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상주의 고대국가 사량벌국과 고녕가야국의 역사 인물과 유적 유물
김상옥
고 영 섭 (동국대 교수 ) I. 서언 II. 경상도 서북부의 사량벌국과 고녕가야국 III. 상주 사량벌국의 역사 인물 과왕도 왕성 1.전 사량벌국 ' 장수'와후 사벌 국 ' 왕' 2. 사량벌국 왕도와 이부곡토성 일대 3. 병풍산 아래와 사벌국 고성 4. 자산산성과 상주 중심축의 이동 IV. 함창 고녕가야국의 역사 인 물과 왕도 왕성 1. 본국 금관가야국 ' 왕'과 열국 고녕가야국 ' 주' 2. 숭덕산 아래와 고녕가야국 왕도 3. 오봉산과 남산고성 4. 국사봉과 왕도동 및 함창 중 심축의 이동 V. 사벌량국과 고녕가야국의 유적 유물 VI. 결어 1. 서언 18 세 ( 世 )의환웅으로 이어진배달국 ( 배달족 ) 은 다시 47 세 ( 25 세 + 22 세 )의 단군로 이어진 고조선 (동이족)과 북부여로 계승되었다. 고조선8)은 기원전 4세기 무렵 신한의 조선왕 (朝鮮王)인 해씨 (解氏)에게 당시 불한의 조선후(朝鮮侯)인 기씨 (箕氏)가 반기를 들고 일어나 스스로 ' 신 한' (=왕)이라칭함으로써 삼조선(三朝鮮)즉 신(眞) 한조선 (大王, 朝鮮王 ), 말(莫8)한조선 ( 副王. 朝 鲜侯 ), 불(番)한조선 ( 副王 ) 으로 분화 9) 하면서 동북아시아역사 지형은 큰 변화를겪기 시작하였가.이로부터 생겨난 삼조선은지금의 길림성과 흑룡강성 두 성과지금의 연해주 남단을 다스렸던'신조선(수도 하얼빈),과 지금의 요동성 개평현 동북의 안시성과 개원 이남 흥경 이동을 가스렸던 '불조선'(수도 안시성) 그리고 압록강 이남을다스렸던 '말조선'(수도 평양. 韓氏)의 영토를 중심으로 수축과 팽창을 서듭하였다.10) 고조선이 이처럼 삼조선11)으로 분립한 이래 기원전108년에 고조선이 해체되자 종래의 전삼한(구삼한)으로 분화되어 점차 원삼국으로 정립되어 갔다. 고조선의 분화와 삼조선의 해체 이후 한나라와 흉노의 난을 피하여 그유민들이남진하였다. 압록강 이남을 다스렸던 마한 ( 54소국)도 불조선의 왕기준(箕準)에게 무너진 뒤 남진하여 멀리 떨어진 남방의 월지국 ( 공주 ) 으로 천도하여 옛날에 왕호로 쓰던 ' 말한'을 국호로 쓰면서 이를 이두자로 '마한' (馬韓 ) 이라 쓰고 새로 쓰는 왕호인 ' 신한'은 이두자로 ' 진왕' ( 辰王 ) 으로 i 서 ' 마한국 (馬韓國) 진왕 ( 辰王 )' 이라 칭하였다. 그리하여 동일한 ' 한'이란 명사를 하나는 음 취하여 ' 한'이라 국호를 쓰고, 다른 하나는 뜻을 취하여 왕를 씀으로써 문자상 국호와 왕 의 혼동을 피하였다. 기준이 왕위를 탈취한 뒤에 국민들의 불평을무마하기 위해 자신의본성인기씨 (箕氏)를 버리고 한씨 ( 韓氏 ) 로 성을 바꾸었다. 12 ) 그리고 그 고도 평양에서 최씨 ( 崔氏 ) 가 일어나 그 부근의 25 개 국을 복속시켜 하나의 대국 ( 낙랑국 ) 을 세웠다. 13 ) 낙랑이 이렇게 분리해 나가자 마한은 지금의 임진강 이북을 잃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임진강 이남 70 여 개국을 다스리고 있었다. 14 ) 계속해서 북방에서 한나라와 흉노의 난을 피하여 마한으로 들어오는 신한 조선 15 ) 및 불한 조선의 유민들이 날로 많아졌다. 이에 마한이 지금의 낙동강 연안 오른편의 1 백여 리의 땅을 신(眞)조선유민들에게 주어 자치계 (自治禊)를세워 이름을 진한부(辰韓部)라하고, 낙동강연안 오른편에다소의 지방을 갈라서 불(番)조선의유민들에게 주어 또 자치계 (自治禊) 를 세워 변한부 ( 卞韓部 )라 하였다. 마한이구태여 진·변 양한을 운것은 삼신(三神)사상에 의거하여 삼한의 수를 채운것이다. 16)이처럼 이들이 이주한곳은대륙에서 반도로 뻗어 내려오는 백두대간과 그 사이에서 흘러 내려오는 강가였다. 특히 이들이 머문 낙강 가에는 여러 나라들이 탄생하였다. 특히 이들이 머문 낙강 가에는 여러 나라들이탄생하였다. 특히 서쪽에서 뻗어 내려오는 백두대간과 낙강(洛江) 즉 낙동강은 경상도를 동서로가르면서 진한 12 소국과 변한12소국 등 수많은 나라들을 성립시켰다. 경상도서북단에 자리한 상주는서쪽의 백두대간과 동쪽의낙동강을 끼고서 상주분지를 중심으로 서고동저 (西高東低)의지으로 자리하고 또 상주는 조령으로 올라가는 영남의관문이자 낙동강 수운이 이뤄지는 곳이어서 예로부터 군사적요충지이자 교통의 요충지로주목되어왔다. 원삼국시대부터 상주는 넓은평 야와 깊은 강물로 풍부한 물산과 신속한 유통을 매개로 웅주 ( 雄州 ) 이자 대읍 ( 大邑 ) 으로 성하였다. 그 결과 이곳에는 사벌평야를 기반으로 한사량벌국 ( 解氏 17 ) 과 함창평야를 기반으로 한 고녕가야국 ( 箕氏 ) 등이 성립되었다. 18 ) 그런데 우리나라 고대사 특히 남삼한시대에 대한 기록이거의남아 있지않아「 후한서」와「 삼국지 」등의 기록에 의존할 수밖에 다. 이들 사서는 삼한 의 위치를 방위로 구분해 진한은 동쪽, 변한은 진한의 남쪽에 있다 19 ) 고 하였다. 또 한편으로는 변한과 진한은 잡거 (雖居 )한다 20)며 거주 문화 중심으로 기술하고 있다. 당시 한나라 군현에서는 이들 삼한 소국을 통솔하는'거수'(渠帥)에게 작호(爵號 )와 인수(印授) 를 주어 회유하였다고전한다. 사량벌국이 첨예왕 때에 홀연히 백제에 귀속하였던 것은 상주의 사량벌국이 사로국을거치던 기존의 대외교섭체계를벗어나 백제국 중심의 교섭체계에 속했던 사실의 반영 21 ) 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그중에서도 상주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하는 3 세기 대의' 위솔선한백장 (魏率善韓伯長) 의 동인 (銅印) 22)은 그 물적인증인동시에 사량벌국의국가적위상을 보여주는 현저한유물23)로 짐작된다. 고녕가야국에서도 이와 유사한 유물이 토되었을 것으로짐작된다. .이 글에서 이러한 '역사인물'과 '유적 유물'에 주목하는이유는 한 나라의 정체성과 권역은 그 나라에 살았던 '역사 인물'과 ' 유적 유물'의 실체를 통해서 확 인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사랑벌국과 고녕가야국의 역사 인물과 유적 유물을 통해 이들 소국의 정체성과 왕도의 권역 그리고 왕릉과 통치 중심축의 이동에 대해 재인식해 보려고 한다. ll.경상도 서북부의 사량벌국과 고녕가야국 낙동강의 서북부에 자리한상주에는 기원전 2 세기 이래 사벌평야를 기반으로 한 사량벌국( 沙梁伐國 ) 이 자리잡고 있었다. 낙동리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해진 ' 한경'이 기원전 것이라는 사실 24 ) 과 고조선의 해체와 조선상 ( 朝鮮相 ) 역계경 ( 歷谿卿 )1만여명에 달하는주민을 거느리고이탈하여 진국방면으로 이주한사건의정치적 파동은 상주지역 사량벌국형성은기원전 2세기대로 추정된다.25) 사량벌국을 세운 주체들은 불한조선의 조선후인 기씨(箕氏 26 )가 반기를 들고 일어나 스스로 신한 (= 왕 )이라고 칭하는것을계기로 고조선이 삼조선으로 분화된 뒤 이래 신한조선이해체 되자 반도로 내려온 신한조선의 통솔자는 해씨(解氏)계로 추정된다. 27) 위에서 살피본 것처럼 말한 조선의 조선후인 한씨 ( 韓氏 ) 는 본래부터 압록강 이남을다스렸지만 불조선의 왕 기준 ( 箕準 ) 에게 무너진 뒤 옛날에 왕호로 쓰던 ' 말한'을 국호로 쓰면서 이를 이두자로 '마한' (馬韓) 이라 쓰고 새로 쓰는 왕호인 ' 신한'은 이두자로 ' 진왕' ( 辰王 ) '으로쓰서 '마한국 ( 馬韓國 ) 진왕 ( 辰王 )' 이라 칭하였다. 기준이 왕위를 탈취한 뒤에 국민들의 불평을 무마하기위해 자신의 본래 성인 기씨 ( 箕氏 ) 를버리고 한씨 ( 韓氏 ) 로 성을바꾸었다. 28 ) 이에 그 고도 ( 古都 ) 평양에는 최씨 ( 崔氏 ) 가 그부근의 25 개국을 복속시켜 하나의 대국인 낙랑국을 일으켰다. 29 ) 그리하여신한조선의 해씨계는 영남 일대로 남진하여 낙강 서북부의 북천과 동남부의 병성천이 만나는 사벌평야에 사량벌국을 세웠다. 그리고 인근의 소국을 병합해 가며 세력을 키워나갔으며여타소국과 달리 강력한 존재감을 지닌 강소국으로 자리했을 것으로 해된다. 30 ) 사료에는 당시에 존재했던 진한12소국의이름이 등장하고 있다. 또 상주 동북쪽의 이안천과 영강을젖줄로 하고 함창평야를 기으로 성장한 함창의 고녕가야국은 번한조선의 해체 이후 그 유민들을 통솔해온 이는 기씨 ( 箕氏 ) 계로 추정된다.이들은 낙동강 상류와 중하류에 국호를 구야 즉 가야로 한 여섯 가야국 ( CE. 42 년 )을 세우고 강력한 존재감을 확립해 가고있었다. 가야의 나라들은 본국인 금관가야국의 왕(王)과 열국인 고녕가야국(상주 함창).아라가야국(함안).대가야(고령).성산가야(성주 벽진).의 주(主)를 중심으로 한 정치 연맹체에서 정치 연맹체에서 점차 고대국가로 나아가고 있었다. 당시 삼한의 여러 나라들 가운데 역사에 나타난 것은 70여개국이었다. 사료에는 당시에 존재했던 마한 54소국. 진한12소국,변한12국의 이름이 등장하고 있다. 아처럼 당시 경상도 서북부의고대도시 상주의 사벌국과 함창의 고녕가야국은 각기 이웃소국들을병합해 가면서 세력을 확장해 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들 두 소국은 각기 경상도 동 남부의 경주 일대에서 사로국 ( 斯盧國)을기반하여 주변으로 팽창해 가는신라에 맞서면서 성장해 가고 있었다. 특히 상주의 사량벌국은사로국연맹을키워 성장해 간 경주 신라의 첨해왕이보낸우로의 군대에 의해 3세기 중엽에 멸하기는 했지만 여타의 진한 소국들 중 가장 마지막에 병합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병합 직후에도 오랫동안 이 지역은 경주의 사로국 즉신라에 맞서면서 일정한 자주권을 유지했던것으로짐작된다.이 지역에는 사량벌국의왕도로추정되는 이부곡 토성과그 부근인 사별면 금흔리 일대에는 토광묘 유적이 광범위하게분포하고 있다. 이부곡 토성 부근 바람받 고개 야산 능선에서 무문 토기와 주머니호가 수습되었는데 주머니호는 토광목관묘에서 조합식 우각형파수부호와 공반하므로 금흔리 유적은토광목관묘로 추정된다.32) 비록 토광묘는 발굴 조사되지 않은 것이지만 읍락국가존재기의 대표적 무덤양식이기때문이다. 33 ) 그리고 4 세기 전후한 시점에 한 차원 높 은 도질토기가 중장하기 전무문도기문화에서 회도제작 기술의 영향으로 성립된 와질토기 산은 포지도 있다. 이들 유물은 원삼국기의 유물의 대표성을 지닌다.진한 변한의 광역 경제망이 존재함을 나타내는 지표로 볼 수 있을 34 ) 것이다. 이러한 고고학적 유물에의거해볼때 사량별국이 신라에병합되기는 했지만 신라의 영향력 이 사랑벌국에 미치기까지는 4세기 이후 6 세기 초반에 이르러서야 본격화된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 법흥왕이 병부를 설치 ( 517 ) 하고 율령을 반포하고 복식을 제정 ( 520 ) 하면서 불교를 공인 ( 527 )하고 고대국가로 공고해지는 6 세기 중엽까지 사량벌국과 고녕가야국은 이 지역에서 일정한 존재감을 지녀온 것으로 판단된다. 그런데 김부식의「 삼국사기」 는 신라에 병합된 소국들은 이 후 법흥왕과 문무왕대에는 ' 주' (州) 로 삼고 여기에 군사와 행정을 총괄하는'치소성'(治所城 ) 을 세웠으며, 경덕왕대에 이르러서는 '군'(郡) 이나 '헌' (縣)으 로 개편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삼국사기 」의 기록과 같이 이들 소국들의 멸망 직후 곧바로 신라의 '군'(郡 ) 이나 현(縣) 으로 편입시켰었다고 볼 수는 없다. 이 지역에서 발굴되는고고학적인 유물들의 성격으로 볼 때 4 세기 후기까지 신라의 유물이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료에 의하면 여러 소국 중에서 상주의 사량벌국 즉사벌국은가장늦게 신라에 병합되었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신라는사량벌국의 권역에 대해 일정한 시기 동안 간접 지배 형식을 취하다가 경덕왕 대에 이르러 직 접 지배 형식으로 전환한 것으로보이기때문이다. 「 삼국사기 」에서는사량벌국의 권역을 '사벌주' (沙伐州,上州 ) 혹은 ' 사벌군' (沙伐郡) 으로 기 록하고 있다. 35 ) 이것은 사벌국이 여타의 소국들과달리 강력한 소국이었기 때문으로 ' 주' 혹은 ' 군'으로 인정되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사서는규모가좀 큰 것은 ' 군'으로. 그 다음의 것은 ' 현'으로 편입시킨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 근거해 본다면 당시사량벌국은진한 여러 소국 가운데에서도 4. 5 천가의 규모를가졌고,거수즉 '장수'(長帥)도 가장 격이 높은 ' 신지' ( 臣 智 ) 로 불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경덕왕 대 이래 상주의 사량벌국권역의 '사벌주'내지' 귀덕군'의 표현과 함녕의 고녕가야국 권역의 고동람군 - 고릉현'의 기록은 후대 역사서 기술당시의 군현제 (郡縣制 ) 의 반영으로 보인다. 다만 이들지역을'군'과 '현'으로 구분해 불렀던 것은 이들 소국의 지위와 위상을 반영한 표현으로 이해된다. 고녕가야국은 함창평야 일대에서 소멸 ( 254 ) 했지만 금관가야 소멸 ( 532 ) 이후 본국의 역활을 한 대신한 대가야가 잔존(562)할 때까지 이 지역 또한 가야 연맹의 잔존지로서 이지역에서일정한 영향력을 지녀왔을것으 로 추정된다. 수로왕(王)에서 구형왕(王)까지10대 491년을 이어온 가야의'본국'(本國) 금관가야국을 ' 금관군'(金官郡) 혹은 '김해군' ( 金海郡)으로, 고로왕(主)- 마종왕(主)-이현왕(主) 3 대 213 년을 이어 온 '열국'(列國) 고녕가야국을 신라는 경덕왕때'고동람군'(古冬欖都 )흑은 '고릉현'(古陵縣 )으 로 삼았던 것도 같은 맥락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고조선을 이끌었던 신한조선의 해씨계와 불한조선의 기씨게의 후예들이 이곳상주평야와 함창평야에서 뚜렷한 존재감을가지고 경주평야를 기반으로신라를이끌었던 박씨계에 강력히맞섰던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사료의 부족 때문이기도하였겠지만 지금까지 이 부분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은 고조선의 분화와 삼조선의해체로 인한 유민의 이동과의 유기적관계 속에서 살펴보지않았기때문으로 이해된다. 이제 고조선과 삼조선 체제의 해체 이후 한나라와 흉노의 난을피해 마한의 남진과 진한의 낙동강 동남부 그리고 변한의 낙동강 남북부에 정착하여 소국을 성립시켜가는 것과의 관 계 속에서 문제를 풀어간다면 동치 주체에 대한 실마리도 풀어갈 수 있을 것이다. 신라의 박씨계와 이에 맞셨던 사량별국의 해씨계 그리고 고녕가야국의 기씨계와 같은 통치 주체에 대한 이해 속에서 비로소, 이들 소국에 대한 성격이 보다 분명해 질 수 있을 것이다. ~~~~~~~~~~~~~~~~~~~~~~~~~~~~~~~~~~~~~~~~~~~~~~~~~~~~~~~~~~~~~~~~~~~~~~~~~~~~~~~~~~~~~~~~~~~~~~~~ 17 ) 진한조선의 지배층은 해씨게였으며 이들이 유민들을이끌 영남의 낙강서북부로 내려가 사량벌국 을 세웠던 것 으로추정된다. 한편 낙강 동남부로이동하여 斯盧國 을 세운 이는 북부여 동명제인 解慕漱 의 딸 巴素 와 태백선주 朴元達 사이에서 태어난 朴赫居世 였다. 혁거세는 해모수의 外孫子 인 것이 다. 18)「 鴻史桓股 」은이비가지( 実毗詗之, ?~?) 즉 首露왕의아버지가 箕子 의 후손인 箕氏 임을 알려 주고 있으며 가야계 6 국의 과 주 또한 은나라의 후손인 기자의 후손임을 알 수 있다. 서동인, 「 흉노인 김씨의 나라 伽倻 」( 서울 : 주류성,2011 ). pp. 10 ~ 11. 그렇다면 흉노 우현왕의 태자인 金日磾 및 金倫 두 형제 중 金日磾 가 한 무제의 측근이 되었고 전한 말기에 김일제의 증손녀인 金政君 이 前漢 元帝 의 정비인 효원황후가 되어 아들 성제를 낳았다. 김일제 이후 김씨들은 7 대를 내러오며 한나라 조정 에서 큰 세력을 형성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효원황후의친정조카인 王莽 즉 金王莽 이 "신 ( 新, 기원후 8 ~ 23 년 ) 나라를건국하였고 이를 도왔다고 알려지는 수로 ( 金諟 ) 형제가 가야에 정착하면서 성씨를 金 氏 로 바꾼 것으로 추정된다. 금불상을 만들어 놓고 곤륜산 서쪽으로부터 중앙아시아 일대에서 머무르던 匈奴人들이 숭배하던 祭天金人의 金人에 착안하여 한나라 무제는 내려준 성씨가 ' 金'이라는 성씨 이다고 전하고 있다. 19 ) 范曄,「 後漢書」75韓조. 20)陳壽,「 三國志 」30권, 「 魏書 」「 東実傳 」, 弁辰 조. 21 ) 韓基汶,「사벌국의성립과 전개 」,「 문화사학 」제 27 호, 문화사학회, 2007. p. 142. 22 ) 李賢惠,「 三韓 小國 의 構成 과 정치 · 사회적 性挌」,「 三韓社會形成過程研究 」( 서울 : 일조각, 1978 ). pp. 107 ~ 108 및 주 ) 18 참조, 23 ) 李冰鎬, 「 上古期 尙州地域 政治體 의 向方 」「신라문화 」 제 41 집, 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 2013.2. p. 7. 24 ) 정인성, 「 낙동강 유역권 세형동검 문화의전개」.경북대 석사학위논문, 1997. 25 ) 한기문, 앞의 글 앞의 책, p. 138 26 ) 魏孔安釐王 五十年 曲阜 孔子順 記, 大野勃 ( 754 ) 序 、 崔勉吉 抄錄, 「 鴻史桓殷 」. 반재원 ( 달. 2012 : 2021 ). p. 281 : p. 371. 서한 ( 마한 ) 의 9 세 영왕의 아들인 ' 文' 즉 ' 이비가지' ( 夷毗 이며 은나라 무을의 둘째 아들인 리의 아들인 箕子 의 후손으로 나온다. 최치원의「 釋利貞傳」에는'夷 毗訶' 를 天神 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는 여섯 아들을 낳았는데水路는 금관가야국을 세웠고나머지 다섯아들은 각기 고녕가야. 대가야. 아라가야. 벽진가야 소가야를 세웠다. 27 ) 신채호, 앞의 책. p. 124 28 ) 신채호, 앞의 책, p. 137 29 ) 신채호, 앞의 잭, p. 139. 30 ) 한편 낙강 즉 낙동강의 남동부에 자리한 또 다른 웅주인 慶州에는 기원전 1세기(BCE.57년)이래 경주평야를 기반으로 한 사로국(斯盧國)즉 훗날의신라(新羅)가 이웃 소국을 병합하여 세력을 키워가고 맀었다.「홍사환은」(P366)에 의하면太伯仙主 朴元達과 죽부여왕(동녕제)해모수의 딸 巴素 사이에서 朴赫居世 가 태어났음을 알 수 있다. 32 ) 홍지윤.「영남서북부 초기정치체의 동향 -고고학 자 료를 중심으로 - 」숭실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9. 33 ) 한기문, 앞의 글. 앞의 책, p. 137. 34 ) 이희준, 「 초기 진변한에 대한 고고학적 논의 」.「 진 변한사연구 」경상북도 계명대 한국학연구원, 2002. 35 ) 金富軾 ( 1145 ).「 三國史記 」권 45, 「 新羅本紀 」, < 列傳 >, ' 昔于老'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