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물기행 김병로
영원한 인간사랑 ・ 2024. 6. 7. 1:24
URL 복사 통계
본문 기타 기능
한국인물기행 김병로
인기멤버
2024.05.28. 02:16조회 26
댓글 0URL 복사
항일 변론투쟁 벌인 사법부 독립의 상징 ‘김병로’(1888~1964)
길고 잔혹했던 일제의 식민통치, 외세와 좌·우익 투쟁에 의한 민족분단이라는 시련, 이 어둠의 역사 속에서 민족적 양심과 지조를 끝까지 지킨 인사들은 많지 않다.
좌익도 그렇지만 대개의 우익 인사들이 만주사변(31년)과 중일전쟁(37년)을 거치면서 일제의 탄압이 극도로 가중되자 독립운동을 팽개치고 소극적으로든 적극적으로든 친일활동에 가담했으며, 8·15해방 이후 48년 단독정부가 수립되기까지의‘해방공간’에서 단독정부수립 노선에 가담함으로써 민족분열에 기여했다.
초대 대법원장 지내
그러나 우파 지도자 모두가 그러했던 것은 아니며 그 가운데서도 일제하에서 비타협의 길을 고수했고 해방 후에도 좌우합작과 그것에 의한 민족통일국가 수립에 적극 나섰던 인물이 없지 않았던 바 그 대표적 인물이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가인 김병로이다.
가인은 1888년 1월 27일(음력 1887년 12월 15일) 전라북도 순창군 복흥면 하리에서 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7살에 아버지를 여읜 외로운 호주로 성장한 그는 12살 때 결혼, 30대 후반의 홀어머니를 모시고 집안일과 농사일 전반을 처리하면서 <소학>과 사서 특히 <중용>과 <대학>을 열심히 공부했다. 14살 때인 1902년 조선유학의 마지막 대종으로 불리던 간재 전우 밑에서 성리학을 배웠다.
6살 때 이웃 고부군에서부터 시작된 갑오농민전쟁을 겪은 그는 한말 위정척사파의 지도자 면암 최익현을 만나 항일의병투쟁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일본군의 대토벌작전으로 국내 의병투쟁이 수그러들기 시작하자 전남 담양 창평의 창흥학교에서 신학문을 배웠다.
가인은 이 학교에서 그의 일생에 적잖은 영향을 주는 친구들 즉 동아일보 주필과 사장을 지낸 고재욱의 아버지 고광준, 인촌 김성수, 고하 송진우, 근촌 백관수 등을 만났다.
21살 때 창흥학교에서 고등과(6개월 속성과)를 마친 가인은 인촌, 고하가 먼저 떠난 일본 유학길에 오르기로 결심해 세 번에 걸친 유학 끝에 독학과 고학으로 1913년 메이지대학 법과를 졸업, 다시 메이지대학과 주오대학이 공동으로 설치한 법률고등연구과(오늘날의 대학원 석사과정)에 적을 둔 그는 일본대학 법과에도 동시에 적을 두고 공부해 2년 만에 졸업했다.
귀국 즉시 경성전수학교의 법률학 조교수로 친족상속법·국제법·형법 등을 가르치던 그는 1919년 3·1운동 직후 교수직을 사임하고 특별임용에 의해 총독부 산하 부산지법 밀양지원에서 1년간 판사를 거친 뒤 변호사 자격을 얻었다. 이때가 31세 때의 일이다.
가인은 전국을 휩쓴 3·1운동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으나 변호사로 개업한 지 며칠 안돼 독립운동단체인 대동단사건의 변호를 돕는 것을 시작으로 항일운동 관련사건의 변호를 거의전담하다시피했다.
1921년 항일무장단체 보합단사건 등 독립운동사건의 변호를 전담하다시피 했던 가인을 비롯한 허헌·이인 등은 비용문제로 곤란을 느끼게 되자, 23년 권승렬·김용무 등과 함께 형사공동연구회를 발족한다. 이들은 무료 변론을 하는 한편 일반 형사사건에서 수임료를 받아 그 전액을 연구회의 수입으로 삼아 활동자금으로 이용했다.
형사공동연구회가 맡은 첫 사건이 의열단원 김상옥의사 사건이며 이어 김시현 등의 제2차 의열단사건, 박헌영 등의 제1차 조선공산당 사건 등을 변호했다.
이 시기에 가인은 초기 사상운동 단체인 북풍회, 조선변호사협회, 동아일보와 보성전문 이사, 민립대학설립운동, 물산장려운동 등 다양한 사회활동에도 참여했다.
특히 한가지 주목할 것은 가인이 당시 우파적 흐름 가운데 조직화가 시도되고 있던 자치운동 즉 타협주의에는 참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가인은 창흥학교 이래 자신과 가까운 사이였던 인촌·고하·최린·이종린·신석우 등 우파 지도자들이 추진한 자치를 추구하는 합법정치단체인‘연정회’ 등 타협적 민족주의 흐름과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중국의 국공합작 시도와 조선독립운동단체들 사이에서 추진되고 있던‘민족유일당 운동’의결실로 신간회가 창립되면서 여기에 참여한 가인은 초대 회장 월남 이상재가 창립 한달반 만에 별세하고 후임 회장으로 권동진이 뽑히면서 허헌과 함께 그의 보좌역으로 기용돼 활동을 시작한다.
이 시기 그는 지부조직의 확대와 노동쟁의·소작쟁의 등의 공정한 해결을 위한 노력 등을 통해 신간회의 기반을 굳히는 데 진력했다. 한편, 법정투쟁을 통한 항일활동도 계속해 장진군 토지강제 매입반대 주민투쟁, 만주 항일무장단체인 정의부와 그 지도자 오동진 사건, 원산총파업사건, 형평사사건 등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과 변호활동을 벌였다.
신간회에서 가인의 역할은 29년에 들어서면서 더욱 본격화됐다.
29년 신간회 전국대회에서 허헌이 중앙집행위원장에, 가인은 중앙집행위원 겸 회계장(재정부장 격)으로 선출되었다.
형사공동연구회의 회원이면서 기질이나 뜻이 잘 맞는 허헌 위원장 체제에서 가인은 자신의 고향이자 곡창지대인 전북지방 특히 김제·부안·익산·이리·정읍 등지에서 일어난 소작쟁의와 수리조합 분규 등 농민·화전민들과 관련된 사건변호를 많이 했는데 이 점은 그가 농민들의 생활에 남다른 이해와 관심을 가졌던 데 따른 것으로 보이며, 해방 후 토지개혁문제에 대해서도 우익계 인사로서는 거의 유일하게 무상분배를 주장했던 사실과도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신간회 위원장 맡아
29년말 허헌 위원장 등 신간회 간부진들이 광주학생운동의 진상과 일제의 잔학상을 폭로·규탄하기 위한 민중대회를 계획한 것이 일경에 탐지되면서 주요 사회단체 지도자 1백여명이 경찰에 검거된 이른바 민중대회사건으로 신간회의 운영은 가인에게 넘어왔다. 가인이 위원장을 맡고 몇 달이 지나지 않아 신간회는 좌우익 알력이 표면화되기 시작했고 좌익세력은 지도부가 우경화했다는 지적과 함께“신간회의 사명과 역할이 끝났다”고 주장하는 신간회해소론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신간회 해소론의 배경으로는 일제의 탄압과 코민테른의 전략변화가 지적되고 있지만 가인의 진용이 우파적 색채가 짙었던 점도 해소론 대두의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마침내 31년 5월 신간회는 해소파의 힘에 밀려 해산됐다.
신간회가 해소된 뒤 가인은 3차 간도공산당사건, 흥농사사건, 안창호와 수양동우회사건 등에 대한 변호와 법정투쟁을 계속했으나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이 일어나면서 일제의 회유와 탄압이 거세지자 서울 근교 양주군 노해면 창동(지금의 서울 창동)으로 은둔해 농사를 지으며 지냈다.
은둔생활을 하던 가인이 해방을 맞아 다시 일선에 나선 것은 환갑을 눈앞에 둔 58세 때이다.
그는 백관수·이병헌 등 옛 신간회 동지들과 고려민주당을 발기해 이를 바탕으로 한국민주당(한민당)창당에 참여했다.
그러나 해방정국에서 미군정청과 한민당의 밀착이 두터워지고 반면 군정청과 건준·인공, 한민당과 건준·인공의 대립이 날로 날카로워지자 이를 극복하는 방법은‘제2의 신간회운동’즉 좌우세력의 합작운동이라고 생각하고 이 운동에 착수했다. 그는 또 변호사로서 좌익인사들과 맺은 폭넙은 인간관계 등으로 이 일에 적임자의 한 사람이기도 했다. 백관수 또는 원세훈과 함께 한민당의 대표로 좌우협동과 합작을 위해 적극활동에 나섰으나 좌우 각 파의 주도권 투쟁과 불신으로 별다른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그의 이런 노력이 한때나마 큰 성과를 거둔 것은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 즉 신탁통치문제에 대한 노선통일 노력이다.
신탁통치를 둘러싼 좌우익간 노선대립이 표면화되기 시작한 46년 1월 6~7일 이틀 동안 통일을 위한 인민당·한민당·국민당·공산당의 4당회의가 열렸다. 가인은 원세훈과 함께 이 회의에 한민당 대표로 참석해“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이 조선의 자주독립을 보장하고 민주주의적 발전을 원조하려는 정신과 의도는 전면적으로 지지하며, 탁치문제는 장래 수립될 우리 정부가 자주독립정신에 때라 해결하게 한다”는 내용의 공동성명에 합의했다.
그러나 이 합의는 한민당에 의해 거부됐으며 가인은 당 확대간부회의에서 인책론까지 거론되는 수모를 당했다.
그는 그 뒤로도 모스크바 결정에 따른 미·소 공동위원회와의 협의에 응하기 위해 우선 우익정당들부터 통합해야 한다고 제의, 한민당·한독당·국민당·신한민족당 등 4당통합을 추진했으나 한민당의 거부로 무산됐다.
그해 5월 미군정청의 후원 아래 좌우합작이 추진되자 그는 한민당의 차가운 시선에도 아랑곳없이 원세훈과 함께 여기에 깊은 관심을 쏟았으며, 10월 들어 좌우합작위원회가 합작7원칙을 발표하면서 토지문제를 둘러싼 한민당 내 갈등 끝에 그는 탈당했다. 함작7원칙 중 토지관련 조항은 몰수, 조건부 몰수 등 밥법으로 지주의 토지를 수용해 농민에게 무상으로 분배한다는 것이다.
가인은 토지문제 해결방안은“주주로부터 땅을 사서 소작인에게 거저 나눠주는 것뿐”이라고 생각했으나 지주계급적 성격이 강한 한민당은“무상분배는 공산주의와 다름이 없다”며 거부했다.
토지문제로 한민당 탈당
토지문제로 한민당을 떠난 가인은 좌우합작이 통일로 가는 열쇠중 하나라는 믿음으로 합작세력의 결집체인 민중동맹에 가담했고 좌우합작위원회가 해체된 이후 47년에는 새로운 출구를 찾아 김규식의 민족자주연맹 결성에 참여했다.
대한민국 정부고 수립되면서 초대 대법원장을 맡은 그는 취임인사에서부터 사법부의 독립을 강조하는 등 이승만 정권의 간섭을 배제했으며 그 과정에서 이 대통령과 많은 갈등을 빚기도 했는데, 이 정권 아래 사법부에서 법률을 수호하려 노력했던 법관들이 많이 나올 수 있었던 것도 그의 이런 노력에 힘입은 바 크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오랫동안의 변호사 생활과 대법원장 재임에도 불구하고 경제적으로 결코 넉넉하지 못했다.
일제시대 그와 함께 숱한 항일변호를 맡았던 이인은 회고록에서 그의 청빈을 실감나게 적고 있다.
집팔아 동지들 밥값 치러
당시 사회운동하는 사람들이 다 넉넉지 못해 신간회 동지들이 가인의 집에서 기식하면서 부근 설렁탕집에서 식사를 하기도 했는데, 1년만에 그 밥값을 갚으면서 자신의 서대문집 근 50간을 팔아야 했다는 것이다.
그는 또 술을 무척 좋아해 술과 관련한 일화를 많이 남겼다.
그의 고향 후배로 회고록을 구술받아 <경향신문>에 게재하기도 했으며 그 뒤 그의 전기 <가인 깁병로>를 쓴 김진배씨는 가인이 법률과 관련된 짧은 글들 외에는 거의 기록을 남기지 않은 것도 술을 너무 좋아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적었다.
58년 대법원장을 정년 퇴임한 그는 자유당 말기의 반민주적 행태와 부정선거를 규탄했으며 5·16쿠데타가 일어난 뒤에도 이에 반대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는 민정이양을 앞두고 야당통합과 대통령후보 단일화를 위해 끝까지 노력했으나 63년 선거에서 민정이양에 실패하자 정계에서 은퇴했고 64년 1월 13일 자택에서 77세로 별세했다.
[출처] 김병로|작성자 바람소리
hanjy9713님의 게시글 더보기
좋아요0
이 글을 '좋아요'한 멤버 리스트
댓글0
블로그/카페 공유수0
공유
클린봇이 악성 댓글을 감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