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3章 검(劍) 대(對) 검(劍)
①
검예랑과 양모잠!
한 사람은 까마득한 언덕 위.
또 한 사람은 그 아래 평원(平原)에 서서 상대를 노려보고 있다.
"……."
"……."
오가는 시선은 비교적 담담하다.
거리는 백오십여 장.
그들은 침묵 속에 서로 바라보고 있었다.
잠깐의 침묵이었지만 억겁(億劫) 같은 세월이 느껴지는 긴 시간이었다.
"와하하하핫……!"
이윽고 양모잠의 입에서 굉렬한 광소가 터져 나왔다.
일순 머리에 이고 있는 핏빛 하늘이 쩌렁쩌렁 흔들리는 것 같았다.
파팟-!
동시에 그의 신형이 슬쩍 떠올랐다.
일순 그의 신형이 허공 중에 연기처럼 흐트러지는 듯했다.
악동들의 시선이 흠칫 그의 모습에 따라붙었다.
하지만 허공 중에서 그의 신형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 신형은 곧장 악동들이 있는 쪽을 향해 빛살처럼 미끄러지고 있었다.
스으으읏-!
찰나란, 잘 갈린 예검에 머리카락이 끊어지는 시간을 말한다.
그야말로 찰나, 양모잠의 신형은 검예랑의 삼 장 앞에 깃털처럼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오오, 백오십 장 허공을 단 한 호흡에 격하여 가로지르다니?
가히 꿈에서나 볼 수 있는 전설의 경공술이 아닌가?
모든 악동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아, 저런 가공할 경신술이라는 것은…….'
'조금 전 죽어 간 자들과는 아예 차원이 틀리다! 대체 저 자는……!'
그들이 아연하여 바라볼 때였다.
양모잠의 눈길이 예리하게 검예랑을 노려보았다.
잠시 후, 그의 다물린 입술 사이로 얼음장 같은 냉막한 음성이 새어나왔다.
"크크… 어린 나이에 놀라운 경지를 이루었구나. 자네 같은 기재가 무림계(武林界)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오늘처럼 자랑스럽게 느껴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눈빛만큼이나 무심한 음성이다. 거기에는 억양이나 감정 따위는 아예 티끌 만큼도 담겨 있지 않았다.
검예랑의 동공에 신비로운 광채가 더욱 짙어졌다.
"절화로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을 때에는 돌아올 대가도 이미 각오하고 있었을 텐데?"
상대로 하여금 격노를 일으키기에 충분한 말!
하나 양모잠의 표정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대신 얼음장 같은 말이 계속 흘러 나올 뿐이다.
"승천대밀전에 항거하는 것은 너무도 어리석은 일이다. 지금이라도 포기해라. 포기한다면……."
양모잠은 잠시 말을 끊었다.
그 다음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검예랑은 그 다음 말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일순 검예랑의 얼굴에 비릿한 조소가 피어 올랐다.
"후후… 그 말은 마치 나보고 자결(自決)이라도 하라는 말처럼 들리는군."
"그게 더 나을지 모른다. 시체나마 보존할 수 있으니까!"
"싫다면?"
"내가 대신 죽여 준다. 또한 개미 새끼 한 마리까지!"
검예랑은 또 웃었다.
"후후… 세상 일이 당신 뜻대로 된다면 오죽이나 좋겠소?"
검예랑의 미소는 신비했다.
도대체가 그의 모습에서는 두려움이나 망설임 따위는 아예 찾을 수가 없었다.
츠으으-!
순간 양모잠의 전신에서 서릿발 같은 기운이 안개처럼 피어 올랐다.
그것은 주체할 수 없는 살기였다.
"가상한 용기다. 대신 본좌의 척효검(刺梟劍) 아래 죽어 가는 영광을 누리게 해 주겠다."
다음 순간, 양모잠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검(劍)을 집어라."
바닥에는 추밀대원들의 검들이 무수히 흩어져 있었다.
일순 검예랑이 씨익 웃었다.
"후후후… 당신 눈에는 내 손에 들려진 병기가 보이지 않는단 말이오?"
검예랑의 손, 거기엔 삼 척 길이의 나뭇가지가 들려 있었다.
순간 양모잠의 눈에 잔광(殘光)이 푹 솟구치며 표정이 급속도로 냉각되었다.
"건방진 놈! 나는 두 번의 기회를 주지 않는다."
그의 손이 등 뒤의 녹슨 장검을 잡아 갔다.
순간이다.
츠츠츠츠-!
붉은 녹가루가 우수수 떨어질 것만 같은 거북한 기음(奇音)과 함께 검이 천천히 뽑히기 시작했다.
"크크… 근래 십오 년 동안 단 한 번도 뽑지 않던 척효검이다. 한데 그 상대가 이토록 어린 소년일 줄이야… 너무 뜻밖이군."
감회가 새로운 것일까?
그는 가는 경련을 일으키며 느릿하게 검을 뽑았다.
적수가 없었기에 십오 년 이래 뽑을 일이 없었다는 그의 장검.
일컬어 척효검이라는 애병(愛兵)이었다.
챙-!
검날이 검집을 완전히 벗어났다.
그런데… 보라! 그것은 너무도 시뻘겋게 녹이 슬어 썩은 나무 토막도 벨 수 있을까 의심이 갈 정도로 형편없는 검이 아닌가?
누구나 절로 비웃음이 날 정도였다.
그러나 검예랑은 달랐다.
순간적으로 검예랑의 동공이 흔들렸다.
'웃! 심상치 않은 검이다. 검에서 뿜어지는 예기(銳氣)에 벌써부터 심장이 저며지는 것 같다니…….'
그의 손에서 나뭇가지가 바르르 떨렸다.
찰나, 양모잠의 머리 위에 척효검이 곤두세워졌다.
"요잇!"
이어 휘파람처럼 토해지는 냉갈일성!
파아아앗-!
그의 신형이 핏빛 노을을 머리에 이고 붕 떠올랐다.
"척(刺)- 살(殺)- 치(致)-!"
주저함도 없고, 망설임도 없다. 그저 앞으로 뻗어 갈 뿐이다.
쐐애애액-!
뇌전처럼 내리꽂히는 검기(劍氣) 한 줄기.
단언한다. 이 세상에 이보다 빠른 검은 없으리라.
이것은 빛이었다.
대해(大海)라도 일 검(劍)에 양단해 버릴 듯한 엄청난 검광이 검예랑의 정수리를 향해 덮쳐 갔다.
순간 악동들의 입에서 아연한 경악성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아앗! 예랑!"
"악!"
그들이 판단하기에 검예랑은 결코 피할 수 없었다.
아니, 누구의 눈에라도 그렇게 보였으리라.
찰나였다.
스으으읏-!
검예랑의 신형이 그림처럼 느릿하게 떠올랐다.
이어 나뭇가지가 앞으로 쭉 떨어졌다.
"양모잠! 쾌(快)로 따진다면 그대는 지상에서 최강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슨 뜻일까?
처어어어어억-!
이어 바람 소리와 같은 파공음과 함께 검예랑이 쥔 나뭇가지 끝에서 한 줄기 강기가 뿜어진다.
무형의 강기이다.
그것은 느릿하게 앞으로 쭉쭉 뻗어 갔다.
꽈르르르르릉- 꽈꽈꽈꽝-!
천번지복의 천둥음이 무섭게 울부짖었다.
격돌(激突)!
한 덩어리 거대한 빛무리가 찬란하게 폭발하며 불똥이 현란하게 사방으로 쏟아져 내렸다.
그것은 일대장관(一大壯觀)이었다.
정녕 생사(生死)를 건 격전이 아니었더라면 인간이 창출(創出)해 낸 최대의 예술이라 표현해 마땅하리라.
"아……!"
"오, 저런 싸움이란 건……."
모든 악동들은 차마 볼 수 없다는 듯 눈을 감고 말았다.
잠시 후, 그들이 눈을 떴을 때였다.
검예랑과 양모잠!
스르르……!
그들은 등을 교차한 채 이 장 간격으로 지면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검예랑이 먼저 천천히 돌아섰다.
펄럭-!
순간 그의 소맷자락이 뭉텅 베어져 아래로 흘러내렸다.
어디로 간 것일까? 그의 손에 들려 있던 나뭇가지는 이미 보이지 않았다.
양모잠이 돌아섰다.
한데, 보라! 그의 미간(眉間) 사이를.
그의 이마 정중앙에 검예랑의 손에 들렸던 나뭇가지가 콱 틀어박혀 있지 않은가?
양모잠의 두 눈은 엄청난 불신으로 부릅뜨여져 있었다.
두 눈에서 뿜어지던 가공할 냉기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의 입술이 씰룩거렸다.
"그르륵… 나의… 척효검이 패… 하다니… 이… 이것은… 꿈이야… 이것은 꿈……."
그는 아직도 자신의 패배를 인정치 않고 있었다. 아니, 인정할 수가 없었다.
그가 누구던가?
천하에서 가장 막강한 추밀대원의 원주이며, 십오 년 이래 패배를 몰랐다는 무적의 고수!
그런데 일개 소년에게 당하다니?
그것도 일개 나뭇가지에 당하다니?
검예랑은 물처럼 고요히 서 있었다.
"그대의 검법은 내가 본 것 중 최고였소."
"이… 이것은… 이것은……."
주르르……!
양모잠의 이마에 박혀 있는 나뭇가지를 타고 붉은 선혈이 뚝뚝 떨어졌다.
그의 동공은 급격히 흐려졌다.
이어 무릎이 서서히 꺾여 갔다.
그의 입술이 힘겹게 달싹였다.
"방금 네가… 사용한 무공… 의 이름은?"
"전에 누군가도 그런 질문을 한 적이 있었소. 하나 대답을 해 주지 못했소. 왜냐하면, 워낙 여러 가지 무공을 혼합하여 본인이 창안한 무공이기에… 아직 이름을 짓지 못하였기 때문이오"
털썩-!
양모잠의 무릎이 지면에 부딪쳤다.
이어 그의 상체가 서서히 앞으로 허물어져 갔다.
그의 목구멍에서 듣기 거북한 발음이 울울거렸다.
"그르륵… 승… 천대밀전은… 무서운 상대를 만났……."
쿠웅-!
끝내 마지막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이미 양모잠의 혼백은 그의 몸에서 떠나 있었다.
그의 육신은 속절없이 뒹구는 싸늘한 시신으로 변해 버린 것이다.
그것이 끝이었다.
이로서 양모잠이 이끄는 추밀대원들은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하고 모조리 도륙되어 버린 것이다.
그 때 악동들이 일제히 검예랑의 곁으로 달려들었다.
조자양이 환희의 탄성을 질러 냈다.
"예랑! 역시 너는 여덟 권의 비급(秘 )을 완벽하게 익히고 있었구나. 그 동안 실력을 숨기고 있었어."
일순 매성하는 슬몃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지난번 삼십육만겁대라진을 통과할 때 어디선가 무형의 잠력(潛力)이 날아왔지. 그것은 바로 예랑이었어!'
검예랑은 빙글 돌아섰다.
그는 냉염한 시선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화르르르르륵-!
절화로는 시뻘건 화염에 휩싸여 무섭게 타오르고 있었다.
"아악! 도와 줘! 내 몸에 불이 붙었어!"
"으흐흑… 저 속에 가향(佳香)이 아직 빠져 나오지 못했단 말이야!"
울부짖으며 발을 동동 구르는 절화로의 여인들.
아직도 아수라 지옥도는 계속되고 있었다.
검예랑의 눈에 분염( 焰)이 이글이글 피어 올랐다.
주먹이 꽈악 말렸다.
'승천대밀전… 오늘의 일은 백 배를 더하여 반드시 갚아 주마.'
그러다 문득 어디에 생각이 미쳤음인가?
그의 안색이 급히 변했다.
'어머님! 대모!'
그의 시선이 급히 모친과 대모가 기거하는 곳으로 홱 돌아갔다.
하나 그 곳의 건물도 이미 화염(火焰)에 휩싸여 있었다.
"아앗!"
그의 신형이 그 곳을 향해 막 날아가려고 할 때였다.
조자양이 급히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예랑! 포기해. 너무 늦었어."
"비켜!"
파아아악-!
검예랑은 조자양을 뿌리치며 그대로 쏘아 나갔다.
그는 급히 불이 붙어 있는 건물들 사이를 뒤지며 소리쳤다.
"어머니! 대모!"
아무도 없었다.
어머니와 능비연이 살던 곳. 그 곳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화르르르르륵-!
다만 악마의 혓바닥 같은 불길이 온통 너울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내전과 지하 내실에도 모친과 능비연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검예랑은 미친 듯 화염 속을 찾아 헤맸다.
'흔적! 흔적이라도 찾아야 돼.'
그는 미칠 것만 같았다.
심장이 타 재가 되어 버릴 것만 같은 안타까움 속에서 그는 어쩔 줄을 몰랐다.
하나 도무지 찾을 길 없는 불길만 가득하다.
결국 검예랑은 우뚝 서고 말았다.
그의 눈앞, 모친 남궁하려가 평소 사용하던 경대(鏡臺)가 불타고 있었다.
"어머님……."
가슴이 텅 비어 버린 듯 허탈해졌다.
기둥과 벽이 시커먼 숯덩이가 되어 허물어져 내리고 있었다.
검예랑은 입술을 지그시 악물었다.
'이 곳에 어머님과 대모가 없는 것이 확실해. 필시 피한 것이 틀림없어. 그렇다면…….'
그의 눈이 번뜩 빛났다.
'이 곳에 더 이상 있을 필요가 없지.'
슈우우우웅-!
그의 신형이 화염(火焰)을 뚫고 그대로 솟구쳤다.
검예랑의 신형은 불타오르는 절화로의 중심으로 떨어져 내렸다.
아홉 명의 악동들이 서 있는 곳이었다.
악동들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검예랑은 바로 그들의 대장이었기에!
능비연이 없는 이상, 이제 그들을 지휘할 자는 검예랑이었다.
그것은 검예랑도 알고, 아이들도 안다.
조자양이 냉철한 음성으로 급하게 말했다.
"예랑! 빨리 사태를 수습해야 한다. 나머지 절화로 사람들을 데리고 이 곳을 떠나자. 곧 야혼벌의 놈들이 달려올 텐데… 그렇게 되면 일이 곤란해진다."
"……."
"물론 전부 탈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겠지. 하나 하는 데까지는 해 봐야 될 것 아니야?"
"……."
검예랑은 계속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문득 그의 시선이 허공으로 향한다.
어느덧 석양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어 버리고, 사위는 어둠이 짙게 밀려들고 있었다.
그런 밤하늘에 총총히 들어서는 별무리들.
어느 새 밤이었다.
그 야천(夜天)은 절화로에서 뿜어 올리는 불기둥으로 시뻘겋게 달구어지고 있었다.
비록 어둠이라지만 불빛으로 인해 주위는 대낮처럼 밝았다.
문득 검예랑의 입술을 비집고 무거운 음성이 흘렀다.
"늦었어."
악동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늦다니?"
"예랑, 그게 무슨 뜻이지?"
검예랑의 눈빛이 흐릿해졌다.
그의 전신에서는 심해(深海)와 같은 적막감이 감돌고 있었다.
"자세히 들어 봐. 우리는 이미 포위를 당했다."
"뭣이?"
악동들은 황급히 모든 공력을 귓전에 끌어올렸다.
일컬어 천리지청술(千里地聽術)이란 수법이다.
일순 그들은 느꼈다.
수백여 장 밖에서부터 미세한 음향이 밀려들고 있다는 것을!
②
무슨 소리일까?
들리고 있었다.
사사사삭- 삭- 삭-!
우르르르르-!
송충이가 풀잎을 갉아먹는 듯한 음향과, 그리고 바퀴가 구르는 소리들일까?
일순 악동들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우라질! 새카맣게 몰려오는군."
"오천 명은 훨씬 넘겠어."
"분명 야혼벌 놈들일 거야. 마차도 있는 것 같아. 한데 이상하군. 마차는 한 대뿐인 것 같으니……."
문득 매성하가 눈빛을 가늘게 모았다.
"굉장한 놈들이 있어. 열 명이야. 야혼벌 놈들과는 아예 수준이 달라."
최초에 포착된 음향과 그 다음으로 포착되는 음향의 간격은 십 장(丈).
그렇다면 그들 십 인은 한 번 몸놀림에 십 장씩 앞으로 전진하고 있다는 결론이었다.
그리고 그 뒤를 수천 명의 인물들이 따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사사삭- 사사삭- 우두두두두-!
죽음을 재촉하는 소리일까?
기분 나쁜 음향은 점차 커지고 있었다.
일순 소불이 한 곳을 가리키며 다급하게 외쳤다.
"저기야!"
백 장 밖이었다.
한 대의 마차와 주위를 감싸듯 따르는 십 인의 흑포인(黑袍人)들이 있다.
마차는 네 마리 말이 끌고 있었다.
네 마리 말은 모두 한혈(汗血)의 적토마(赤 馬)였다.
마부(馬夫)는 없었다.
두두두두두두-!
마차는 맹렬한 속도로 돌진해 오고 있었다.
하되 놀라운 것은, 그토록 가공할 속도로 달려오고 있는 데도 마차와 흑포인들의 간격이 조금도 변함없다는 것이다.
흡사 그들은 한 덩어리로 뭉쳐져 한 곳에 가만히 서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흑포인들의 경신술이 가공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실로 가공할 경신술(輕身術)을 펼쳐 마차를 따라붙는 자들.
느릿하게 다섯 정도를 세었을 시간일까?
벌써 마차와 흑포인들은 십 장 앞에서 멈추고 있었다.
히이이잉……!
마차와 흑포인들의 동작은 한 호흡처럼 일사불란했다.
흑포인들은 모두 무심하게 팔짱을 끼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허리춤에 길이가 두 뼘, 넓이가 한 뼘에 이르는 도를 꽂고 있었다.
모양이 기이하기 이를 데 없는 계도(戒刀)였다.
초점 없이 흐릿한 동공, 방금 무림을 박차고 튀어나온 듯 창백한 안색.
그들의 전신에서 풍기는 것은 오직 하나의 기운이었다.
죽음과 무심(無心)!
순간 검예랑은 느낄 수 있었다.
'추밀대원들과는 하늘과 땅 차이의 고수들이로구나. 조금 전 죽은 양모잠보다 족히 두 배는 위의 고수들이다!'
마차 옆에는 하나의 문(門)이 달려 있었다.
그리고 그 문에는 주렴(珠簾)이 드리워져 있었는데…….
쫘르르륵……!
어느 순간이다.
그 주렴 사이로, 문득 하나의 손이 미끄러져 나왔다.
실로 섬세한 손이었다.
그 손은 슬몃 주렴을 젖히고 있었다.
이어 흘러 나오는 한 줄기의 느릿한 음성.
"참으로 애석한 일이로구나. 뭇 사내들이 고달픈 인생으로부터 위로받을 수 있는 절화로가 불타 버린 것은……!"
먼저 보인 것은 학익선(鶴翼扇) 한 자루였다.
이어 드러나는 것은 발!
품위 있는 가죽신에 감싸인 발이었다.
느릿하게, 아주 느릿하게 열린 주렴으로부터 한 명의 백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백포문사!
전신에서 풍기는 고귀한 기품과 여인처럼 수려(秀麗)한 자태(姿態)를 지닌 자이다.
그의 눈빛은 너무도 맑았다.
그의 용모는 너무도 깨끗했다.
그래서일까?
도무지 나이를 도무지 짐작할 수 없게 하는 백포인이었다.
그를 보고도 누가 모르랴?
오오, 선우종이었다.
그는 바로 천하제일의 집단 승천대밀전의 군사, 문후 선우종이었다.
강호인들에 의해 천통대선생이라고도 불리는 자.
선우종의 눈길은 천천히 사방을 살폈다.
그 모습은 너무도 여유자적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흐르는 물과 같은 느낌을 받게 했다.
그러다가 이윽고, 문득 그의 시선이 두 곳에 멈췄다.
그 첫 번째는 양모잠의 시신(屍身)!
두 번째는 그 옆에 무심하게 서 있는 검예랑이었다.
그는 아주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입가에 흐르는 한 줄기의 미소!
그것은 감탄의 미소일까?
"후훗… 천하의 추밀대 총사가 자신의 최고(最高) 절예(絶藝)인 척살지검(刺殺之劍)을 사용하여 겨우 자네의 소맷자락밖에 베지 못하다니……!"
느릿한 어조!
그러나 빈틈없이 흘러 나오는 음성이었다.
"정말 놀라운 일이야. 자네는 여러 가지 절기를 혼합하여 독특한 무공을 사용하였군."
선우종은 단 한 번으로 상황을 정확하게 간파했다.
과연 승천대밀전의 군사이며, 실로 놀라운 안목이었다.
그는 검예랑을 똑바로 응시했다.
고요한 눈(眼),
맑은 눈(眼).
두 개의 눈빛이 허공에서 마주친다.
"……!"
"……!"
일컬어 눈은 마음의 창(窓)이라던가?
눈(眼)은 인간의 신체 중 등불에 해당된다.
눈빛을 보면 상대를 어느 정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시선과 시선이 부딪쳤다.
그리고 서로의 동공에 실낱 같은 광채가 피어 올랐다.
그것은 상대방에 대한 감탄이었다.
'놀라운 기재로구나! 나조차도 저만한 나이에 저 정도의 기도를 지니지 못했었거늘, 저 나이에 저 성취라는 건……!'
어이없게도 선우종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찰나간에 묘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상대방에 대한 질투였다.
놀라운 일이었다. 천하의 선우종이 절화로의 일개 소년 검예랑에게 질투 같은 감정을 느끼다니!
검예랑의 눈빛 역시 맑게 빛났다.
'이런 류의 인물은 두 가지다! 속세(俗世)를 초월한 진정한 성인군자(聖人君子)이거나, 아니면 천하를 움켜쥐려는 무서운 야심가(野心家)이던가! 이 자는 아마 후자(後者)일 것이다.'
용(龍)은 용(龍)을 알아보는 법!
짧은 대면이었지만 서로는 서로를 읽어 내고 있었다.
일순 선우종이 부드러운 음성을 흘렸다.
"너무 뜻밖이로구나. 추밀대원들이 이토록 간단하게 무너질 줄이야! 그것은 곧 그대들이 그만큼 강하다는 뜻이겠군."
"……."
검예랑은 대답하지 않았다.
선우종은 쉽게 말을 이어 나갔다.
"한데 왜 승천대밀전에 항거하려는지 모르겠군."
순간, 검예랑의 입이 조용히 열렸다.
"후후… 별 이유는 없소. 천하를 개판 세상으로 만들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랄까?"
"개판? 승천대밀전이 말인가?"
"당신은 머리가 매우 잘 돌아가는 사람이오."
"쯧, 매우 어리석은 생각들을 했구나."
"후후… 똑똑한 것보다 때로는 어리석은 것이 훨씬 멋있게 보일 수도 있는 법이오."
선우종은 여전히 부드러운 표정을 풀지 않았다.
"이런 생각이 든다. 자네들의 솜씨가 아깝다는! 승천대밀전의 군사 이 선우종의 이름을 걸고 제안하건대, 지금이라도 생각을 바꾸는 것이 어떻겠나?"
"바꾼다면?"
"세상의 누구보다 더한 칙사 대접을 해 주지."
말!
그것은 선우종의 말이었기에 신뢰가 있다.
그것은 충분한 유혹이 된다.
하되 검예랑은 씨익 웃었다.
"후훗… 아무리 황금 그릇에 담는다 하더라도 개밥은 개밥이오."
순간 선우종의 동공에 찰나간 살광이 스치며 사라졌다.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기회는 한 번뿐! 목숨 역시 하나뿐이다."
"큿… 개밥을 먹고 살면 목숨이 두 개로 늘어난다는 말처럼 들리는구려."
"……!"
파르르……!
일순 선우종의 눈가에 잔 경련이 피어 올랐다.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노염을 억제하고 있었다.
그러는 가운데 그는 한 인물을 떠올렸다.
'타협할 줄 모르는 사내! 만에 하나, 대쪽 같은 성격만 꺾었다면 지금쯤 천하제일인이 되었을 자.'
누구일까?
누구를 떠올리는 것일까?
선우종은 가만히 입 속으로 하나의 이름을 되뇌었다.
'화무천! 지금은 죽은 주군의 일점혈육이며 후계자.'
문득 그는 검예랑을 보다가 흠칫했다.
그는 다시 한 번 검예랑을 바라보았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표정에 묘한 의혹이 떠오르는 듯했다.
'그러고 보니, 화무천과 성격이 너무 흡사하군. 용모도 비슷한 것 같은데……!'
하나 그는 피식 웃었다.
그는 생각을 툭 털어 버렸다.
'아니야! 그는 죽었어.'
그는 알고 있었다. 화무천이란 사내가 이미 십 수 년 전에 죽었다는 것을!
그것은 확신이며 결론이었다.
'비록 시체는 찾지 못했지만, 가장 강한 절독이 포함된 지옥혈사대의 검에 심장이 관통당했으니… 필히 죽었을 것이다.'
선우종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너희들의 실력은 인정한다. 하나 이들을 이길 수는 없어."
그러면서 그는 흘낏 시선을 흑포인들에게 주었다.
그의 뒤에 시립하듯 서 있는 자들.
흡사 시체처럼 창백한 흑포인들이 거기 서 있었다.
순간, 악동들 사이에서 빈정거리는 조소가 터져 나왔다.
"낄낄… 그 사람, 정말 유치하게 사람을 공갈 협박하는군."
"크큿… 저 강시 같은 작자들을 가지고 뭘 어쩌겠다는 거야? 설마 강시 부활을 하자는 건 아닐 테고!"
한데 바로 그 때였다.
한 줄기 전음(傳音)이 검예랑의 고막을 실낱처럼 파고든 것은!
전음(傳音)은 뜻밖에도 여인의 음성이었다.
"소가주! 속하, 대모입니다. 제 말을 잘 들으십시오."
"……!"
검예랑은 내심 흠칫했다. 하나 겉 표정은 전혀 변화가 없었다.
들려 오는 음성!
그것은 다름 아닌 대모 능비연의 음성이었다.
하되 그의 시선은 여전히 담담히 선우종을 향하고 있었다.
전음은 계속 이어졌다.
"지금 소가주의 형세는 대단히 불리합니다. 지금 소가주님 앞의 흑포인들은 십풍혈(十風穴)이라고 하는 인물들입니다."
'십풍혈……?'
"그들은 모두 벙어리들이지요. 하나 저들은 승천대밀전 내에서도 서열 백 위 안에 속하는 특급 고수들로서, 그들의 합공(合攻)은 가히 천하무적입니다. 소가주께서 상대하시기에는 벅찰 것입니다."
능비연의 음성은 비교적 차분했다.
그러나 그 음성 깊은 곳에 조급함이 담겨 있다는 것을 검예랑이 어찌 모를까?
음성은 계속 들려 왔다.
"더욱이 유념하셔야 할 것은, 학익선을 들고 있는 백포인… 그가 바로 승천대밀전의 제이인자(第二人者)로 알려진 문후 선우종이라는 사실입니다."
'문후 선우종……!'
검예랑은 자세가 흐트러질 정도로 경악했다.
'선우종! 실로 신비 속의 인물. 외부의 일에 좀체로 나서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가 직접 나설 정도라면 승천대밀전에서 우리들을 그만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증거가 아닌가?'
그 때였다. 선우종의 학익선이 천천히 악동들을 가리켰다.
"하긴 애초부터 너희들을 살려 둘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의 입가에 흐르는 미소는 여전했다.
세상에서 가장 유현하고 부드러운 미소랄까?
그래서 그의 자태는 더욱 신비하게 돋보였다.
선우종과 십풍혈의 진정한 신분을 알 리 없는 악동들은 조소 가득한 야유를 퍼부었다.
아니 설혹 알았다 하더라도, 그들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을 것이다.
애시당초 겁이란 것을 상실하고 태어난 그들이니!
"낄낄낄… 저 친구, 아까부터 말로만 겁주네. 그러지 말고 실천에 옮겨 보시지."
"크큿… 이빨로 겁주는 거라면 우리가 한 수 위일걸."
"이봐, 샌님 서생! 지금 우리 상태가 형편없지만 쉽게 당하지는 않아. 적어도 골통에 피흘릴 것은 각오해야 돼."
하나 검예랑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내심 긴장된 상태로 선우종을 바라봤다.
'선우종… 저 자는 지금 여유를 부리며 즐기고 있다. 우리는 너무 지쳤어. 또한 대모의 말대로라면 십풍혈 중 한 명을 상대해도 나의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
검예랑은 입술을 잘근 씹었다.
'나 혼자라면 이 곳을 충분히 벗어날 수 있겠지만, 친구들은 불가능해. 승부는 이미 결정난 것이다!'
문득 입 안이 짭짤했다.
피였다.
입술을 너무 세게 깨무는 바람에 찢어지는 것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 때 문득 해서미의 숨가쁜 외침이 터져 나왔다.
"예랑, 주위를 봐!"
일순 악동들의 시선이 급박하게 돌아갔다.
보라! 어느 틈이었을까?
수천 명의 무사들이 절화로 주위를 빽빽하게 에워싸고 흉흉하게 쏘아보고 있지 않은가?
그들의 손에는 각종 병장기(兵仗器)가 꼬나 쥐어져 있었다.
악동들은 살벌하게 이를 갈았다.
"빌어먹을! 야혼벌 개자식들이야!"
"아예 떼거리로 새까맣게 몰려왔군. 그러고 보니 우리들도 꽤 대단한 인물들인가 본데?"
검예랑의 얼굴은 석고처럼 굳었다.
'이 곳을 탈출한다는 것은 불가능해졌어!'
예상했던 일이고, 우려했던 일이다.
하나 그것이 직접 눈앞의 사실로 나타날 때는 더욱 낭패인 것이다.
이 때, 능비연의 전음이 재빠르게 검예랑의 고막을 두드렸다.
"소가주! 지금부터 속하의 말을 잘 듣고 신속하게 행동으로 옮기셔야 합니다. 모친께서는 안전하시니, 걱정 마십시오."
"……."
물론 짐작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그제서야 약간의 안도감이 찾아든다.
하지만 지금 급한 것은 눈앞의 위기를 빠져 나가는 일이었다.
"아무리 노력하셔도 절대적으로 불리한 현재 상황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소가주께서는 악동들과 함께 이 곳을 탈출하십시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 탈출구(脫出口)를 만들어 두었습니다."
'탈출구?'
검예랑의 동공에 잔 파문이 일었다.
능비연의 음성은 빠르게 이어졌다.
"뒷일은 속하가 처리하겠습니다. 소가주께서는……."
능비연은 탈출구가 있는 장소를 소상하게 말해 주기 시작했다.
백 장 밖.
중앙통 대로가 끝나는 지점에 반 장(丈) 높이의 석비(石碑)가 있다.
절화로 입구라는 표지판이었다.
그것을 격파하면 한 명 빠져 나갈 구멍이 나타날 것이고, 그것은 십 리 밖 안전 지대까지 지하 굴로 연결되어 있다.
오 년 전, 능비연이 우연히 발견한 천연동굴이 그것인데…….
능비연이 인위적(人爲的)인 손질을 가미하여 교묘한 탈출구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실로 능비연은 만에 하나의 경우까지 대비해 만반의 조치를 취해 놓은 것이다.
그 외에도 능비연은 몇 가지 검예랑이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일러 주었다.
능비연의 전음이 계속 이어지고 있을 때이다.
선우종은 여전히 부드러운 음성을 흘려 냈다.
"결정이란 시기가 가장 중요한 것이다. 포기해라. 늦으면 그것마저도 허락되지 않는 법이니……."
순간이다.
"닥쳐!"
산백의 단검이 번뜩였다.
스파앗-!
찰나 선우종을 향해 일직선으로 날아가는 짙푸른 섬광(閃光) 한 줄기가 있다.
빠르고 포악하다.
빛인가 여겨질 정도의 빠른 검광!
하되 선우종은 쏘아 오는 빛을 담담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훈훈한 미소 한 가닥이 입가에 머금어져 있다.
그러다가 문득 그의 손이 슬쩍 쳐들렸다.
이어 손에 들린 학익선이 슬쩍 바람을 일으켰다.
따앙-!
날카로운 금속음이 고막을 찢어발겼다.
학익선은 날아오는 단검을 되퉁겨 내었다.
패애액-!
쏘아 오던 단검이 방향을 전환시키며 산백을 향해 되쏘아 갔다.
반탄지력(反彈之力)!
그것은 애초의 속도보다 몇 배나 빨랐다.
산백조차 미처 손쓸 틈이 없을 정도였다.
산백은 입을 벌렸다.
"어어?"
피할 틈도 없었다. 그저 눈앞에 희뿌연 한 줄기 빛이 다가드는가 싶었다.
단검이 산백의 육신을 가차없이 꿰뚫는가 싶은 위기일발의 찰나였다.
문득 옥생의 무쇠 촛대가 허공을 갈랐다.
째째쨍-!
단검은 산백의 몸에서 머리카락 한 올 사이를 두고 퉁겨 났고, 가랑잎처럼 바닥에 떨어졌다.
"으……!"
산백의 등에 식은땀이 쫙 흘렀다.
실로 아슬아슬했던 순간이었다.
이 때 선우종의 눈꼬리에 살얼음이 조금씩 밀려들고 있었다.
"나는 기회를 거부하는 자에게는 두 번의 기회를 주지 않는다."
악동들의 안색이 무섭게 굳어졌댜.
"음……!"
"엄청난 고수야!"
선우종이 펼친 단 한 번의 동작.
실로 가벼운 손짓에 불과했을 뿐이다.
하나 악동들은 충분히 선우종의 능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 아니, 절감했다.
비록 지쳐 있었다고 하지만 산백의 투검(鬪劍)을 학익선의 바람으로 날려 버리다니?
촤륵-!
선우종의 학익선이 천천히 들려졌다.
그의 시선은 열 명의 흑포인들 쪽으로 향했다.
일컬어 십풍혈이라는 엄청난 극강의 고수들!
"십풍혈! 그대들에게 저 아이들을 맡긴다. 일각 이내에 처리하도록!"
"……."
"……."
유령처럼 무심냉막한 십풍혈은 여전히 말이 없다. 그들은 전부 벙어리들이었다.
처척-!
그들은 동시에 기계처럼 허리춤의 기이한 계도를 잡았다.
그 때 능비연의 전음은 검예랑의 귀에 마지막 말을 남기고 있었다.
"소가주!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헛된 죽음을 해서는 아니 됩니다."
슥- 스윽-!
찰나 계도가 십풍혈의 손에서 죽음과 같은 빛을 뿌렸다.
밤(夜)!
그리고 타오르는 화염(火焰)!
계도에서 쏟아지는 살광은 그것들과 어울려 섬뜩한 기운을 불러일으켰다.
그것은 살기(殺氣)라고 하기엔 차라리 만 장 지하에서 뿜어지는 죽음의 빛깔이었다.
이어 십풍혈은 걸음을 내디뎠다.
스슥-!
마치 한 사람처럼 움직이는 자들.
가히 기계적인 움직임이고, 오직 한 사람이 움직이는 것처럼 일사불란하다.
일순 악동들은 어떤 절박한 위기감을 실감했다.
그들이 한 걸음을 움직였을 뿐이거늘…….
실로 무서운 압박감이 대해처럼 밀려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목줄기를 옥죌 정도의 가공할 살기였다.
'으, 저 시체 같은 자식들! 우리의 상대가 아니야!'
'우라질! 우리가 두려움을 느껴 보다니……!'
급박하게 조여 드는 공기!
막 십풍혈이 지면을 박차려는 찰나였다.
한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음성!
"선우종! 그대는 상대를 잘못 선택했다."
어디서 들려 오는 음성일까?
홀연 한 줄기 싸늘한 냉갈음이 창망한 허공에서 울려 퍼지는 것이 아닌가?
야천(夜天)이었다.
모든 시선들이 흘낏 그 곳을 향해 들려졌다.
쐐애애액-!
찰나, 하나의 묵빛 그림자가 밤하늘을 등에 업고 섬뢰처럼 내리꽂히고 있는 것이 아닌가?
묵빛 그림자는 악동들의 삼 장 좌측에 떨어져 내렸다.
묵면인(墨面人)!
머리에서 발끝까지 검은 천을 뒤집어쓴 자.
그런데 보라! 그의 가슴에 선명하게 표기되어 있는 핏빛의 대나무 한 그루를!
오오, 그것은 바로 혈죽(血竹)!
혈죽이었다.
최근 호북성 일대를 풍운으로 강타했다는 최고의 신비대도!
그가 나타난 것이다.
일순, 지금껏 전혀 동요를 보이지 않던 선우종의 동공에 잔 파랑이 일었다.
하나 그것은 놀라움이나 경악이 아니었다.
다만 뜻밖의 상황을 인정한다는 단순한 동작 정도랄까?
곧이어 다시 부드러운 미소가 그의 입가에 번졌다.
어떠한 상황에라도 담담할 수 있는 인물, 그가 바로 선우종인 것이다.
"후훗… 잔챙이를 잡으려다가 뜻밖에도 대어(大漁)가 걸려들었다는 건가?"
그는 도리어 혈죽의 출현을 기뻐하는 눈치였다.
혈죽은 냉오하게 선우종을 노려보고 있었다.
시리도록 차가운 시선이다.
"문후 선우종! 대어를 낚으면 그만큼 질긴 낚싯줄을 사용해야 할 텐데, 이토록 썩어 문드러진 낚싯줄로 본인을 낚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십풍혈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선우종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후후… 혈죽! 그대의 명성은 익히 들었소. 간덩이가 부은 자라는 소문도! 역시 그렇군. 오늘 본인이 그대의 부은 간덩이를 확실히 치료시켜 주겠소."
"그러길 바란다."
그러면서 혈죽의 시선이 옆으로 슬쩍 흘렀다.
검예랑 쪽이었다.
이어 전음이 검예랑의 고막을 빠르게 두드렸다.
"소가주! 속하, 대모입니다. 잠시 혈죽의 모습을 빌렸습니다. 물론 조금 전에야 깨달은 것이지만, 속하의 추측으로는 혈죽은 바로 소가주라고 생각합니다만……."
검예랑은 흠칫 혈죽을 바라보았다.
'대모였군……!'
한데 능비연의 말이 놀랍다.
검예랑이 혈죽이라니?
하나 검예랑의 표정에서는 긍정도, 부정도 읽을 수 없었다. 그저 무심할 뿐이다.
그는 과연 혈죽인가? 혈죽이 아닌가?
능비연의 음성이 계속 들려 왔다.
단호한 음성이었다.
"잠시 후, 속하가 묻어 둔 폭약(爆藥)이 폭발할 것입니다. 그 틈을 이용해 아이들과 함께 탈출하십시오. 명심하십시오. 기회는 단 한 번뿐이라는 것을!"
전음은 끊어졌다.
선우종은 여유 있는 음성으로 말했다.
"후후… 대어를 낚는다는 것은 참으로 좋은 구경거리가 될 것이오."
챙-!
맑은 금속음과 함께 혈죽의 손에 검이 들렸다.
그것은 채대와 흡사한 연검(軟劍)이었다.
"후후… 낚싯줄을 끊는 것도 매우 흥미 있는 일이지."
언중유골(言中有骨)이랄까?
두 사람은 말에 가시가 있는 대화를 나누었다.
그런 가운데 혈죽, 즉 능비연은 마음 속으로 수(數)를 세었다.
'셋, 둘, 하나!'
그리고 어느 순간이었다.
꽈꽈꽝-!
무슨 소리일까?
돌연 엄청난 폭발음이 울려 퍼졌다.
선우종과 십풍혈이 흠칫 그쪽을 바라볼 때.
보라! 실로 엄청난 폭발들이 절화로의 사방에서 일어나고 있지 않은가?
꽈르르르- 꽈꽈꽈꽈꽝-!
폭발은 가공했다.
이 곳 저 곳에서 터져 오르는 대폭음들!
그 폭발은 사방에 포위하고 있던 야혼벌의 무사들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흙보라가 집채만큼 일어나고, 무사들이 천참만륙이 되어 갈기갈기 찢겨져 날아갔다.
"케에에에엑……!"
"크아악… 이게 무슨 일이냐?"
"피… 피해! 카아악……!"
순식간에 수백 이상의 무사들이 피떡이 되어 나뒹굴었다.
이 때, 능비연은 검예랑을 향해 시선을 홱 돌렸다.
그녀는 간절한 눈빛으로 외치고 있었다.
"피하십시오, 빨리!"
그것도 찰나, 능비연은 십풍혈을 향해 벼락처럼 덮쳐 갔다.
"네놈들은 내가 책임진다!"
그녀의 손에 들린 연검이 무서운 검우(劍雨)를 허공에 뿌리며 무섭게 날아갔다.
검예랑은 찰나적으로 망설였다.
'대모를 남겨 두고 갈 수는 없어!'
그러다가 문득 그는 대세를 의식했다.
'하지만… 나 혼자가 아니야!'
신속한 결정이 필요했다.
다급한 상황이었다.
자신의 결정으로 나머지 악동들의 생사(生死)가 결정지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끝까지 싸운다면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한 것!
검예랑은 입술을 짓씹었다.
'나 혼자가 아닌 것이 한이다!'
꽈꽈꽈꽝-!
이 때 능비연은 십풍혈과 어울려 무섭게 격돌하고 있었다.
그녀는 용맹하게 싸우는 가운데, 계속 검예랑을 흘낏거렸다.
재촉의 의미일 게다.
검예랑의 눈빛은 침울히 가라앉았다.
'내가 이 곳에 있으면 대모를 불리하게 만들 뿐이다!'
결국 그는 결정을 내렸다.
'일단 이 곳을 빠져 나가는 거다. 그리고 대책을 강구하는 것이 현명해.'
꽈꽈꽈꽝- 꽈르르르-!
"크아아악……!"
"케엑!"
폭음은 연이어 터지고, 비명은 꼬리를 물었다.
검예랑은 악동들을 향해 단호하게 외쳤다.
"모두 나를 따라와!"
파아아앗-!
찰나 그의 신형이 어느 방향을 정하고 섬전처럼 날아갔다.
"예랑!"
"예랑! 어딜 가는 거야?"
악동들은 의아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곧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간파하고 급히 검예랑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한편 선우종은 눈살을 찌푸렸다.
"폭약이라……."
그는 악동들이 한 덩어리가 되어 치닫는 것을 지그시 바라봤다.
'예기치 않았던 상황인가?'
하나 그는 여유가 있었다.
그는 결코 악동들을 뒤쫓지 않았다.
그들이 결코 빠져 나갈 수 없으리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후후후… 튀어 봐야 손바닥 안이다. 혈죽을 제압하고 천천히 뒤쫓아도 늦지 않아. 그 때까진 야혼벌의 무사들이 웬만큼 퇴로를 지연시킬 테고… 문제없다!'
입가에 씨익 미소까지 번졌다.
그는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능비연과 십풍혈을 향해 시선을 돌려 버렸다.
하지만 어찌 알았으랴?
실수!
이것이 바로 그의 일생일대 최대의 실수가 되어 버렸다는 것을.
③
악동들은 바람처럼 치닫고 있었다.
선두는 검예랑이었다.
그들이 치달려갈 때, 야혼벌의 고수들이 겹겹으로 가로막았다.
"크크… 어딜 가는 거냐?"
"애송이들! 목숨을 바쳐라!"
그들은 병장기를 휘두르며 악동들을 공격해 왔다.
이 때 검예랑의 손에는 어느 틈인지 한 자루의 검이 꼬나 쥐어져 있었다.
근처에 나뒹구는 무사의 검을 집어든 것이다.
"비켜!"
슈아아악-!
검예랑의 손이 무섭게 날아갔다.
순간, 그의 검이 달려드는 무사들을 향해 가공하게 쏘아 갔다.
가가각- 그아아악-!
그의 검은 순식간에 달려드는 야혼벌 무리 가운데 십여 명의 허리를 베어 넘겼다.
"크악!"
"케에엑……!"
악동들 역시 달려드는 무리들을 향해 살수를 내뻗었다.
퍽- 퍼퍼퍼퍽-!
그들의 손에서 살수가 뿜어져 무자비하게 무리들을 도륙했다.
휘둘러지는 손, 병장기들!
"아악!"
"크악! 가… 가공한 놈들!"
그 때마다 야혼벌의 고수들은 피떡이 되어 고꾸라졌다.
악동들은 잔인했다.
이미 죽음을 각오했고, 악이 극도로 받쳐 있었기에 손속은 자연 잔인독랄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오직 가공할 살초(殺招)만을 전개했다.
퍼퍼퍽- 퍼퍼퍼퍽-!
치달리는 그들이 주위에서 지옥 문턱을 넘어서는 비명성이 줄지어 터져 나왔다.
눈빛은 충혈되고, 살기가 전신에 사무쳤다.
문득 검예랑이 신형을 우뚝 멈췄다.
능비연이 말한 석비(石碑) 앞이었다.
<절화로(絶花路) 입구(入口)>
그런 글씨가 석비에 아로새겨져 있었다.
꽈아앙-!
검예랑의 손이 한 줄기 강기를 쏟아 내자, 석비는 산산조각이 되어 날아갔다.
순간, 보라!
석비의 아래쪽, 사람 하나가 간신히 통과할 수 있는 시커먼 입구가 삐죽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검예랑은 악동들을 향해 빠르게 소리쳤다.
"빨리빨리 들어가!"
악동들은 눈을 휘둥그래 떴다.
"으응? 여기에 이런 곳이 있었다니……."
머리 회전이 빠른 조자양이 재빨리 눈치를 챘다.
"바보들! 탈출구니까, 빨리 들어가!"
검예랑이 날카롭게 재촉했다.
"시간이 없다. 빨리……."
순간 조자양이 맨 먼저 들어섰고, 뒤따라 나머지 악동들도 입구로 몸을 던졌다.
문득 빙접화가 탈출구 앞에서 몸을 세웠다.
그녀는 검예랑을 바라보았다.
뜨거운 눈길이었다.
"예랑, 먼저 들어가."
그녀는 검예랑에 대해 새로운 기준을 세우고 있었다.
심혼을 잡아끄는 신비로운 분위기에 더하여 태산(泰山)이 느껴지는 웅후한 기상(氣象).
그녀에게 있어 검예랑은 이제 생명 이상이었다.
'예랑! 너를 절대 빼앗기지 않겠어. 그 누구에게도…….'
일순 검예랑은 훈훈한 미소를 지었다.
"접화, 나는 걱정 말고 너나 빨리 빠져 나가."
"……!"
빙접화는 검예랑을 응시하다가 입술을 꼬옥 깨물었다.
"알았어. 빨리 따라와."
실로 다소곳한 음성이었다.
방접화, 천성적으로 가공할 색기를 타고 태어난 요녀!
그녀도 이런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가?
그것은 진정 그녀가 최초로 말해 본 여인의 음성이었을 것이다.
빙접화는 곧 탈출구 속으로 몸을 사라졌다.
해서미!
할 말은 가슴에 대해(大海)처럼 출렁이고 있으나, 끝내 입 밖으로 표현하지 못하는 옥잠화(玉簪花) 같은 소녀!
그녀는 검예랑에게 무언가 말을 할 듯하다가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리고 통로 속으로 몸을 날렸다.
순간, 입을 연 것은 검예랑이었다.
"서미! 조심해라."
"……!"
순간, 해서미는 뇌전에라도 감전이 된 듯 그 자리에 신형을 멈추고 말았다.
그녀는 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너… 너는……?"
거기 검예랑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일순 해서미의 동공에 물기가 한 꺼풀 탁 덮였다.
그녀는 고개를 푹 숙였다.
'바보! 이럴 때는 웃어야 되는 건데… 어째서 눈물이 나는 거지?'
그녀는 재차 몸을 틀어 동혈 속으로 신형을 날렸다.
이윽고 검예랑을 제외하고 모든 악동들은 동혈 속 안으로 사라졌다.
'됐어!'
검예랑은 시선을 들었다.
안도의 기색이 그의 얼굴에 번지고 있었다.
이 때, 야혼벌의 무리들이 벌 떼처럼 덮쳐 들고 있었다.
"앗! 놈들이 비밀 통로로 빠져 나가고 있다!"
"막아라! 절대 놓쳐서는 안 된다."
"생포할 수 없을 때는 사살(射殺)해도 좋다는 문후의 명(命)이 계셨다."
위아아앙- 쏴아아-!
가히 수십, 수백 자루의 병장기가 그를 향해 밀어닥쳤다.
순간, 검예랑의 입가에 싱긋 미소가 매달렸다.
'후후… 불을 향해 덤벼드는 불나방들!'
순간, 검예랑의 쌍장(雙掌)이 가슴 앞에서 춤을 추듯 갈라졌다.
꽈르르릉-!
굉렬한 뇌음(雷音)이 일어나는가 했더니…….
보라! 수십 마리 백룡(白龍)의 환상이 엄청난 속도로 앞을 향해 밀려가는 것이 아닌가?
오, 천불용천장(千佛龍天掌)이었다.
검예랑의 손에서 소림 최대 절기가 거침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앵무연이 영호 대사로부터 구해 온 보리범천경의 비급(秘 )에 있는 무공이 바로 그것!
퍼퍼퍼퍽- 꽈지지지직-!
으스러질 자는 으스러지고, 피떡이 될 자는 피떡이 되었다.
아예 살점과 피가 난무한다.
"크아악……!"
"어린 놈이 너무 강… 크으윽……!"
"케애액……!"
야혼벌의 무리들은 폭풍에 흩어지는 낙엽처럼 산지사방으로 피떡이 되어 날아갔다.
검예랑의 눈은 핏빛으로 충혈되었다.
"나는 지금 더욱 잔인해지고 싶은 심정이다. 더 이상 우리를 쫓지 마라."
씹어 뱉듯 소리치며 그는 급히 동혈 안으로 몸을 날렸다.
한데 바로 그 때였다.
어디선가 돌연, 한 줄기 뾰족한 음성이 깨질 듯 터져 나오는 것이 아닌가?
"예랑, 기다려!"
"……?"
검예랑은 흠칫 신형을 돌리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 때 한 여인이 입구를 향해 빠르게 달려왔다.
나이가 지긋한 사십대의 창기(娼妓)!
그녀는 바로 과거 무공비급을 구하기 위해 선출되었던 열 명의 야화 가운데 한 여인이었다.
이름하여 초연(草然)!
무공비급을 구해 오는 대신 온몸에다 춤추는 일천(一千) 나녀(裸女)의 문신을 새겨서 돌아온 여인이 바로 초연이었다.
지금 그녀의 머리는 온통 불에 타 사라졌고, 의복 역시 갈기갈기 찢어져 엉망진창이었다.
검예랑은 달려오는 초연을 의아하게 바라봤다.
"예랑아! 이것을 받아라."
초연은 품속에서 한 권의 책자를 꺼내 검예랑에게 내밀었다.
겉표지에 이런 글씨가 적혀 있다.
<여인한세록(女人恨世錄)>
검예랑은 의아한 눈길로 초연을 응시했다.
"초연 아주머니! 이 책자를 왜 저에게 주시는 겁니까?"
"넌 필히 이것을 받아야 한다."
초연의 얼굴은 엄숙했다.
항상 뭇 사내들에게 질탕한 웃음을 흘리며 몸을 팔던 여인.
절화로의 많은 창기들 가운데 한 여인.
그러나 지금 그녀의 얼굴은 너무도 엄숙하게 변모해 있었다.
"이 책자에는 이 곳 절화로 여인들의 가슴에 응어리진 한(恨)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앞으로… 너희들이 대신 풀어 주어야 할 한들이다."
검예랑은 흠칫했다.
"……!"
"강요하지는 않겠다. 하되, 지금까지 우리들이 참을 수 있었던 것은 너희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통곡해도 시원치 않을 우리들의 한을 너희들이 해결해 주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그녀의 음성은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뿐이랴? 어느 틈인지 핏발 곤두선 두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흘러내리는 눈물은 핏빛이었다.
그야말로 피눈물(血淚)!
초연은 이를 악물고 여인한세록을 내밀었다.
"예랑아, 부디 받아 다오!"
일순 검예랑의 가슴 저 밑바닥에서 뜨거운 불덩어리가 확! 솟구쳤다.
진한 감동으로 가슴이 찌르르 했다.
'짓밟히고, 찢겨지며, 수욕의 세월을 살아온 여인들!'
그는 초연에게서 책자를 받아 쥐었다.
"초연 아주머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예랑의 숨이 붙어 있는 한, 여인한세록의 한은 반드시 풀어질 것입니다. 맹세합니다."
"고맙구나, 예랑아!"
초연의 눈꼬리를 타고 계속 피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문득 그녀는 검예랑을 뜨겁게 쏘아보았다.
"예랑아! 너에게 한 가지 보여 줄 것이 있다."
그러면서 그녀는 돌연 옷을 벗기 시작했다.
"초연 아주머니!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초연은 주저 없이 순식간에 전라(全裸)가 되었다.
드러난 초연의 나신(裸身).
오오, 보라!
그녀의 전신에는 온통 문신 투성이였다.
그것은 실로 기이한 자세로 춤을 추고 있는 일천 여인상(女人像)의 문신이었다.
일컬어 무녀일천비도(巫女一千秘圖)!
예랑은 어쩔 수 없이 그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어떤 이유가 있다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초연은 빠르게 말을 이어 나갔다.
"십육 년 전, 어느 기인께서 내 몸에 새겨 둔 문신이란다. 그는 이 무녀일천비도의 비밀을 얻으면 천하를 상대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고 했다. 나는 지금도 그 기인의 말이 허황된 광언(狂言)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한다."
그녀의 음성은 단호하다.
그 음성은 신념(信念)에 차 있었다.
"나는 요즘에야 그분이 왜 무녀일천비도를 내 몸에 새겨 두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잘 보아라!"
돌연 그녀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검예랑의 앞에서 춤을 추기 시작한 것이다.
"초연 아주머니!"
검예랑은 어리둥절하여 초연을 망연히 바라볼 뿐이었다.
여인의 하이얀 나신이 너울너울 춤을 춘다.
학(鶴)처럼, 나비처럼…….
접었다 폈다, 그리고 또 비틀며…….
그것은 차라리 서러운 몸부림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검예랑의 눈이 커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의 눈은 완전히 부릅뜨여지고 말았다.
"오, 이럴 수가……!"
그는 자신도 모르게 경악의 탄성을 흘려 내고 있었다.
보라! 초연이 너울너울 춤을 출 때마다 놀랍게도 그녀의 전신에 새겨진 일천 개 문신도 마치 살아 있는 듯 따라서 움직이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문신의 위치에 따라 각양각색의 동작(動作)들로 나타났다.
내뻗은 팔뚝의 문신은 용(龍)인 양 날아오르고, 허벅지의 문신은 힘차게 대지(大地)를 두드린다.
출렁이는 젖무덤에선 눈을 현란케 하는 교태로움이 어우러지고…….
비틀어지는 등과 허리에서는 맹호(猛虎)가 꿈틀거리며 튀어나온다.
검예랑은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마치… 백만(百萬) 대군(大軍)이 일시에 덮쳐 드는 것 같다!'
검예랑은 그런 착각을 느꼈다.
초연은 수치를 잊고 전라(全裸)를 흔들어 대고 있었다.
가슴에 응어리진 한이 풀린다면 짐승 같은 치욕도 웃으며 행할 수 있는 여인이여!
검예랑은 가슴이 미어졌다.
그는 더 이상 초연의 춤사위를 바라볼 수가 없었다.
'초연 아주머니! 압니다. 그래서 당신의 한은 반드시 풀어 드리겠습니다.'
검예랑은 피를 토하듯 외쳤다.
"모조리 기억했습니다. 이 검예랑의 뼛골 속에 깊이 새겨 두었습니다."
그의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그는 더 이상 초연을 바라볼 수 없었다.
그는 몸을 돌아서서 마구 달렸다.
한데 몇 걸음도 옮기기 전이었다.
"아악!"
돌연 뒤에서 여인의 비명성이 찢어지게 들려 왔다.
고개를 돌렸을 때, 초연의 희멀건 나신이 어깨에서 허리로 두 토막나고 있었다.
야혼벌의 고수들이 동혈로 뛰어들자, 그녀가 맨몸으로 막아 선 것이다.
뒤에서 살기 서린 음성이 터졌다.
"쫓아라! 놈들은 멀리 가지 못했을 것이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 어린 놈들을 척살해야 한다."
야혼벌의 무리들은 벌 떼처럼 동혈을 향해 밀려들었다.
순간, 여기저기서 함성이 터졌다.
"막아야 해!"
"아이들이 안전 지대로 피할 때까지 시간을 벌어야 한다! 막을 수 없다면 몸으로 막아라!"
난데없이 수백 명 절화로의 여인들이 나타나 동혈을 막아 섰다.
동혈 입구는 순식간에 여인들의 몸으로 뒤덮였다.
서릿발 같은 살음이 쨍 터졌다.
"찢어 죽일 년들! 죽고 싶어 환장을 했구나!"
"모조리 베어 버려라!"
스파아- 쏴아아아-!
허공을 가르는 병장기들의 파공성이 섬뜩하게 울려 퍼졌다.
그 병장기들은 여지없이 가녀린 창녀들의 몸에 작렬했다.
퍼퍼퍼퍽- 퍼억- 퍽-!
"아아악……!"
"아악!"
가녀린 비명성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야혼벌의 무리들은 여인들을 향해 무자비하게 병장기를 떨쳐 냈다.
사지(四肢)가 풀풀 날아오르고, 진홍빛 붉은 선혈이 바닥을 질펀하게 적신다.
하나 여인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앞의 여인이 죽으면 다음 여인이 가로막고, 그 여인이 거꾸러지면 뒤의 여인이 막아 선다.
그녀들의 무기란 오직 하나뿐.
육체(肉體), 바로 그것이다.
눈에서 핏발을 머금고 끝없이 불나방처럼 달려드는 여인들!
육탄 돌격이었다.
아예 죽음이란 여인들에게 있어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 모습에 야혼벌의 무리들은 진저리를 쳤다.
"지독한 년들!"
"에잇! 죽어라, 죽어!"
동혈 입구는 여인들의 시신으로 쌓이고 또 쌓였다.
한편 동혈 안에서 입구를 내다 보던 검예랑은 버들가지처럼 전신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미처 손쓸 사이 없이 벌어진 상황이었다.
그의 얼굴에 실로 처절한 눈물이 흘러내렸다.
우드득-!
말아 쥐는 그의 손가락은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절화로의 여인들이여! 우리의 어머니들이여! 당신들을 위해 이 눈물을 흘립니다. 이 눈물의 대가는 반드시 받아 낼 것입니다. 천 배를 만 배를 더하여 반드시……!"
그의 입술을 비집고 맹세가 씹혀져 나왔다.
그는 품속에 있는 책자를 어루만졌다.
조금 전 초연이 건네 준 책자.
"약속합니다. 남궁세가의 복수보다도, 당신들의 한이 우선이라는 것을……!"
어느 순간, 검예랑은 무겁게 돌아섰다.
그리고 동혈 안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어둠 속, 그 곳에는 한이 있다. 그리고 복수가 있다.
그리고 이제 드디어 그 처절한 복수의 행로는 시작된다.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