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년경진 ○ 선생 52세
○ 정월 계해(29일)에 부인 서씨(徐氏)가 졸거하였다. 안산 추곡에 권조(權厝 임시로 장사함)하였다.
○ 경자에 삭녕 군수(朔寧郡守)에 임명되었는데 사임하였다.
○ 10월에 여주(驪州)에 갔다. 자형 민 판서(判書) 진주(鎭周)의 장례식에 회장(會葬)하였고 광주군을 지평(砥平)에 옮겨서 장사하였다
27년신사 ○ 선생 53세
○ 8월 기사(15일) ○ 인현왕후(仁顯王后)가 승하(昇遐)하여 분곡(奔哭)하였다. 대궐 밖에 달려가 산반(散班)에서 곡하였다.
28년임오 ○ 선생 54세
○ 12월 병오(30일)에 사도시 주부(司導寺主簿)에 임명되었다.
29년계미 ○ 선생 55세
○ 정월에 충정공의 시호가 내린 데 대하여 사은(謝恩)하였고 얼마 후에 주부직(主簿職)을 사임하였다.
30년갑신
31년을유 ○ 선생 57세
○ 2월 계사(29일)에 종부시 주부(宗簿寺主簿)에 임명되었는데 사임하였다.
32년병술 ○ 선생 58세
○ 봄에 판부사(判府事) 윤공(尹公) 지완(趾完)이 선생을 조정에 추천하였다. 이때 조정에서는 별도로 인재를 추천하라는 명령이 있자 윤공(尹公)이 소를 올려 선생을 천거하여 대략 이르기를, “전의 도사(都事) 정모(鄭某)로 말하면 명문(名門)의 집에 태어나서 일찍이 과거 보는 일을 버리고 글을 읽고 뜻을 구하였으므로 명성이 크게 드러나서 일찍이 천섬(薦剡)에 들었사온데 한 번 관리에 임용[奉撽]되었으나 후에는 벼슬에 뜻을 끊고 초야에 숨어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인품을 논한다면 금옥(金玉) 같은 군자(君子)이오며 재주로 말한다면 고금(古今)을 넓게 통달하였으므로 신은 항시 마음속으로 기뻐하고 정성으로 감복되었던 바입니다. 이 나라의 큰일을 잘 꾸려 나갈 자는 반드시 이 사람일 것으로 생각되오니, 진실로 원하옵건대, 조정에서는 선비를 수용하는 상례(常例)만을 따르지 마시옵고 먼저 관찰사[方岳]의 직무를 주어서 시험해 보시었다가 그로 하여금 조정의 일[廟謨]을 돕게 하오면 세상을 건질 만한 좋은 그릇이며 나라를 편안케 할 어진 보필(輔弼)이 될 만하옵니다.” 하였다. 윤공의 호는 동산(東山), 벼슬은 우의정, 시호는 충정(忠正)이었다.
○ 7월 정묘(12일)에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에 임명되었는데 세 번 상소를 올려서 체직되었다. 소는 문집에 보이나 비(批)는 빠졌다.
33년정해 ○ 선생 59세
○ 10월 무술(20일)에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임명되었는데 사임하였다.
34년무자 ○ 선생 60세
○ 봄에 지포(芝浦) 박공(朴公)에게 곡하였다. 이름은 심(鐔) 자는 대숙(大叔) 천관으로 자의(諮議)를 지냈는데 선생이 추곡에 거주하자 박공(朴公)도 또한 지포에 와서 살았다. 지포는 같은 고을 땅이다. 자주 강회(講會)가 있어 우의(友誼)가 심히 돈독하였다. 박공이 서거하자 시마복을 입고 곡하였으며 제문을 지었는데 문집에 보인다.
○ 3월 을미( 일)에 장령(掌令)에 임명되었으나 세 번 소를 올려서 체직되었다. 소는 문집에 보이고 비는 빠졌다.
○ 4월에 죽산(竹山)에 갔다. 외조부 호암공(浩庵公)을 개장하는데 개장(改葬)하였다.
○ 7월 을유(11일)에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에 임명되었는데 세 번 소를 올려서 체직되었다. 1, 2의 소는 본문에 보이나 3소는 빠졌으며 비도 모두 빠졌다.
35년기축 ○ 선생 61세
○ 2월에 요사(夭死)한 장손(長孫)을 곡하였다.
○ 7월 을미(26일)에 세자익위사 익위(世子翊衛司翊衛)에 임명되었다.
○ 8월에 강화(江華) 하곡(霞谷)으로 옮겨서 살았다. 선생은 장손이 요사하는 변을 당하자 몹시 슬퍼하였으며 따라서 선묘(先墓) 가까운 곳에 살고자 하여 이곳으로 이사하였다.
○ 선생은 깊이 외물(外物)에 힘쓰거나 명예를 숭상하는 것을 경계하였으며 학도(學徒)들이 배우고자 하여 찾아오는 것도 기쁘게 여기지 아니하였던 것이다. 일찍이 서울에 머물고 있을 때에는 문하(門下)에 배우기를 청하는 자가 약간 있었는데 그 뒤 안산(安山)에서 섬중[島中]으로 옮겨 살게 된 뒤로는 거의 세상 사람과 상종이 끊겼고 비록 더러 사모(思慕)하여 종유(從遊)하려는 이가 있다 하더라도 또한 왕래하기가 험악하여 쉽사리 오갈 수가 없었으므로 선생의 문장(文墻)에 출입하는 이는 더욱 적었던 것이다. 선생의 뜻은 다만 스승의 도를 자처(自處)하고자 아니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말세(末世)에는, 쉽게 높아지고 명실(名實)은 분변하기가 어렵게 되니 세도(世道)의 폐단을 또한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던 때문이었다.
○ 9월 신사(14일)에 집의(執義)로 천직(遷職)되었는데 두 번 소를 올려서 사퇴하였다. 소는 모두 문집에 보인다.
○ 10월 계묘(6일)에 통정대부(通政大夫)호조 참의(戶曹參議)에 발탁되어 임명되었는데 세 번 소를 올려서 사퇴하였으나 허락되지 아니하였다. 이때 대신들이 모두 임금께 아뢰었고 또한 윤공의 천거한 글[薦章]을 인용하여 발탁해서 승진시키기를 청했던 까닭에 이 명령이 있었다. 선생의 상소문에 대략 이르기를, “신의 집안은 대대로 은총을 받음이 가장 무거웠으므로 참으로 옛사람과 같이 나라에 생명을 바칠 의리가 있습니다만 재분(才分)이 둔하고 용렬하여 여러 번 과거에도 성공하지 못하였는데 천장(薦章)까지 있게 된 것은 더욱이 부끄럽고 송구한 바이옵니다. 더욱이 또한 외람되게 낭서(郞署)의 명을 받았고 시골[下邑]에서 직무를 받들었는데 비록 사의(私義)의 만 분의 일도 보답할 수 없었다 하더라도 천한 분수로서는 이미 과분했던 것입니다. 재주도 없는 것이 게다가 병이 많아서 직책을 감당하지 못하겠사옵기에 스스로 달게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러하온데, 벼슬에 뜻을 끊고 초야에 숨어서 살겠다고 하온 것은 신이 벼슬을 않음으로써 고고(孤高)하다고 생각하고 물러남으로써 뒤에 벼슬에 나아가는 기연으로 삼는 것은 옛사람도 두려워했던 바이옵니다.”라고 하였다. 계속 세 번 소를 올렸는데 상께서는 우악(優渥)한 비지(批旨)를 내리시고 모두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소는 모두 문집에 보인다.
○ 상께서 몸이 미령(未寧)하시어 강교(江郊)에 나아가서 문안을 드렸다.
36년경인 ○ 선생 62세
○ 2월에 다시 소를 올려 사퇴하였다. 소는 문집에 보이며 비는 빠졌다.
○ 9월 경자(9일)에 강원도 관찰사(觀察使)에 임명되었는데 세 번 상소하여 사퇴하였으나 허락되지 아니하다가 얼마 후에 병으로 체직되었다. 소는 문집에 보인다.
37년신묘 ○ 선생 63세
○ 7월 무자(1일)에 회양도호부사(准陽都護府使)에 임명되었다. 8월에 부임하였다. 왕명이 있었는데도 곧 사양만 하는 것이 분수가 아니므로 애써 부임하였던 것이다.
○ 9월에 금강산(金剛山)을 유람(遊覽)하였다.
○ 10월에 벼슬을 버리고 돌아왔다. 선생이 정사(政事)를 한 지 3개월 만에 교화(敎化)가 크게 행하여졌다. 때마침 흉년(凶年)이었으므로 편의에 따라서 골고루 구제하고 유망민(流亡民)을 구출하여 모두 회복시켰는데 안렴사(按廉使)는 그 공적을 높이 평가하여 이르기를, “청백(淸白)한 것이 옥호(玉壺)와 같고 은혜는 봄바람과 흡사하다.”고 하였다. 벼슬을 버리고 돌아올 때에는 술안주를 가지고 따라 나와 전송하는 이가 수십 리 길에 끊이지 않았으며 철비(鐵碑)을 세워서 내내 추모하였다.
○ 심경집의(心經集義)를 편찬하였다. 일찍이 《심경부주(心經附註 정황돈(程篁墩)의 저작)》의 번무(繁茂)함을 병통으로 여겼으므로 이 편찬이 있었다.
38년임진
39년계사
40년갑오 ○ 선생 66세
○ 《정문유훈(程門遺訓)》을 편찬하였고 《정성서(定性書)》를 주해(註解)하였다.선생은 평소 정명도(程明道)의 말을 외우고 음미하였으므로 그 말을 채취(採取)하여 문목(門目)을 나누어 세 편의 책으로 만들고 《정문유훈》이라 이름하였다. 또한 《정성서(定性書)》는 공부하는 사람에게 절실하되 강론하는 자가 많이 그 취지를 잃으므로 드디어 주해(註解)한 것이다. 하곡은 대체로 정백자(程伯子)를 흠모하고 좋아하기를 깊게 했던 까닭에 그의 언동(言動) 사이에는 저절로 많이 부합되었고 마음에 즐기고 마음 갖기를 높고 밝게 하였으며 문자(文字)의 밖에서 초월하여 깊이 들어갔으니[深造] 스스로 얻으려던 지취와 신묘한 도리와 정미한 의(義)의 발단이 자연히 남몰래 모이고 묵묵히 이루어졌으며 힘쓰기를 오래하여 더욱 드러내려는 징험이 있었다. 그러므로 만년(晚年)에는 기상(氣象)이 화수(和粹)하고 고랑(高朗)하였으며 표리(表裏)가 명백하였으니 이는 명도에게서 얻어서 그러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문자에 있어서도 또한 같아서 수미(首尾)와 체단(體段)에는 법규(法規)를 쓰지 않아도 서독(書讀)과 장소(章疏) 따위가 마음 가는 대로 쏟아져 나왔는데 다만 그 본뜻을 볼 수 있게 하였을 뿐인 까닭에서였다. 사람들이 혹 그의 잘잘못을 허물하였으나 오직 명곡(明谷) 최공(崔公)만은 깊이 칭찬을 가(加)하였으니 대체로 그가 한 언어(言語)에는 저절로 본(本末)과 곡절이 있었던 것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41년을미
42년병신 ○ 선생 68세
○ 명곡(明谷) 최공(崔公)에게 곡하였다. 이름은 석정(錫鼎) 자는 여화(汝和), 벼슬은 영의정 시호는 문충공(文忠公)이었다. 최공은 선생과 함께 죽마의 교분[竹馬交]을 맺고 뜻이 합치되어 서로 허락[契許]하기를 매우 돈독(敦篤)히 하였는데 최공은 이르기를, “내가 여러 공(公)들과 함께 강설(講說)할 적에는 항상 신을 신고 그 위에서 긁는 것[隔搔] 같았는데 사앙(士仰)의 한마디 말만 듣고서도 나도 모르게 구름이 흩어지고 안개가 거쳤으며 매양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면 반드시 글을 보내어 묻고 의논하여 그의 답변을 얻었는데, 곧 이르기를, “이는 이른바 내성(內聖)과 외왕(外王)의 도(道)이며 명체(明體)와 적용(適用)의 학문이다.” 하였다. 부음(訃音)이 오자 위(位)를 만들어 곡(哭)하였다.
43년정유 ○ 선생 69세
○ 3월 무오(9일)에 상께서 온양(溫陽)에 납시게 되자 강상(江上)에 나아가서 경건하게 전송하였다. 상께서 온천에 순행하시려 하매 3월(본문 2월은 3월의 잘못임) 을묘(6일)에 선생은 강상(江上)에 이르러 잠시 잠실촌(蠶室村)에 머물렀다가 무오 9일에 전송하였으며, 경신(5일)에는 동호(銅湖)에 가서 귀천(龜川) 이공(李公) 세필(世弼)을 방문하였고, 임술(7일)에는 용인(龍仁)으로 가서 선조(先祖) 문충공(文忠公)의 묘(墓)에 참배하였으며, 이어 산 아래에 머물면서 일가(一家)인 정 산음(鄭山陰) 찬휘(纘輝) 등 여러 사람들과 함께 서원(書院)을 옮겨 세우고 제의(祭儀)와 족보(族譜)를 수정(修整)하였으며, 갑신(甲申) 그믐날에 다시 잠실(蠶室)로 돌아왔다.
○ 4월 정해(3일)에 어가(御駕)가 돌아옴에 전송하였다. 기축(5일)에 고양(高陽)으로 가서 백부(伯父) 찬성공(贊成公)의 묘소에 참배하였으며 하곡촌(霞谷村)에 악질(惡疾)이 전염하였으므로 계속 산소 아래에서 머물렀다.
○ 5월 병진(3일)에 서울 집에 들어왔다가 기묘(26일)에 서강(西江)에 나아가 있었다. 선생은 나라에 큰 일이 있지 않으면 일찍이 서울에 들어오지 않았다. 비록 서울에 들어왔더라도 언제나 여관[旅舍]에 머물렀는데 이때는 학질(虐疾) 때문에 서울 집에 있었으나 병이 나은 후에는 곧 강사(江舍)를 빌어서 나가 있었다고 한다.
○ 7월 을묘(3일)에는 집으로 돌아왔다.
44년무술 ○ 선생 70세
○ 2월에 단의빈(端懿嬪)이 서거하자 시사복(視事服)과 연거복(燕居服)에 대하여 의논하였다. 시사복과 연거복의 복제(服制)가 다른가의 여부를 가지고 예조 좌랑(禮曹佐郞)이 와서 의논을 모았는데 선생은 대답하기를, “옛날 인군(人君)의 예(禮)에는 수시로 길흉(吉凶)에 따라서 각각 그 복제를 다르게 하였으니 주(周) 나라 강왕(康王)이 면류관을 벗고 상복(喪服)을 입었던 것과 같은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였다. 의대(議對)는 문집에 상세하다.
○ 10월에 단의빈에 대한 복제에 대하여 의논하였다. 대전(大殿)께서는 마땅히 빈궁(嬪宮)을 위하여 기년복(期年服)과 대공복(大功服)을 입어야 한다는 것과 동궁(東宮)은 마땅히 기년복을 입는데 장기(杖期), 부장기(不杖期)를 입는 것을 가지고 예조 좌랑(禮曹佐郞)이 나와서 수의(收議)하였는데, 선생은 대답하기를, “큰 자부(子婦)에 대하여 기년복을 입는 것은 개원(開元 당 나라의 현종의 연호) 이래로 이미 정해진 제도가 되었으며 우리나라도 이를 따랐던 것인데 임금의 세자나 대부(大夫)의 맏아들이 아내를 위하여 부장기(不杖期)의 복을 입는 것은 고례(古禮)에도 명문(明文)이 있사오니 청컨대 대전(大殿)께서는 후왕(後王)의 제도를 따라서 기년복(朞年服)을 입으시고 동궁께서는압강(壓降)의 의(義)를 좇아서 부장기(不杖期) 의를 입으십시오.”라고 하였다. 의대는 문집에 상세하다.
45년기해 ○ 선생 71세
○ 2월 병진(13일)에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진(昇進)되었다. 이때 상께서는 태조(太祖)의 고사(故事)를 따라서 기사(耆社)에 들게 하셨는데 사대부(士大夫)는 71세 이상이면 모두 은전(恩典)을 베푸는 까닭에 이번 명령이 있었다.
○ 8월 기사(29일)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제수되었다.
○ 10월에 가묘(家廟)가 신계(新溪)로 갔었는데 배종하여 경상(境上)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7월에 부평군(富平君)이 신계 현령(新溪縣令)에 임명되었다. 이에 이르러 가묘를 모시고 선생이 배종하여 승천포(昇天浦)까지 갔다가 배례하고 돌아왔다.
○ 11월 경신(9일)에는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에 임명되었는데 소를 올려 사퇴하였으나 허락되지 아니하였다. 소는 문집에 보이며 비(批)는 빠졌다.
46년경자 ○ 선생 72세
○ 12월에 체직(遞職)되었다.
○ 정월에 상께서 미령(未寧)하시자 임오(3일)에 서울에 들어와 문안을 드리고 곧 통진(通津)으로 물러나갔다가 신묘(12일)에 돌아왔다.
○ 3월 갑술(7일)에 통진에 나가서 문안을 드리고 병술(19일)에 돌아왔다.
○ 4월 임술(26일)에 서울에 들어가 문안을 드리고 갑자(28일)에는 통진으로 물러나와 있었다.
○ 6월 무술(3일)에 서울에 들렀다가 예궐(詣闕)하여 문안을 드렸는데 계묘(8일)에는 상께서 승하(昇遐)하셨고 무신(13일)에 성복(成服)을 하였으며 이튿날에 돌아왔다. 계묘(8일)에 외반(外班)에 나가서 조곡(吊哭)하였고 기유(14일)에는 돌아왔다.
○ 7월 정묘(2일)에는 조석(朝夕) 상식(上食)에 곡(哭)할 때 지팡이를 잡는 의식[朝晡哭臨受杖儀]에 대하여 의논을 모았는데 사양하고 대답하지 아니하였다. 예조 좌랑(禮曹佐郞)이 나왔다.
○ 경인(25일)에 군신(群臣)들의 연거대(燕居帶)에 대한 의논에 대답[對]하였다. 조정 관원[朝官]들의 연거 때의 착용할 띠와 유생들이 어떤 띠를 착용해야 할 것인가를 예조 좌랑이 나와서 의견을 모았는데 선생은 대답하기를 모두 같이 포대(布帶)를 착용하여야 한다고 대답하였다. 의논은 문집에 상세하다.
○ 8월 정미(13일)에 대한 의논[新授職人追服當否議]에 대답하였다. 예조 좌랑이 와서 의논을 모았는데 선생은 상(喪)을 들은 것과는 다르기 때문에 추복(追服)이 부당하다고 대답하였다. 의논은 문집에 자세하다.
○ 10월 갑인(21일)에 명릉(明陵)에 나아가서, 하관하는[下玄宮] 곡반(哭班)에 참례하였다. 정미(14일)에 서울에 들어왔다. 계축(20일)에 발인(發靷)하였는데 상여를 길에서 맞아 곡하였으며 능소(陵所)까지 따라가서 갑인(21일)에 현궁의 하관식(下棺式)의 곡반에 참례(參禮)하고 을묘(22일)에 돌아왔다.
○ 11월 병인(3일)에 대행(大行 돌아가신 왕을 말함) 졸곡(卒哭)에 부(府)에 나아가 망곡(望哭)하였다.
○ 《중용설(中庸說)》을 저작(著作)하였다.
첫댓글 어제와 오늘 2개씩 4개의 연보와 행장을
잘 받들어 읽었습니다.
앞으로도 몇번 더 정독
할까 합니다.
역시학자시니 물론 박학다식하지만 투철
한 사명감과 역사의식
은 타 학자의 추종을
불허 하시는군요.
문암같은 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해가 뜨고
달이 뜨며 밤하늘 별이
빛나는줄 알겠나이다.
장문의 글을 읽으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저에 대한 칭찬의 댓글에 감사드리며,
2019년 전국백일장에서 수상하신 사진도
잘봤습니다.
2023년 11월 19일(일) 문 암 드 림.
고맙습니다.
조금전 올린 사진은
제가 상을 타는게 아
니라,
광주 광역시의 후원
으로 고봉(조선 선조대
대유학자 기대승)선생
추모 백일장에서 장원
하신 용인의 박청자시
인(41년생.보건직공무원출신으로 부부가
문학에 정진하여 80여
권의 시집과 수필집을
펴낸바 있음)에 대해
제가 문학상을 드리는
사진입니다.
감색옷 입은게 접니다.
제가 잠시 착오를 일으킨 점 깊은 양해를 구합니다.
아울러 정확한 사실을 알려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2023년 11월 19일(일) 문 암 드 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