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재(李商在, 1850년~1927년) 선생 독립협회(獨立協會)
동지 서재필
독립협회의 지도자로 활약하며 한성부와 고향인 충청남도 서천, 서산 등 각지를 순회하며 계몽, 강연활동을 하였다. 후일 사학자 문일평은 이상재와 윤치호, 서재필을 독립협회의 세 기둥이라고 평하기도 한다.
그는 윤치호, 서재필 등과 민중의 참정권을 주장하였다. 5월 17일 서재필이 강제 추방되어 미국으로 돌아가고 이완용은 독립협회를 떠나 변절하게 되면서 윤치호와 함께 독립협회를 주도했다. 10월 28일 독립협회 부회장으로 관민공동회(官民共同會)를 개최하여 전제군주권을 제한하고 내각책임 행정을 실시해야 한다는 헌의6조(獻議六條)를 결의하여 고종에게 건의하자 그해 10월 30일 고종이 이를 수락한 후 중추원을 개정하여 중추원 관제를 발표했으나, 조병식(趙秉式)·유기환(兪箕煥) 등의 반격을 받게 된다. 11월 4일 독립협회 해산령이 내리고 정교(鄭喬)·남궁억(南宮檍) 등 16명과 함께 구속되었다.
독립협회가 만민공동회를 열어 시위항의를 함으로써 11월 10일 태(笞) 40대를 맞고 풀려났다. 이후 만민공동회를 지도하여 헌의6조의 실시를 요구하면서 황국협회에 맞섰으나 1898년 말 독립협회는 보부상들의 정치단체인 황국협회를 앞세운 보수파들의 탄압으로 해산당하였다. 그해 12월 25일 독립협회가 정부의 탄압과 황국협회의 방해로 해산되자 모든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기독교에 귀의
YMCA 청년회 사무를 보는 월남 이상재
서재필은 도미하였고 윤치호는 관료생활에 매진하였으나 그는 벼슬을 거부하고 탐관오리의 부패상과 비리, 내부 묵인 등을 탄핵하다가 1899년 11월 4일 수구파가 보낸 군사들에 의해 독립협회 간부들 대다수가 체포됨으로써 독립협회는 해산당한다.
1902년에는 개혁파 인사들이 대거 구금되거나 일본으로 피신하는 개혁당 사건이 일어나자 그해 6월 둘째 아들 이승인(李承仁)과 함께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아들 승인은 당시 고문을 당하여 고문 후유증으로 출옥후 옥사한다. 당시 그는 감옥에서 이승만이 전달한 성서를 읽고 기독교인이 되기로 결심했는데, 청소년 기독교 잡지인 《새벽나라》(두란노 刊)에 의하면 이상재 선생은 원수도 사랑하라는 마태복음서의 산상수훈에 감동받았다 한다.
출옥 직후 그는 자신의 고향인 충청도 서천군 한산면 종지리로 내려가 교회를 설립, '초갓집교회' 예배당을 헌당한다. 초가집교회는 후에 1970년대에 현대식 새 건물로 개축된다.
또한 이상재 선생은 1910년 황성기독교청년회 야유회에 감리교 성직자인 전덕기 목사와 같이 참여하였다. 이상재 선생은 양반이고, 전덕기 목사는 숯을 만들어서 장사하는 노동자였으니 계급이 달랐지만, 기독교인인 그에게 전덕기 목사는 하나님의 나라 건설을 위한 동지였을 따름이다.
이승만과의 관계
한성감옥에서의 사진(맨 왼쪽 서있는 사람이 이승만,앞줄 오른쪽 두 번째에 앉은 이가 이상재, 뒷줄 오른쪽 두 번째는 그의 아들)
옥중에서 그는 김정식(金貞植), 유성준(兪星濬), 이승만, 이동녕을 만났고, 그들과 가까이 지냈다. 이때 그는 이승만에게 영향을 주었는데, 그로부터 기독교를 접하고 교인이 되었다.
1904년 2월 이상재는 특별 석방되었다. 이후 이승만의 옥바라지를 했고, 이승만도 미국에 파견될 특사로 선정되어 곧 석방된다. 그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YMCA에서 만난 이승만의 정치적 후견인이 되어 주었고, 후일 이승만이 미국 유학을 할 때는 그의 생활비를 지원, 후원하기도 했다.
공직 사퇴와 기독교청년회 활동
출옥한 뒤로는 그는 한동안 두문불출했다. 1905년 9월 26일 서울 전동에 있던 시종무관장 민영환 집에서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딸 엘리스 루스벨트를 환영하는 이색 만찬이 개최되었다. 이상재 역시 이 만찬에 큰 기대를 걸고 참석했다. 주빈은 당시 미국 대통령인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딸 앨리스이고 배빈이 앨리스양을 수행한 해군대장 트레인과 앨리스 양의 약혼자 커빈 해군 중장이었다. 한국에서는 민영환 이외 이준, 이상재, 이용익, 윤치호, 그리고 미국인으로 서울에 와 항일 필봉을 휘두르고 있던 '코리안 리뷰'사 주간 헐버트(흘법) 여사 등 반일 친미 인사들이 대거 참여했다. 그리고 앨리스양에게 아버지인 대통령에게 다리놓아줄 것을 부탁했고, 앨리스양은 황제의 국서를 지닌 특사를 파견한다는 조건으로 쾌히 응낙했다.
YMCA의 지도자이며 기독교, 개화파와 친분을 쌓았던 이상재는 바다 건너 해양 문명국이 대한제국의 자유와 해방을 도와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제자인 이승만, 친구 윤치호 등으로부터 가쓰라-태프트 밀약 소식을 듣자 이상재는 미국에 대해 엄청난 실망감을 품게 된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된 뒤 고종의 부름을 받았다. 그러나 관직에 미련이 없었음을 밝혔으나 도와달라는 고종의 애절한 부탁을 거절할 수 없어 의정부참찬에 머물렀고, 1907년 법부대신의 교섭을 받았으나 사양하였으며, 군대해산 이후 관직을 사퇴했다.
윤치호
(그와 함께 YMCA를 지도하였다.)
석방된 뒤 함께 감옥에 있었던 김정식, 유성준, 이승만 등과 그밖에 윤치호 등과 함께 황성기독교청년회(YMCA)에 가입, YMCA 초대 교육부장에 선임되었다.
경성부 YMCA에 지원, 파송되어 온 미국인 선교사들과 함께(가운데 오른쪽이 윤치호, 가운데 왼쪽이 이상재)
한일 병합 조약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10년 8월 한일 합방 이후 일체의 공직에서 사퇴하였다. 한일 합방 직후 조선총독부에서는 조선의 관료들에게 고위직에게는 작위를 수여했고, 중하위직에게는 총독부의 관직을 하사했으나 그는 모두 거절하였다. 이후 교육 계몽활동에 나섰고, 청년들의 깨달음과 실력 양성, 해외 유학과 견문 시찰을 청년들에게 당부하였다.
한일합방 직후 총독부가 개최한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우연히 이완용, 박제순과 조선인 귀족들과 마주보고 앉게 되자 그는 인사말로 '대감들은 동경으로 이사가셔야 겠습니다'고 하였다. 그들이 의문을 표하자 이상재는 '대감들은 나라 망하는데 선수 아니십니까. 대감들이 일본으로 이사가면 일본이 망할 것이 아닙니까?'라고 반문했다 한다. 그의 풍자, 조롱에 아무도 대답을 하지 못했다.
한일합방 직후 그는 일체의 공직활동을 자제하고, 언론, 문필, YMCA 청년회와 선교 활동에 종사하였다.
YMCA 활동과 선교 활동
엄낙만 환영회장에 참석
(뒷줄 왼쪽이 이상재, 앞줄 왼쪽은 윤치호, 앞줄 가운데는 신흥우
1913년 조선총독부는 YMCA의 확장을 경계, 어용단체인 유신회(維新會)를 동원, 이 청년회를 파괴하려 하였고, 이 때문에 간부들은 축출, 구금, 국외추방 당하거나 해외망명을 하였다. 출국한 이승만의 미국 체류를 위한 장학금을 지원하는 한편 윤치호에게도 출국을 권한다. 그러나 노부모가 생존해있던 윤치호는 출국을 주저한다.
그러나 그는 1913년 황성 YMCA 총무에 취임하여, 지도자들의 이탈과 구속, 추방 등의 가운데 윤치호와 함께 YMCA의 간판을 지키고 청년회를 사수하였다. 1914년 재일본조선YMCA를 비롯한 세브란스·배재·경신과 개성의 한영서원, 광주의 숭일YMCA, 군산의 YMCA연맹, 전주의 YMCA신흥, 공주의 YMCA연맹 등 학생YMCA와 연합, 황성기독교청년회와 통합하여 조선기독교청년회 전국연합회를 조직하였다. 이는 한국 YMCA의 모태가 되었다.
황성기독교청년회를 중심으로 꾸준히 계몽운동에 참가했는데, 이는 1920년대 조선 기독교계에서 계몽운동에 중점을 둔 사회참여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기독교청년회(YMCA)는 3·1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아, 그도 이 일로 관련자로 지목되어 6개월간 구금되었으나 혐의점이 없어 풀려났다. 한국보이스카우트연맹의 전신인 소년척후단조선총연맹 초대 총재, 조선일보 사장을 역임하면서 다양한 사회운동을 하였다.그러나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으로부터 조선독립선언문에 서명해 줄 것을 요청한 것은 거부하였다.
청년들과의 교유
만년의 이상재
그 뒤 그는 YMCA 청년회의 제2대 총무에 취임한다. 그는 기독교에 늦게 입문하여 나이가 들어서 젊은 사람들과 함께 청년회 운동을 하였고, 사망하는 해에도 신간회 초대 회장을 맡는 등 끝까지 원기 왕성한 활동을 펼쳤으며, 유머가 넘치는 밝은 성격이라 "만년청년"으로 불렸다. 당시 보수적인 이들은 "나이지긋한 분이 체통을 지키지 않는다"며 그의 그러한 행동에 불만을 가졌으나, 이상재 자신은 "내가 청년이 돼야지, 청년더러 노인이 되라고 할 수 없다"면서 청년들과 교류하는 일을 그만두지 않았다. 또한 그 자신은 셋방에서 살면서도 어려운 고학생이 있으면 학비를 줄 정도로 청년들을 다음 세대의 지도자로 키우는 일에 헌신하였다.
기독교인으로서의 기독교 비판
이렇듯 이상재는 너그럽고 밝은 성격을 갖고 있었지만, 옳지 못함에 대해서는 거침없이 비판했다. 그 실례로 1923년 이상재는 서구 선교사들앞에서 다음과 같은 연설을 하여, 당시 조선 개신교 교회에서 선교사들과 조선인 신자들이 대립하게 된 원인인 선교사들의 백인우월주의를 비판하였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하나이다. 하나님 나라는 세상의 어떤 경계도 초월한다. 그러므로 민족적 우월감에 사로잡혀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에 방해되지 않도록 하자.”
그는 일부 선교사와 교인들의 오만함과 독선이 사회적인 분열과 갈등을 야기할 것이라 예견하였고, 이해와 사랑으로 감싸려고 노력하자고 권고하였다. 그의 이런 예견은 사회주의가 본격 조선에 도입된 1920년대초에 이르러 기독교계열과 사회주의 세력 간의 첨예한 갈등으로 나타난다.
교육, 강연 활동
1920년 11월 4일에 개최된 1920년 전국체육대회 개회식에서 이상재(우측)가 시구를 하는 모습
그러나 3·1 운동 이후 만세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어 투옥되었다가 바로 풀려났다. 이때 일본인 검사 상내(上內)가 문초를 할때 각종 고문 도구들을 준비하고 회유하였으나 그는 거절하였다. 상내검사가 고문 도구들을 늘어놓은 다음 순순히 자백하지 않으면 고문할 의사를 밝혔다. 그러자 그는 큰소리로 외쳤다.
“옳지. 왜놈들은 제 부모도 친다더라. 늙은 나를 치려거든 쳐 보거라.”
이 말을 들은 상내 검사는 고향의 늙은 아버지를 생각하여 감히 그를 치지 못했다. 총독부 경찰은 그에게 3.1 만세 운동에 관련된 것을 추궁하였으나 그는 모르쇠로 일관했고, 별다른 혐의점이 없자 석방되었다.
1920년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 회장,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이어 동년 YMCA의 명예총무 또는 전국연합회회장에 선출되었고, 1920년 미국회의원으로 구성된 시찰단이 내한하였을 당시 제2의 독립운동·물산장려운동·소년척후대(보이스카웃)운동·학생청년회운동 등 YMCA운동을 주관하였으며, 각종 강연회·토론회·일요강좌·농촌운동·지방순회강연을 다녔다.
반기독교 사태 중재
하와이 방문 시 안창호, 윤치호와 함께 달리기 경주 (오른쪽 맨 끝)
105인 사건의 실패 이후에도 조선총독부는 통치에 부정적이었던 기독교 단체들을 타도할 계획을 꾸몄다.
1920년 9월 경상북도 영주군(榮州郡)에 권성영(權聖英)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의 아내는 평소에 효성이 지극하여 시어머니 상을 당하자 아침 저녁으로 상식(上食)을 했다. 그러던 중 남편이 예수교 신자가 되면서부터 조석 상식이 미신이라고 하면서 그것을 엄금하게 하였다. 아내는 남편에게 애원도 하고 설득도 해봤으나 끝내 듣지 않았으므로 차라리 죽음으로써 불효의 죄를 갚는 것이 자식된 도리라 생각하고는 자결하였다.
그 당시 기독교인들은 성서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여 부모의 신주(神主) 앞에 절하는 것 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부모에게 1년에 한 번씩 세배 드리는 것마저 우상 숭배라고 생각했다. 이것은'하나님 외에는 절하지 말라'는 십계명을 범하는 일로 여겼기 때문이다. 이 일로 서구의 미신이 조선을 짐승 사회로 만든다며 기독교에 대한 유교의 기독교 성토가 이어졌고, 사회주의자들 역시 기독교의 배타성과 맹신을 집중공격했다. 기독교 단체를 타도하려 했던 조선총독부는 기독교 성토를 부추기거나 수수방관하였다.
이 사건은 신문에 크게 보도되었다. 9월 1일자 동아일보에 '애매 무리한 기독교의 희생자, 남편이 예수교를 믿고 상식을 폐한 결과 마누라가 대신 죽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이후 사회에서는 기성 교회에 대하여, 특히 선교사들에 대하여 비난의 소리가 빗발쳤다. 반기독교적 시위와 항의가 확산되는 가운데, 그는 기독교의 본질이 부모를 공경하고 조상에게 예를 표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라며 해명하였다.
이상재 선생의 의견
사태가 이쯤 되자 동아일보의 기자가 기독교계의 반응을 듣기 위하여 청년회 회관으로 월남을 찾아왔다. 이에 월남은 크게 충격을 받고 자기 소신대로 의견을 말했다. 기독교가 효를 거절하는 것은 아니며, 인간이 되지 못한 자가 신앙을 한다고 하여 달라지는 것은 없다는 것이었다.
동아일보는 그의 발언을 환영하여 '제사와 우상 숭배, 조선의 제사는 일신(一神)사상에 위반이 되지 아니한다'는 사설을 발표했고, 기독교 근본주의를 따르는 개신교 교회들과 선교사들은 그들이 보기에 우상숭배인 제사를 효의 실천으로 존중하는 이상재를 책벌감상으로 몰았다. 이때 박승봉장로는 기독교의 제사 문제를 근본적으로 파헤쳐 구약성서 레위기 주석까지 썼으며, 더 나아가 주정(주자와 정호) 때부터 유교가 결단났다고 하면서 주자학(朱子學)의 제사관을 비판한 일도 있었다. 이상재의 이러한 발언은 교회와 사회에 큰 파문을 야기시켰고, 반기독교 풍조를 잠재우고 사태를 중재하는데 성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