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종 대왕(英宗大王) 원년(元年 1725년 을사 ○ 선생 77세)
○ 8월 경인(25일), 대행 소상(小祥)에 부에 나아가서 망곡(望哭)하였다.
○ 9월에 종묘(宗廟)에 이안(移安)하는 데 대하여 수의(收義)하였는데, 사양하고 대답하지 아니하였다. 종묘에 이안(移安)할 때에 일실(一室)의 신주를 한 수레에 같이 모시느냐 2차로 나누어 이안하느냐의 여부를 가지고 예조 좌랑(禮曹佐郞)이 찾아와서 의론(議論)을 거두었었다.
○ 10월 을유(21일)에 사현사(四賢祠)에 대하여 의론을 수렴하였는데 사양하고 답변하지 아니하였다. 사현사를 합향(合享 같이 배향하는 것)의 여부를 가지고 예조 좌랑이 의논을 거두었다.
2년병오 ○ 선생 78세
○ 7월에 지평(持平) 이정박(李廷樸)이 계(啓)를 올려 선생을 헐뜯었다.기유(19일)에 이정박이 계(啓)하기를, “정모(鄭某)의 학문은 신건(新建 왕양명의 학문을 말함)의 학문을 주장하므로 빈사(賓師)로서의 위치를 가지고 대우할 수 없사오니, 청컨대, 유일(遺逸)을 깎아 없애소서.” 하매, 상께서 답하기를, “유현(儒賢)을 무고하며 헐뜯으니 세상의 도(道)가 분통스럽도다.” 하시었다. 또한 이르기를, “동강(桐江)의 뜻과 세상을 건지는 덕을 장차 시행할 데가 없게 되었구나.” 하였다.
정박은 이에 따라서 몸을 피하여 물러가서 죄를 기다렸으며 여러 문인(門人)들은 기어이 조정에 진술하여 변무하려고 하였는데, 선생은 천천히 이르기를, “내버려 두어라. 비교하여 분변하는 것이 수고스럽지가 않으냐. 또한 선비들의 상소(上疏)가 분운(紛紜)한 것은 성세(盛世)의 일이 아니며 역시 조용히 지키는[靜守] 도리(道理)도 아닌 것이다.”라고 하시었고, 두세 번이나 청했으나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문인(門人) 윤순(尹淳)은 이를 듣고 이르기를, “선생의 덕은 무아(無我)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8월에 이정박이 벼슬에서 물러나갔으므로 계를 멈추었다. 선생은 성품이 너그러워서 남을 깎지 않았으며 남의 과실(過失)을 말하지 아니하였고 옛사람에게 대하여도 역시 그렇게 하였다. 비록 아언(雅言)과 시례(詩禮)일지라도 정자(程子)와 주자(朱子)를 돈독하게 받들었으며 그것은 제가(諸家)의 설(說)에 있어서도 나쁜 것은 버리고 좋은 것을 썼을 뿐이며 어느 것에도 항상 애증(愛憎)으로 부억(扶抑 부축하고 억제함)하지 아니하였다.
세상에서 양명(陽明)을 배척하는 자는 그의 설(說)을 모두 알아보지도 못하고서 졸지에 이단(異端)이라고만 그를 지목함으로써 이를 금지하여 말도 못하게 하였으나 선생의 뜻은 자못 그렇지가 않았으니 이르기를, “저들도 공자(孔子)를 배운 자들이 아니겠는가? 진실로 취할 수 있으면 취할 것이고 취할 수 없으면 취하지 않을 것이니, 그것은 오직 나의 권도(權度)에 있을 뿐인 것이다. 어찌 전말(顚末)을 묻지 않고 세상을 따라서 뇌동(雷同)할 것인가? 주자도육상산(陸象山)을 칭하기를 또한 좋은 곳은 스스로 감출 수가 없다 한 것은 대체로 이러한 뜻에서일 것이다. 세상에서는 혹 선생의 취지에 달하지 못하고 이를 변론함이 넓지 못한 때문에 이를 신건(新建)의 학문으로 돌리는 자는 이것 또한 망령된 인간일 뿐이니 어찌 족히 이것으로 선생을 가볍다 무겁다 할 것인가?” 하였다.
○ 8월 갑신(25일)에 대행 대상(大行大祥)에 부(府)에 나아가 망곡(望哭)하였다. 10월 을축(7일)의 담제(禫祭) 때에도 또한 같이 하였다.
3년정미 ○ 선생 79세
○ 7월 신미(17일)에 이조 참판에 배명되었는데 소를 올려 사양하였다. 소문은 문집에 보이며 상께서 사관 남위로(南渭老)를 보내어 비지를 내려 허락하지 아니하였으며, 8월 정유(14일)에 비로소 면부(勉副 의정(議政)의 해임을 허락함)하기를 허락하였다.
○ 8월에 가묘(家廟)를 가평(加平)으로 모시게 되어 배종(陪從)하여 경계(境界)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이때에 부평군(富平君)이 가평 군수(加平郡守)에 제수(除授)되었으므로 가묘(家廟)를 모시게 되니 선생이 모시고 나와 광성진(廣城津)에 이르렀다.
○ 병오(23일)에 세자시강원 찬선(世子侍講院贊善)에 천직(遷職)되어, 사관이 와서 소명을 내렸으나 소를 올려 사양하였다. 이때는 세자의 관례(冠禮)를 행하려고 하였으므로 이런 배명이 있었으며 사관을 보내어 별유(別諭)를 내리고 같이 오도록 하였는데 서계(書啓)를 부쳐서 아뢰었고, 또한 소를 올려 사양하였는데, 소는 없어졌다. 9월 신유(8일)에 사관에게 머물도록 명하였고, 비지를 내려서 대략 이르기를, “전번에 경이 무고(誣告)를 당한 것은 실로 내가 정성이 얕아서 그렇게 되었으니 다만 스스로 부끄러우며 다시 무어라 이르겠소. 바야흐로 별유(別諭)를 내려 경을 위로하고자 하였는데 경의 소가 먼저 이르러 겸손하고 사양함이 이와 같으니 더욱이 부끄러움을 더하게 하오. 슬프도다! 경이 무고를 당한 것은 이미 풀려서 남음이 없으니 경은 어찌 다시 혐의스러운 끝이 있겠소. 경은 선조(先朝)에서도 은혜를 입어 오늘날에 이르렀는데 원량(元良)이 삼가(三加)하는 때에 어찌 훌쩍 뜻을 돌려서 올 생각이 없는가? 경은 이 지극한 뜻을 받들고 마음을 편히 하여 사양하지 말고 곧 당일로 올라와 주오.”라고 하였다.
○ 10월 무자(6일)에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에 임명되었는데 소를 올려 사양하였다. 소는 문집에 보인다. 사관을 보내어 비지를 내려 허락하지 않았으며, 비지는 문집에 보인다. 11월 경진(庚辰)에 또 두 번째 소를 올렸는데 사양하였다. 상소문은 문집에 보인다. 사관을 보내어 비지를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다. 비지는 문집에 보인다.
○ 집의(集義 심경집의를 말함)》와 집록(集錄 경학집록을 말함)》 두 책을 수정(修正)하였다.
4년무신 ○ 선생 80세
○ 정월 기미(8일)에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승급(昇級)하였는데 소를 올려 사양하였다. 대신들이 아뢰어서 이 직(職)에 승진시켰는데 소를 올려 사양하였고, 또한 헌직(憲職)을 해직하기를 빌었다. 소는 문집에 보인다. 2월에 사관을 보내어 비지를 내리고 헌직(憲職)을 해직하도록 허락하였고 이어 선소(宣召)하였는데, 비지는 문집에 보인다.
○ 2월 갑신(3일)에 의정부 우참찬(議政府右參贊)에 임명되었으며 연달아 사관을 보내어 선소(宣召)하였으나 계속 소를 올려 사양하였다. 갑신에 상께서 사관을 보내어 별유를 내리고 선소(宣召)하였는데 소를 올려 사양하였다. 소는 문집에 보인다. 다시 사관을 보내어 비지를 내리고 허락하지 아니하였으며 비지는 문집에 보인다. 이어서 머물러서라도 함께 올라올 것을 명하였는데 3월 계축 3일에 두 번째로 소를 올려 사양하였으나 사관을 보내어 비지를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으며 비지는 문집에 보인다. 이어서 머물러서라도 같이 올라오라고 명하였다.
○ 3월에 호남(湖南)과 영남(嶺南)에서 역변(逆變)이 일어나자 분문(奔問)하러 서울에 들어왔는데, 계유(3일)에 다시 별유(別諭)를 내려 입대(入對)하라는 명을 받들고 대궐에 나갔다가 희정당(熙政堂)에서 사대(賜對)하였다. 상께서 이르기를, “일찍이 경을 불러 쓰지 않아서 오늘날의 변이 있게 되었으니 내 실로 부끄러울 뿐이오. 이러한 어렵고 걱정스러운 때를 당하여 어찌하면 민심을 가라앉힐 수 있겠는지, 경은 모름지기 마음에 간직한 바를 모두 말해 주오.” 하니, 선생은 대답하여 아뢰기를, “지금의 이 적변(賊變)은 전고(前古)에도 드문 바이오나 지금 토적(討賊)이 시작되었으므로 남은 무리는 저절로 멸망(滅亡)하게 될 것이옵니다. 반드시 오래도록 성상의 걱정을 번거롭게 하게 되지는 아니할 것입니다. 신이 근심하는 바는 문초하는 옥사(獄事)가 만연되어 수습하기가 쉽지 않고 또한 파종(播種)할 시기를 잃어서 백성의 일이 염려되옵니다. 대개 농사가 때를 잃지 않은 후에야 백성이 부지될 것이오, 백성이 살게 된 후에야 나라가 나라답게 될 수 있사오니 여러 도(道)에 각별히 타일러서 이들로 하여금 편안히 모여 살고 농사를 권면하여 그때를 잃지 않도록 하옵소서. 이것이 오늘의 급한 일이옵니다.”라고 하니, 상께서는 옳은 말이라 칭찬하였다.
선생은 다시 이르기를, “문왕(文王)은 다섯 나라를 평정하였고 주공(周公)은 사국(四國)을 평정하였는데 이는 모두가 학문 중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이때를 당하여 더욱더 성상의 덕망에 힘쓰시어서 난리를 평정하시고 태평한 정치를 도모할 근본으로 삼으시면 공드린 보람이 어찌 크다 아니하겠습니까?” 하더니, 상께서 이르기를, “아뢰는 바가 절실하니 꼭 각별히 마음에 간직하겠소.” 하였다. 입대가 끝나자 배궤례(拜跪禮)를 하지 말라고 분부하시였다.[연주 헌의 3월 25일, 소Ⅰ, 삼소(적변으로 올리지 못함) 적변을 듣고 올리는 소 3월, 답 사관 박필재(朴弼載) 참조.]
○ 4월 신사삭(辛巳朔) 음식물과 땔감을 하사(下賜)하였으며, 계미(3일)에는 사관을 보내어 선소(宣召)하였으나 대궐에 나아가 소를 올려 사양하였는데 허락하지 아니하였고 소는 문집에 보인다 [소Ⅰ. 사특사식물소(辭特賜食物疏) 4월 답, 진하잉귀소(陳賀仍歸疏) 4월, 전(傳)회대, 별유 등 참조.] 소명을 받들어 입대(入隊)하였다. 들어가서 대답한 것은 주자의 경자봉사(庚子封事)에 대하여 강론한 것이었다.
선생이 나아가 아뢰기를, “주자는 효종(孝宗)이 태평한 정치를 도모하는 날을 만나서 충곤(忠悃)을 다하여 다스리는 도리를 극히 논하였으되 기강(紀綱)이 근본이 된다는 말을 가지고 이를 끝내었습니다. 대체로 천하의 만 가지 일이 기강이 없으면 서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하오나, 그 근본은 마음을 바르게 하는 데[正心] 있고, 마음을 바르게 하는 근본은 또한 홀로를 삼가는 데[愼獨]에 있으며, 천리(天理)와 사의(私意)를 팔자로 타개[八字打開]하는 것은 홀로를 삼가하는 공부에 있고, 천도(天道)와 왕도(王道)의 공효(功效)가 넓어지는 것은 홀로를 삼가하는 공부에서 말미암는 것이니, 《대학》의 성의 정심(誠意正心)과 《중용(中庸)》의 계신 공구(戒愼恐懼)의 공부가 홀로를 삼가하는 뜻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맨 처음에 손을 댈 곳이 여기에 있사오며, 철두철미(徹頭徹尾)한 곳도 역시 여기에 있습니다. 마음과 힘을 굳게 하여 줄기를 찾아간다면 큰 근본은 스스로 서는 것입니다.” 하였다. 또한 아뢰기를, “깊은 근심은 성스러움[聖]을 열어 주고, 어려움이 많음은 나라를 흥하게 하는 것이옵니다. 그러므로 신은 앞서 문왕(文王)과 주공(周公)의 일을 가지고 대략 말씀드린 바 있사옵니다. 문왕은 밖으로 밀인(密人)과 숭호(崇虎)가 있어서 시사(時事)가 매우 어려웠으나 시인(詩人)은 찬송하기를, ‘또한 명예를 떨구치 않았다.[亦不隕厥問]’고 하였는데, 만약에 그 난리를 평정할 근본을 논한다면 그윽한 문왕의 덕이 계속 빛나서 공경하는 데 그친 것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주공은 안으로 사국(四國)이 있어 이를 토멸하느라 커다란 무기를 썼으나, 시인은 찬미하기를, ‘덕 있는 소문에는 흠이 없더라.[德音不瑕]’ 하였는데, 만약 변고(變故)에 대처하는 도리(道理)를 말한다면 또한 ‘붉은 신이 궤궤(几几)하다.’고 한 데서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옛사람이 환란에 대처하는 도리가 이러한 까닭에 능히 그 성스러움을 잃지 않고 마침내 태평한 정치의 아름다움을 이루었던 것이니, 지금의 조그마한 도적이 난을 일으켜 우환이 가시지 않고 있사오나, 만약 먼저 근본만 올바로 세우신다면 저절로 안정하게 될 것이오니 전하께서는 전날의 성인을 따라 더욱 원대(遠大)한 계책에 힘쓰시어 종사의 무궁한 복을 이루시면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다.
상은 이르기를, “전날에 말한 것은 나도 역시 생각하였는데, 이제 또 부연(敷衍)하여 아뢰는 바가 좋으니, 마땅히 깊이 생각하겠소.” 하였다. 연신(筵臣)들이 말하기를, “우참찬(즉 선생)은 병가(兵家)의 일에 대해서도 또한 널리 통한다 하니, 청컨대 찾아가서 묻게 하옵소서.” 하니, 선생은 사양하고 대답하지 아니하였다. 대신이, 벼슬을 파는 일에 대하여 말하자, 선생은 옳지 못한 일이라고 아뢰니, 이를 옳다 하였다. 선생은 돌아갈 것을 빌었으나 상은 간곡히 머물러서 난리가 평정될 때를 기다리게 하였다. 드디어 물러 나왔다.
○ 갑신(4일)에 음식물을 내리시었다. 소를 올려 사양하였는데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소와 비지는 아울러 문집에 보인다.
○ 신묘(11일)에 소를 올려 돌아갈 것을 고(告)하고 도성(都城)에서 떠나왔다. 이때에 영남의 군사(軍師)가 승리를 거두고 모든 도적들이 평정되었으므로 선생은 드디어 소를 올려 집으로 돌아갈 것을 고하였다. 따라서 진계(陳戒)하여 아뢰기를, “지금의 깊은 근심이 성스러움을 열어 주었으니[啓聖] 실로 나라가 다시 회복될 시기(時期)이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어진 이를 친하게 하시고 일에 능한 이를 등용하시어 공사(公事)를 열게 하며 사사(私事)를 막으시며 백성을 구휼(救恤)하시고 군사를 다스려서 맨 처음에 하시려던 정치를 이룩하시옵고 원자(元子)를 잘 보도(輔導)하심으로써 연익(燕翼)의 계책을 남겨 주옵소서.” 하였다. 이어 성(城) 밖에 나와서 묵었다.
○ 사관을 보내어 비지를 내리어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들에게 같이 올라오게 하였다. 임진(12일)에 또다시 사관(史官)을 보내어 별유(別諭)를 내리어 불렀으며, 이들에게 같이 올라오게 하시었다. 상이 사관을 보내어 별유를 내려 이르기를, “어제 두 번째의 별유에서 내 뜻을 모두 말하였는데 이제 서계(書啓)를 보매 내 마음을 알지 못하는 것이 이와 같으니 내 평상시에 유현(儒賢)을 대접하는 성의가 이르지를 못하였소. 재차 자리에 나와서 직접 경을 면대(面對)하여 말하기를 간곡하게 했거늘 돌아갈 것을 청하는 것이 이처럼 빠르단 말인가? 오직 부끄럽기만 할 뿐 더할 말이 없오. 이제 경에게 한마디 말할 것이 있으니 경은 양해해 주오. 경이 비록 고도(高蹈)한 선비일지라도 세록(世祿)을 먹는 신하인데, 이미 성 안에 들어왔다가 나를 만나서 돌아가겠다는 인사말도 없이 곧바로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것인가? 옛날에 한(漢) 나라 엄광(嚴光)이 광무제(光武帝)에게 사직하고 돌아갈 때에, 선유들은 말하기를, ‘광무가 아니었다면 자릉(子陵)의 높은 것을 이룰 수 없었고, 자릉이 아니었다면 광무의 큰 것을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내 비록 덕이 없어서 본래 한당(漢唐)의 시대에 대하여 스스로 부끄럽게 생각하지만, 경은 어찌 한(漢) 나라 이후의 일을 가지고 나를 대(待)하려는 것인가? 연석(筵席)에 종용(從容)하며 간곡히 돌아갈 것을 청하는데 내 또한 말이 없을 수 있겠는가? 그렇게 하지 않고서 돌아가는 길을 찾기에 급급(汲汲)하니, 이것이 내 몹시 부끄러워하는 바이오. 경은 모름지기 나의 지극한 뜻을 몸소 깨닫고 다시는 상소하는 글귀[章]를 찾지 말고 곧 같이 들어와서 나의 타는 듯한 소원에 따라 주기를 바라오.” 하였다.
소를 올려 사양하였으나 다시 사관을 보내어 비지를 내리고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소는 문집에 보인다 왕세자(王世子)가 관원을 보내어 머무르도록 권면하므로 계사(13일)에 도성에 들어간다. 정유(17일)에 소명(召命)을 받들고 입대(入對)하였다. 상은 직접 면대하며 유시(諭示)하기를, “전일의 비지(批旨)에서는 경의 뜻을 이루게 하고자 하여 광무의 이야기에 언급(言及)하였오. 광무제가 자릉(子陵)의 뜻을 펴게 하여 준 것은 비록 착한 일이나 마침내 그가 머물러 있으면서 자기를 도와주게 한 것만 같지 못하였으니, 나는 그렇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이오. 오늘날 경을 머물도록 한 것은 모두가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인데 경은 어찌 깊이 생각하지를 못하오.” 하였으나 선생은 굳이 사양하였다. 나아가 아뢰기를, “전하께서 크게 하시고자 함이 계시어 한ㆍ당(漢唐) 때처럼 되기를 기원하시며 부끄럽게 생각하시는데, 신이 구구하게 바라는 것도 또한 어찌 요ㆍ순(堯舜)으로 기대하지 않겠습니까마는, 지금 정치의 효능은 도리어 한ㆍ당(漢唐) 아래에 있으니 무엇 때문입니까? 요ㆍ순의 정치에서도 홀로는 행할 수 없었으므로 반드시 고(皐)ㆍ기(夔)와 같은 신하의 도움을 기다렸던 것인데, 지금에 있어서는 임금은 있어도 신하가 없어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홍범(洪範)에 이르기를, ‘임금이 그 극(極)을 세우면 무릇 그 백성에게는 음사(淫邪)한 편당이 없을 것이라.’고 하였는데, 지금에 있어서는 그 극을 잘 세우지 않았기에 그런 것이옵니까? 전하께서는 이때야말로 바로 개창기(開創期)의 처음인 듯하오며 진실로 유신(維新)하실 시기(時期)이옵니다. 진실로 원하옵건대, 먼저 근본을 다스리시어 성인의 도를 밝게 하신다면 신은 비록 돌아가서 죽더라도 한(恨)이 없겠사옵니다.” 하니, 상은 좋은 말이라고 칭찬하고 이어 유시하여 이르기를, “경이 가는 것은 내 비록 억지로는 말리지 못하겠으나 이달이 며칠 남지 않았으니, 이달이나 지나서 떠나는 것이 좋겠소.” 하였다.
이날 서연(書筵)에 입시(入侍)하였다. 입대를 끝내고 다시 동궁(東宮)에 나아가서 입시(入侍)하여 조감(祖鑑)을 강(講)하였다. 기해(19일)에 상께서 숭례문(崇禮門)에 납시어 목 벤 도적의 머리를 받는데, 길가에서 지영(祗迎)하였다. 임인(22일)에 하반(賀班)에 참석하였다. 갑진(24일)에 소대(召對)되어 입대(入對)하였다. 주자의 무신봉사(戊申封事)를 강하였는데, 선생이 나아가 아뢰기를, “주자는 먼저 인주(人主)의 본원(本源)이 되는 곳을 간곡하게 주장하였고, 다음으로는 궁궐의 근습(近習)에 이르기까지 각각 바르게 해야 할 도리를 말하였으며, 공사(公私)와 의리(義理)의 분별을 깊이 밝혔으며, 끝으로는 제갈량(諸葛亮)의 말을 가지고 이를 끝맺었으니, 그 뜻의 깊고 간절하며 뚜렷하게 밝혀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근습이 용사(用事)하는 것을 주자(朱子)는 오히려 깊이 염려하기를 이와 같이 하였는데 하물며 지금은 나라에 당론(黨論)의 폐단이 극도에 이르렀사오니, 이와 같이 되면 화란(禍亂)이 어찌 나지 않겠습니까? 전하께서는 항상 탕평(蕩平)하시는 데 힘쓰시니, 성상(聖上)의 뜻이 계신 바를 누군들 우러러 흠모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탕평을 하고자 하시면 극(極)을 세우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다만 시중(時中)의 의(義)는 쉽게 말할 수 없으나 정일(精一)의 중(中)은 천하의 대중(大中)이옵고 자막(子莫)의 중은 집일(執一)의 중이옵니다. 대중(大中)의 중을 강구하심을 근본으로 삼으시고 또한 반드시 제갈량이 이른바 어진 신하를 친하게 하고 소인(小人)을 멀리하라 하던 것을 법으로 삼은 뒤에야 바야흐로 탕평이라 할 것이옵니다.”라고 하였다.
○ 병오(26일)에 서연(書筵)에 입시(入侍)하였다. 《소학(小學)》을 강하였다.
○ 정미(27일)에 다시 서연에 입시하였다. 조감(祖鑑)을 강하였다.
○ 무신(28일)에 소명이 내려 입대(入對)하였었다. 주자(朱子)의 무신봉사(戊申封事)를 강하였는데, 선생은 글 뜻에 따라서 동궁(東宮)을 보양(輔養)하는 도리를 아뢰되, 자주 서연을 열어 궁료(宮僚)들을 인접(引接)하여 어진 사대부(士大夫)를 접촉할 때는 적고 환관(宦官)과 궁첩(宮妾)을 친하게 할 때가 많은 것을 깊이 경계로 삼으시기를 청하였다. 상은 좋게 받아들였다. 또 이르기를, “송(宋) 나라 효종(孝宗) 때에는 근습(近習)이 용사(用事)하여 대신(大臣)을 잘 임명하지 않았던 까닭에 주자가 이를 걱정하여 특히 궁중부중일체(宮中府中一體)의 설(說)을 끌어서 반복하여 아뢰기를 이와 같이 하였는데, 임금이 되어서 대신을 잘 임용하지 않으면 비록 어진 이를 구하는 데 힘쓰더라도 어진 사람을 반드시 쓸 수 없을 것이며, 비록 정치를 하는 데 근면하더라도 좋은 정치는 꼭 세울 수 없을 것이옵니다. 등용되는 자가 혹 용렬하고 간교한 사람이거나 행하는 바가 모두 아사(阿私)하고 구차한 정치라면 기강(紀綱)은 위에서부터 무너지고 풍속은 아래에서 허물어져서 백성은 근심하고 병사(兵士)는 원망하며 나라의 형세가 날로 기울어질 것이오니, 어찌 크게 두려워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 이른바 기뻐할 것을 구하지 말고 두려워할 것을 구할 것이며, 나의 뜻에 잘 맞는 것을 구하지 말고 나의 덕을 도울 수 있는 것을 구하라고 한 것이 더욱 절실하고 긴요한 것이옵니다. 전하께서는 만약 생각해 두시어서 반드시 대신을 잘 임용하실 것을 기하시는 것은 오늘을 당하여 급히 힘쓰실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또 이르기를, “효종은 처음에 정력을 다하여 다스림을 구하였으나 말년(末年)에는 어질고 사특한 것을 분변하지 아니하고 이를 혼합하여 등용하였으며 나머지 백 가지 일을 많이 포용(包容)하는 데 힘썼고, 곡직(曲直)과 시비(是非)를 둘 다 묻지를 않으며 이것을 평균(平均)하는 도(道)를 삼았습니다. 그러므로 주자는 주역(周易)에 있는 사물(事物)을 저울질하여 평등하게 베푼다는 것과 악한 것을 막고 선한 것을 드러낸다는 것으로써 누누이 경계하였던 것입니다. 대체로 주역의 평(平)이란 한 글자는 임금이 되는 이가 범연하게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옛날에 공평하게 하려는 자는 많은 것을 덜고 적은 것을 보태 주어서 물건이 많고 적음을 저울질하여 고루 베풀어 주었으므로 이들에게 공평할 수 있게 하였던 것입니다. 만약 시비와 곡직을 묻지 않고 한결같이 대한다면 착한 자는 항시 펼 수 없을 것이며, 악한 자는 도리어 요행으로 면할 것이오니, 이것은 크게 불공평한 일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요순의 정치일지라도 팔원 팔개(八元八凱)를 거용(擧用)하여 반드시 공도(共兜 공공과 환도)를 물리친 것은 주역의 상(象)에 이른바, ‘악을 막고 선을 드러내며, 하늘에 순종하여 명을 아름답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늘의 도는 선한 이에게 복을 주고 악한 자에게 화를 주며, 또한 상벌의 권력을 사목(司牧)에게 맡김으로써 그로 하여금 이를 돕게 하는 것이니, 인군(人君)이 되는 자는 그 권병(權柄)을 삼가서 쥐고 받들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상은 이르기를 “아뢰는 바가 모두 좋으니 마땅히 각별히 유의하겠소.” 하였다.
○ 경술(30일)에 서연(書筵)에 입시(入侍)하였다. 《소학(小學)》을 강하였다.
○ 5월 신해(1일)에 입시하고 돌아갈 것을 빌었다. 선생이 조참(朝參)으로 인하여 인정전(仁政殿)에서 입대하고서 돌아갈 것을 빌었는데, 상이 이를 허락하시고 입대하여 사직하기를 분부하였다. 다음날 사퇴(辭退)를 고하자 상은 술을 주시고 수찰(手札)을 하사(下賜)하였다. 상이 사관(史官)을 보내어 소명을 내리고 그로 하여금 만나서 인사하도록 하였다.
상이 유시하여 이르기를, “이번의 진퇴(進退)는 경의 소원대로 굽혀서 좇겠으며, 이 뒤에는 직사(職事)로서 경을 번거롭게 하지는 않겠소마는, 만약 나라에 큰 일이 있어서 상의할 것이 있으면 마땅히 사관을 보낼 것이니, 경은 반드시 올라 와서 이 뜻에 따라 주어야 하오. 전날에는 단지 글의 뜻만을 강론케 하였는데, 오늘은 학문하는 공부를 묻고자 한 것이오.” 하니, 선생은 사양하여 아뢰기를, “경(經)에 이르기를, ‘날로 새롭게 하고 또 날로 새롭게 한다.’고 하였는데, 주자의 봉사(封事)에는 조목으로 의논한 것이 많기는 하오나 커다란 근본은 반드시 임금의 덕[君德]에 귀결시켰고, 긴요한 것은 반드시 성학(聖學)을 성취하는 데 있다고 하였습니다. 대저 진강(進講)하는 규모는 날마다 과정을 두어서 비로소 진실로 그 뜻을 얻는 것이오니 한 구(句)에는 한 구의 공을 드린 보람이 있고 한 편(篇)에는 한 편의 공을 드린 보람이 있는 것이오며, 이와 같이 한 뒤에야 바야흐로 실용(實用)이 있는 것이옵니다. 전하께서는 비록 성학(聖學)에 마음을 두시고, 자주 경연(經筵)을 여신다 하더라도 마침내 외우는 것만을 주로 하시온데, 과정이 너무 많으면 문자를 기록한 것이 비록 많더라도 몸에 돌이켜 실천하는 요점에는 부족할 것이오니, 반드시 날로 새롭게 하시고 또 새롭게 하신 뒤에야 학문의 빛이 계속 밝아질 것이옵니다. 풀과 나무는 뿌리가 있어서 나날이 자라듯이 학문도 근본이 되어야만 바야흐로 의거할 데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근본이 이미 서고 공부가 계속되는 것은 천운(天運)이 쉬지 않는 것과 해와 달이 계속 빛나는 것과 같이 한 뒤에야 바야흐로 독실한 공부가 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성인은 하늘과 같아서, 깊고 멀어서 그치지 아니하니 어느 곳엔들 공리(功利)의 사사로운 뜻이 끼고 섞이게[挾雜] 할 수 있사오리까? 정자(程子)는 공부하는 방법을 펼 때에는 반드시 홀로를 삼가는 것[愼獨]을 주장으로 삼았는데, 이것이 곧 심원하여 그치지 않는 곳이며, 이것이 곧 중화(中和)하는 공부를 이루는 곳입니다. 천지가 자리잡고 만물이 자라나며 이 속에서 좇아 점점 변하여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없고 이를 이루는 외에 또다시 별다른 방법이 없사옵니다.” 하니, 상은 이르기를, “이 말은 간략하되 극진한 것이니, 내 마땅히 명심하여 잊지 않겠소.” 하였다.
상께서 묻기를, “정치하는 데 바꾸고 변통하는 데는 옳은 것이 무엇인고?” 하니, 선생은 대답하여 아뢰기를, “신이 삼가 성상께서 조감(祖鑑)의 서문 쓰신 것을 보았더니 그중에는 요순을 법으로 하자면 먼저 조종(祖宗)을 법으로 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신은 생각건대, 성상의 이 말씀은 종사(宗社)의 복입니다. 오직 우리 세종 대왕(世宗大王)께서는 예를 마련하시고 악(樂)을 만드시어 동방(東方)의 성인(聖人)이 되시었는데 그 법제(法制)는《경세육전(經世六典)》에 갖추어졌고 예문(禮文)은 《오례의(五禮儀)》에 갖추어져서 명백하고 행할 만한데 후세의 사람으로서는 조종의 법을 세우신 뜻에 도달[達]하지 못하고 각자의 소견대로 어떤 일을 행해야 하고 어떤 예를 써야 한다고 하니, 오늘날 정치를 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반드시 모름지기 뜬 의론을 그치게 하기를 힘써야 할 것이며 먼저 성학(聖學)을 가지고 본령(本領)을 세우고 조종(祖宗)의 옛 정치를 전적으로 닦으며 힘써 행하여 마지않는다면 어찌 능히 치평(治平)을 이룩할 수 없겠사옵니까? 조종께서는 이를 전일에 이미 쓰셨는데 전하께서는 어찌 뒤에서 이를 쓰지 못하시겠습니까? 이 백성[斯民]은 삼대(三代)에서 바른 도(道)로 행하였던 것이니 다만 옛 법을 닦고 밝히면 이를 다하는 것이옵니다.” 하니, 상은 옳은 말이라 칭찬하시고, 이어 술을 내오라 분부하시고 손수 쓴 글 한 봉(封)을 내리었는데, 이르기를, “내가 이미 경의 마음을 깊이 알고 있는데 경은 어찌 내 뜻을 몰라주는고? 이제 시골집으로 돌아가 잘 조섭(調攝)하였다가 내가 만약 부르거든 경은 마땅히 다시 올라와 내 오늘날 경에게 권권(眷眷)하고 순순(諄諄)한 지극한 뜻을 몸 받아 주오. 면계(勉戒)하여 준 말은 마음에 새기겠소.” 하니, 선생은 다만 황공하게 절을 하고 사퇴하였다. 상께서는 다시 앞에 가까이 나오라 하시고 악수하시며 내시에게 부축하여 뜰아래 내려가도록 하시었다.
○ 동궁(東宮)께 절하고 물러나자 왕세자(王世子)는 또한 주식(酒食)을 내리시었다. 을묘(5일)에 돌아왔다. 갑인(4일)에 강을 건넜고 이튿날 돌아왔다. 경신(10일)에 소를 올려 사직(辭職)하였다. 상소문 끝에는 옥사(獄事)가 만연(蔓延)하고 민심이 소란한 것이 근심할 일입니다.”라고 아뢰었는데, 문집에 자세하게 보인다.
○ 사관을 보내어 비지를 내렸다. 사퇴를 허락하지 않고 유시하기를, “아뢴 바는 내 뜻에 꼭 합치되어 깊이 감탄하였다.”라고 하였으며, 비지는 문집에 자상하게 보인다.
○ 9월 신미(24일)에 안산(安山)에 가서 선조묘소[先墓]에 성묘하였다. 길을 돌려서 과천(果川)으로 향하여 외조부[外王考] 호암(浩庵 이름은 이기조) 이공(李公)의 산소에 성묘(省墓)하였다.
○ 11월에 왕세자가 몸이 미령(未寧)하시자 기미(13일)에 양천(陽川)에 나가서 문안을 드렸다. 임술(16일)에 왕세자가 훙거(薨去)하매, 분곡(奔哭)하였다. 임자(6일)에 동궁이 몸이 불편함을 듣고 소를 올려 안부를 물었으며, 소는 문집에 보인다. 정사(11일)에는 세자의 병환이 몹시 중함을 들었다. 기미(13일)에는 김포(金浦)에 나아가 있었는데, 사관이 와서 비지를 내렸으며 양천(陽川)에 나가서 안부를 드렸다. 임술(16일)에는 세자가 훙거(薨去)하시었으므로 도성(都城)으로 달려가서 외반(外班)에 나아가 곡하였다.
○ 갑자(18일)에 소명을 받고 입대(入對)하였다가 양전(兩殿)의 복제를 의논하였다. 이날에 궁정(宮庭)의 곡반(哭班)에 나아갔다가 소명에 따라 입대하였다. 이때 예관(禮官)이 나와서 왕세자의 복제(服制)에 대하여 의논하였는데, 대왕대비(大王大妃)는 손복(孫服)을 입어야 하며 왕대비(王大妃)는 형제의 아들복[子服]을 입어야 한다고 하매, 상이 선생에게 물었다. 선생은 아뢰기를, “옛날 명종(明宗)께서 돌아가셨을 때 의논하는 자는 모두 말하기를, 공의전(恭懿殿 인종왕후를 말함)께서는 수숙(嫂叔)이 되므로 마땅히 복이 없어야 한다고 하였는데, 기대승(奇大升 자는 명언(明彦), 호는 고봉(高峯), 퇴계와 4칠론(四七論)을 폄)의 계체(繼體)를 중히 해야 한다는 의논을 듣게 되자, 선정신(先正臣) 이황(李滉)은 크게 그렇다고 하여 이르기를, ‘우리들은 하마터면 천고(千古)의 죄인 됨을 면치 못할 뻔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복제도 역시 계체를 중히 하는 것이므로, 대왕대비전은 마땅히 증손복(曾孫服)을 입으셔야 하고, 왕대비는 손복(孫服)을 입으셔야 합니다. 그러나 적자(嫡子)가 있으면 적손(嫡孫)은 없는 것이니, 대왕대비전께서는 마땅히 시복(緦服)을 입으셔야 하며 왕대비전께서는 마땅히 대공복(大功服)을 입으셔야 하옵니다.” 하였더니, 상께서는 이를 따랐다.
을축(19일)에 성복(成服)하고, 다음날 돌아왔는데, 사관이 뒤따라와서 소명을 내리자, 소를 올려 사양하고 끝내 돌아왔었는데, 사관이 또 와서 비지를 내려 머무르게 하였다. 사관이 뒤따라 양천(陽川)에 이르러 인견(引見)한 뒤에 내려가라는 하교(下敎)가 있었다고 전하니, 회대(回對)를 덧붙여 올렸다. 신미(25일)에 소를 올려 소명을 사양하였는데 상소문은 문집에 보인다. 상이 사관을 보내 비지를 내려 사명(辭命)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머물렀다가 함께 오라 하시었으므로 회대(回對)를 덧붙여 올렸다. 임신(26일)에 사헌부 대사헌으로 옮겨졌는데 소를 올려 배명(拜命)을 사양하였더니, 사관을 머무르게 하여 비지를 내리시었다. 이때 마침 동궁의 공제(公除)가 겨우 지났는지라 상하(上下)가 모두 애통하였으므로, 선생은 사소(辭疏)에 따라서 덧붙여 아뢰었는데, 대략 이르기를, “사정(四情) 중에서 애(哀)의 정이 가장 억누르기 어렵고 깊숙한 궁 안은 적막하기 쉬울 것이오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날로 신하[臣隣]를 대하시고 아름다운 말씀을 받아들이시면 반드시 성상의 마음은 넓게 정치하는 도에 도달(導達)함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상소문은 문집에 자세하다. 상은 사관을 명하여 비지를 내려 사양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이르기를, “알뜰하게 돌보며 위로하여 힘쓰게 한 데 대하여 깊이 감탄하였소. 이때에 내 마음을 위로하여 주는 자는 경과 원로(元老 간재(艮齋) 최규서(崔奎瑞)를 말함)뿐이었소. 권면하고 경계하여 준 것이 비록 간절하나 내 친히 그 격언(格言)을 듣는 것과는 어찌 같겠소.” 하였다. 비지는 문집에 보인다.
○ 을해(29일)에 세자의 장사 전에 사가(私家)의 제사를 행하느냐 아니하느냐에 대하여 대답하였다. 사관이 나와서 의논을 모았는데 선생이 대답하기를, “기제(忌祭)와 삭망(朔望)은 지금 조령(朝令)에서도 역시 허락[裁許]하고 있는 중에 있지만 묘제(墓祭)만은 행할 수 없으니 무릇 우제(虞祭)ㆍ졸곡(卒哭)ㆍ대ㆍ소상(大小祥)도 행하는 것을 허락하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라고 하였으며, 의대(議對)는 문집에 상세하다.
○ 12월 경진(4일)에 장사 전의 삭망의에 대하여 대답하였다. 의대(議對)는 문집에 상세함. 신사(5일)에 어의(御醫)를 보내어 약을 내리고 병을 물었다. 기축(13일)에 빈궁(嬪宮)의 제례의(祭禮議)에 대하여 대답하였다. 예조 좌랑(禮曹佐郞)이 나와서 의논을 모았는데 의대(議對)는 문집에 보인다. 기해(23일)에 소를 올려 소명(召命)을 사양하였다. 갑진(28일)에 사관을 머물게 하고 비지를 내렸다. 상소문은 문집에 보인다. 비지를 내려 허락하지 않았는데 비지는 문집에 나온다. 임인(26일)에 세자의 졸곡(卒哭) 전후의 복색(服色)에 대하여 대답하였다. 예조 좌랑이 나와서 의논을 모았는데, 의대는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