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살던 고향 꽃피는 산골 - 문산리(汶山里)
문산리(汶山里)는 대부분의 지대가 평지로 이루어진 전형적(典型的)인 농촌 마을이었다. 마을 동쪽으로 우박천(愚朴川 ; 동천강)이 흐르고, 그 주변으로 ‘새들’과 ‘모화들’이 넓게 펼쳐져 있다. 마을 북서쪽에는 ‘구어들’이 펼쳐져 있으며, 비옥한 토지로 조성되어 있다.
자연마을로는 문산1리에 ‘밖문산’, ‘안문산’이 있고, 그 서남쪽에 있는 문산2리에는 ‘우박’, ‘울밑들’, ‘성만리’등이 있다. 문산(汶山)은 또 ‘묵산(墨山)’ 또는 ‘멍미’라고도 한다.
그리운 내 고향 문산리 입구
문산 마을은 개척당시 돌이 많은 뒷산을 울산(蔚山) 사람들이 빼앗으려 하자 소유권 분쟁을 하면서 욕을 많이 얻어먹었다고 하여 문산(汶山)이라는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다고 한다.
울산(蔚山)은 이래저래 문제가 되는 동네라 아니할 수 없다.
옛 신라조(新羅朝)부터 관문성 이북은 물론 지금의 두동면과 두서면 지역까지 경주부 지역이었는데, 관문성(關門城)의 북쪽 사면(斜面)의 임야까지 빼앗으려고 얼마나 욕설(辱說)을 퍼부었으면, 마을 이름까지 ‘욕산(汶山)’이라 했을까. 한문자(漢文字) ‘汶’이 ‘욕될 문(汶)자’이다.
문산공단 조성작업
(‘우박’에서 오봉산 ‘성만리’로 가는 중간쯤 오른쪽의 ‘뿕은디’산은
형체가 없어지고 좌측 중간 부분에는 기이 건설된 외동 제1공단이
자리잡고 있다. 모화리의 태화방직 구 공장들이 철거되기 전이다.
우측 상단에는 석계리의 '서라벌 골프장'이 흩어져 있다. 우박천과
'돌기거랑'이 합류하는 지점에 마을이 조금 남아 있으나, 이곳에도
언제 공단이 들어설 지 모를 일이다)
예부터 문산리(汶山里)는 모화역(毛火驛)에서 석계리와 녹동리로 들어가는 초입의 산기슭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고즈넉한 촌락이었지만, 지금의 문산(汶山)은 이제 그 시절의 모습을 상상하기조차 어려워졌다.
경주시(慶州市)에서 경제도시 건설을 위해 물류이동과 산업인프라를 갖춘 다양한 산업단지(産業團地) 조성을 한다며, 마을의 거의를 공단(工團)으로 조성한다고 벗기고, 메우고, 밀어버렸기 때문이다.
외동 제1공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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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산(汶山)은 앞서 말한 대로 마을 뒤에 있는 돌산을 울산(蔚山)사람들이 뺐어가려고 하여 욕을 많이 얻어먹었다고 하여 ‘문산(汶山)’이라는 이름이 지어졌다.
그리고 문산(汶山)은 전술한 대로 묵산(墨山) 또는 ‘멍미’라고도 하는데, 녹동리와 석계리에서 흘러내리는 ‘돌기거랑’을 중심으로 그 동북쪽에 위치한 밖문산, 안문산 등이 문산1리, 그 서남쪽에 있는 우박, 울밑들, 성만리가 문산2리를 이루고 있다.
문산리 마을회관
문산1리는 ‘우박’을 중심으로 북쪽에 ‘울밑들’이 인접해 있고, 남쪽으로 공단(工團)을 지나 산 위에 ‘성만리’가 자리하고 있다.
문산(汶山)은 원래 ‘우박’이 가장 중심마을이며, 큰 마을이기 때문에 마을 이름도 ‘우박’이 되었어야 했으나, 지난 1914년 일제가 시행한 행정구역(行政區域) 통폐합 때, 마침 문산리의 구장(지금의 이장)이 작은 마을인 문산 사람이라 동리 명칭이 문산(汶山)으로 되었다고 한다.
문산1리는 특별한 작물은 없고 주로 벼농사에 의존하고 있었고, 예전에는 소를 많이 먹였다.
그러나 공단(工團)이 들어서면서부터 대부분의 농토가 공장부지로 변하고, 20%정도의 농토만 남았는데, 이나마도 공단확장의 대상이 되고 있다. 문산리의 자연부락과 중요지형, 그리고 지방문화재를 알아본다.
문산 일반공단 건설
우박(愚朴)
1539년경 인동장씨(仁同張氏), 단양우씨(丹陽禹氏), 밀양박씨(密陽朴氏)의 3성씨(三姓氏)가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으므로, 3성을 따서 마을 이름을 ‘장우박’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후일 인동장씨들이 다른 곳으로 이사하고, 우씨와 박씨만 남았으므로 ‘禹朴’이라고 하다가, 뒤에 한문글자가 변하여 ‘愚朴’이라 부르게 되었다.
우박천
밖멍미
약 450년전 박춘무(朴春茂)라는 선비가 경기도(京畿道) 여주에서 이주(移住)하여 처음 살았는데, 당시에는 ‘묵산(墨山)’ 또는 ‘멍미’라고 불렀다.
‘문산(汶山)’마을은 길게 줄지어 늘어선 마을로 그 중에서도 ‘밖멍미’는 바깥쪽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인데, ‘밖문산’이라고도 칭한다.
문산리 노인정
성만리(城萬里)
관문성(만리성) 옆에 마을이 위치하였다 하여 ‘성만리’라 불렀다고 한다. 신라(新羅) 초기 때 가락국(駕洛國)과 경계지역인 이곳에 외침(外侵)을 막기 위해 성(省)을 쌓았는데, 그 성 이름이 ‘만리성(萬里城)’이다.
약 500년 전에 황씨(黃氏)가 처음 이곳에 들어와 살면서 만리성(萬里城 ; 關門城) 옆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성만리(城萬里)’라 불렀다.
성만리와 모화리에 걸쳐 축성된 만리성(관문성)
울밑들
‘우박’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원래 지대가 낮아서 토사(土砂)를 방지하기 위해 나무를 심어 제방(堤防)을 만들었던 곳이라 마치 울타리에 둘러싸인 듯하다고 하여 ‘울밑들’이라 불렀는데, 이곳에 70여 년 전부터 마을이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마을이름이 되었다.
약 60년 전에 강호용씨가 이 마을에 처음 들어와서 살기 시작했는데, 그 당시 유사(流砂)가 많이 흘러 내려오는 곳에 ‘울섶’을 만들어 유사를 방지하고, 그 아래에 들을 만들었다고 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울섶’은 ‘섶’을 울타리 같이 엮어 세운 물막이 또는 흙막이를 말하는데, ‘섶’은 잎이 붙어 있는 땔나무나 잡목의 잔가지, 잡풀 따위를 말린 땔나무 등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섶(섶나무)
“섶을 지고 불로 들어가려 한다”는 말은 ‘불이 잘 붙는 섶나무를 지고 불속에 뛰어든다는 뜻으로, 위험을 자초하는 어리석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난두절 터
‘난두사’라는 절이 있었던 곳으로 지금은 ‘순금사(舜琴寺)’가 들어서 있다. ‘마냇골’ 서쪽에 있다.
성불사
‘관바우산’ 밑에 있는 절로 10여 년 전에 들어섰다. 경로잔치를 베풀고 마을 일에 협조를 많이 했다고 한다.
순금사
순금사(舜琴寺)
문산리 91-1번지, ‘난두절’의 절터에 100여년 전에 새로 지은 절이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인 불국사(佛國寺)의 말사이다. 지금의 도로명 주소는 경상북도 경주시 문산공단길 236-31로 되어 있다.
순금사(舜琴寺)는 우리 외동향우회 카페지기 우희곤님의 선대부인(先大夫人)이신 ‘정산댁’여사께서 7남 1녀를 모두 성장시켜 전국 각지에 분가(分家)·출가(出嫁)시켜 놓으시고, 선(禪)공부와 불도를 닦으시던 사찰이기도 하다.
순금사
배너리
‘난두절터’ 동남쪽에 있는 산으로 옛날에 하늘에서 내려온 배를 대던 곳이라는 전설(傳說)이 전해지기도 한다. 마을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인데, 바닷가에서나 볼 수 있는 조개 등이 발견된다고 한다.
우박재(愚朴齋)
문산리 597-4에 소재하는 사당으로 조선시대 충주병사(忠州兵使) 증 병조정랑(贈 兵曹正郞)을 지낸 단양인 우인탁(禹仁鐸)을 추모하기 위해 그 후손들이 1999년도에 지은 재실(齋室)이다.
우박재
마을 뒷산 연화봉에 자리한 ‘우박재(愚朴齋)’는 삼문과 담장, 종회당(회의 및 제사 준비실)을 갖춘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둥근 기둥의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가운데 3칸은 마루를 설치하고, 양쪽은 방을 배치했다.
구어리(九魚里) 일대의 단양우씨(丹陽禹氏) 종중산(宗中山)의 매각 대금과 종중(宗中)에서 부담한 성금으로 총 공사비 4억여 원으로 지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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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양우씨(丹陽禹氏) 얘기가 나왔으니 여기에서 단양우씨의 절의정신(節義情神)을 잠시 소개하고 넘어간다.
‘외동이야기’ 어느 파일에서도 기이 소개드린바와 같이 고려조의 선비였던 단양인(丹陽人) 역동(易東) 우탁(禹倬)의 절의는 청사에 길이 빛나고 있다.
폐륜(廢倫)을 저지른 군왕에게 죽음을 각오하고, 서릿발 같은 기개로 극간(極諫)을 했던 단양우씨(丹陽禹氏) 역동(易東) 우탁(禹倬)의 이야기다. 사연을 알아본다.
여말(麗末)의 석학 ‘우탁’은 우리나라 최초로 역학(易學)을 개척한 대학자이자 서릿발 같은 기개로 군왕(君王)의 패륜을 극간했던 당대의 명신으로서 역사에 뚜렷한 발자국을 남긴바 있다.
1308년, 갓 왕위에 오른 고려조 충선왕(忠宣王)은 부왕(忠烈王)이 총애했던 숙창비(淑昌妃)와 정을 통하는 등 정사(政事)를 멀리하고 애욕의 늪에 빠졌다. 당시 우탁(禹倬)의 벼슬은 감찰규정(監察糾正)이었다.
충선왕
(몽골 오랑케 복장을 하고 있다)
충선왕(忠宣王)은 고려의 제26대 왕으로 아버지 충렬왕과 어머니 제국대장공주(원 세조 쿠빌라이의 딸) 사이에서 출생한 인물로 고려시대 최초의 혼혈왕(아이노꼬)이었다.
아버지 충렬왕이 원에 사실상의 귀부를 하고, 원나라의 부마가 됨으로써 원의 ‘제국대장공주’를 아내로 맞았고, 그 사이에서 출생한 것이 충선왕이다.
충선왕은 원(元) 세조 쿠빌라이칸의 외손자이자 고려의 왕인 동시에, 원 제국 황제의 외손자이며, 다시 원 제국 황실의 부마(夫馬)라는 특이한 정체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그랬는지, 1308년 부왕인 충렬왕이 사망한 후 아버지의 후궁인 숙창원비와 정을 통하고 그녀를 숙비(淑妃)로 진봉시켜 말썽을 불러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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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이 꼴이 되자 당시 감찰규정(監察糾正)이었던 우탁(禹倬)은 어느 날 그는 조상의 묘소를 참배(參拜)하고, 사랑하는 가족들과 하직인사를 한 후 도끼 한 자루와 ‘거적때기’를 들고 충선왕의 어전(御前)에 나아갔다.
드넓은 궁궐 뜰에 깐 ‘거적때기’ 위에 엎드려 “충렬왕릉(忠烈王陵)의 흙이 채 마르기도 전에 부왕이 총애하던 숙창비(淑昌妃)를 희롱하는 처사는 인륜을 저버린 패륜”이라는 내용의 칼날 같은 상소를 올렸다.
“군왕은 마땅히 경술(經術)을 좋아하며, 날마다 유신과 더불어 경사를 토론하고, 백성을 교화함이 당연할진데, 만고에 결처 변할 수 없는 윤상(倫常)을 무너뜨림이…, 전하께서는 하루 빨리 마음을 돌이키소서!”라는 내용도 덧붙였다.
서늘하다 못해 어깨가 뻣뻣하게 굳어지는 내용이었다. 이러한 상소를 ‘지부상소(持斧上疏)’라고 한다.
드넓은 궁궐 뜰
도끼를 들고 왕에게 상소(上疏)하는 것을 문자로 표현한 것 인데, “내말이 틀리면 이 도끼로 머리를 쳐 달라”는 뜻이니, 참으로 처절한 직언(直言)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주위에 둘러선 만조백관(滿朝百官)들은 겁을 먹고, 뒤로만 빠져 쑥덕대고만 있을 뿐 누구 한 사람 나서지 않을 때였다.
‘우탁’선생처럼 용기 있는 선비가 우리 역사에 몇 사람만 더 있었다면, 지금의 우리들 자화상(自畵像)은 제법 달리 묘사되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용기(勇氣) 있는 행동에는 자비가 따른다는 선례(先例)도 이때부터 만들어졌다. 죽음을 각오한 용기 있는 상소(上疏)에 자신의 잘못을 뉘우친 충선왕(忠宣王)은 그 ‘거적때기’와 도끼를 ‘우탁’의 집으로 보내고, 어떤 처벌도 내리지 않았다.
그 시절 절신(節臣)들의 지부상소
이후 우탁(禹倬)은 스스로 벼슬을 버리고 경북(慶北) 안동(安東)에 은거, 주역(周易) 연구에 여생을 바쳤다.
그의 호 역동(易東)은 ‘동방에 역학(易學)을 처음 들여온 인물’이라는 뜻으로 세인들이 붙인 별명이었다.
그리고 우리나라 주자학(朱子學)의 조종(祖宗)으로 추앙받는 정몽주는 ‘우탁’선생의 사후 25년 만에 선생을 동방사림(東方士林)의 으뜸으로 삼아야한다고 상소를 올려 이를 실현되게 하였다. 의인(義人)은 의인을 알아본다는 진리가 통용되던 시절이었다.
이뿐이 아니었다. 그의 사후 2백년, 성리학의 대가 이퇴계(李退溪)는 그를 “동방 성리학(性理學)의 조(祖)”라고 극찬하면서, 은거지 예안(禮安)에 역동서원(易東書院)을 세우고 그의 위업을 기렸다.
‘단양우씨’는 고려 충렬왕조(忠烈王朝1247~1308)를 전후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여 조선 개국 직전까지 번영을 누렸다.
문산리
특히 고려(高麗) 고종(高宗)때 문하시중(門下侍中 ; 조선조의 영의정)을 지낸 우중대(禹仲大)는 단양우씨를 명문의 위치에 올려놓은 인물이었다.
그의 아들 천규(天珪)ㆍ천계(天啓)ㆍ천석(天錫)ㆍ천우(天佑)ㆍ천성(天成)등 5형제가 거의 같은 시기에 문과에 올라 가문을 빛내었는데, 이들 5형제 중 맏이인 천규(天珪)의 아들이 바로 우탁(禹倬)이다.
고려의 국운(國運)이 기울면서 우씨일문(禹氏一門)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켰다.
그 중에서도 ‘역동’의 손자인 우현보(禹玄寶)는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조가 갈리던 무렵의 대표적인 절신(節臣)으로 명성을 떨쳤다.
공민왕 4년 문과에 급제하여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등을 역임하고, 단양부원군(丹陽府院君)에 오른 그는 당대의 명유인 이색(李穡), 정몽주(鄭夢周)등과 교분이 두터웠던 석학이었다.
그러나 그는 고려말 정몽주(鄭夢周)의 일당으로 몰려 귀양을 가기도 했었으나, 조선개국 후 청백리(淸白吏)에 오르기도 했었다. 조선조 초대 왕인 이성계(李成桂)가 그의 옛 친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성계가 공(公)에게 친구의 예로서 대접하고 호의를 베풀었지만, 공은 끝까지 벼슬을 사양하고 낙향하기를 원했다.
공이 죽은 뒤 태조(太祖)는 그에게 영의정을 추증하고 ‘충정(忠靖)’이란 시호를 내렸다.
우현보의 고려조(高麗朝)에 대한 충절은 절세(絶世)의 본보기가 되기도 했었다. 조선조 정종2년, 68세로 세상을 떠난 그는 가족들을 모아놓고, 비장(悲壯)한 유언을 남겼다.
“나는 망국대부(亡國大夫)다. 세상에서 죄를 지은 몸이니 내가 죽거든 선영 밑에 묻지 말고, 우리 내외를 합장(合葬)도 하지 말라. 나 혼자 무덤을 따로 만들어 내가 생전에 죄인이었다는 뜻을 표시케 하라”.
거적때기
이렇듯 단양우씨(丹陽禹氏)는 1천여 년의 씨족사에서 ‘절의(節義)’를 가장 큰 덕목으로 고집해온 가문이기도 하다.
왕(王)앞에 ‘거적때기’와 도끼를 들고 나타났던 ‘역동(易東)’의 기개가 고려가 망할 때는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로 계승되었고, 임진왜란과 일제하에서는 구국의 투혼으로 이어졌으며, 6.25당시에는 반공(反共)의 보루로 대물림 되었다.
일제에 대항하여 우리민족의 우월성(優越性)을 세계에 선양한 육종학자 우장춘(禹長春)박사, 6.25당시 제헌국회의원에 입후보했다가 적색분자의 총탄에 쓰러진 외동읍 출신 우용근(禹鎔根) 한국반공청년단장 등이 그 대열에 섰던 이들이다.
우용근(禹鎔根) 한국반공청년단장은 우리 외동향우회 우희곤 전임 회장의 왕고장(王考丈 ; 할아버지)이시다.
충선왕(忠宣王) 얘기가 나왔으니 여기에서 잠시 최근까지 인기를 끌었던 사극 ‘기황후(奇皇后)’와 관련한 의견을 조금만 제시하고자 한다. 충선왕은 이 극에서 '심양왕(瀋陽王)'으로 등장한바 있다.
최근까지 안방극장에서 상영되었던 사극 ‘기황후(奇皇后)’는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학생들도 시험기간에 상관없이 이 드라마를 보려고 엄마들과 실랑이를 벌이곤 했었다.
그런데 드라마에서 충혜왕 역할을 한 주진모는 ‘왕유(충혜왕)’라기보다는 사실상 충선왕(忠宣王)의 인생을 그린 것이었다. 극이 사실(史實)을 왜곡한 것이다. 어쨌든 충선왕은 고려 역대 왕들 중 가장 많이 여색을 탐한 난봉꾼이었다.
어렸을 때 원(元)나라에 가서 유년기를 보내고, 자신의 외사촌 무종 카이산을 황제 등극에 오르는 큰 공을 세운 공신이 되어 고려의 전쟁 포로와 이주민이 많았던 요동 땅에 가서 심양왕(瀋陽王)이 되었고, 원(元)나라 조정에서 직접적인 정치 참여도 했었다.
그러나 충선왕(忠宣王)은 말년에 원(元)나라 황제 등극에 줄을 잘못 서서 ‘티베트’에서 귀양살이 아닌 귀양살이를 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동시대의 원나라 황후에 오른 기황후(奇皇后)는 1337년 21세에 원(元)나라 순제(順帝)의 황후가 되어 23세 때인 1339년 황자 아이유시리다라(愛猶識理達獵)를 낳았으며 그가 후에 북원(北元)의 12대 임금 소종(昭宗)이 된다.
순제의 초상
여기에서의 북원(北元)은 중국대륙을 지배하면서 우리나라(고려)를 100년 동안 참담하게 짓밟던 원(元)나라가 명(明)나라를 세운 주원장(朱元璋)에게 쫓겨 원래 자신들의 고향이던 몽골지역으로 옮긴 제2기의 원(元)나라를 말한다.
어쨌든 기황후(奇皇后)는 태어난 해와 유년기의 행적을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15세 무렵인 1331년 공녀(貢女)의 덫에 걸려 원(元)나라에 들어온 것으로 되어 있다.
이후 고려 충숙왕 복위 2년(1333)에 원의 휘정원(徽政院)에 있던 고려 출신의 환관 고용보(高龍普)의 추천으로 궁녀가 되어 갓 즉위한 순제의 총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순제 5년(1337)에는 옹기라트 가문의 여인에게 황후자리를 내어준다.
그러나 1339년 황자를 낳은 후 1340년 4월에 순제의 제2황후로 책봉되었지만, 제1황후를 능가하는 권력을 휘둘렀다. 그리고 이후 기황후(奇皇后)는 순제의 재위기간(1333~ 1370)인 37년 동안 권세를 유지하였다.
기황후(奇皇后)는 황후가 되자 곧바로 원(元)나라에서 자신의 반대세력을 몰아내고 휘정원을 자정원(資政院)으로 개편하는 등 전권을 행사했다.
기황후(奇皇后)의 세력이 강력해짐에 따라 고려에서도 그녀의 오라비인 기철을 중심으로 한 기씨(奇氏) 일족이 강력한 세력을 행사했다.
드라마 상의 기황후(하지원)
기황후(奇皇后)는 1365년, 전례를 깨고 정후(正后)가 되었으나, 1368년 원(元)나라가 멸망한 뒤에는 그 행적이 알려지지 않고 있다.
어쨌든 사극 ‘기황후(奇皇后)’는 당시의 역사를 상당부분 왜곡했 다고 볼 수 있다. 역사문화 콘텐츠는 교육의 한 부분이므로 철저한 고증이 되지 않으면 역사인식에 혼란이 야기된다.
최근 역사 교과서 왜곡 등으로 논란이 되는 시점에 픽션과 퓨전의 흥미도 중요하지만, 앞으로의 사극은 사실(史實)에 입각한 내면이 충실한 정통 사극이었으면 한다.
여기에서 한 가지 더 참고할 것은 위에서 말한 '심양왕(瀋陽王)'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심양왕(瀋陽王)'은 사극 ‘기황후’에서도 잠시 등장했는데, 이는 원(元)나라 당시 남만주 일대의 고려인을 통치하기 위한 왕으로서 원(元)나라가 고려왕족에게 내리던 봉작(封爵)이었다.
원(元)나라에 머물던 고려 충선왕(忠宣王)이 원나라 무종(武宗)을 황제에 오르게 하는데 공을 세워 처음으로 원(元)나라로부터 심양왕(瀋陽王)의 봉작을 받은바 있다.
당시 선양(瀋陽)을 중심으로 한 랴오닝성(遼寧省)에는 고려의 전쟁포로 ·항속민(降屬民) ·유민(流民) 등의 집단이 많아 고려의 영토와 같은 특수지역이어서 원나라는 고려에서 볼모로 데려간 영녕공(永寧公)을 안무고려군민총관(安撫高麗軍民摠官)에 임명하여 이 지역을 관장하게 하였고, 충선왕을 심양왕에 봉한 뒤에는 통치권의 권한을 더욱 확대해 주었다.
심양왕은 1310년부터 심왕(瀋王)으로 그 명칭이 개칭되었고, 충선왕의 조카인 연안군(延安君) 고(暠)가 심왕을 이은 뒤부터는 실권이 없어지고 명예적인 봉작에 불과하였다.
그 후 심왕은 연안군의 손자인 탈탈불화(脫脫不花)가 계승했는데, 이 두 심왕은 고려의 왕위를 노려 군대를 동원하는 등 분란을 빚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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괸디뻔디기
고인돌(괸돌)이 있는 버덩(뻔디기)으로 ‘관바우’ 북쪽 아래에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버덩(뻔디기)’이라는 말은 좀 높고 평평하며 나무는 없이 풀만 우거진 거친 들을 말한다.
복합어(複合語)로 ‘솔버덩’은 소나무가 무성하게 서 있는 좀 높고 평평하며 잡풀이 우거지고 거친 들을 이르는 말이다.
두리봉
‘관바위’ 위쪽 봉우리에 있는 산으로 모양이 둥그렇게 생겼다. ‘분팃삐알’ 위쪽에 있다.
삐 알
분팃삐알
‘북바위’ 남쪽에 있는 산으로 분토(粉土)가 났던 골짜기라고도 전해지고 있는데, 지금은 분토가 없다고 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분토(粉土)란 방앗간에서 쌀 따위를 깨끗하게 찧을 때 섞는 희고 고운 흙가루를 말한다.
그러나 문산리 ‘분팃삐알’에서 출토되는 ‘분토’는 규조토(硅藻土)를 말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삐알’은 ‘비알’이라고도 하는데, 표준어로 ‘산비탈’을 이르는 말이다.
문산리
규조토(硅藻土)는 바다 밑이나 호수(湖水) 밑에 죽은 규조류가 쌓여서 된 퇴적물(堆積物)로 흰색이나 회황색이며 가볍고 무른 흙인데, 보온재, 여과제, 흡착제, 폭발약, 시멘트, 연마재, 단열재, 안료, 니스 따위를 만드는 데 사용한다.
붉은 돌배기
‘형제바우’ 남쪽에 있는 산으로 붉은 점토질(粘土質)의 산이다. ‘뿕은디산’라고도 한다. ‘뿕은디산’의 ‘디’는 ‘만디이’의 약칭으로 ‘산마루’를 말한다. ‘만대이’, ‘만디기’, ‘만대이’라고도 한다.
새총밑
‘너반들’ 밑에 있는 작은 산으로 들 가운데 있다. 옛날에 동네 소를 매던 곳이다.
만디이
순금산(舜琴山)
순금사(舜琴寺)가 있는 산으로 ‘오방만디’ 남쪽에 있다. 순금산(舜琴山)은 해발 122m의 높이로 울산광역시 북구 천곡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일명 ‘순등산(舜登山)’ 또는 ‘북신선암(北神仙巖)’이라고도 한다.
백척(百尺) 층암(層巖)이 하늘에 솟아있고, 그 허리에는 바위가 움푹 들어가서 작은 방과 같은 것을 이루고 있으며, 많은 바위에는 제 나름대로의 이름들이 부여되어 있다.
순금산 만디
떠덕떠덕하다 하여 ‘떠덕바위’, 해가 넘어가는 바위라 하여 ‘해지바위’, 높은 층암(層巖)을 이루고 있다 하여 ‘층디미바위’, 범이 살았다 하여 ‘범굴’, ‘해산(解産)터’와 ‘가위터’가 있다는 ‘삼신 바위’들이 모두 그 위용(偉容)을 자랑하고 있다.
또 이 산에는 고깔같이 생겼다 해서 ‘꼬깔봉’이 있는가 하면 말안장 같다 하여 ‘안장걸이’, 옛날에 배(船)가 하늘에서 내렸다 하여 ‘배내리’가 있다.
북신선암
이렇게 바위로 된 풍경이 뛰어난 점을 들어 그 산의 이름도 중국의 순(舜)임금을 비유하여 순금산(舜琴山)이라 이르게 되었으며, 또한 신선(神仙)들의 놀던 곳이라 하여 ‘북신선암(北神仙巖)’이라고도 한다.
순금산은 관문산(關門山)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관문성이 이 산을 지나고 있기 때문이다.
순금산(舜琴山)은 아득한 옛날에는 하나의 섬이었다는 전설(傳說)이 전해지고도 있다. 그래서 순금산의 한 봉우리를 지금도 ‘배내리’라고 하며, 얼마 전만 해도 여기에서 배의 조각이 나왔다는 말이 있었다.
‘배내리’ 아래 울산 쪽 마을에는 마을 앞에 배를 매었다 하여 ‘속섬’이라 하던 말이 변하여 지금은 ‘속심미’ 또는 ‘속심이’라하며, 이를 다시 한역(漢譯)하여 ‘속도(束島)’라 쓰기도 한다.
순금산에서 내려다 본 ‘속심이’ 마을
오봉산
봉우리가 다섯 개의 산으로 ‘문산’ 동남쪽에 있다.
죽밋산
‘황새골’ 동쪽에 있는 산이다.
오방만디
‘우박’ 뒷산으로 오목하게 몰아 올라가서 ‘오방만디’라고 한다. ‘만디’는 산마루(산꼭대기)를 말한다.
토함산 만디이
용마(龍馬)등
‘호샛골’ 서남쪽에 있는 용(龍)과 말의 형상으로 생긴 등성이를 말한다.
성만리 고개
‘성만리’에서 울산시 울주군 농소면 중산리 이화마을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이 고개는 옛적에 관문성(關門城)의 문이 있었던 곳이다.
성만리 고개
댄배기
‘배너리’ 동쪽에 있는 골짜기로 가팔라 오르기가 힘든(댄) 곳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댄’의 원형은 경상도 사투리 ‘대다’라는 말로 고되거나 힘들다는 의미를 담고 있고, ‘배기’는 언덕배기의 준말이다.
들독거리
‘우박’ 서쪽에 있는 ‘버덩’으로 나무하러다닐 때 쉬던 자리다. 지금은 공단(工團) 조성부지에 들어갔다.
‘버덩’이라는 말은 ‘뻔디기’라고도 하는데, 좀 높고 평평하며 나무는 없이 풀만 우거진 거친 들을 말한다.
버 덩
(이런 버덩이 골프장 적지가 된다)
떡대말랭이
‘우박’ 서쪽에 있는 산으로 우씨(禹氏)들의 묘지가 많아 옛날에 ‘묘사떡’을 많이 갈라(나누어) 주었던 곳이라 붙인 이름이다. ‘말랭이’는 ‘만디이’라고도 하는데, 산마루(산꼭대기)를 말한다.
골작말(고짓골)
‘우박’ 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고짓골’이라고도 한다. 절터가 있고 오래된 우물이 남아 있다.
구아태
‘우박’ 서남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담방골
‘댄배기’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현재 공단(工團)이 들어서 있다.
문산공단 건설현장
마늑골
‘우박’ 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민마늘’이 많이 자생하던 곳이다. 지금은 공단(工團)에 편입되었다. 여기에서 말하는 ‘민마늘’은 ‘산부추’를 말하는데, 산부추는 백합과에 속한 여러해살이 풀로, 비늘줄기는 달걀꼴이며 길이가 2 센티미터 내외이다.
잎은 선형(線形)이고 2~3개가 뿌리에서 나는데, 8~9월에 높이 30~60센티미터의 꽃줄기 끝에 홍자색 꽃이 산형(繖形)으로 달린다.
비늘줄기와 연한 부분은 마늘 냄새가 나는데 식용(食用)한다. 우리나라, 중국, 일본 등지에 분포한다.
민마늘(산부추)
잎이 연할 때 뜯거나 캐서 간장이나 고추장에 박아 장아찌를 만들어 먹기도 하고, 부추처럼 겉절이를 하거나 된장찌개에 넣어도 좋다.
전(煎)을 부칠 때와 같이 부추나 파가 들어가는 곳이면 어디든 넣을 수 있다. 조금만 자라도 잎이 거칠어지므로 연할 때 뜯어 먹는다.
맹건쟁이
‘괜디뻔디기’ 동쪽, 즉 ‘신경더미’ 동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범중골
‘맹건쟁이’ 서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소매골
입구가 좁고 안은 넓은 골짜기로 안에서는 세 골짜기로 갈라진다.
문산공단 배치도
진다골
‘붉은돌배기’ 서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골짜기의 길이가 길다고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재자골
‘우박’ 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처음에 마을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그 일대에서 기와조각이 많이 발견되는데, 지금은 공단(工團)에 편입되었다.
황새골
‘우박’ 서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황사골(黃砂谷)’이라고도 한다.
신겅더미
바위더미가 있는 ‘버덩’으로, ‘들독거리’ 서쪽에 있다. 이곳에 범굴이 있었다고 하며, 여기서 불을 때면 ‘형제바위’에서 연기가 났다고 한다.
버 덩
큰 신경더미
‘신경더미’의 큰 ‘버덩’을 말한다. ‘버덩’은 앞서 말한 대로 좀 높고 평평하며 나무는 없이 풀만 우거진 거친 들을 말한다.
적은 신겅더미
좁은 ‘신겅더미’로 범굴 옆에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적은’이라는 말은 표준어로 ‘작은’이라는 형용사(形容詞)에 해당한다.
경상도지방에서는 ‘작다’라는 표현을 ‘적다’라고 표현하기 때문이다. ‘작은 아버지’를 ‘적은 아버지’라고 부르는 등의 용례가 있다.
탕 관
관바우
‘황새골’ 위쪽에 있는 바위로, 모양이 마치 관(탕관 ; 탕건)처럼 생겼다하여 붙인 이름이다. 탕건(宕巾)은 예전에 벼슬아치가 ‘갓’ 아래 받쳐 쓰던 ‘관(冠)’으로 말총을 잘게 세워서 앞은 낮고 뒤는 높게 하여 턱이 지도록 만든다.
여기에서 말하는 ‘갓’은 조선시대(朝鮮時代)에서 근세(近世)까지 성인이 된 남자가 머리에 쓰던 의관(衣冠)을 말한다. 그리고 ‘바우’는 ‘바위’를 말한다.
관바우
북바우
‘황새골’ 물탕 위에 있는 바위로 두드리면 북소리가 난다고 한다.
처자바우
어떤 총각과 낚시하던 처자(처녀)가 빠져 죽어 ‘처자바우’라고 한다. ‘우박’마을 남쪽으로 지금은 공단부지(工團敷地)에 편입되었다.
본래 이곳은 거랑(개울) 둑이었는데, 물길이 바뀌고 길이 나면서 메워져 낚시를 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탕관바우’에서 서쪽으로 50m 지점에 있다.
문산리
탕관바우
‘탕관(宕冠)’을 쓴 사람이 빠져 죽었다는 전설(傳說)이 있는 바위로 ‘우박’마을 남쪽에 있다. 여기에서의 ‘탕관’은 표준어로 ‘탕건(宕巾)’이라고 하는데, ‘탕건’은 앞서 소개한 대로 예전에 벼슬아치가 ‘갓’ 아래 받쳐 쓰던 관(冠)으로 말총을 잘게 세워서 앞은 낮고, 뒤는 높게 턱이 지도록 만든다.
용바우
‘용바웃들’에 있던 바위로 지금은 없어졌다.
형제바우
바위 두개가 나란히 서 있다고 하여 ‘형제바우’라고 한다. ‘오방만디’ 서쪽에 있다.
문산리
너반들
‘문산(汶山)’ 동쪽에 있는 들이다.
용바웃들
‘용바우’가 있는 들로 ‘우박’ 동남쪽에 있다.
돌기거랑
‘녹동’에서부터 발원하여 석계리를 지나, 문산리(汶山里)에서 ‘동천’으로 합류하는 ‘거랑’으로 돌이 많다고 붙인 이름이다. ‘거랑’은 개울이나 하천을 이르는 말이다.
문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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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동읍 문산(汶山) 지역은 울산-포항 간 산업도로인 7번 국도에 인접해 있고, 울산과 가까운 지리적인 여건 때문에 10여 년 전부터 공장이 들어서기 시작해 지금은 자동차부품공장 100여개가 들어서 있는 신흥 산업단지로 주목받는 마을이 되었다.
그러나 포근하고 인정(人情)이 넘치던 보금자리와 일터였던 산과 들을 죄다 공장에 내어준 채 공장들에 둘러싸인 지금의 마을은 정감(情感)어린 옛 정취(情趣)나 선조들의 숨결이 사라진지 오래다.
문산 공단 안내도
문산리 외동 제1산업단지는 1994년부터 1966년에 걸쳐 조성하여 섬유, 자동차 부품, 운수장비, 목재 및 전기제품 생산공장 등 22개의 공장이 입주하여 가동되고 있다.
그리고 문산리 937 일원에 60만㎡ 규모의 외동 제2산업단지는 2007년 3월 공사를 착공하여 2008년 말에 완공했으며, 섬유, 1차 금속, 기타 기계장비, 자동차 부품업 등 중소제조업체 40여 개소가 입주하고 있다.
또한 문산리 산95-1 일대 32만m²규모로 조성된 문산일반산업단지는 지난 2009년부터 5년간에 걸쳐 완공하여 현대중공업 등 국내 유명기업의 공장과 일본 굴지의 기업들이 자동차부품 제조와 정밀금속 가공, 자동설비, 조선기자재 제조 등의 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문산 공단(외동 제2산업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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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는 문산리와 석계리, 모화리 등 남부 외동읍지역에 대규모 공단이 들어선 배경을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우리들의 고향 경주시에서는 지난 2002년 초 외동읍 모화라와 문산리, 구어리 등 일대 1백16만평을 공업지역으로 지정하여 공단으로 개발할 방침을 세우고, 문산·석계리의 지방산업단지를 비롯하여 구어리 공단 등 모두 8개 지역에 공단을 조성하였다.
문산리
이 일대 공단에 4백여 개의 중소기업을 입주시켜 경주시의 재정난 해소에 일익(一翼)을 담당하도록 하려는 계획인데, 경주시가 이 일대를 공업지역으로 만들기로 한 것은 인근 울산시의 배후공단 역할을 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이곳은 현대자동차·현대조선·현대중공업 등과 인접한 울산시의 관문지역인 데다 교통도 편리해 최적의 기업 입지로 꼽히고 있었다.
앞으로 포항-울산 간의 고속도로(高速道路)가 완공되면, 물류수송의 이점 때문에 공단조성(工團造成)은 그만큼 촉진될 것이고, 물 좋고 인심 좋은 그 시절의 고향마을은 종적(蹤迹)을 감추게 될지 모른다.
포항-울산 고속도로 노선
(우측 상단에서 좌측 하단으로 그어진 점선이 포항-울산고속도로
노선이고, 좌측 중간 제내리에서 냉천리와 구어리를 거쳐 우측하단
폐역되기 전 모화역 쪽으로 그린 점선은 동해남부선 대신 건설하는
포항-울산간 전철노선이다)
특히 이 지역은 울산(蔚山)에 비해 땅값이 저렴(低廉)하여 협력·하청업체의 유치가 쉬워 경주의 도시 생산성도 크게 높아졌고, 지금껏 준농림지역이었던 이 일대가 공업지역으로 바뀌어 건폐율 등 각종 규제가 완화되어 기업들의 입주도 한층 촉진되고 있다.
이에 발맞추어 냉천리(冷泉里)에는 4천5백여 평에 현대중공업이 조선부품 생산공장을 건설했고, 구어리(九魚里)에는 자동차부품업체 공장이 자리를 잡았다.
외동공단 배치도
그리고 경주시는 이 일대를 신흥공업단지(新興工業團地)로 육성한다는 방침아래 광역상수도(廣域上水道) 설치를 비롯하여 입주 희망업체에 대한 지원을 한층 강화해 왔다.
이러한 경주시(慶州市)의 방침에 따라 외동읍 남부지역 일대에는 자동차 부품, 선박부품, 금속가공, 기타기계 및 장비 제조업을 중심으로 클러스터화된 문산일반산업단지, 외동 1·2일반산업단지, 모화일반산업단지, 석계 1·2일반산업단지, 구어리 공단, 냉천농공단지 등이 운집(雲集)해 있다.
문산 공단
이 지역에는 현재 약 450개 업체(業體)가 입주해 가동 중에 있어 산업집적화(産業集積化)화를 통한 시너지효과와 관련기업과의 동반성장이 가능한 뛰어난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다. 경주시의 산업단지 중 외동읍(外東邑) 지역현황을 참고로 게재한다.
경주시 산업단지 현황
단지명 |
소재지 |
조성면적
(㎡) |
유치업종 |
외동 제2 |
외동읍
문산리
600일원 |
141,644 |
섬유, 자동차부품, 운수장비, 목재, 전기 |
석계 |
외동읍
석계리
산184-1
일원 |
145,946 |
운수장비, 자동차부품, 조립금속, 철강, 전기제품, 재생재료가공 처리업 및 플라스틱 제조업 |
외동 제2 |
외동읍
문산리
937일원 |
604,800 |
자동차부품, 선박, 기계장비, 조립금속 철구조물 |
냉천 |
외동읍
냉천리
산69 |
215,449 |
운수장비, 전기, 전자 |
문산 |
외동읍
문산리
산95-1 |
314,924 |
조립금속, 기타운송장비, 기타 기계 및 장비, 자동차 및 트레일러 |
석계2 |
외동읍
석계리
산180-5
일원 |
124,090 |
1차금속, 기타기계 및 장비, 자동차 및 트레일러 |
문산리
외동읍(外東邑) 남부지역 일대는 이러한 공단조성으로 아래 표에서와 같이 도로명주소(道路名住所)까지 거의가 ‘공단길’이 아니면 ‘산단길’, ‘산업단지길’로 변모되어 있다.
개곡공단길, 구어공단1길, 구어공단길, 냉천공단길, 냉천제내공단길, 모화공단길, 문산공단길, 문산공단안길, 석계산업단지길, 외동농공단지길, 제내1공단길, 제내2공단길, 모화산단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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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산리(汶山里) 출신인사로는 오래 전에 고인이 되었지만, 지난 1950년대 초, 한국반공청년단장(韓國反共靑年團長)으로 재임하던 중 제헌(制憲) 국회의원 선거에 입후보했다가 투표 며칠을 앞두고 좌익분자의 총탄에 쓰러진 우용근(禹鎔根) 청년단장이 단연 손꼽히고 있다. 그 시절의 우용근(禹鎔根) 후보자의 사연을 잠시 소개한다.
아시는 바와 같이 제헌국회(制憲國會) 구성을 위한 국회의원(國會議員) 총선거는 1948년 5월 10일 실시되었다.
좌익의 치열한 선거방해 공작과 김구·김규식등 민족주의진영의 선거 불참에도 불구하고 유권자의 95.5%가 투표에 참가하여 제주도(濟州道)를 제외한 남한(南韓) 전역에서 198명의 국회의원이 선출되었다.
그리고 제헌의원(制憲議員) 선거 때 외동읍이 소속된 경상북도 제15선거구(경주군 갑선거구)에서는 당시의 외동면(外東面) 거주 이상희(李相憘)씨등 5명이 입후보하여 경주군 경주읍 동부리 출신 김철(金喆)씨가 당선되었다.
그 시절 국회의원선거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불행했던 일은 위에서 얘기한 대로 문산리(汶山里) 출신 우용근(禹鎔根) 후보가 선거를 며칠 앞두고 좌익분자의 총탄에 맞아 절명하고 말았다.
우용근(禹鎔根) 후보는 1897년 1월 1일, 외동읍 문산리(汶山里)에서 출생하여 당시의 경주읍(慶州邑) 내에서 신문사(新聞社) 지국을 운영하면서, 대한독립촉성국민회에 입당하여 한국반공청년단장을 역임하고 있다가 제헌(制憲) 국회의원 선거 경상북도 제15선거구 경주군 갑구(甲區)에 입후보하였다.
우용근(禹鎔根) 후보가 입후보했던 경상북도 제15선거구(경주군 갑선거구)의 후보자(候補者) 및 득표 수는 아래 표와 같다.
외동읍지역 초대(제헌) 국회의원선거 후보자 및 득표 수
(경상북도 제15선거구 : 경주군 갑선거구)
기호 |
정당명 |
성명
(한자) |
성별 |
나이 |
주 소 |
직업 |
경력 |
득표 수 |
1 |
무소속 |
이상희
(李相憘) |
남 |
36 |
경주군
외동면 |
농업 |
상업
8년 |
9,234 |
2 |
대한
촉성 |
우용근
(禹鎔根) |
남 |
51 |
경주읍
동부리 |
신문사지국장 |
반공
청년단장 |
4,199 |
3 |
대한
촉성 |
이춘중
(李春仲) |
남 |
52 |
강서면
안동리 |
목사 |
상업 |
9,460 |
4 |
무소속 |
최병량
(崔炳亮) |
남 |
51 |
경주읍
황오리 |
공무원 |
경주읍장3년 |
사퇴 |
5 |
대한
촉성 |
김 철
(金 喆) |
남 |
53 |
경주읍
동부리 |
무직 |
신문
기자
교사 |
15,333 |
(‘대한촉성’은 ‘대한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의 약칭이다)
그 시절 국회의원선거 벽보
위의 표에서 후보자 중 붉은 글자로 표시되어 있는 ‘대한촉성’ 우용근(禹鎔根) 후보는 앞에서 소개한 대로 우리 외동향우회(外東鄕友會) 카페의 카페지기이자 외동향우회 전임 회장인 우희곤 님의 조부(祖父)가 되신다.
개표결과 우용근후보는 비록 4,199표밖에 못 얻었지만, 이 득표수는 투표일(投票日)을 며칠 앞두고 ‘적색분자(赤色分子)’들로부터 피살(被殺)을 당한 뒤에 고인(故人)이 된 상태에서 얻은 득표수였다.
그러나 우용근후보의 사망으로 우용근후보를 지지하던 상당수의 유권자들이 우용근후보와 같은 정당(대한촉성) 출신이자 같은 마을 출신인 김철(金喆)후보를 당선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면 우용근후보는 왜 살해되었는가. 소개한 대로 당시 우용근(禹鎔根) 후보는 한국반공청년단장(韓國反共靑年團長)으로 재임 중이었기 때문에 ‘빨갱이’들이 집요하게 암살(暗殺)을 시도하고 있었다.
그 시절 국회의원선거
이러한 상황에서 우용근(禹鎔根) 단장이 국회의원선거에 입후보하자 적색분자들의 암살(暗殺) 시도는 더욱 기승을 부렸고, 우용근 후보는 끝내 선거일 며칠을 앞두고 그들의 희생물(犧牲物)이 되고 말았다.
우용근(禹鎔根) 후보의 주소가 경주읍 동부리(東部里)로 되어 있는 것은 당시 우용근 후보가 운영하던 신문사 지국이 동부리에 소재하고 있었고, 그 신문사지국에 주소를 설정해 놓았기 때문이다.
동부리(東部里)는 지금의 법정동 동부동(東部洞)으로 행정동은 중부동(中部洞)의 관할이다.
제헌국회의원 선거 기념우표
어쨌든 우용근(禹鎔根) 후보는 끝내 문산리(汶山里)에서 좌익분자들에게 피살되기는 했지만, 당시의 경우 수많은 좌익분자(左翼分子)들이 순금산을 비롯한 치술령 연봉(連峰)에 은신하면서 우익인사들을 살해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기 때문에 그나마 치안이 확보된 경주읍내에 주소를 두면서 반공활동(反共活動)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시절의 좌익(左翼)과 우익(右翼)의 대립상황에서 좌익(左翼)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노선과 조직을 부정하고, 타도하려는 반공청년단장(反共靑年團長)을 제거하는 것이 지상과업(至上課業)이었기 때문에 우용근(禹鎔根) 후보는 그들의 일차적 살해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문산리
여기에서 말하는 좌익(左翼)은 급진적 사상이나 노선, 또는 사회주의적이거나 공산주의적(共産主義的)인 경향, 또는 그러한 사상이나 경향을 지닌 인물이나 단체를 말한다.
1792년 프랑스 국민의회에서 의장석(議長席)의 왼쪽(左側)에 급진파(急進派)인 ‘자코뱅당’이 의석을 차지했던 데서 나온 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시쳇말로 ‘빨갱이’를 말한다.
대신 우익(右翼)은 보수주의적(保守主義的) 또는 국수주의적(國粹主義的)인 입장을 취하는 인물이나 단체를 이르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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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지난 1959년에 작고하신 할머니를 통해 어렴풋이 우용근(禹鎔根) 단장의 얘기를 전해 들은바 있다.
필자의 할머니께서는 당시의 외동면 모화리(毛火里) ‘계동’ 출신으로 가끔 친정(親庭)을 다녀오시면서 인근 마을인 문산리(汶山里) 소식을 알아 오시곤 했었다.
그 시절 국회의원선거 벽보
그 당시 필자의 향리 괘릉리(掛陵里) 지역에 전해진 얘기는 “죽은 사람이 5천표나 얻었다”는 우용근(禹鎔根) 후보의 얘기가 국회의원선거(國會議員選擧) 때마다 간헐적으로 거론되곤 했었다.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우용근(禹鎔根) 후보자는 선거기간 중에 피살(被殺)을 당했는데도 유효투표(有效投票) 수 38,226표 중 4,199표나 얻었다. 그분을 기리는 유권자들이 그 분의 사망에 상관없이 기표(記票)를 했기 때문이다.
우용근(禹鎔根) 후보는 당시 원내 제1당이 된 이승만(李承晩)계열의 대한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 소속 후보였고, 기호(記號)는 2번이었다.
당시 임기 2년의 우리나라 제헌국회의원의 선거에서는 무소속이 85석(42.5%)으로 가장 많았고, 그 다음이 이승만(李承晩)계열의 대한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 : 55석 : 27.5%)가 2위를 차지했다.
그 시절 국회의원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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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산리(汶山里)에는 위에서 소개한 우용근(禹鎔根) 전 반공청년단장 외에 상당수의 인사들이 있으나, 필자가 알고 있는 인사는 몇 되지 않는다.
필자가 알고 있는 주요 출향인사(出鄕人士)로는 우병택(전 부산시의회 의장), 우한곤(일흥상사 태창메리야스 대표이사), 우외진(경주시 주민생활지원국장), 우종함(KMCT 대표이사)씨 등이 있다. 제7대 재경 외동향우회(外東鄕友會) 회장을 역임한 우순곤 전임회장도 문산리 ‘우박’출신이다.
문산리
입실초등학교(入室初等學校) 출신으로 부산광역시의회 초대 의장을 역임한 우병택 전 의장은 필자가 수석전문위원(首席專門委員)과 정책실장(政策室長)으로 재직한바 있는 전국시도의장협의회(당시 회장 김찬회 전 체육부장관)의 부회장을 역임한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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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산리(汶山里)에 대해서는 온 동네를 불도저로 밀어 공단(工團)을 만들어 버렸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소개드릴 사연이 여기에서 바닥이 나고 말았다. 이런 저런 핑계로 이쯤에서 파일을 덮는다.
배경음악은 여기에서도 다른 부락의 경우와 같이 이미자(李美子)의 ‘고향의 봄’을 선곡(選曲)하여 음미하고자 한다.
고향의 봄
작사 : 이미자
작곡 : 이미자
편곡 : 박경호
흑난초 곱게 피는 고향에 봄은
강남제비 찾아와서 집을 짓겠지
내 어이 고향 두고 타향을 왔나
그리워서 불러보고 눈물을 짓는
정든 고향 찾아가자 꽃피는 고향
흑난초 눈에 어린 고향에 봄은
강남제비 돌아와서 피었으련만
천리타향 머나먼 곳 내 어이 왔던가.
오늘 밤도 잠 못 들어 밤을 지새는
정든 고향 나는 가리 꽃 피는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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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참으로 많은 역사가 있고 사연이 있는 곳이
현대화로 공장으로 변신하니 아쉬움이 크지만
지난날을 되돌아 보며 더욱 발전하여 외동의 일자리 되어
크니큰 역할을 하리라 믿어지기도 합니다
더구나 전임 우희곤 회장님 조부님에 대한
내력은 더욱 놀라게 하고 애석 하기도하네요
훌륭하신 가문 존경 스럽습니다
좋은 글 감사드리며
혹여 시간이 나시면 본 카폐 공지란을 보시고
꼭 자리를 함께하여 모처럼 담소를 나누는 자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안녕을 비오며...
네....공지사항 보고 왔습니다. 요사이 제가 좀 카페 못 나와서..죄송햇습니다, 그날 참석토록 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벌써 그렇게 되었네요. 가급적이면 뵙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리고 역시 대단하십니다.
형님...요오 형님 ...정말 오래간만입니다. 제가 무심했습니다. 아니 늘 생각하면서도 몸이 따르지 못했습니다. 문산 우박이라면 제가 소개해야되는데....우째 이렇게도 소상하고 정확하고 자세하게 아시는지...마치 우박 문산 모화에 사신분 보다 더 잘 아시고...제가 그기서 오래 살았는데도 몰랐던게 너무 많습니다, 정말 대단하심이 다시 한번 확인해 드립니다.
문산 우박 모화 석계까지 한눈에 보이는 사진...모화 태화방직 있을때 찍은 사진 참 좋으네요..다운 받아볼까 했더니..안되네요..ㅎㅎ 맞습니다. 순금산 가는길에 있었던 뿕은디는 이미 없어진지가 오래됐지요..아까시아 숲이 우거져서 없어졌을때만 해도 운치가 있었는데...
공장이 들어서면 흔적이 없어진거 같습니다. 그 옆이 중밋산 선대 묘소조차 다 없어지고...순금산을 볼라치며...산천은 의구한데...라는 말이 실감이 가지 않고....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맞는거 같고....순금산 정상 배내리를 저는 어태까지 배너리로 알았으니..ㅎㅎ 성만리 넘어 속심이 서당에 다니던 생각이 아련합니다.. 옛날에는 ...제가 들은바로는.....순금산 전체가 우리 산이다 싶이 산이 많았는데....그 성만리 산에다 우용근 할아버지가 낙엽송을 얼마나 싶었던지...지금도 그 낙엽송숲이 건재하고 있으며....아버님께서 생활이 궁핍하여..순금산을 산소 묘지로 수십개로 쪼개어 생활하신거 같고...답답할때는 그 낙엽송을
팔기도 했고...순금사 올라가는 중간쯤의 비탈밭이며 비탈논이며 ....그 골짝논 우리 손으로 개척하고..붙이고 했지요...
우리 할아버지에대해서도 저보다 다 잘 아시니...정말 부끄럽기 짝이 없고...큰형님(우순곤 전임 향우회장)께서는 좀 더 잘 아시는거 같고...큰형님께서는 아직도 생활하기도 궁핍하고 어려우신데...학도병 참전용사들을 찾아서 대한민국 건국회를 만들어 인천에서 총무간사를 맡으셨는지.. 그 회장으로 전에 국정원장 하신분이라고 하는거 같던데... 연평도를 접수하려 한다고 하시던가...ㅎㅎ 좌우지간 80 어르신들의 정렬에 감탄을 하기도 하고..
우병택 아제는 저는 잘 알고 있고 저의 어머님이 참 좋아하시어 제가 어릴적 저희집에 자주 들리기도 했고.. 부산에서 고등학교 다닐적에는 아지매한테가서 받도 얻어먹고 했습니다. 제가 부산을 떠면서....동생 우건곤이고 한진그룹 홍보 담당을 하고...총무상무로 있으면서 조언도 많이 받았다고 하데요....할아버지 계실적에 심부름도 좀 했다고 하던가...우리와 제일 가까운친척입니다.
형님 할머니 계동할머니( 최우개)...제가 메모 해 두고 있는데....그 아버님 최정수 존함도 메모해 두고...알아볼까 마음만 먹으면서...아직 실천 못했습니다. 모화 계동에는 최씨 집안이 여럿 있었고..지금도 그 후손들이 살고 있고...마음만 먹으면 전화 연락처도 가능합니다. 우선 서울 구의동에 사시는 최두식 형님...인천에 사시는거 같은 최정식 형님이 서울에 있으니까...할머니 친정 집안내력 아시려고 하면 가능할 것입니다.
순금산에 있는 순금사가 옛날에는 난두사..난두암이던가...그랬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지금도 순금사 법당 왼쪽 위표 모시고 곳의 최상단에는 저의 어머님 정산댁 영정을 모셔두고 있는 걸로 알고 ...그 초안 스님을...동국대에 공부시킨 곳이...순금사 할머님이시고...그 할머님이 서울에서 돈을 많이 가지고 와서 다 쓸어져 가는 순금사를 재건하셨고..그 이후 건설 전공...ㅎㅎ 죄송....초안스님은 절 짓는데는 대승같기도...ㅎㅎ 그 스님이 순금사를 불국사 못지않게....좀 과장해서 미안....정말 잘 지어 놓고...한번 내려와서 자고 가라고 하는데도...그기 갈 여가가 없어 못가고 있습니다.
나이가 들어감에따라...옛날 생각이 더 많이 나고....우박 울밑들..석계 문산 모화 계통 순금사 성만리 오봉산...속심이까지...옛날 생각들이 이어집니다...선배님의 글을 보다 보면 그기에 함몰 되는거 같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우용근 할아버님의 정확한 내용을 알게되고...선대의 우탁 우현보님까지..옛날 고려 이조 얘기까지..정말 잘 몰랐던거 많이 알고 갑니다. 항아버지가 빨갱이한테 당한 장소가 바로 우박이고....지금 사진에 다리건너 우박 들어서는 길에서 우측으로 들어가서 두번째 길에 입구짜 큰 기왓집이 있었는게..그기가 본가였고....그기에서 주무시면 안된다고 경찰이 했다는데.. 뭣에 씌어셨는지...어미님이 그때
그것을 못말린것을 천추의 한이 되신듯.....할아버님이 만주에 가 계실적에...저의 어머님과 주고 받은 편지가 한뭉치 있었는데...그것을 어쩌다 다 잃어 버렸는데....할아버지는 집안 사람 다 못 믿어도 저의 어머님은 믿어서..모든 집안 살림 결정을 전부 의지 했는거 같았고...그 대신...어머님께는 그 당시로는 최고의 선물을 다 해 주셨는데. ....공작새 박힌 농이며....축음기 재봉철 책상.....뭐 자랑하는거 같아...ㅎㅎ 감사합니다.
신용태 전 회장님 아버님이 저희 할아버지 비서 했는걸로 압니다만...그러면 용태 형님과 저는.....지금쯤 누가 비서해야되는지요..ㅎㅎㅎ 우리 엄마 얘기로는 우리집에서 밥도 많이 드시고...많이 주무시고 했다고 하시던데..밥값이나 제대로 치루셨는지....알아보고 싶구만은...증거가 없어서..ㅎㅎ
우회장님 !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무슨 ‘답글’이 한꺼번에 여남은 개나 올라 이상하다해서 열어봤더니 우회장님께서 아예 쏟아 놓으셨군요.
결론만 말씀 드리면 모두가 너무 과찬이시고, 이 곳 저 곳에서 긁어모은 이야기를 짜깁기 해 놓은 것뿐입니다.
저도 신상철 향우님의 출판기념행사에 가급적 참석하려 합니다만, 선약된 행사가 있어서 어떻게 될지 의문입니다.
그리고 스크랩이 가능하도록 조정해 놓겠습니다.
다른 카페에서 무제한으로 퍼가는 통에 혹시 우리 카페 회원님들의 신상과 관련한 사항이 함께 실려 나갈까 해서 요즘은 스크랩과 복사를 제한하고 있습니다.
네...그런데 형님 ...제발 ....말씀 좀 ....낮추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그래야 제가 편합니다. 뭐로 보나 마나...고향 선배님에게 제가 존대 받는다는게 너무 거북합니다....사진 다운 받고 스크랩도 했고..ㅎㅎ 감사합니다. 그래봤자 써 먹을데가 있는것도 아니면서 그냥 좋아보여서...ㅎㅎ 좌우지간 형님 글은 전부 명작입니다.
@愚空 우희곤(모화리 입실32) 뜻은 잘 이해하고, 또한 고맙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그러나 제 경우는 천성이기도 하고, 청소년기부터 체질화된 습성이라고 봐 줘야 할 것 같습니다.
무슨 범절이나, 공의에 입각한 습성도 아니고 그냥 버릇이 되었다고 보면 되고, 이제 와서 이 버릇을 고쳐보자니 너무 골수에 착근된 상태라 고치거나 바꾸기가 여의치 않습니다.
그래서 평생동안 공직사회에 매달려 있으면서도 부하직원이나 일용직 여직원에게까지 하대 한 번 못해 봤습니다.
따라서 우회장님, 신회장님을 비롯한 향우회 회원 여러분께서는 선배의 버릇을 굳이 고치려 하지 마시고, 그냥 넘겨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황보 선배님 한번 뵙고 싶었는데, 아쉽게 되었네요.
선배님 저는 틈틈이 조금식 읽느라고 답글이 늦엇습니다, 하도 상세하고 장문이라 조금읽다보면 "좀안도와주고 방꾸직에서 머하능교"마눌이 호통을 치사서..암튼 토백이들도 모르고 있는 역사를 선배님덕분에 많은걸 알앗습니다,저히 아버님의저수지공사와 도로,전기 등 이야기가 있는데(경주수리지역사에 나오 이다는데) 제가 자료를 안만들어 놔서 나중에 동생들 시켜서 준비 하도록 하겟습니다, 정말 대단한 자료들을 너무너무 감사 합니다, 항상 건안 하시길 빕니다,
신회장님, 오랫만입니다. 역시 과찬의 말씀입니다. 오히려 기사를 너무 길게 써서 여러 회원님들을 성가시게 하는 것 같아 송구스럽습니다. 위에서 말씀 드린대로 신상철 회원님 출판기념회에 가게 되면 뵙도록 하겠습니다.
일전에 황보선배님 상경해서....부산으로 잠깐 이주해 계시는듯....체신고 후배함께 막걸리 한잔 하면서 요오 민철 용태 형님이며 여러 향우님들 얘기도 많이 했습니다. 지금 크루즈 여행 가셨고...저보고 같이 가자고 하더구만은....저는 배타고 뱅기 타고 놀러다니지는 않는다고 했더니...기가 차서....어안이 벙벙 하셨겠지요...ㅎㅎ 제가 좀 괴상한 성격이라....그렇습니다. 볼일이 있던가 ....임무가 부여된것이 아니고...혼자 놀기삼아 뱅기 타고 배타는것은 옛날부터 부담이 되어 잘 다니지 못합니다. ㅎㅎ
그날 같이 못해서 무척 아쉬웟는데,...우회장이 대접하셧다니 송구 스럽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