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
: '흑창'은 태조 왕건이 백성들에게 춘궁기에 곡식을 빌려주고 추수기에 상환토록 한 진대 기관이었다.
'흑창'은 고려 성종 대에 이르러 규모를 확장하고 명칭을 '의창'으로 변경하였다.
: '견룡군'은 왕실의 금군으로 호위 대상에 따라 '어견룡', '태자견룡'으로 불리었다고 한다.
'교위'는 현재로 치면 중대 병력 정도를 이끄는 위관급 군인이라고 한다.
: 당시 고려의 '경기'는 개경 주변 13개현 정도의 범위였다.
해당 시기는 위에 언급된 견룡교위 송종소가 호랑이를 '때려'잡은지 1년여 뒤로 도성 안팎으로 호환이 심해지자 호랑이 사냥을 위해 병력을 동원한 것으로 보인다.
: 최루백은 고려 인종 ~ 의종 대의 관료로 금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했다. 의종에게 올린 간언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낙향하였다.
그 덕에 무신정변을 피하였고, 90세가 넘도록 천수를 누렸다. 자필로 쓴 사별한 부인의 묘지명이 현재까지 전해진다.
최루백이 호랑이를 잡아 원수를 갚은 이야기는 고려사 뿐만 아니라 조선 초에 제작된 삼강행실도, 오륜행실도에도 수록되었다.
조선 숙종 대에 와서는 효자비와 효자각이 세워졌다.
: '고려사'는 조선 조에 편찬되었기에 고려 왕조에서 활약한 이성계를 언급하면서도 '우리 태조'로 지칭하고 있다.
이 시기 우왕의 나이는 열한 살로 즉위한지 1년이 채 안 된 시기이고, 이성계의 나이는 40세로 '홍건적 격퇴', '나하추 격파', '원-덕흥군 세력 분쇄', '요동 정벌' 등의 경력을 지닌 기량 절정의 무장이었다.
: 당시는 원나라를 쫓아내고 중원을 통일한 명나라와 원나라 세력이 북쪽 초원으로 가서 세운 북원이 공존하던 시기였다.
이에 고려는 명과 북원에 모두 사신을 보냈으며, 명은 북원과 관계를 끊지 않은 고려의 사신을 억류하기도 하였다.
게다가 왜구의 침입은 그치지 않아 한 달에도 몇 번씩 왜구 침입과 피해, 격퇴 기사가 기록될 지경이었다.
: 조선이 건국되기 3년 전이다.
+ 여담
: 여기에 기록된 '태손'은 고려 원종의 아들이자 고려 고종의 손자였던 충렬왕이다. 원종 원년의 기사인데 태손의 정무 기록이 남아있는 것은 고려 고종이 붕어했을 당시 원종이 몽골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원종이 고려로 돌아올 때까지 태손 신분으로 사실상의 태자였던 충렬왕이 대리청정 중이었다.
그런데 호랑이를 때려잡은 장정을 무려 '어의'로 임명하였다. 훗날 충렬왕 시기의 정치를 예견할 수 있는 프리퀄이었던 셈.
: 이 시기는 고려 원종 말기로 여몽연합군이 삼별초 항쟁을 진압한지 수개월 뒤이다.
파견을 올 정도면 원에서 날고 기는 사냥꾼들일텐데 무려 사냥개 100마리를 동원하고도 고려의 호랑이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아마도 고려의 백성들이 그리 협조적이지 않았을 듯 싶다.
원나라는 일본 원정을 위해 이듬해 부원배 홍다구를 고려로 보내어 불과 4개월 만에 전선 900척을 건조토록 한다.
첫댓글 범 내려온다
여기서 범은 호랑이랑 표범을 다 묶은 거... 명확하게 한 동물을 지칭한 게 아님
그렇군요. 언젠가 그런 이야기를 봤던 것 같네요. 등에 무늬가 동그라미든 줄이든 구별 안 하고 다 범이라 불렀다고.
착호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