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보이스 – 바닷가의 추억 키보이스 - 멀어져간 사랑 키보이스 – 해변으로 가요 키보이스 – 정든 배 키보이스 - 미소 키보이스 – 그 사람 키보이스 - 님 떠나갈 시간 키보이스 - 파도 해변으로 가요 [곡 해설]
여름철에 자주 애창되는 불후의 대중가요 ‘해변으로 가요’는 언제 들어도 시원하게 몸과 마음을 적셔주는 청량음료와 같은 노래입니다. 파도가 가까이서 밀려오고 달콤한 사랑을 나누는 해변의 연인들 속삭임이 마치 곁에서 들려오는듯한 노래이다 보니 여름만 되면 남녀노소 모두가 즐겨 부르던 노래였습니다. 노랫말에서처럼 백사장에 사랑의 발자국을 남기며 다정하게 손을 잡고 걷는 모습도 자연스럽게 그려지는 그런 노래였습니다. 4/4박자, 고고 풍의 이 노래는 남성그룹 키보이스(Key Boys)가 불러 크게 히트했던 노래였습니다. 당시 미8군 무대에서 Rock & Key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던 밴드의 다른 이름이 바로 Key Boys였다고 합니다. 인천에서 중학교를 다닐 때부터 미군 하사관에게 기타를 배우고 일찌감치 밴드에서 연주하면서 기타신동으로 소문이 나 있었던 대학 새내기가 김홍탁이었고, 오리지널 멤버는 윤항기와 차중락, 차도균과 옥상빈이었다고 합니다. ‘해변으로 가요’ 노래는 대중가요 악보 집엔 김희갑 작사, 작곡으로 돼있지만 내막을 알고 보면 사실이 아니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 노래는 원래 일본 곡이었는데 나중에 우리말 가사로 번역된 것이었다고 합니다. 이 노래가 우리나라에 들어와 불리게 된 사연은 4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1968년 서울시민회관(현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아시아 그룹사운드 페스티벌에서였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Key Boys와 미국, 일본, 인도네시아 등지에서 온 그룹사운드 팀들이 닷새 동안 공연을 펼쳤다고 하는데 이들 가운데는 재일교포 이철(아베 데스)씨를 포함한 8명의 일본그룹사운드 ‘The Astro Jet’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무렵 한국에선 일본노래를 부를 수 없게 돼 있었으므로 ‘The Astro Jet’의 리더 이 씨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이 작사, 작곡한 ‘하마베에이꼬’(浜邊へ 行こう)를 국제관계 평론가인 형(이건)에게 한국말로 가사번역을 맡겼다고 합니다. 이건 씨는 이를 다시 친분 있는 소설가 이호철씨에게 가사번역을 부탁하여 비로소 시민회관에서 공연을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 과정들을 거쳐 불린 노래가 바로 ‘별이 쏟아지는 해변으로 가요~’로 시작하는 ‘해변으로 가요’였다고 합니다. 인기절정의 남성보컬그룹 Key Boys가 ‘해변으로 가요’를 부른 건 그 이듬해인 1969년부터였다고 합니다. 시민회관공연이 끝난 뒤 Key Boys가 이철 씨에게 그 노래를 부르게 해달라고 요청을 하였고, 이 씨가 불러도 좋다고 허락했던 것입니다. 한국음악저작권협회 등록 전에 이 노래의 작사, 작곡자와 관련된 기록을 보면 여러 사람들 이름이 나온다고 합니다. 1970년 유니버설레코드사가 제작한 앨범 ‘보칼 NO.1 키보이스 특선 2집’엔 작사, 작곡자 표시 없이 ‘키보이스 가요그룹’의 노래라고만 표기돼 있으며, 1976년 유니버설 레코드사에서 제작된 ‘키보이스 골드’란 레코드 판엔 키보이스 작사, 작곡으로 표기돼 있다고 합니다. 그러던 게 1983년 4월 서울음반에서 만든 ‘키보이스 골드’ 레코드 판엔 김희갑 작사, 작곡으로 나와 있다고도 하고. 또 Key Boys 2진인 장용 씨가 작사, 작곡자로 돼 있기도 하였답니다. 하지만 이 노래 원작자 이철 씨가 소송을 통해 저작권을 되찾으면서 일본노래란 사실이 밝혀졌다고 하는데요. 이 씨가 ‘해변으로 가요’가 다른 사람 이름으로 돼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건 1980년대였다고 합니다. 그는 당시는 한일 음악교류가 거의 없는데다 저작권 협정마저 없어 방치해 둘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무려 37년이 지난 후인 2007년에야 한국의 법정은 원래의 주인을 인정하였다고 하니, 남의 노래를 마치 자기 노래인양 훔친 노래가 한 시대를 대표하는 국민가요가 될 수 있었던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었으니 참으로 부끄러운 사례가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윤항기 김홍탁 옥성빈 차도균 차중락 이 다섯명의 더벅머리 총각으로 구성된 '키보이스'는 성공한 그룹사운드의 원조이다. 이들은 그 후 국내에서 폭발적으로 이뤄졌던 음악 그룹의 세포분열에서 핵 역할을 했다. 63년에 결성된 '키보이스'는 초기에는 주로 미8군 무대에서 연주활동을 했다. “차중락이 엘비스 프레슬리를 모창했습니다. 윤항기는 검은 안경을 끼고 더듬거리며 무대에 올라가 맹인가수 레이 찰스의 「I CAN`T STOP LOVING YOU」를 불렀는데 찌그러진 트럼펫을 들고 루이 암스트롱의 흉내도 곧잘 내 대단한 인기였어요]“ 기타를 쳤던 김홍탁의 회고이다. 2년 뒤 '키 보이스'는 작곡가 김영광 씨에게 곡을 받아 첫 음반을 발표했다. 그때부터 꾸준한 인기를 누리고 있는 '정든 배'는 이 음반에 수록된 노래이다. 정감어린 보컬의 주인공은 차중락 차도균. 사촌형제인 둘은 나중에 솔로로도 인기를 얻었다. 차중락은 그가 번안해 불러 히트한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처럼 요절했다. '키 보이스'는 67년 차도균 차중락이 '가이스 앤 덜스'를 만들면서 세포분열을 시작한다. 장영 박명수 조영조 한웅 등이 제2의 '키 보이스'로 활동했고 윤항기는 군에서 제대한 후 '키 브라더스'를 만들었다. '키보이스'는 지금도 여름마다 불리는 '해변으로 가요', '바닷가의 추억'을 히트시켰고 '키 브라더스'는 '장미빛 스카프', '별이 빛나는 밤에'로 인기를 얻었다. 키보이스(KeyBoys)
키보이스와 에드훠 중 누가 최초의 국내 록그룹일까? 탄생 시기만 놓고 보자면 1960년대 초 태동한 미8군 전속 캄보밴드 코끼리브라더스가 최초의 록그룹이다. 그러나 록그룹 형태로 미8군 무대를 벗어나 일반대중에게 선보인 것은 키보이스와 시기가 거의 비슷하다. 에드훠는 이들보다 늦다. 문제는 음반 발표 여부. 신중현의 에드훠가 64년 발표한 창작앨범이 현재로서는 가장 앞선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코끼리브라더스의 음반은 소문만 무성할 뿐 존재여부가 확인된 적이 없다. 키보이스 역시 64년에 발표했다고 주장하지만 확인할 만한 자료가 불명확한 상태. ‘가수는 음반으로 이야기해야 한다'는 일반적 상식 때문에 에드훠가 최초의 록그룹으로 꼽히고 있다. 하지만 68년 트윈폴리오보다 몇 달 늦게 대중들 앞에 서고 6년이나 늦은 74년에야 데뷔음반을 발표한 한대수는 ‘한국모던포크의 창시자’로 공식화되어 있다. 창작곡 발표 여부가 정서적으로 이 모든 것을 상위한다고 보면 문제는 명확해 진다. 최고의 대중적 인기를 끌었던 1기 키보이스의 음악적 한계는 창작곡 부재였다. 거의 모든 레퍼토리가 번안곡 위주였고 데뷔곡이라 할 만한 김영광 작사ㆍ곡의 '정든 배는 떠난다'도 당시 일본곡 표절문제로 구설수에 올랐던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 그렇지만 키보이스가 국내그룹들의 최대 발원지였음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70년대 대부분의 중요 록그룹들은 키보이스로부터 가지에 가지를 치며 ‘개체수’를 늘렸다. “60년쯤 군에서 탈영했을 때 이미 그룹 활동을 했다. 61년 5ㆍ16때 자수하여 군복무를 마친 63년부터는 키보이스를 결성해 본격적인 활동을 했다”고 윤항기는 회고한다. ‘락앤키ROCK&KEY)’라는 그룹명은 미8군 무대에서만 사용했던 또 다른 이름. 유명한 가수였던 송달엽의 부인(작고ㆍ이름 미상)이 자신의 딸인 송영란에게 ‘락(rock)’이란 이름을 붙여 보컬을 맡기고, 윤항기 등 세션맨에게 ‘키(key)’라는 애칭을 주고 연주를 시켰다. 송달엽의 부인은 매니저 역할을 했다. 송영란의 미국이민 이후 여성보컬은 수차례 교체가 되는데 3인조 코리안키튼스의 멤버였던 김현아가 마지막 여성보컬로 기억되고 있다. ‘락앤키’는 하우스밴드로서 무수한 미8군 가수들의 세션도 맡았다. 봄비로 유명한 박인수는 65년쯤 ‘락앤키’의 객원가수로 데뷔를 하였고 차중락, 쟈니리, 남석훈, 서정길, 김선, 점블씨스터즈는 ‘그 밤과 같이’(신세기, 가12145, 연도 미상) 음반도 함께 발표했을 정도. 키보이스는 일반대중들 앞에서 공연할 때 사용했던 그룹 이름이다. 솔로독립 이후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 ‘사랑의 종말’로 최고인기 가수가 되었던 미남가수 차중락이 리드보컬을 맡았다. 경희대 입학 예정이었던 기타 신동 김홍탁이 가세해 새롭게 구성된 오리지널 1기의 라인업은 윤항기(드럼), 차도균(베이스), 김홍탁(리드기타), 옥성빈(키보드), 차중락(보컬)의 5인조. 63년 종로의 유명 음악감상실 ‘드씨네’는 비틀즈가 캐번 클럽에서 그랬듯 일반대중들 앞에서 국내 최초로 록사운드를 연주했던 키보이스의 데뷔공간이었다. “이종환이 사회를 맡고 있던 드씨네 DJ박스 옆에 임시로 만든 간이무대에서 비틀즈와 비치 보이스 곡들을 주로 연주했다”고 리드기타 김홍탁은 기억한다. 음악감상실의 간이무대를 시작으로 한 이들의 인기는 65년께는 필리핀 그룹 선스팟(Sunspot)과 협연을 하는 등 하늘을 찔렀다. 차중락은 긴 부츠를 신고 엘비스 프레슬리를 흉내 내는 모창으로 젊은 여성들의 인기를 한몸에 받았고, 사촌형 차도균은 첼로로 베이스를 시도해 신선함을 던져주었다. 윤항기는 맹인가수 레이 찰스처럼 검은 안경을 쓰고 더듬거리며 무대에 올라 맛깔나게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이 당시 멤버들간에는 보이지 않는 인기경쟁이 뜨거웠다. 키보이스 초기음반 ‘키보이스 힛트앨범’(오아시스, OL12504)에 수록된 12곡은 모두 번안곡들로 2면 머리곡 ‘바람난 노처녀(WHOLY ROLY)’는 최대 히트곡이다. 곡 제목에서 느낄 수 있듯 막 산업화의 기지개를 켠 당시 분위기를 반영하듯 밝고 코믹한 도회풍의 가사들이 대부분이었다. 타이틀곡인 ‘이별의 새벽길(TIICKET TO RIDE)’은 비틀즈가 65년 4월에 싱글로 발표한 사실에 미루어 볼 때 65년 말에서 66년 초 쯤 발매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중들의 폭발적인 인기를 얻을수록 창작곡에 대한 음악적 갈증은 더욱 달아올랐다. 60년대 중반쯤으로 추정되는 또 다른 초기음반 ‘정든 배는 떠난다’(신세기, 가12125). 오리지널 제목이 이채로운 키보이스의 대표곡 ‘정든 배’는 지금도 서민들의 애환을 달래주며 30여년간 불리어지는 정감어린 대중가요. 1기 키보이스의 노래를 듣노라면 트로트 창법을 벗어나지 못한 ‘정든 배는 떠난다’와는 달리 번안곡들은 상당히 세련된 연주와 창법을 들려준다. 각자 개성과 음악 역량이 출중한 멤버들은 새로운 그룹을 창시하거나 솔로 독립을 꿈꾼다. 67년부터 키보이스는 잦은 멤버교체로 엄청난 몸살을 겪으며 핵분열을 시작했다. 핵분열은 1967년 차중락, 차도균으로부터 시작됐다. 잘생긴 외모와 감미로운 목소리로 젊은 여성들로부터 인기를 한 몸에 받았던 차중락. 사촌형 차도균을 따라 ‘코끼리 브라더스’ 멤버였던 조영조의 ‘가이스 & 돌스’에서 리드보컬로 잠시 활동했지만 솔로로 독립하라는 유혹은 집요했다. 차도균 역시 솔로로 데뷔해 ‘철없는 아내’ 등 히트곡들을 통해 요절한 사촌동생인 차중락의 향수까지 달래 주었다. 이들의 빈자리는 장영, 박명수로 메워졌다. 핵분열의 중심은 김홍탁과 윤항기였다. 당시 지미 핸드릭스의 비트 강한 음악에 심취했던 김홍탁은 키보이스의 스탠더드한 음악노선에 심한 갈등을 느꼈다. 결국 탈퇴 후 한웅이 창립한 록그룹 ‘히5, 히6’의 팀 리더로 추대되었다. 김홍탁의 탈퇴로 영입된 조영조. 그에 관한 평가는 사실 미미하다. 그러나 이미 8군 시절 미군들의 향수를 달래주는 정감어린 연주로 명성이 자자했다. 그는 1회 플레이보이 컵 쟁탈 전국 그룹사운드 경연대회에서 최우수 개인 연주상을 수상했을 정도로 쟁쟁했던 기타 리스트였다. 또한 박명수와 더불어 후기 키보이스의 실질적 리더로 거듭났던 장본인이기도 하다. 윤항기는 69년 시민회관에서 열린 전국 그룹사운드 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한 후 미국으로 건너가는 문제로 탈퇴했다. 파월논쟁으로 온 나라가 뜨거웠던 70년, 월남 위문 공연단 'ROCK & KEY'를 창립한 뒤 홀연히 베트남으로 떠났던 윤항기는 귀국 후 ‘키브라더스’를 결성해 화려하게 부활했다. 그의 공백은 미8군 ‘고고쇼’ 멤버인 우승기가 메웠다. 오리지널 멤버 중 가장 늦게까지 키보이스에 남았던 만능 연주자 옥성빈은 69년 9월초 후기 멤버들과의 갈등을 견디다 못해 시민회관 소울파티 무대를 마지막으로 탈퇴를 선언했다. 이로써 오리지널 멤버가 키보이스를 모두 떠났다. 이때 불거져 나온 신구멤버간의 팽팽했던 대립은 단연 세간의 화젯거리였다. 오리지널 멤버들은 그룹명 키보이스를 영구보존하기로 결의하고 ‘창단멤버가 한명도 없는 키보이스는 가짜'라며 그룹명 사용불가라는 철퇴를 내리쳤다. 후기 멤버들은 새로운 그룹명을 모색했지만 키보이스라는 그룹명이 가지는 상품성은 상상을 초월했다. 당장 밤무대수입이 3분의 1로 줄어들 판이었고 킹레코드와 계약한 3장의 음반계약도 파기될 차가운 현실에 부닥쳤다. 궁지에 몰린 후기 멤버들은 ‘창단멤버는 아니지만 지금까지 그 이름을 고수하고 개발시킨 우리는 그룹이름의 기득권을 가지고 있음은 물론 어엿한 진짜 키보이스’라고 강하게 맞섰다. 쉽게 무너지기엔 후기 키보이스의 대중적 인기도 만만치 않았다. 그들은 ‘해변으로 가요’, ‘바닷가의 추억’, ‘뱃노래’ 등 바다를 주제로 한 노래로 젊은이들에겐 해변가의 제왕으로 추앙받고 있었다. 조영조, 박명수, 장영 등으로 구성된 후기 키보이스는 개인적 기량이 출중했던 1기와는 달리 탄탄한 팀워크로 구성된 연주와 구성진 하모니로 큰 사랑을 받았다. 이들은 차중락이 혼자 불렀던 ‘정든배는 떠난다’를 멤버전원의 정겨운 하모니로 무장, ‘정든배’로 재구성하여 지금껏 사랑을 받고 있다. 현재 대중들이 기억하는 키보이스의 히트곡들은 대부분 후기 멤버들의 노랫가락이다. 그 중 ‘해변으로 가요’는 여름철이면 어김없이 불리어지는, 영원한 젊은이들의 주제가로 여전히 군림하고 있다. 71년 키보이스는 7인조로 거듭났다. 이때 멤버는 조영조, 오정소, 백승진, 이광일, 조기상, 장영, 박명수. 브라스 연주를 가미한 음악적 변신은 ‘시카고 사운드’라는 새 유행어를 낳았다. 당시 모든 국내 록그룹들은 브라스 밴드로 유행처럼 변신하고 있었다. 트로트 록을 구사한 후기 키보이스는 3장의 독집음반과 여러 버전의 히트곡 집을 발표했다. 1집은 더블 자켓으로 임희숙과 함께한 김희갑 작곡집 <멀어져간 사랑/ 그 사람-유니버샬, KLG가1003,69년>이다. 이 음반은 공전의 히트몰이를 하며 순식간에 싱글 자켓 재판을 찍었을 정도. 2집은 2회 전국 보컬그룹 경연대회 최고인기상 수상을 기념하기 위해 출시된 <해변으로 가요/바닷가의 추억-유니버샬, K APPLE가 20, 70년 7월25일>. 트로트 록의 진수를 만끽할 수 있는 친숙한 사운드의 음반이다. 특히 1면에 수록된 ‘미련’은 추천하고픈 명곡. 3집은 더블 자켓으로 발표된 김영광 작곡집 <키보이스 스테레오앨범 VOL.3-유니버샬, K APPLE가 27, 71년2월25일> 이다. 수록된 모든 곡들은 옛추억을 되살려 주기에 충분한 '제목은 몰라도 들으면 아는' 아련한 곡들. 국내 록그룹들의 모태라 할 만한 키보이스가 개척하고 들려준 음악은 비록 음악적 한계는 있다 하더라도 처음 시도되는 트로트와 록이 접목된 구성진 노랫가락이었다. 그들로부터 파생된 수많은 록그룹들은 키보이스가 부정할 수 없는 한국 록그룹의 개척자임을 증명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