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을 감사하며, 4월의 일기, 하오의 명상
<샘터>의 오랜 독자들은 나를 기억할지도 모른다. 2003년 12월 ‘아름다운 빚’이라는 글로 나는 당시 4년간 연재하던 ‘새벽의 창가에서’를 닫았다. 그리고 꼭 3년 만에 나는 다시 나타났다. ‘다시 나타났다’는 말을 쓰니 정말 홀연히 바람처럼 사라졌다가 불현듯 모습을 드러낸 느낌이 드는데, 어쩌면 나의 ‘공백기’를 설명하기에 가장 적합한 말인지도 모른다.
3년-젊은 사람들에게 3년은 인생의 드라마를 창출할 만큼 긴 시간이다. 군에 입대한 남학생이 전역할 만한 시간이고, 새 신부가 아기 둘을 낳을 만한 시간이고, 신입 사원이 잘하면 대리가 될 수 있는 시간이고, 아, 그리고 우리 학생들을 보면 누군가를 만나 사랑하고 아픈 이별을 하고 또 다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하기에도 충분할 만큼, 3년이라는 기간은 의미심장할 수 있다.
하지만 내 나이에 3년이란 세월은 그렇지 않다. 신상에 무슨 커다란 변화를 기대하기보다 이미 오랜 세월을 걸쳐 설정된 삶의 자리가 그냥 ‘조금 더’ 깊어지는 기간이다. ‘조금 더’ 늙어가서 ‘조금 더’ 눈가에 주름이 잡히고 ‘조금 더’ 내 살아가는 모습에 길들여지고, ‘조금 더’ 포기하고 ‘조금 더’ 집착의 끈을 놓고...
그럼에도 <샘터>에서 사라졌던 지난 3년 동안 나는 내 인생의 가장 큰 변화를 겪었다. 칼럼을 닫고 나서 얼마 후에 나는 척추 암 선고를 받고, 2004년 9월 8일 나의 영명축일에 갑작스레 병원에 입원했고, 2006년 5월 도합 스물네 번의 항암치료를 마칠 때까지, 거의 2년에 가까운 시간을 나는 긴긴 투병 생활로 보냈다.
돌아보면 그 긴 터널을 어떻게 지나왔는지 새삼 신기하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지난 3년이 마치 꿈을 꾼 듯, 희끄무레한 안개에 휩싸인 듯 선명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 통증 때문에 돌아눕지도 못하고 꼼짝없이 침대에 누워 있던 일, 항암치료를 받기 위해 백혈구 수치 때문에 애타던 일, 온몸의 링거 줄을 떼고 샤워 한번 해보는 것이 소원이었던 일, 방사선 치료 때문에 식도가 타서 물 한 모금 넘기는 것조차 고통스러워하며 밥그릇만 봐도 헛구역질하던 일, 그런 일들은 마치 의도적 기억상실증처럼 내 기억 한편의 망각의 세계에 돌아가 있어서 가끔씩 구태여 끄집어내야 잠깐씩 회생되는 파편일 뿐이다.
그 세월을 생각하면 그때 느꼈던 가슴 뻐근한 그리움이 다시 느껴진다. 네 면의 회벽에 둘러싸인 방에 세상과 단절되어 있으면서 나는 참 많이 바깥세상이 그리웠다. 밤에 눈을 감고 있을라치면 밖에서 들리는 연고전 연습의 함성소리, 그 생명의 힘이 부러웠고, 창밖으로 보이는 파란 하늘 아래 드넓은 공간, 그 속을 마음대로 걸을 수 있는 무한한 자유가 그리웠고, 무엇보다 아침에 일어나 밥 먹고 늦어서 허둥대며 학교 가서 가르치는, 그 김빠진 일상이 미치도록 그리웠다. 그리고 그런 모든 일상-바쁘게 일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누군가를 좋아하고 누군가를 미워하고-을, 그렇게 아름다운 일을, 그렇게 소중한 일을 마치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태연히 행하고 있는 바깥세상 사람들이 질투 나고 부러웠다.
하루는 저녁 무렵에 TV를 보는데 유명한 보쌈집을 소개하고 있었다. 보쌈 만드는 과정을 소개한 다음, 손님 중 한 중년 남자가 목젖이 다 보이도록 입을 한껏 크게 벌리고는 큰 보쌈 하나를 입에 넣더니 양 볼이 불룩불룩 움직이게 씹어서 꿀꺽 삼키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상갓집에 가면 보통 육개장, 송편, 전 등, 자금자금한 음식들이 나오고 상추쌈이나 갈비찜처럼 큰 덩어리 음식은 나오지 않는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는데, 상갓집에서 입을 크게 벌리고 먹는 것은 죽은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한다. 미련을 남긴 채 이 세상을 하직하고 이제는 아무리 하찮은 음식일지라도 하나도 먹을 수 없는 망자 앞에서 보란 듯이 입을 크게 쩍 벌리고 어적어적 먹는 것은 무언의 횡포라는 것이다.
보쌈을 먹고자 입을 크게 벌린 그 남자의 격렬한 식탐, 꿀꺽 삼키고 나서 그의 얼굴에 감도는 찬란한 희열, 그 숭고한 삶의 증거 앞에 나는 지독한 박탈감을 느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바깥세상으로 다시 나가리라. 그리고 저 치열하고 아름다운 일상으로 다시 돌아가리라.
그리고 난 이렇게 다시 나타났다. 나의 본래 자리로 돌아왔다. 다시 강단으로 돌아왔고, 아침에 자꾸 감기는 눈을 반쯤 뜬 채 화장실에 갔다가 밥을 먹고, 늦어서 허겁지겁 학교로 가는 내 편안한 일상으로 돌아왔고, 이젠 목젖이 보이게 입을 크게 벌리고 보쌈도 먹고 상추쌈도 먹고 갈비찜도 먹는다. ‘어부’라는 시에서 김종삼 시인은 말했다.
바닷가에 매어둔 작은 고깃배.
날마다 출렁인다.
풍랑에 뒤집힐 때도 있다.
화사한 날을 기다리고 있다.
(...)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된다.
사노라면.
많은 기쁨이 있다.
맞다. 지난 3년간 내가 살아온 나날은 어쩌면 기적인지도 모른다. 힘들어서, 아파서, 너무 짐이 무거워서 어떻게 살까 늘 노심초사하고 고통의 나날이 끝나지 않을 것 같았는데, 결국은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열심히 살며 잘 이겨냈다. 그리고 이제 그런 내공의 힘으로 더욱 아름다운 기적을 만들어갈 것이다. 내 옆을 지켜주는 사랑하는 사람들, 그리고 다시 만난 독자들과 같은 배를 타고 삶의 그 많은 기쁨을 누리기 위하여.....//
15년 전으로 거슬러, 장애인 작가 장영희가 2009년 5월 9일 향년 56세를 일기로 세상을 뜨기 전에 마지막으로 펴낸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이라는 에세이집에 실린 동명의 글 그 전문이다.
암 투병을 하면서 치열하게 살아온 그 삶의 모습이 눈물겹게 담겨있다.
내 그 대목을 읽으며 참 많이도 울었었다.
지금껏 살아있긴 하지만, 내 삶 또한 그렇게 치열해야 했던 대목들이 적잖았기 때문이다.
내 살아온 날들 또한, 모두 기적 같은 날들이었다.
"뒤돌아보면 내 인생에 이렇게 넘어지기를 수십 번, 남보다 조금 더 무거운 짐을 지고 가기에 좀 더 자주 넘어졌고, 그래서 어쩌면 넘어지기 전에 이미 넘어질 준비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신은 다시 일어서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넘어뜨린다고 나는 믿는다. 넘어질 때마다 나는 번번이 죽을힘을 다해서 다시 일어났고, 넘어지는 순간에도 다시 일어설 힘을 모으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많이 넘어져 봤기에 내가 조금 더 좋은 사람이 되었다고 난 확신한다."
20년 전으로 거슬러, 2004년 9월 25일자 조선일보 고별칼럼에서, 그렇게 자신의 그 기적적인 삶을 털어놨었다.
그녀만 그렇게 기적의 삶을 살아온 것은 아니다.
지나온 삶의 길목들을 돌이켜볼라치면, 우리 모두가 마찬가지로 기적의 삶을 살아와서, 지금 이 순간에 서 있는 것이다.
그러니 그 삶이 감사할 수밖에 없다.
2024년 4월 29일 월요일인 바로 어제 일이다.
오후 3시 반쯤해서 올림픽대교와 잠실철교가 좌우로 보이는 한강 그 북쪽 강변으로 나갔다.
‘서리풀’ 모임이라고 해서, 반세기 전으로 거슬러 검찰에서 함께 일하면서 인연이 동료 수사관들과 반주를 곁들여 점심을 한 뒤에, 내 사는 반 천리 길 문경으로 되돌아오려고 전철 2호선을 타고 동서울터미널로 가서 오후 4시 20분 승차권을 사고 보니, 한 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었다.
그 여유시간에 그 강변을 찾은 것이다.
뽀얀 이팝나무 숲 풍경이 시원한 강변이었다.
그 풍경 속의 벤치에 홀로 앉아 하오의 명상에 들어갔다.
강 건너 남쪽의 아파트 군상들을 동에서 서로 쭉 이어보면서, 동쪽의 강남 일원동에 사는 손녀 서현이네 가족들도 떠올렸고, 서쪽의 손자 서율이네 가족들도 떠올렸다.
그 두 집 중에 어느 한 집에서 하룻밤 묵을까 말까 하다가, 문경의 우리 집에서 기다리는 아내에게 더 무게를 둬서 귀향을 작정하게 된 사연도 생각했고, 이왕 서울 온 김에 낮술에 이어 몇몇 친구들을 불러내서 저녁술이라도 한 잔 할까 하다가 포기한 사연도 생각했다.
그 생각 속에서 일희일비(一喜一悲)하기도 했다.
그리고 또 생각한 것이 있었다.
이날 점심때 만난 여덟의 검찰수사관 동료들 생각이었다.
그 중에 둘이 모진 병마를 견뎌냈었고, 그 둘 중 하나는 기적의 치유를 경험하고 있다고 했다.
표적 치료를 하던 중에, 약효가 뛰어난 신약이 개발되어 임상실험 중에 있는데, 그 효과가 탁월하다는 것이었다.
독실한 기독교인인 그였다.
지난해 가을에는 어쩌면 마지막일는지 모른다 싶어서 우리 사는 문경으로 부부동반 초대를 해서 하룻밤 묵어가게 했었다.
그때 내 한 말이 이랬다.
“기도 많이 해. 우리들 운명은 주의 뜻 대로일 뿐이야. 잘 감당하고 있다 보면, 살길을 마련해주시기도 할 거야. 그래서 기적 같은 치유를 하게 될 것이니 말이야.”
그리고 그를 위해 기도도 많이 했다.
비단 그만이 아니다.
생로병사(生老病死)에 있어서는 너도 나도 따로 없다.
우리 주 하나님의 뜻에 따를 뿐이다.
그래서 나를 위한 기도도 했다.
오로지 기도만이 우리 살 길이 아닌가 싶다.
열심히 기도했다 했다.
그래서 구원을 받게 되었나보다 했다.
덕분에 그 친구가 발병해서 주위와 인연을 끊은 지 실로 5년 만에 이날로 얼굴을 내 보인 것이다.
결국 지금껏 살아온 것도 기적이고, 앞으로 살아갈 것도 기적이다.
그렇게 생각을 잇고 이은 끝에, 장영희 교수의 에세이 집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의 한 대목을 떠올리게 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