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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창세기 1장 1~31절(NO2)
주제 :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성경의 서두는 단순 간결한 서술형 단문으로 시작되고 있다. 그러나 이 짧은 한마디 말씀이야말로 모든 인생을 죽음이 가져오는 무의미의 절망 가운데서 구원해 줄 수 있는 장엄한 神的(신적) 선언인 것이다. 만일 온 宇宙(우주)가 하나님의 크신 사랑에 의해 創造(창조)된 것이 아니라면 人間(인간)의 存在價値(존재가치)와 意味(의미)는 무엇이겠는가? 이 대답은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자들의 인생에서 쉽게 발견할 수가 있다. 이기적이고 본능적인 욕망과 죽음의 공포에 짓눌려서 그저 외부의 강제력에 제재당하며 살아가는 그들의 삶 속에 그 대답이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본문의 짧은 긍정문이야말로 인간과 세계 내에 있는 모든 존재에게 그 참된 존재가치와 생의 의미를 제공해 주는 계시의 찬란 천 빛줄기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존재의 시작(the beginning)이요, 원인이며(the Cause), 근원(the Source)일 뿐만 아니라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creatio ex nihilo) 우주와 세계의 主人(주인)이시기 때문이다. 본문은 그런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우주의 기원에 대한 계시를 명쾌히 선포하고 있다. 하면 창조의 순서에 대해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친밀한 계획과 사랑을 엿볼 수 있다. 마치 캔버스위에 화가가 그림을 그리듯 처음 세 날은 준비 작업을, 그 후 세 날은 완성시켜 나가는 질서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배 경 | 완 성 | ||
첫째 날 | 우주, 빛(1:1-5) | 넷째 날 | 해, 달, 별(1:14-19) |
둘째 날 | 궁창(1:6-8) | 다섯째 날 | 새, 물고기(1:20-23) |
셋째 날 | 바다,땅, 식물(1:9-13) | 여섯째 날 | 동물, 사람(1:24-31) |
일곱째 날 | 안식하심(2:1-3) |
들어가는 말 - 생각해보자! 만일 초자연적이라 하는 사건들을,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자연 현상의 골격 안에서 설명할 수 있다면, 그 뒤에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의 신성하고도 기적적인 지혜와 총명과 전지전능이 감소가 되는가?
인간(우리)의 지식은 어려서부터 보고 듣고 배우고 경험한 것과 보강된 것의 산물이다. 그 고착화된 지식(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얼마나 제한적인 것인가? 주관적인 것인가? 얼마나 잘 못 알고 있는 것인지도 인식하지 못한 채)으로 살아가며(참된 것을 배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그러한 면에서 '참 진리를 아는 스승을 만난다는 것'은 행복이다) 또한 새로운 개념을 대했을 때, 인간은 본능적으로 방어적인 자세를 취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신앙하면서 하나님의 일들을 과다하게 신비화하려는 경향(신비한, 기적적인, 비현실적인 것이 현실적인 것으로 이루어 주시거나 만나주시는 하나님으로만 인식하고 신앙하는)이 있다. 그로 인하여 하나님의 일반계시와 보편적 일상에서의 무소부재 섭리(일)하시는 것을 의식하지 않거나 무시하게 된다. 하나님의 모든 “초자연적인” 활동은 그분의 능력과 성품 안에서는 완전히 “자연적”이다. 그분은 일관되며, 변덕스럽지 않으시다.
▷. 기원의 논쟁
창조와 자연법칙 - 창조 사역은 하나님과 그분이 사용하신 법칙에 의하여 조절되었다. 이 장조의 원리는 지금까지 계속되지는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창조 사역을 끝마치시고, 쉬시기 전에 그것이 매우 좋다고 생각하셨다. 비록 창조의 법칙은 알 수 없으나 창조된 우주 안에 있는“자연”의 법칙은 알 수 있다. 우주 속에서 작용하는 자연 법칙은 하나님께서 홀로 세우신 원리들을 통하여 하나님에 의해 통제된다. 중력, 핵물리, 광자역학, 질량, 소리, 그리고 에너지 등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자연 법칙에 의해 조절된다. 우리 인간은 그들 중 대부분을 이해할 수 없다. 단지 제한된 정도만을 분석할 수 있을 뿐이다.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1-3)
인류가 피조물을 발견하고 분석하며 이용함에 따라, 지식과 과학의 신이 만들어지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질서를 깨달은 사람에게는 그러한 발견이 참 창조주의 계시에 이르는 문(門)이 된다.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골2:3)
▷. 창세기는 성경 중 제일 앞에 있는 성경이다. 창세기란 이름 그대로 세상을 만든 이야기를 기록한 책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히브리 원전에는 “בְּרֵאשִׁ֖ית -베레쉬트”로서 우리 말은 “태초”로 번역하였다. 찬송가 가사 첫 머리가 제목이 된 것과 같은 이치다. 출애굽기도 “또한 이것들이 이름들이다” 라고 되어있다. 창세기란 이름은 BC 285-247년경이다(구약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번역한 70인 역을 번역할 때에 히브리 원전 “태초에”로 첫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의미를 따라 붙인 것이 창세기다).
창세기는 하나님께서 왜 세상을 창조하셨는지를 설명하는 이론의 책이 아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는 선포로서 시작하고 있다. 하나님께는 이론이나 이유의 설명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록된 연대기는 BC 1450년경으로 모세를 통하여 기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자칫 창세기가 어떤 한 민족의 역사로 해석하기 쉬운데, 실제로는 한 민족의 역사가 아니라 온 세상의 세계사이며(전 포괄적인 우주), 전 인류의 근원과 구원과 및 그 나라에 대한 역사이다.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בְּרֵאשִׁ֖ית בָּרָ֣א אֱלֹהִ֑ים אֵ֥ת הַשָּׁמַ֖יִם וְאֵ֥ת הָאָֽרֶץ׃ (⟵)
:베레쉬트 바라 엘로힘 에트 하샤마임 뵈에트 하아레쯔
913 203 86 401 395 407 296 = 2701
일부 학자들은 1절은 단지 천지를 창조하기 위한 선포에 불과하다는 ‘제목설’을 주장하면서 진정한 천지 창조는 3절부터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2절의 상태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 이전에 이미 존재하였다는 것(상대 창조)이 되므로 하나님의 창조는 진정한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절대 창조)이라고 할 수 없으며, 출20:11절과도 상치된다. 뿐만 아니라 이 제목설에 의하면 우주를 창조한 날이 없게 된다. 그러므로 1절은 단지 선포에 불과한 제목이 아니고 실질적인 창조로 보아야 한다. 태초에(베레쉬트)는 처음, 기원, 출발의 뜻이며 동일한 단어가 요1:1 요일1:1에도 나타나는데 그 의미는 각기 다르다. 즉 ①“태초에” 무시간적인 영원함이나 영원한 시간의 흐름 중 어느 한 시점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시간 자체도 하나님의 창조 결과로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 다라서 본절의 태초에 라는 말은 하나님이 천지 창조를 開始(개시)함으로서 시작된 시간의 출발점을 의미한다. ②요한복음 1:1절의 태초(헬 아르케)는 만물의 시초 이전에도 존재한, 즉 시간적 차원을 초월한 영원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단어는 그리스도의 영원 전 先在性(선재성)을 밝히기 위해 사용되었다. ③요한일서 1:1절의 태초는 요한복음1:1절의 의미와 거의 동하나 특별히 성육신(成肉身)하신 제2위 하나님, 즉 그리스도의 강림을 강조하려는 목적으로 사용되었다(서론 천지창조 이해 참조).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요절을 몇 개 선택하라고 한다면 창세기 1:1절이 가장 우선한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이 사실만 믿을 수 있다면 성경의 모든 내용도 믿을 수 있다. 그리고 이 사실이 믿어진다면 개인의 사고와 지식과 감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믿어지도록 역사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믿음은 인간의 노력이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닌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특별은총)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2:8,9절)
▷. “태초에 하나님이” 태초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는 태초 이전에 계셨다는 것을 말씀하며 또한 모든 것의 시작과 시간의 시작을 말한다. “하나님이” 엘로힘(אֱלֹהִים)은 복수로서 “하나님들”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결코 그렇게 번역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여러분이라서 그렇게 사용한 것이 아니라 거룩한 장엄함의 복수를 사용기 때문이다(히브리 문학에서 전능자 하나님을 표현할 때 세상(世上) 신(神)들과 구분하기 위하여 복수를 사용 한다). 삼위일체는 신비적 연합으로 동일 본질이시다. 성부안에 성자와 성령이, 성자 안에 성부와 성령이, 성령 안에 성부와 성자가 동일 본질로 계시며 각기 나뉘지 않는다. 삼위일체는 인간의 지혜나 지식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신비적 연합이다.
▷.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조” 히음(בָּרָא 바라- created)은 “없는데서 있게 하셨다”는 말씀으로, 무엇인가 있는 것으로 무엇을 만들다(make)와는 다르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이 사실만 믿을 수 있다면 모든 것을 믿을 수 있고 이 사실을 믿지 않는다면 아무 것도 믿을 수 없다.]
2절 והארץ היתה תהו ובהו וחשך על פני תחום. ורוח אלהים מרחפת על פני המים
웨하아레츠 하에타 토우 와보후 웨호세크 알 페네이 테홈 웨루아흐 엘로힘 메라헤페트 알 페네이 함마임
“그 땅은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은 내면에 있더라. 그리고 하나님의 영이 그 수면위에 운행하시더라.”
▷. “혼돈하고 공허하며” 히브리인들은 일반적으로 전혀 형체가 없는 텅빈 상태와 아주 적막하고 무가치하며 헛된 것을 묘사할 때 이 혼돈(תהום -tehom)과
공허(בהו -Bohu)란 말을 사용하였다(사34:11 렘4:23). 그런데 본절에 기록된 혼돈 개념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①부정적 개념을 가진 혼돈과 공허가 아니라, 1절을 좀 더 상세히 설명한 것이거나 우주 창조의 초기상태에서 아직 정돈이 안 된 물체를 묘사해 주고 있다는 견해(the orignal chaos)와 ②본절의 ‘~하고’란 말을 상태의 변이(become)로 해석함으로서 하나님을 거역한 사단(사14:12-17 겔28:11-19 벧후2:4 유1:6)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라고 보는 견해이다. 바람직한 견해는 태초에 무(無)에서 유(有)의 창조는 이미 이루어진 상태이지만(chaotic), 아직 지구는 우주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 맞도록, 즉 사람이 거주하기에 적합하도록 조성된 상태(cosmos)는 아닌 것으로 보는 전자의 견해다.
▷. “깊음” 액체 상태로 있는 지구의 유동적인 표현을 가리킨다.
▷. “하나님의 신” 직역하면 ‘하나님의 숨’으로서 모든 생명의 근원을 가리킨다. 더 나아가 이 말은 영적 질서를 주관하시는 성령을 이미 한다(욥26:13; 27:3 시33:6; 104:29; 143:10 사34:16; 61:1; 63:11). 혹자는 성령께서는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때 처음 땅 위에 내려오셨고 휴거(rapture)때에 떠나가시는 줄 알고 있으나 분명히 성령은 창세기 1장 2절부터 나타나 천지 창조 사역에 협력하고 계심을 알 수 있다.
▷. “운행하시니라” 운행(רחף -라하프)‘부드럽게 움직이다’ ‘소중히 가슴에 품다’ 라는 뜻으로 어미새가 알이나 어린 새끼를 날개에 품어 돌보며 그들의 생명을 키우는 활동 등에 사용되는 말이다(신32:11 시104:30). 이상을 종합해 볼 때 생명의 근원되신 하나님의 신은 깊은 수렁과도 같고 생명이 없는 공허한 지면을 감싸듯 운행하시면서, 새로운 생명의 요소와 기운을 그 수면에 채워 주셨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신은 수면 위에 운행하셨다”고 말한다. 그러나 물이 어떻게 하여 거기에 있게 되었는지에 관한 언급은 없다. 6절의 하늘에 의한 물의 분리는 물이 이미 만들어져 있었음을 추측케 한다. 흥미롭게도 물의 히브리어는 מים(마임) 이다 마임은 샴[ שם]과 복합어를 이루는데 샴은 “거기에” 또는 “그 안에”라는 뜻이다. 이로서 '샤마임(שמים)'은 이라는 단어가 만들어졌고 그 단어는 창세기 1:1절에서 “하늘- (שמים) ”로 번역되었다. 하늘은 원래부터 그 안에 물을 담고 있었다. 과학자들은 행성사이의 빈 공간에 물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Nat' Geo 74년 5월호 p625) 그렇다면 시편 148편의 “하늘 위의 물”은 무엇인가?
○ 특이성에서의 평행 - 물은 물질세계의 가장 기본적인 것 중의 하나이지만 보통의 화학 이론에 맞지 않는다. 물은 두 기체의 화학 결합으로 쉽게 생성되지만 쉽게 파괴되지 않는다. 그리고 물은 일반적으로 액체이고, 다른 화합물과 잘 결합하지 않으며, 얼면 부피가 증가하여 뜰 수 있다. 액체 형태의 물은 생물의 모든 중요한 界(계)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순환계, 소화계, 재생산계, 그리고 호흡계 모두가 물에 따라 좌우된다.
○ 물이 없으면 생물이 없다. - 다른 행성으로 발사된 우주 탐색선은 그 행성에 생물이 존재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알아보기 위해 언제나 물을 찾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물질적 생명체를 특별히 창조하신 지구에서만 물을 발견할 수 있다.
○ 물과 연관된 첫 성경의 관주를 보라. 그곳은 하나님의 신이 처음 언급된 말씀이다. 물과 영이 서로 같지는 않을지라도, 물이 육체적 생명의 근본인 것처럼 영은 우리 영적 생명의 근본이다. 태초에 하나님의 신이 물과 연관되었다는 사실이, 물과 영의 “생명을 주는 독특성”을 보여 주는 것 같다.
▷.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성령하나님께서 수면에 운행하셨는데 운행하시니라의 뜻은 암탉이 알을 품어서 병아리로 부화시키는 것과 같은 깊은 묵상(?)의 문학적 표현(신인동형론적인 문학의 수사법)으로 그냥 막 만들어 진 것이 아니라 하나하나 질서 있게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3절 וירא אלהים את האור כי טוב ויבדל אלהים בין האור ובין החשך.
바이오메르 엘로힘 예히- 오르 바이히 오르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더라.
And God said "Let there be light. There was light."
하나님의 창조 사역은 다음 다섯 단계로 이루어졌다 창조의 말씀-가라사대 말씀으로 인한 각 피조물의 탄생-그대로 되니라 하나님 당신의 평가-보시기에 좋았더라 각 피조물에 이름을 붙이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칭하시고 각 날의 구분-이는 .. 날이니라.
▷. 빛이란 무엇인가?
사람들은 시도를 하였지만, 빛을 적절하게 분리하고 조사하며 정의할 수 없었다. 다음의 사실들을 생각해 보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니 빛이 있었다.
○그 분의 말씀이 빛을 만들었다
○그분의 말씀이 빛이다.
실제로 빛 가운데로 걸어가는 우리조차도, 그분 앞에 서서 그분과 얼굴을 맞대고 보게 될 영광스러운 그날까지는 완전히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이 문제는 영적으로 난해하며 포괄적이다. 잘 알려진 전자기 스펙트럼(일부분만이 보인다)외에 과학적으로 규명되지 않은 빛과 에너지의 영역이 있을지도 모른다. 최근까지만 해도 초당186,282 마일의 광속을 최대 가능 속도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우주의 알 수 없는 물질이 더 빠른 속도를 나타내었다. ❇spectrum - 복잡하게 짜여진 현상이나 물질을 단순한 성분으로 나누고, 각각의 양의 크기에 따라 강도의 분포를 배열한 것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이 빛은 넷째 날에 만드신 해와 달의 빛과는 구별된 빛이다. 시작의 빛 질서의 시작을 말씀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말씀하실 때, 그 번쩍 하는 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죄의 저주에 의해 영향 받지 않은 “매우 좋았던” 전 우주는 창조주가 발하는 엄청난 빛에 흠뻑 젖어 있었을 것이다.
▷.창조의 “날들”은 얼마나 길었을까? - 창세기 1장에 기록된 날들은 언제나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라는 구절로 끝난다. 이러한 표현은 그것이 나타내는 사실성만을 모세가 우리가 알 수 있는 방법으로 기록한 것이다. 태양이 아직 없었을지라도 지구가 한 번 회전하였음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언제 태양을 만드셨는가? 16-19절을 보라
▷.시편84:10절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하루(1년) = 천 날(천년)의 표현이나 벧후3:8절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은 그분의 심판에 관한 표현이지 창조에 대한 표현이 아니다 그러므로 창조 때의 7일간의 기간을 나타내는 말씀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특정한 부여를 하실 때만이 “날(욤 יום)” 은 “시간”과 같은 의미로 쓰인다(출20:8 창1:9).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니 빛이 있었다.
○그분의 말씀이 빛을 만들었다
-하나님께서 창조한 물리적인 빛(물론 이 빛도 만물의 생명과 직접적 연관이 있다)과 참 생명으로서의 빛이라고 요한복음은 기록하고 있다.
○그분의 말씀은 빛이다.
○그 말씀은 곧 그분이다.
그러므로 빛은 하나님께로 부터 나오고 그 빛은 세상을 비추는 참 빛 곧 하나님이시며 참 생명이다(요한복음1장1-14절).]
4절 ויקרא אלהים לאור יום ולחשך קרא לילה. ויהי ערב ויהי בקר יום אחד
그리고 그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그 빛 사이와 그 어둠 사이를 나누사 And God saw the light that was good and He divided between the light and between the darkness.
▷. 하나님의 천지 창조에는 3차에 걸친 분리(分離) 사역이 나타나 있다. 즉 빛과 어두움(4절) 물과 궁창(7절) 바다와 땅(9절)의 분리이다. 이 분리 작업이 완료되었을 때마다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좋았다고 인정하셨다. 후일 바울은 이 빛과 어두움의 분리를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의와 불법의 분리에 적용시킴으로서 도덕적, 종교적 성결의 원리로 확대해석했다(고후6:14).
▷. 하나님의 천지 창조 사역은 다음 다섯 단계로 이루어졌다. 즉 ①창조의 말씀-가라사대 ②말씀으로 인한 각 피조물의 탄생-그대로 되니라 ③하나님 당신의 평가-보시기에 좋았더라 ④각 피조물에 이름을 붙이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칭하시고 ⑤각 날의 구분- “이는 ... 날이니라” 등이다. 하나님께서 빛을 창조하시고 기뻐하셨다. 자신의 의도대로 되었기 때문이다.]
5절
כֹּ֣ל הַ֭נְּשָׁמָה תְּהַלֵּ֥ל יָ֗הּ הַֽלְלוּ־יָֽהּ׃ וַיִּקְרָ֨א אֱלֹהִ֤ים׀ לָאֹור֙ יֹ֔ום וְלַחֹ֖שֶׁךְ קָ֣רָא לָ֑יְלָה וַֽיְהִי־עֶ֥רֶב וַֽיְהִי־בֹ֖קֶר יֹ֥ום אֶחָֽד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히브리어 창 1:5 끝 부분에는 “יום אחד פ”이란 표현이 있는데 발음은 ‘욤 에하드 : 페’이며, ‘첫째 날. 5절의 종결’이란 뜻이다. 또한, אחד(에하드)는 ‘서수 남성 단수’로 ‘하나, 첫째’란 뜻이며 יום(욤)은 ‘명사 남성 단수’로 ‘날, 하루’라는 뜻이다. 그리고 콜론(:) 뒤에 표시한 ‘페(פ)’는 창 1:5의 ‘종결’을 의미하는 ‘꼬리형 문자’ 중 하나다.
▷. 히브리어 날(욤 יום)의 이해에 따라 우주 창조의 연대 및 시간적 길이가 정해지는데, 여기에는 다음의 세 학설이 있다.
①(욤 יום)은 곧 한 세대를 가리킨다는 학설(Day-Age Theory)이다 요세프스, 이레니우스, 오리겐, 어거스틴 이들은 창1:5, 8, 13절의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라는 말이 하나의 상징적인 표현으로서, 한 시대의 끝과 다른 한 시대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이 주장의 근거는 창조주 하나님의 손에는 시간적 요소가 초월되어 있다는 점이다(시90:4 벧후3:8). 그러나 이 학설에는 두 가지의 난제가 있다 첫째 창1장의 주석이라고도 할 수 있는 출20:8-11절의 안식일 계명 문제에 위배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분명히 안식일 계명에서 보는 창조의 6일은 여자적(如字的)인 6일이요 장구(長久)한 6시대를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일 창세기의 1일이 현재적인 하루가 아니라면 제 7일의 안식일 문제를 설명할 길이 없다. 둘째 성경에 분명한 어법으로 표현된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1,5,8,14,19등)라는 말을 상징적으로 해석하여 한 시대의 교체로 보는 것은 매우 부자연스럽다는 점이다.
②(욤 יום)을 문자 그대로 24시간을 의하는 것으로 보는 학설이다(루이스 벌고프). 이들의 근거는 첫째 성경 해석상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원어의 일차적인 뜻을 따라야하며, 둘째 현실적인 제 7일을 안식일로 하나님께서 정하셨다면 다른 6일도 당연히 같은 24시간을 가진 하루이어야 한다. 셋째 창조 사역에 있어서 마지막 3일은 분명히 오늘날과 같은 태양으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에 24시간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논리적으로 최초의 3일도 같아야 되지 않겠는가라는 주장이다.
③(욤 יום)이라는 말이 나타내는 기간이 서로 다르다고 보는 학설이다. 그것은 시간 계산의 표징인 태양이 제 4일에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 이전 3일은 오늘날 하루와는 다른 장구한 기간이며 이어지는 3일은 24시간으로 볼 수 있다는 학설이다. 이상의 모든 학설들은 연대설과 및 혼합설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성경이 우주 및 인간의 창조 연대를 분명히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 중의 한 가지 사실만을 강조하거나 주장해서는 알 될 것이라는 점이다.]
※ ⌜알기쉬운 창세기⌟윤희주 저. ⌜밝혀진 만물의 기원과 창조의 신비⌟ 창조과학 씨리즈1 데니스 피터슨 저. ⌜창세기 서론⌟톰슨 저.
▷.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 구절은 창조 6일간의 각 기사 끝 부분에 공통적으로 사용되었다(1:5,8,13,19,23,31). 여기서 어떤 학자들은 저녁이란 말이 먼저 나오는 것은 모세 율법(레23:32)과 고대의 시간 개념에 의하면 하루의 시작이 저녁때부터 비롯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즉 이 풍속은 문명 이전 시대에 광야에서 유목하던 사람들이 낮에는 뜨거운 햇빛을 피해 천막 속에 들어가 있다가, 저녁이 되어 서늘해지면 별빛 아래서 그 날의 활동을 시작했던 풍속에서 연유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풍속들은 창조 때부터 유래한 것이 아니라 달(月)을 표준한 계절 변화를 깨달은 후부터 생겨진 것이다. 그러므로 본서의 표현은 그러한 풍속을 따라서 기록된 것 같지 않다. 원문도 직역하면 “저녁이 있었고 아침도 있었다”라는 말이 된다. 그런데 여기서 저녁을 먼저 기록한 것은 빛을 맨 처음, 창조했으므로 그 다음 처음으로 닥친 것은 그 빛이 어둠과 교제하는 저녁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라는 표현이 나왔다고 보는 것이 타당성이 있다.
▷. “각기 종류대로” 이 표현은 1장에서 10회나 사용되었다(11,12,21,24,25 등). 특히 이 말은 種(종)의 근본적인 변천을 주장하는 진화론(進化論)이 성립될 수 없음을 변증한다. 생물계의 재생산 영역은 분명히 넘을 수 없는 경계가 있다. 그러나 여기서 사용된 종류(Kind)라는 말이 생물 분류 기준의 여러 단위 중에서 과(科)에 속하는 것인지, 혹은 속(엮을屬)에 해당하는 것인지, 또는 그와 다른 어떤 특정한 범주(Category)에 속하는 것인지를 명확히 알 길은 없다. 그럼에도 이 구절의 가장 타당한 해석은 하나님께서 생물을 창조하시되, 그 종류 자체 내에서는 환경의 변화에 따라 얼마든지 적응하며 변할 수 있는 비교적 적은 수의 기본 종류의 범위를 일단 정하신 후 그 안에서 각 개체의 생물체를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 “형상과 모양” 이 두 단어는 본서에 서로 번갈아 가며 사용되었다(5:3). 히브리어 형상(image)이란 주로 실제의 조각품, 모조품, 우상(민33:52 삼상6:5 왕하11:18 시39:7 겔23:14)등과 같이 구체적인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모양’은 어떤 추상적인 유사함, 닮음, 상응하는 것 등을 가리킨다(왕하16:10 겔1:5,26). 따라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인간이 창조되었다는 것은 사람의 육신과 정신이 합쳐진 전인(全人)이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시8편 겔28:12).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있는 사실은 인간은 결코 진화되어진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 의해 지음 받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인간의 창조에 함께 참여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도 거듭 강조되고 있다(마19:4 막10:6) 하나님께서 인간을 당신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으셨다는 것은 모든 피조물 가운데 유독 인간만을 당신과의 대화와 사귐의 대상으로 삼으셨다는 것이다(엡4:23,24 골3:10). 그러나 인간에게 부여된 이러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은 인간이 범죄 했을 때 그 원형(the original Type)을 상실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성, 감정, 의지와 같은 영적 본성들은 비록 어두워졌으나, 그 흔적(痕迹)은 계속 남아 있어 하나님과의 접촉이 가능하게 되었다.
▷. “사람” 창조 사역의 절정은 사람의 창조이다. 사람이 원어로는 ‘아담’인데, 흙을 뜻하는 ‘아다마’라는 동사와 동일한 어원(붉다)을 가지고 있다. 이 단어는 이중적인 뜻을 갖고 사용되는데 첫째는 보통 명사로서 사람을 가리키며, 둘째는 고유 명사로서 최초의 사람인 아담을 가리키기도 한다. 이런 창조 행위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남자와 여자의 동등성 문제이이다. 남자와 여자는 본질적이고도 영적인 의미에 있어서 서로 동등하다. 왜냐하면 남자와 여자는 둘 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엄연히 그 직무와 기능에 있어는 서로 다름을 알 수 있는데, 신약 갈라디아서 3장28절에서 그 표본을 찾아볼 수 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모든 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었지만 그 직무(Office)와 기능(Function)에 있어서는 각기 다르다고 강조했기 때문이다(엡5:22). 이것은 마치 삼위 하나님께서 동일성(Equality)과 개별적 특성(Unique)을 동시에 갖고 있음과 같다(요5:19,20. 6:38. 8:28,29,54. 10:30. 14:9,26. 16:13,14).
▷. 한편 인간 창조 시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라는 신적 결의의 표명을 통해서 이제까지의 모든 창조 사역보다 인간 창조가 더욱 의미 깊은 것임을 보여주셨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인간 창조의 방법 면에서 상의(相議)의 과정을 가짐으로서 인간을 가장 존귀하게 여기셨음을 보여주셨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다른 상담자가 필요치 않으셨기 때문에 당신 자신과 상의하셨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므로 인간 창조는 한 분 하나님(the Godhead) 안에 계신 복수의 위(Persons) 즉 삼위(三位)가 의논할 정도로 중대한 사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 “보시기에 좋았더라” 1장에서 7회나 언급된 이 말씀은 하나님이 원래 의도하셨던 대로 창조된 여러 피조물에 대한 기쁨에 찬 승인을 의미한다. 즉 이 말은 일차적으로 심미적 판단에서 나온 우주의 아름다움 보다는 창조의 놀라운 합목적성과 적합성을 나타낸다(시104:31). 또한 이 말은 우주 자체의 심미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한 것임을 부인해서도 안 된다. 좋았다(good)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토브(טוב)는 위대한(great 시11:2 계15:3), 놀라운(wondrous 욥37:14), 완벽한(perfect 신32:4), 아름다운(beautiful 전3:11) 등의 뜻으로도 사용된다. 이러한 의미로 미루어 보아 ‘물질은 악하다’는 영지주의사상(요일4:1-3)이나 세계가 선과 악의 두 본질적 요소로 구성되었다는 페르시아의 동양의 이원론 사상은 비성경적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좋은 것으로 인정하신 물질이 바르게 사용될 때 많은 유익을 줄 수 있음을 안다. 그러나 이 구절이 인간의 타락 이후에도 구원을 받기 합당하다는 뜻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인간의 타락은 구원의 길을 끊음과 동시에 모든 피조물을 죄의 고통 아래 탄식하게 하였다(롬8:22). 그러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된 구속을 통하여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서 나타났던 조화와 선이 다시 회복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승인을 받은 선한 것이므로 성도들의 물질에 대한 태도가 선을 위해서 적극적이어야 함을 교훈한다.
※ 합목적성(合目的性) : 어떤 사물이 일정한 목적에 적합한 방식으로 존재하는 성질. 일정한 목적에 들어맞음을 뜻하는 말. 원어명 Zweckmässigkeit 이것은 인간행위에는 당연히 포함되지만 사물의 존재가 일정한 목적에 적합한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설명하는 원리
▷. “에덴동산”
1. 어원 및 용례 : 헬라어 ‘낙원’(παράδεισος:파라데이소스)이 말의 어원에 대해서는 개방된 들판을 뜻하는 아카드어 ‘에디누’나 수메르어 ‘에딘’에서 유래했다는 주장과 기쁨, 환희, 아름다움을 뜻하는 히브리어 ‘에덴’에서 나왔다는 주장이 있는데 후자의 견해가 더 설득력이 있다. ‘에덴’이란 말의 성경적 용례는 지리적인 장소(2:8,15. 3:23,24 ), 상징적인 의미로(사51:3 겔28:13. 31:9,16,18, 36:35 욜2:3 계21:1) 기록하고 있다.
2. 지리적인 위치 : 에덴이 극동(極東)에 있었다는 주장이다. 이런 입장을 취하는 자들은 비손 강(11절)을 인도의 인더스 강 또는 갠지스 강으로, 기혼 강(13절)을 이집트의 나일강으로 본다. 에덴이 남바벨론의 에리두(Eridu)부근에 있었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E. 그레이의 탐사(探査)를 근거로 한다. 그는 비손강, 기혼강, 힛데겔 강을 북아라비아의 다와진, 시르한, 룸마의 강줄기였다고 한다. 에덴이 북바벨론 지역이라는 주장이이다. 이러한 학설은 1881년 독일의 앗시리아 연구 학자 델리취에 의해 주장되었다. 그는 에덴을 바벨론 평야 전체를 의미한다고 본다. 그는 비손과 기혼을 바벨론에 있는 두 운하 곧 팔라코파스(Pallakopas) 운하와 샤트-엔-닐(Sjatt-en-nil) 운하로 보았다. 이처럼 에덴동산의 위치에 대한 지리적 재구성은 여러 갈래로 시도되었으나 만족할 만한 해답을 주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성경 지명이 단일 지역만을 의미하는 명칭으로 사용되지 않았다는 점, 지구상의 지형 변화가 계속되었다는 난점 때문이다.
3. 의미 : 이제 원(原)낙원은 영원히 되찾을 수 없는 실(失)낙원이 되고 말았다(3:24). 즉 사단의 유혹에 빠져 하나님을 거역한 인간들은 짐승의 피를 흘려 만든 가죽 옷을 입고 슬피 울며 쫓겨난 것이다. 따라서 성도는 잃어버린 지상 낙원 에덴을 더 이상 그리워해서는 안 된다. 그 옛날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가 시온을 기억하며 날마다 통회하며 회개의 눈물을 흘리던 그들을 하나님의 언약대로 이스라엘로 돌아올 수 있었던 그 백성들처럼(시137:1), 이곳 지상의 강가에서 낙원을 잃어버린 죄악을 통회하면서, 제2의 에덴 즉 완전한 하나님 나라의 낙원을 소망해야 한다. 그곳은 다시 유혹이 없으며(계20:2,10), 온갖 영적 보화가 풍부한(계21:17-23) 생명의 강이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에서 흘러나오는(계22:1) 새 하늘과 새 땅, 곧 천국이다. 메시야 왕국 묘사에서도 부분적으로 계시된(사11:6-9) 이 하나님의 나라 에덴에 참석할 소망을 가진 자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자신의 죄와 허물을 씻어 정결케 한, 흰 세마포 옷을 입은 자들이다(계7:13,14).
▷.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성경은 에덴동산에 특별한 성질을 가진 두 나무가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먼저 생명나무에 대하여 살펴보면 이 나무 자체가 인간에게 영생을 주는 그런 류의 어떤 신비한 마법의 나무는 아니다. 이 명칭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이미 부여해 주신 생명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만약 인간이 하나님의 뜻에 계속 순종한다면 인간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의미를 지닌 명칭이며, 동시에 불순종으로 인해 인간이 타락하게 될 때에는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통해 잃었던 생명을 다시 찾게 될 것이라는 의미도 함께 내포하고 있는 명칭이다(계22:2). 이런 의미에 어거스틴(Augustine)은 이 생명나무가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으로, 칼빈(John Calvin)은 이 나무의 열매를 먹을 때마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회상케 하는 성례전적(聖禮典的)의미가 있는 나무로 각각 이해했다. 또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존재 가치는 인간이 자유 의지를 가진 인격체로 피조 된 만큼 이 금지된 선악과를 통하여 인간의 전인격적 자유가 주체적으로 활용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데 있었다. 따라서 만일 선악과 없었다면 인간은 신의 완전한 보호를 받는 애완동물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출9:12).
▷. 인간의 자유 의지(출9:12) :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으므로” 바로가 열 번이나 자기의 뜻으로 자신의 마음을 강퍅하게 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7:13,14; 22:8,15,19, 32; 9:12; 10:1,20,29; 11:10; 14:4,8,7), 혹자는 이 구절을 하나님께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정하신 것으로 해석하기도 하나, 이는 하나님의 주권을 잘 못 이해한 것이다. 즉 이 말씀은 원래 선했던 바로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고의적으로 악하고 강퍅한 마음으로 바꾸어 놓으셨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은 어느 누구의 마음도 능동적으로 개입하셔서 강퍅케 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악한 자들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돌이켜 회개하여 살기를 원하신다(겔33:11 딤전2:4 벧후3:9). 단지 패역한 인간들이 하나님을 대항해서 자기들 스스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했을 뿐이다. 즉 바로는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동안 자신의 행동이 여호와께 명백한 죄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원초적으로 주어진(창2:16,17) 자유 의지를 남용하고 악용하여 자신의 오만한 거부 행사를 철회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바로의 그 강퍅한 마음을 그대로 버려 두어 전혀 관여치 않으셨는데, 출9:12절은 이러한 하나님의 유기(끼칠遺버릴棄)상태를 표현한 말이다(롬1:28). 반면 오늘날 성도가 구원 얻을 수 있게 된 것은 비록 우리의 마음이 바로처럼 완악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그 고집대로 버려두지 않으시고 그 크신 은혜로 붙들어 주시기 때문이다(신9:5 딛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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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세기 첫 부분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신 것만을 말씀하지 않는다. 우선적으로 계시되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왕국)이다. 여기서의 이 하나님의 나라를 가리켜 완성된 은혜의 왕국이라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은혜’란 보통 아무런 권리가 없는 자에게 베푸시는 은총(Favor)을 뜻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우리의 죄 용서와 같은 은총을 말할 수 있다. 혼동을 피하기 위해 여기서는 ‘하나님의 은총의 나라’ (the Kingdom of God's Favor)라고 명명하자.
하나님의 나라 건설은 창세기 1장의 중심주제이다. 하나님께서는 엿새 동안 만물을 창조하실 때 하등한 것들과 고등한 것들(인간적인 표현)을 만드셨다. 그리고 전자는 후자의 생존에 도움이 되도록 지어졌다.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시고 그를 만물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대리자로 삼으셨다(창세기 1장 26-28).
우리가 이 부분을 대할 때 인간을 영광스럽게 표현해서는 안 된다. 천지와 인간을 만드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더욱이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자기의 형상대로 만드심으로서 만물의 다스릴 수 있도록 하셨다는 것은 인간은 모든 것에 있어서 하나님과 의존되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만물이 복종되어지는 동시에 인간이 하나님께 자발적인 순종으로 섭리되어지는 나라인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만물을 다스리는 권한을 주신 것은 그 만물들과 및 인간 상호간에 하나님의 형상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하기 위함이다. 인간이 가장 아름답고 인간다움은 그 자신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이 드러날 때이다.
▷.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교제의 표시로서 안식일을 주셨다. 우리는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께서 스스로 만드신 모든 창조물을 보시고 반복적으로 “매우 좋았더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게 된다. 더욱이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의 선하신 즐거움이 모든 창조물을 감싸고 있으심을 나타내고 있다. 1장에 이어 2장에서는 안식한 날(the day of rest)에 관한 내용이 나타난다.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통하여 그가 만드신 만물을 축복하고 거룩하게 하셨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나라에 내리신 평화는 안식일이라는 특별한 표현으로 나타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 만든 세상에 자신의 영광을 그대로 나타내셨다. 따라서 이 부분에서 중심이 되는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 건설이라 할 수 있다. “모든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이 말씀은 성경의 중심 주제인 동시에 보편적인 의미를 가지게 된다.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성이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를 창조하신 분명한 이유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창조된 인간은 자신뿐만 아니라 위임 받은 다스리는 모든 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해야 한다(하나님의 영광을 보존 유지 발전).
▷. 우리가 또 하나 간과(看過) 해서는 안 될 사실은 하나님께서 그의 손으로 지으신 창조물에 직접적인 즐거움을 가지신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창조물 속에 하나님의 영광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직도 우주에는 인간의 지식이나 혜안으로 볼 수 없는 일들이 무수히 많기 때문이다.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고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이라 할지라도 보이는 피조물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하나님께서 자신이 지으신 창조물의 영광 가운데서 직접적인 즐거움을 가지신다’는 사실이다.
이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과 비기리라” 했던 사탄의 타락에 인간 첫 사람 아담과 하와가 동조하고 함께함으로서 그 본래의 모습이 더렵혀지고 망가져 잃어버렸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거룩한 형상의 회복과 그 나라의 영광의 회복을 위하여 자신과 동일 본질이시며 또한 인간의 모습을 가지신 둘째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그리스도의 사람들에 그 영광의 형상을 회복하게 하시고 또한 함께 그 나라를 이루어 가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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