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당시 비참한 생활상을 알 수 있는 것으로, 고성 거류면의 구상덕(1706~1761)이 쓴 승총명록(勝聰明錄) 중 1733년 봄에 기록한 내용에,ꡒ시중의 행인들을 살펴보니 태반이 귀신의 몰골이고, 도로에는 굶어죽은 시체를 묶어놓은 것이 마치 난마와 같이 널려 있는 등 개벽 이래로 어찌 이러한 세월이 다시 있었겠는가ꡓ 라는 기록에서 무신사태 후 처참한 사회상을 엿볼 수 있다.
또한 박지원(朴趾源: 박필현 방손)의「박연암집 권1 이처사묘갈명(朴燕巖集 卷1 李處士墓碣銘)」에, “(안음현이 폐지된 후 안음현 사람은) 논(畓)의 물도 이웃 고을 사람에게 먼저 빼앗기고 대낮에 무덤 주변에 있는 나무를 모조리 베어가도 말 한 마디하지 못할 뿐 아니라 입만 조금 움직여도 도리어 역적으로 욕을 퍼부었고, 이속․군교․사령들이 양읍(註: 거창․함양)에 분속 사역되는 등 마치 포로나 노예처럼 취급되었고, 유생들에게까지 병정의 충원이 요구되는 형편이어서 그 고통은 호소할 곳이 없다”라고 한 것에서 그 차별과 핍박을 알 수 있으며, 박지원의「허생전」에 허생이 변산 노비도적과 무인도를 개간하여 이상국가를 건설하는데, 이는 무신사태 때 참여하여 새로운 세상을 만들려고 했으나 무신사태 실패로 좌절한 소외계층인 부안 변산 노비도적을 소설화한 것임을 직시해야 한다.
경상좌도인 안동에도 무신사태의 연루자 중 형벌에 처해야 할 사람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조정에서는 이를 깊이 다스리지 않아, 잡힌 죄인 중 도망간 사람들이 제멋대로 당론을 형성한다 하여 많은 사람들을 형률로써 죄를 다스리기도 하였다. 심지어 당시에는 경상좌우도(영남)에 파견된 암행어사조차 탐관오리는 살피지도 않고 무신사태 관련자 체포에 급급한 나머지 이미 10여년 전에 무신사태에 가담한 사실이 없다는 판결이 나서 무죄 석방된 사람까지도 역적으로 몰아 처벌하는 실정이었다.
또한 정조 임금의 왕권이 집권 노론에 의해 위협받고 있던 1780년(정조4)에 집권 노론세력들은 소위 무신란 일주갑을 맞아 대구에 평영남비(平嶺南碑: 비문속에「曺聖佐」의 이름은 없으나「曺鼎佐」의 이름은 4번 나와 있음)를 세우고 경상우도 지역을 이른바 역적의 고을, 즉「반역향(反逆鄕)」으로 격하하였고, 무신사태를 평정한 것을 마치 적국(敵國)을 토평(討平)한 듯이 과장․미화하여 치켜 올리는 전승비같은 碑를 세우는 등 1623년(인조1) ‘내암 정인홍’ 참형 후 또 다시 철저히 탄압하였다. 심지어 老論이며 북학파인 ‘담헌 홍대용(1731~1783)’이 쓴「담헌서」에도, “南人들 중 무신란에 연루되지 않는 자는 일천 명에 한두 명도 되지 않을 것이며 南人들이 금수(禽獸)로 변하였으니 이들을 배척하여야 한다.”라고 하고 있는 등 조선왕조가 망할 때까지 심한 차별과 수모를 겪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조하주(曺夏疇: 조성좌 祖父인 曺夏全의 10촌 동생이며, 무신사태 때 처형된 조세추의 祖父)의 손아래 처남이며 現 경기도 안산시 일동에 칩거하고 있던 ‘성호 이익(星湖 李瀷, 1681~1763)’이 지은 성호문집 중「문족등과기(門族登科記)」에도 그 실상이 잘 나타나 있는데, “무신역란(戊申逆亂) 후에는 대가(大家)․명족(名族)․문인(聞人)․현사(顯士)․달관(達官)․비위(卑位)를 물론하고 서로 이어 육몰(戮沒)하였으며 연루자가 나라 안에 편만하였다. 그리하여 수년 동안에 기상이 꺾이고 무너진 것이 겁화(劫火)가 지나가고 상전(桑田)이 벽해(碧海)가 된 뒤와 같다.”라고 증언하고 있다.
성호(星湖)의 증언을 뒷받침하는 사례 중 하나로, 성호와 같은 시대 같은 지역에 거주하면서 교유한 문인화의 대가인 표암 강세황(豹菴 姜世晃, 1712~1791, 祖父: 좌찬성 강백년)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표암의 장인의 兄인 유래(柳徠, 1727년 증광시 급제)가 무신사태와 연계되어 장살되고, 표암의 친형인 강세윤(姜世胤)이 무신사태와 연루되어 중도부처된 관계로, 표암은 61세까지 관직에 나가지 못했다. 표암은 現 안산시 부곡동에 거주하면서 단원 김홍도 등 제자를 양성하는 등 한국적인 남종 문인화풍의 정착에 기여하고 진경산수의 발전과 서양화법의 수용에도 업적을 남기는 역설적인 결과를 가져왔는데, 이처럼 무신사태와 조금이라도 연루된 문중은 조정으로부터 가차 없이 차별과 억압을 받았다.
그 중에서도 특히 영남인에 대한 집권 노론세력들의 탄압은 더욱 가혹했다. 그들은 무신사태 이전부터 시도한 바 있는 영남인에 대한 노론으로의 귀화책을 방백과 수령들을 통해 적극적으로 회유와 압력을 행사하게 하여, 경상도에서 중앙권력층에 대한 대립된 감정이 발생하지 않도록 시도하였다. 당시에는 영남의 명문벌족들을 두루 순방하면서 회유와 위협으로써 노론으로 당색을 바꿀 것을 강요하는 방백과 수령들이 많았다. 특히 무신사태 전후 경상감사 정익하(鄭益河) 및 조영복(趙榮福) 등이 그 앞잡이로 유명하였다.
나주벽서 사건으로 소론 세력 위축
경상우도(現 경남)는 경상좌도(現 경북)와 달리 구심점이 취약했던 관계로 경상우도의 일부 한문단족(寒門單族)들 중 함양의 정여창 후손, 산청의 배씨․민씨, 의령의 강씨․권씨, 밀양의 沈氏 등은 중앙의 위세와 압력에 못이겨 노론으로 귀화하기도 했으나, 대부분의 경상우도사족(慶尙右道士族)들은 조금도 지조를 굽히지 않았다.
영조가 표방한 탕평책이라는 것도 노론(老論)을 주체로 삼고 소론(少論)을 겸용하여 관직을 적절히 안배함으로써 왕권의 안정을 도모한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므로 영남인들 중, 특히 진주․합천․삼가․안음․거창․함양 등 경상우도 사림의 관직 진출에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 박문수가ꡒ탕평의 이름은 있으나, 탕평의 실체가 없다.ꡓ라고 신랄하게 비판한 사실에서 여실히 증명된다. 이는 1755년 소론에 의한 나주벽서사건 및 토역경과투서사건과 1762년 사도세자 죽음으로 탕평책이 종말을 고하자 소론이 거세되고 노론에 의한 일당 지배 하에 놓이게 된다는 사실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이와 같이 오랜 기간을 두고 중앙 권력층으로부터 버림을 받아오던 사이에 특히 경상좌우도, 즉 영남 남인(南人)들 모두의 정치적 지위는 몰락하였고, 진주․합천․삼가․초계․안음․거창․함양․산청 등 경상우도 南人들의 벼슬을 통한 입신출세는 상대적으로 더욱 어려워지게 되어 관직 진출은 아주 단념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소위 무신란에 적극 가담한 경상우도에 대한 핍박과 차별은 경상좌도(現 경북) 보다 심각하여 더 이상 중앙의 관직으로의 진출은 불가능했다. 즉 무신사태에 적극 참여하지 않은 안동 등 경상좌도에 대하여는, 영조 때는 회유책으로 경상좌도의 조덕린(趙德隣, 號:옥천(玉川), 1658~1737, 우부승지, 영양 일원면 출생)․김성탁(金聖鐸, 號:제산(霽山), 약봉 후손, 무신사태 때 토벌을 논의) 등을 청요직에 등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후 1736년 서원 남설(濫設) 반대 상소와 1737년 스승인 갈암 이현일(葛菴 李玄逸, 1627~1704, 이조판서, 영양 출생, 조정생의 손자인 曺夏剛의 墓誌를 지음)의 신원 요구로 노론으로부터 탄핵을 받아 모두 삭탈관직 되고 유배된다.
또한 정조 때는 집권세력인 노론(특히 벽파)의 전횡을 제어하기 위해 근기(近畿) 남인인 정약용과 채제공 등을 등용하고, 1788년(정조12)에는 ‘한강 정구’ 계열인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을 우의정으로 특채하였다. 특히, 1788년은 무신사태 일주갑(一周甲, 60년)이 되는 해로써 무신사태 때 정희량․조성좌의 거사군에 항거하여 공을 세운 13개 읍 사림(士林)들의 행적을 기록한 소위「무신창의록(戊申倡義錄)」을 안동 사림들의 주도로 작성하여 11월에 정조 임금에게 바친 것이 계기가 되어, 급기야 1792년(정조16) 3월에는 ‘퇴계 이황’을 배향하는 도산서원에서 영남 남인, 특히 안동을 중심으로 한 경상좌도를 배려하는 차원에서 별시(別試)를 베풀자 과장(科場)에 입장한 유생만 7,000여 명이 넘었다.
여기에 더욱 고무된 안동 유림들은 사도세자의 신원과 유성한․윤구종 등 노론들의 처벌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영남만인소(嶺南萬人疎」를 1792년 4월에 정조 임금에게 상소(거창의 동계 정온․합천의 오계 조정립․산청의 동계 권도 후손 등도 만인소에 참여함)하기에 이른다는 사실에서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1800년 정조가 사망하자 안동을 비롯한 경상좌도의 남인들 역시 집권 노론 세력으로부터 또 다시 탄압과 차별을 받게 된다.
이렇듯 정조 때는 정조의 개혁적 사상, 그리고 노론(벽파)을 견제하려는 정치적 고려 등에 힘입어 조덕린․김성탁․황익재(黃翼再, 무신혁명에 연루, 7년간 유배) 등이 신원되고, 소위 무신란 창의 주동자들에게는 포상이 주어지는 등 경상좌도의 南人들에 대하여는 명예 회복과 동시에 일시적이나마 등용되기도 했지만, 진주 등 경상우도의 南人들은 1694년 갑술환국으로 실각되고, 1728년 3월 무신혁명 때 적극적으로 가담한 후 일시적․한시적 국정 참여도 해보지 못한 채 영원히 조정으로부터 철저하게 버림을 받았던 것이다.
경상좌도와 비교하여 경상우도가 중앙 집권 세력들로부터 상대적으로 차별을 더 받았다는 또 하나의 주요한 증거가 되는 조선 전후기(前後期) 경상좌우도 각 권역별로 사림의 관직 진출 상황을 보면, 진주․삼가․합천․초계․거창․안음(안의)․함양․창원․함안․웅천(진해)․김해․고성․하동․의령․남해․산청 등 진주권의 21개 읍의 문과 급제자가 전기에는 241명인데 비해 후기에는 144명으로 무려 97명이나 줄었으나, 의성․군위․영천․대구․봉화․안동․영덕․청송․예천 등 안동권 14개 읍은 전기에 180명에서 후기에는 446명으로 266명이나 문과 급제자가 늘어났으며, 선산․성주․상주․고령․지례․개령․금산․함창 등 상주권 12개 읍도 전기 262명 후기 407명으로 후기에 145명 늘어났다. 이것을 보더라도 1728년 戊申革命 실패 이후 합천․안음․거창․함양․산청․삼가․초계 등 진주권을 중심으로 한 現 경남(경상우도)지역의 침체가 더욱 심화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진주권의 사림들이 문과(文科)에 급제했다 하여도 정3품 당상관 이상 벼슬에는 올라가지 못하는 심각한 차별을 받았지만, 안동 등 경상좌도 남인들에게 가한 집권 노론세력의 차별과 억압 역시 지속적으로 계속되었다.
이는 한말 척사론자인 노론의 최익현(崔益鉉)과 김평묵(金平黙) 등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즉, 1873년 및 1876년 그들의 상소 등에서,ꡒ이현일․한효순․목내선 등의 신원을 요구한 사람들을 추율(追律, 반역죄로 처벌)해야 하며, 南人인 윤휴(尹鑴) 이후로 우리 서인(노론)과 남인은 원수가 됐다. 만약 서양과의 조약이 성립된 후에 민암․목내선․이인좌․정희량의 남은 후손들이 백성의 불인(不忍)한 마음을 이용하여 창을 들고 도성과 대궐을 침범한다면 서인은 일망타진될 것이다.ꡓ라고 주창한 사실에서 척양(斥洋) 즉, 서양세력의 일망타진보다 또 하나의 양적(洋賊)인 무신혁명의 후손 등 남인세력의 일망타진에 척사의 비중을 더 두었음을 알 수 있다. 집권 노론세력들은 조선이 망하는 그 시점까지 경상좌도 뿐만 아니라, 경상우도의 무신당(戊申黨)과 남명학파(南冥學派) 후손 및 남인들 모두를 원수처럼 철저히 배척했다.
그러나 몰락한 영남, 즉 경상좌우도 남인(南人)들에게는 전통적(傳統的)이고 토착적인 생활의 기반, 즉 농장이 있어 관료가 되지 않더라도 실생활에 있어서의 위협은 크지 않았다. 이는 안동․상주․진주권의 경상도 실세 남인(失勢 南人)들이 근기(近畿) 지방의 失勢 南人들 과는 달리 근검절약으로 토착생활의 기반을 잘 보존해 왔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영남 도처에 각기 보유한 농장을 배경으로 하여 조상 중에서 현조(顯祖)를 내세워 떠받들고 집단적으로 거주하는 동족부락을 이루어 일문일족(一門一族)의 번영에만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무신혁명에 참여한 경상우도 남인들의 영향력은 경상좌도보다 훨씬 위축되어갔다.
(경상우도는 서울에서 볼 때 낙동강 우측인 금산․함창․지례․문경․상주․성주․선산․합천․삼가․초계․고령․안음․산청․사천․진주․하동․진해․창원․마산․김해․의령․함안․남해․함양․거창 등 28개 군현(郡縣)을, 낙동강 좌측인 경상좌도는 경주․안동․대구․의성․영덕․풍기․예천․군위․영천․봉화․현풍․동래․창녕․밀양․기장․언양․양산․울산 등 37개 군현을 말함)
첫댓글 1694년(숙종20) 갑술환국으로 경상좌우도 南人들은 서인(노론)에 의해 살육되고 완전히 야당으로 몰락하게 되었고, 무신사태 이후에는 더욱 탄압을 받았다. 즉, 1730년 1,000여 승군(僧軍)과 八月山 도적이 남인과 연계한 것과 최필웅(崔必雄) 궁궐 침입사건이 무신사태와 연관돼 있다고 하여 관련자를 처형했으며, 1733년에는 보은읍 장곡서당의 사건도 무신여당(戊申餘黨)의 소행이라 하여 이제동(李濟東)과 조성좌 외가집 사람인 김희능(金喜能)․김희공(金喜功) 등 많은 사람들을 처형하였고, 곧이어 남원괘서사건(南原掛書事件)으로 김원팔(金元八) 등을 처형했다.
1755년(영조31) 1월 소론인 윤지(尹志) 등에 의한 나주벽서사건(羅州壁書事件)과 5월 심정연 등에 의한 토역경과투서사건으로 경종의 독시설이 다시 쟁점화 되자 소론계 인사들을 무신사태와 연관시켜 조태억․이광좌 등은 관직추탈, 유수원․박찬신․윤지․심정연 등은 처형되고, 이광사(연려실 이긍익 父)는 귀양 가서 죽었다. 또한 1763년에는 해서(海西)의 미륵신앙자가 소위 무신란 후예와 관련이 있다 하여 처형되고, 1768년에는 곽재우․서경덕의 사상과 계보가 닿는 자들이 소위 무신란과 관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