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니오 모리코네(Ennio Morricone, 1928년~2020년)
이탈리아의 작곡가, 편곡가, 오케스트레이터이자 지휘자.
미국의 존 윌리엄스와 함께 전세계 영화팬들과 음악팬들의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고
국경과 세대를 뛰어넘는 최고의 명곡들을 작곡한, 현대 영화 음악의 거성이자
20세기 전후세대 작곡가 중 가장 영향력있는 거장중의 한 사람이다.
1960년대부터 반세기가 훨씬 넘는 세월동안 수 많은 유럽 영화와 할리우드
영화들의 작업을 오가며 전설적인 작곡가로 세계적인 명성을 떨쳤지만 평생 고향인
이탈리아의 로마에 살면서 엄청난 양의 다작을 해낸 것으로도 유명하다.
지금까지 400여 편이 넘는 영화 및 드라마 음악과 100여 곡에 이르는 클래식 음악을 작곡했다.
엔니오 모리코네의 작품 리스트를 보면 그가 지난 60여년간 영화, 연극, 뮤지컬, TV,
국제적 이벤트, 콘서트 홀, 비디오 게임 (*) 등 음악 예술이 향유될 수 있는 거의
모든 분야에서 창작과 지휘 활동을 병행해온 전설적인 존재였음을 알 수 있다.
탁월한 음악성과 대중성을 고루 갖춘 그의 앨범들은 연주음악 작곡가로서는
드물게 전세계적으로 7,000만 장 이상이 팔렸고 이중 프랑스에서 650만 장,
미국에서 300만 장, 한국에서 200만 장 이상이 팔렸다.
전세계 인터넷 음악 데이터 베이스인 Allmusic에 확인해보면 무려
3,301장의 앨범에 그의 크레딧이 올라와 있는 것을 확인해 볼 수 있다.
1928년 11월 10일 이탈리아 로마 중심부의 트라스테베레에서 태어났다.
엔니오 모리코네가 태어나던 날은 이탈리아가 파시스트 정권
통치하에 들어가던 날이었다고 한다.
나이트 클럽과 댄스 클럽 등지에서 활동하던 프로페셔널 트럼펫 연주자였던 아버지
로베르토 모리코네 덕분에 어릴 적부터 트럼펫과 음악 이론을 배울 수 있었다.
어머니 리베라 모리코네는 소규모 가내직물업을 하며 엔니오 외에도 프랑코,
아드리아나, 마리아, 알도의 5남매를 키웠다.
엔니오는 여섯살에 처음 곡을 쓰기 시작하고 아홉 살에 이미 산타 체칠리아
국립음악원에서 개인적으로 트럼펫 레슨을 받을 정도로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다.
아버지의 연주가 집안 전체의 유일한 수입원이어서 아프거나 하시면
종종 어린 엔니오가 대신 나가서 클럽 연주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열네 살에 공식적으로 같은 음악원에 등록해 일종의 예비 과정인
하모니 프로그램과 트럼펫 전공 본과정을 차례로 이수했다.
이 기간 동안 트럼펫 외에 작곡과 지휘도 같이 배웠고, 특히 작곡 지도 교수였던
전위파 성향의 작곡가이자 20세기 현대음악의 위대한 거장인
고프레도 페트라시(Goffredo Petrassi)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기간에 한창 예민한 10대를 보내며 음악 공부에 매진하고자 했지만
비무장 도시인 로마에 독일 폭격기들의 무차별 폭격으로 인해 극심한 굶주림과
전쟁의 참상을 겪으며 힘들게 생활해야 했다.
이 때 어린 모리코네가 겪은 처절한 고통과 생생한 경험은 평생 그의 기억에 남아
이후 영화 음악가로서 작곡한 작품들에도 크게 반영되었다고 한다.
당시 작은 악단에 소속되어 있던 모리코네는 독일군이 로마를 점령했을 때는
독일군들 앞에서 트럼펫을 연주하고 2차대전에 승리 한 미군이 로마에
입성했을 때는 미군들 앞에서 트럼펫 연주를 한 일화가 있다.
1946년에 트럼펫 연주 전공으로 학위를 따서 음악원을 졸업했지만 작곡을
제대로 깊이 있게 배워야 겠다고 생각한 모리코네는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
작곡과에 재입학해 페트라시 교수의 지도 하에 공부를 계속 이어 나갔다.
이 당시 클래식 음악계는 극히 보수적이어서 연주자가 작곡을 배우고 싶어한다는 것은
거의 스캔들에 가까웠다고 한다.
생계를 위해 밤에는 틈틈히 트럼펫으로 클럽 연주를 하면서 이 기간 동안
가곡을 비롯한 소위 '순수음악'에 속하는 곡들을 작곡했다.
1954년에 작곡 학위를 획득해서 두 번째로 음악원을 졸업했다.
졸업 이듬해인 1955년부터 음악 활동을 시작했지만 이상 높은 젊은
예술가에게도 현실은 현실인지라 생활 사정이 그리 녹녹치가 않았다.
1956년에 마리아 트라비아(Maria Travia)와 결혼했으며
그 해 첫번째 아들인 마르코를 얻었다. 부양해야 할 사랑하는 가족이 생기자
그는 더 이상 돈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학교를 나와 사회에 첫 발을 내딛을 때는 대중음악의 전통을 벗어난
작곡을 하고 싶었지만, 현실적인 어려움으로 다음 몇년 동안 자신이 추구해온
예술음악, 혹은 절대음악의 정의를 다시 찾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날 로마에 있던 당시 유명 음반사인 RCA의 문을 두드렸고
그 곳에서 본격적으로 대중음악 가수들의 편곡 작업을 하기 시작한다.
처음 활동하기 시작한 시절에는 몇 년간 유명 작/편곡가들의 작업을 해주며
생계를 해결하고 경험을 쌓으며 본명을 쓰지 않고 이런 저런 가명을 썼다.
모리코네의 회고 인터뷰 <Ennio Morricone:In His Own Words>에 따르면
당시 로마에서 유명 작곡가들이 간단한 스케치를 해서 던져주면 이를 확장해
오케스트레이션을 하거나 노래 반주를 만드는 편곡 작업을 하는 젊은 도제들을
"니그로(negro)"라고 불렀다고 한다.(...)
모리코네는 동시에 이탈리아 국영방송국(RAI)의 관현악단에서 트럼펫 연주자와
작/편곡가로 활동하면서 당시 유명 팝 가수였던 폴 앵카의 편곡 작업을 하는 등
대중음악 분야의 경험도 많이 쌓았고 1950년대와 60년대를 통틀어 수백 곡의 노래들을 편곡했다.
모리코네는 이 당시 클래식에 아직 미련이 남아 있었다.
1960년 이탈리아 북부에 위치한 베네치아의 라페니체 극장에서 자신이 작곡한
협주곡 지휘를 하며 클래식 음악계에서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기왕 대중음악을 할거면 음반 제작과 히트곡을 만드는 과정에서 중요한
핵심 역할을 하지만 음악 업계 관행으로 인해 늘 그늘에 가려진 편곡가보다는
이름 있는 작곡가로 더 알려지고 싶어했다.
그런 연유로 가명을 쓰기도 하면서 주위에 자신의 편곡가 활동을 비밀로 하기도 했으나
그의 탁월한 음악 감각으로 인해 수 많은 히트곡을 내게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훌륭한 편곡가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하지만 대중음악 작업을 하면서도 순수음악에 대한 흥미도 잃지 않았고
당시 이탈리아 전위음악의 선두 주자 중 한 사람이었던 프랑코 에반젤리스티가
주축이 되어 1964년에 결성한 '새로운 어울림음의 즉흥연주 그룹
(Gruppo di Improvvisazione di Nuova Consonanza)'이라는 연주단의
일원으로도 활동하며 당시 영화음악 분야의 상업성이나 통속성과는
판이하게 다른 현대음악가로서의 진지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본격 장편영화의 음악 작업은 루치아노 살체의 파시스트(The Fascist (Il federale))의
음악을 작곡한 1961년부터 시작했다.
1995년에 BBC2에서 방영한 엔니오 모리코네 다큐멘터리.
그의 생애와 음악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오고 그와 함께 작업한 브라이언 드 팔마 등
유명 영화인들이 그의 천부적인 감각과 끊임없는 열정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1965년 엔니오 모리코네가 편곡한 곡들 중 가장 높은 순위로 차트에 오른 참여한 캐나다
출신의 팝 가수, 폴 앵카의 "Ogni Volta (Every time)". 폴 앵카의 전기에 의하면
이 곡이 담긴 45회전 싱글앨범은 전세계적으로 300만장 이상 팔렸다고 한다.
1966년 엔니오 모리코네가 편곡으로 참여한 이탈리아 가수 미나(Mina)의
"Se telefonando (If calling)". 언듯 평범한 60년대 팝송 같지만 후렴부를
자세히 들어보면 3개의 음으로 구성된 멜로디 구조가 한 싸이클을 돌 때마다
한 음씩 추가되며 전조되는 모리코네의 탁월한 편곡 기법을 발견할 수 있다.
- 엔니오 모리코네가 1960년대에 트럼펫으로 참여한 작곡가들의 모임이며 전위 창작집단인,
'새로운 어울림음의 즉흥연주 그룹 (Gruppo Nuova Consonanza Azioni Documentario)'의
다큐멘터리. 독일어와 이탈리아어로만 나오지만 희귀 영상이며
그룹의 실험적인 음악은 충분히 들어볼 수 있다.
"전위부대"라는 혹은 "선발대"라는 말과 관계가 있는 "전위, 혹은 아방가르드"는
원래 군사용어로 전투시 최전방에 위치한 선발 부대가 신속하게 진로를 방해하는
모든 장애물을 제거하며 돌진해 나가는 행위를 의미한다.
전위 음악은 음악인들이 예술가로서 자신들의 생각과 느낌을 이전에는 들어보지 못한
새로운 방식으로 마음대로 표현하고 싶은 대로 표현하는 것이 최우선이다.
청중이 음악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현재의 음악 시장에서 어떤 반응을 얻을 것인가를
신중하게 고려해야 하는 대중음악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할 수 있다.
60년대 당시는 특히 전후 세대의 충격과 공포, 냉전시대 핵무기에 대한 불안감
근현대 산업화 과정에서 인간성의 상실으로 인해 생긴 모호성 및 불확실의 역설과
주체의 붕괴등을 반영한 포스트 모더니즘의 태동으로 인해 현대음악 작곡가들이
급진적인 실험을 추구하던 시기인 것을 참고하기 바란다.
1960년대 후반 북부독일방송에 의해 제작된 이 다큐멘터리에서는 평소
일반인적으로 듣기 편하고 아름다운 영화 음악을 만드는 작곡가로만
대중에 알려진 엔니오 모리코네의 또 다른 일면을 볼 수 있다.
2분 15초부터 트럼펫으로 즉흥 연주를 하는 모리코네와 다른 그룹 멤버들의 모습이 나온다.
언듯 이상하게 비칠 수도 있지만 이러한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자세가 그의 선구적인
영화 음악 사운드 디자인 실험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보통 음악인들은 대중성, 음악성, 실험성 등 대부분 한쪽 성향으로 크게 치우치는 경우가 많은데
대중적인 면과 음악적인 면, 실험적인 면을 차별하지 않고 적극 수용하고 다양한 관심을 보였던
엔니오 모리코네의 광범위한 폭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모리코네는 20세기 이후에도 영화음악보다는 자신이 더 하고 싶어했던 절대음악 양식의
클래식 협주곡이나 오라토리오, 관현악곡, 실내악 등도 다수 작곡했으며 대중에 잘 알려진
영화음악의 후광에 가려있던 이들 작품도 최근 들어 다시금 조명을 받고 있다.
다음은 엔니오 모리코네의 초기작들 중 오늘날에도 사랑받는 작품들이다.
1954년부터 1962년까지 8년간 북아프리카 알제리 국민들이 130년간 통치받던 식민지를 벗어나
나라의 주권회복과 독립을 위해 제국주의 열강 프랑스를 상대로 벌인 알제리 전쟁에 바탕한
1966년 명작 영화, "La Battaglia di Algeri (The Battle of Algiers)"의 테마.
영화의 작품성도 뛰어나 1966년도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과 1972년도
영국 영화 아카데미 (BAFTA) United Nations 상을 수상했다.
전세계 영화 감독들이 지금도 이 영화의 드라마틱한 리얼리즘에 찬사를 보내고 있고
크라이테리온 콜렉션으로도 출시되었다.
(크라이테리온 온라인 채널로도 영자막과 함께 시청 가능).
프랑스에서 높으신 분들의 심기를 건드려 5년간 상영 금지되었으며 2003년에
미 국방부에서 이라크 전쟁 문제와 관련해 아랍권 문화에 대해 배경지식이 거의 전무하던
군 장성들이 단체관람하며 시뮬레이션 하기도 했다.
1964년에 동향인으로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영화 감독 세르조 레오네와 연결되어
황야의 무법자의 음악을 맡아 영화 음악가로서 큰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하지만 스파게티 웨스턴이 처음 인기를 끌기 시작할 때 미국 주류 평단으로부터
환영받으며 좋은 평가를 받았던 것은 아니다.
당시 미국에서는 저예산 호러영화, 홍콩의 쿵푸 영화, 이탈리아의 스파게티 웨스턴 영화,
자극적인 야한 영화(...)등 온갖 장르의 영화들을 돌아가며 박리다매로 하루종일 틀어주는
"그라인드하우스(Grindhouse)"라는 저렴한 연중무휴 극장에서 상영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에도 과거 80-90년대에 재개봉관 혹은 동시상영관이라는 국내외 오만가지
상업 영화들을 데려와 돌려가며 상영하는 저렴한 영화관들이 있었다.)
이들 영화들을 대부분 저예산으로 만들어지고 미국인들이 좋아하던 보편적인
헐리우드 상업영화들과는 다른 관점이나 도덕적 이미지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간혹 작품성있는
영화들마저도 도매금으로 B급 영화로 부르며 불량식품으로 푸대접하는 편견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외국인들에 대해 왠지 모르게 남아있는 미국인들의 선입견 때문에
엔니오 모리코네는 '댄 새비오’라는 이탈리아계 성씨이긴 하지만 영어권 거주자
느낌을 주는 가명을 써야하는 웃픈 일화가 있다.
이후에도 이런 이유로 그는 '리오 니컬스' 등 여러가지 다른 가명을 쓰기도 했다.
많은 팬들이 세르조 레오네와 엔니오 모리코네가 어린 시절부터 함께 성장한
죽마고우인 것으로 알고 있고 최근 일부 국내 언론에서도 그렇게 보도하고 있는데
이는 사실과 약간 다르다.
2014년에 국내에 번역 출간된 뉴욕 대학교 교수 안토니오 몬다의 인터뷰를 담은
"엔니오 모리코네와의 대화"에서 작업차 성인이 되어 만났을 때 레오네의 특이한
입술 모양을 보고 모리코네가 먼저 알아보았고 한다.
‘트라스테베레 거리에 있는 학교에 다녔던 거 맞아?’라고 물었더니 그제서야 레오네가
‘그래! 바로 네가 그때 그 모리코네구나!’하고 대답했다고 한다.
작곡가 모리코네가 순식간에 초딩 모리코네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고.
물론 레오네와 모리코네는 둘 다 로마 출신이었고 2차대전 동안 그들이 겪은
전쟁의 공포와 인류애의 파괴, 아사 직전의 빈곤 경험등을 겪어 여러 작품들을
거치면서 단순히 프로페셔널 예술가들로서의 관계를 뛰어넘어 누구보다 서로를
잘 이해하는 가까운 의형제같은 친구사이가 되었다는 것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황야의 무법자로 알려진 명성으로 레오네와 맺은 인연은 석양의 건맨,
석양의 무법자,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더 웨스트, 석양의 갱들 과 그의 마지막
유작이 된 1984년 작품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까지 이어졌다.
- 세르조 레오네가 처음으로 스파게티 웨스턴을 크게 흥행에 성공시킨
1964년 작품 황야의 무법자(A Fitsful of Dollars) 테마.
원래 모리코네는 서부영화의 음악을 이미 두 편 담당한 적이 있었는데
레오네 감독이 이 음악들을 들어보고 전혀 맘에 들어하지 않았다고 한다.
모리코네와 함께 이런 저런 음반을 함께 들어보다가 미국의 포크 가수이자 민중 가요의 전설인
우디 거스리의 원곡을 모리코네가 편곡해 가수 피터 테비스(Peter Tevis)가
부른 "드넓은 초원들 (Pastures of Plenty)"을 듣고서야 무릎을 탁 치며
"그래, 바로 이거야!"라고 했다고 한다.
모리코네가 "그 곡은 잊어버리라"며 컨셉에 맞게 새로운 음악을 만들겠다고
제안 했는데도 고집불통 레오네 감독은 끝까지 이 음악을 넣어야 한다고 우겼다.
결국 모리코네의 기존 편곡에 가수 목소리에서 휘파람 소리로 옷만 갈아 입힌
같은 멜로디를 다시 얹은 것이 황야의 무법자의 메인 테마가 되었다.
스파게티 웨스턴의 전형적인 사운드 트랙을 만들어낸 것으로 유명한 모리코네는
황야의 무법자가 단돈 20만 달러(한화로 약 2억 2천만 원, 나중에 극장수익으로
70배가 넘는 1,450만 달러을 벌어들어 대 히트를 침)로 만든 저예산 영화이기에
음악 예산 역시 턱없이 부족했다.
그는 대규모 오케스트라 녹음을 할 돈이 없어 소규모 앙상블로 사막의
청각적 풍경(sonic scape)을 표현 내는 방법을 찾아내야만 했다고 한다.
하지만 전화위복이 된 것이 이런 제약으로 인해 스파게티 웨스턴 특유의 이미지와
어울릴 만한 소리를 가져다 쓰게 된 것이다.
보통 엄청나게 비싼 악기를 당연스럽게 내세우는 클래식을 바탕으로 한 영화 음악계에서
일반적으로 대수롭지 않은 악기로 여기던 하모니카, 전기 기타, 주즈하프, 마리아치 트럼펫,
리코더, 오카리나, 휘파람, 샤우팅, 채찍 등,
영화 속 시대 배경과 멕시코 사막의 분위기를 연상시키는 소리들을 현악 앙상블, 오페라
가수의 노래, 남성 합창등과 함께 지금 들어도 기가 막힌 감각으로 편곡해 넣은 것이다.
엔니오 모리코네가 만든 스파게티 웨스턴 스코어의 이러한 신선한 기법은
할리우드 황금기에는 스튜디오 시스템에 전속 계약된 작곡가, 오케스트레이터,
오케스트라 악단에 페이가 주단위로 계속 지급되고 있어서 산업구조상 꽉 짜여진
미국의 A급 메이저 서부 영화들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 때 당시에는 그렇게 혁신적인 실험이라고 생각해 본적은 없다고 하지만
결과적으로 엔니오 모리코네가 자원이 부족한 가운데 만들어낸 사운드가
오히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대중의 기억에 남아있는 독특한
스파게티 웨스턴 장르 사운드 트랙의 주요 소스가 되었고
창의성면에서도 더 크게 빛을 발했다고 할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일반적으로 영화 음악을 만드는 작업은 영화 제작 과정에서
각본과 기획, 섭외, 촬영, 이후 더빙과 함께 최종 후반 작업(post production)
단계에서 이루어지는데 레오네의 영화에서 모리코네의 음악은
이와는 정반대로 작업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