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병원의 역사>
한국병원의 역사에 대해 김일순 교수는
다음의 네 가지 시기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김일순, 1984).
첫째는 대한제국 말기(1885-1910년)로 서양의학이 한국에 도입되는 시기이며,
둘째는 일본통치시대(1910-1945년)로 일본의학이 한국 의료를 주도하게 된 시기이고,
셋째는 대한민국 수립초기(1945-1969년)로 대한민국 수립 전후와 6·25동란,
그리고 전화(戰火)로 인한 피해로부터 회복될 때까지의 시기이며,
넷째는 1970년대 이후로 급격한 경제성장을 바탕으로
사회 각 분야가 자주적인 발전과 성장을 이룩하는 시기이다.
■ 대한제국시대(1885-1910)
서양의학은 다음과 같은 세 경로를 통하여 한국에 도입되었다.
첫째는 북미주 또는 유럽의 기독교 선교활동의 일환으로 선교사들에 의하여 도입된 것이며,
둘째는 일본 정부의 영향력에 의하여 대한제국 정부가 공적인 정부조직으로 도입한 것이고,
셋째는 일본인이 정부(政府) 또는 민간차원에서
한국에 있는 일본거류민을 진료할 목적으로 직접 도입한 것이다.
□선교병원
공식기록상으로 처음 설립된 병원은 1885년에 광혜원(13일 후에 재중원으로 개칭)이다.
광혜원은 미국 선교의사 알렌(Dr. Horace Allen)의 제안에 의하여 왕실에서 설립한 병원이다.
한국의 첫 서양식 병원은 왕립(王立)으로 시작하였으며 진료는
미국 북장로교에서 파송하고 비용을 부담한 알렌에 의하여 이루어짐으로써
한국 왕실과 미국 북장로교의 합작형태의 병원으로 시작되었다.
알렌이 왕립 제중원에서 서양의술을 시술하고 선교활동도 어느 정도 묵인 받게 됨에 따라,
그동안 활동을 중지하고 있던 북미주와 유럽 각국에서 들어온 기독교 각 교파(남·북 장로교,
남·북 감리교 및 영국성공회 등)의 선교의사들이 1886년에서 1990년대에 이르는
15년 동안 서울을 위시한 전국 주요도시에 19개의
병·의원을 설립하였고, 환자의 진료와 동시에 기독교 선교사업까지 실시하였다.
선교의사들에 의하여 병·의원이 설립되었던 지역은
서울, 인천, 개성, 공주, 청주, 광주, 목포, 군산, 전주, 부산, 진주, 대구,
안동, 춘천, 해주, 재령, 평양, 선천, 강계, 원산, 함흥, 성진 그리고 회령 등이다.
이러한 병·의원의 약 반은 선교의사들의 건강, 지역적인 문제,
선교부 자체의 문제 등으로 인해 설립된 후 문을 닫기도 하였으나,
일부는 현재까지도 남아 각 지역의 주요 기독병원의 모체가 되었다.
1904년 미국 실업인 세브란스(Louis H. Severance)의 재정적인 지원을 받아
서울역 앞에 현대식 병원 건물을 지어 이전한 제중원은 각 과별로 분화되고
X-선 진단시설, 검사실 및 수술실 등을 갖춘 종합병원으로 되었는데,
이 병원을 후에 세브란스병원이라 했으며,
한국에 설립된 현대적 개념의 첫 종합병원으로 인정된다.
세브란스 병원의 당시 병상규모는 150병상 정도이었다.
선교의사들에 의하여 설립된 각 지역 병원들의 구조,
관리운영 체계 및 진료체계는 전부 미국식 체계이었으며,
관리운영도 선교의사들이 담당하였고,
병원운영에 필요한 재정도 주로 선교부의 보조에 의존하였다.
한국 선교에 가장 앞섰던 가톨릭에서는 이 기간에 병원은 설립하지 않았으나,
구라(救癩), 시약(施藥), 고아사업 등의 사업을 하였는데,
이러한 사업들이 후에 가톨릭계 병원설립의 기본이 되었다.
□일본인에 의한 병원
광혜원이 설립되기 10년 전인 1875년 병자년(丙子年)의
조일(朝日) 수호조약이 있었는데, 이후 부산, 인천, 원산 등의 항구를
일본인에게 개항할 수 밖에 없게 되었고, 이에 따라 많은 일본인들이
항구도시에 거류하게 되었다. 일본 정부는 일본인 거류민의 진료를
위하여 1877년에 부산에 재생의원을 개설하고,
일본 해군성 군의관을 파견하여 진료를 담당하게 하였다.
그 이후 6년 동안 일본정부는 원산에 생생병원, 인천에 일본병원,
한성에 일본 관의원 등을 개설하였으며, 이들 의료시설에서는
일본인(日本人)을 주로 진료하였으나 소수의 한국인에게도 치료를 해주었다.
참고로 일본병원은 1549년 성 프란시스코 자비에르가 기독교를
포교한 후, 1589년 도요도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기독교(基督敎) 박해가 있었다.
□ 대한제국 설립병원
1894년 대한제국은 정부의 모든 직제를 일본식
정부 직제형태로 모방하여 근대화하는 갑오개혁을 단행하였다.
이에 따라 1899년 정부의 공식 직제에 의한 첫 공공병원이 설립되었는데,
이것이 내부(內部, 내무부에 해당)에 속한 내부병원이다.
이 내부병원은 1년 2개월 후에 광제원으로 관제가 개정되었다.
그러나 한국에는 서양의학을 이수한 의사가 없어 개원초기에는
한 사람의 일본인 의사와 다수의 한의사가 진료하였다.
진료수준도 낮았고 서양의학을 시술하는 완전한 병원관리체계가 수립된 것도 아니었다.
광혜원이 이러한 상황에서 운영되다가 1907년에 이르러
1899년에 설립된 관립 의학교와 1904년에 설립된 적십자병원 등을
통합하여 새로운 건물을 짓고 대한의원으로 승격 확장하였다.
대한의원에서는 한의사는 완전히 배제되고 진료과도 분화하는
등의 변화가 있었고 이는 종합병원의 형태를 갖춘 것이다.
대한의원은 처음에는 일본 정부의 건의에 의하여 원장 이하
거의 대부분의 의사 및 교수들을 일본인 군의관들로
재편성 위촉하고 일본식 현대병원으로 개편되었다.
이것이 현대적인 종합병원체계와 기능을 갖는 한국의 첫 공공병원이라고 할 수 있다.
대한제국은 일단 대한의원을 중앙병원으로 하고, 1909년과 1910년에
13개의 자혜의원을 지방에 설립하여 공공병원망을 형성하고,
주로 저소득층의 진료를 담당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현재 한국의 공공병원망(시도립병원)구성의 시작이다.
■ 일본통치시대(1910-1945)
□ 공공병원(公共病院)
일본이 통치하게 됨에 따라 대한제국에서 설립한 대한의원(大韓醫院)과 지방의 자혜의원은 모두 일본총독부의 관장 하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병원장을 위시하여 각 과장 및 의사의 거의 대부분을 일본인이 직접 맡게 되었다. 대한의원은 총독부의원으로 그 명칭이 변경되었다. 그러나 당시 일본의 국력 및 의학수준에 힘입어 그 내용이 더 충실해졌으며, 시설이 확장되었고, 진료도 각 과별로 분화되어 의사수도 증가되었고 진료수준도 향상되었다.
13개의 자혜의원들은 조선총독부에서 건물을 신축하거나 대폭 확장하여 대개 50-100병상 크기의 도립병원(道立病院)으로 발전하였으며, 공공병원들이 지방에 더 설립되었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도립병원수는 42개로 증가되었다. 이들 도립병원들은 당시 위용을 갖춘 최신식 건물이었으며, 의료시설도 충실하게 갖추고 일본에서 의학을 직접 도입하여 진료수준도 높았다. 이러한 국가주도의 도립병원망은 당시 한국 의료의 주축이었다.
□ 선교병원(宣敎病院)
일본통치 초기에는 외국인의 선교활동이 비교적 자유로워 비록
새로운 선교병원의 설립은 가능하지 않았으나, 기존 선교병원에
근무할 선교의사도 계속 들어왔고 선교비도 조달되어 선교병원들은 계속 유지 발전되었다.
특히 평양, 대구, 전주, 광주, 원산, 함흥, 부산 등
비교적 큰 도시에 설립된 병원들은 계속 발전되고 진료수준도 높았다.
그러나 선교병원이 독립운동의 중심지가 되어감에 따라
1920년대부터는 선교활동이 제한을 받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선교병원들은 운영에 큰 어려움을 받기 시작하였다.
새로운 선교의사들의 입국이 허락되지 않아 차츰
한국인 의사들을 고용하여 병원의 관리 및 진료를 담당하게 하였다.
특히 1930년대 중반에 들어와서는 모든 선교의사들이
축출되었으며 선교병원은 완전히 한국인에 의하여 관리되었다.
더욱이 미국의사의 입국이 끊어지므로 인해 병원경영상 재정적인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어 선교병원들은 차츰 그 기능이
위축되었으며 전쟁말기에는 그 기능이 거의 마비되다시피 되었다.
□ 민간병원(民間病院)
일본통치 하에서 한국 병원은 공공병원이 주축이 되고
선교병원이 보완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형태로 존재하였다.
민간에서의 병원설립은 극히 미미하였으며,
한국인 의사들은 주로 의원을 설립하여 환자진료에 임하였다.
당시 병원은 절대수가 부족하였으며 공공병원은
문화적으로나 감정적으로 일반국민과 거리가 멀어
국민의료수요의 많은 부분은 의원이 담당하였다. 대부분의 의원은
실질적으로 병상 10-20개를 구비한 소규모의 병원형태로 운영되었다.
■ 대한민국 수립초기(1945-1969)
그간 일본의학의 발전에 크게 의존해 왔던 한국의학은
미군정(美軍政)의 실시와 미군 등의 6·25 참전으로
미국의 발달된 의학과 의료제도 및 의학교육제도 등을
직접 도입하게 되어 각종 의료와 관련된 제도가 미국식으로 바뀌게 되었다.
극도의 빈곤으로 국민의 건강상태가 지극히 불량하였으나
경제적인 이유 등으로 별로 많지 않은 의료시설마저도 크게 활용되지 못하였다.
이 시기에는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병원도
오히려 쇠퇴 또는 겨우 현상유지를 하는 정도에 불과했다.
□ 공공병원(公共病院)
1960년대를 지나면서 대부분의 시도립병원(市道立病院)들의
모습은 의사의 부족, 시설의 노후 등으로 수용소와 다름없는 상태로 되었다.
국립 대학병원들은 시도립병원과 같은 수준으로까지 되지는 않았으나 거의 발전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국민들의 의료문제를 지불능력 범위 내에서 해결해 주어야 할 책임을 가진
정부는 이러한 상황에서도 1950년에서 1969년에 이르는 20년 동안 서울과
지방에 13개의 소규모 시도립병원을 설립하여 저소득층 환자의 진료에 힘쓴 바 있다.
□ 선교병원(宣敎病院)
기독교 선교병원들도 이 기간에 어려움을 겪는 점에서는 공공병원과 별 차이가 없었다.
이미 기독교 선교병원의 대부분은 한국인 의사들에 의하여 관리 운영 및 진료되고 있었다.
비록 국민의 잠재의료수요는 많았어도 경제적인 이유로
유효의료수요(effective medical demand)는 적어 재정적으로 병원운영이
지극히 어려웠으나 미국, 캐나다 등의 선교부에서 보내오는 소액의 지원금으로 겨우 유지해 나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공병원의 쇠퇴로 선교병원들은 오히려 우리나라 병원의료의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국민들의 절대 다수가 긴급한 의료수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재정적인 이유와
병원의 부족 등으로 진료를 받지 못함에 따라 선교부의 지원을 받거나 또는
기독교정신에 입각하여 작은 규모이기는 하나 부산의 복음병원, 서울위생병원,
침례병원, 인천기독병원, 원주기독병원 등 여러 병원들이 1950년대에 설립되었다.
당시에는 소규모였으나 그 이후 계속 발전되어 지방에서는 진료수준이
가장 높은 공익병원으로서의 기능을 담당하였고 그 중 일부는 후에 대학부속병원으로까지 발전되었다.
□ 민간병원(民間病院)
공공병원(公共病院)과 선교병원들이 쇠퇴 또는 성장이 정지된 상태에서
1960년대말까지 의원급이 질적·양적으로 크게 발전하여 부진한 병원의료를 보완하게 되었다.
1958년대에 시작된 전문의제도에 의하여 많은 전문의사들이 배출되었으나
근무할 수 있는 마땅한 병원들이 적어 이들이 직접 의원을 개설하고 전문진료를 하게 되었다.
이러한 의원의 상당수는 입원실과 수술실 및 검사실 등을 갖추고
소규모병원의 기능까지도 담당하게 되었으며, 몇몇 의원들은
차츰 규모를 확대하여 30∼50병상의 병원으로까지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현대적 병원이 한국에 도입된 이래 병원의
설립과 관리운영을 해 본 경험이 별로 없었을 뿐 아니라,
병원의료수요도 많지 않았고 사회적으로 자본의 축적도
별로 없어 대규모병원을 설립할 능력이 있는 개인은 별로 없었다.
따라서 민간병원 건립의 움직임도 별로 없었다.
1960년대 중반에서부터 비로소 몇몇 의사가 중심이 되어 소규모의 개인병원들을 경영하기 시작하였다.
1963년에 설립된 서울의 제일병원, 1968년에 설립된 고려병원 등이 그 좋은 예이다.
이들 병원도 초기에는 30∼50병상의 소규모병원으로 시작했으며 후에 대규모의 종합병원으로 성장하였다.
□ 대학부속병원
비록 경제수준이 낮고 사회안정을 이루지는 못했으나 국민의료수요에 비해 의료시설과 의료인력이 절대 부족하였으므로 의과대학을 설립, 의사의 수를 증가시키려는 노력이 계속되었다. 1945년 한국에는 모두 5개 의과대학이 있었다. 1945년에 이화여자대학교, 1953년에 부산대학교, 1954년에 가톨릭성신대학, 1960년대말에는 경희대학교, 한양대학교 그리고 충남대학교에 의과대학이 신설됨으로써 6개 의과대학이 추가되었다. 이에 대한 부속병원들이 설립되었는데 특히 1960년대말에 설립된 사립의과대학부속병원들은 당시의 수준으로 보아 큰 규모(300병상 정도)의 최신 시설과 장비를 갖춘 현대식 병원이었으며 병원시설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 아울러 대학부속병원이 차츰 한국 병원의료의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 1970년대 이후 (1970- )
1960년대초부터 정치적인 안정과 경제개발이 성공됨으로써 그 효과가 사회 전반에 나타나고, 의학이 각 분야에서 급속하게 발전하는 시기로서 병원도 발전의 전기를 맞게 되었다. 경제성장과 더불어 그간 잠재해 있던 의료수요가 증가하기 시작하여 병원수요가 급상승하였으며, 의료에 대한 국민의 기대도 급격히 증가되었다. 뿐만 아니라 1977년부터 시작된 의료보험과 의료보호 등으로 의료수요의 증가는 가속되었다.
수요의 급격한 증대에 비추어 병원시설의 절대량은 부족하였다. 공립병원의 발전은 대단히 늦었으며 선교병원들의 발전은 급속하기는 하였으나 양적으로 한계가 있었다. 부족한 병원수요를 감당하기 위하여 민간에게 서둘러 병원을 신설하도록 유도하였다. 정부에서도 부족한 병상을 확보하기 위하여 1978년에 취약지역 및 공단지역 병원설립에 재정지원을 하였으며, 1980년에는 지역민간병원계획을 수립하여 민간병원의 건립을 지원하였다. 정부지원 자금(외국차관 및 장기저리 융자 알선)으로 신설된 병원은 전국적으로 약 65개에 이르렀다.
〈표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1970년에 총 병원수가 235개였고, 그 중 종합병원은 불과 12개에 불과하던 것이 1989년에는 562개, 1995년에는 693개로 증가되었다. 이는 주로 민간병원의 급속한 증가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1970년대 이후 한국의 병원은 과거 공립병원과 선교병원 증심에서 민간병원 중심으로 이행하게 되었으며 아울러 자주적인 노력에 의한 병원설립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음을 뜻한다. 병원의 급격한 양적 증가와 동시에 병원의 전반적인 규모의 증대현상도 일어나 1,000병상 전후의 병원이 4-5개 되었으며 이것은 국민의 대규모 병원 선호현상에 따라 더욱 촉진되었는데 앞으로 대규모병원의 건립계획도 상당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뿐만 아니라 시설 및 장비면에서도 크게 발전하여 고급 고가의 현대식 장비의 도입도 급격하게 증가하였다. 1988년 7월 현재 한국에 도입된 전산화단층촬영기가 135대(전신 81대, 뇌 54대)에 이르렀다.
〈표 1〉 연도별 병원수(1970-2000)
자료 : 보건사회 통계연보 1970∼1982.대한병원협회, 전국 회원병원 현황, 1983∼2000
이렇듯 급속한 병원의 발전은 여러 가지 문제점을 야기하였다. 병원신설 및 경영의 경험부족, 전문의사의 절대수 부족, 지역적으로 불균형적인 분포, 의료기기 가격의 급격한 상승현상 등이다. 거기에다 저렴한 의료보험 수가로 병원들은 차츰 재정적인 어려움까지 겪게 되었다. 정부는 한때 재정적인 지원까지 해주면서 병원의 설립을 적극 권장해 왔으나 이러한 문제점들, 특히 병상의 지역적인 불균형 분포로 1984년 4월부터 병원설립을 지역적으로 통제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1989년 전국민을 의료보험에 가입하도록 계획이 확장됨에 따라 병원시설이 부족한 농어촌지역 특히 낙도·오지 등에 병원설립의 필요성이 대두되어 정부는 1987년부터 다시 39개 취약지역에 재정지원인 농어촌개발기금(農漁村開發基金)을 통한 민간병원유치계획을 서두르게 되었다.
□ 공립병원
의료수요가 급격히 상승함에도 불구하고 공공의료기관은 민간의료기관에 비해 다음과 같은 몇가지 이유로 발전하지 못하였다. 첫째, 국방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 상대적으로 공공병원에 대한 정부의 투자능력이 위축되었으며, 둘째, 병원관리의 기업성에 대한 고려가 별로 이루어지지 못하였고 셋째, 30여년간 공공병원의 발전 정지로 병원으로서의 명망이나 신뢰가 낮아 전문의를 구하기도 힘들고 환자의 이용률도 낮다는 점 등이다.
이러한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하여 1978년에 서울대학교 의과대학부속병원을 특수법인(特殊法人)인 서울대학교병원으로 하고 공사형태로 관리운영하게 하였으며 1983년부터는 시도립병원을 지방공사화(地方公社化)하였다.
□ 선교병원
1960년대에 들어와서부터 상대적으로 약화되기 시작한 의료선교활동은 1970년대에 들어와서 더욱 약화되어 대부분의 선교병원은 그 운영권을 한국인에게 넘기게 되었다. 기독교 선교병원은 1960년대 이후 수준으로 증가되지 않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선교병원은 당시 다른 병원에 비해 일찍이 규모가 큰 종합병원의 형태를 갖추었고 역사가 길며 모범적인 관리운영을 함에 따라 널리 알려져 있었으며 대부분의 경우 지역에서 가장 수준이 높은 병원으로서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1970년대부터 급증한 의료수요가 일차적으로 이러한 선교병원에 집중되게 되어 외부의 지원없이도 재정상태가 그 어느 병원보다 먼저 양호해지기 시작하였다. 뿐만 아니라 병원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선교병원들은 다른 병원보다 먼저 외래 및 입원시설의 확충과 장비 및 기구의 현대화를 기하게 되었다.
특히 선교병원의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던 세브란스 병원은 1970년대말까지 1,100병상의 대규모 병원으로 성장하였으며, 이어 원주기독병원과 통합하고 동시에 독일차관으로 서울의 강남, 인천, 용인, 광주 등지에 크고 작은 병원들을 설립하여 총 2,000병상이 넘는 국내 최대 규모의 병원으로 발전하였다.
그 외의 대부분의 선교병원들도 1960년대까지는 150∼200병상 규모였으나 300∼400병상 규모로 성장되었다.
□ 민간병원(의료법인 및 개인병원)
급격히 증가된 병원의료수요를 기존 병원들이 모두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순수 민간재원에 의한 병원들이 급격하게 건립되었다. 그간 의원을 오랫동안 경영한 경험을 가진 의사 또는 약간의 부가 축적된 의사들을 중심으로 병원설립이 시작되었으며, 다음으로 어느 정도의 재력을 동원할 수 있는 의사와 의사집단 또는 사업가들이 병원을 설립하기 시작하여 병원건립 붐을 일으켰다.
그런데 1973년에 병원은 법인이어야 하도록 법령이 바뀌자, 많은 소규모의 병원들이 의원으로 격하하여 약 150여개의 소규모 개인병원이 병원수에서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 개인이 의료법인(醫療法人)을 설립하여 병원을 건립함으로써 병원설립의 속도는 다시 증가되었다.
한편 민간병원의 급격한 증가는 농어촌이나 의료취약지역의 의료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별로 도움을 주지 못하여, 정부는 1978년에 농어촌 및 공단지역 병원건립계획을 설립하여 13개의 병원설립에 재정적인 지원(차관 및 장기저리융자)을 하였으며 1980년도부터 민간지역병원계획을 수립, 50여개의 민간병원 건립에 재정지원을 하였다. 그러나 단기간에 많은 병원을 신설하게 됨에 따라 병원신설 경험의 부족, 관리능력의 미비, 그리고 재정상태의 취약 등으로 일부 병원이 도산하는 등의 부작용을 낳기도 하였다.
□ 대학병원
1970년대에 들어와서는 의료수요에 비해 의사수의 절대 부족과 의과대학을 설립하기를 원하는 많은 대학교와 의과대학교에 입학하기를 원하는 많은 학생들이 있고, 국민의 대학부속병원 선호도가 높아 정부는 많은 수의 의과대학 신설을 인가해 주었다. 신설 의과대학은 대규모의 부속병원들을 건립하였으며, 기존 대학부속병원들도 시설을 대량 확충하고 장비와 시설을 현대화하였다. 그리하여 전국의 대학부속병원들이 한국 병원의료의 중심이 되었다.
서울대학교병원과 연세대학교의과대학 세브란스병원의 1,000병상을 상회하는 대규모 병원으로 발전하였고, 경희대학교병원과 한양대학교병원도 1,000병상에 육박하고 있으며, 가톨릭의과대학교 고려대학교의과대학도 대규모의 병원을 신설하였다. 지방에 있는 국립과 사립대학부속병원들도 시설의 현대화와 더불어 규모를 확장하여 500병상을 상회하는 대규모 병원으로 되었으며 신설 의과대학도 대규모 병원을 설립하고 있다.
특히 대학부속병원은 진료내용에 의료보험 비급여부분이 많아 비록 저렴한 보험수가이기는 하나, 재정적인 어려움이 상대적으로 적다는 이유로 대학부속병원의 급속한 증가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1960년대말까지도 13개의 의과대학이 있었는데 그 후 계속 신설되어 1989년 31개교, 1994년 34개교, 그리고 2000년에는 개교의 의과대학으로 60개 종합병원, 8개의 병원 36,896병상수를 가지고 있다.
김재수, 남은우,「병원관리학」,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