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화빵은 모른대 [이규옥]
국화빵은 모른대
알록달록한 국화꽃을 모른대
알큰달큼한 국화 냄새를 모른대
불 위에서 철틀 속에서
엎어지고 젖혀지는
국화빵은 모른대
누릇한 냄새밖에 모른대
살 익는 냄새밖엔 모른대
내장마저 훤히 비치도록
바싹 살을 지져
전신에 국화 문신 새기는
국화빵은 모른대
거뭇거뭇 살을 태워
구수한 국화 냄새 풍기는
국화빵은 모른대
저만치 비켜선 채
화분 속에서 방실거리는
국화꽃은 모른대
가을볕 받아 살랑살랑 풍기는
국화 냄새를 모른대
덥석, 내장째 물려
찢기고 씹혀
감감한 미로 속으로 삼켜질
제 살 익은 냄새밖에
국화빵은 모른대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세계사, 2008
귀가 서럽다 [이대흠]
강물은 이미 지나온 곳으로 가지 않나니
또 한 해가 갈 것 같은 시월쯤이면
문득 나는 눈시울이 붉어지네
사랑했던가 아팠던가
목숨을 걸고 고백했던 시절도 지나고
지금은 다만
세상으로 내가 아픈 시절
저녁은 빨리 오고
슬픔을 아는 자는 황혼을 보네
울혈 든 데 많은 하늘에서
가는 실 같은 바람이 불어오느니
국화꽃 그림자가 창에 어리고
향기는 번져 노을이 스네
꽃 같은 잎 같은 뿌리 같은
인연들을 생각하거니
귀가 서럽네
- 귀가 서럽다, 창비, 2010
국화꽃 그늘을 빌려 [장석남]
국화꽃 그늘을 빌려
살다 갔구나 가을은
젖은 눈으로 며칠을 살다가
갔구나
국화꽃 무늬로 언
첫 살얼음
또한 그러한 삶들
있거늘
눈썹달이거나 혹은
그 뒤에 숨긴 내
어여쁜 애인들이거나
모든
너나 나나의
마음 그늘을 빌려서 잠시
살다가 가는 것들
있거늘
일기 [안도현]
오전에 깡마른 국화꽃 웃자란 눈썹을 가위로 잘랐다
오후에는 지난 여름 마루 끝에 다녀간 사슴벌레에게 엽서를 써서 보내고
고장 난 감나무를 고쳐주러 온 의원에게 감나무 그늘의 수리도 부탁하였다
추녀 끝으로 줄지어 스며드는 기러기 일흔세 마리까지 세다가 그만두었다
저녁이 부엌으로 사무치게 왔으나 불빛 죽이고 두어 가지 찬에다 밥을 먹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것 말고 무엇이 더 중요하다는 말인가
야채사(野菜史) [김경미]
고구마, 가지 같은 야채들도 애초에는
꽃이었다 한다
잎이나 줄기가 유독 인간의 입에 단 바람에
꽃에서 야채가 되었다 한다
맛없었으면 오늘날 호박이며 양파꽃들도
장미꽃처럼 꽃가게를 채우고 세레나데가 되고
검은 영정 앞 국화꽃 대신 감자꽃 수북했겠다
사막도 애초에는 오아시스였다고 한다
아니 오아이스가 원래 사막이었다던가
그게 아니라 낙타는 원래 사람이었다고 한다
사람이 원래 낙타였는데 팔다리가 워낙 맛있다 보니
사람이 되었다는 학설도 있다
하여튼 당신도 애초에는 나였다
내가 원래 당신에게서 갈라져 나왔든가
국화/ 안상학
올해는 국화 순을 지르지 않기로 한다.
제 목숨껏 살다가 죽음 앞에 이르러
몇 송이 꽃 달고 서리도 이슬인 양 머금다 가게
지난 가을처럼
꽃 욕심 앞세우지 않기로 한다.
가지 잘린 상처만큼 꽃송이를 더 달고
이슬도 무거워 땅에 머리를 조아리던
제 상처 제 죽음 스스로 조문하던
그 모습 다시 보기는 아무래도 쓸쓸할 것만 같아
올해는 나도 마음의 가지를 치지 않기로 한다.
상처만큼 더 웃으려드는 몰골 스스로도 쓸쓸하여
다만 한 가지 끝에 달빛 닮은 꽃 몇 달고
이 세상에 처음 태어나는 슬픔을 위문하며
서리라도 마중하러 새벽 길 가려한다.
그 도시의 일곱시 문동만]
전철역 의자에 앉아 젖을 먹이는 여인이 있고
잠깐 놀랍기도 흐뭇하기도 한 표정의
사내들이 애써 눈길을 돌리던 일곱시
역전에서 만개한 어미꽃이 봉오리진
아기꽃을 지긋이 내려다보는 노란 국화분을
살 수 있었고 하루의 가장 지친 시간이었으나
무언가 가져갈 것 있던 그 도시의 일곱시
맞춤하게 배가 고프면 어묵 한 꼬치를
사먹고 그 기운으로 오르던 얕은 오르막길
비슷한 인상의 사람들이 좁은 보도블록에서
어깨를 부딪치며 걷던 일곱시
골목에는 낮익은 아이들
작년 겨울 나와 눈싸움을 하던 아이들
아는 체도 모르는 체도 못하던 순한 골목 사람들
외상술을 주는 호프집을 지날 땐
친구로 튼 주인여자가 있는지 곁눈질을 부리기도 했던
- 그네, 창비, 2009
패밀리 [정일근]
조심해! 자연에도 패밀리*가 있다 이탈리아 마피아나 러시아
마피아 같은 패밀리가 있다. 자연의 패밀리에는 사람의 족보로
치자면 같은 항렬자 쓰는 형제나 사촌쯤 되는, 그러나 사람의 족
보와는 다른 자연의 인드라망이 있다.
동물의 왕인 호랑이와 밀림의 왕인 사자는 고양이의 패밀리다.
고양이가 형이고 호랑이와 사자는 아우다. 은현리에 와서 도둑고
양이에게 야단을 쳐보라. 달아나기는커녕 느릿느릿 왕의 걸음걸
이로 걸어가며 네 이놈! 하는 눈빛으로 빤히 노려보기까지 하는,
당신을 우습게 여기는 배경에는 도둑고양이에게 제 아우가 둘이
나 왕인 패밀리의 "빽"이 있기 때문이다.
길거리에서 흘레붙는 개에게 뜨거운 물 뿌리며 방해해서는 안
된다. 늑대, 은빛여우, 너구리가 개의 패밀리다. 가끔씩 개가 하
이톤의 고독한 늑대 울음소릴 내는 것은 자신의 패밀리가 누구인
지 목청 높여 알리는 것이다. 그건 또 자신들의 종족번식 방식을
사람 패밀리가 존중해달라는 경고방송이다.
독야청청해서 외로울 것 같은 소나무에게는 전나무,솔송나무,
가문비나무, 잎갈나무 같은 따뜻한 패밀리가 있다. 키 작은 벼들
이 목에 힘주고 서 있는 것은 죽창이 되는 키 큰 대나무가 자신의
패밀리이기 때문이다.
국화는 코스모스, 과꽃, 해바라기, 민들레, 쑥부쟁이, 도깨비바
늘이 제 패밀리다. 놀라지 마라. 국화는 국내에 400에 가까운 패
밀리가 살고 1,000에 가까운 패밀리가 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다.
쉿! 더 무서운 건 그 패밀리 밑으로 20.000이 넘는 국제적인 사조
직이 지금 이 순간에도 가동 중이라는 것이다. 그럴 리야 없겠지
만, 국화 패밀리가 파업을 한다면 지구촌에서 꽃구경하기 힘들
것이다.
향기롭고 우아한 백합에게는 냄새가 고약한 마늘, 양파 패밀리
가 있다. 백합은 결코 그 관계를 부정하지 않는다. 사람 패밀리
같으면 창피해서 외면해버리지만 자연의 패밀리는 영원한 패밀
리다. 남극의 펭귄 부모는 영하 50도의 혹한 속에서 새끼를 살리
기 위해 제 몸을 아낌없이 먹이로 내주고 까마귀는 자신을 낳아 기
른 어미 까마귀가 늙으면 먹이를 물어다주며 봉양한다.
지구에 함께 살고 있는 패밀리 중에서 부모가 자식을 쓰레기처
럼 내다버리고 자식이 부모를 동네북처럼 두들겨 패는 패밀리는
사람 패밀리뿐이다. 패밀리끼리 싸우고 고소 고발하고 총질하며
전쟁을 하는 패밀리는, 이름도 고상한 호모사피엔스, 스스로 생
각하는 사람이라는 그 패밀리뿐이다. 문자를 가지고 시를 쓰고
읽는다는.
* 동식물을 분류할 때 쓰는 과科를 영어로 패밀리family라 한다.
꽃 [이규리]
돌확에 띄웠다가 시든 국화 건져 낸다
꽃이 꽃을 버릴 때는 한 치 가차도 없어서
그 독한 냄새란
입양 보내는 어미 정 떼는 눈길만큼 매섭다
시커멓게 상한 꽃잎은
돌아서는 어미 눈가처럼 짓물러 있지만
꽃이 떠난 돌확의 퀭한 눈도 그만큼 젖거나 어둡다
보내고 떠나는 자리는
맹장 수술한 흔적처럼 없는 듯 남아
하릴없이 옆구리가 결리기도 한다
마음을 준 건 모두 꽃 아니던가
꽃!
눈에 밟히지 마라
끝없다
- 현대시학, 2006. 4월호
국화 화분 [고영민]
현관 옆에 국화 화분 하나를 사다가 놓으니
가을이 왔다 계절은
이렇게 누군가 가져다 놓아야 오는 것인가
저 작은 그릇에 담겨진 가을,
노란 가을을 들여다보며
한 계절 내가 건너가 가져오지 못한 시간들을 본다
돌보지 못한 시간 속에도 뿌리는
있다, 모두 살아 있다 흙 속 깊이
하얀 실뿌리를 숨기고 어둔 흙 헤집어
둥근 터널 그 속으로, 먼 내 속으로 오고 있다
아주 오래전부터 쭈그리고 앉아 바라본
국화의 근본이여, 모든 계절의 초입이
나 몰래 튼튼한 뿌리를 내리고 있어
손을 내밀어 그냥 가져다 놓기만 하면 분명
한 계절의 꽃 필 법도 한 것이다
국화는 현관 앞 계절의 환한 등을 밝히고 있다
사람들이 지나가다 국화를 보며 아! 노란 국화,
하며 가을을 말하기 시작한다
내가 가져다 놓은 한 계절, 저 국화 화분은
한 바가지의 물을 건네주길,
해를 향해 화분의 방향을 가끔씩
누구도 아닌 내가 손수 돌려주길 기다리는 것이다
- 악어, 실천문학사,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