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등반 관련 글을 쓸 일이 있었고
마무리하며 글 하나 올립니다.
단독 등반
글쓴이: 조장빈(근대등반사팀)
1920년대 후반 한국에 알피니즘이 유입되고 1929년 9월 아처의 북한산 인수봉 등반을 한 전후로 본격적인 암벽등반이 이루어졌다. 임무는 당시 아처와 서울근교의 산 그리고 개성 천마산을 등반하였고 조선산악회(1931년 10월에 설립된 ‘조선산악회’ 이전의 산악회)의 이이야마 다츠오를 비롯한 일본인들과 서울근교산과 금강산에서 선구적 등반을 하였다. 서울 근교산의 암봉을 대상으로 가장 쉽고, 짧은 코스로 등정주의 암벽 초등반이 끝나갈 무렵, 금강산으로 암벽등반 무대가 옮겨지는 가운데, 1931년 1월 금강산 비로봉을 대상으로 동계 초등정이 이루어졌다. 암벽 및 동계 초등반 시대를 연 임무에 이어 이이야마 다츠오, 이즈미 세이치, 오꾸노 마사이, 박순만과 하마노, 엄흥섭(클라이머), 김정태, 양두철, 주형렬 등 뛰어난 클라이머들이 있었다.
중요 등반을 대략 살펴보면, 임무의 우이암 초등반은 최고의 등반 기술이 필요한 코스였고 주봉은 당시 난공불락으로 1933년 5월 이즈미 세이치와 하라의 경성중팀에 의해 초등반되었으며, 도쿄대학의 1933년 7월 집선봉 동북릉 제1(S1)~2봉(S2) 초등반과 1934년 12월 쿄토대 동계 백두산 원정 초등반은 당시 서울의 ‘알피니스트’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인수봉 동남면 B코스를 개척한 엄흥섭, 김정태 그리고 A코스를 5주간에 걸쳐 개척한 박순만과 하마노, 도쿄대의 미등정 논란이 있었던 집선봉 S1~S2코스에서 돌로미테의 인공등반 방식을 선보인 크리스천 후퍼의 1935년 4월의 등반, 1938년 엔도의 집선봉 중앙릉 제2봉(C2) 초등, 1940년 오쿠노팀의 동북능 제1봉(S1)~5봉(S5) 종주 및 1940년 주형렬, 양두철, 엄흥섭(백령회 대표)에 의한 주봉 ‘K크랙’ 코스 초등반과 1941년 10월에, 당시 앞 선 등반을 하던 일본인들이 포기한 집선봉 동북릉 제2봉(S2) 정면 북벽코스 초등을 한 김정태, 주형렬, 양두철의 당일 초등반 그리고 1941년~1942년 동계 마천령 종주 백두산 등반 등 수많은 등반이 있었다.
그러나 상세한 등반 기록이 전하는 것은 주로 일본인들의 등반 기록이고 한국인의 등반 기록은 김정태의 자전적
등반 기록인 『登山 50年』이 거의 유일하다. 초등정 위주의
등반 고찰이 월간 <山>1982년 1월호~5월호에 손경석의 「한국산악등반사」, 1982년 7월~1983년 12월호에 김정태의 「한국등반사의 고찰」 등이 있어 당시 등반 활동의 편린을 엿볼 수 있어 다행이나 정사로서
일제강점기등반사를 만나본다는 것은 요원한 형편이다.
일제강점기의 등반 기록을 확인하다 보니, 단문이지만 단독 등반 기록이 넷이 눈에 든다. 임무의 동계 금강산 비로봉 등반, 이즈미 세이치의 동계 금강산 비로봉, 양정고보 산악부장인 노정환의 주봉 등반 그리고 금강산 집선봉의 중앙릉 C2를 초등한 엔도(遠藤, 京中 OB)의 단독 등반이 그것이다.
구분 |
기간 |
대상 |
코스 |
내용 |
임무 |
1931. 12. 31-1931. 1. 6 |
금강산 비로봉 |
내금강 코스 |
폭설로 실패 |
이즈미(泉靖一) |
1933. 3. 25-4. 2 |
금강산 비로봉 |
동북릉 제2봉(S2) 능선-꿀르와르-S2안부 |
동계 등반 |
노정환 |
1939. 4. 6 |
도봉산 주봉 |
K크랙 코스(추정) |
추락사 |
엔도(遠藤孝一) |
1939. 10. 여름 |
금강산 비로봉 |
중앙릉 제2봉(C2, 남면 추정) |
초등반 |
이즈미의 등반 기록을 제외하고는 자세한 등반 내용이 전하는 것이 없다. 임무의 기록은 오랜 시간 산악계의 관심사였는데, 그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었고 작년에 1929년 12월-1930년 동계 비로봉 첫원정의 리더였고 1931년 1월 이이야마와 초등을 하였으며, (구)조선산악회 회원들과 함께 1931년 10월 조선산악회 창립을 주도했다는 것을 추가로 밝혔다.
임무는 1932년 1월 1일 내금강 코스로 동계 비로봉 첫 단독 등반에 나섰으나 폭설로 마하연암에서 하산을 하며 당시 등반 중이던 시모데, 나까무라, 센파를 만났고 센파의 등반기에 그 상황이 전한다.
“1월2일 밝은 태양이 비추고 있다. 만일을 고려하여 인부 3명을 준비하여, 경쾌하게 스키를 신고 밝은 만폭동의 계곡을 올랐다. 일면의 깊은 눈에 묻힌 계곡의 조용한 공기를 깨며, 어느 곳에서부터 라고할 것 없이 한행(寒行, 주: 소한, 대한의 추위속에서 하는 불교 수행)의 독경의 소리가 울려퍼지고 있다. 우리들도 역시 고행승려처럼 깊은 눈을 치우며 나아가, 표훈사에 도착한 것은 정오경이였다. 여기서 가벼운 식사를 끝내고 하도(夏道)를 따라, 긴 자국을 남기며 나아갔다. 긴 스키를 좁은 계곡속에서 운반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고 특히나 팔담에 이르러서는 눈을 헤치고 나가는 것이 괴로웠다. 보덕암 근처 전방으로 부터”야호”하는 소리가 들린다. 어쩌면 이이야마군 일행은 아닌가 하고 다가가니, 임군(주:임무)이 스키를 등지고 기는 듯이 내려왔다. 임군은 단독으로 비로봉을 넘기를 시도, 이 많은 눈 때문에 중도에서 되돌아 왔던 참이었고, 여기서부터는 우리들과 함께 마하연까지 다시 돌아가기로 했다. 여러가지 상상을 생각했지만, 오늘의 상태로는 3척이나 가까운 신설(新雪)을 밟고 비로봉 등행은 전망이 서지 않는다.”-번역: 류백현(인문산행 팀장)
임무의 이 단독등반은 당시 신문에 금강산 비로봉 스키코스 개척으로 소개되었고 등반에 실패했지만, 그는 비로봉을 스키로 횡단이 가능하다고 하였다. 이 기사를 보면, 임무는 지금까지 알고있었던 것과는 다르게 당시, 금강산 비로봉 동계 초등자로서 상당히 알려진 인물인 듯하다.
이즈미 세이치(泉 靖一)가 오른 집선봉 동북릉 제3(S3)~제4봉(S4) 끌르와르
노정환은 양정산악부가 인수봉, 만장봉 등지에서 실시한 코스별 기록 경기에서 모두 개인 최고 기록을 차지할 정도로 등반 기술이 뛰어났고 오직 주말의 등반만을 기다리던 클라이머였다고 한다. 그 날 뜻밖의 등반사고는 “노정환 부장이 프리 클라이밍으로 처음에는 하급생들의 떠받침으로 바위에 오르기 시작하더니 정상에 올라서는 순간 균형을 잃은 듯 주춤대면서 자신이 낙하할 장소를 순간적으로 의식한 듯 붙어있던 바위로부터 몸을 허공으로 날려…”가 당시 상황이다.
엔도(遠藤, 京中 OB)는 초등정이고 조선산악회 회원 임에도 밝혀진 기록이 없다. ‘초등정’ 한 줄의 기록과 이즈미팀이 활동한 경성중 출신으로 이라는 것이 전부이며, 김정태는 그가 40년 5월, 일본 다니카와(谷川岳) 단독등반 중 추락조난사 하였다고 한다. 단독등반을 즐겼던 것일까.
이즈미는 동행하기로 한 가부토(甲本)가 사정으로 못가게 되어 포기할 수도 있었지만 단독 등반에 나섰다. 경성 출발부터 온정리까지 함께한 이이야마 다츠오와 요시다가 스키를 포기하고 철수하며, 눈사태의 위험을 무릅쓰고 등반을 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경고를 했다.
“아! 회색 저편에 일대 굉음이 일어났다. 구불구불 연이어 휘어진 협곡에서 나무들이 꺾이며, 적막했던 산들이 한꺼번에 울부짖어댔다.세존봉의 경사면에서 바닥 쪽으로 눈사태가 일어난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 진행할건지?」이이야마씨가 웃었고 나도 웃었다. 그 웃음은 일그러지고 경련을 일으키는 듯한 무시무시한 웃음이었다. (중략) S3-S4의 가장 넓은 꿀르와르에서 능선 아래쪽으로 달라붙어 있는데 눈상태는 마블크러스트라 등반은 불가능하다. 100m쯤 위에는 어제 눈사태로 깨끗이 씻겨져 있고 S4봉의 서북면을 엉망진창으로 만든 눈사태가 난 쪽을 올려다보니 좁은 꿀르와르가 완전히 눈과 얼음 파편(데브리 debris)으로 가득했다.
2~300m정도 올라가면, 이번에는 종일해가 비치지 않는 곳을 만나게 된다. 가루눈이 깊어 럿셀에 대한 믿음이 가지 않는 그곳을 어렵사리 뚫고 이어지는 눈덩이 위에 올라선다. 내려다보이는 풍광은 명암 차이가 큰 빛과 그림자 모습이어서 마치 흑백사진 같은 세계다. 벌써 4시간째 계속 올라가고 있지만 이쪽으로 해가 비치게 될 까봐 걱정되어 쉬지 않고 힘을 내고 있다. S3-4봉 안부의 50m 정도 하부에 도착했을 때, 왼쪽(S3봉 쪽)에 눈을 뒤집어 쓰고 있지만 붙을 만한 암벽을 발견했기에 스키를 놓고 이곳을 오른다.
붙잡거나 디딜만 한 곳의 눈이나 얼음을 걷어내면서 40m정도 올랐을 때, 반짝이는 빛이 능선 쪽으로 반짝이는 빛이 눈에 뜨였다. 곧 이어 눈이 덮인 크랙을 파내면서 힘든 밸런스 자세로 올라가자 눈앞에 아까 보았던 반짝이는 곳이 나타났다. 위험하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가볍게 피켈을 박는 순간, 우르르 한 덩어리의 딱딱한 눈이 굴러 내려왔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상당히 난해한 곳이어서 몸을 돌릴 틈이 없었다. 눈덩어리에 발을 맞으며 내쳐진 순간 갑자기 파고든 피켈이 크랙에 들어간 덕택에 무사히 나왔지만, 기분이 좀 안 좋아 트래버스하여 안부의 바로 아래로 나와, 거기서 안부로 오르니 10시 반 이었다.”-번역: 류백현(인문산행 팀장)
이들의 등반은 대상지, 시기와 코스도 쉽지 않은데 더욱이 단독 등반이었다. 등반 기록을 살피며, “단독 등반”이라는 단어에서 우려되었던 비극적 상황은 그들의 삶에 여지없이 현실로 다가왔다. 노정환의 주봉 등반은 그날 추락사로, 엔도는 일본으로 돌아가 다니카와(谷川岳) 단독등반 중에 사망하였고 임무는 그 다음 해 삼방산 스키등반 중 사고로 등반을 그만 두었다고 한다. 산을 떠나지 않고 남은 한 사람. 당시, 경성 최고의 클라이머팀의 이즈미는 이후 1932년 12월 동계 비로봉 등반, 1933년 5월 주봉 초등, 1935년 금강산 집선봉 S1, S2 실질적 초등(동경대는 S2 전위봉 등반 추정), 1935년 12월 한라산 동계 초등, 1936년 12월 동계 관모봉 등반을 이어가지만, 1935년 12월~1월 동계 한라산 초등반에서 경성제대 후배인 마에가와(도봉산 선인봉 남측 마에가와 코스 초등자)를 잃은 22살의 등반대장으로서의 회한을 안고 살아갔다.
--------------------------
*본문 번역 출처:『朝鮮山岳』4
*엔도의 금강산 집선봉 중앙릉 제2봉(C2) 남면 초등정 기록은 김정태의 「한국의 등산사 考察」에 근거한다.
“1939년10월: 「금강산 집선봉 중앙릉 (센터피크) Ⅱ봉」 초등반, 遠藤登(京中 O.B) 단독등반(기록 朝鮮山岳会「会報」No, 17, 기사) 일행기사로만 게재되어 행동미상인데, 그는 40년 5월, 일본 谷川岳 단독등반 중 추락조난사 하였다.”-출처: 김정태, 1983, 「한국의 등산사 考察」 <산>10월호, p. 187.
그런데 여전히 답답한 것은 무거운 주제의 글 때문이 아니라 “서로 다른 기록” 때문이다. 위의 김정태 기록에 대하여 조선산악회의 오꾸노는 ‘遠藤登’이 ‘遠藤孝一’로 표기(당시 김정태의 기사는 ‘遠藤 登’을 이름으로 착각하여 ‘遠藤登’로 오기한 듯)하여 동일인 임을 기록하고 있고 1938년에 중앙릉 C4를 후지모토(藤本)와 등반하였고 1939년 C2를 오꾸노 본인과 함께 등반했다며, 김정태의 조선산악회 회보와는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奧野正亥, 1995, 「集仙峰 中央릉 C2の 登攀」, 『北朝鮮の 山』, p. 161.) 김정태가 출처로 제시한 “朝鮮山岳会 「会報」No, 17”은 김정태 이후 없어진 자료로 달리 전하는 문헌이 없고 있기도 어려운, 짧은 소식지다. 일제강점기의 기록은 전하는 것도 적고, 개인적인 주장으로 서로 기록이 틀린 것이 많다. 사실 확인은 요원한 것인가. 오꾸노는 북한산 노적봉 등반을, 김정태가 얘기한 1937년이 아니라 1938년이라 전하고 노적봉에서 김정태를 처음 보았다고 한다.
1933(昭和8年) 22歳 朝鮮山岳会に入会する。※朝鮮鉄道局の飯山達雄氏の誘いで・・・
1938(昭和13年)27歳 厳冬の白馬岳、乗鞍岳に登る. ※集仙峰東北稜縦走・北漢山露積峰西壁初登
1939(昭和14年)28歳 集仙小屋建設 ※集仙峰C2針峰の初登・厳冬の渡正山(2201m)から冠帽縦走
(本田誠也 2007, 「日本山岳会熊本支部 設立50周年記念誌」, 特別号17号, (社)日本山岳会熊本支部, p. 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