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행수필
내 금혼에 쐰 바람
제3장 바르세로나 Barcelona
1. 우뚝 선 콜럼버스 기념탑
하루도 흐리지 않은 날이 없고 하루도 빗방울 한 번 들지 않는 날이 없으며, 그렇다고 파란 하늘 한 번 안 뵈는 날이 없던 독일의 날씨가 모처럼 맑던 날, 도르트문트(Dortmunt)공항에서 서반아(西班牙:Spain)국적의 부엘링 애어 버스(Vueling Air Bus)에 올랐다.
창밖으로 내려다보이는 북부독일 너른 들판에 노란 유채 밭이 우리 제주도의 모습과 비슷하다.
파란 바다에 들어 저게 지중해인가 싶더니 금세 하얀 거품을 문 매끈한 해안선을 타고 건물들이 발전하다가 마침내 깔끔한 모습의 큰 도시가 눈앞에 펼쳐진다.
<지중해에 연한 바르셀로나>
바르셀로나(Barcelona),
인구 159만이니 우리나라 대전과 비슷하고 북위 41도 23부이니 42도의 백두산에 버금가는 위치이나 해양성기후의 영향으로 퍽 온화한 곳이다.
공항 제2터미널에 내려 공항버스를 타고 제1터미널로 건너가 지하철을 타는데 여간 번거롭지 않다.
두리번거리는 우리 모습을 보았는지 허술한 옷차림의 중년 하나가 접근하여 길을 가르쳐주고는 아내에게 배낭은 가슴 쪽으로 메야 안전하다고 이르는데 그 친절이 어딘지 미덥지 못하게만 느껴진다.
그러고 보니 모두들 배낭을 가슴에 메었는데 이리되면 배낭(背囊)이 아니라 흉낭(胸囊)이다.
우리는 딸애의 주선으로 한국에서 유학 온 여학생 둘이서 운영하는 민박집에 여장을 풀었다.
그리고는 곧장 바르셀로나의 대표적인 번화가를 구경하기 위해 드넓은 카탈루냐(Catalunya)광장으로 나갔다.
거리의 풍경을 보지 않고서야 어찌 그들의 생활과 풍습 그리고 정서를 알 수 있으랴.
영화에서나 봤던 양쪽 베란다에 빨래들이 주렁주렁 걸려있는, 좀 부풀리면 양쪽에서 손을 내밀면 서로 맞잡을 수 있을 것만 같은 비좁은 골목을 빠져나니, 여러 가지 동상과 구축물들이 세워져있고, 분수대 주변으론 사연을 알 수 없는 신상들이 배치된 광장이 나온다.
<라 람블라 거리>
파괴된 듯한 계단 구축물 아래 있는 작은 흉상 앞에서 아내가 손짓을 하여 가보니 1931년 지방선거에서 승리하여 카탈루냐 공화국을 선언했다는 첫 번째 대통령 팡세 마시아(Fancesc Macia)이다.
4.19혁명당시 성난 시민들의 밧줄에 목이 걸려 시가로 끌려 다니던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이 뇌리를 스쳤다.
이곳에서 정 남으로 1.2km에 이르는 널찍한 도로가 라 람블라(La Rambla)인데, 양 옆으로 승용차가 다닐 수 있는 일 방로가 있을 뿐 그 중앙 넓은 도로는 보행자전용으로 간이시설인 기념품가게와 음식점들이 즐비하다.
이곳에 세게 각국에서 모여든 관광 인파가 꽉 차있는데 흡사 인종 전시장을 보는 것 같다.
뜻 밖에도 검은 머리(黑髮)가 많고, 키 작은 사람(短身)이 많고, 검은 피부와 집시가 많으며, 흡연자, 오토바이 질주족, 거리의 악사들이 많다.
또 한 가지 더 독일에선 보지 못했던 권총과 수갑으로 무장한 남녀 정복경찰관이 곳곳에 서있는데 이는 무엇인가 치안상의 문제가 있음을 느끼게 한다.
<콜럼버스 기념탑에 새겨진 이사벨라 여왐>
이 거리의 맨 남쪽 끝 바다연안에 높이 50m의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 기념탑이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있다.
왼손 검지 위에 앵무를 앉히고, 바른손 검지를 펴 바다를 가리키는 콜럼버스 입상은 바르셀로나가 껴안고 있는 바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상징하는 것이라는데 이는 1882년에 시작하여 1888년 바르셀로나 국제박람회 개회에 맞춰 준공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탑신 하단부에 이사벨라(Isabella)1세 여왕상이 새겨져 있어 신대륙발견과 관련된 밀접한 지원관계를 떠올리게 한다.
콜럼버스, 그는 1451년 이태리(伊太:Italia) 제노바에서 서반아인 아버지와 유대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평범한 선원생활을 시작한다.
그러나 그는 등산가가 미지의 산에 뜻을 두 듯, 미지의 바다에 마음을 두어 개척의 꿈을 키워나가는 야망의 청년이었다.
이루다 헤아릴 수 없는 간난신고를 겪고 끝내 꿈을 이룬 자신감에 차있는 모습!
그것이 바로 저 망대 위의 콜럼버스 아니랴......
2. 사람이 만든 최상의 작품
사그라다 파밀리아(Sagrada Familia:성 가족) 성당!
세계 각국에서 밀려온 관광객들의 최대관심은 바로 이 성당에 있는 게 아닌가싶다.
아침 일찍 서둘러 나갔는데도 매표구에 사람들이 100m는 더 늘어서있다.
한 시간이 더 걸려 표를 샀는데 오후 1시의 입장권이다.
점심을 일찍 먹고 들문 앞에 또 줄을 섰는데 차례가 되었을 때 12시40분이라 그 옆에서 20분을 기다리다 들어가란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이 성당은 1882년 건축가 비야르(Vill)에 의해 설계되었으나 성당건설위원회와의 의견차이로 그는 다음해인 1883년에 사임하고, 31살의 가우디(Antni Gaudi i Cornet:1852~1926)가 인계받아 43년이란 세월을 이 건축을 위해 온 정성을 기우렸으나 완성하지 못한 채 불의의 교통사고로 74살에 죽는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외부>
그가 죽은 지 90년이 지난 지금도 대형 타워크레인 3대가 작업을 계속하고 있는데, 현재 건설위원회에서는 앞으로 준공을 하기까지는 30년, 어쩌면 100년, 아니 수백 년이 더 걸릴지도 모른다고 보고 있으며 전문가들의 견해도 가지가지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아름다운 건물을 갖고 싶은 것은 한결같은 욕망인가보다. 하물며 하느님을 모시는 성당이야 더 말할 나위 없다.
로서아(露西亞:Russia)의 뇌제 이반(Ivan)4세는 1555년~1560년까지 5년에 걸쳐 지은 「성 바실리 성당:Saint Basills Cathedral」의 아름다움에 반하여 그 보다 더 아름다운 건물을 짓지 못하도록 두 설계자를 장님으로 만들었다는 일화가 있거니와 47m의 팔각형 첨탑을 중심으로 주위에 8개의 양파지붕 건물을 배열한 이 성당을 어찌 여기 비기랴.
그 앞 사그라다 파밀리아 광장에서 바라뵈는 외형이 자못 웅대하여 한참동안 넋을 잃게 하거니와, 본당 안의 아스라이 높은 천정에서 빙 둘러 이어져 내려오는 현란한 색의 조화엔 그만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한 마디로 나를 감동케 한 것은 화려함이 아니라 황홀함이었다.
<성당 내부>
우리는 제단 앞에 앉아 잠시 묵상한 다음 지하층을 둘러본 뒤에 첨탑으로 올라갔다.
첨탑은 곧 성당의 상징이고 위엄이기도 하다.
이곳 첨탑은 모두 18개가 될 것이라는데 이른바 「영과의 문」 「탄생의 문」「수난의 문」에 12사도를 상징하는 종루로 100~110m의 첨탑을 각각 4개씩 세우고 거기에 길고 짧은 종풍금 7개씩 총84개를 매달았는데, 그 외 170m높이의 그리스도 탑과 125m의 섬모 마리아 탑, 그리고 120m의 복음서가(福音書家) 탑4개를 합하여 모두 18개가 세워지게 될 것이라 한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 첨탑의 다락방에서 바라 뵈는 시가지가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시간을 알리고 미사 때 연주하는 성가가 흘러나오는 종풍금 소리를 듣는 시민들의 마음은 어떨까......
오를 때는 표를 사서 승강기로 올랐지만 내릴 때는 비좁고 급한 나사못 계단을 통해서 내려와야 되는데 현기증으로 핏기 잃은 아내의 얼굴을 보았는지 안내인이 승강기를 타고 내려가라 한다.
또 특이한 것은 수난의 문 파사드(Facade) 위에 있는 길이 7m의 예수님 십자가고상이다.
이는 두말할 나위 없이 옛 골고다 언덕에서 처참하게 최후를 맞으신 예수님의 모습으로 천주교도들이야 마땅히 소중히 여기는 신앙의 상징이디.
그런데 그 고상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 경이롭다.
<예수님 십자가 고상>
스페인에서 꼽히는 조각가인 70대 후반인 스피락스는 성당안의 작업실 옆에 작은 방 하나를 마련하여 여기서 지내며 심혈을 기우려 만든 작품이다.
낙성식에서 이 모습을 본 관중들 속에서는 긴 한숨이 흘러나았으나 비판여론은 점차 가시어 지금은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다한다.
가우디가 그랬던 것처럼 일생을 독신으로 살아온 노 조각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왜 나신으로 새겼냐고 던지는 물음에 “성서의 그리스도 수난 구절(요한복음 19장 23절)을 잘 읽어보십시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는 곧 사람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남겨놓고 간다는 뜻으로 그게 바로 진실이고 진리라는 뜻인 듯하다.
조각가 스피락스는 이 작품을 만들며 용기를 가지고 임했다는데 그가 아니었다면 아무도 주님의 나신을 새기지 못했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성당 지하실에 마련된 석고 모형>
천재적인 건축가 가우디!
그는 기존의 고전주의적 건축양식을 벗어나 하늘과 구름과 바람과 나무 심지어 곤충 등을 관찰하여 곡선을 채택하고 색과 빛의 조화를 모색하는 혁명적인 설계로 밀라 주택, 바트요 주택, 구엘 저택 등 불후의 작품을 남긴 그는 깊은 신앙심과 금욕과 절제된 생활 그리고 온갖 힘과 정성을 다하여 이 위대한 성전의 창조에 매진하다 세상을 등졌다.
「성당의 건축은 지지부진하였다. 그것은 하느님께서는 결코 서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그가 남긴 이 한마디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시간이 걸려도 완벽을 추구하겠다는 의지인 듯하다.
떠도는 이야기대로 앞으로 이 건물을 완성하는데 수백 년이 더 걸린다 해도 이 뜻이 이어졌으면 한다.
천재적인 두뇌! 물론 그의 머리로 구상되었지만 그 깊은 믿음을 지닌 가슴으로 하느님께서 영감을 내리신 것은 아닐까......
3. 천재는 또 있었다
1881년 서반아의 남부 마라가(Mālaga)에서 태어난 그림의 천재 피카소(Pablo Ruiz Picasso: 1881~1973),
그는 10살 때 미술교수인 아버지를 따라 북서부의 라 코르냐(La Coruńa)로 이사를 하고, 14살 때 다시 바르셀로나로 옮긴다.
그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스케치화법을 익히고 유채화에도 재능을 보였다는데 틈만 나면 늘 그림을 그리고 교과서나 노트의 여백에도 그림낙서로 채우곤 했다한다.
그의 어머니 마리아(Maria Picasso Lopes)는 아들이 그린 스케치나 나뭇조각에 그린 그림들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챙겨두었던 것을 이 미술관이 개관 될 때 모두 기증하였다.
피카소는 어머니를 퍽 사랑했었던가 보다.
<피카소의 어머니>
그의 이름 가운데 「Ruiz」는 아버지의 성이고 「Picasso」는 어머니의 성인데 초기작품에는 「Pablo Ruiz Picasso」라 낙관을 했으나, 뒤에는 모두 「Picasso」라고만 낙관을 하고 있다.
바르셀로나를 방문하는 관광객의 수가 매년 늘어나 연간 250만 명이 넘은 것으로 보도된바가 있다는데 성가족성당, 피카소미술관 구엘 공원(Park Gűell) 등에 집중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중세 바르셀로나 간선도로이었던 몬카다(Montcada) 골목길에 나란히 선 5동의 대 저택을 하나의 미술관으로 이용하고 있는데, 이는 피카소의 친구였던 사바르테스(Sabartes:1881~1968)가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1963년 3월 9일 개관한 것이다.
현재 미술관에는 무려 3.600점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는데 크게 두드러진 것이 소년기 작품으로 「바르셀로나전시회 수상작인 「첫 영성체」이며, 또 하나는 마드리드 미술학교 총 전람회에서 명예 상을 받은 「과학과 자비」로 그가 15살과 16살 때 그린 대작들이다.
「첫 영성체」는 제대 앞에 꿇어앉은 누이동생 로라의 모습이고, 「과학과 자비」는 침대에 누워 임종을 맞는 부인의 바른 손을 의사가 진맥하고 있는 모습인데 부인의 왼쪽에 간호사에 안긴 어린아이가 아무것도 모르고 엄마를 바라보고 있다.
이 그림 앞을 왼쪽에서 바른 쪽으로 또 바른 쪽에서 왼 쪽으로 걸어 다니며 느끼는 감정이 사뭇 다르다.
<과학과 자비>
누가 이 그림을 16살의 소년이 그렀다고 생각하랴, 화법도 화법이려니와 기막힌 그 구도가 가히 천재적이라 할 것이다.
피카소의 아버지는 이 그림을 보고 화구 일체를 아들에게 넘겨주고 다시 붓을 들지 않았다 전해진다.
피카소가 20살이 되면서는 종종 불란서 파리에 드나들며 그림 그리는 친구들을 사귀었으며, 이곳 바르셀로나에서도 여러 화가나 조각가들과 만나 미술 문예 등을 논하곤 했다는 데 그곳이 바로 「네 마리의 고양이」라는 카페 레스토랑이었다.
그때만 해도 아직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었던 피카소는 이 카페의 메뉴나 간판 등을 그리며 생활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그 스케치 한 점이 미술관에 전시되어 눈길을 끈다.
피카소가 그린 그림이 얼마나 많은지는 자료가 없어 찾아보지 못했다.
그러나 세계 각국의 미술관에 그의 그림이 한 두 점쯤 걸리지 않은 곳이 없으며, 독립된 그의 미술관만도 이곳과 파리 그리고 마라가 등 세 곳이나 되니 구 수량 또한 상당할 것으로 여겨진다.
이미 20세기에 세계최고의 화가라는 평가를 받은 피카소가 76회의 생일을 맞아 「지금까지 내가 한 일은 먼 길을 걷기 위한 첫걸음이다. 먼 훗날에 전개될 것에 대한 예비단계에 불과하다......」고 말했던 그는 76살이던 1957년에 58매의 「궁녀들」시리즈를 그렸으며, 82살이던 1963년에는 3월부터 6월까지 40매의 「화가와 모델」시리즈를 이루어 낸다.
피카소가 85살이던 1966년부터 89살인 1970년까지 4년 동안에 뎃상 500점, 판화 350점, 회화 200점과 그 외 많은 도기 등을 그리고 만들었다니 실로 놀라운 정력이다.(자료:ESCUDO DE ORO)
천재적인 미적 감각을 지닌 그의 여성 편력도 대단한 것이었던가 보다.
그가 21살 때 몽마르트에 허름한 작업실을 마련하여 그림을 그리며 미모의 모델 동갑내기 기혼녀 페르낭드 올리비에(Fernande Olivie)와 9년 동안 동거를 했으니 그녀가 첫 번째 여인이요,
두 번째는 그가 30살에 만난 역시 동갑내기인 에바 구엘(Eva Gouel)로 그녀는 1915년 결핵으로 죽는다.
<화가와 모델>
그 뒤로 러시아 발레단원인 10살 아래인 25살의 이름다운 올가 코클로바(Olga Koklova)를 만나 그해 바로 정식결혼을 했으니 그녀가 세 번째 여자이자 첫 부인인데 아들 하나를 낳고는 갈라선다.
그의 심미벽(審美癖) 아니 탐미벽(探美癖)은 가시지 않았던가보다.
네 번째로 그는 45살 때 17살의 금발머리 마리 테리즈(Marie Therese)를 발견하고는 여섯 달 동안이나 쫓아다니며 모델로 앉힌 다음 그녀와의 사이에서 딸 하나를 낳았으나 의문의 자살로 끝난다.
다섯 번째 만난 여인은 성질 급한 사진작가 도라 마르(Ddora Maar)인데 그녀는 정신착란증으로 입원하고, 62세의 피카소는 22살의 프랑수오즈 질로(Francoise Gilot)와 작업실에서 살림을 차렸으니 그녀가 6번째 여인이다.
법대출신의 이 지적인 여인과의 사이에 아들과 딸을 두었으나 피카소가 또 17살의 여기자와 염문이 일자 그에게 환멸을 느낀 그녀는 피카소를 버리고 법정투쟁으로 자식들에게 엄청난 재산을 물려준다.
수많은 여인들을 버려온 피카소가 처음으로 여인에게서 버림받았을 때 그 심정이 과연 어떠했을까......
그러나 피카소는 여복이 많은 사람이었던가 보다.
그가 도자기에 심취해 있을 때 공장주의 조카로 30대 초반의 이혼녀인 자클린 로크(Jacqueline Roque)를 만나 1961년 비밀결혼을 하였으니 그녀가 피카소의 일곱 번째 여인이자 두 번째 부인이며 또한 마지막 여인이 된다.
30살의 젊은 여인이 어찌 80의 늙은이와 결혼을 하느냐는 주위의 물음에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청년과 결혼했어요! 늙은 건 오히려 나지요.-라 대답했다던 그녀는 언제나 피카소를 “나의 주인님”이라 부르며 헌신적이고 절대적인 사랑과 내조를 다한 현명한 여성이었다.
피카소는 1973년 4월 8일 92세를 일기로 자택에서 조용히 눈을 감고, 그녀는 피카소가 죽은 뒤 소장하고 있던 작품 모두를 미술관에 기증하고 열세 해 동안 두문불출하다가 1986년 권총 자살로 인생을 마쳤다.
4. 영광은 하느님께
「五岳歸來不看山 黃山歸來不看岳」이라 오악에 다녀와서는 다른 산이 안보이더니, 황산에 다녀와서는 오악도 눈에 들지 않더라! 던 명나라 말기의 지리학자 서하객(徐霞客:宏祖)의 말이 떠오른다.
저 유명한 성가족 성당을 보았는데 이제 더 볼 성당이 어디 있겠느냐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계획된 일정이라 람블라 거리의 동부에 있는 바르셀로나 대성당(Catedral)을 찾았다.
<바르셀로나 대성당 정면>
람불라 거리 중앙부 바로 동쪽에 있는 성 자우마(St. Jaume)광장은 카탈루냐 정치의 중심지로 북쪽에 주정부의 청사가 남쪽에는 바르셀로나시 청사가 서로 맞바라보고 있다.
주정부 청사 현관 파사드에는 서반아 국기와 카타루냐 국기가 게양되어 있고, 시청사에는 하나 더 바르셀로나시기를 합하여 세 개가 펄럭이고 있는데 대성당은 거기서 멀지 않는 곳에 있었다.
이 성당은 바르셀로나에 있어 고딕건축의 대표적인 건물이라는데 1298년에 건설하기 시작하여 150여년이 걸려 1449년에 준공한 로마네스크(Romanesque)양식의 건축을 19세기 종반에 들어 현관 파사드를 개축하므로서 오늘 날 보는 장엄한 고딕양식 건물로 바뀐 것이라 한다.
광장에서 바라보는 길이 93m에 폭 40m인 성당 그리고 높이70m의 첨탑과 종루가 장엄하다.
성당 안으로 들면 우선 제대 뒤의 스테인드그라스창과 드높은 천정을 통해 들어오는 휘황한 빛에 산란한 마음이 씻기는 듯하며, 제대 뒤로 빙 둘러 안치된 성화와 조각들이 성스런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 모두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인간들의 노력 아니랴.
<성당 내부 제대>
이 성당의 수호성인은 산타 에울라리아(Santa Eularia)란 여성이다.
신앙을 지키다 13살 때 십자가형을 받아 순교하였다니 천주교의 박해는 동서가 다르지 않았던가 보다.
주 제단 밑에 만든 영묘(靈廟)안의 석관에 성인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니 내 마음 또한 경건해진다.
골목길로 빠져 잠시 헤매다가 대성당 동쪽으로 멀지 않은 왕의 광장(Placa Del Rei)을 찾았다.
<성당 내부 성모상>
이름은 광장이지만 실은 볼품없는 비좁은 마당이었다.
다만 여기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역사를 지녔다는 점에서 종요로운 곳일 뿐이다.
1492년 아메리카 대륙 발견의 위업을 이루고 돌아온 콜럼버스가 그 때 마침 카탈루냐에 행차 중인 페르난도(Fernando)왕과 이사벨 여왕에게 보고하기 위해 사랑하는 배 산타마리아호의 정박지를 바꾸어 바르셀로나로 온다.
보고 장소는 바로 이 왕의 광장이었다.
광장의 바른쪽 14계단을 오른 평평한 자리에 양 왕이 앉아있고, 콜럼버스는 자우마거리에서 부터 새빨간 카펫이 깔린 광장을 당당히 걸어 들어와 대륙 발견을 자랑스럽게 보고한다,
그리고 양 왕의 경제적 지원에 감사드린다며 현지에서 가져온 많은 토산품을 바친다.
그 때 그 생생한 모습들의 벽화가 주청사 대 광장에 걸려 있다는데 시간에 쫓기어 가보지 못했다.
어디까지 믿어야할지는 모르지만 여왕은 어려운 재정과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콜럼버스의 후원자가 되어 수많은 선박과 선원 그리고 막대한 자금을 지원했다.
매우 아름다운 용모와 침착한 성격을 가진 여왕은 뜻밖에도 남편 페르난도 왕과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데, 게다가 외아들의 요절과 딸들의 불행한 결혼 등 정신적 괴로움 속에서 우울한 나날을 보내던 여왕이 잘 생기고 용기 있고 남자다운 콜럼버스를 사랑하게 된 것을 어찌 우연이라 해야 하랴......
눈부신 금관을 쓰고 하얀 드레스를 걸친 여왕이 금방이라도 열네 계단을 종종걸음으로 내려올 듯도 하다.
<왕의 광장>
이사벨라 여왕이 승하한 뒤 대신들은 콜럼버스를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페르난도 2세는 재산을 몰수하는 등 콜럼버스는 말할 수 없는 수난을 당하며 몰락의 길로 떨어져 1506년 바야돌리드(Valladolid) 자택에서 쉰다섯의 아까운 나이로 눈을 감아 세비야(Sevilla)대성당에 묻힌다.
그 뒤 자손들에 의해 도미니카공화국 산토 도밍고(Santo Domingo)대성당 으로 이장되는 등 우여곡절 끝에 지금은 다시 세비야 대성당에 누워있다니 사련(邪戀)은 시작할 때의 그 달콤함처럼 종말은 결코 행복하지 못한 것인가 보다......
5. 또 하나의 골고다
건축가 가우디는 서반아 카탈루냐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대학시절에 바르셀로나로 이사하여 가장 위대한 예술가가 되었다.
1926년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지만 89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의 작품(성가족 성당)은 지어지고 있으며, 그는 근대 건축사에서 가장 특출한 인물로 지칭되고 있다.
시대사조나 유행에 흔들리지 않고 자기만의 독창적인 작품을 만들어 완벽한 조화를 이루어내는 데는 그 누구도 그를 따르지를 못했다.
그래서 그는 20세기의 가장 빛나는 천재로 불린다.
성장과정에서 평범했던 그가 뛰어난 재능을 나타내자 알아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으나, 오직 한 사람 그의 예술적 창조성을 이해해주는 구엘(Eusebe Gűell)을 만난 것이 그의 인생을 바꾸게 된다.
돈 많은 사업가 구엘 백작은 그의 건축비가 많이 든다는 세인들의 비난에도 “그만한 비용이 들지 않고 어찌 예술이 창조되겠느냐”고 변명하며 적극 지원했다.
<구웰공원 정수리>
그리하여 백작은 바르셀로나 북부 지중해가 바라다 보이는 완만한 270m의 페라다 언덕에 20헥타(6만평)의 토지를 확보하여 이곳을 60구획으로 나누어 별장풍의 고급 주택을 세울 계획을 세운다.
설계와 공사는 당연히 가우디의 몫이었다.
이에 그는 무성한 자연림을 최대한 보존하고 세라믹 파쇠예술의 묘미를 살려 카탈루냐의 전통미와 자연환경과의 조화를 이루어낸다.
그러니 이 계획은 20세기 초의 세계불황과 제1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주택의 원매자가 나타나지 않아 겨우 세구역이 팔렸을 뿐이다.
그래서 이 사업은 중지되고 백작의 사업도 위축되어 1918년 백작이 죽은 뒤 유족들이 이를 바르셀로나 시당국에 매각하므로 써 시민들의 휴식공간인 이른바 「구엘 공원」이 되었으며, 1984년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기에 이른다.
우리는 물매 급한 언덕길 가운데 설치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돌탑처럼 쌓아 올린 정수리 전망대가 예수님수난의 골고다 모습인데 여기 돌 십자가가 서있다.
가우디는 왜 이곳을 이렇게 꾸몄을까......
사방팔방으로 펼쳐진 시가지의 모습이 참 아름답다.
<공원에서 바라본 시가지>
내려오는 길섶에 자란 무성한 백년초 손바닥만 한 잎사귀에 방문자들이 이름을 새겨 상처투성이다.
나무 한 그루도 돌덩이 하나라도 훼손하지 않으려는 것이 가우디의 뜻이었다는데, 이름 석 자를 남기고 싶은 졸부들의 짓인가 보다.
가우디가 꾸불꾸불 뱀이 기어가는 모습으로 만든 긴 벤치처럼 매표구에 늘어선 입장객들도 장사진을 이루었다.
건물 내부를 들어가 볼 수 있는 유료구간은 2시간 뒤에나 입장이 가능하다기에 무료구간만을 구경하고는 가우디의 또 다른 흔적을 찾아 뒤돌아섰다.
카탈루냐 광장 북쪽 구라시아 길 43번지에 있는 사업가 호세트 바트요의 요청에 따라 1904년에 리모델링했다는 바트요저택(Casa Batllό)과 그 길 92번지에 있는 라 페드레라(La Pedrera)라 알려진 연합주택 밀라저택(Casa Milἀ)은 모두 그의 예술성을 느끼는 데 모자람이 없었다.
<밀라 저택>
세계의 이목이 여기에 집중되어 찬탄을 아끼지 않는다는 가우디의 주택을 상징적으로 말한다면 현관의 기둥으로부터 출입문, 창틀, 창살, 베란다, 지붕 심지어 가구에 이르기까지 휘고 뒤틀리고, 비딱하고 틀어져 좌우가 모두 달라도 서로 어울려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동적인 정감을 느끼게 한다.
어찌 보면 바람에 일렁이는 물결 같기도 하고, 철석철석 파도소리가 들리는 듯도 하다.
내 건축에 대하여 무엇을 알랴만 지금까지 지탱해온 그 어떤 건축양식에도 철저하게 반기를 든 그의 혁명적 사고가 그저 놀라울 뿐이다.
그러나 세계가 경탄한다는 이른바 가우디건축이 원산지인 이 바르셀로나에서 현대 도시계획에 의해 새롭게 건설된 신시가지에서도 더 이상 눈에 띄지 않는 것은 어떤 연유에서일까.
그 외 여러 곳에 그의 천재적인 숨결은 스며있었다.
6. 바르셀로나 하늘에 나부끼던 태극기
앞서 소개한 구엘 공원이 바르셀로나 시내를 조망하기에 좋은 곳이라면 이곳 몬쥬익(Montjuic)언덕은 저 푸른 지중해와 매끈한 해안선을 바라보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다.
우리나라 서울 같지는 못하지만 여느 유럽국가에서 보기 드문 고층건물들이 여기저기 눈에 띈다.
<W 호텔>
바로 눈 아래 바닷가에 솟아오른 웅장한 건물이 W호텔인데 범선의 모양을 본뜬 것이며, 동쪽 멀리 솟아오른 단조롭지만 특이한 건물이 바르셀로나 신시가지를 대표하는 아그바르 탑(Torre Agbar)이고, 서쪽 언덕 아래 드높은 조형물이 올림픽을 상징하는 칼라트라바(Calatrava)탑이다.
남쪽이 지중해에 접하고 북쪽이 산으로 둘러싸인 천혜의 자연조건을 갖춘 바르셀로나 조석으로 부는 신선한 바람이 도심의 오염된 공기를 말끔히 씻어준다.
해발 210m의 몬쥬익 언덕,
옛날 로마인들이 이곳에 신전을 짓고 신들의 제왕 쥬피터(Jupiter:희랍의 Zeus)를 제사 지냈다는데 「Montjuic」이란 이름은 산언덕(丘)이란 뜻의 「Mont」와 「Jupiter」라는 합성어로 이곳이 바로 바르셀로나의 발상지 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몬쥬익 언덕의 성새>
이곳은 1992년 오림픽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
서반아 정부는 당초 1936년 올림픽을 치를 계획이었으나 좌우익의 항쟁과 시민전쟁 등 정치적인 혼란으로 단념하고 독일로 넘어갔으니 그것이 바로 베르린 올림픽이다.
그 때 이미 몬쥬익 언덕에는 매인스타디움이 마련되어 올림픽 정신의 심볼로써 보존되어오다가 1992년 56년 만에 올림픽 주경기장으로서 빛을 보게 된다.
이 역사적인 터전에 태극기가 휘날렸으니 그것이 바로 한국의 아들 황영조 선수의 마라톤 우승이다.
1936년 베르린 올림픽의 손기정 선수의 우승이후 56년 만에 회득한 마라톤 금메달!
주경기장을 눈앞에 둔 물매 급한 언덕길을 2~3위로 뒤쫓아 오던 일본과 독일 선수를 따돌리고 온 힘을 다하여 쏜살같이 달려 1위로 꼴인 한 뒤 쓰러져 「몬쥬익의 영웅」으로 칭송되었으니 그의 의지와 땀과 얼이 여기 스며있다 할 것이다.
<바다로 향항 옛 대포>
바람에 휘날리던 태극기가 지금 내 눈에 아른거린다.
이 언덕 정수리에 옛 성새가 남아 있다.
지금은 그 안에 무기 박물관이 되어 있으나 요소요소마다 육중한 대포가 바다 쪽으로 포문을 향하고 있으니 어느 땐가는 저 큰 입에서 침입하는 외선들을 향해 불을 뿜지 않았으랴......
특히 1808년 나폴 레온 군이 공격해올 때 과감하게 맞서 항전했던 곳으로 알려지고 있디.
육지와 바다 어느 쪽을 봐도 경관이 아름다운 곳,
1936~1939년까지 시민전쟁 때 반 후랑고 측에 섰던 수많은 정치가, 문화인, 시민들이 예서 총살을 당했다니 민족적 아픔이 남아있는 곳이기도 하다.
돌아오는 길, 이제는 돌아볼 수 없는 투우장엘 들렀다.
-아빠, 스페인에 가시면 뭥 보고 싶으세요?- 딸아이의 전화가 왔을 때,
-그래 투우가 한 번 보고 싶구나!-라 답했었다.
붉은 천 마카레를 흔들어 사나운 소를 현혹하고 흥분시켜 끝내 날카로운 작살(반데리아)로 찔러 죽이는 잔인한 것을 보고 싶은 까닭은 서반아가 아니면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다는 것 외에 어느 한 쪽은 어차피 죽어야 할 어쩔 수 없는 긴박한 상황에서도 의연한 투우사의 모습이 낭만으로 보였던 젊은 시절이 있었기 때문이지 꼭 봐야겠다는 건 아니었는데 발길을 돌린 곳이 에스파냐(Espanya)광장 앞에 있는 옛 투우장(Aremas de Barcelona)이었다.
<옛 투우장>
겉은 옛날 영화에서 봤던 그 모습인데 그 안은 호화로운 상품들을 진열한 쇼핑몰이었다.
인간이 동물의 살코기를 영양원으로 하고, 또 질병 예방을 위한 실험을 동물을 통해서 하는 한 수많은 동물들이 희생되지만, 투우는 이미 동물 학대를 이유로 금지 되어 찾아 볼 수 없다.
이번에야 알게 된 일이지만 투우는 농업과 목축의 풍요를 빌어 황소의 죽음을 신에게 바치는 의식에서 비롯되었다니 인당수 물귀신에게 숫처녀를 바치던 풍습은 어찌 이해해야하랴.
라 람블라 거리에서 온 몸에 금가루를 뒤집어쓰고 투우사 복장으로 관광객들과 사진을 찍던 그 사람이 어쩌면 서반아의 마지막 투우사가 아닐까싶다.
7. 바르셀로나에서의 마지막 밤
일반적으로 도로는 좁고 골목이 많아도 곳곳에 널찍한 광장이 있어 시민들이 여기모여 대화하며 휴식하는 모습들이 정겨워 보인다.
람블라 거리 중간 지점에서 동쪽 골목으로 들면 또 하나의 숨은 광장을 만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레이알(Reial)광장이다.
네모반듯한 넓지 않은 이 광장은 작은 호텔과 음식점 그리고 춤과 노래 등을 감상하는 소극장들로 둘러싸여있다.
그 중앙에 아리따운 여인상 셋이 받치고 있는 분수대 양쪽으로 등갓 여섯 개씩을 매단 가로등이 있는데 이것이 바르셀로나 시가 현상공모를 통하여 채택된 가우디의 작품이라 한다.
<가우디의 가로등>
이곳이 북위 40도면 우리나라 북한 신의주와 맞먹는 지역인데도 해양성 기후의 탓인지 아열대식물인 아름드리 야자와 종려나무들이 전봇대만큼 자라 남국의 정취를 풍긴다.
우리는 정열적인 서반아 민속춤인 플라멩코(Flamenco) 공연을 보기 위해 줄을 서고 있는데 60대 전후로 보이는 교양미 넘치는 한국인 아주머니 한분이 찾아와 인사를 한다.
자기는 미국에 사는 한국교민으로 미국인 부부들 세 쌍이 함께 왔다며 미국인 남편도 소개를 하는데 인상이 좋은 그 친구는 처가나라 늙은 손을 퍽 반가워했다.
관중 약 100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작은 극장 좁은 무대에 등장하는 사람은 모두 여섯 명, 악기라고 해야 기타 하나와 작은 북이 전부다.
처음 네 사람의 남자들이 나와서 노래를 부르더니 검은 긴 드레스를 입은 집시 같은 무희가 굽이 도톰한 구두를 신고 나와서 춤을 춘다.
단단한 각질의 무대바닥을 구두 끝으로 차고, 바닥으로 때리고, 뒤꿈치로 찍으며 딱, 딱, 따다닥, 딱딱, 소리를 내며 요란스럽게 발짓을 하고 팔을 흔들며 몸짓을 하다가 갑자기 힘차게 딱 딱 바닥을 딛고 관중에게 고개를 돌려 멈추어 미동도 하지 않으면, 관중석 뒤편에서부터 우레와 같은 환호와 박수가 터져 나온다.
그러기를 몇 번 반복하다가 치렁치렁 레이스가 달린 긴 옷자락을 살금살금 무릎 위까지 당겨 올리는데, 거기서 나타난 것은 하얗고 미끈한 각선미의 종아리가 아니라 근유질의 거친 다리였으니 얼마나 연습을 했으면 저리 되었을까, 이 또한 평탄한 길이 아니구나 싶었다.
그리고는 다리도 떨고, 몸도 떨고, 몸 위에 걸친 옷도 경련을 한다.
그러면 관중 속에서 또다시 환호와 박수가 터져 나온다.
여인의 춤이 끝나자 보다 날쌘 남자의 역동적인 춤이 이어지고, 이 춤이 끝나자 빨간 드레스로 바꿔 입은 무희의 춤이 또 한 차례 있었지만 그 춤들이 서로 어떻게 다르며 무슨 의미인지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에 이어 무대 뒤쪽에 앉아 있던 남성가수(칸타오르)가 의자 옆에 놓인 페트병의 생수를 마시며 몇 번인가 목청을 가다듬더니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한 마기도 알아듣지 못하지만 그야말로 혼신의 힘을 다하여 심저에서부터 울려나오는 그 노래는 마치 우리나라 장사익이 영혼을 통해 부르던 찔레꽃처럼만 들린다.
그 소리가 기도라면 하늘인들 어찌 무심할 수 있으며, 그 소리가 사랑을 호소하는 것이라면 목석인들 어찌 맘 문을 열지 않을 수 있으랴.
인생길이 어디인들 평탄하지만은 아닌 듯 싶다.
공연이 끝나고 뿔뿔이 헤어지던 레이알 광장, 손을 잡고 이별을 아쉬워하던 이국의 부부들, 나도 10년 지기를 떠나보내는 마음이었다.
아내의 손을 잡고 익숙지 않은 밤길을 거를 때 “여보, 이번 여행에서 당신이 내 손을 가장 많이 잡아주시는 것 같네요!” 아내의 말이었다.
이튿날은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벌기 위하여 밤 비행기를 예약했다.
그래서 오후4시까지 공항에 도착할 량으로 가까운 개선문(凱旋門:Arc del Triomf)을 가보기로 했다.
우리 개념으로 개선문은 당연히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오는 군사를 환영하기 위해 세운 문인데, 뜻밖에도 이곳은 1888년 개최한 만국박람회를 기념한 벽돌로 쌓은 문이었다.
널찍한 대로를 통하여 남쪽으로 내려가면 옛날 군사요세가 있었던 31핵타(93.000평)의 부지를 역시 만국박람회를 대비하여 공원으로 조성했다는데 옛 요새 이름 그대로 시우타데야(Ciutadella)공원이다.
<시우타데아공원 분수대>
여기서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것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분수와 폭포로 쥬셉 폰 세레 작이라는데 당시 학생이던 가우디가 참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네 마리의 천리마가 이끄는 눈부신 황금빛 전차를 머리에 인 신전 풍의 건축물, 그 중앙에서 쏟아져 내리는 폭포, 그 앞 호수에서 솟아오르는 분수 그리고 날개달린 괴물의 입에서 뿜어대는 물줄기 모두가 웅장하기만 하다.
또 하나는 서반아의 경제학자이자 문인인 아리바우(Aribau:1798~1862)이다.
재무장관과 왕실의 재정상무관을 지낸 그는 19세기 서반아문예부흥의 효시가 되었다는데 그의 깊은 애국심에서 우러나온 「조국에 바치는 찬가 : Oda a la patria」로 더욱 유명해진 사람이다.
이렇게 해서 바르셀로나의 일정을 모두 마치고 비행기에 올랐으나 마음은 아직 바르셀로나를 맴돌고 있다.
<아리바우의 동상>
어디를 가나 펼쳐지던, 사연을 몰라도 호기롭고, 예술을 몰라도 아름답던 갖가지 구축물과 조각품, 그리고 동상과 조소, 신상 석상 등이 눈에 선하다.
광화문 세종로에 세워진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의 동상만으로 만족할 수는 없을 듯하다.
어떻게 보면 좀 냉정한 듯해도 길을 물으면 애써 가르쳐주던 그들, 느긋하고 게을러 보여도 성질이 급한지 교통신호가 바뀌기 전에 언제나 미리 건너던 그들이 지하철을 탈 때 낯선 이방인에게 자리를 양보해주던 친절이 잊히지 않는다.
첫댓글 많은 분께 매우 도움되는
玉書를 연재해 주시니
너무 고맙습니다
무엇보다 年老하신데도
헌신이라 여겨지며
많은 분들이 지차철 등
이동 시에 유익하게
폰을 통하여 읽을수 있어
좋겠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이제 낡아서
신선발랄한 젊은 세대를 못 따라간다는 느낌에
스스로 소외되어가는 늙은 세대를
늘 "선배"라는 좋은 이름으로 챙겨주시는 진심이
내가슴에 따스하게 다가옵니다.
전광회 카톡에 실을까도 생각해 보았으니
이제 시력이 미치지 못해 안타까울 뿐입니다.
감사합니다.
네.. 고맙습니다
세월이 흘러 감이 안타깝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