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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이야기들 광장 스크랩 이순신장군의 환생인가?
칼빈코스트너 추천 0 조회 83 07.09.13 10:02 댓글 4
게시글 본문내용

난세에 영웅이 나는 것은 당연한 이치라 하지만 후세까지 영웅으로 추앙받을 정도의 인물은 시대적

상황에 기인하여 운 좋게 적당히 태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역사에 많은 영웅들이 출현하였지만 단연 으뜸은 임진왜란 이라는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성웅 이순신장군이 아닐까 한다. 이순신장군이 보여준 살신성인의 헌신이 없었더라면 우리역사도

지금과는 많은부분 달라져있을 것이다. 아무튼 이순신장군이 조선시대의 대표 영웅이었다면 근, 현대

사회로 넘어와서 발생한 동족상잔의 비극이요 이념분쟁인 6.25에서 공산주의 마수로부터 남한을 구한

것은 우리의 역사에 전무후무한 이십대 사단장이요 40대 참모총장을 지낸 백마고지 전투로 잘 알려진

김종오 장군이다.  

 

김종오장군은 요즘의 기류로 보면 일본군 사관학교 출신인 매국노 내지는 친일파다. 이 글을 쓰는 블러

거 역시 누구보다도 강력한 친일잔재 소탕을 외치는 사람이다.

1943년 민족대표 33인이요 기미독립선언문을 작성한 최남선과 3.1운동의 시발점이된 2.8독립선언서를

발표한 춘원이광수가 동경 유학생회관에서 유학생들을 상대로 성전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는 시국 강

연회를 열었다. 유학생들은 변절한 두 사람에게 분노하여 강연회장은 아수라장이 되었을게 뻔하고 그

자리에 김종오장군도 주우오대학생 신분으로 참여하여 분개하였다고 술회했다.

그러나 그 역시도 1944년 일본사관학교에 자진 입대하여 소위로 임관하게된다. 

그리고  다행이라면 다행으로 김종오장군이 전투에 참가하기전에 2차대전은 일본의 패망으로 끝나고

그 역시 귀국하게된다.  

1946년 미 군정하의 남한은 군사국장 쳄페니 대령이 2만5천명의 국방경비대 창설을 발표하며 기간요

원은 60명을 선발하였다. 미군정 당국은 이 기간요원을 정확히 삼등분하여 만군 출신 20명, 광복군 출

신 20명, 일본군 출신 20명을 선발하여 장교로 임관 지휘관으로 임명하였다.

김종오장군도 이때 일본군 출신으로 선발되어 소위로 임관되어 지금으로는 있을 수도 없는 초 특급으로

3년만에 제1연대장, 4년만에 6사단장으로 임명되었는데 이때 그의 나이는 31세였다.  

 

 

 

1950년 1월 당시 춘천을 방어하고 있던 6사단장으로 부임한 김종오장군은 다른 여타 사단들과는 달리

만일에 있을지도 모르는 전쟁에 대비하여 이순신장군이 거북선을 만들었듯이 진지를 보강하고 방어선

을 견고하게 구축하였다. 이런 철저한 준비는 1950년 6월 25일 새벽4시에 여지없이 진가를 발휘하였다.

전 전선에서 거칠 것 없이 남하 하는 북한군과 달리 김종오장군이 지휘하는 6사단 정면의 북한군은 3일

동안 한 발짝도 남쪽으로 내려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문산축선과 동해축선이 무너져 고립될 위기

에 놓인 김종오장군의 6사단은 전략상 눈물을 머금고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김종오장군의

6사단이 춘천축선에서 버텨준 3일로 인하여 오끼나와에 있던 미군 스미스부대가 최초로 경기도 오산에

투입할 시간을 벌었으며(이부대는 자만으로 거의 전멸하였다.) 물 밀듯이 내려오던 북한군이 축선을 맞

추기위해 전열을 재 정비하게되고 남한은 이 시간으로 인하여 최후의 축선인 낙동강 방어선을 형성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6.25전쟁 영웅인 맥아더가 한강방어선을 시찰하며 인천상륙작전을 구상하게 되었다고 술회하면서

가장 염려했던 것은 상륙부대가 한반도에 도착하기전까지 국군이 버텨줄 것인가가 가장 염려되는 부분

이었는데 이 기우를 김종오장군의 6사단이 훌륭하게 버텨준 춘선방어 3일이 있었기에 가능했었다

고 술회하였다.

 

  

 

6.25 개전초기 훌륭하게 방어임무를 수행하고 9사당으로 보직을 전환한 김종오장군은 전쟁 막바지 한

쪽에선 정전 협상이 이루이고 있을때 휴전이 되에 전선이 고착되기전에 차후 작전을 위해서 반드시 확

보해야 하는 중부전선 제1의 요충지인 철원평야를 감제하는 백마고지 전투를 지휘하게된다.

 

백마고지는 해발 395미터라고 하지만 철원지형의 평지가 해발 200미터인점을 감안하면 동산수준의 아주

작은 봉우리에 지나지 않는다. 이 동산을 평수로 환산하면 불과 2~3만평(정확히 환산한 수치는 아님)을

초과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백마고지는 전라도의 호남평야 다음으로 지평선이 보이는 남한의 2개 평야중 한 곳인 철원평야

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수하여야 하는 요충지이며 지형상으로 보면 철원 지형이 복주머니 형태

의 분지인데 이 복주머니의 좌측 입구부분에 해당되므로 이 고지를 확보하지 못하면 철원평야도 확보하

기 어렵다고 보며 추후에 있을지도 모르는 전쟁의 재개되면 북한의 높은산인 고암산으로의 진출을 위한

발판이기도 하다.  그러다 보니 피, 아간 만여명의 아까운 목숨이 숨져간 안타까운 곳이다.

 

아무튼 김종오장군의 9사단이 이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철원평야가 남한의 지배하에 년간 20키로 쌀

5백만포대를 생산하게 되는 명실공히 국민의 식량생산에 일익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이후 김종오 장군은 본인이 세운 혁혁한 전공 덕분이기도 하지만 타고난 군인으로의 자질과 지략을 인

정 받아 1961년 5.16 혁명으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이 출범하고 만40세에 참모총장을 지내게 된다.

그러나 그는 정치엔 큰 뜻이 없어 5년동안 참모총장을 지내고 예편 후 바로 타계하고만다.

 

 

 

 

 

 

사진 우측이 박정희대통령이다.

 

 

김종오장군의 인생 역정을 돌아보면 어려운 시대에 태어나 본인이 가진 모든 역량을 쏟아부어서 나라를

구하고 그래도 가장 안정적일 수 있을 것 같은 시대가 도래하자 45세라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만일 그가 박정희 정권하에서 본인에게 온 절묘한 타이밍에 맞춰 정치가로 변모하였다거나 지금까지

생존하고 있다면 (생존하고 다면 88세다) 시대가 만들어낸 일시적인 무용가이거나 일제의 잔재 내지는

매국노로 그 이미지가 손상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거짓말 처럼 나라가 평온해지자 본인의 임무를 다 했다는 듯이 홀연히 사라지고 만 것이다.

이 글을 쓰는 불러거는 그가 저승에서 풍전등화의 조국을 보다 한 이순신장군이 환생하여 조국을 구하고

홀연히 사라진 것 아닐까하는 얼토당토않는 생각을 백마고지가 바라다 보이는 위령비 앞에서면 두 위인이

동일인물이라고 그렇게 믿고싶을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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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7.09.13 13:27

    첫댓글 김종오..육군참모 총장님이셨군요.

  • 07.09.13 14:22

    우리는 이런 위대한분을 잊어서는 안 되겠지요 지난 역사를 다시한번 생각해보는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

  • 07.09.13 14:34

    젊은 나이가 아깝네요 그것도 하느님의 뜻이니 짧지만 굵게 가신 그분을 기립니다

  • 07.09.14 15:42

    저두 다녀 다녀와서 가슴이 찡 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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