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물기행 이용익
영원한 인간사랑 ・ 2024. 6. 3. 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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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물기행 이용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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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22. 18:34조회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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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실물경제의 혜안 ‘이용익’(1854~1907)
구한말에 ‘이용익’이라면 부와 재력의 상징이었다. 당대 사람들은 그를 이전(李錢)이라 불렀다. 1924년 이용익이 세상을 떠난지 20년이 되어갈 즈음 그의 장남 이현재가 자신의 아버지가 생전에 일본 제일은행 경성지점에 예금해 두었던 36만원을 돌려달라고 이왕가와 일본 정부, 제일은행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36만원은 가난한 식민지 백성의 상상에 잡히지 않는 부피였다. 당시 쌀 한가마는 10원이었다. 이 소송은 1938년 이현재의 패소로 끝났지만, 이전의 성가를 새삼 확인시켜 주었다.
어떤 사람들은 한말의 거부요 금광부자로 또는 고종의 심복, 왕실재산의 관리자, 친러반일파로 또 어떤 사람들은 보성학교(지금의 고려 대학교와 보성중고등학교)의 설립자로서 그를 기억한다. 더러는 천민계급에서 났고, 보부상 출신에서 몸을 일으켰다는 신화적 입지전의 주인공으로 그를 떠올린다. 그가 천출에 무학이라는 사실은 그가 군부대신 등 최고위 직책들을 두루 섭렵하던 시절까지 그를 끊임없이‘자격시비’에 휘말리게 했다. 그가 요직에 중용된 10여 년 동안 네 차례나 모함과 탄핵으로 파면되거나 유배됐던 것도 봉건말기 사대부계층의 계급적 편견의 탓이 컸다고 보인다.
양잠 등 근대기술 첫 도입
경제학자 조기준씨는 저서 <한국기업가사>의 머리에 이용익의 평전을 싣고 있다. 이 책에 따르면 이용익이 한말의 정계와 재계를 쥐락펴락하게 된 것은 1897년 왕실재산을 관리하는 내장원경에 발탁되면서부터이다. 그는 다음해 전환국장, 철도사감독, 그 다음해 탁지부협판까지 겸임하면서 당시 화폐·철도·금광·인삼 산업을 완전히 자신의 관리하에 두었다. 유리 벽돌 제지 성냥 총기 염직 양잠 직조 등 각종 기술을 처음 도입한 것도 그가 근대 공업에 기여한 바로 기록돼 있다.
그런가하면 오직 왕의 신임과 권력의 중심을 향한 끝없는 신분상승 욕구만이 머릿속을 채우고 있었다거나, 조선말기의 주요 재원이었던 금광과 인삼산업을 민간에서 빼앗아 왕실재산으로 돌려버렸다거나, 황국협회 보부상들의 독립협회 파괴공작에 뒷 돈을 댔다거나 하는 비판은 그의 생전에도 간간이 제기됐던 것이고, 지금도 유효한 것 같다.
그러나 근대경제, 실물경제에 대한 혜안은 당대의 내노라하는 현학들을 여러 걸음 앞지르고 있었고, 돈버는 재주는 가히 신기에 가깝다는 것은 아무도 부인하지 않았다. 등짐장수로 전국각지를 떠돌며 시장바닥에서 발로 익힌 세상물리가 그로 하여금 근대경제로의 시야를 열어주었던 셈이다. 그는 지금부터 1세기전 봉건사회와 산업사회의 접경에서 현대기업인의 맹아를 키워보였다. 그러나 “군주가 사용하실 재정은 국내의 허다한 금광이다 대군주의 물건인데 하필 백성의 재물을 따로 착취할 필요가 있겠는가”(윤효정의 <풍운한말비사>가운데서)라고 말했듯이 충직한 신하의 봉건적 정치의식은 이용익을 제국주의 침탈 앞에 놓인 봉건왕조와 운명을 함께 하도록 조건지워 놓고 있었다.
그의 출세도 물론 가출로 시작되었다. 누대에 걸쳐 천업과 가난만을 대물림해온 함경도 벽촌의 가계로부터 탈출한 그의 첫 번째 직업은 보부상이었다. 유자후씨의 <조선화폐고>에는 그가 철종 5년 1854년에 함북 명천에서 상민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돼 있다. 그러나 북청군 또는 단천군 출신이라는 기록도 있다. 또 그의 부친이 사농공상의 맨 밑바닥인 말장사였다는 기록도 있다. 그가 서당을 다니며 한문공부를 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유자후씨가 <이준선생전>에서 이용익이 한문편지를 쓴 적이 있다고 특별히 언급한 것은, 그에 대한 당대 사회의 선입관이 얼마나 지독했는지를 반증한다.
서양식 기계로 화폐개혁
이 책에 따르면 이용익과 동향인 이준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이위종에게 통역을 부탁하는 서한을 그에게 써줄 것을 부탁했다. 이용익은 자기는 무식하다고 겸손해 하다가 곧 한 통의 편지를 써주었는데 이준은 세상사람들이 모두 무식한으로 멸시하던 이용익이 이처럼 풍부한 내용의 글을 쓰다니 하고 놀랐다고 한다.
그는 스무살 쯤에 고향을 떠났다. 고향을 떠난 뒤 그는 보부상 등짐장수로 전국 각지를 돌아다녔고, 그 뒤 단천금광에서 금맥을 발견해 큰돈을 모았다. 그야말로‘노다지’를 캔 뒤 1880년쯤 그는 함경도를 떠나 서울로 온 곳으로 알려진다. 그가 금광에서 가져온 돈을 어떻게 처리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중앙정부에 줄을 대는 밑천으로 삼지 않았나 하는 것이 대개의 추측이다.
그가 관직에 진출한 계기를 잡은 것은 1882년 임오군란 와중이었다. 임오군란으로 경복궁을 도망쳐 나온 명성황후가 충주에 숨어 있을 때 이용익이 보부상의 그 ‘빠른 걸음’으로 서울의 민영익 사이에 다리를 놓은 공로였다. 임오군란이 청군의 파병으로 진압되고 명성황후 세력이 복권한 뒤 그는 곧 단천부사로 임명됐다. 명성황후의 가마꾼 김성택이 당장 장흥부사로 임명된 것에 비기면 그의 출세도 무리는 아니다. 지방관리로서의 편력은 1882년 단천부사로 시작해서 영흥부사, 함남 병마절도사, 강계부사를 거쳐 1897년 내장원경으로 발탁돼 중앙정부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끝나게 된다.
왕실재정의 책임자인 내장원경이 된 뒤 그가 맨 처음 한 일은 농상공부 소관의 광산산업을 내장원 산하로 옮겨오고, 일인 등 외국인의 광산채굴을 불허하며, 회사를 설립해 특허를 얻어내는 업자에게만 채굴을 허용하는 조처였다. 그다음 그는 삼정사(蔘政社)를 신설하고, 전국의 인삼밭을 내장원 직영으로 선포하고 인삼의 전매를 실시했다. 그는 탁지부 전환국장이 된 뒤에는 독일 주조기계를 들여와 서양식 화폐를 본떠서 백동화를 찍었다.
일본 영향력 막으려 애써
아밖에 그는 궁내부 산하에 모범양잠소 등 공장을 지었고, 각도에 공업전습소를 설립해 염직·직조·제지·금공·목공 등 근대기술을 보급시켰다. 그는 1903년 무기제작술을 배워오도록 청년들을 중국 천진에 파견하고 총기제작소 설치를 추진했으나 다음해 러일전쟁이 일어나 중지되고 말았다, 그는 일본이 노리는 경의선과 경원선 철도 부설을 내장원 직영으로 장악하기도 했는데, 1895년 을미사변 이후에 나날이 넓혀오는 일제의 영향력을 차단하려는 그의 노력은 여러 곳에서 눈에 띤다. 그러나 러일전쟁이 끝나면서 그 철도 부설권도 일본에넘어가고 말았다.
이용익의 개인사의 기록에서 가장 아름답지 못한 기록은 황국협회에 관련한 것들이다.
독립협회 최고의 표적
이용익과 조병식은 구한말 독립협회의 최고의 표적이었다. 권력중심의 혼선과 이념의 부재에다 주변 국가들의 간섭으로 하염없이 무력해지고 있던 구한말의 조정에 대해 독립협회는 제일 야당이었고, 압력단체였고, 사상가집단이었다. 그러나 독립협회를 이끌던 개화파들의 성향을 생각할 때 대표적인 반일친러 정치인 이용익이나 방곡령을 내려 일제의 미움을 샀던 조병식이 그들의 공격목표가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1898년 8월 독립협회 총대의원 남궁억은 이용익을 이렇게 성토했다. 첫째 금점하는 일로 전국에 독을 흘린 것과, 둘째 삼포하는 백성의 원망소리를 들었으며, 셋째 백동전 20만원을 남발하고 그중 4만원은 횡령했고, 넷째 그가 남병리 때 두 번이나 민요를 만난 죄를 들고 있다.
독립협회의 공격이 수그러들지 않자 고종은 이용익의 모든 관직을 박탈했다. 협회가 그를 고등재판소에 제소하자 법부는 경무청에 이용익을 잡아들이도록 훈령을 내렸다. 그러나 얼마 뒤 독립협회의 연설회장을 황국협회 보부상들이 덮였을 때 이용익이 버젓이 나타나 보부상들의 식대를 지급했다고 독립신문은 보도하고 있다. 일설에는 이용익이 고종의 왕궁에 숨어 있었다고 한다.
‘독립협회 파동’이 가라앉고 관직에 복귀한 이용익은 1902년 이번에는 원로대신들로부터 탄핵을 받게 된다. “엄비를 업신여긴다”는 혐의였다. 일본 정부도 곧 가세해 공사를 통해 이용익을 문책하라는 공문을 보내왔다. 그러자 고종은 이용익을 궁궐안에 수십일 동안 숨겨두었다가 아무도 몰래 상해로 내보냈다(이용선의 <거부실록> 중에서)
그러나 중국으로 쫓겨갔던 이용익은 불과 두달 만에 돌아왔다. 그는 상해에서 프랑스무역회사와 수입계약을 맺고 안남미 30만석을 배에 싣고 인천항에 나타났던 것이다. 그해는 심한 흉년이었고 우리나라 최초의 수입쌀은 당시 기근을 해결하는 데 수훈을 세웠다. 다음해 서울 청계천변에 그의 공덕을 기리는 불망비가 세워졌다. 그가 안남미와 함께 인도산 코끼리 두 마리를 인천항에 하역했다는 보도는 그의 배짱이 가히 에술적 경지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다시 복권된 그는 헌병사령관에 임명됐다가 1904년 군부대신으로 승진했다. 그러나 내장원경에 탁지부대신, 군부대신까지 겸한 이용익은 군부대신 취임식을 한 지 꼭 한 달 뒤 일본에 납치된다. 초동의 집에서 일본 순사의 호위로 일본공사관에 불려간 그는 곧장 기차에 태워진 다음 인천항에서 군함에 실린다. 2월 일본에 잡혀간 이용익은 “이용익이 일본에서 죽었음이 틀립없다”는 소문이 막 기정사실화되려던 무렵 그해 12월 부산항으로 돌아온다. 그의 귀국에 대한 <황성신문>의 보도도 역시 흥미로운 것이다.
“이용익씨가 일본에 유람하여 일본의 교육제도를 시찰하고 회국시에 각종 서적과 인쇄기 7천원어치를 가져왔다 한다. 여기에 자금을 내어 한성내외에 보성학교를 설립할 계획으로 학부에 청원하고... 교장을 정명섭·김중환 양씨로 정하고 장차 교육을 대발달케 한다더라.”
1905년 보성전문은 법률학과 이재학(理財學) 두과의 2년재 전문학교로 문을 연다. 그러나 이른바 ‘보호조약’을 강요하는 일본의 움직임이 점점 집요해지면서 이용익도 조선왕조와 함께 몰락을 향하고 있었다. 일진회가 반일인사들의 협박을 일삼고 다닐 때 이용익의 집도 늘 일진회 회원들이 에워쌌다. 고종은 아마도 “피신시키는” 셈치고 이용익을 대구관찰사로, 그다음에는 강원도 관찰사로 보냈고 강원도 관찰사로 나간지 얼마 뒤 그는 상해로 망명해버렸다. 그가 상해로 나갔다는 소식이 맨 처음 신문에 실린 것은 1905년 9월 11일이었다. 프랑스여권을 갖고 나간 이용익은 당시 고종의 밀명을 띠고 있었다는 보도가 있었고, 다음해 한 신문은 “이용익씨는 지금 상해에 있는데 의식비에 곤란함을 본국 거류민들이 인지하고 화폐1만원을 모금해주었다더라”고 보도하고 있다.
블라디보스토크서 객사
그의 죽음에 대해 1936년 <삼천리>에 한 익명의 글이 다음과 같이 실렸다.
“이용익은 상해에서 프랑스에 도착했다가 다시 아라사로 들어갔다. 아라사의 수도인 성 페테르스부르크에서 본국에서 밀파된 자객 3명에게 해를 입었다. 그 자객 3명은 육혈포를 쏘아 그에게 중상을 입혔고 이용익은 다시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가 거기서 한 많은 일생을 마쳤다. 그때가 1907년 2월 20일이었다.”
1907년 3월 9일자 <황성신문>은 그가 남긴 유서의 요지를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국가 독립이 인재교육에 있은 즉 학교를 다수 설립하야 인민의 지식을 발달케 하되 관립학교를 다수 설립하면 필연 일인의 저어가 있을 것이니 경향간에 사립학교를 세워 교육할 뜻이 간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