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사랑 선언
누가복음 3:15-17, 21-22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오늘은 주현 후 첫째 주일이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세상에 드러내신 날을 기념한다. 주현절 기간 첫째 주일은 세례주일이고, 마지막 주일은 산상변모주일이다.
세례와 산상변모 모두 그리스도로서 예수님의 특징이 잘 드러난다. 주현절 색동 배너를 보니, 예수님의 세례와 동방박사의 경배 두 가지 심볼을 사용하였다. 지극히 주현절 느낌이 난다.
세 분이 주현절 배너에 댓글을 달아 감상을 전하였다. 마치 동박박사 세 현인과 같다.
첫 박사는 “주현절 표현이 음악으로도 찬양대도 표현하기 가장 어렵거든요. 그런데 그 많은 것들 중 예수님의 세례식을 포인트로 잡았다는 것은 대단한 것”이라고 하였다.
둘째 박사는 “주현절을 어떻게 표현할까? 얼마나 곰곰이 생각했을지... 다 보이네요. 저희가 기도 쓰는 것처럼 준비과정이 기쁨이면서도 부담스럽기도 했을텐데요”라며 그 마음을 헤아렸다.
세 번째 박사는 “어른들보고도 주현절을 표현해보라고 하면 쉽게 생각이 안날텐데... 정말 기특하고 대단합니다... 거룩한 부담감을 주님이 어여삐 보시고 영감과 능력을 더하여 주시고 계심이 느껴집니다”라고 했다.
그림으로 표현한 작가도 훌륭하고, 박사들의 헌사도 아름답다. 이런 말들이 사랑 선언이 아닐까 싶다. 오늘 설교제목은 ‘하나님의 사랑 선언’이다.
1)
본문은 요단강에서 예수님이 세례받는 장면이다. 예전에 성지순례에 가서 세례용 물을 떠 온 일이 있다. 특별한 능력이 있는 물이어서가 아니다. 예수님이 세례받으신 그 현장의 분위기를 담아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당시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푼 요한은 ‘광야의 외치는 소리’라고 불린다. 세례 요한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말한 대로 예언이 실현되는 시간이 오자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 현장이 유대 광야이고, 요단강이었다.
세례 요한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3:2; 4:17)고 외치자, 새로운 세상에 대해 관심이 많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요한을 찾아온 것은 온갖 죄인뿐 아니라 종교지도자들도 있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종교적 신념과 열심이 강하여 자신이 죄인인 줄 몰랐다.
사람들은 요한에게 나아와 자기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였다. 그리고 요한은 그를 찾아온 이들에게 죄를 용서하는 세례를 베풀었다. 회개는 세례의 조건으로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하는 출발점이었다. 요한의 메시지는 사자후를 외치듯 강력하였고, 그의 세례는 제사장의 의식처럼 경건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 사람이 오신다던 메시야가 아닌가 궁금해하였다.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생각하니”(15).
그러나 강직한 사람 요한은 자신이 메시야가 아니며, 다만 그분이 오실 길을 예비하는 자요, 미리 외쳐 길을 닦는 소리일 뿐이라고 말하였다. 심지어 자기는 그분의 신발 들메끈조차 감히 풀지 못할 그런 존재라며 몸을 낮추었다. 지극히 겸손하고 가난한 마음이었다.
세례자 요한은 말한다.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16).
장차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그 분은 ‘알곡과 죽정이를 가려낼’ 심판자이신 메시야라고 하였다.
이렇듯 요한은 광야로 나온 백성들에게 자신의 죄를 깨닫고 뉘우치며, 나아가 새로운 삶을 결단케 하는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다. 그리고 그런 물세례를 통해 메시야 오심이 임박하였음을 선포하였다. 그가 전한 세례는 바로 하나님과 화해하는 일이요, 궁극적으로 죄인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 선언’이었다.
그때에 예수님 역시 세례 요한을 찾아오셨다. 놀라운 것은 예수님 역시 죄인의 모습을 자처하였고, 세례를 받으셨다는 사실이다.
오래도록 교회의 사상가들은 “왜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가셨는가?”라는 주제를 문제 삼아 토론하였다. 요한의 세례는 회개의 세례인데, 예수님에게는 죄가 없다는 것을 성경은 누누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죄인 아니신 분이 죄인의 몸을 스스로 자처하셨을까?
초대교회의 어떤 해석은 아주 소박하다. “예수님이 그같이 한 것은 그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기쁘게 하기 위함이다.” 우리도 세례받는 일을 통해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한다. 내 부모, 가족, 믿음의 벗들, 군대 상관, 신앙공동체, 전도인, 주례 목사에 이르기까지 모두 즐거워한다. 새로운 존재, 구원받은 삶을 결단하기 때문이다.
모든 복음서는 요한의 세례를 대단히 중요하게 조명한다. 오늘 예수님의 세례는 마태복음과 함께 읽으면 더욱 이해가 구체적이다. 마태복음 3장에 따르면 요한은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러 자기에게 나오시자 당치도 않은 일이라며 사양했다고 기록한다.
“요한이 말려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마 3:14).
이런 요한의 말에 대해 예수님은 단호히 말씀하신다.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마 3:15).
예수님의 세례는 하나님의 의를 이룬다는 큰 의미가 있다. 예수님이 요한의 세례 곧 ‘회개의 세례’를 받으신 것은 주님이 타락한 인간의 자리에로 친히 낮아지셨음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공생애는 그때 세례 사건처럼 낮아지고, 희생하고, 욕보는 대속의 삶으로 일관했던 것이다.
2)
요한의 세례는 당시 전례 없던 사건이었다. 사람들이 광야로 몰려들었고, 죄 사함의 세례를 받았으며, 임박한 하나님 나라를 기대하였다. 민중 사이에 하나님께로 향하는 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무엇보다 역사가 된 사건이 있었는데, 그것은 메시야이신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일이다. 예수님도 백성들처럼 세례를 받으셨다. 공관복음서는 공통적으로 같은 증언을 한다.
세례 직후에 성령이 비둘기 같은 모습으로 그 위에 임하였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비둘기는 중요한 순간마다 하늘의 전령 노릇을 한다. 창세기에서는 평화의 심벌로, 복음서에서는 성령의 심벌로 상징화되었다. 예수님은 “비둘기같이 순결하라”(마 10:16)고 말씀하신다. 이만한 대표상징이 없다.
하늘로부터 난 소리는 그가 메시야이심을 드러내는 메시지였다.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22).
복음서는 이 메시지를 메시야 인준 선언이라고 말한다. “내 사랑하는 아들”과 “내 기뻐하는 자”는 구약성경에서 인용된 말씀이다. 모두 예수님을 가리켜 왕이요, 메시야이심을 드러내는 예언 문구이다.
“내 사랑하는 아들”은 시편(2:7)에서 임금의 즉위식에서 행하는 선언문이고, “내 기뻐하는 자”는 선지자 이사야(42:1)가 네 차례 반복하여 말하는 ‘고난 받는 종’을 의미한다. 메시야를 지칭하는 가장 핵심적인 표현이다.
모든 사람에게는 자기 인생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이 있다. 그것을 의식적으로 깨닫는 경우를 소명이라고 한다. 처음에는 모르다가 나중에 어떤 계기가 있어 뒤늦은 깨달음이 있기도 한다. 그런 경우를 각성이라고 한다.
예수님의 세례 장면은 바로 주님의 그리스도로서 공생애를 이해하는데 열쇠와 같다. 주현절의 키워드와 같다.
만약 자신의 세례, 곧 그리스도인 됨을 내 생애의 전환점으로 삼은 사람은 복있는 사람이다. 자주 자신을 성찰하면서 지금 나를 좌우하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다시 하나님께로 향할 것을 매 순간 결단하는 그 사람도 복 있는 자이다.
나중에 세례는 그리스도교회에서 최초로 행하는 성례가 되었다. 바울의 서신과 사도행전을 보면 일찍부터 세례가 시행되었다.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하였다.
세례는 “침수한다”라는 의미를 가진 헬라어 밥티스마에서 유래되었다. 세례의 본래 형식은 침례였을 것이다. 침례는 물속에 몸을 잠기게 하여 생명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을 느끼게 하고, 이 죽음에서 갑자기 구원받는 것을 깨닫게 해 주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모든 세례가 다 침례는 아니다. 침례는 세례의 한 종류이다.
이렇듯 세례는 그리스도와 함께 (옛 사람이)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새 사람으로) 다시 사는 신앙의 강력한 상징이었다. 한 마디로 거듭남이었다.
세월이 지나면서 세례식의 관행이 달라졌다. 초대교회는 학습의 기간을 중요하게 여겼다고 한다. 박해의 시대에 불가피한 일이었다. 박해를 견디기 위해 배교하지 않는 철저한 신앙을 요구했던 것이다.
지금 우리가 세례를 쉽게 생각하는 것은 그만큼 신앙생활에 대한 위협이나 위기를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가톨릭에서는 7가지 성례 중 첫 번째로 세례를 꼽는다. 원죄의 흠과 죄를 제거해 주며, 더 깊은 은혜로 인도한다고 설명한다. 이것은 전통적으로 어린아이들에게 세례를 줄 수 있는 이유가 되었으며, 세례를 받지 않으면 성화하는 은혜에 동참할 수 없으며 중생할 수 없다고 믿었다.
종교개혁자들은 “세례는 어떤 본질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 능력은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며, 그 목적은 신앙을 깨닫게 하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루터는 세례는 구원받기 위하여 필요하며, 성령은 세례를 통하여 중생시키신다고 하였다.
세례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세례를 받음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가 된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마 28:19)라는 말씀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에 연합하는 세례를 주라”고 하는 뜻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말한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6:3)
한때 종교개혁이 일어날 무렵, 중세교회에서는 세례를 베풀 때 불필요한 일을 많이 덧붙였다. 세례 받는 아기에게 눈 아래에다 입김을 불고는 십자를 긋고 입에다 소금을 넣어주고는 침과 진흙을 귀와 코에 쑤셔 박았다. 가슴과 어깨에다 기름을 바르고 정수리에다가는 성유를 칠하였다. 그리고 세례복을 입혀서는 불이 켜인 초를 두 손으로 쥐게 하는 것이다. 혹은 이마에다 재로 십자를 그리기도 하였다.
종교개혁자들은 이러한 잘못된 관행을 쇄신하였다. 세례는 가장 단순하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사랑 선언이지, 인간이 덕지덕지 붙여 놓은 인위적 의식이 아니다.
재세례파 공동체는 세례에 대해 더욱 극적인 이해를 하였다. 거룩한 자들의 공동체인 교회에 참여하려면 성인으로서 신앙고백을 하였고, 세례를 받아 교회의 일원이 되고 나서 거룩하지 못한 생활로 공동체를 더럽혔을 때는 징계를 받아 공동체를 정화하였다. 전쟁에 대해서는 평화주의를 고수하여, 어떠한 경우에도 무기를 사용해서는 안된다. 그들은 박해를 받았지만 여전히 세계 곳곳에서 존재하며 인류 사회에 영감을 준다.
3)
세례를 받을 기회가 늘 있는 것은 아니다. 독일에 있을 때 멀리 베를린에서 한 가정의 아빠와 딸이 복흠교회로 세례받으러 왔다. 그 가정의 아내이자 엄마는 박성희라는 여성인데, 딸 초롱에게 아기 세례를, 남편 김정수에게 세례를 받도록 하려고 먼 곳에서 찾아왔다. 고속기차로도 여덟 시간이 걸리는 곳이다. 미리 제3자를 통해 미리 의견을 물어왔다.
박성희는 1991년 전대협이 평양으로 파견했던 여성이다. 당시 경희대 음대 4학년이었는데, 귀국하지 못한 채 독일로 난민신청을 하였다. 그때는 이미 독일생활 7년 차로 독일에서 망명자로 활동하는 지극히 평범한 주부, 그러나 결코 평범치 않은 사람이었다.
자신은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나 서울 안동교회에서 성장하였는데, 낯선 독일 땅에서 신앙생활 계속하지 못하였다. 그 사정은 당시 한국 정부가 위험시하고 감시하는 인물이어서, 베를린에 살면서도 몸 붙일 한인교회가 없었다. 그것이 늘 서울에 계신 부모님의 염려였고, 객지에서 결혼 후 손녀가 태어나자 세례받게 하는 일이 유난히 나이 드신 부모의 근심 어린 기도 제목이 되었다.
그날 초롱이의 아기 세례는 큰 의미가 있었다. 온 교우들이 축복해 주고, 잔치를 열어 주었다. 멀리 한국에서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도 방문하셨다. 나는 사위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오늘 김정수 님의 세례는 사위가 장인, 장모를 기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바로 하나님 앞에서 다시 서는 것이다.”
몇 년 후 초롱이네 가족은 본래 친가가 있는 미국으로 영구이주하였고, 더 이상 보지 못하였다. 지금도 엄지손가락을 열심히 빨던 그 세례받던 아기 초롱이가 떠오른다. 언젠가는 문득 연락이 올 거라고 기대한다.
세례는 ‘하나님의 사랑 선언’이다. 누구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는 세상과 짝하기보다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믿음과 사랑으로 동맹 맺는 일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 세례를 통해 배운다.
하나님의 사랑 선언인 세례는 지금도 내게도 영향을 주신다.
하나님의 사랑 선언을 받아 들인 사람은 날마다 주님의 평화로 살아간다.
하나님은 지금도 이 세상을 향해, 뭇 백성의 마음을 품으시며 사랑을 선언하신다.
그런 은총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내게 자존감과 자부심, 감사와 기쁨이 언제나 같이 하길 바란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받은 세례에 큰 은총을 베푸시어 날마다 그리스도와 믿음과 사랑으로 연합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
첫댓글 김초롱 어린이 세례식이 있던 때를 찾아 보니 1997년 7월 13일이었습니다. 초롱이에게 세례를 베풀면서 그 해 봄에 태어난 두 아기도 조금 서둘렀습니다. 두 아기 중에 하나는 송한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