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형상 창조의 논리
- 은유적 상상력을 기르기 위하여
禹漢鎔
Ⅰ. 몸과 마음은 함께 움직인다
우리들은 본의 아니게 거짓말을 하는 경우가 있다. 마음은 온통 거기 있는데 다른 일을 했다거나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다고 하는 경우가 그렇다. 몸이 가는 길과 마음이 향하는 방향이 각각이라는 것인데, 과연 그러한가 하는 데는 의문이 남는다. 몸을 움직이는 것이 마음이고 마음의 행로를 헤아려 실천하는 주체가 몸이라면 그런 말은 말로서만 성립되는 것일 뿐 삶의 실상과는 거리가 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그런 말에 진실이 숨어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을 또 알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겪는 갈등 가운데 그런 예는 쌓이고 쌓였다. 젊은 남녀가 영혼을 바쳐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결혼이라는 절차만 거치면 사랑의 탑은 훤칠한 모습을 드러내기 직전. 그런데 일이 생길 수 있다. 상대방의 옛 애인이 문득 찾아와 결혼을 방해할 수도 있고, 어느 집안이 송사가 문제되어 결혼을 미룰 수밖에 없는 경우도 생기곤 한다. 또는 알고 보니 두 집안이 만나면 안 되도록 되어 있는 경우를 상정할 수도 있다. 그럴 경우 어쩔 수 없이 마음과 몸이 각기 다른 길을 가야 할 ‘운명’에 처하게 된다.
이런 경우는 상황이 특수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우리들이 겪는 갈등과 같은 성질의 것이라고 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문학의 경우는 다르다. 어느 학생이 그런 사연을 홈페이지에 올려놓은 것을 보고 고개를 갸웃한 적이 있었다. 사연이라는 것은 이렇다. 자기는 문학에, 특히 소설에 관심이 있는데 다른 과목 보고서를 써야 하기 때문에 소설을 읽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럴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 걱정거리의 핵심이었다. 몸과 마음이 각기 다른 길을 간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어떻게 새겨들어야 하는 것인지 잠시 아연한 심정으로 앉아 있었다. 문제는 결단이다. 그리고 실천이다. 몸이 가는 곳으로 마음을 이끌거나 그 반대로, 마음이 원하는 길로 몸을 움직여 가는 것이 가장 어울리는 일이다. 어느 몸과 마음 어느 한 편의 길로 자신을 이끌고, 그것이 진실인가, 진실이었는가, 진실일 수 있는가 하는 철학은 다음 단계에 와도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구나” 하는 한탄은 몸과 마음을 둘로 갈라 보게 할 염려가 있다. 몸과 마음이 그렇게 판연히 갈라지는 것이 아닌데도 그렇게 말하고 나면 몸이 하는 일을 마음의 탓으로 돌리거나 그 반대로 마음이 움직이는 방향을 몸의 탓으로 돌릴 수 있게 된다.
문학에는 몸과 마음이 따로 없다. 글쓰는 일은 더욱 그러하다. 글을 읽는 일과는 달리 글을 쓰는 데는 몸이 움직여야 한다. 우선 책상에 앉아야 하고 - 물론 배를 깔고 엎드려 쓸 수도 있을 것이지만 -, 손을 움직여 종이 위에 혹은 타자기나 컴퓨터를 자판을 두드리는 노동을 거쳐야 한 편의 글이 나온다. 그리고 전문적으로 글을 쓰자면 그러한 노동이 몸에 배야 하고, 소설 같은 경우는 장시간의 노동을 견딜 만한 체력이 있어야 한다. 글은 몸으로 쓴다는 것은 그러한 뜻이다.
옛 사람들은 속에 있는 것은 마음으로 겉에 드러나게 되어 있다고 믿었다. “마음에 있는 것은 몸으로 나타나게 마련이다.” 원문은 誠於中이면 形於外라고 되어 있다. 대학 에 나오는 말인데 小人이 한가하게 지내면 못된 짓을 한다는 이야기 끝에 나오는 말이라서 믿음성이 덜 가기는 하지만, 마음에 있는 것은 겉으로 드러나게 마련이라는 믿음을 확인하는 데는 하자가 없다. 그러나 몸이 움직이지 않으면 마음에 그 모양이 잡히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몸의 철학’에서는 몸과 마음 혹은 정신을 다른 세계의 것으로 구분하지 않는다. 문학 특히 창작은 그런 것이다. 손으로 쓸 수 있을 때라야 마음의 아름다움도 정신의 고귀함도 나타나게 마련인 것이다.
정신제일주의, 정신주의라고 할 수 있는 태도는 권위로 나타난다. 오직 하나의 진리가 있어 그 하나의 진리로 세계를 설명할 수 있고, 그러한 해석을 따라 세계를 운영할 수 있으며 삶의 모든 목표를 한 군데로 집약할 수 있다고 본다. 심지어는 역사는 이성의 전개를 뜻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한 정신주의는 권위를 바탕으로 삶의 통합성을 상실한다. 남과 나의 소통이 불가능해진다. 절대정신은 남을 인정하지 않는 사고이기 때문이다. 리오타르는 <포스트모던의 조건>(1979)에서 탈근대적 지식의 특성은 권위의 도구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면서 몸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는 몸을 통해서만 보여질 수 있다. 그러나 정신은 오직 몸과 연결되어 있을 뿐, 다른 사람의 정신이나 몸과 직접 연결될 수 없다. 우리의 몸은 다른 사람의 몸과 함께 세계 내에 거주할 때 비로소 정신은 하나의 연결체 relatum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정화열, ꡔ몸의 정치ꡕ, 민음사;22-23)
몸을 통한 남과의 연결에서 현대의 윤리를 추구하는데, 순수 이성을 벗어나 신체를 중심으로 하는, 탈근대적 지식은 통약불가능한 것을 인내하게 하는 힘을 기르고, 차이에 대한 감수성을 세련되게 하는 것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그렇기 때문에 탈근대적 지식은 전문가의 동종론homology이 아니라 발명가의 배리론paralogy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창조적 반역을 떠올릴 수 있다. 부단히 만들어 가는 세계, 혼돈 속에서 질서를 찾아가는 세계,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게 모색하는 상상력 등이 문학의 일이고, 그러한 세계를 만들어 나가는 것은 진리에 현실을 조회하여 그 동일성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가능성을 현실화하는 신체의 구체적 작업을 요하는 것이다.
문학은 몸으로 하는 것이다. 글을 쓴다든지 글을 짓는다든지 하는 말은 ‘글을 한다’는 동사적 속성을 지닌 것이다. 몸 이야기, 신체 이야기를 길게 하는 이유는 마음에 소원하는 바이나 몸이 안 따라 준다든지 하는 이유대기를 이제는 포기할 시점에 와 있기 때문이다. 이제 훌훌 털고 敢然히 일어나 행동으로 하는 문학에 나서야 한다.
마음에 있으면 책상 앞에 앉으시기를 바란다. 그리고 백지를 앞에 펼쳐 놓으시라. 백지의 그 텅 빈 공간이 공포로 다가온다면, 줄이 정갈하게 쳐 있는 노트를 펼치거나 깨끗하게 정리된 원고지를 준비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요즈음 글쓰기의 장치에 익숙한 이들이라면 우선 이 책을 집어던지고, 혹은 책을 들고 컴퓨터를 키고 손(몸의 한 부분이면서 몸이 글로 나타나는 전체를 담당하는 그 손)을 움직여 곧장 글을 쓰기 시작하기 바란다.
“글은 몸이다.”라는 은유를 화두로 던지고, “문학은 신체와 정신의 대화이다.”라는 보다 큰 명제로 나아기기로 하자.
Ⅱ. 술; 불타는 물의 신비
문학을 이야기하는 자리에 엉뚱하게 혹은 생뚱맞게 무슨 술 이야기를 하는가 할지 모른다. 먼저 이야기하자면 앞에서 던져 놓은 화두 “글은 몸이다.”하는 것은 모순되면서도 이해가 가는 이야기다. 이를 바꾸어서 “술은 불타는 물이다.” 이렇게 이야기했을 때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같은 수사적 원리이기 때문이다.
술에 대한 다른 이름은 망우물(忘憂物)이니 미록(美祿)이니 하는 것을 비롯하여 배중물(盃中物)이라는 것도 있고, 화의 근원이라고 하여 화천(禍泉)이라는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기 짝이없다. 술의 속성 자체가 다양함에 그 원인이 있을 것이다. 서양의 경우도 술을 지혜의 샘으로 보는가 하면 악마의 피라고 폄하하기도 한다. 지혜와 악마를 동시에 떠올리게 하는 것이 술이다. 술에 대한 여러 가지 이칭(異稱) 가운데 조시구( 釣詩鉤)라는 것이 있다. 소식(蘇軾)의 기주시(飢酒詩)에 나오는 구절인데, 술은 시를 낚아 올리는 낚시바늘이라는 것이다. 소동파가 ‘동정춘’이라는 명주를 말실 기회가 생겼던 모양이다. 지난 해에 마셨던 동정춘의 향내가 아직도 손에서 난다면서, 금년의 동정춘은 옥빛처럼 술이 아닌 것만 같다, 병 속의 향기는 방에 가득하고 술잔의 빛은 창문에 비친다고 하면서 그 술에 대해 좋은 이름을 붙이고 싶을 뿐 술의 양은 묻고 싶지 않다고 한다. 좋은 이름으로 떠올리는 것이 “시를 낚는 갈고리”와 “시름을 쓸어 버리는 비”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술을 잔에 넘치게 부어 달라는 내용이다. 우리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술을 시를 낚는 낚시바늘로 이름붙이고 있다는 점이다. 술이 시흥을 불어온다는 이야기는 사실 덤덤하기도 하다. 술이 시를 낚는 갈고리라는 표현이나 시름을 쓸어 버리는 비라는 것도 비교적 단순한 표현이다. 그런데 사고는 현란한 바 있다. 술은 갈고리이다. 그 갈고리에 시라는 물건이 걸려 올라온다. 낚시바늘 같은 갈고리에 걸려 오는 것이라면 그것은 필시 펄펄 살아 뛰는 물고기일 것이다. 그렇다면 술은 갈고리가 되고, 그 갈고리에 생선이 물려 올라온다는 뜻이 된다. 그렇게 되면 다시 술은 시로 자리바꿈을 한다. 여기 은유의 비밀 한 가닥이 들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시를 건져 올리기 위해 술을 마신다면, 그 낚시는 시 대신 당신의 불건강을 낚아올릴지도 모른다.
문제는 남이 어떻게 하였는가 하는 설명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렇게 한가한 사람들이 못된다. 그렇다고 서두를 일만은 아니지만, 내 몸을 움직여 내가 글을 써야 하는 것이 이 과정의 本務인 것이다. 여러분이 스스로 은유를 구사할 줄 아는 사람, 은유적 발상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되지 않겠는가.
술 이야기를 꺼낸 것은 술의 속성을 통해 은유를 이해하고 은유를 술 빚듯이 만들어 보자는 뜻이다. 그리하여 “불타는 물의 신비”를 아느냐고 묻고 싶은 것이다. 물의 형상을 하고 있는데 불탈 수 있는 것은 사실 기름이 술보다 먼젓길이다. 그런데 기름이 불이 탄다는 것은, 그래서 그 안에 불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너무 냉냉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술은 성질이 좀 다르다.
술은 사람과 관련되는 물건이다. 술이 아니라 알콜로 본다면 그것도 열료(熱料)나 연료(燃料)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밖에서 탄다는 점에서 기름과 다를 것이 없다. 물의 형태로 마시지만 몸 안에 들어가 작용을 하면 열이 난다. 기름은 서서히 영양으로 화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열량을 불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술은 단번에 열이 올라 번열(煩熱)을 앓게 된다. 그리고 술은 사람의 성정을 완전히 바꿔 놓기도 한다. 인간을 악마로 전환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사람과 천지가 하나가 되는 체험을 가능하게 하기도 한다. 이백의 시 가운데 월하독작(月下獨酌)이란 것이 있다.
花間一壺酒 獨酌無相親
擧盃邀明月 對影成三人
月旣不解飮 影徒隨我身
暫伴月將影 行樂須及春
我歌月徘徊 我舞影凌亂
醒時同交歡 醉後各分散
永結無情遊 相期邈雲漢
이 시를 이원섭 선생은 이렇게 옮겼다.
꽃 사이에 앉아/ 혼자 마시자니
달이 찾아와 /그림자까지 셋이 됐다.
달도 그림자도/ 술이야 못 마셔도
그들과 더불어/ 이 봄밤 즐기리
내가 노래하면/ 달도 하늘에 서성거리고
내가 춤추면/ 그림자 춘다.
이리 함께 놀다가/ 취하면 서로 헤어진다.
담담한 우리의 우정!/ 다음에는 은하수 저쪽에서 만날까.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我歌月徘徊, 我舞影凌亂,”라는 구절이다. 내가 노래하면 달도 하늘에 서성거리고 내가 춤추면 그림자도 춤춘다는 말은 예사롭지가 않다. 사람이 춤을 추면 그림자도 따라 흔들릴 것이기 때문에 그림자가 춤춘다는 것은 사실의 표현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노래를 하면 하늘의 달도 서성거린다는 것은 참으로 희한한 체험이라 아니할 수 없다. 하늘의 달과 내가 하나가 되지 않으면 그러한 인식은 불가능하다. 인간이 우주적 존재로 존재의 전환을 하는 체험은 이렇게 은유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러한 인식의 구조는 단순한 동일시만으로 되지 않는다.
은유는 존재의 변환을 시도하는 인간의 능력이다. 아주 쉽게 생각하면 사물을 명명하는 데서부터 은유는 시작된다. 들머리, 산허리, 책상다리, 노루발 등 일상에서 사용하는 말 가운데 은유를 이용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이성중심주의를 지향하는 이들은 은유가 진리를 은폐한다고 질타한다. 그러나 언어가 그렇게 명징하고(물이 맑다는 이 말 또한 비유가 아닌가, 明澄) 정확하게 의미를 드러낼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은 오래 전부터 제기되어 왔다. 2500년 전 중국의 老子라는 어른은 이미 “道可道면 非常道요 名可名이면 非常名”이라는 명제를 던져 놓고 있지 않은가? 언어가 도단에 이르렀을 때, 그리하여 心心相印이니 염화시중의 미소니, 敎外別傳이니 하는 말이 나왔고, 不立文字의 경지를 운위하게 되었던 것이 저간의 사정이다. 언어라는 것이 본래 그런 속성을 지니고 있다면, 애매성 자체를 언어의 특장으로 인정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는 이미 영국의 비평가이며 의미론을 학문으로 수립한 리차즈가 설파한 바이기도 하다. 언어의 읨가 정확성을 본질로 하기보다는 애매성을 본질로 하되, 소통을 지향하는 것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할 때라야 은유의 본질적 능력이 확연하게 드러날 수 있게 된다. 사물을 자로 재고, 근으로 달고, 되로 됨질하는 데서는 언어의 삭막한 논리만이 제시될 따름이다.
술을 마심에 있어 시간을 정하고 마시는 술, 양을 정하고 마시는 술, 돈을 계산하며 마시는 술은 술자리다운 술이 되지 못한다. 넘치는 듯 과하지 않게 마시는 경지가 아마도 주선들의 술자리가 아닌가 싶다. 언어를 다룸에 있어서도 기본 의미와 문법을 지키면서 그 문법을 뛰어넘어(어기는 것이나 범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적 가능성을 최대치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 문학을 하는 이들이 할 의무요 도리라고 생각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물의 양면적 속성을 이해하고, 다면적 연계를 찾아내는 형안이 필요하다. 그러할 때라야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보다”하는 이육사의 황금의 은유는 상상공간에 실현하는 것이다. 이는 그저 주어지는 능력이 아니라 스스로 계발하고 추구하는 결과로 얻을 수 있는 능력이다.
Ⅲ. 이상한 나라의 글쟁이들
시인의 공화국은 이상한 글쟁이들이 모인 곳이다. 소설가의 나라도 이상하기로는 시인의 공화국에 못지 않다. 먼지 낀 일상인의 눈으로 본다면 상상력이니 허구의 세계니 하는 것은 실로 이상한 일들로 가득한 나라에 틀림없다. 시인은 영통술(靈通術)을 익힌 사람들이라고도 하고, 또는 접신술사(接神術師)라고도 부른다. 이렇게 말하는 데는 비아냥거리는 감이 없지 않지만, 사물의 본질을 간파하는 데는 정신만 가지고도 안 되고 논리적 언어만으로도 충분치 않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러한 말의 진의를 짐작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서양의 시인들이 시와 음악을 관장하는 뮤즈라는 신에 들려[憑依] 신의 언어를 말로 옮겼다는 것이나 사물의 영을 이승에 옮긴다는 영통술이나 발상에서는 차이가 별로 없다. 다만 둘 다 진실을 보아내는 눈이 갖추어져 있다는 점은 동질적이다. 그러한 점에서 시인이 은유를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을 천재의 징표로 인식한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자신이 천재임을 암시한다.
인간의 능력 가운데 가장 위대한 것은 은유를 잘 구사하는 일이다. 이 능력만은 남에게서 배울 수 없다. 이 능력이야말로 천재의 표징이다. 왜냐하면 훌륭한 은유를 만들어 내는 것은 서로 이질적인 것들에서 직관적으로 유사성을 찾아내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김욱동, ꡔ은유와 환유ꡕ, 민음사, 1999; 22)
일상적인 언어 생활 속에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은유를 구사한다. 그렇다고 우리가 모두 천재라는 것은 말이 되질 않는다. 사실 일상어라는 것은 남들이 쓰고 써서 이제는 멀미가 날 지경의 말들이다. 멀미라는 것이 무엇인가. 차가 혹은 배가 이렇게 흔들리겠지 하면서 앉아 있으면 그렇게 흔들려 구역질이 나는 현상이다. 이런 상황에서 저 사람이 이렇게 얘기하겠지 하는 판에 꼭 그런 말로 그런 이야기를 할 때, 우리는 ‘말멀미’를 느낀다. 일상어는 우리가 아는 것만을 전달한 뿐이다. 그렇다고 말이 너무 낯설면 우리는 당혹하게 된다. 같음과 다름을 아울러 표현하는 은유를 통해서 우리는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얻게 된다. 이러한 점을 김욱동은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원관념과 매개관념 사이에는 어떤 거리감이 있다는 것은 은유의 한 특징이다. 원관념과 매개관념의 유사성은 괴리감을 수반하여야 한다. 이 둘은 서로 다른 사고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김욱동;123)
그 동안 은유를 논하는 이들이나 은유를 이해함에 있어, 유상성에 지나치게 몰두한 경향이 있다. 유사성에 매달릴 때, <리리 리자로 끝나는 말은>, 개나리, 보따리, 댑싸리, 소쿠리, 유리, 항아리 하는 식으로 나가거나, 아이들이 고무줄놀이를 하면서, 원숭이 똥구멍은 빨가, 빨가면 사과, 사고는 맛있어, 하는 식으로 연결해 나가는 말놀이에 그치고 말 공산이 크다. 그러한 말놀이가 문학의 본질국면을 이룬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수준, 그 형태에 머물러서는 시를, 소설을 창작한다는 일은 무망하다. 사물의 다면성은 그렇게 간단히 찾아지지 않는다.
은유를 이용한 글쓰기의 예를 멀리 외돌아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서 찾을 필요는 없을 듯하다. <춘향전>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어사또가 변학도의 생일잔치 자리에서 한 상 얻어먹고 시짓기를 하는 대목이다.
담담상 물린 후에 어사또 출두하자, 차비를 차리는데, 본관은 춘치자명, 손수 재촉 더 우스워, 좌상을 돌아보며, “우리 오늘 이 모임이, 승지 명루 서로 만나, 승우여운, 고붕만좌, 십순가는 못 얻어도, 반일한은 되었으니, 一觴一詠 좋은 자미, 음영 하나 하옵시다.,” 만좌가 좋다 하니, 본관이 당주지에 운자를 써 놓는데, 어사또 짓기 좋게, 비위를 똑 맞추어 기름 고자 높을 고자. 기생이 주지 들고 좌차로 돌려 뵐 제, 운봉 영장 앞에 오니, 어사또가 손을 내밀어, 주지축을 쑥 뺏으며, 운봉더러 하는 말이, “필묵을 청합시다” 운봉이 통인 시켜, 필연을 갖다 놓으니 어사또가 인사 차려 안 일을 한 번 짜아, “이러한 장한 좌상, 청치 않은 손님으로, 풍월축에 먼저 쓰기, 체면은 어떠하되, 과객 글은 개좆 같아, 앉으면 곧 나오니 어찌 알지 마시오.” 운봉이 대답하되 “당인 불양어사, 무슨 허물 있으리까. 겸사 말고 어서 쓰오.”
어사또 칠언절구 일필휘지 썩 쓴 후에 ‘호남과객 근고’라, 만좌가 돌려가며, 풍월축을 서로 보고 하나도 말이 없어 면면상고하는 낯빛, 주기는 간데 없고, 모두다 외꽃이라. 본관은 호리건곤 겁이 없이 읽어 보아, 금준미주는 천인혈이요, 옥반가효는 만성고라. 촉루락시 민루락이요, 가성고처 원성고라(金樽美酒千人血 玉盤佳肴萬姓膏 燭漏落時民漏落 歌聲高處怨聲高). 읽으면서도 속 모르고 죄를 버썩 더 지어 “내가 저를 박대한가, 제가 나를 건드리제. 나이 아직 젊은 것이 말본을 잘못해도 신세가 낮을 것을 문자상에 이러하고 생전에 빌어먹제” (강한영 교주, ꡔ신재효판소리 사설집ꡕ에서)
이 글은 당시에 글쓰기가 어떤 풍속으로 수행되었는가를 알 수 있는 자료가 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글을 통해 실제적인 일을 수행하는 방법을 일러주기도 한다. 그런데 은유를 이야기하는 자리이니 은유라는 관점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우선 운자(韻字)를 낸다는 것은 시의 형식에 얼마나 익숙한가를 보고자 하는 일종의 시험이다. 이러한 시험에 통과하지 못하는 자는 시를 짓는다고 할 수 없는 자이다. 그런 사람은 당대 사회의 문화에서 뒤쳐진 사람이다.
운자를 내는 데는 이중의 주문이 들어 있다. 하나는 시의 형식으로 일정한 자리에 두 글자를 넣으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膏와 高의 동일성과 차이점을 함께 발견하라는 것이다. 즉 서로 상관이 없는 글자를 말이 되게 만들어 보라는 것이다. 이는 방정식 풀기와 흡사하다. 자리를 잡아 글자를 앉혀야 하는 과제, 그리고 별로 관계가 없는 듯한 글자 사이에 의미를 발견하여 하나의 글(방정식)을 만들라는 것, 어사또가 지은 시에는 다음과 같은 등식이 복합되어 있다.
美酒 = 人血/ 佳肴 = 人(萬姓)膏 / 燭漏 = 民漏 / 歌聲 = 怨聲
짧은 형식의 시에서 이렇게 치밀한 등치 혹은 의미의 동질성을 발견하는 것은 천재에 해당하는 능력이다. 이러한 능력에 대한 사또의 대응 방식은 시의 수준에 비하면 한결 낮은 수준의 것이다. 호리건곤(壺裏乾坤), 고주망태가 된 사또가 하는 말은 이렇게 근엄한 것이다. “내가 저를 박대한가, 제가 나를 건드리제. 나이 아직 젊은 것이 말본을 잘못해도 신세가 낮을 것을 문자상에 이러하고 생전에 빌어먹제” 본관사또의 반응은 시의 맥락을 벗어난다. 이렇게 벗어나는 맥락 속에서 사또의 말은 다시 하나의 은유로 작용한다. 사또를 나무라는 시를 쓴 것은 평생 빌어먹을 장본이라는 것, 기실 그것은 “속 모르고 죄를 버썩 더 지어” 놓은 것이 된다. 그 말이 곧 자신을 향한 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글을 잘못 읽은 자신의 사례를 남에게 들러씌움으로써 자신에게 그 죄과가 돌아오는 부메랑효과를 독자는 안다. 자신의 이야기를 남의 이야기로 등치하고 있는 것이다. 이 또한 사고 차원의 은유적 발상이다.
이상한 나라의 글쟁이들은 그게 누구의 말인지도 모른 채 말을 희롱한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그러한 말놀이 사이에 진리가 피어난다는 것은 기막힌 아이러니이다. 그런데 영통술이 남을 불러다가 이야기를 시키는 재주라면 그러한 예를 미당 서정주보다 잘 수행한 시인이 달리 없을 듯하다. <춘향유문>, <사소 두번째의 편지 단편>, <선덕여왕의 말씀> 같은 시들은 접신술의 기막힌 예이다. 남의 마음을 읽는다는 것, 남이 지핀 내가 남의 말을 한다는 것은 천기를 누설하는 불길함이 서려 있기도 하다. 다음은 <선덕여와의 말씀>이라는 시이다.
朕의 무덤은 푸른 嶺 위의 欲界 第二天
피 예 있으니, 피 예 있으니, 어쩔 수 없이
구름 엉기고, 비 터잡는데- 그런 하늘 속.
피 예 있으니, 피 예 있으니,
너무들 인색치 말고
있는 사람은 病弱者한테 柴糧도 더러 노느고
홀어미 홀아비들도 더러 찾아 위로코,
瞻星臺 위엔 瞻星臺 위엔 그중 실한 사내를 와라.
살[肉體]의 일로써 살의 일로써 미친 사내에게는
살 닿는 것 그중 빛나는 黃金 팔찌를 그 가슴 위에,
그래도 그 어지러운 불이 다 스러지지 않거든
다스리는 노래는 바다 넘어서 하늘 끝까지.
하지만 사랑이거든
그것이 참말로 사랑이거든
서라벌 千年의 知慧가 가꾼 國法보다도 國法의 불보다도
늘 항상 더 타고 있거라
朕의 무덤은 푸른 영 위의 欲界 第二千
피 예 있으니, 피 예 있으니, 어쩔 수 없이
구름 엉기고, 비터잡는 데 - 그런 하늘 속.
내 못 떠난다.
이시를 쓴 사람은 물론 서정주라는 시인이다. 그러나 서정 주 자신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선덕여왕이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무덤이 하늘이라든지, 피가 여기 있다든지, 팔찌, 불, 노래 등이 은유의 보조관념이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러나 여기서 더욱 중요한 것은 시인이 “나는 선덕여왕이다.”하고 선언함으로써 상위 차원에서 은유가 성립한다는 점이다. 소설도 마찬가지이지만 시에서도 내가 남이 되어 이야기를 함으로써 거대 차원의 은유가 성립한다는 점은 문학의 상상력이 미치는 자장이 어디인가를 알 수 있게 한다.
나무야 하고 한번 불러 놓고 너는 어떻다고 속성을 부여해 보라. 나무가 살아서 내게 다가오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그렇게 존재와 존재가 섞이는 경험이 은유를 빚어내는 원동력이다. 우리는 그러한 능력을 기르기 위해 나선 사람들이다. 그것이 시가 되어도 상관이 없고 동화가 되어도 아니면 소설이 되어도 아무 상관이 없다. 이는 성인들이 일찍이 다 한 일들이다. “인생은 고해”라고 한 석가모니의 말씀은 은유의 적실한 예 가운데 하나이다. ‘화택’이라든지 ‘천국’, ‘지옥’ 그런 말들로 유토피아(없는 땅, 나라)와 디스토피아를 부르는 일 자체가 은유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닌가. 이승에서 선업과 적덕을 해야 ‘극락’에 간다는 이야기는 은유적 발상의 예가 되거니와 이상한 나라의 글쟁이들이 하는 일과 다를 것이 별로 없다.
Ⅳ. 천상과 지옥을 넘나들기 위한 격률
은유는 천국과 지옥을 꿈꾸는 힘이다. 현실에 없는 사물을 불러내어 있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행동하게 하고, 그 속에서 의미를 읽어내는 행동이 곧 글쓰기이고 문학을 하는 것이다. 그러한 세계를 이해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그렇게 움직인 마음을 글로 표현하는 행동으로 옮기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작업이다. 글을 쓰는 데는 은유를 이해하는 것보다는 은유적으로 생각하고 은유를 만들어내는 일이 한결 중요하다. 그리고 전체 구조 속에 은유를 포함해 넣는 일이 구조를 형성하는 일이고 문학의 형성력이 실현되는 방식이다. 은유를 만들어 내는 데 필요한 격률 몇 가지를 제안하고자 한다. 일상 가운데 예를 찾아 설명하려고 하는데, 잘 쓰여진 시에서 예를 찾아보는 점잖은 작업은 앞으로 작가가 되려는 여러분 자신이 직접 해 보시길 바란다.
격률1, 당신이 대하는 사물을 색다른 방법으로 명명하라. 命名한다는 것은 신의 능력이다. 혹은 신이 인간에게 가장 먼저 능력을 시험하기 위해 과한 과제이다. 세계를 창조하고 인간을 창조한 신은 인간의 능력을 재보기 위해 아담에게 밖에 나가 돌아보고 본 것들을 이름지으라는 시험을 한다. 거기 통과한 아담은 세계를 언어로 규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는 유행가에서도 그러한 예를 얼마든지 볼 수 있다. 인생을 노래한 유행가치고 인생을 새로운 방식으로, 혹은 자기 나름으로 명명하지 않은 경우가 없다. 처음 최희준이 불렀고 나중에 이승환이 편곡하여 부른 하숙생이라는 노래는 거창하게 인생을 규정하는 데서 시작한다. “인생은 나그네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는 나그네 하는 행동을 따라 노래는 흘러간다. (노래가 흘러간다는 것도 비유이다.) [인생 = 나그네 = 나그네는 길을 간다 = 그 길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모르는 길이다 = 구름이 흘러가듯이 나그네는 길을 간다 = 정처가 없다] 이런 식으로 비유는 이어진다. 그런데 그 노래 가운데 하숙집이라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그러니까 인생을 달리 이름붙인 내용이 하숙생의 속성이 된다. 근본적으로 인생은 하숙생이라는 것이다. '천지는 만물의 역여'라고 하는 입장에서 보면 인생이 나그네길이라는 것이 그리 신통할 것은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름붙이기를 해 봄으로써 은유를 통해 글을 쓸 수 있다는 점에서 이는 매우 중요한 사항이다. “인생은 미완성, 쓰다 만 편지”라는 구절도 같은 발상이다. “사랑은 타 버린 불꽃, 사랑은 한 줄기 바람인 것을” 하는 구절은 유심초의 노래 가운데 빛나는 은유이다.
격률2, 대상을 속성이 다른 말로 형용하라. 그러면 대상의 다른 속성이 보일 것이다. 시를 쓰는 사람들은 흔히 봄을 노래하고 싶어한다. 시인이 아니라도 그 음울한 겨울이 지니고 봄이 돌아오면 핏줄로 맑은 피가 돌기 시작하는 것을 느낄 것이다. 이상화의 말대로 봄신명이 지핀다. 그러나 봄의 찬란한 햇살 저쪽에는 이별과 상실이 공존할 수 있다. 그럴 때, 우리는 봄에서 슬픔을 느끼기도 한다. 그런 감각에서 봄은 찬란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 김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 에 나오는 “찬란한 슬픔의 봄”이라는 구절은 그러한 예에 해당한다.
“창백한 슬픔”이라든지 “사랑의 빛깔” “텅 빈 충만” 같은 데서 볼 수 있는 발상은 대상을 다른 속성을 지닌 말로 속성을 부여하는 데서 가능한 것들이다. 이들 낱낱의 발상이 그대로 시가 된다든지 수필을 쓰는 데 이용할 수 있는 실탄과 같은 효용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렇게 말해 보고, 그렇게 생각해 봄으로서 사물의 다른 속성을 발견할 수 있다. 문학은 이러한 발견의 기쁨에 줄을 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발견의 눈은 곧 문학을 할 수 있는 능력이 된다.
격률3. 대상을 다른 존재로 탈바꿈하라. 탈바꿈한 존재가 움직이도록 행동을 촉구하라. “나는 네가 좋아서 순한 양이 되었지.” 나는 한 마리의 양이 되었다. 존재가 전환된 그 이유는 내가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네가 좋아서 순한 양이 되었으면 그 양이 뛰어 놀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 것이다. 그러니까 “풀밭 같은 너의 가슴에 내 마음은 뛰어 놓았지.” 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의 존재를 다른 존재로 전환하자면 그 존재가 거하고 있는 세계 자체를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한 마리 거대한 새가 되는 꿈을 구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 새가 날기 위해서는 구만 리 長空이 펼쳐져야 한다. 인간이 상상으로 만들어 낸 새 가운데 가장 거창한 새는 아마 장자가 상상한 鵬새보다더 거창한 새가 없을 듯하다. 남미의 전설에 전해오는 콘도르나, 불경에 나오는 金翅鳥 정도 가지고는 장자의 붕새를 넘볼 수 없다. 붕새가 남방을 향해 날아가면 물결치는 수면이 3천리이고 올라가는 높이는 9만리, 6개월을 쉼없이 날아간다는 것이다. 그런 새를 위해서는 그런 환경이 필요한 것처럼 존재를 바꾼 존재는 거기 어울리는 환경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내 마음은 조약돌”이라고 변형해 놓으면 조약돌에 맞는 환경을 부여해 주어야 한다. 비바람에 시달려도 둥글게 살아가자면 그러한 환경을 만들어 주어야 하는 것이다. 이는 쉽게 말하자면 내가 한 마리 짐승으로 변했을 때 나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문제와 상통한다.
격률4. 남의 이야기를 해 주어라. 이야기를 하지 못해 답답한 사람의 속을 풀어 주는 것만큼 큰 積德이 달리 있을 것 같지 않다. 사람이 남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만큼 높은 인간성이다. 시 속에서, 시를 쓰면서는 내가 어떤 인간이 되어도 상관이 없다. 비유로 말을 할 경우 나는 그 말의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 남의 이야기를 한다면 대체로 소설이나 극처럼 대서사를 생각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학이 남의 이야기 나의 이야기 경계를 무너뜨리기로 작심하고 나서는 작업인데 유독 남의 이야기라고 해서 거기 내가 개입하지 말라는 법도 없는 것이다.
복효근의 시에 이런 것이 있다. <강이 나더러-섬진강에서7>이라는 제목이 달려 있는데 강을 불러들여 이야기를, 행동을 시키고 있다.
새벽이면
강이 내 곁으로 와
드러누웠다.
피도 살도 벗어두고
강은 나에게
흐르자 한다.
가장 낮게 엎드려
제 몫의 갈증만큼
깊어지자 한다.
비워야 채워지는 눈물샘 비워
자갈밭으로 모래벌로
흘러 스미자 한다.
시든 풀뿌리
잠든 네 사랑
그렇게 적시자 한다.
이런 시를 두고 의인법이 사용되었다고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인간의 육신을 가지고 사는 한 인간은 인간 자신을 떠나 세계를 바라볼 수 없다. 세계를 바라보되 자신과 가장 닮은 방식으로 바라보는 것이 의인법이다. 아예 대상을 대상으로 놔두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 바꾸어 놓고 바라보는 것이 의인법이다. 이태백은 <春夜宴桃李園序>에서 의인법을 이렇게 변형하여 쓰고 있다. 그 일부를 옮긴다.
夫天地者萬物之逆旅. 光陰者百代之過客. 而浮生若夢. 爲歡幾何. 故人秉燭夜遊. 良有以也. 況陽春召我以煙景. 大塊假我以文章.
이 문장의 뜻은 대강 이렇다. “대저 천지는 만물의 역려, 광음은 백대의 과객이다. 그리하여 부생은 꿈과 같으니, 기쁨이란 그 얼마쯤이나 되는 것인가. 고인이 촛불을 잡아 밤놀이를 한 것은 참으로 까닭이 있는 일이다. 하물며 양춘에 연경으로써 나를 부르고, 천지는 나에게 문장을 빌려주었음에랴.” 이 가운데 천지가 만물의 여관이라는 것과 광음이 백대에 한 번 지나가는 손님이라는 뜻의 은유는 많은 사람들이 인용하여 이제는 죽은 은유가 될 정도로 널리 알려진 것이다. 그렇다고 이를 두고 무어라고 탓할 사람은 없다. 문제는 비유의 수사적 유형이 무엇인가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비유를 이용하여 어떤 글을 쓰는가 하는 데 있는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은, 격률을 실천하는 플랜을 만들고 실천하기를 권면한다. 여기서 그 플랜을 제시할 수 없는 것은 여러분은 각기 체질이 다르고 생활의 궤도가 같지 않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제안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비유적 상상력을 위해서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접신술로 끓어오르는 용광로”로 스스로를 단련해야 한다. 그것을 치열한 삶이라고 할 수도 있고, 철저한 삶이라고도 할 수 있다. 삶과 글쓰기를 하나로 일치시키는 것, 그러한 행복의 가능성을 점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글쓰는 일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