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1호 : 청자비룡형주자(靑磁飛龍形注子) 62.12.20. 국립중앙박물관
고려 청자의 전성기인 12세기경에 만들어진 청자주전자로 높이 24.4cm, 밑지름 10.3cm이다. 용의 머리와 물고기의 몸을 가진 특이한 형태의 동물을 형상화했는데, 이런 물고기모양은 옛날부터 화재를 예방하기 위한 상징적인 의미로 건축물에 많이 장식하였다.
물을 따르는 부리는 용의 머리모양이고, 이빨과 지느러미, 꼬리 끝에는 백토(白土)를 발랐다. 얼굴의 털이나 지느러미들을 매우 가늘고 섬세하게 표현하였다. 주전자 몸체에는 비늘이 도드라지게 표현되었고, 중앙부에는 앞뒤로 커다란 갈퀴모양의 옆지느러미가 묘사되었다. 손잡이는 연꽃줄기 모양으로 주전자의 몸체 위로 자연스럽게 늘어져 있고, 뚜껑은 물고기의 꼬리부분을 본떠서 만들었다.
전체적인 구조로 볼 때 기이하면서도 각 부위를 갖춘 한 마리의 상상의 동물모습을 하고 있다. 비취빛의 유약색과 더불어 지느러미와 꽃무늬에 나타난 세밀한 음각 표현은 능숙한 솜씨를 보여준다. 이 주전자는 상서로운 동물이나 식물을 모방해서 만든 상형청자 중에서도 매우 기발함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제62호 : 금산사미륵전(金山寺彌勒殿) 62.12.20, 전북김제
모악산에 자리한 금산사는 백제 법왕 2년(600)에 지은 절로 신라 혜공왕 2년(766)에 진표율사가 다시 지었다.
미륵전은 정유재란 때 불탄 것을 조선 인조 13년(1635)에 다시 지은 뒤 여러 차례의 수리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거대한 미륵존불을 모신 법당으로 용화전·산호전·장륙전이라고도 한다. 1층에는 ‘대자보전(大慈寶殿)’, 2층에는 ‘용화지회(龍華之會)’, 3층에는 ‘미륵전(彌勒殿)’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1층과 2층은 앞면 5칸·옆면 4칸이고, 3층은 앞면 3칸·옆면 2칸 크기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짠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지붕 네 모서리 끝에는 층마다 모두 얇은 기둥(활주)이 지붕 무게를 받치고 있다.
건물 안쪽은 3층 전체가 하나로 터진 통층이며, 제일 높은 기둥을 하나의 통나무가 아닌 몇 개를 이어서 사용한 것이 특이하다. 전체적으로 규모가 웅대하고 안정된 느낌을 주며, 우리 나라에 하나밖에 없는 3층 목조 건물로 잘 보존해야 할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제63호 : 철원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鐵原 到彼岸寺 鐵造毘盧舍那佛坐像)
62.12.20, 강원철원
강원도 철원군 화개산에 자리잡은 도피안사는 신라 경문왕 5년(865)에 도선대사가 창건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도선대사가 철조비로자나불을 만들어 철원의 안양사(安養寺)에 모시려고 했으나 운반 도중에 불상이 없어져서 찾아보니 도피안사 자리에 앉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에 절을 세우고 불상을 모셨다고 한다.
신라말에서 고려초에는 철로 만든 불상이 크게 유행했는데, 이 작품은 그 대표적인 예로, 불상을 받치고 있는 대좌(臺座)까지도 철로 만든 보기 드문 작품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갸름한 얼굴은 인자하고 온화한 인상이다. 평판적인 신체에는 굴곡의 표현이 없고, 양 어깨를 감싼 옷에는 평행한 옷주름이 형식적으로 표현되었다.
몸에 비해 가냘픈 손은 가슴 앞에서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고 있는 모양으로 비로자나불이 취하는 일반적인 손모양이다.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는 이 시기에 가장 유행한 형태로, 상대와 하대에는 연꽃무늬를 새겼으며 중대는 8각을 이루고 있다.
불상 뒷면에 신라 경문왕 5년(865)에 만들었다는 내용의 글이 남아 있어서 만든 연대를 확실하게 알 수 있다. 통일신라 후기에 유행하던 철조비로자나불상의 새로운 양식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능숙한 조형수법과 알맞은 신체 비례를 보여주는 뛰어난 작품이다.
제64호 : 법주사석연지(法住寺石蓮池) 62.12.20
법주사 천왕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이 석연지(石蓮池)가 보인다. 돌로 만든 작은 연못으로, 물을 담아두며 연꽃을 띄워 두었다고 한다. 불교에서의 연꽃은 극락세계를 뜻하여 사찰 곳곳에서 이를 본뜬 여러 형상들을 만날 수 있다.
연지는 8각의 받침돌 위에 버섯 모양의 구름무늬를 새긴 사잇돌을 끼워서 큼지막한 몸돌을 떠받치고 있는 모습이다. 몸돌은 커다란 돌의 내부를 깎아 만들었는데, 반쯤 피어난 연꽃 모양을 하고 있어 그 쓰임과 잘 어울리며, 외부의 곡선과도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다.
표면에는 밑으로 작은 연꽃잎을 돌려 소박하게 장식하였고, 윗부분에는 큼지막한 연꽃잎을 두 겹으로 돌린 후 그 안으로 화사한 꽃무늬를 새겨두었다. 입구 가장자리에는 낮은 기둥을 세워 둥글게 난간을 이루었는데, 그 위로도 짧은 기둥을 새긴 후 난간 모양이 되도록 조각해 놓아 마치 난간이 두 줄로 된 듯하다. 윗난간에 세워진 기둥은 아주 기발한 착상이라 할 수 있는데, 불국사 다보탑에 새겨진 돌난간의 기둥과도 비슷하여 예스러움을 간직하고 있다. 밑의 난간벽에는 여러가지 무늬를 새겨 놓아 화려함을 한층 더 살려준다.
8세기경에 제작된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절제된 화려함 속에 우아함이 피어나는 아름다운 자태는 석연지의 대표작이라 불리울 만하다. 다만, 크게 갈라진 연지의 몸돌을 쇠붙이로 겨우 이어놓아 안타까움을 주고 있으며, 문화재 보존의 필요성을 다시금 일깨워준다.
제65호 : 청자기린유개향로(靑磁麒麟鈕蓋香爐) 62.12.20, 간송미술관
고려청자의 전성기인 12세기경에 만들어진 청자향로로 높이는 20㎝이다. 향을 피우는 부분인 몸체와 상상속의 동물인 기린이 꿇어 앉아있는 모습을 한 뚜껑으로 구성되어 있다.
몸체는 윗부분이 넓게 바깥쪽으로 벌어져 있고 짐승모양을 한 3개의 다리가 떠받치고 있다. 몸통에는 구름무늬가 장식되었고 윗면 가장자리에도 세 곳에 구름무늬가 배치되었으며, 그 위에 뚜껑을 덮도록 하였다. 뚜껑 한복판에는 뒤를 돌아보고 있는 기린이 조각되어 있고, 기린이 앉아있는 자리의 옆면에는 번개무늬가 돌아가며 음각되었다. 기린의 머리에는 뿔이 돋아있으나 부러져 있는 상태이고, 목뒤의 부분은 곱슬곱슬하게 표현하였다. 눈은 검은색 안료를 사용해 점을 찍었다. 구조상 향의 연기는 벌려진 기린의 입을 통하여 뿜어 나오도록 만들어졌다.
비취색 특유의 은은한 광택이 향로 전체를 품위있게 감싸고 있다.12세기 전반기에 비취색의 청자가 절정에 달하였을 때, 이와 같이 상서로운 동물이나 식물을 본뜬 상형청자가 많이 만들어졌다.
제66호 : 청자상감유죽연로원앙문정병(靑磁象嵌柳竹蓮盧鴛鴦文淨甁)
62.12.20, 간송미술관
이 정병(淨甁)은 이러한 초기 상감청자의 하나이며, 이 작품이 보여 주는 정제(整齊)되고 세련된 양식은 청동은입사포유수금문정병(靑銅銀入絲蒲柳水禽文淨甁)(국보(國寶) 제92호)과 흡사할 뿐더러, 상감도안의 내용도 비슷하다. 이렇게 닮은 것은, 상감기법의 창안(創案)에 끼친 이들 은입사동기(銀入絲銅器)의 영향을 보여 주는 좋은 보기라고 할 수 있다.
원래 이러한 정병(淨甁)은 불교(佛敎)에서 비구(比丘)나 비구니(比丘尼)가 제악(諸惡)과 불선(不善)을 씻어 버리는 의식(儀式) 곧 포살회(布薩會)에 쓰이던 불구(佛具)로서, 중국(中國)을 거쳐 전해진 서래(西來)양식이었다. 그런데, 이 양식의 정병이 고려(高麗)에서 가장 세련미를 나타내, 청동금은상감(靑銅金銀象嵌) 또는 청자상감(靑磁象嵌) 등 가작이 남겨지게 되었다.
이 작품은 이러한 유물 중에서도 뛰어난 걸작이며, 청아한 담록색 계통의 비색(翡色) 유약 밑에 백토(白土) 상감만으로 새겨진 버드나무와 갈대·연꽃 그리고 노니는 1쌍의 원앙새를 회화적으로 배치해 놓고 있다. 병 목에는 앞뒤 양면에 모란꽃을 1그루씩 상감했고, 병 목의 가장자리에는 백상감(白象嵌)으로 여의두(如意頭)를 둘러 놓았다. 8각으로 된 기품있는 주구(注口)는 병 목 위에 수직으로 세워져 있고, 주둥이는 둥근 어깨 한쪽에 아담하게 붙어 있다. 이 주둥이로는 물을 붓고 긴 주구(注口)로 물을 따르게 되어 있는데, 원래 주둥이에는 뚜껑이 있었으나 없어지고 말았다.
이런 종류의 상감청자 파편은 전북(全北) 부안군(扶安郡) 유천리(柳川里)와 전남(全南) 강진군(康津郡) 대구면(大口面) 사당리(沙堂里) 요지(窯址)에서 출토되고 있다.
제67호 : 화엄사각황전(華嚴寺覺皇殿) 62.12.20
화엄사는 지리산 남쪽 기슭에 있는 절로 통일신라시대에 지었다고 전한다. 조선시대에는 선종대본산(禪宗大本山) 큰절이었는데, 임진왜란 때 완전히 불타버린 것을 인조 때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원래 각황전터에는 3층의 장륙전이 있었고 사방의 벽에 화엄경이 새겨져 있었다고 하나,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만여점이 넘는 조각들만 절에서 보관하고 있다. 조선 숙종 28년(1702)에 장륙전 건물을 다시 지었으며, ‘각황전’이란 이름은 임금(숙종)이 지어 현판을 내린 것이라고 한다.
이 건물은 신라시대에 쌓은 것으로 보이는 돌기단 위에 앞면 7칸·옆면 5칸 규모로 지은 2층 집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라 매우 화려한 느낌을 준다. 건물 안쪽은 위·아래층이 트인 통층으로 3여래불상과 4보살상을 모시고 있다.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인데, 벽쪽 사방으로 돌아가면서 경사지게 처리하였다.
화엄사 각황전은 건물이 매우 웅장하며 건축기법도 뛰어나 우수한 건축 문화재로 평가받고 있다.
제68호 : 청자상감운학문매병(靑磁象嵌雲鶴文梅甁) 62.12.20, 간송미술관
고려 매병(梅甁)은 중국 송(宋)나라 매병에서 유래된 것이지만, 12세기경에 이르러서는 고려만의 풍만하면서도 유연한 선의 아름다움이 나타난다. 이러한 고려 매병의 양식은 이 작품에서 세련미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높이 42.1㎝, 입지름 6.2㎝, 밑지름 17㎝의 크기의 매병의 아가리는 작고 낮으며 밖으로 살짝 벌어져 있다. 어깨는 넓고 당당한 모습을 보여준다. 아가리 아랫부분에는 꽃무늬를 둘렀으며 굽 위로는 연꽃무늬를 둘렀다. 몸통 전면에는 구름과 학을 새겨 넣었는데, 흑백상감한 원 안에는 하늘을 향해 날아가는 학과 구름무늬를, 원 밖에는 아래쪽을 향해 내려가는 학과 구름무늬를 새겼다.
학의 진행방향을 다르게 표현한 것은 도자기 표면이라는 일정한 제약을 넘어 사방으로 공간을 확산시켜 짜여진 구획으로부터의 자유로움을 추구한 듯하다. 이같은 표현상의 변화 추구와 함께 문양처리의 능숙함에서 고려 도자기의 우수함과 고려인의 창의력을 엿볼 수 있다.
제69호 : 심지백 개국원종공신록권(沈之伯 開國原從功臣錄券) 1962.12.20, 동아대학교
조선 태조 6년(1397) 10월에 공신도감(功臣都監)에서 왕의 명령을 받아 심지백(沈之伯)에게 내린 문서로, 공신임을 입증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크기는 가로 140㎝, 세로 30.5㎝이며, 원래는 함경남도 단천군 파도면 심씨 집안에서 물려 내려오던 것이다.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 제도는 조선시대에 개국공신을 늘리려는 의도에서 만들어진 일종의 새로운 포상제도로, 1392년부터 1397년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1,400여 명에게 봉해졌다. 심지백이 녹권을 받을 때에도 74명이 함께 받았는데, 이때 그들에게 내린 포상으로는 각기 밭 15결(結)을 내렸고, 각 공신의 부모와 처에게는 땅을 주고 벼슬을 내렸으며, 자손에게는 벼슬을 주었다. 이러한 사실은 실록에도 빠져있어 알려지지 않았으나 이 문서에 의하여 비로소 알려지게 되었다.
이 문서는 조선 전기의 문서로 이두문(吏讀文)이 많이 사용되어 그 문체와 내용이 귀중한 역사적 자료가 되며, 목활자를 이용하여 찍어냈다는 점에서 더욱 중요성이 엿보인다. 또한 조선 전기의 목활자 인쇄물로서 상태가 완전하고 남한에 전해지고 있는 것으로는 이 문서가 으뜸으로 손꼽혀지는데, 두루마리로 되어있는 점에서도 조선 전기의 특징을 엿볼 수 있다. 글자 크기가 일정하지 않고 글자배열이 고르지 않는 등 인쇄가 정교하지는 않으나, 현존하는 목활자 인쇄물이라는 점에서 한국 활자 역사상 매우 귀중한 인쇄자료가 된다.
제70호 : 훈민정음(訓民正音) 1962.12.20, 간송미술관
이 책은 조선 세종 28년(1446)에 새로 창제된 훈민정음을 왕의 명령으로 정인지 등 집현전 학사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한문해설서이다.
책이름을 글자이름인 훈민정음과 똑같이 ‘훈민정음’이라고도 하고, 해례가 붙어 있어서 ‘훈민정음 해례본’또는 ‘훈민정음 원본’이라고도 한다. 전권 33장 1책의 목판본이다.
구성을 보면 총 33장 3부로 나누어, 제1부는 훈민정음의 본문을 4장 7면으로 하여 면마다 7행 11자씩, 제2부는 훈민정음해례를 26장 51면 3행으로 하여 면마다 8행 13자씩, 제3부는 정인지의 서문을 3장 6면에 1자 내려싣고, 그 끝에 ‘정통 11년’(1446)이라 명시하고 있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훈민정음은 세종 25년(1443)에 왕이 직접 만들었으며, 세종 28년(1446)에 반포한 것으로 되어있는데, 이 책에서 서문과 함께 정인지가 근작(謹作)하였다는 해례를 비로서 알게 되었다. 또한 한글의 제작원리도 확연하게 드러났다. 국내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본이다.
제71호 : 동국정운 권1,6 (東國正韻 卷一,六) 1962.12.20, 간송미술관.
조선 세종 때 신숙주, 최항, 박팽년 등이 왕의 명으로 편찬하여 세종 30년(1448)에 간행한 우리나라 최초의 표준음에 관한 책으로, 6권 6책이며, 활자본이다. 중국의 운(韻)에 관한 책인 『홍무정운』에 대비되는 것으로, ‘동국정운’이란 우리나라의 바른 음이라는 뜻이다. 당시 혼란스럽던 우리나라의 한자음을 바로잡아 통일된 표준음을 정하려는 목적으로 편찬, 간행되었다.
이 책은 세종 29년(1447) 9월에 완성되자 간행하라는 임금의 명이 있었고, 이듬해인 세종 30년(1448) 11월에 성균관, 사부학당 등에 보급되어, 이 책이 간행되고 보급되었던 시기를 알 수 있다.
현재 이 책은 전 6권 가운데 1권과 6권만이 남아있다. 내용을 보면 본문의 큰 글자는 나무활자이고, 작은 글자와 서문의 큰 글자는 갑인자이다. 글자체는 큰 글자가 진양대군의 글씨이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한자음을 우리의 음으로 표기하였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지고 있으며, 국어연구자료로서의 중요성도『훈민정음』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또한 한자음의 음운체계 연구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훈민정음의 글자를 만든 배경이나 음운체계 연구에 있어서 기본자료가 된다.
제72호 : 금동계미명삼존불입상 (金銅癸未銘三尊佛立像) 1962.12.20, 간송미술관.
커다란 하나의 광배(光背)를 배경으로 중앙에 본존불과 양 옆에 협시보살을 배치하고 있는 삼존불(三尊佛)이다.
중앙의 본존불은 민머리 위에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불상 전체 크기에 비해 크고 높게 표현되었다. 미소를 띤 갸름한 얼굴은 앞으로 약간 숙이고 있으며, 어깨와 가슴은 약간 좁은 듯 하지만 둥글고 강인하게 처리되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에는 정면으로 V자형 옷주름이 있으며, 좌우로는 새의 깃같은 옷자락이 뻗치고 있다. 오른손은 손바닥을 정면으로 하고 손끝이 위로 향하고 있으며, 왼손은 손바닥을 정면으로 하고 손끝은 아래를 향하고 있는데 손가락 2개를 구부리고 있는 모습이 특징이다.
양 옆에 배치한 협시보살은 광배의 끝에 매달리듯 표현하였으며, 세가닥으로 올라간 보관(寶冠)을 쓰고 있다. 신체 표현은 본존불과 비슷하지만, 앞면에서 X자로 교차하고 있는 옷주름과 손모양이 다르다. 불꽃이 타오르는 모양을 가는 선으로 장식한 광배(光背)는 끝이 뾰족한 배(舟) 모양으로, 본존 주위에는 머리광배와 몸광배를 도드라지게 새기고 그 안에 연꽃무늬, 덩쿨무늬, 인동초무늬를 새겼다. 불상이 서 있는 대좌(臺座)는 바닥이 밖으로 퍼진 원통형이며 연꽃이 새겨져 있다.
금동신묘명삼존불(국보 제85호)의 양식과 비슷한 점이 많으며, 중국 남북조시대의 불상 양식을 따르고 있는 이 불상은 광배 뒷면에 새겨진 글에 의해 백제 위덕왕 10년(563)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제73호 : 금동삼존불감(金銅三尊佛龕) 62.12.20, 간송미술관
불상을 모시기 위해 나무나 돌, 쇠 등을 깎아 일반적인 건축물보다 작은 규모로 만든 것을 불감(佛龕)이라고 한다. 불감은 그 안에 모신 불상의 양식뿐만 아니라, 당시의 건축 양식을 함께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 작품은 높이 18㎝의 작은 불감으로, 청동으로 불감과 불상을 만들고 그 위에 금칠을 하였다. 불감 내부를 살펴보면 난간을 두른 사각형의 기단 위에 본존불과 양 옆에 보살상이 있으며, 그 위에 기둥과 지붕으로 된 뚜껑이 덮혀 있다. 법당 모양의 뚜껑에는 앞면과 양쪽에 커다란 창문이 있어서 안에 모셔진 불상을 잘 볼 수 있도록 하였다.
본존불은 얼굴이 세련되지 못하고,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주름을 간략한 선으로 표현했다. 몸 뒤편에 있는 광배(光背)는 머리광배와 몸광배로 나누어져 있으며, 불꽃무늬로 가장자리를 장식하고 있다. 본존불 양 옆의 보살상도 구슬로 장식된 관(冠)을 쓰고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형식이나 표현 수법이 본존불과 같다.
불감은 지금도 금색이 찬란하고 지붕에 녹청색이 남아 있는 등 전체적인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본존불의 긴 허리, 불규칙하게 나타나는 옷주름, 그리고 보살이 쓰고 있는 구슬로 장식한 관(冠) 등 여러 양식으로 보아 만든 시기는 중국 북방 계통의 영향을 받은 11∼12세기 경으로 추정된다. 이 작품은 고려시대 또는 그 이전의 목조건축 양식과 조각수법을 보여주는 귀중한 예라는 점에서 가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제74호 : 청자압형수적(靑磁鴨形水滴) 62.12.20, 간송미술관
오리 모양으로 만든 고려시대의 청자 연적으로 높이 8㎝, 너비 12.5㎝의 크기이다.
물위에 뜬 오리가 연꽃줄기를 물고 있으며 연잎과 봉오리는 오리의 등에 자연스럽게 붙어있다. 오리의 등 가운데 붙어있는 연잎에는 안으로 뚫은 구멍이 있어 물을 넣도록 되어있고, 연꽃 봉오리 모양의 작은 마개를 꽂아서 덮고 있다. 물을 따르는 부리는 오리 주둥이 오른편에 붙어 있는데, 이 부리가 연줄기에 달린 봉오리 끝으로 통했으리라 짐작되지만, 지금은 그 부분이 부서져 있어 원형을 확실히 알 수 없다.
이 연적은 오리의 깃털까지도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정교한 기법을 보여주고 있으며, 알맞은 크기와 세련된 조각기법, 그리고 비색(翡色)의 은은함을 통해 고려 귀족 사회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훌륭한 작품이다.
제75호 : 표충사 청동 은입사 향완(表忠寺 靑銅 銀入絲 香垸) 1962,12,20 경남밀양
향완이란 절에서 마음의 때를 씻어준다는 향을 피우는데 사용하는 도구로서 향로라고도 부른다. 경상남도 밀양 표충사에 있는 청동 향완은 높이 27.5㎝, 아가리 지름 26.1㎝의 크기이다. 향완에 무늬를 새기고 그 틈에 은실을 박아서 장식한 은입사(銀入絲) 기술이 매우 세련된 작품이다.
향완의 형태는 주둥이 부분에 넓은 전이 달린 몸체와 나팔모양의 받침을 갖춘 모양으로, 고려시대의 전형적인 양식을 나타내고 있다. 전과 몸체가 닿는 부분을 둥글게 처리하고 받침 둘레의 가장자리에 얕은 턱을 만들어 안정감을 주었다. 높이나 너비의 비율도 거의 1:1을 이룸으로써 균형잡힌 비례감각을 보여주고 있다. 넓은 전 윗면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있는 6개의 원 안에 ‘범(梵)’자를 은입사하였으며, 그 사이사이에 구름무늬를 장식하였다.
몸체에도 역시 굵고 가는 여러 선으로 원 안에 굵게 은입사한 ‘범(梵)’자가 4곳에 배치되어 있다. 받침에는 구름과 용무늬를 장식하였는데, 굵고 가는 선을 이용하여 능숙하게 표현된 용의 모습에서 고려시대 뛰어난 은입사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넓은 전의 안쪽 면에는 57자의 은입사로 된 글자가 있는데 내용으로 미루어 명종 7년(1177)에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는 국내에 남아있는 향완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시대를 구분하는 자료로서 큰 가치를 지닌다. 뿐만 아니라 받침 안쪽에 새겨진 글을 보면 원래 이 향완이 있었던 곳이 현재의 표충사가 아닌 창녕 용흥사였음을 알 수 있는데, 어떻게 해서 표충사에 전래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제76호 : 이순신 난중일기 및 서간첩 임진장초
(李舜臣 亂中日記 및 書簡帖 壬辰狀草) 62.12.20, 현충사관리소
충무공(忠武公)(1545∼1598)께서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진중에서 육필로 집필한 일기로 연도별로 7권으로 나뉜다.
첫째;임진일기(壬辰日記)는 선조(宣祖) 25년(1593) 5월 1일부터 동왕 26년(1593) 3월까지 27매. 둘째;계사일기(癸巳日記)는 선조 26년(1593) 5월 1일부터 9월 15일까지 30매. 셋째;갑오일기(甲午日記)는 선조 27년(1594) 1월 1일부터 7월 28일까지 52매. 넷째;병신일기(丙申日記)는 선조 29년(1596) 1월 1일부터 10월 11일까지 41매. 다섯째;정유일기(丁酉日記)는 선조 30년(1597) 4월 1일부터 10월 8일까지 27매. 여섯째;정유일기속(丁酉日記續)은 선조 30년(1597) 8월 4일부터 동왕 31년(1598) 1월 4일까지 20매이나 약간 중복된 부분이 있다. 일곱째;무술일기(戊戌日記)는 선조 31년(1598) 9월 15일부터 10월 7일까지 8매이다.
이상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다음 달에 시작하여 중간에 비록 약간의 건너뜀이나 중복이 있느나 장군께서 전사한 전달까지의 기록으로 뒷날 충무공전서(忠武公全書)에 수록된 난중일기의 초본이다.
특히 내용 중에는 수군통제에 관한 군사비책과 전황을 보고한 장계(狀啓)의 초안 등이 소상히 기록되어 있어 당시 군사연구에 결정적 사료로 높이 평가 인정되어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76호로 지정되었다.
제77호 : 의성탑리오층석탑(義城塔里五層石塔) 62.12.20
탑리 마을에 세워져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5층 석탑이다. 낮은 1단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으로,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올린 전탑(塼塔)양식과 목조건축의 수법을 동시에 보여주는 특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기단은 여러 개의 돌로 바닥을 깐 뒤, 목조건축을 본떠 가운데기둥과 모서리기둥 모두를 각각 다른 돌로 구성하였다. 탑신은 1층이 높으며 2층부터는 높이가 급격히 줄어드는 모습을 보이는데, 1층 몸돌에는 불상을 모시는 방인 감실(龕室)을 설치하였다. 지붕돌은 전탑에서 보이는 모습처럼 밑면 뿐만 아니라 윗면까지도 층을 이루고 있는데 윗면이 6단, 아랫면이 5단이다. 지붕돌은 네 귀퉁이가 살짝 들려있어 목조건축의 지붕 끝을 떠올리게 한다.
각 부분에서 목조건축의 양식을 응용하는 한편, 곳곳에서 전탑의 조성기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러한 독특한 특징으로 인해 분황사석탑(국보 제30호)과 함께 통일신라 전기의 석탑양식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제78호 :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金銅彌勒菩薩半跏思惟像) 62.12.20, 국립중앙박물관
한국(韓國)에서는 삼국기(三國期)에 반가사유(半跏思惟) 형식의 불상이 유행하였는데, 이 불상은 그 중에서도 국립중앙박물관(國立中央博物館)에 소장된 반가상(半跏像)(국보(國寶) 제83호)과 더불어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얼굴은 풍만한 가운데에 눈꼬리는 길고 위로 약간 들린 봉안(鳳眼)이며, 입가의 미소는 신비스러운 인상을 준다. 머리에는 복잡한 보관(寶冠)을 썼고, 여기서 내려오는 두 가닥의 수식(垂飾)이 보발(寶髮)과 함께 좌우로 어깨까지 늘어져 있다. 가슴 앞에는 짧은 장식이 있고, 두 어깨를 덮은 천의(天衣)는 날개 모양 옆으로 퍼졌으며, 그 가닥은 앞면으로 늘어져 무릎 위에서 X자형으로 교차되어 있다.
상반신은 나형(裸形)으로, 가는 허리에서 신라(新羅) 불상의 기본형을 볼 수 있다. 두 손에는 팔찌를 끼었고, 왼손은 오른쪽 발을 잡고 있으며, 오른손은 오른쪽 무릎에 팔꿈치를 얹고 손가락을 볼에 대어 사유(思惟)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하반신에 걸친 상의(裳衣)는 배 앞에서 매듭을 지었고, 밑으로 내려오면서 도식화된 옷자락 무늬를 선각(線刻)으로 표현하였으며, 왼쪽에는 한 가닥의 끈이 드리워져 있다. 왼발은 밑으로 내려서 작은 단판(單瓣) 연화좌(蓮華座)를 특징적으로 밟고 있다.
이 반가상(半跏像)에는 원래 광배(光背)가 있었던 모양으로, 뒷머리 부분에 그 흔적이 있다. 균제(均齊)된 자세, 명상에 잠긴 오묘한 존용(尊容), 아름다운 의문(衣文)의 각선(刻線) 등 이를 따를 만한 작품이 없을 뿐만 아니라, 금동반가상(金銅半跏像)으로 이만한 대작(大作)은 찾을 수 없다.
1963년, 방사선 투과법에 의하여 촬영한 결과 재질(材質)이나 제작수법이 특이하고, 주조(鑄造)기술 또한 고도로 발달되었으며, 내부의 결함이나 보수(補修)의 흔적이 없이 보존이 비교적 잘된 작품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이 불상은 1912년 일인(日人) 연토정조(淵土貞助)가 입수하여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에 기증하였던 것을, 1916년 총독부 박물관 창설 때 이관(移管)된 전력을 가지고 있으나, 그 밖의 관계지견(關係知見)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제79호 : 경주 구황동 금제여래좌상(慶州 九黃洞 金製如來坐像)
62.12.20, 국립중앙박물관
1934년 경주구황리 삼층석탑(국보 제37호)을 해체·복원할 때 나온 사리함에서 경주구황리 금제여래입상(국보 제80호)과 함께 발견되었다. 사리함에 새겨진 글에 의하면 통일신라 성덕왕 5년(706)에 사리함 속에 순금으로 된 아미타상을 넣었다고 하는데 이 불상이 아닌가 추측된다. 그러나 크기가 6치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불상은 12.2㎝로 4치도 되지 않아 의문이 간다.
광배(光背)와 불신(佛身), 연꽃무늬 대좌(臺座)의 3부분으로 되어 있으며, 각 부분은 분리되도록 만들었다. 민머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큼직하게 솟아 있으며, 둥근 얼굴은 풍만한 느낌을 준다. 눈·코·입은 뚜렷하고 균형이 잡혀 있어 통일신라시대 불상의 이상적인 모습에 접근하고 있다. 어깨는 넓고 당당하며,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앞가슴을 많이 드러내고 있는데, 그 안에 대각선으로 걸쳐 입은 속옷이 보인다.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에 흘러내린 옷자락은 좌우대칭으로 정돈되어 길게 늘어져 있다. 오른손은 어깨 높이로 들어 손바닥을 보이고 있고, 무릎 위의 왼손은 손끝이 땅을 향하도록 하여 손등을 보이고 있다.
머리광배에는 연꽃무늬를 중심으로 인동초·당초무늬·덩쿨무늬와 그 가장자리에 불꽃 무늬가 뚫을새김되어 있고, 몸광배에는 인동초·당초무늬와 덩쿨무늬를 이중으로 뚫을새김하였다. 대좌는 원형이며 엎어 놓은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미소 띤 얼굴에 뚜렷한 이목구비와 균형잡힌 몸매를 지녀 더욱 위엄있게 보이는 이 불상은 손모양이나 옷주름, 양감이 강조된 표현 등에서 8세기 초 불상의 양식과 성격을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제80호 : 경주 구황동 금제여래입상 (慶州 九黃洞 金製如來立像)
62.12.20, 국립중앙박물관
경주구황리금제여래좌상(국보 제79호)과 함께 경주구황리삼층석탑(국보 제37호)에 안치된 사리함 속에서 발견된 불상이다.
전체 높이 14㎝의 순금으로 만든 불상이며 대좌(臺座)와 광배(光背)를 모두 갖추고 있다.
민머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큼직하게 솟아 있고, 얼굴은 갸름한 편이나 두 볼에는 살이 올라 있다. 눈은 정면을 바라보고 있으며, 콧날은 날카롭고 입가에는 미소가 번져 있다. 약간 좁은 어깨에는 두껍게 표현된 옷을 걸치고 있는데, 앞면에는 U자형의 옷주름을 새기고 있다. 치마는 발목 부분에서 양쪽으로 약간 퍼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서, 삼국시대의 불상 양식이 아직 남아 있는 모습이다. 오른손은 들어 손바닥을 보이고, 왼손은 옷자락을 잡고 있다.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상징하는 광배는 머리 뒤에 원형으로 표현하였는데, 불꽃무늬에 둘러싸여 전체적으로 보주형(寶珠形)을 띤다. 원 안의 연꽃무늬를 중심으로 빛이 뻗어나가는 모양을 하고 있으며, 가장자리의 불꽃무늬는 섬세하게 뚫을새김하였다. 대좌는 따로 만들어 끼운 것으로 12각의 받침 위에 엎어 놓은 연꽃무늬를 큼직하게 새겼다.
머리와 신체의 적당한 비례, 옷주름의 형태 등을 볼 때, 삼국시대 후기의 불상에서 좀 더 발전한 통일신라 초기 새로운 양식의 불상으로 보인다. 사리함에 새겨진 글을 통해 692년에 탑을 건립할 때 넣은 것으로 추정되는 이 불상은 만든 연대가 거의 확실하여 통일신라시대 불상 연구에 있어 중요한 기준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