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정의
대마도 ( 쓰시마섬)가 한국 영토임을 대내외에 각인시키며 영유권 확보를 목적으로 경상남도 마산시 의회가 제정한 기념일입니다.
2. 유래
* 2005년 1월 14일 일본 시마네현 의회가 다케시마의 날 조례를 제정한 것에 대응해 경상남도 마산시 의회에서 2005년 3월 18일 조례를 통해 제정한 날입니다.
* 마산시 의회는 이날 오후 임시회를 열고 '대마도의 날 조례'안을 긴급 상정해 30명 의원 가운데 출석의원(29명) 전원 찬성으로 가결하였습니다.
* 6월 19일은 조선 초기 이종무 장군이 대마도 정벌을 위해 마산포를 출발한 날입니다.
* 2012년 12월 11일, 창원시 의회가 본회의를 통해 '창원시 대마도의 날 조례'로 명칭을 바꾸었으며, 원래의 조례 목적에 '객관적인 사료를 근거로 하여 대한민국 국민과 세계인의 올바른 여론을 형성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었습니다.
3. 대마도 정벌
1) 1차 정벌: 1389년 (창왕 2년)
2) 2차 정벌: 1396년 (태조 5년) 음력 12월
☆ 3) 3차 정벌: 1419년 (세종 1년) 음력 6월 19일(대마도의날 기원)
■ 대마도 정벌(對馬島征伐)은 한반도의 여말선초 시기 고려와 조선 왕조에서 한반도를 침입하던 왜구의 주요 기항지 가운데 하나인 쓰시마섬을 토벌한 것을 가리킨다. 정벌은 총 3번 있었는데, 일반적으로는 조선 세종 1년(1419)에 단행된 제3차 대마도 정벌을 칭한다. 일본에서는 당시 일본 연호를 따서 오에이의 외구(応永の外寇)라고 불러, 왜구(倭寇) 문제가 아닌 한반도의 왕조를 침략의 주체로 칭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대마도 원정은 좁은 뜻에서는 1419년(세종 1) 6월에 이종무를 삼군도체찰사(三軍都體察使)로 임명하여 정벌한 일을 말하나, 넓은 뜻으로는 이보다 앞서 있었던 고려 창왕 때와 조선 태조 때의 정벌까지도 포함한다.
① 1389년(고려, 창왕1) 1월에 박위가 병선 100척을 이끌고 대마도를 공격하여 왜선 300척을 불사르고 노사태(盧舍殆)를 진멸하여 고려의 민간인 포로 남녀 100여 명을 찾아왔다.
② 1396년(조선, 태조5) 12월 문하우정승(門下右政丞) 김사형이 오도병마처치사(五道兵馬處置使)가 되어 대마도를 정벌하였다.
③ 1419년(조선, 세종1) 6월에 다시 대마도를 정벌하였다. 1418년(태종 18) 대마도도주(島主) 소 사다시게[宗貞芽]가 죽고 아들 소 사다모리[宗貞盛]가 뒤를 이었는데, 대마도에 흉년이 들어 식량이 부족하게 되자 왜구는 대거 명나라 해안으로 향하던 중, 비인현(庇仁縣:舒川) 도두음곶(都豆音串)과 해주(海州) 해안을 약탈하였다.
조선에서는 왜구의 창궐과 행패가 새 도주 소 사다모리의 선동에 의한 것이라 하여 이종무를 삼군도체찰사로, 우박(禹博)·이숙묘(李淑畝)·황의(黃義)를 중군절제사(中軍節制使), 유습(柳濕)을 좌군도(左軍都)절제사, 박초(朴礎)·박실(朴實)을 좌군절제사, 이지실(李之實)을 우군도절제사, 김을지(金乙知)·이순몽(李順夢)을 우군절제사, 도합 9절제사에게 삼남(三南)의 병선 227척, 병사 1만 7,000을 주고 마산포(馬山浦)를 출발하게 하여 대마도로 진격시켰다.
당시 일본에서는 규슈의 제후(諸侯)를 총동원하여 대마도를 방어하게 하였으므로 원정군은 대마도 전체를 토벌할 수 없었으나, 그들에게 큰 타격을 주고 그해 6월에 회군하였다. 이 해가 기해년이었으므로 이 정벌을 일명 기해동정(己亥東征)이라고도 한다.
4. 대마도가 우리 땅인 10가지 이유
*1. 날씨가 맑은 날 부산 태종대에서 보면 대마도가 훤희 보인다.
*2. 독도와 마찬가지로 대마도 역시 두 개의 섬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우리나라 섬이라는 특징적 증거이다.
*3. 마산(馬山)을 대(對)하고 있는 섬(島)이라 하여 대마도라 부른다.
*4. 면암 최익현 선생을 일본 본토가 아닌 우리 땅 대마도로 압송했다.
*5. 부산에서 대마도까지는 3백리, 대마도에서 일본 쿠슈까지는 7백리다.
*6. 부산에서 대마도 사이를 대한해협이라 부른다.
*7. 세종실록(世宗實錄)과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팔도총도(八道總圖) 외에도 여러 사료를 통해 입증되고 있지만, 우리나라 고지도에 대마도는 항상 우리 땅으로 표시되어 있다.
*8. 이승만 대통령이 제헌국회에서 대마도는 우리 땅이라 주장했다.
*9. 대마도의 초대 도주로 추앙받는 소시게히사(宗重尙)와 관련, “원래 우리나라 송씨로, 대마도에 들어가서 성을 종(宗)씨로 바꾸고 대대로 도주가 됐다”는 기록(1740년 간행된 동래부지)이 있다.
*10. 대마도가 우리나라 땅임을 숨기고 있는 일본이 이를 감추기 위해 저토록 끈질기고 엉뚱하게도 독도를 물고 늘어지고 있는 것이다.
5. 이승만 초대대통령의 대마도 영유권 주장
**이래도 이승만은 친일파인가?
대통령(이하 이승만)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선포하고 불과 사흘 후에 "대마도는 우리 땅이므로 일본은 속히 반환하라"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승만은 이어 온 세계를 향해 ‘대마도는 대한민국 속령(屬領)’이라고 선포했다. 세계 제2차대전 종료를 앞둔 1945년 7월 26일 미·영·중은 포츠담에서 일본 영토는 혼슈(本州), 홋카이도(北海道), 시코쿠(四國), 규슈(九州) 등 4개 섬으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1949년 1월 8일 이승만은 첫 년두 기자회견에서 ‘대마도 한국 속령’을 거듭 선언했다. 1949년 1월 18일에는 제헌의원 31명이 ‘대마도 반환촉구 결의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곧 개최될 샌프란시스코 미·일 강화회의에서 대마도 반환을 관철시킬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대마도 속령에 관해 중국과 일본 역사서들도 ‘대마도 한국 속령’을 기록하고 있다. 기원전 3세기의 중국 역사서 『위지(魏志)』와 『왜인전(倭人傳)』은 대마도(對馬島) 사람들은 한반도 마한(馬韓)을 대상으로 무역을 하고 살았다’고 기록하고 있고,『삼국사기』와 『세종실록』은 대마도는 주로 말<馬>을 기르던 땅으로 말이 많이 살았던 고대 마한(馬韓)과 마주보는 우리 땅이라 ‘대마도(對馬島)’로 명칭이 생겼다고 했다.
고대 중국의 『삼국지(三國志)』, 『위지동이전(魏志東夷傳)』의 『왜전(倭傳)』, 일본의 『일본서기(日本書紀)』, 『고사기(古事記)』 등도 모두 대마도는 명칭에서부터 한국령임을 인정했다. 대마도의 일본말 쓰시마는 한반도로 가는 배가 잠시 머무는 항구,가라시마는 한반도로부터 사람과 문화가 건너올 때 거쳐 온 섬 곧 한국의 섬이라는 의미가 있다. 마침내 세종대왕은 「對馬島本是我國之地(대마도는 본시 우리 땅이다)」라고 확실하게 정리했다. 이는 세종실록에 기록된 글귀로서 세종(1419)대왕이 이종무로 하여금 대마도를 토벌하게 해 항복을 받고 경상도에 예속시키면서 기록한 말이다.
역사는 흐르고!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은 전란을 틈타 슬그머니 대마도를 강점했다. 하지만 대마도의 조선의병들이 이에 결사항전 했다. 지금도 의병 전적비가 대마도 도처에 서 있다. 오늘날도 대마도에서 쓰이는 일상용어 가운데는 우리 말이 많이 섞여 있다. 예를 들면 고구마를 일본말로 사츠마이모라고 하는데 대마도 사람들은 이를 고우코오라고 한다. 발음이 모두 고구마에 가깝다.
각설하고 "미국 점령군사령부에도 대마도 반환을 거듭 요청하겠다"는 이승만은 여타 외교사절을 만날 때도 대마도 문제를 역설했다. 이승만은 대마도 문제와 관련된 미국 국무성 기밀문서까지 공개했다.
이런저런 한국의 ‘대마도 한국속령’ 주장과 반환 요구에 경악한 당시 일본총리 요시다 시게루는 맥아더 사령관을 찾아가 읍소(泣訴)했다.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이후 그들이 실효지배했기 때문에 대마도는 일본 땅이라고 하면서 읍소하고 또 읍소했다. 일본 외무성은 산하기관을 총동원해 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일본 역사학계는 대마도 한국속령 반대자료 작성을 위해 나섰다. 역사학, 고고학, 인류학 등 관련 5대 학회가 2년간 대마도 관련사항을 조사했다면서 관련 논문(왜곡된 것)을 잇달아 발표했다.
일본 요시다 시케루 내각은 그 이후 연합군최고사령부(SCAP)의 맥아더 사령관에게 어용논문을 들고 다니면서 이승만의 요구를 막아주기를 계속 집요하게 읍소했다. 요시다 시게루 총리가 1951년 9월 샌프란시스코 강화 회의에서 미국에 읍소 외교를 통해 대마도 등의 도서들을 일본 영토로 다시 확보하고자 분투하자, 드디어 맥아더 사령부는 이승만의 대마도 영유권 주장을 당시 동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정치적 구도를 방해하는 한 요인으로 받아들이고 이승만의 대마도 반환요구를 묵살했다. 그 당시 한국의 정치인들과 학계가 힘을 합해 이승만을 도와 패전국 일본에 강경하게 대처하고 맥아더 사령부, 미국 행정당국과 거국적으로 교섭했더라면 대마도를 반환받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아! 이 시기에 불행하게도 북한 김일성이 6·25전쟁을 일으키자 대마도 반환정책은 일단 보류되고 만다. 그리고 그 이후 우리 정치인들은 오직 정권탈취싸움만 하다 대마도 문제는 기억도 못하고 오늘에 이르렀다. 이후 대마도 영유권 문제는 6·25전쟁이 발발한 상황에서 더 이상 공식문서나 외교채널을 통해 정식 제기되지 않았고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오늘에 이르렀다.
6. 대마도 한국령으로 확정
♡ 과거 국제사법재판소 대마도 한국령 확정판결 동영상 입니다.
(확정판결이 났음에도 말없이 있는 이유는 무엇인지 궁금?, 또 궁금?)
- https://youtu.be/ZghxOtsGjLQ
7. 우리의 대처 방안
일본이 대마도를 실효적으로 점유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국제법상 인정되는 영토취득의 요건을 갖추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일본이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면서 제시하는 증거보다는 대마도가 한국 땅임을 입증할 수 있는 사료가 훨씬 더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수립 직후의 2~3년의 기간을 제외하고는, 일본의 대마도 점유를 불법적인 것으로 규정하지도 않았고 문제제기도 하고 있지 않다. 앞으로 시간이 경과할수록 일본의 대마도 영유가 국제법적 및 역사적 관점에서 공고해져가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런 잘못된 역사 전개를 막기 위해서는 정부차원에서 충분한 연구와 검토를 거쳐 일본 정부에 정식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국제 사회에도 알려야 할 것이지만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이렇게 영토분쟁을 일으키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도 실천하기 쉬운 일은, 대마도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동질성을 회복하는 것이며 경제와 문화 교류를 활성화하여 대마도를 사실상 영토화하는 것이다. 대마도민들도 1시간 10분거리의 대한민국과의 교류를 원하고 있으므로 영토분쟁을 일으키는 것보다는 훨씬 우호적이며 성공가능성이 높다.
8. 대마도 정벌 이종무 장군
이종무함으로 거듭 태어나다.
조선 초 대마도 정벌에 큰 공운 세운 이종무 장군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명명된 이종무함은 1998년 환태평양훈련(RIMPAC, Rim of Pacific Exercise)에 대한민국 잠수함 최초로 참가하여 가상 함정 공격훈련에서 미 항공모함 및 핵잠수함을 비롯한 적 함정 13척 15만 톤의 함정을 가상 격침시켰고, 2주 훈련기간 동안 단 한 번의 고장도 없어 '최우수함'으로 선정된 바 있다.
9. 대마도 노래
https://naver.me/FIft1UCU
첫댓글
청암님
좋은자료 고마워요
아ㅡ
어찌하오리까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