙으시어 봉양하여야 했기 때문에 서울에서 벼슬하는 것이 불안함을 염려하여 제공(諸公)에게 애써 부탁하여 중지케 하였다.
○ 딸이 이징성(李徵成)에게 출가(出嫁)하였다. 전의인(全義人)이며 이조 참판(吏曹參判) 정겸(廷謙)의 아들이었고 벼슬은 성천 부사(成川府使)였다.
10년갑자 ○ 선생 36세
○ 3월 갑술(8일)에 공조 좌랑(工曹佐郞)에 임명되었다. 벼슬한 지 며칠 만에 병으로 체직(遞職)되었다.
11년을축
12년병인 ○ 선생 38세
○ 11월에 아들 후일(厚一)이 이씨(李氏)의 딸을 부인으로 취(娶)하였다. 연안인(延安人)이며 부제학(副提學) 정관재(靜觀齋) 단상(端相)의 따님이었다.
13년정묘
14년무진 ○ 선생 40세
○ 4월에 이조 판서(吏曹判書) 여공(呂公) 성제(聖齊)와 호조 판서(戶曹判書) 유공(柳公) 상운(尙運)이 선생을 조정에 천거하였다.
○ 겨울에 어머님을 모시고 장성 현아(長城縣衙)에 갔다. 광주군이 때마침 장성 현감(長城縣監)이 되었었다.
○ 12월 병인(27일)에 평택 현감(平澤縣監)에 임명되었다.
15년기사 ○ 선생 41세
○ 2월에 부임하였다. 이때 모 부인의 분부 때문에 서울에 들어와서 임금께 사은(謝恩)한 다음 부임하였다.
○ 4월에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서 관리에게 문초(問招)를 받았다. 이때에 이 문성(李文成 율곡)과 성 문간(成文簡 우계) 두 선생이 문묘(文廟)의 배향(配享)에서 쫓겨나게 되자, 선생은 벼슬에 있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어 벼슬을 버리고 안산(安山) 추곡(楸谷)으로 돌아왔는데 안사(按使)가 직무 이탈[擅離]을 이유로 삼아 문죄하게 되었다.
○ 7월에는 죄가 용서되었으므로[赦罪] 안산(安山)으로 돌아와서 살았다. 따라서 추곡에 집을 짓고서 살았던 것이다.
○ 겨울에 모 부인을 뵈러 장성(長城)에 갔다.
16년경오 ○ 선생 42세
○ 정월에 어머님을 뵙고서 그곳에서 돌아왔다. 어머님의 회갑(回甲)을 현아(縣衙)에서 차리고 돌아왔다.
17년신미 ○ 선생 43세
○ 황고(皇考 돌아가신 아버님)를 강화(江華)로 옮겨 장사하였다. 진강산(鎭江山)의 충정공(忠貞公 조부)의 묘(墓) 동쪽인데 장사 지낸 달[月]은 모른다.
○ 윤 부인의 묘를 천안(天安)으로 옮겨 장사하였다. 천안군 북쪽 부토리(富土里)인데 옮긴 달은 모른다.
○ 겨울에 어머님을 뵈러 장성(長城)에 갔다.
18년임신 ○ 선생 44세
○ 어머님을 모시고 돌아왔다. 어머님이 장성에서 돌아와서 서울 집[京邸]에 계셨는데 이때에 모시고 추곡(楸谷)으로 돌아왔다.
19년계유
20년갑술 ○ 선생 46세
○ 정월 무진에 황비(皇妣 돌아가신 어머님) 이씨(李氏)가 졸거하였다. 한산인(韓山人)이며 예조 판서(禮曹判書) 정간공(貞簡公) 호암(浩庵) 기조(基祥)의 따님이었고, 이조 판서 대제학(大提學) 창곡(蒼谷) 현영(顯英)의 손녀였으며, 승지(承旨) 신응구(申應榘)의 외손이었는데 뒤에 선생이 귀(貴)하게 되어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증직되었다.
○ 4월 모갑(某甲)에 추곡(楸谷)에 장사하였다. 세운(歲運)이 좋지 못하여 진강(鎭江)에 합장(合葬)하지 못하였다. 이때 아우인 부윤공(府尹公 제태를 말함)이 관서(關西)로 귀양 갔으므로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4월에야 비로소 장사하였다.
21년을해 ○ 선생 47세
○ 2월에 남계(南溪) 박 선생에게 조곡[哭]하였다. 이름은 세채(世采), 자는 화숙(和叔), 벼슬은 좌의정, 시호는 문순(文純)이었다. 선생이 종유(從遊)하기를 가장 오래하였으므로 부음(訃音)이 이르자 위(位)를 만들어 곡(哭)하고 시마복을 입었으며, 장사 때에 또한 가서 회장하였다.
22년병자 ○ 선생 48세
○ 6월 임진(8일)에 서연관(書筵官)에 뽑혔다. 이때 동궁의 나이가 열 살이어서 공부가 날로 진취하기 시작하자 조의(朝議)에서는 이름난 선비를 초대하여 출입하며 근강(勤講)케 하였는데 무릇 선출된 8명은 전 정언(正言) 이세필(李世弼) 전 현감 - 즉 선생 - 인천 현감(仁川縣監) 이희조(李喜朝), 영평 현감(永平縣監) 민이승(閔以升) 전 주부(主簿) 이기주(李箕疇), 공조 좌랑(工曹佐郞) 박담(朴鐔), 전 주부 김창흡(金昌翕), 예산 현감(禮山縣監) 이세귀(李世龜) 등이었는데 선생은 소를 올려 사퇴하였다. 상소문은 문집에 보인다. [A본 4책 소(疏) 1. (以下同) 사서연관소, 병자 참조. 재소와 비는 일(逸)]
○ 이조판서 최공(崔公) 석정(錫鼎)이 선생을 조정에 천거하였다. 최공이 통용(通用)과 탁용(擢用)의 두 가지 조목으로 선비들을 천거하였는데 선생도 이에 끼었다. 그러나 선생은 일찍이 이르기를, “우리들은 평생 글을 읽었으나 나라에는 척촌(尺寸)만큼도 보답한 것이 없었으니 오직 서연관 직만은 직무 때문에 분주(奔走) 할 것도 없고 또한 당론(黨論)으로 다투며 싸울 처지도 아니니 분수를 다하여 조금이라도 보답하고자 하거늘 만약에 소명이 있으면 의리상으로도 굳이 사양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하였는데 얼마 후에 대신(臺臣) 신임(申銋)은 최공이 천거한 조목이 잘못이라고 배척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상께서는 도리어 임(銋)의 협잡을 미워하시어 엄한 교지[嚴旨]로서 해변 가의 고을[海邑]로 좌천시켰다. 선생은 소를 올려 의리를 말하고[引義] 끝내 나가지 않았다. 소는 빠뜨렸다.
○ 성재(誠齋) 민공(閔公)에게 곡(哭)하였다. 민공의 이름은 이승(以升), 자는 언휘(彦暉), 천관(薦官)으로 장령(掌令)이 되었는데 선생과 더불어 가장 우의(友誼)가 돈독하였으며 글 뜻에 의심나는 곳이 있을 때에는 곧 자상하고 확실하게 강론하여 각기 정미로웠고 마음을 털어놓았으며 비록 의견이 서로 맞지 않는 것이 있더라도 반드시 극론(劇論)하므로서 한 군데로 돌아간 뒤에야 끝냈던 것이다. 그는 일찍이 참판(參判) 이세필(李世弼)에게 준 글에서 “성대하고 빛나도다. 당세(當世)의 군자여! 이승(以升)은, 다행이도여화(汝和)의 박흡(博洽)과 덕함(德涵)의 전섬(典贍)과 중화(仲和)의 정약(精約)을 주선할 수 있었고 청명(淸明)하고 강수(剛粹)한 자질로써 이를 겸하였으며 반궁(反躬)과 실천(實踐)으로 이를 구했던[濟之] 학자는 저 정사앙(鄭士仰)뿐이던가!”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추곡(楸谷)의 학문에서 만약 범위의 넓은 곳을 가지고 논한다면 혹 옛사람에게는 조금은 손색이 있으나 밝게 나아가고 스스로 얻으려던[自得] 지취(旨趣)에서는 이 세상에서 뒤따라갈 이가 거의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선생의 학문을 박문순(朴文純)에게 헐뜯는 자가 있었는데 공(민공을 말함)이 마침 자리에 있다가 정색(正色)하며 이르기를, “사앙(士仰)이 어찌 일찍 격치(格致)ㆍ성정(誠正)ㆍ효제(孝弟)ㆍ충신(忠信)의 학문을 아니하였던가?”라고 반문하였으며, 임종할 때에는 세 아들에게 유언하여 선생께 수학하기를 명하였다. 부음이 들리자 그를 위하여 시마복을 입었으며 제문을 지어 제사하였는데 문집에 보이며, 선생은 그의 아들을 가르치기를 자기의 자식이나 조카처럼 하였다.
○ 11월 계유(20일)에 경기 도사(京畿都事)에 임명되었으나 사임하였다.
23년정축 ○ 선생 49세
○ 8월 모갑(某甲)에 황비(皇妣 돌아가신 어머니)를 진강(鎭江)으로 옮겨 장사하였다. 찬성공(賛成公)의 묘(墓)에 부장(附葬)하였다.
○ 남계 선생(南溪先生)의 묘에 제사하였다. 제문은 문집에 보인다.
24년무인 ○ 선생 50세
○ 3월에 광주군에게 곡하였다. 이름은 제태(齊泰), 자는 사첨(士瞻), 벼슬은 광주 부윤(廣州府尹)이었다.
○ 11월 경인(19일)에 세자익위사 익찬(世子翊衛司翊賛)에 임명되었는데 사임하였다.
25년기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