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시 리
가시리 가시리잇고 나는
바리고 가시리잇고 나는
위 증즐가 대평성대
1
위 가사는 고려가요 “가시리”의 4절 중 1절로. 이별의 한을 주제로 한 작자 미상 의 가요이다. 일명 歸乎曲이라고도 한다. 내가 말하려고 하는 표선면 가시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하지만 “가시리”라는 같은 단어에 마음이 이끌려 서언으로 삼았다. 그러나 늙으신 부모를 두고 모두 일본으로 건너간 모친과 이모 그리고 외숙부는 다시 가시리에 돌아가지 못하고 이별의 아픔을 가슴에 안고이 세상을 떠나셨으니. 그 한을 생각하면 이 고려가요의 정한이 가슴에 사무친다.
내 외가 본적은 제주도남제주군표선면가시리3397번지. 외조부는 정상옥(鄭詳玉), 외조모는 김여수(金如水)로 1남2녀 3남매를 두셨는데, 둘째 딸 정춘택(鄭春澤)이 모친으로 호적에 1908년6월15일 생이라고 적혀있다. 외숙부는 정환휴(鄭桓烋), 이모 이름은 지금 모른다. 이렇게 함자를 적는 것은 글로 남기고 싶기 때문이다.
지난5월11일부터 5박6일 세 가족이 함께 제주도 관광여행을 했다. 서귀포에 있는 호텔에 여장을 풀고 명소를 찾아 관광하기로 예정 되어있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따로 가야할 곳이 있었다. 외조부모가 사시던 가시리이다. 혼자 가겠다 하자 가족이 반대했다. 가족들 입장에서는 내 외조부와 외조모에 관심을 가질 그런 절실한 사유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다르다. 귀국했지만 모친이 그렇게 그리던 친정에 가지 못하고 43세 나이로 돌아가셨으니, 나로서는 꼭 찾아가야 한다는 절실한 심정이 있다는 것을 가족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안타깝지만 생전에 외조부가 사시던 곳은 돌볼 사람이 없었으니 온데간데 없을 터이고, 산소도 무연고묘지로사라졌을 것이다. 게다가 가시리는 제주4.3학살사건의 중심지역으로서 민간인 학살과 가옥의 소각이 격심하던 곳이다.
제주특별자치도는 한라산을 중심으로 북은 제주시, 남은 서귀포시의 2행정시로 2분되어있어, 남제주군과 북제주군이 폐지되었다. 출발 전, 미리 네이버에 들어가 검색했다. 가시리 지형은 한라산 동남쪽에서 표선리 백사장까지 완만한 사면으로 이루어졌고, 넓은 초원에 오름(기생화산)이 곳곳에 솟고, 울창한 수목 속에 6개 부락이 밀집하지 않고 방대한 면적에 산재하고 있다고 한다. 마침 서귀포에서 성산항으로 잇는 간선버스 295번이 가시리를 경유하므로 버스를 이용하기로 했다. 가시리까지는 한시간 거리, 간선버스 요금은 제주도 각 구간 일률적으로 1,150원이다. 어디서 버스를 내려야 할 지 막연한 상태지만 일단 버스를 타고 가시리사무소에서 내려달라고 버스 기사에 부탁했다. 교통망이 사통팔달로 뻗어 도로는 잘 정비 되어있었다. 수목이 우거진 완만한 경사 도로를 오르락 내리락 달리는 버스 여행은 쾌적했다. 이제 모친이 그리던 친정 동네, 내 외가의 루트를 찾는구나 생각하니 감개무량하다.
잠시 과거를 회상해본다. 1947년 오사카에 거주하던 재일교포의 과격한 행동으로 일본 경찰과 충돌이 심각해지자 당시 미군정하였기 때문에 미군 헌병대가 단속 하게 되었고, 그 결과 오사카 거류민단체의 10개지부 간부 10명이 모든 책임을 지고 강제추방 당했다. 그 중에 부친이 있었다. 그 1년 후, 추방당했던 10명 중 9명은 다시 돌아왔지만 부친은 돌아오지 않았다. 모친이 병환으로 눕게 되자 부득이 귀국하게 되었다. 외숙부는 나에게 남아서 학업을 마치고 가라고 했지만 병환인 모친을 그냥 보낼 수는 없었다.. 1950년 초, 한국에 와 보니 부친도 병환 중이었으니 모친은 의료 혜택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임종 무렵 연일 신음하고 괴로워했지만 자식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했다. 아마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는 여인의 긍지가 아니었을까? 그 신음은 또 자식을 데리고 귀국한 회한의 울부짖음이 아니었을까? 지금도 신음소리가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모친은 부모 곁을 떠나 일본으로 건너가 “육지 사람”과 일본에서 결혼했고 우리 3남매를 낳았다. 20여년간 일본에서 살다 귀국했지만 그리던 가시리 친정도 병환으로 가지 못하고 돌아가신 것이다,
이제 그 한을 풀어드리는구나 하는 생각에 만감이 교차한다. 그런 상념들이 주마등처럼 맴돈다. 85년 전쯤, 잠시 한국에 왔을 때
모친을 따라 외가를 찾은 적이 있다. 한라산 가시리 산허리에 있는 집을 기다시피 올라가던 일, 변소를 못 찾아 부엌에서 실례하고 시침 떼던 일, 그리고 모친의 친구를 만나러 서귀포에 갔던 일, 거기는 양산가게로 벽에 형형색색의 양산이 가득 진열 되어있던 희미한 기억들이 있다.
상념의 나래는 일본에 있는 또 하나의 외가로 날아간다. 모친의 언니는 제주에 계실 때 같은 가시리에 사는 고도진(高道進)씨라는 분과 결혼해서 일본 오사카 이쿠노구(大阪生野區)에 와서 살았다. 그리고 외숙부도 그 이웃에 살고있었으니 모친에게는 친정이요 나에게는 외갓집이다. 어느 분의 기제사 날인지 모르지만 가끔 제사가 있었고 그럴 때마다 모친을 따라 이모 댁에 가서 제사음식을 맛있게 먹었고, 그 중에서도 “감주”를 맛있게 마셨던 기억이 난다, 이모는 일본말을 못해 나하고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았지만 인자하신 분으로 나를 보면 육지놈 왔다고 귀여워해주었다. 가끔 오사카에 유학 온 나와는 외6촌이 되는 전문학교 다니는 형이 집에 왔었는데, 한 동안 우리 집 2층에서 기거하면서 통학 했었다. 모친이 “태원아, 태원아” 하던 말이 생각난다.
그렇다! 가시리에 도착하면 태원 형을 찾아야겠다. 이미 세상을 떠난 분이지만 가시리에서 오랫동안 초등학교 교사를 했었다고 하니 분명 아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버스는 어느덧 가시리에 들어섰다. 버스기사가 도착을 알려주었다. 가시리농협 앞이다. 주변을 살펴보니 가시식당 옆에 가시사무소가 있었다. 먼저 가시사무소로 갔다. 여직원이 문 앞에서 휴대전화로 열심히 통화하고 있었다. 안에 들어가 보니 책상이 두 개
있는데 늙수그레한 남자가 앉아있다. 마을 일을 보는 사람 같아서 말을 걸어보았다. 흘깃 보더니 그뿐이다. 다시 말을 걸었다
“혹시 정태원(鄭泰元)이라는 분 아십니까?”
다시 나를 보더니
“글쎄요”
멀리서 반가운 마음을 안고 온 나에게 앉으라는 말도 없다. 하기야 불쑥 들어와 사람을 찾으니 절차가 틀린 것 같기도 하다.
“앉아서 얘기하면 안될까요?”
그러자 뒤쪽에 있는 응접세트를 가리키며
“그쪽에 앉으세요”
거기 앉아서 말하자니 등뒤에서 말하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다. 일어서서 옆 책상의 의자를 끌어당기면서,
“옆에 앉아서 얘기 좀 합시다”
여직원의 의자인 듯 제지 하려고 했으나 무시하고 그냥 앉아서 말을 걸었다.
“여기 가져온 옛 호적등본이 있는데 봐 주시오. 외조부가 사시던 주소가 가시리 3397 번지인데 어디쯤 될 거 같습니까?”
“글쎄요, 번지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지금은 많이 변해서 거긴 아무도 살고있지 않지요. 호주가 정상옥이라고 써있는데 이제 가시리에는 정씨 일족은 한 사람도 없어요”
“허, 그럼, 아까 물어본 정태원이라는 분을 아는지?”
“알지요 오래 전에 돌아가셨지요. 선생 하던 분인데”
“그럼 그분과 가까운 사람이 있을 텐데 찾을 수 없을까요? 그 분 딸이 제주시에 산다는 건 알지만 집도 전화번호도 모릅니다”
“예, 그 제주 딸은 장녀이고 둘째 딸이 여기 가까운 데에 살긴 해요”
아니, 그렇게 잘 알면서 시원스럽게 알려줄 것이지. 뭐 이런 영감이 다 있나.
“그럼 어딜 가면 만날 수 있지요?”
“이 왼쪽 도로를 좀 올라가면 식당이 있고, 앞에 있는 2층집에 살아요. 2층집이 하나밖에 없으니 찾기 쉬울 겁니다”
“아이고, 어쨌던 고맙습니다”
그렇게 찾을 수 있는 단사를 얻고 사무소를 나왔다. 여직원이 아직도 문 앞에서 통화하고 있었다. 도로는 사무소 앞에서 두 갈래로 갈라지는 삼거리였다.
2
자, 이제 그 식당 앞 2층집을 찾으면 되겠지. 오르막 도로를 걸어갔다. 그런데 처음에 나타난 식당 앞에는 2층집이 없다. 다시 올라갔다. 식당은 있는데 옆에 2층집이 있었다. 여기인가 싶어 안에 들어가서 문을 두드렸으나 인기척이 없다. 마침 그 집 마당에 흑색 SUV가 있었다. 틀림없이 앞 차창에 휴대전화 번호가
적혀 있을 것 것이다. 앞창 바른쪽 구석에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바로 전화했더니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미안합니다. 혹시 이 집 주인이 정씨 아닌가요?”
“아닌데요. 아니, 그런데 남의 집에 들어와서 뭘 하는 거요. 빨리 나가요”
“아이고 미안하게 됐습니다. 당장 나갑니다”
더 물고 싶은 말도 못하고 나왔다. 다시 사무소에 가서 물어볼 수 밖에. 그런데 길 반대편에서 4, 50쯤 되는 남자가 휴대전화를 들고 걸어오면서 나를 보더니
“아까 전화하던 사람이요?”
하고 물었다.
“네, 그렇습니다만. 아깐 실례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누굴 찾는다고요?”
“혹시, 정태원 씨 아십니까? 그 분 딸이 식당 앞에 있는 2층집에 산다고 하는데”
“정태원 씨는 오래 전에 돌아가셨고 그 딸이 살지요”
“그럼 얼마쯤 더 가야 됩니까?”
“2킬로 정도 더 올라가야 합니다”
“네, 2킬로요? 여하튼 고맙습니다”
이 오르막 길을 노구를 이끌고 2킬로를 더 올라가야 한다니 아이고 소리가 절로 나온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다. 올라가야 한다. 마음을 다잡고 한참 땀 빼며 올라갔다. 거의 2킬로쯤 올라갔다고 생각되는데 2층집이 보이지 않는다. 좀 더 올라갔다. 그러자 시골 치고는 번화한 동네가 나왔다. 사거리에 로터리가 있고 가운데에 큰나무가 서있었다. 사방을 보니 2층뿐만 아니라 3, 4층 건물이 서있고 식당도 여기저기 있다. 그러니 어느 집이라고 특정 지울 수가 없다. 난감했다. 할 수 없이 다시 그 남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아까 실례했던 사람인데요. 2킬로는 넘게 올라온 것 같은데 식당 앞에 2층집이 안보이네요”
“지금 위치가 어딥니까?”
“사거리 로터리인데 큰 나무가 있네요”
“지나갔어요. 다시 뒤로 내려가면 은하수식당이 있는데 그 앞이 찾는 집입니다”
아니, 이 사람도. 미리 은하수식당이라고 말해주었으면 어디가 덧나나? 그 고생을 않고 바로 찾았을 텐데……
다시 뒤로 내려가자 과연 은하수식당이 있다. 앞을 보니 2층집은 없고 4층 건물이 있다. “?” 어찌 되었던 가서 물어볼 수 밖에 없다. 앞쪽은 식당인데 문이 닫혀 있어서 뒤쪽으로 갔다. 현관 벨을 눌러야 하는데 몇 층 벨을 눌러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옆에 회색 SUV가 주차하고 있었다. 앞창을 들여다보니 전화번호가 적혀있었다. 전화를 걸자 바로 여자목소리가 들렸다. 옳지! 이제 찾았구나 하고 기대하면서,
“혹시 이 건물 주인 성씨가 정씨 아닌가요?”
“네, 맞습니다. 왜 물으세요?”
“혹시 정태원 씨를 아십니까?”
“네, 저희 아버지입니다”
“엇, 그래요. 정태원 씨가 내 외가 6촌형이 됩니다”
“어머나! 잠깐 기다리세요. 지금 내려가고 있습니다”
방금 통화했는데 벌써 내려오고 있다니. 얼핏 50대로 보이는 여자가 꽃다발을 들고 내려왔다.
“아버지를 아신다고요? 전 둘째 딸 봉희입니다”
“내 외가 6촌형이 되는 분이지요. 큰딸이 숙희라고 기억하는데 지금도 제주시에 살아요?”
“네, 삽니다. 지금 바로 전화를 걸어볼 게요”
바로 통화가 되더니 나한테 전화를 건네준다.
“여보세요. 서울에 사는 아저씨뻘 되는 사람이오. 기억하는지 모르겠네”
“아이고, 3촌을 왜 몰라요. 오셨으면 저희 집에 오셔야죠”
“실은 가족과 함께 관광하러 서귀포에 있는 호텔에 왔는데 제주시에 갈 계획은 없고, 통화 되었으니 이걸로 만족 해야할 거 같네”
“아이고, 무슨 섭섭한 말씀. 저희 집에 꼭 오셔야 해요”
그러자 봉희가,
“그런데요. 실은 지금 성당에서 결혼식이 있는데 거기 가려고 꽃다발 가지로 집에 잠깐 들렸는데 3촌을 만났네요. 어쩔 수 없이 가야 되는데, 서귀포에 돌아가는 버스정류소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아이고, 이를 어쩜 좋아. 전화번호 주세요. 언니와 상의해서 다시 연락 드리겠습니다”
명함을 주자 자신의 명함도 주었다. 명함에는 일주종합건설주식회사 대표이사 정봉희라고 적혀있었다.
“아까 로터리를 지나가는데 낯선 사람이 걸어가기에 유심히 보았는데 설마 그분이 우리 집에 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어요. 만약 꽃다발을 가지러 집에 들리지 않았다면 못 만날 뻔했네요”
한산한 시골 동네이니 낯선 사람은 눈에 잘 띄는 것 같다. 아무튼 차에 동승해서 버스정류소로 가는데 도중에 메물국수 집이 있었다. 그냥 보내드리기는 섭섭하니 메밀냉면을 먹고 가라고 하면서 주문해 놓고 갔다. 그렇게 우연의 연속으로 외가 친척을 만나게되었으니 가시리에 온 목적의 반은 달성된 셈이다.
다음 날 서귀포에서 가까운 천지연폭포 등 여러 명소를 다니고, 매일올레시장에 가서 해산물도 먹었다. 제법 관광객으로 붐비고 있었다. 3일째는 협재(挾才)로 숙소를 옮겼다. 아직은 추워 해수욕 객은 없지만 서핑 하는 젊은이들이 있었다. 한림공원, 오설록 티뮤지엄 등, 특히 애월읍 한담해안산책로 1.2km를 남중국해 수평선을 보면서 걷는 기분은 상쾌했다, 석양에 수평선으로 지는 해를 보면 절로 탄복이 나온다고 한다. 산책로 길가 바위틈에 조그만 나팔꽃처럼 생긴 화초가 눈에 띄었다. 처음 보았지만 하마히루가오(浜昼顔)라고 직감했다. 우리말로 갯메꽃이라고 한다. 모진 해변 바람에 잘도 견디어 꽃잎은 작지만 곱게 피어있다. 하지만 관광이 이 글의 취지가 아니므로 이 정도로 끝내고……
3
그 사이, 봉희로부터 전화가 몇차례 있었다. 제주시 언니 집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으니 제주시외터미널에 11시까지 오면 픽업해서 언니 집으로 간다고 연락이 왔다. 이 참에 제주시로 숙소를 옮길까 생각했으나 짐을 들고 버스에 오르기가 번거로워 점심만 먹고 다시 협재(挾才)로 돌아오기로 했다. 몇가지 선물을 들고 시외터미널로 갔다. 11시 정각에 봉희 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숙희네아파트로 갔다. 숙희는 다리가 불편하다고 한다. 40여년 전에 숙희가 서울에서 직장에 다닐 때 우리 집에 가끔 왔었다. 실로 오랜만의 상봉이었다. 제주에서 관광업을 하던 남편과 사별하고, 자식은 결혼하고 따로 살고있고, 혼자 살고 있지만 자주 손자들이 집에 온다고 한다. 처음으로 상면하게 된 넷째인 명희도 와있었다. 정태원 씨는 4대째 독자로 아들을 원했지만 4자매만 두었다. 외숙부도 2대째 독자로 일점혈육인 의만(義滿)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해병대에 입대해 월남에서 전사했으니 대를 이을 아들이 없다. 그런 연유로 가시리에 동래정씨(東萊 鄭氏) 일족이 단절된 것이다. 숙희는 66세, 봉희는 60세 명희는 56세로 셋째는 영희 재미교포와 결혼해서 미국에 있는데 아들이 웨스트포인트를 나와 미군 장교로 근무하고 있다고 한다. 점심은 옥돔과 제주도 산나물이 주로 색다른 맛이었다. 식사시간은 흐뭇했다. 가시사무소를 찾아 봉희의 집을 찾는데 혼났다는 이야기를 했더니 봉희가 당장에 가시사무소로 전화를 걸었다. 나이 드신 어르신이 찾아 갔으면 흔한 커피 한잔 대접하지 못하더라도 집까지 안내해줄 수 있는 일이지 그럴 수 있느냐고 거세게 몰아붙였다. 아닌게아니라 나도 표선면장에게 전화로 불친절한 대민자세를 한마디 하려고 생각했었지만 좋은 이미지로 남기기 위해 그만 두기도 했다. 4.3사건 이야기가 나왔다. 가시리에도 경찰이 들이닥치고 남자들을 모조리 끌고 가 총살했다고 한다. 그래도 숨거나 도망가거나 한 사람은 살아남았다. 정태원 씨도 다락방에 숨고 음식물을 막대에 매달아 건네주면 먹고 변은 그 자리에서 보았다고 한다. 제주는 6.25 참화를 겪지 않았지만 혹독한 4.3사건을 겪은 것이다.
봉희가 가시리3397번지를 검색 해보니 그 일대는 조랑말목장으로 변해 있다고 한다. 목장 터 안에는 필시 외가의 집터, 밭, 산소도 있었을 것이다. 이제 그것을 따져서 무슨 소용인가, 세월의 무상을 느낄 뿐이다. 식후에 차를 내왔다. 보이차라 했는데 풍미가 있었다. 일어설 때가 되자, 숙희가 제주의 명물 옥돔, 한라산 고사리 그리고 흑돼지 삼겹살을 냉장고에서 꺼내, 스티로폼박스에 넣어 택배로 보내겠다고 한다. 그렇지 않아도 옥돔을 사기로 했었는데 선물로 받게 되었다. 시내를 돌아보겠다고 나서자 봉희가
동문시장까지 태워다 주었다. 거기서 옥돔을 사서 세종시에 사는 둘째 딸네 집으로 택배로 보냈다. 제주에 간다고 하자 여비를 보태 주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가시리 땅을 밟았다고 해서 모친의 한을 풀어드렸다고 할 수는 없지만, 오랫동안 묵었던 내 가슴의 응어리와 외가에 대한 망향의 정한을 이제 미련없이 버릴 수 있게 될 것 같다. 또 외가 친척도 찾게 되었고 또 살갑게 대해준 숙희 3자매도 먼 친척은 있지만 가까운 친척이 없었는데 나를 만나게 되어 기쁘다고 하니 두루 잘 된 것이다. 이제 나에게도 외가가 생긴 것이다. 끝
2022년 5월
goldwell 김 중 형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