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눈발 딛고 일어선 소나무
민경탁
근·현대 한국 여성육영사업가로 대구의 김울산(金蔚山 일명 金復明), 김천의 최송설당(崔松雪堂), 서울의 안유풍(安遺豊) 여사를 꼽을 수 있다. 세 분은 일제 강점기 민족에 내린 어둠을 밝힐 빛을 나눔과 육영에서 찾고자 하였다. 지역사회에 대한 사랑, 인류를 널리 돌봄에서 여성박애주의자라 할 수 있다.
김울산은 울산 태생으로 대구 남성과 결혼했지만 이내 사별, 홀로 술장사와 정미소 경영으로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 흥선대원군과 가깝게 지내 땅을 하사받았단 설도 있다. 여사는 고종의 하사금을 합한 재산으로 1925년 대구 명신학교를 인수, 복명학교(현 복명초등학교)로 개명했다. 조국 광복의 염원을 담아 교명을 ‘복명(復明)’이라 한 것이다. 김 여사는 대구에서 맨 먼저 교육기부 확산과 인재 육성에 앞장 선 사표(師表)다. 뒤늦게, 생애 일부에서 친일행적이 밝혀져 근래 선양사업이 중단되고 있다.
최송설당은 홍경래 난 때 몰락한 화순최씨 가문의 김천 출신 여성이다. 애초 길쌈과 바느질, 농사로 재산을 모았다. 동학농민운동을 피해 상경, 우여곡절 끝 고종의 엄 상궁과 가까워져 입궁, 영친왕의 보모로 지내다가 왕궁에서 나오며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이때 최 여사는 엄 귀비가 진명여학교, 명신여학교를 세우고 양정의숙이 경영난에 빠지자 도와주는 걸 지켜보았다. 여사는 경술국치 이후 서울 무교동에 저택을 짓고 ‘송설당’이라 현액해 송설당, 이것이 자신의 아호 또한 이름으로 굳어졌다.
송설당은 귀향해 전 재산을 기부하며 1931년 김천고등보통학교(현 김천중·고교)를 개교했다. 해인사에 기부하려던 재산을 “깨끗한 재산을 육영에 써라”는 어머니의 유훈과 만해 한용운의 권고에 따라 당시로선 인가부터가 불가능한 인문고교를 설립했다. 김천 지역 여타 학교에도 교육기부를 많이 했다. 또한 불심이 깊어 북한산, 금강산 유점사·표훈사·정양사, 법주사 복천암, 경북 청암사, 경남 화왕산 도성암, 통도사 등에도 크게 시주했다. 최송설당은 한시 259 수, 49 편의 가사를 낳은 조선의 마지막 궁중여류문인이기도 하다.
안유풍은 휘문의숙(현 휘문중·고교) 설립자 민영휘의 부실(副室)로 ‘해주마마’로 불린 여성, 휘문초등학교를 설립했다. 안 여사의 유지에 따라 증손민덕기가 1945년에 설립한 학교가 풍문여학교(현 풍문고교)다. 안유풍의 ‘풍(豊)’자에서 풍문학원이란 교명이 나왔다. 학문을 풍성히 한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강수진·김을동 배우, 김상희 가수, 한강 소설가가 이 학교 동문들이다. 근래, 민영휘의 친일행적으로 인하여 청주에 있던 안유풍 여사의 묘소를 이장하는 운명을 맞았다.
김울산, 최송설당, 안유풍은 애초 신분이 미천했다. 하지만 굴곡진 생을 살며 치부해 나중에 육영과 박애를 실현했다. 생애를 두고 볼 때 부분적인 흠결이 있지만 인재 육성과 나눔에의 실현은 아름답고 빛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중에서도 친일행적이 없는 이가 최송설당이다. 최 여사는 생전에 자신의 삶과 문학에서 만고불변 송설(松雪)의 기상을 존중해 흠모하며 기렸다. 송설당의 나눔과 육영 정신은 눈발을 딛고 일어선 소나무와 같이 오늘도 푸르고 푸르다.
문화예술이 삶을 이끌어가는 시대를 맞아 사회에 각종 콘텐츠가 차서 넘친다. 토지, 노동, 자본 및 경영, 정보기술에 이어 곳곳에서 문화콘텐츠가 생산의 요소로 부상한다. 문화 선진국에서는 고유문화를 세계에 전파하기 위해 막대한 재정을 투자하고 있다. 독창적인 문화의 힘, 예술적 창조력에 의한 고품질 문화 서비스가 장차 창출해 낼 시너지 효과는 엄청날 것이다. 이미 우리나라의 한류문화는 세계적으로 주목 받으며 국가의 위상을 높이고 있다.
수년 전 어느 문인 모임에서 극작가 한 분으로부터 시나리오「송설당」을 쓰다가 중단한 채로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 극작가는 우리나라 톱 여배우로 주인공 배역을 상정, 송설당의 일대기를 영상미로 재현, 노을 진 황악산을 배경으로 동문들이 최 여사 상여를 메고 학교 뒷산으로 올라가는 장면을 라스트 신으로 구성했다고 한다. 경북의 여성육영사업가, 한국 여성육영사업의 어머니, 여성박애주의자 송설당을 소재로 영화를 만들어볼 사료와 타당성은 넘친다.
-송설회보 75호(2022. 겨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