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을 감사하며, 4월의 일기, 선물을 주는 기쁨
선물을 주는 것은 어렵지 않다.
마음만 먹으면 누군가에게 기쁨과 감동을
안겨줄 수 있다. 가슴 설레는 선물을 받는 일도
그리 어렵지는 않다. 선물은 묘하게도 받는 사람
만큼이나 주는 사람에게도 기쁨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선물을 준비할 때부터 마음은
설레고 들뜬다. 무엇을 줄까 고르는
즐거움, 받는 이의 표정을 상상하는
기쁨이 있다. 선물을 주면서
이미 그 이상의 보상을
받는 셈이다.//
2024년 4월 26일 금요일인 바로 오늘 이른 아침에, 하루도 빠짐없이 밑줄 치기에 마땅한 귀한 글들을 내 Daum메일함에 꽂아주는 ‘고도원의 아침편지’에서, 오늘도 어김없이 글 한 편을 전해줬다.
위의 글은 그 본문 전문이다.
김소일의 《말과 침묵》 중에서 뽑아온 글이라고 했고, 글 제목을 이렇게 붙여주고 있었다.
‘선물을 주는 기쁨’
글의 핵심은 ‘기쁨’ 그것이었다.
선물의 종류에 대해서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내가 딱 공감하는 글이었다.
나도 그렇다.
선물을 물질적인 것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온전해야 할 양심이 자칫 가당찮은 물질로 더럽혀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받는 사람의 마음에 기쁨이 담기는 것이라면, 그 어떤 것도 선물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 신새벽 같은 시간인 오전 2시 46분을 막 찍고 넘어가는 그 시각에, 내 중학교 동기동창인 전용호 친구가 같은 동기동창 친구들이 온라인으로 함께 하는 카카오톡 단체방에 달랑 ‘3’이라는 숫자 한 자만 게시한 것도, 오늘 하루를 시작하는 나를 기쁘게 해주는 선물로 받아들인 것이다.
또 하나 선물이 더 있었다.
그것은 텔레파시의 선물이었다.
하루 전인 어제의 일로, 밤이 깊어가는 시각인 오후 9시 3분에, 국민학교 동기동창인 문숙이 친구가 역시 같은 동기동창 친구들이 온라인으로 함께 하는 카카오톡 단체방에 ‘3’이라는 그 숫자를 게시한 것이 그랬다.
그 같은 숫자를 그 다섯 시간쯤 뒤에 전용호 친구가 게시한 것이다.
우연히 그랬겠지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난 아니다.
어쩌면 그 둘의 텔레파시를 짚어서, 오늘 이 글 한 편 쓸 수 있게 해주는, 신의 선물이 아니었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