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아래 "#12104 ***친환격적으로 농약을 대신할 방법을 찾았습니다."란 글을 읽고,
잠시 잠깐 생각해본 단상(斷想)입니다.
***
나는 얼마 전 미생물 교육을 받았다.
강사의 말씀이 기름집 됫박처럼 반지르한 것이 보따리 장사를 많이 한 양 싶다.
처음엔 잘 몰랐으나 이러저러한 강의를 접하다보니,
말짓, 몸짓만으로도 저이들의 면면을 얼추 짐작할 수 있겠더라.
강사의 말씀인즉,
농약을 그냥 뿌리면 식물 몸체에서 떼떼구르 굴러 떨어지기 쉬우므로,
전착제를 섞어 뿌려주면 좋다 한다.
그럼, 전착제(展着劑)란 무엇인가?
展 : 펼 전
着 : 붙을 착
劑 : 약지을 제
펴서 붙이는 약제(藥劑)란 뜻이다.
약제가 식물 표면에 오래도록 붙어 있으면 당연 약효가 오래 갈 터.
하지만 물방울 표면은 장력(張力)이 있어 구슬처럼 탱탱하니 동그랗게 말리는 힘이 있다.
(이를 표면장력(表面張力), 영어로는 이를 suface tension이라 한다.)
한즉 대개의 경우,
물방울은 식물 또는 해충의 표면에 난 잔 털 위를 떼구르르 굴러 떨어지고 만다.
내가 까마득한 옛날 모 대기업에 면접을 보러 간 적이 있다.
거기 복도에 화려한 카펫이 깔려 있었는데,
이게 얼마나 보드라운지 걷는 걸음마다 마치 얼음 위를 지치듯,
스르르르 미끄러지는 듯 한 착각에 빠졌던 적이 있다.
이 모두 다 한참이나 어릿어릿 풋 촌놈 시절 이야기다.
만약 여기 누군가 씹던 껌을 버렸다면,
아마도 구두 밑창에 쩔껑하며 붙어 걸음걸이가 멈칫거렸을 것이다.
농약을 식물(해충) 표면에 오래 머무르도록 하려면,
표면에 난 잔털 속까지 약제가 파고 들 정도로 약제의 표면장력을 누그러뜨리면 된다.
그리되면 약제가 잔털 속에 머물러 오래도록 약효를 발휘할 수 있게 된다.
때문에 농약엔 대부분 애초부터 이런 성분이 들어 있다.
이를 계면활성제(界面活性劑)라 이른다.
풀이 하자면 경계면을 활성화시키는 약제란 뜻이다.
말인즉슨 그럴듯하니 활성제라 하고 있음이나,
이는 농약과 식물체가 닿는 경계면 장력을 느슨하게 하여 무장해제 시키겠다는 것이다.
원래 천하의 만물은 자기를 지켜내는 모종의 채비를 갖추고 있다.
물방울이 동그랗게 구슬 모양을 이루는 것도,
외물(外物)과 쉽사리 친화(親和)하지 않으려는 속성의 발로인 것이다.
헤픈 계집처럼 아무 놈팡이에게나 치맛자락을 열어젖힌다면,
어찌 자신의 정조(貞操)를 지키어 낼 수 있겠음인가?
강약이 한결 같지는 않지만,
모든 개별 존재는 외물과 닿는 표면을 조여 오므리는 성질이 있는 것이다.
이러하므로써 비로서 제 본성을 오롯하니 지키어낸다.
이를 일러 수분(守分)이라 한다.
한 마디로 제 분수를 지킨다는 말이다.
이리 볼 때,
계면활성제란 마치 천하의 계집 치맛자락을 다 벗겨내고 말겠다는 팔난봉 짓에 다름 아니다.
치맛자락에 그치면 다행이게 단속곳, 속속곳은 물론 저 안쪽 은밀한 곳을 가리고 있는,
개짐까지 벗겨내고 말겠다는 우격다짐인 게다.
그러함인데,
그날 강사는 이리 말하고 있다.
‘자가 제조한 천연 약제엔 전착성분이 없으니,
세제를 풀어 넣으면 좋다.
퐁퐁이 싸고 좋다.’
아, 나는 이 말을 기어이 듣고 말았다.
순간 바로 나는 저 녀석이 팔난봉에, 조방(助幇)꾼이고나!
이런 생각을 떠올리며 홀로 장탄식을 하였었다.
(※ 조방꾼 : 오입판에서, 남녀 사이의 일을 주선하고 잔심부름 따위를 하는 자.)
정숙한 계집은 나이를 제 아무리 먹더라도 다리를 오므림으로써,
아직도 여전히 자신은 여자임을 입증하고자 한다.
보아라,
지하철에 앉은 여인네들을.
요즘엔 시퍼런 나이 어린 것들도 헤프게 다리를 쩍쩍 벌리고 앉기를 예사로 한다.
어려서부터 전착제 뿌린 것들을 많이 먹고 자라서 그런가?
저들은 도대체 오므림의 미학을 모르고 있음이다.
여든 잡수신 할머니일지라도 꼿꼿하니 허리를 다려 펴시고는,
양 무릎을 가지런히 모으신 분을 뵈오면,
저 정갈하신 모습에 내 옷매무새를 다시 가다듬게 된다.
허락만 된다면 가만히 꼭 껴안아드리고 싶다.
이러한 단아함 앞에 어찌 고개를 숙이며 찬미하지 않을 수 있으랴?
대저,
사려 지키고 있을 것이 있음이라야,
안으로 오므려 감추는 게다.
良賈 深藏若虛
자고로 진짜배기 장사꾼은 귀한 물건일수록 깊숙이 감추고 없는 양 하는 것인 바라.
오늘 이 글을 쓰게 된 것은,
저 아래 파리모아님의 "☞친환격적으로 농약을 대신할 방법을 찾았습니다."
이런 글을 대하였기 때문이다.
게에 이르길 퐁퐁을 써서 파리를 잡고, 배추 벌레를 잡는다 하였다.
나는 순간 어찌 이를 두고 친환경 운운할 수 있음인가?
이리 의심을 하고드니 필경은 이리 자리에 나서게 되었다.
설혹 전착제 자체가 독성이 없다한들,
과도한 계면활성화는 자연계의 질서를 어지럽힌다고 나는 생각해보는 것이다.
비록 전착제가 해충의 잔털을 파고 들어 오래 머무른다하더라도,
더불어 식물체의 기공을 타고 안으로 들어갈 소지도 그만큼 많아지는 것이다.
농약은 식물이 보기엔 서로 친화하고 싶지 않은 외물인 것,
한즉 농약이 식물 표면에 오래 머므르면 기어히 안짝 깊숙한 곳으로 스며들게 마련이다.
‘빈대 잡자고 초가삼간 태울 수는 없다.’
그러함이 아니던가?
떫은맛을 한자로는 삽미(澁味)라 한다.
나는 전착제를 이야기하자니 이내 이 澁을 떠올리고 만다.
흔히 떫다 하면 땡감을 떠올리게 된다.
먹기가 힘이 들기 때문에 탈삽(脫澁)처리를 하게 된다.
초크베리류에도 떫은맛이 강하다.
블루베리보다 몇 십 배는 유효성분이 많이 들어 있다하지만,
이 떫은 맛 때문에 식용에 장애가 되고 있다.
하여, 초크베리의 떫은 맛을 저감하기 위해 열심히 품종개량을 하고들 있다.
허나, 내 짐작으로는 떫은 맛이 감해지면 유효성분도 그만큼 낮아지지 않을까 싶다.
그럴 양이면 이미 안정적으로 자신의 본성을 활짝 꽃피워내고 있는,
블루베리를 취하지 굳이 초크베리를 탐할 이치가 없다.
다만 초크베리는 식용이 아니라 약용쪽으로 나아가,
자신의 역량을 십분 발휘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자다가 일어나거나,
한참 눈을 혹사하면 눈꺼풀이 뻑뻑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를 목건삽(目乾澁)이라 한다.
내가 근래 눈병이 있어 자주 이러함인데,
안과에 가서 의사에게 이 병증(病症)을 무엇이라 일러야 할 터인가 하다가,
스스로 홀로 짐작하길 澁이라 하면 좋겠다 싶었다.
양의가 어지간한 자가 아니면 이런 말을 알아들을까 의문이긴 하지만.
그러다 오늘 뒤져보니 과연 목건삽이란 병명이 기왕에 있었음을 확인하였다.
그런데, 이 삽(澁)은 탄닌 성분 때문이라 한다.
물론 목건삽은 이와는 무관하다.
다만 그 느낌이 텁텁하니 그러함이니 빌려 썼을 뿐이다.
초크베리엔 특히나 폴리페놀이 많이 들어 있다.
이게 바로 떫은맛의 정체인 것이다.
이로 인해 방부(防腐) 역할을 하여 면역력 강화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가령 식물체이든 해충이든 간에 표피가,
적당히 텁텁하니 엉기어 외물이 들어오는 것을 막아내고 있을 터인데,
이런 역할을 하는 기능 인자로서 나는 澁을 추상(抽象)해내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런 기능이 방부(防腐), 방역(防疫)의 역할을 할 것임이라.
실제로 이런 성분 물질이 있든 없든 간에,
그런 발현 기능을 상징하는 말로써 나는 澁을 여기 이 자리에서 그려내고 있는 게다.
계면활성제는 바로 이런 현실 또는 상징 기능을 강제로 무장해제시킨다.
나는 오늘 이런 기분 내지는 추상체계(抽象體系)를 통해 사물을 그려보고 싶었다.
계면활성제는 이런 澁의 정반대 쪽에 서있는 것이 아닐까?
한즉, 저 링크된 글에서 주장하듯이,
퐁퐁이 그저 먹어도 이상이 없다는 말씀에 동의하기 어렵다.
설혹 저분의 주장대로 저런 따위의 계면활성제 자체에 독성이 없다한들,
2차적 기능일지라도 생명체에게 작폐가 심하리라 여겨지는 것이다.
그러한데 1차든, 2차든 유해하다면 독성 물질이라 아니 부를 이유가 없지 않은가?
이에 대하여는 ‘순천향대학 홍세용’을 키워드로 하여 검색하면,
보다 구체적인 추가적인 정보를 접할 수 있을 것이다.
“☞ 일부 농약 속 계면활성제에 치명적 독성”
첫댓글 계면활성제의 철학적(?) 풀이...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내용 읽어보고 많은 것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귀중한 글이라 생각합니다.
평소 내가 사물이나 사실에 접근할 때 자기 본위적으로 판단하고 유리한 쪽으로 결론짓는 행동들이...
부끄럽게 생각함.
모두들 무작정 앞으로만 달려가고 있습니다.
효율, 결과지상주의.
하지만 누구라도 단 반 발자국만이라도 사려 챙길 수만 있다면,
당연 떠오르는 생각이기도 합니다.
이 실터럭 한 올이라도 귀히 여길 수 있다면 우리는 이내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좋은글새겨읽습니다감사합니다한번더생각하게됩니다
비누는 대표적인 계면활성제입니다.
더러움을 닦아내는데는 아주 훌륭한 역할을 해냅니다.
하지만, 이것이 하수구를 지나 종내는 지하수나 하천으로 들어갑니다.
개천 한쪽 끝에 엉겨 붙어 거품을 일으키고 있는 저것의 정체가 바로 이런 세제류 때문입니다.
물 속에 산소 공급을 방해하여 수질을 크게 악화시킵니다.
저러한 것을 먹어도 좋다고 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커피의 프림도 계면활성제의 일종입니다.
때문에 이 역시 적당히 삼가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네, 고맙습니다.
생명이란 것은 막(膜)에 의해 유지되는 것이니, 이것을 저 界面이란 말로 대체할 수도 있겠습니다.
계면을 활성화한다는 것은 곧 膜이란 차별성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것이니 생명을 죽음으로 내모는 궁극이 될 것이 분명한 것 같습니다.
막을 투과해 들어와도 이 외물을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가 바로 癌, 암이란 것이 현대에 창궐하게 된 것이
이 계면활성이라는 이런식의 인간의 조작성과 직결되어있을 것입니다.
원래 외물과의 사이엔 膜이 있어 안팎을 나눕니다.
허나 외물과 소통하지 않고는 살 수 없음이니,
또한 일정분 들고 날 구멍이 있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체(생명)마다 계면장력의 강약이 있을 수 있으며,
각 개체는 저마다의 분수대로 나름 출입을 취사선택 조절합니다.
우주 전체적으로는 이게 조화롭게 균형을 이룹니다.
허나, 계면활성제라 불리우는 약제는 이를 강제적으로 허물어,
인간이 원하는 조건을 만족시킵니다.
그런데,
눈앞의 욕심에 눈이 멀었음이니,
이게 정밀하게 통제되지 못하여,
여러 문제를 야기합니다.
가령 해충을 죽이려고 하였지만 식물도 다치게 되고,
나아가 토양, 지하수, 하천까지 오염시키게 되지요.
바로 빈대 잡자고 초가삼간 태우는 꼴이 되곤 합니다.
대저,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 것.
路逢劍客須呈劍,不是詩人莫獻詩
길에서 검객을 만나면 검을 바칠 것이며,
시인이 아니면 시를 바치지 말아야 한다 하였음인가?
***
들려주신 말씀이,
저의 마음과 계합되어
제 뜻을 더욱 밝히 넓혀 주시니 감사합니다.
膜의 특질은 개방성이겠지요. 폐쇄는 곧 죽음을 의미하겠습니다.
到處劍客, 處處詩人, 何處俯伏?
有求之心 終不能見
丹霞燒木佛
燒佛取舍利
到到處處俯伏?
三千燒木佛, 三千破鐵佛 覓舍利?
차라리,
장마철 옴폭 패인 호방다리에 고자좆 박고 용두질 3천번 하는 것이 남는 장사일 터.
見神殺神 遇佛殺佛 逢祖殺祖
새로운 지식이네요
잘 읽고 갑니다
그저 다시 한번 짚어본 셈입니다.
고맙습니다.
허허허~ 필력이 대단하십니다.
살짝 무리한 비유가 사용되긴 했어도 지식보다는 웃음 한바가지 얻고 갑니다. 주장하시는 내용엔 깊이 동감합니다.
白髮三千丈
緣愁似箇長
不知明鏡裏
何處得秋霜
백발이 길어 삼천장이라,
근심 때문에 이리 길어졌는가?
아지 모할세라, 거울 속의
가을 서리를 어디에서 얻어왔는가?
제 아무리 길다한들 머리카락이 수십 센티를 넘겠음입니까?
허나, 白髮三千丈를 만약 白髮三十寸이라 하였다면,
오늘 날 李白을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후인들이 시인을 기려주고 아니고가 문제가 아니라,
정작으론 白髮三千丈은 세인들의 시비 대상이 아니란 생각을 해보는 것입니다.
왜냐면, 길이는 물리적 척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심리적 척도도 있을 터이니까요.
헌즉 기실 저 말은 문학적 수사를 넘어,
이백의 정한(情恨) 깊이를 함께 느껴보는 장치로선,
아주 훌륭한 설정이란 생각이 듭니다.
하기사, 족탈불급이라,
저의 글에 등장하는 이야기들은 아주 서툴러 그저 뻥에 불과할 터이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인간들이 저지르는 오만가지 자연 파괴에 대하여는,
저로선 저런 뻥 삼천 가지를 동원하여 나무라도 심에 차지 않고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한참 웃어주셔서 기쁩니다.
감사합니다.
잘보고 갑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