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9일 사진
6월 21일 사진
7월 30일 사진
8월 21일 사진
8월 말일경 고추따고나서 폰으로 마누라가 찍어준 사진
9월 20일 사진
철수하기전 11월 5일사진
네이브카페에 올린글입니다....
위치: 경남 합천군 대병면 상천리(합천땜안동네)
고추품종: pr장수촌....면적: 493평중 약400평....이름: 황해만(010-4844-0202)
수량: 870포기(1000포기는 심어도 되는데 중간에 나무도있고 그래서870포기만심었음
직업: 소방공무원....근무지: 합천소방서....사는곳: 진주시 옥봉동....
고추농사를 짓게된계기는 부모님이 85세 83세로
고령이고 어차피 한주에 3번정도는 가야되는지라 가서특별이할일도 없고해서
취미로 고추농사를 시작했습니다.
2011수확은 건고추 약600근 고추지담는것 약300kg 풋고추10kg60박스를 생산하고
일등급퇴비를 약180포주어 트랙트로
로타리를 해놓고 마감인지 시작인지모르고 봄이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래글은 1999년 어느날 원인없이 찾아온 희귀병수기입니다.....시간되시는분은 한번읽어보시길 바람니다....
아직도 약쪽큰손가락에 장애를 가지고 열심히 살고있습니다.....
희귀병 수기록
합천소방서 황해만씀 010-4844-0202
수 기 록
나는 지금 내 삶에 있어서 너무나 감사와 행복 속에 살아가고 있다. 나의 모든 가족, 이웃들, 경남소방본부장님, 전 소방서장님이하, 직장동료 그리고 나에게 위안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모든 이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내가 이러한 삶의 태도를 갖게 된 것은 어느 날 갑자기, 정말 아무런 징후도 없이, 원인도 모르게 찾아온‘Guillain-Barre syndrome‘(길레인-바레 증후군)이라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희귀한 병으로 죽음 직전까지 갖다온 후부터이다.
정말 삶이란 것이 죽음에 이를 정도의 고통과 고난을 겪은 후에야 더욱 빛나고 소중하며 겸허해 진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나는 경남 합천군 대병면 상천리(지금 합천댐 바로 위 지역)라는 농촌마을에서 태어나(62.1.28.) 그야말로 자연과 함께 뛰놀며 어린 시절을 보내고 거창에서 고등학교를 다녔고 군 제대 후 거창소방서에서 근무해오고 있다. T.V에서 한창 ‘구원의 천사’로 주가를 올리고 있는 그야말로 119구조대원으로 근무하고 있는 것이다. 발병하기 전까지는 건강하나만은 감기 한 번 제대로 걸리지 않을 정도로 타고났다고 자부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전혀 예고도 없이 원인도 모르게 어느 날 갑자기 마법의 악령처럼 나를 휘감아 나의 전신을 마비시키고 죽음 직전까지 몰고간 병마가 찾아올 줄이야.
정말 끔직한 기억이지만 내 삶을 다시 한 번 추스리고 비슷한 병마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과 그 가족들에게 조금이라도 위안과 희망이 될까하여 나의 투병 생활을 얘기하고자 한다.
먼저 발병하기 3년 전에 있었던 내 집의 화재 이야기부터 간단히 해야 겠다. 지금 생각해보니 이것으로 인한 충격과 스트레스가 발병에 조금이라도 일조를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다.
1996년 늦가을 어느 날 거창소방서 가야출장소에 근무를 하고 있는데 본서상황실에서 근무자가 연락이 왔다. 황해만씨 집에 화재가 발생하였다는 것이다. 처음엔 무슨 말인지 어안이 벙벙했다. 남의 집에 화재 진압하러 다니는 소방관의 집에 화재가 발생하였다고 하니 이게 무슨 어처구니없는 일이란 말인가. 화재에 대한 걱정과 수만가지 생각이 머리속을 어지럽히는 가운데 합천파출소에 사실을 알리고 승용차로 거창 집으로 달렸다. 도착하니 집 앞에는 방금 소방차가 정차되어 있었던 흔적이 역력했다. 무슨 이런 날벼락이 또 있겠는가. 누나와 이웃 사람들은 다 보이는데 집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누나가 나를 보고 현장을 보면 쓰러진다고 현장을 보지 말라고 막았다. 신경쓰지 말라며 현장을 확인해 보았다. 정말 화재 현장은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그 아담했던, 우리 네 가족이 오손도손 살아가던 보금자리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단지 남아 있는 것이라곤 그릇 몇 개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정말 완전히 타 버렸다. 이 일을 어떻게 해야할지 앞이 막막하였다. 당장 숙식은 어떻게 해결하며 이것들을 어떻게 처리해야할지 앞이 캄캄하였다.
우선 숙식은 가까이 살고 있는 누나 댁에서 해결하기로 하고 정신을 추스리고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생각해 보았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그것도 한낮에 일어난 화재를 원인이 무엇이란 말인가. 내가 이웃주민들에게 나쁜 일도 하지 않았고 원수 진일도 없으니 방화도 아닐 것이고, 전기 계량기 휴-즈도 정상이었다. 우리 소방서 방호과장님이 나오셔서 원인을 분석해 보아도 원인을 발견치는 못했다.
며칠 동안 누나 집에서 그럭저럭 지내고 있는데 이웃에 사는 분들이 많이 오셔서 위로를 해주었다. 주위 제일교회에서 목사님과 여러 분들이 오셔서 기도를 해주면서 위로금도 주셨다. 한편 거창 초등학교에서는 불우이웃 돕기 성금을 모아 주었다. 이때까지 불우이웃 돕기는 해보아도 받아보기는 처음이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될지 현실은 그렇게 돌아가고 있었다. 다만 여러분들의 관심과 정성에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집을 지어야 하는데 빚도 꽤 있는 데다 어떻게 수습을 해야 될지 아무리 생각해도 해결책은 떠오르지 않았다. 일단 직원 집에 달세로 우선 숙식을 정하고 일단 타다 남은 쓰레기 정리를 했다. 직원들과 이웃 분들이 많이 도와 주었다. 경운기로 7~8대 분을 실어 처리했다. 어느 정도 세월이 흘러 빚을 내어서라도 새집을 지어야 되겠기에 설계사무소를 찾아 상의를 해서 설계를 부탁하고, 건축은 조금 아는 건축업자에게 부탁하였으나 펌프 카가 들어갈 수 없어 자기는 못한다고 하여 경운기로 쓰레기 처리했던 분에게 이야기 하니 집일을 많이 해보았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일을 부탁하였다. 펌프 카가 안 된다고 하더니만 펌프 카로 기초를 하고 응고 후 벽돌로 담장을 쌓고 정말 일이 진행이 아주 잘 되었다. 뒷집에서 기초가 높다며 읍사무소에 신고를 하여 읍사무소 담당자가 나와서 확인을 해보아도 이상 없었다.
이럭저럭 준공을 하게 되었다. 준공검사를 통과하려면 소방 도로를 중앙에서 3미터를 공제하고 집을 지어야 되는데 줄자로 재니까 2m 55cm 밖에 안되어 준공이 안 된다는 것이다. 정말 큰일이다 45cm를 공제해 주려면 계단을 잘라내고 집을 다시 짓는 거와 비슷하다. 그렇게 1년이 지났다. 읍사무소에서도 방법이 없고 주택은행에서도 등기가 되지 않으니 신축자금을 반납하라고 독촉은 오고 건축업자는 준공 받고 남은 돈을 바로 주기로 했지만 보통 일이 아니다. 하루 하루가 정말 괴로운 나날이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돈 때문에 골탕먹어 보지 않은 사람은 정말 이해가 되지 않을 일이 나날이 계속되었다.
더 이상 방법은 없고 해서 집을 팔기로 하고 부동산중개소에 내놓았다. 부동산중개소에서는 매일매일 오다시피 와서 완전히 등기가 되지 않는 집이라며 시중의 반값이 될 정도로 완전히 헐값에 살려고 하는 사람밖에 없었다. 그때 마침 누나가 여유가 조금 있어 매입을 해주기고 했다. 우리는 전세로 2층에 살고 누나는 1층에 은행에서 대출을 내고 해서 해결하였다.이렇게 한 고비가 흘러갔다.
새해가 밝았다. 1999년, 20세기 마지막 해인가 보다. 지난해부터 거창 소방서 대평파출소에서 구급을 담당하게 되었고 소방학교에서 구급교육도 받았다. 그렇게 지나다보니 여름이 왔다. 휴가신청을 받는다고 해 신청을 해놓고 피곤하지만 그 날만 기다리는데 휴가 날이 되니까 다른 직원이 가족들이 제주도 항공예매를 해놓았다고 해서 휴가가 연기되었다. 중간에 빈자리가 없어서 미루다 늦여름 8월 26일 휴가를 가게 되었다. 휴가 첫날 바람도 쐬일 겸 인근도시의 모 마트에 가서 쇼핑도 하고 몇 가지 생필품 등을 사 가지고 와서 평소와 같이 저녁 먹고 텔레비젼을 보다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에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6시 정도에 일어나 화장실에 갔다와서 다시 누워 잠을 조금 더 잤다. 8시경 일어나라고 잠을 깨워 눈을 뜨니 손과 목이 조금 힘이 빠져 있어 잠을 잘못 자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가 하고 아침을 먹고 다시 점심때가 되도록 잠을 잤으나 손과 팔의 힘은 더욱 빠져 있었으며 그때 이상하게도 자장면이 먹고 싶었다. 집사람과 아들 둘과 같이 모 마트에 갈려고 승용차 시동을 걸려고 하니까 손가락에 힘이 없어서 손가락 사이에 넣어 겨우 시동을 걸었고, 또 핸드 브레이크가 풀리지 않아 집사람의 도움으로 핸드브레이크를 풀고, 어렵게 운전하여 모 마트에 가서 자장면을 사와 끓여서 젓가락으로 먹으려고 하니 도무지 젓가락질이 되지 않아 대충 둘둘 말아 겨우 먹었다.
그제서야 몸이 이상하니 병원에 가보자고 하여 그렇게 하자고 했다. 설거지도 하지 않고 인근 모 병원의 신경내과에 접수후 대기하니 이름을 불러 진찰을 받았다. 담당의사 소견은 칼슘부족으로 지금 링거 주사를 주사실에서 주사하고 나면 나아질 거라면서 큰 병원에 예약을 하던지 하면서 가보라고 해서 링거주사를 2~3시간 정도 맞고 일어서려고 하니까 그때는 힘이 빠져 서있는 자체가 되지 않고 매형과 이웃집 형수를 불러 집으로 왔다. 그때 밤8시30분 정도 아무래도 이상하여 김반장에게 전화를 하여 집으로 와달라고 하니 금방 와 주었다. 현재의 사정을 당직관에게 이야기하고 구조대 구급차를 불러 대구대학병원으로 가기로 했다. 그때 이웃집 형수가 중풍인지 모른다며 우황청심원을 2병을 사 가지고 먹으라면서 대구에 있는 모 한방병원에 가는 것이 좋을 거라며 추천해 주었다. 금방 구조대 구급차가 금방 도착했다. 양손으로 담배 한대를 피우고 김반장이 1인 도수 법으로 나를 부축하여 구급차에 올랐다. 평소에 환자를 이송만 했지 구급차 침대에 내가 누워 싸이렌을 울리며 구급을 당하는 신세가 되니 만감이 교차하였다. 다른 사람을 구급해야 할 내가 왜 이렇게 구급차에 실려가고 있으며, 왜? 무엇 때문에 이렇게 온 전신에 힘이 하나도 없단 말인가? 도대체 지금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말이다.
집사람과 매형이 한 손은 집사람이 주무르고 한 손은 매형이 주물렀다. 아프지는 않지만 힘이 점점 빠지니까 찌리하게 느껴지고 주무르면 조금 나아지고 그렇게 하여 대구에 도착했는데 대구에서 대학병원 가는 중 75광장 앞에서 신호대기 중 바로 옆에 대구기독병원이라는 새로 개원한 듯한 병원이 있어 중풍인지도 모르니 일단 가보자고 했다. 병원에 도착하니 한방원장이 나오고 신경과 과장이 응급처지 후 CT 및 X레이 촬영, 혈액검사 등 각종검사를 하더니 마지막으로 척수검사를 하고 난 결과 이 병은 마지막 호흡까지도 갈 수 있다며 증세를 이야기 해주었다. 이게 무슨 말이란 말인가.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난단 말인가. 내가 무얼 잘못해서 하느님께선 이런 시련을 주신단 말인가?
이제 앉지도 못하고, 소변을 보고싶어도 휠체어로 화장실로 가서 바지를 손으로 내리지도 못하여 매형의 도움으로 겨우 볼 수 있었다. 이젠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이렇게 죽어가는 것인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창창한, 겨우 생활도 안정되어 재미있게 살려는데 나를 불러간단 말인가? 그렇게 밤새도록 한시간도 못 자고 날이 밝았다.
오늘은 1999년 8월 28일 10시가 조금 넘어 신경과 과장이 CT 등 의뢰서를 해줄 테니 대학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이제 호흡도 조금씩 잘 안되는 중이다 가톨릭의료원으로 가기로 하고 기독병원 구급차로 가톨릭의료원 응급실로 갔다. 응급실에 들어가니 어느 병원이나 마찬가지로 실습생만이 달려와 혈압맥박 호흡수 등 일반적으로 하는 것 외 접수만 해놓고 마냥 기다린다. 그때 소식을 들은 어머니와 동생이 합천에서 병원으로 들어서면서 꼼짝도 못하고 눈만 멀뚱거리는 나를 보고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고, 동생도 눈물을 글썽이고, 어머니는 평소에 감기도 한번 하지않던 네가 병원이 웬말이냐며 팔다리를 한참 주무르며 눈물만 흘리셨다. 아! 어머니 어머니 우리 어머니, 없는 살림에 우리 남매들 이렇게 사람 구실을 할 수 있도록 길러주셨는데 장남인 내가 이런 모습을 보이다니 그 슬픔을 어찌하랴. 그저 찢어지는 가슴으로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3~4시간이 지나서야 레지던트가 와서 입원 결정하고, 치료제가 약350만원(5일. 1일12병 60병)이고 보험이 안되는데 그래도 약을 쓰겠냐고 하여 약을 쓴다고 하고 입원 서약서 등을 작성하고 약 2시간 후 병실로 들어갔다. 병실에 들어가니 담당의사와 간호사가 와서 링거주사를 달고 치료제 주사도 달고 나니 이제 어머니도 동생과 매형은 모두 집으로 가고 집사람만 남았다.
이젠 자주 호흡이 잘되지 않아 몸부림을 계속 치고 있는데 건너편에도 중풍인 듯한 아저씨가 누워있고 딸이 아버지 간호를 하고 있는데 의식이 없는 아버지가 계속 딸을 차고 때리고 해도 곁에서 간호하는 모습이 정말 눈물겨워 보였다. 정말 효녀인 것 같았다. 점점 호흡이 되지 않아 집사람과 서로 돌아앉아 있어도 보고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보아도 이젠 방법이 없는 상태였다.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내가 의사한테 중환자 실로 가서 호흡기를 달아야 된다고 의사한테 이야기하니까 환자 본인이 중환자 실로 가서 호흡기 달러 가자는 환자는 생전 처음이란다. 몇 시간 동안 호흡이 곤란하고 많은 몸부림으로 인하여 정신을 잃고 말았다. 눈을 떠보니까 중환자 실이었다. 그때가 아침인 것 같은데 옆에는 나와 같이 호흡기를 달고 누워 있는 사람밖에 없고 간호사만 왔다 갔다 하고 호흡기 소리밖에 아무 소리도 없었다.
그때 집사람이 면회를 왔다. 들어와도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물수건으로 얼굴이나 닦아주는 것 외는 대화도 안되지 그저 눈물만 훔칠 뿐이었다. 20~30분 정도 있다가 면회시간 끝났다며 밖으로 나갔다. 그 후 몇 시간이 지났을까 점심 면회를 들어왔다. 집사람이 와야되는데 매형이 들어왔다. 눈을 두리번거리니까 매형이 집사람은 거창 집에 입원에 필요한 짐 챙기려 갔다고 하였다. 입에는 호흡기를 한 입 물고 있지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눈꺼풀 밖에 없었다. 마침 베개가 잘못 놓여 불편해 신경이 많이 쓰였는데 눈으로 매형한테 눈동자로 깜박이고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표시해도 삐뚤어진 베개는 바르게 하지 못하고 면회시간은 끝나고 말았다. 참으로 답답할 노릇이었다. 이렇게 하여 내가 살 수 있을까, 영영 이렇게 지내야 한다면 어찌한단 말인가. 정신은 멀쩡한데 육체는 눈동자외는 그 어느 것도 움직일 수 없으니 이것도 살아가는 것인가.
그 후 의사가 와서 코 속으로 특 미음 위관영양 호스 삽입하여 소변 줄도 넣고 대변은 디펜드를 깔아주었다. 저녁면회 시간에 집사람이 왔다. 들어와서 봐도 한심한 모양이다. 필요한 것 있냐고 물었다 할 이야기는 많지만 눈만 움직이니까 전달할 방법이 없고 어떤 사람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정신만 멀쩡하니까 더 답답한 것이다. 집사람은 시간이 되어 나갔다. 29일 밤 나이트 근무를 들어온 최진영간호사가 내가 누워있는 침대에 와서 출근하면 환자를 둘러보고 자기네끼리 인수인계를 하는 모양이었다. 얼마 후 침대에 와서 나보고 결혼은 했는지 묻고 눈으로 깜박이니까 아이는 손가락으로 1명이지 2명인지 물어왔다. 2명이라니까 애처로이 쳐다보고 다른 환자에게로 갔다. 얼마 후 호흡기에 가래를 뽑기 위하여 또 왔다. 그때서야 삐틀어진 베개를 눈으로 표시하니 바로 해 주었다. 내 눈짓으로 알아주는 간호사도 있구나 생각하니 조금 안심이 되었다.
그 날밤 11시쯤 되었을 때 옆 침대에 농약(제초제)을 마신 약물중독 환자가 들어오더니 밤이 깊어 새벽까지 ‘아이고 배야’하면서 고통을 호소하더니 새벽녘에 조용하더니 사망한 것 같았다. 침대 커-턴을 치더니 관이 들어오고 곡소리가 나더니 덜컹거리면서 밖으로 실려나간다. 나도 곧 저 신세가 될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몰려왔다. 이왕 갈 바에는 그 사람처럼 큰소리로 고함이라도 한번 쳐보고 저 세상에 갈 수 있다면 여한이 없겠다 싶은 마음조차 들었다. 밤새도록 한 숨도 못 자고 뜬눈으로 지새웠다. 앞 침대에선 앞 침대대로 마구 고통을 호소하고 정말 이곳이 마치 지옥 같았다. 마침 아침이 되어 집사람이 면회를 왔다 옆 침대에서 일어난 일 등을 이야기하고 싶지만 이야기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 집사람은 중환자 실 가운을 입고 들어와 아무 말도 못하고 나의 얼굴과 손을 닦아주고 면회시간이 다되었다며 나갔다. 팔과 다리는 움직이지 못하지만 찌리한게 감각이 사는 것 같은데 조급 더 주물러 주면 좋으련만 면회시간은 지켜야 되니까 할 수 없지. 조금 있으니까 교수님께서 레지던트들과 함께 회진을 왔다. 자기네끼리 영어로 무어라고 하더니 회진을 마치고 다른 환자에게로 가버렸다.
좀 알아들을 수 있게 뭔가 경과를 설명이라도 해주면 좋으련만 내가 전혀 의사 표시를 할 수 없으니 알아듣지도 못하리라 생각하는 건 아닌지...
30일 오전11시쯤 되었는가 그때 대구에 살고 계시는 당숙모께서 면회를 왔다. 당숙모는 내 모습을 보고 한없이 울면서 젊으니까 나을 거라며 희망을 잃지 말고 지내란다. 나도 눈에서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 내렸다. 잠깐의 면회를 마치고 가셨다. 이제 다시 다 나아서 서는 것보다는 휠체어를 타고서라도 한번 바깥 구경이라도 한번 나갔으면 하는 마음 밖에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얼마후 의사가 와서 관장을 한다고 했다. 이때까지 변을 한번도 못 보았기 때문에 관장을 해야 한다면서 항문으로 좌약을 넣고 한참 있으니까 변이 나오는 느낌이다. 계속해서 정맥주사 치료제(IV-Globuline)는 1일 12병씩 투여되고 있었다. 매일 아침이면 학생간호사가 출근하여 입 청소 양치를 할 수 없으니까 소독을 해주었다. 하고 나도 시원하다는 느낌은 별로 들지 않는다. 시원하게 양치질하는 것이 제일 시원하겠지만 할 수 없지 그래도 세월은 가나보다 또 아침이 밝았다. 거창에서 직원2명이 대구에 환자 이송 후 면회를 왔다. 막상 나를 쳐다보고 한심한 생각밖에 없나보다. 나 자신이 누워서 호흡기 달고 코에는 영양 줄달고 밑에는 소변 줄달고 엉덩이에는 디펜드 깔고 있지 글자그대로 중환자 그대로다. 항상 좋은 생각만 하라고 마음 편하게 있으라면서 면회를 마쳤다.
이젠 간호사는 하루 세 번 아침7시, 오후2시, 저녁9시 회진 및 교대하고 하루가 대충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조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학생간호사는 출근하면 매시간 혈압체크, 맥박 호흡 체크 등, 영양 죽 공급 10시, 12시, 14시, 16시, 18시, 저녁 잠 자기 전 고 칼로리 두-유를 공급한다. 코로 큰 주사기를 이용 하루에 5번 넣어준다. 이제 병원생활이 점점 길들어 가나보다 담당의사선생님은 중환자 실에서 거의 살다 시피하고 잠은 거의 못 자는 것 같았다. 수련의 생활이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닌가보다. 의사는 의사대로 간호사는 간호사대로 서로의 고통과 어려움이 많고 환자는 환자대로 많은 생각과 지난 일들을 반성의 시간을 갖고자 노력하며,나을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또 하루를 보내고자 한다.
이제 밤이 무섭다 옆 침대에서 하나 둘 저 세상으로 떠나가니까 도저히 잠을 이루지 못하겠다. 나도 눈을 감으면 그 분들처럼 저 세상으로 갈 것 같아 간호사 의사 회진 중에 눈을 뜨고 있으면 잠이 안 오냐고 물어 눈으로 깜박이면 수면제를 줄까 물어와서 깜박이면 주사로 투여하였다. 그러나 잠은 오지 않는다. 약효도 없었다. 계속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으니까 그래도 잠이 오지 않느냐며 간호사가 또 물어 깜박이니 잠을 청해보라고 한다. 얼마 후 다시 와서 확인하고 이번에는 강도를 높여 수면제를 투여하였다. 역시 잠은 오지 않았다. 약 힘보다 정신력이 강하다는 걸 실감하는 순간이다. 그렇게 날밤을 새워 하루가 밝았다. 오늘이 9월1일 이제 달이 바뀌었다. 항상 그랬듯 중 환자실은 분주하다. 오늘 간호사가 치료제를 들고 들어와 오늘만 맞으면 마지막이란다 5일 동안 맞은 것이다 지금 미세하게도 움직이는 것은 양쪽 큰 발가락이 미세하나마 움직임이 있단다. 대변을 보아도 느낌이 전혀 없고 소변이 나와도 전혀 느낌이 전혀 없다. 사망을 확인하려면 항문을 보라 했지 않는가. 항문을 오므릴 힘이 없으면 죽은 사람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침 10시면 항상 교수님들이 회진을 돌고 매일매일 반복되니까 지금쯤은 무엇을 하겠다는 것을 대충 알 수 있었다. 현재로서는 추석이 24일인데 추석까지 나갈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을 뿐이다. 병명이 희귀병 인지라 누구한테 물어 볼 데도 전혀 없고, 주위에 같은 병을 앓는 사람이 있으면 그 경과에 대한 말이라도 들어보았으면 한이 없겠다. 나중에 알았지만 위험하니까 준비를 하라고 담당의사가 몇 차례 이야기하였다지만 나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집사람의 마음은 어떠하였는지 상상만 할 뿐이다. 꽃다운 나이에 나에게 시집와서 어려운 시절을 다 보내고 이제 조금 허리를 펴려 하니까 나를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면 그 마음이 오죽하였겠는가? 아직 어린 아이들은 어떻게 키울 것이며, 그래도 가장이라고 믿고 의지하였는데 그 가장이 하루아침에 없어진다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얼마나 막막하였겠는가? 그래도 집사람은 그런 내색 한번 않고 항상 희망의 말만하여 지금 생각해도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간호사들은 하루에 4~5번 등을 쳐준다. 이유는 욕창(등창)을 방지하기 위해서란다. 침대에 오래 누워 있으면 피부에 욕창이 상당히 많이 생긴다는 것이다. 희망도 꿈도 전혀 없이 호흡도 전혀 안되어 호흡기에 의존하여 하루 하루를 연명하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할 따름이다.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전혀 예측불허다. 나 자신은 물론이지만 집사람도 다른 사람들에게 의논할 데는 그 어느 누구도 없다. 내가 지금 글을 쓰고 있는 것도 나와 같은 병 및 비슷한 병을 알고 있는 환우 및 보호자에게 도움을 주고자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투병기가 아니고 경험을 써본다. 이젠 간호사도 언제 무엇 하러 오는지 다 알 수 있다.
하루가 얼마나 긴지 밖에서 일주일보다 지루하다. 어느 듯 일주일이 지나갔다. 집사람이 격리실로 병상을 옮겨달라고 부탁을 했나보다. 격리실은 전염성이 있는 결핵환자나 큰 수술 후 안정을 취하는 병실이다. 당장은 안되고 격리실에 있는 환자가 나가면 그쪽으로 옮겨준다고 하였다. 밤에 잠을 못 자니까 낮에 약간씩 잠을 잔다. 잠이 들면 나를 아는 사람들이 면회를 왔지만 잠만 들면 면회는 사절이다. 워낙 예민하니까 거의 먼 곳에서 면회를 왔건만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이렇게 초라한 모습도 보여주고 싶지도 않다. 울고 나면 호흡이 더 안되고 가래가 많이 끌어올라 고통이 더 심해진다.
정확한 날짜는 모르나 9월3일쯤 기억된다. 격리실에 있던 환자가 나갔다며 격리실로 옮겨준다고 하였다. 꼭 퇴원이라도 하는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침대 자체로 옮기는데 잠깐도 호흡이 안되니까 임버백으로 호흡하면서 격리실로 옮겼다. 격리실에 들어서니 아주 조용한 것이 거의 독 실이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좋은 것은 집사람이 병실에 계속 같이 있어도 되는 것이 큰 장점이었다. 병원생활도 일주일이 지났다. 인심은 잃지 않았는지 면회 객은 매일10~15명 정도는 계속 찾아오고 있었다. 교회에서 오시면 나를 위하여 기도해 주고 일반인이 오시면 마음 편히 먹고 좋은 생각만 하라며 위안의 말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어떤 분들은 청각장애인에게 하듯 말도 못 알아듣는 줄 알고 손짓 발짓을 한다. 한편 면회객이 가지고온 음료수 등은 중환자 실에서 보관할 데도 없고 해서 거의 병원직원들이나 다른 보호자에게 나누어준다는 것이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지만 거의 호전되는 것은 없고 다리가 약간 움직인다는 것이 호전이면 호전이다. 내가 의사표시를 해야하는데 방법이 있었다. 그래서 궁리 끝에 우리 한글의 닿소리 홀소리 ㄱㄴㄷㄹㅁㅂ~, ㅏㅑㅓㅕㅗㅛ~, ㄲㄸㅃㅆ~를 노트에 써놓고 연필로 가르키면 눈을 감으면 그것을 선택하여 글자를 연결하여 의사를 전달하는 방법이다. 만약에 한글을 모른다면 어떻게 이 답답함을 해소 할 수 있을까 싶다. 예를 들어 ‘집에 가고싶다’는 ㅈ,ㅣ,ㅂ,ㅇ,ㅔ로 표현하면 의사 소통이 어느 정도 되었다. 이렇게 해서라도 표현 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몸이 가려운 부분이나 베개가 불편하다 등은 해결이 되었다. 세종대왕님 감사합니다. 그렇게 절망 스러운 가운데 이 발견은 큰 기쁨이 되었다. 정상인이 생각하면 얼마나 어설픈 일이었겠는가. 하지만 나에게는 이것이 그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큰 기쁨이었다. 이것이 또한 나에게 다시 옛날처럼 될 수 있다는 커다란 희망을 보여 주었다.
오늘은 9월8일 오후가 되니까 어떤 분이 의사가운을 입고 들어와 물리치료실에서 물리치료하러 왔다고 했다. 누워서 꼼짝도 못하는 나에게 물리치료를 해준다니 지켜볼 뿐이다. 발가락부터 손가락까지 들고 일일이 관절을 폈다 오므렸다 반복하여 약15분 정도 해주면서 매일 이 시간에 와서 해준다고 하고 토․일요일은 제외하고 온다면서 병실을 떠났다. 하고 나니 조금 시원한 느낌이다. 매일 이 시간이 기다려진다. 9월 10일까지 매일오더니 내일은 토요일이라 오지 않는다고 하였다. 막상 토요일이 되니까 오후 그 시간을 얼마나 기다렸건만 결국 오지 않았다.
9월 12일 오전에 회진을 오더니 너무 오래 입으로 기관 내 튜브를 해있으면 말을 못할 수도 있으므로 기관 절개술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입에 넣어 있으니까 너무 갑갑하니까 빨리 하자고하니 집사람은 나중에 흉터가 남는다고 하니까 조금 더 있어 보다가 계속 호흡이 안되면 하자는 것이다. 어쨌든 이튿날 기관절개 후 기관 내 튜를 빼고 실리콘튜브를 넣었다. 넣고 나니까 입안이 시원하고 기분이 한결 상쾌하였다. 어쨌든 그래도 병원생활은 조금씩 익숙 및 발전을 해갔다. 간호사에게 허락을 받고 오늘은 주위 모 마트에 가서 라디오(카세트겸용)를 사 가지고 왔다. 이어폰으로 라디오를 들을 작정이다. 라디오를 듣고 있으니까 좋은 점은 시간을 알 수 있고 바깥세상 이야기를 들을 수 있고 뉴스나 노래를 들을 수 있어 정말 좋았다. 오늘은 수간호사수녀님이 격리실에 들어와 환자 분 따분하지요? 이제까지 참은 데로 잘 참고 건전한 생각을 가지고 지나온 즐거웠던 것만 생각하고 불편한 것 있으면 집사람에게 전하여 달라고 하면서 가래도 뽑아주고 나가셨다.
이제 물리치료 하는 것을 집사람이 계속 따라해서 집사람도 어느 정도는 흉내를 내고 있다. 오전에 한번 잠자기 전에 한번 토․일요일은 하루 세 번 항상 물리치료 흉내를 내어주니 훨씬 도움이 되었다. 9월 15일 오전에 회진을 오더니 교수님께서 치료제(IV-Globulirne정맥주사)를 한번 더 써야 된다며 더 쓰자고 했다. 그래서 일단 쓰기로 했다. 두 번을 쓰면 한번은 보험이 된다고 하였다. 또 매일 12병씩 5일간(9.15-9.19) 맞아야 된다. 오늘은 라디오를 듣고 있는데 10시 프로에 나왔던 내용이 오후 1시 프로에도 나오고, 4시 프로에도 나오는 것이다. 내용은 공수부대 출신이 물먹기 대회를 하는 이야기인데 사연을 보내는 사람이 프로마다 보냈는데 그것이 모두 채택이 되었나보다 방송도 이런 실수를 하나보다하고 생각하였다. 오늘 처음으로 감독 간호사 님이 병실을 찾았다. 중환자 중 의식이 있는 환자를 만나서 이야기도 해주고 과거에 잘 이겨낸 환자들의 이야기 등을 해주셨다. 감독간호사면 간호부장급이다. 나에게는 격려해주시는 분이 아주 많다. 이 분들의 격려에 힘입어 아무리 힘들고 괴롭더라도 참고 반드시 일어나리라 다짐하였다.
집사람이 생전 처음으로 로션을 발라 면도를 해주었다. 처음으로 하니 나는 볼 수 없지만 얼굴에 피가 나서 따가웠다. 한편 매일 항생제를 링거에 투여할 때는 아프지 않게 천천히 해주는 간호사도 있고 빨리 아프게 투여하는 간호사도 있어 그런 간호사는 일어나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 이렇게 어느 듯 치료제를 투여한지 5일이 지나 오늘이 19일, 마침 집사람이 거창에 다녀 올 일이 생겼다. 그동안은 동생이 와서 있기로 하고 동생이 도착하고 집사람은 거창으로 갔다. 이제 동생하고 하루를 보내야 한다. 노트를 내어 그동안 가족들의 안부, 친구들의 안부 등을 물어보고 내가 죽거든 네가 장남이니까 부모님 잘 모시고 집사람과 민수와 일궁이 잘 부탁한다고 하고 내가 눈물을 흘리면서 전하니까 동생이 울면서 그런 생각은 하지말고 마음 굳게 먹고 앞으로 있을 좋은 생각만 하자고 했다. 그렇게 좋지 않은 마음으로 하루를 보내고 집으로 갔다.
오늘은 9월20일 회진을 와서 다리를 들어보라고 했다. 그래서 해보니까 약 10Cm정도 무릎이 들리는 것이 아닌가. 정말 기쁜 일이다. 집사람이 박수를 치고 기뻐한다. 이젠 조금씩 차도를 보이는 것 같다. 지금까지는 막연하게 나아지겠지하는 생각을 하다가도 이렇게 하여 죽나보다하는 생각을 오락가락 하였는데 이제는 참으로 나아질 수 있겠다는 확실한 믿음이 생기는 순간이었다.
병원에 입원하고 한번도 머리를 감지 못했다. 머리에 떼가 겹으로 있는 느낌이다. 오늘 시간이 나면 머리를 감아준다는 것이다. 이렇게 목도 못 들고 움직이지 못하는 나에게 어떻게 머리를 감아준다니 기다려진다 오후가 되자 간호가 기계를 하나 밀고 왔다. 머리 감겨주는 기계란다. 환보사(환자 보호하는 사람)까지 동원하여 머리감기는 시작되었다. 그렇게 해서 감고 나니 정말 날아갈 것 같고 기분이 상쾌하였다. 오늘 라디오에서 추석이 얼마 남지 않았다며 방송프로마다 추석에 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추석이면 무엇하나 다리도 들지 못 하는데 추석 전에 퇴원할 것이라고 꿈꾸던 일은 산산조각이 나고 어째든 몸이 미약하나마 호전되기에 휠체어라도 타고 집에 가야 되지 않을까 상상해 보았다. 오늘은 추석이다. 부모님과 두 아이, 가족들, 이웃 사람들, 직장 동료 및 나를 알고있는 모든 사람들이 나의 머리를 스쳐갔다.
10시 정도까지는 중환자실내에 면회 객이 거의 없고 간호사만 왔다갔다하는 것 외는 아주 조용하였다. 10시가 넘어서니까 추석 차례를 모신 가족들이 한복차림으로 다른 병상에 하나둘 보이기 시작하였다. 오후가 되니까 나한테도 작은집 형과 가족들이 병문안을 왔다. 부산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형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며 젊으니까 다시 일어날 수 있을 거라며 위로를 해주고 집사람보고 먹을 수 있을 때 먹고 싶은 것 사주라면서 돈을 주고 면회를 마치고 가고나니 합천에서 동생들이 면회를 왔다. 왜 그런지 우리가족만 보면 자꾸 눈물이 앞선다. 막상 동생들도 할말은 못하고 얼굴만 보고 동생들이 떠나갔다. 병원에서 맞는 명절은 건강 할 때는 상상도 하기싫을 것이다.추석은 이렇게 지나가나 보다.
오늘 점심때 집사람이 밖으로 밥 먹으러 간다고 간호사 및 학생간호사에게 부탁하고 나갔다. 한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는 것이다. 무척 기다리고 있는데 집사람이 왔다. 화를 낼 일도 아닌데 무척 화가 났다 꼼짝도 못하는 사람을 생각해서라도 빨리 좀 왔으면 좋으련만 그래서 노트를 내라고 하고 하고싶은 말을 전했다. 내용은 내가 이렇게 있다가 죽고 나면 보험금 타 가지고 잘살려고 빨리 죽기만을 기다리느냐고 하니까 집사람은 밖으로 나갔다 한참 있다 들어오더니 눈을 보니까 퉁퉁 부어 있었다. 울고 온 것이 분명했다. 정말 미칠 지경이었다.
집사람이 못난 나 때문에 힘든 내색 한번 하지않고 얼마나 애쓰고 있는데 내가 한 말이 고작 그것이었다니 집사람은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지금 생각해도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9월 26일쯤 됐을까 하는 시점에 이제 호흡이 약간 된다며 지금까지 분당 15회를 넣어주다 13회로 낮추어 호흡을 해보라는 것이다. 매일 1~2회씩 줄여나갔다. 이제는 잠자는 집사람에게 불편한 것을 이야기하려면 방법이 없다가 다리가 조금 움직이니까 나의 발과 집사람의 손을 서로 손수건 두 개를 연결하여 묶고 흔들어 깨우는 것이다. 이것만해도 다소 불편은 해소됐다. 10월 3일 분당 3회씩 넣어주던 호흡기를 제거하고 산소만 투여한다는 것이다. 그때 시간이 15시30분 약간 시간이 지나고 나니 가슴이 답답하고 호흡이 잘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담당의사를 불러 호흡이 안 된다고 하니까 피를 뽑아 산소 수치검사를 해보고 이상이 있으면 다시 연결을 해준다고 하였다. 검사결과 이상이 없다고 천천히 호흡을 해 보라고 했다. 집사람은 빨리 호흡기를 떼고 싶어하였고 담당의사도 집사람과 같은 생각인 것 같았다. 결국 19시쯤 의사를 호출하여 호흡기를 연결하자고 하니까 다시 검사해서 이상 있으면 연결해 준다는 것이다. 얼마 후 이상이 있었는지 다시 연결을 해주었다. 연결해주니까 가슴이 후련한 것이 시원한 느낌이었다. 오늘 의사(인턴)선생님이 오더니 실리콘튜브가 오래돼서 갈아야 된다고 하면서 갈아주는 것이다. 갈 때는 참으로 아프고 피가 많이 나오고 고통이 심하였다.
10 월6일 오늘은 아주 즐거운 날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오래 달고있던 호흡기를 제거하는 날이다. 호흡기를 떼어 내고 산소만 투입하여 자가호흡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일반 병실에라도 한번 가보겠구나 일반 병실에 가면 TV도 보고 다른 환자의 이야기도 듣고 면회 오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으니까 얼마나 좋을까 정말 그 시간이 기다려졌다. 2~3일 더 기다려 보고 호흡이 잘되면 옮겨 준다고 했다.
그렇게 3일이 지나 10월 9일 회진을 와 오늘 병실로 옮겨준다고 했다. 11시 30분이 되니까 간호사가 와서 병실을 옮겨야 한다면서 옮길 준비를 했다. 중환자 실에서 준 중환자 실로 들어가려니까 준 중환자 실에 환자가 6명이 정원인데 6명의 환자가 있다고 하여 일반병실로 가려니까 섹슨 기(가래 빨아들이는 것)도 없고 산소 투여도 못하니까 어쨌든 일반 병실로 갔다. 침대에 누웠는데 엉덩이가 아파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온몸에 살이 빠져 발병 전에 79Kg이던 체중이 58Kg으로 빠져 딱딱해서 누워 있을 수가 없어 의료기상사를 불러 공기 침대를 사기로 했다. 중환자 실에서는 앞에 환자가 사망으로 물침대를 가지고 가지 않아 그 침대를 사용하였다. 얼마 후 공기침대가 도착하여 공기침대에 누웠다. 폭신하니 좋다. 침대 왼쪽에는 섹슨 기, 오른쪽에는 산소탱크 놓고 이젠 물리치료도 강도를 높여 하체 들기, 다리 들기 등을 하고 나면 호흡이 좀 곤란하여 산소를 투여하면 안정이 되고 한다. 한편 위관으로는 영양 줄로 전과 동일하게 중환자 실에서는 간호사도 넣어주고 하였는데 지금은 집사람이 직접 영양 죽을 넣어 준다. 집사람이 가래 빼고 영양 죽 넣어주니 거의 간병사가 다 되었다.
내가 들어간 병실에는 병실을 수리(커튼 등)후 처음 들어갔기 때문에 약 10일간 우리밖에 없었다. TV도 마음대로 보고 더운 것을 싫어하니까 히터를 잠그고 있어도 되고 정말 이젠 병원 생활이 조금 재미있게 느껴졌다. 병실에 와서는 집사람을 부를 때는 혀를 입천장에 붙이고 쥬 쥬 하면 집사람이 온다. 표현 방법도 우습다. 이제 온 전신에 링거주사 바늘을 하도 많이 맞아 혈관이 전혀 보이지 않아 고참간호사 아니면 5~6번 후에 주사바늘을 꽂는다. 실수를 자주하면 내가 화를 낼 수밖에 없다. 너무 아프다. 나는 평소에 어떤 운동도 거의 하지 않았다. 앞으로 일어나 걸어 다닐 수 있을지는 알 수 없고 단지 희망 사항이지만 희망대로 이루어진다면 매일매일 열심히 운동하리라 다짐해 보았다.
10월 18일 또 한 단계 상승하는 순간이다 비위 관(코 줄)튜브 빼고 점심때부터 죽이 들어 왔다. 내가 발병 전에는 밥맛 한번 없어 본적이 없는데 죽은 정말 먹기 싫었다. 그래도 살기 위해서 제비 새끼처럼 받아먹었다. 손을 전혀 못쓰니까 어떻든 첫 죽은 3분의1정도만 먹고 내보냈다. 이제 병실에는 환자가 하나둘 들어와 빈 침대가 없었다. 히터도 켜 주어야 되고 단체 생활이니까 하는 수 없지 어디를 가나 장단점은 다 있기 마련이다. 이 병동은 거의 뇌졸중(중풍)환자 들이었다. 들어오던 길로 엄살이 심한 환자, 잘 참는 환자 가지각색이다. 면회 오는 사람들과 환자가 많으니 조금 시끄럽지만 그래도 혼자 조용히 있는 것보다는 훨씬 났다.
2~3일 지나서 이제 라면이 먹고 싶어서 집사람한테 가게 가서 튀김 우동을 하나 사오라고 했다. 일반 라면은 오래 음식을 먹지 못했기 때문에 매운 음식이나 짠 음식은 삼킬 수 없어 튀김우동을 사와서 먹었다. 정말 먹고 싶었는데 그렇게 맛이 있지는 않았다. 오늘은 새로 부임하신 류 해운 소방서장님이 병 문안을 오셨다. 내 모습을 보시고 이런 상태인줄 몰랐는지 눈물을 보이면서 정말 고생이 많다면서 위로를 해주셨다. 내가 집사람이 호흡기 연결한 곳을 막고 잘 되지도 않는 말로 ‘서장님 이런 모습으로 뵙게 되어 죄송합니다’하고 인사를 드렸다. 말하기 힘든데 그냥 있으라면서 집사람한테 고생이 많다면서 위로를 하고 시간 있으면 자주 들린다 면서 면회를 마치고 가셨다. 소방서에 도착하시어 이튿날 거창 주재중인 지방신문 기자를 초청하여 나의 현재 상태 등을 이야기하고 경남소방본부 산하에 전파하시고 ‘황해만 돕기 모금운동’을 전개하셨다. 그저 고맙고 미안할 뿐이다. 내가 어떻게 하여 그런 따뜻한 마음에 보답해야 할지.... 그저 충실히 치료받고 빨리 일어나 예전처럼 건강하게 살아감으로써 보답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젠 회진을 돌면 교수님이 무슨 말을 할지 대충은 짐작이 가능하다. 다리 들어 보라고 하고, 누워있으니까 배 위에 팔을 올려놓고 위 아래로 움직여 보라고 하고, 눈동자의 움직임 등을 보고 거의 매일 회진은 비슷하였다. 10월 23일 회진 때 이제 이비인후과에 처방해 놓았다며 기관 내 튜브를 제거하라고 해서 오후에 이비인후과에 들것 침대에 누워 타고 가서 제거를 했다. 아주 시원하다. 튜브 빼어낸 부분에 테이프로 막아 주었다. 이제 말을 해보라고 했다. 말을 하니까 그전처럼은 안되지만 어느 정도 말을 할 수 있었다. 10월 24일 이제 산소도 필요 없다며 철수 시켰다. 섹슨 기는 아직 목젖부분에 가래가 차면 빨아들어야 된다며 철수를 하지 않았다.
이제 사람이 조금씩 되어가나 보다. 병실에는 계속 입원하고 퇴원하는 사람들이 2~3일에 한번은 꼭 이루어졌다. 어떤 사람은 외과 환자인데 담석증 수술 후 2일 정도 있다가 퇴원하는 사람도 있었다. 퇴원하는 사람들이 참 젊은 사람이 고생을 많이 한다며 손도 만져 주고 다리도 만져 주면서 눈물을 흘리며 열심히 운동하고 조리 잘해서 걸어서 집으로 가라면서 병원에서 쓰던 물건 등을 모두 우리에게 주고 가는 고마운 사람들이 참 많았다.
10월 25일쯤 되었을 때 교수님께서 휠체어를 타는 연습을 하라고 했다. 회진이 끝나고 옆 환자 보호자와 같이 침대에서 앉는 연습을 해보았다. 앉으니까 천 정과 벽이 빙빙 돌고 현기증이 일어났다.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눕혀 달라고 하여 다시 누웠다. 오후에 또 한번 해보았다. 그때도 처음과 비슷하였다. 다음날 계속해서 앉는 연습을 하여 부축하여 앉아 있을수 있기까지는 약 4일이 걸렸다.
10월 30일 그렇게도 꼼짝도 하지 않던 엄지손가락이 조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집사람이 손뼉을 치면서 기뻐하고 병실에 환자 보호자들도 손뼉을 치면서 기뻐해 주었다. 한편 우리 누나가 이웃집에서 면회 오는 편으로 전복 죽을 끓여서 보냈다. 직접 가지고 오고 싶지만 일어나지도 못하는 동생의 모습을 볼 자신이 없어서 인편으로 보냈단다. 전복 죽은 참 맛있었다. 이런 마음으로 인근 의료기상사에 가서 휠체어를 빌려 오기로 하고 집사람이 갔는데 목 받이가 있는 휠체어는 4만원이고 다리 받이만 있는 것은 3만원, 일반 휠체어는 이 만원이란다. 나는 목을 가눌 수 없으니까 4만원을 주고 빌려와 간호사와 옆 환자의 보호자가 함께 나를 휠체어에 태우려고 5명이 동원되어 어렵게 휠체어에 태웠다. 그런데 웬일인지 엉덩이가 아파 앉아 있지를 못하였다. 2개월 이상 누워 있다보니 엉덩이에 뼈만 남아 있어 그런 것 같아 폭신한 방석을 사와도 거의 마찬가지였다. 방법은 계속 연습하는 것 외는 방법이 없나보다.
처음으로 휠체어 타고 복도를 나갔다. 처음 차를 타고 창문을 보는 것과 같이 옆에 있는 물체가 확확 지나가면서 멀미를 하는 것 같아 천천히 가줄 것을 요구했다. 첫 외출은 약 5m정도 왕복으로 끝났다. 오늘 점심부터는 죽이 끝나고 밥이 나왔다. 밥을 먹어도 역시 맛이 없었다. 오후에 어머님의 전화가 왔다. 평소에 집사람이 어머니가 전화가 오면 매일 조금 좋아졌다는 것 외는 다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내가 말을 할 수 있으니까 전화를 바꾸어달라고 한다며 내 귀에 대어주었다. 통화하면서 울지 않을 거라며 집사람과 약속했건만 목소리를 듣고 그만 울음이 복받쳐 통화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말았다.
오늘이 11월 1일 병원에 입원한지도 이제 2개월이 지났다. 11월이면 소방서에 서는 ‘전국 불조심 강조의 달’ 각종행사 및 ‘2000년 소방대상물 자료조사’ 등으로 정말 분주할 것인데 병원에서 누워있는 이 마음 답답할 뿐이었다. 오늘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모 일보에 나의 기사가 나왔다며 전화가 왔다. 곧 면회시 가지고 간다면서 연락이 왔다.
오늘은 회진 때, 오늘부터 물리치료실에 가서 치료를 받으라고 해서 회진 후 소변줄 달고, 링거주사도 달고, 주렁주렁 달고 물리치료실에 도착하니 평소에 병실로 와서 치료해 주던 물리치료사가 안내하여 뒤 목 받이가 있는 자전거 타기, 양손을 묶어 아래위로 당기기 등을 하고 병실로 들어 왔다. 휠체어도 엉덩이가 아파서 조금씩 밖에 탈수 없었다. 11월 2일 기관튜브 뺀 자리가 이젠 완전히 치유되어 이제 말은 거의 완전한 느낌이었다. 오늘부터는 휠체어 타고 오전에는 물리치료 받고 오후에는 건물 밖 양지 바른 곳에 가니 보호자들이 모여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담배 중독이 얼마나 심한지 얼마 전에 호흡기를 제거하고 나와서도 담배가 피우고 싶은 생각이 나니 한심한 노릇이다. 담배를 주더라도 손이 움직이지 않아 피울 수도 없는데 말이다.
몇월 며칠인지는 모르겠으나 어느 일요일 그렇게 보고싶던 아들( 민수 일궁 ),부모님, 동생이 내가 좋아하는 음식 등을 만들어 가지고 면회를 왔다. 어머니는 병실에 들어서자 소리내어 우시고 아버지도 눈물이 고여서 들어오셨다. 한편 두 아들은 누워 있는 모습을 보고 표정이 거의 없이 들어와 내가 팔 좀 주물려 달라니까 그때서야 옆에 와서 주물러 주었다. 아들들은 1층의 누나가 학교 보내고 빨래 등 밥을 해주고 있었다. 나 때문에 누나가 고생이 많다. 그렇게 걱정을 하시면서 부모님과 동생 두 아들은 집으로 갔다. 이렇게 나 하나 때문에 온 가족이 물적, 심적으로 고생이 많으니 이 얼마나 부모님께 불효하고, 동기간에 우애를 저버리며, 자식에게 어버이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는 일인가? 하루 빨리 일어나 못 다한 도리를 하는 수밖에 없다고 다짐해 보았다. 동생이 오면서 내 기사가 난 신문을 가지고 왔다. 침대 등받이를 올려 나의 기사를 읽어보았다.
밤낮없이 불구덩이 쫓던 황해만 소방사 희귀병에 굳어버린 팔다리
24시간 군민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하다 격무에 지친 소방관이 결국 쓰러져 지난 8월중 병원으로 실려간 뒤 외로운 투병생활을 하고 있어 주위를 안타깝게 하고 있다 그 주인공은 거창 대평파출소에서 구조. 구급업무를 담당하던 황해만 소방사(39). 황 소방사는 평소 소방파출소의 구조 및 구급활동을 해오면서 과로가 누적되어 자주 피곤함을 느꼈으나 적은 인원 탓으로 휴가를 가지 못하고 계속 미루어 오다가 지난 8월말 늦게 휴가를 가 휴가 첫날 아침 8시께에 팔다리에 힘이 빠지는 증세로 쓰러졌다. 이에 따라 황씨는 대구 가톨릭 병원으로 긴급 후송되어 진료를 받은 결과 ‘길레인-바레 증후군’이라는 원인불명의 희귀병이란 진단을 받았다 대구 가톨릭 병원의 배 준석 담당의사는 “길레인-바레 증후군은 급성 염증성다발성 신경염으로 사지가 마비되는 심각한 질환으로 아직까지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으나 과로, 심한 운동 등으로 면역이 저하되었을 때 유발될 가능성이 높으며 약 1년간 약물 및 재활치료를 요하나 상태를 속단할 수 없다.”고 말했다. 황소방사는 현재 호흡이 곤란하여 기관지를 절개, 기관 삽관하여 호흡기에 의존, 투병생활을 하고 있다.
인력부족 탓 피로 누적 미루던 휴가 첫날 봉변 97년 집불타 어려움 후 병마까지 겹쳐 큰 시름 황소방사는 지난 97년에 화재로 가재도구를 모두 태워 큰 재산 손실을 보았는데 이번에 병마까지 겹쳐 매우 어려운 형편이다. 아내는 남편 병 수발을 하고 있고 초등학생인 어린 두 아들은 고모 집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다. 거창 소방서 직원들은 황씨가 이처럼 어려움에 처하자 류 해운 서장을 비롯한 동료직원들이 작은 정성을 모아 100여 만원을 전달했다. 하지만 이는 현지까지의 치료비 1,000여 만원과 앞으로의 치료비에 턱없이 모자라는 것이어서 주위의 온정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거창=최 병직 기자)
일부 약간 틀린 내용도 있었지만 그 때의 나의 상황을 제대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읽고 나니 눈물이 앞을 가렸다. 옛말에 복은 쌍으로 안 오고 화는 홀로 안 온다더니 그 말이 맞다. 계속되는 병원생활이 반복되었다.
이후로 지방신문(경남일보,신경남일보,영남일보,대구매일신문,등 거창의 주간지) 에 나의 기사는 많이 오르내렸다. 오늘은 소변 줄을 제거했다. 그런데 제거하니까 시원해서 좋은데 소변이 30~40분에 한번씩 계속 보고싶다. 잠을 자다가도 마찬가지다. 잠자는 집사람을 깨 울려면 방법은 침대의 안전보호대를 다리로 툭툭 처면 집사람이 일어나 소변을 받아준다. 2일째부터는 간격이 조금씩 벌어졌다. 오늘이 11월 8일 또 한가지 치료가 추가되었다. 물리치료 후 통증 치료과에 가서 경피신경자극(Tens)치료 받기 시작했다. 오늘이 소방의 날이다. 지금 근무중이라면 소방의 날 행사 등으로 바쁜 일과를 보냈을 것인데 병상에서 휠체어가 아니면 앉지도 못하니 정말 한심하다.
11월 12일 두 손의 움직임이 조금 있다. 이제 희망이 더욱 구체화되어 보이는 것 같다. 11월 14일부터는 허리에 벨트를 채워 집사람이 옆에서 부축하면 5~6발자욱씩 걸음마를 할 수 있는 뜻깊은 날이다. 한시간 후 담당의사가 병실로 와서 걸어 보라고 했다. 다시 5~6발자욱쯤 걸어다니니까 의사도 기분이 좋은지 박수를 치면서 기뻐하면서 축하해 주었다. 다음날 일어나 오전에는 물리치료 받고, 오면서 통증 치료과에 들러 Tens받고, 점심 식사 후 오후에는 병실 복도에서 집사람과 같이 병실복도에서 서고 걷는 연습을 정말 힘들지만 먼 훗날을 위하여, 아니 우리 아이들한테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정말 열심히 연습하고 또 했다. 그렇게 열심히 한 결과 11월 23일 집사람과 같이 병실복도를 약 100m 정도는 걸어갈 수 있었다.
오늘 교수님께서 회진시간에 한번 걸어 보라고 했다. 걷고 나니까 이제 집사람보고 고단백질 음식, 쇠고기 등도 해주라면서 체중이 회복 되야 신경이 빨리 회복된다는 것이었다.그때 체중이 63Kg이었다. 그래서 집사람은 거의 매일 병원에서 나오는 부식 외 매일 쇠고기 등을 볶아 주었다 얼마 후 이웃집 형수가 평소에 내가 좋아하는 토란국 등 밑반찬을 해 가지고 직접가지고 왔다. 정말 이분들에게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더욱 열심히 운동해야 되겠다고 다짐해 본다. 사람이 서고 걷는다는 것이 얼마나 많은 힘이 있어야 된다는 것을 실감하는 순간이다.
오늘은 수간호사가 집사람을 보고 병실을 남자 전용병실로 옮기라는 것이다. 환자들과 보호자들도 정이 들었는데 옮기라는 것이다. 현재 있는 병실은 커튼이 있으니까 대소변을 받아내는 환자가 있어야 되고 조금이라도 걸어다니는 환자는 커튼이 없는 일반 병실로 옮기라는 것이다. 옮기는 것이 싫지만 한편으로는 이렇게 한번씩 옮기는 것이 그만큼 내가 회복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으므로 즐거이 옮기기로 했다. 이제 매일 재활운동도 강도를 높여하고 시간만 있으면 걷고 또 걷고 해서 이제 계단 오르는 연습에 이르렀다. 오늘은 병실을 옮기는 날이다. 이제 까지 정들은 환자 보호자와 작별을 하고 남자전용 병실로 옮겼다. 나는 몸만 가지만 병원 생활이 오래 되니까 일반 가정집과 같이 살림이 늘어 이사 짐이 상당히 많았다. 집사람과 학생간호사가 상당히 고생을 많이 했다. 이곳에 오니 환자가 내과 1명이고 거의 신경과(뇌졸중)병상이었다. 병실은 거의 비슷하지만 창문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전 병실보다 바깥 전경은 조금 좋다.
12월 3일 20세기 마지막 달이다. 이제 혼자서도 걸어 다닐 수 있었다. 또 달라진 것이 있다. Tv가 30분에 100원씩 넣어야 볼 수 있었는데 12월 1일부터 돈 통을 철거했기 때문이다. 혼자서 걸어 다니니까 엘리베이터를 타야 되는데 손을 사용할 수 없으므로 코와 입술을 혀로 밀어 가고자 하는 층을 눌러서 다녔다. 그래도 제일 중요한 것은 밥을 혼자 먹지 못하고 집사람이 먹여주어야 먹고, 대변은 좌변기에 바지를 내려 주어야 앉고, 일어 설 때는 일어켜 주어야 일어나고, 소변도 바지를 내려 주어야 되니까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입원한지가 3개월이 지나 처음으로 샤워를 시켜 준단다. 이제까지는 물수건으로 몸을 닦아주는 것 외는 할 수 없었다. 플라스틱의자를 샤워실로 가지고 가서 나를 의자에 앉혀놓고 집사람은 머리도 감겨주고 몸도 씻어주었다. 자유로이 움직 일수 없으니까 어려움은 아주 많았다. 힘겹게 하고 나니까 아주 상쾌하고 날아갈 것 같은 느낌이었다.
오늘 우리병실에 새로운 환자가 왔다. 치료제를 보니까 내가 받은 처방과 같은 치료를 받고 있는 것이다. 병명은 동일한데 아주 약하게 온 것이다. 처음에는 잘 걷지도 못하더니 치료제 맞고 나서 물리치료실에 3일 정도 다니더니 곧 퇴원을 했다. 저렇게 퇴원하면 얼마나 좋을까 정말 부러웠다. 며칠이 지나 구내 이용원에서 이발을 하는데 아저씨가 전에 중환자 실에서 이발하고 두 번째 만남이었다. 아저씨도 전에 암환자였다며 희망을 가지고 열심히 운동하면 반드시 회복 될 거라면서 위로해 주었다. 이발과 머리 감겨 주는데 오천원이란다.
12월의 어느 날 전국에서 약 60명의 친구들이 병문안을 왔다. 위로금도 수백 만원을 모금을 해서 빠른 쾌유를 바라면서 이렇게 온 것이다. 비록 이 자리에는 오지 못한 친구도 같이 쾌유를 빈다면서 친구대표가 전해 주었다. 친구들은 면회를 마치고 갔다. 동창회장 구재관은 벌써 네 번째 면회다 정말 모든친구에게 고맙다는 말밖에 다른 할말이 없다. 그 다음날 대구 달서소방서에 근무하는 백 병인 씨가 우족 곰국과 밑반찬을 직접해서 아이스박스에 담아 가지고 왔다. 정말 발병하기 전에는 잘 모르는 사이였다. 그런데 이렇게 해온 것이다. 눈물나게 고맙다. 이런 분들의 격려에 힘입어 더욱 열심히 운동했다. 정말 우리 사회는 따뜻한 정이 너무나 많이 흐르는 곳이다. 앞으로 어떻게 이 빚을 갚아가야 할지 걱정이 앞선다. 며칠전 우리 병실에 환자 한 분이 들어왔다. 병원에 오래 있다보니 환자를 보면 대충은 무슨 환자인지는 짐작이 간다. 중풍환자였다. 병실에 들어와 조금 누워 안정을 취하고 있었다. 침대의 환자 나이 등을 보니 69세의 p모씨 아저씨였다. 조금 있더니 아저씨가 아내(보호자)에게 볼펜과 노트를 달라고 한다. 일어나 앉지도 못하면서 침대 등받이 올려 달라고 하여 등받이를 올려주니까 침대 상위에 올려놓고 무엇인가 쓰더니 그것은 유서였다. 이분은 그 나이에 대학까지 졸업하고 약 50년 전 모 면소재지 경찰 지서(현 파출소)장도 하고 한때는 엘리트이시고 청도에서 일류 갑부였던 것이다. 전답이 일백 마지기가 넘었다고 한다. 전당포 운영에 망하고 증권해서 망하고 이제 자녀 교육시키고 출가시킨 것 외 남은 것은 20평 짜리 아파트 밖에 없단다. 어느날 쓰러져 이 병원에 119구급대로 오게 된 것이었다. 부부가 기독교 신자였다. 아무리 많이 배우고 영화를 누린다 한들 이렇게 자기 몸 하나 가눌 수 없다면 그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참으로 인생에서 건강만큼 중요한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환자나 마찬가지로 약 1주일간 링거주사를 맞고 물리치료실로 내려가 자전거 페달에 발을 묶고 페달 돌리기 및 손을 묶고 상하로 당기기 및 의자에 앉았다가 일어나는 연습 등이다. 어느 듯 조금씩 걷기 시작하고 같은 환자들을 눈만 뜨면 보니까 병원에 먼저 온 나로서는 지도해 줄 것이 많았다. 물리치료 갈 때도 같이 가고 저녁 먹고 걷는 연습할 때에도 같이하고 나도 처음 걸을 때를 상기하여 지도도 해주었다. 그분이 나를 보고 선생님이란다. 병원에서 이때까지 도움만 받다가 처음으로 도움을 줄 수 있었다. 매일 그분과 열심히 노력하여 나날이 발전을 하였다.
하루는 옆 병실에 나와 같은 병명으로 입원한 외국인이 있었다. 나와 같은 병이라기에 병실에 가보니 내가 받은 치료제를 맞고 있었다. 호흡이 잘되지 않아 고통을 호소하였다. 나와 같이 피를 뽑아 산소 수치 등을 검사하더니 이상이 없단다. 방글라데시 인인데 발병한지가 한 달이 넘었다는 것이다. 면회 온 직장동료가 한국말을 좀 잘하였다. 방글라데시에서는 똑똑한 사람이란다. 대학까지 나와서 결혼도 하고 한국까지 돈을 벌러 왔다가 변을 당한 것이다. 돈도 없고 하여 하루하루 미루다 음식을 먹으면 구토를 하고 하여 병원으로 오게 되었단다. 의사와 대화도 잘 안되지 그러던 그 날밤 의사와 간호사가 분주하게 뛰어 다니 더니만 그 환자가 하늘나라로 간 것이다. 발병하고 곧바로 왔으면 물리치료도 받지 않고 치료제만 맞고 바로 퇴원하면 될 것인데 결국 하늘나라로 가버렸다. 조금 더 잘 살아 보겠다고 이역만리 타국에 와서 이 무슨 변고란 말인가. 저 사람도 고국에 가면 사랑하는 가족도 있을 텐데 그들은 얼마나 큰 슬픔을 안고 살아가야 할 것인가. 참으로 남의 일 같지 않게 마음이 쓰라렸다.
오늘은 우리 도 소방본부에서 본부장님과 우리 서장님 본부관계자 분들이 병 문안을 오셨다. 박권섭 본부장님은 전에 서장님으로 계시던 분이다. 도 본부에서 본부 및 12개 소방서에서 모금 운동을 하여 400만원이 넘는 돈을 모금해 오셨다. 그렇게 건강하던 네가 왜 그런지 이해가 안 된다면서 열심히 재활운동 하여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만나자며 면회를 마치고 돌아가셨다.
이제 한 해가 저물어 크리스마스가 다 되어간다. 이 병원은 천주교(가톨릭)재단 병원이라 신․구관 현관에는 마굿간을 만들어 아기 예수가 누워 있고 아기 예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한 준비가 한창이었다. 오늘은 성탄절이다. 오전에 의료원장 신부가 환자마다 선물을 주고 즐거운 성탄절 보내시고 빠른 쾌유를 빈다면서 ‘메리 크리스마스’하고 떠났다. 저녁에는 강당에서 환자 위안의 밤 행사가 마련되고 정말 성탄절 같았다. 어린이 재롱잔치가 끝나면 박수를 처야 되는데 손에 힘이 안 들어가니까 박수는 못 치고 그저 바라보기만 하였다. 중풍환자는 못쓰는 손은 밑에 두고 쓸 수 있는 손으로 위에서 내리치고 각양각색이었다. 정말 병원에서나 볼 수 있는 일이었다.
나는 항상 팔을 쓰지 못하니까 팔이 축 늘어져 있어 낮에는 퉁퉁 부어 올랐다. 저녁에 누워 잠잘 때는 가슴에 손을 대고 양손을 묶고 자고 나면 부기가 빠진다. 이제 몸에 달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호흡기, 소변 줄, 링거주사를 달고 다녔는데 이제는 그것들이 모두 사라졌으니 많이 발전했다.
오늘은 2000년 1월 1일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가는 순간이다. 세기가 바뀌는 순간에도 병원에 있는 셈이다. 이제 병원에 온 지도 4개월이 넘었다. 열심히 운동한 결과 양쪽 팔의 움직임이 제법 좋아졌다. 헐렁한 체육복 바지를 입고 소변보기에 도전했다. 역시 잘되지 않았다. 집사람과 같이 화장실에 가서 나 혼자 해본다고 했다. 잘되지 않는 손으로 바지를 내리고 소변을 보았는데 바지를 완전히 내리지 못하고 바지에다 소변을 본 것이었다. 혼자 해본다고 하다가 빨래만 늘여주었다. 중환자 실에서 올라온 지도 3개월이 지났건만 아직까지 수면제를 먹지 않으면 잠을 이루지 못했다. 수면제와 신경안정제를 먹고 나면 1시간 내로 잠이 들었다. 하루는 담당의사와 상의하여 집사람이 수면제를 빼고 대신 소화제를 넣어 나에게 먹인 것이다.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았다. 집사람에게 잠이 오지 않는다고 하니까 이상한 일이라면서 그냥 있는 것이었다. 결국 자정쯤 간호사실에 이야기하라니까 그때서야 가서 처방 받아 약을 가지고 온 것이다. 먹고 나서 바로 잠이 들었다.
오늘 오전 물리치료 중에 김 창호 선생한테 하루에 한번 밖에 할 수 없는 것을 물리치료사들이 병실에 치료하러 가고 없을 때 몇 가지 운동기구를 할 수 있도록 양해를 구하니까 의논해 보고 나중에 연락을 해준다고 하였다. 오후에 병실에서 만났다. 아무도 없을 때 가서 하라고 승낙을 받았다. 정말 고마웠다. 이제 오전에는 공식으로 오후에는 비공식으로 매일 두 번씩 계속 열심히 운동하였다. 한사람이라도 물리치료실에 있으면 들어 갈 수 없다. 다른 환자 보호자도 이렇게 하고싶어 하니까 눈치를 보고 아주 조심껏 해야 하였다 하루는 집사람과 같이 운동을 하고 있는데 매일 운동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물리치료실 최 현임 실장이 환자 분처럼 이렇게 열심히 운동하는 환자는 처음 보았다며 지금까지 해보지 못하던 근력강화 운동을 시켜 주시고 병실에서 하는 운동 법을 가르쳐 주면서 매일 이 시간에 시간이 나는 대로 운동을 시켜 주기로 하였다. 정말 고마운 분이다. 최 현임 실장은 소아 물리치료만 해주고 일반 환자는 치료하는 환자가 한 명도 없었다. 내가 처음이었다. 환자 분처럼 열심히 하면 반드시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면서 조언도 해주었다. 최실장의 도움에 힘입어 매일매일 오전 오후에는 물리치료실에서 운동하고 저녁 먹고는 병원복도에서 걷는 연습 및 계단 오르내리기 등 할 수 있는 한 열심히 운동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주치의인 이 동국 과장께서 회진 중에 나를 보고 이제 대학병원에서 치료는 다 했으니까 집 가까이 가서 치료를 받으라는 것이었다. 이제 한창 발전하는데 앞이 캄캄했다. 종합병원에는 장기환자를 퇴원을 종용하는 사례가 많다. 장기 환자는 건강보험공단에서 보험 수가를 낮추어 지급한단다. 며칠 후 토요일 외출을 한번하고 오라는 것이었다. 집에 가서 근처 병원에 물리치료 받을 곳도 알아보고 바깥 환경에 적응훈련도 할 겸해서 한번 다녀오라는 것이다. 외출 허락 받고 꿈에 부풀어 외출을 했다. 130여일 만에 바깥 외출이다. 현관에서 택시를 타고 성당주차장에 도착하여 광장에는 잘 걸어 들어갔는데 주차장 대합실에 들어가는 계단이 병원계단보다 조금 높았다. 그 계단을 올라가지 못하는 것이다. 집사람이 엉덩이를 밀어 올려 겨우 들어섰다. 남자 화장실에 집사람이 따라가야 소변을 볼 수 있으니까 집사람이 남자 화장실에 따라 들어가니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본다. 얼마 후 승차권을 구입해서 거창 행 버스를 타려고 하는데 승강장에서 버스 첫 계단은 쉽게 올라갔는데 두 번째 계단은 너무 높아서 올라 설 수가 없었다. 마침 버스기사가 평소 알고 지내는 이였다. 집사람은 엉덩이를 밀고 기사는 팔을 잡고 당기고하여 버스에 오를 수 있었다. 거창에 도착해서 택시를 타고 집에까지는 잘 갔다. 아직까지 택시에서 내리는 것도 상당히 힘들었다. 온다는 소식을 듣고 누나와 조카 이웃집 사람들이 배웅을 해주었다 집에 올라가는 데도 장애는 계속 되었다. 병원의 계단하고는 차이가 너무 많이 났다. 누나 집에 들어서니 병원 공기침대에만 생활하다 거실에 쇼-파가 없으니까 바닥에 앉아야 되는데 겨울 이불을 갔다놓고 앉아도 불편함은 계속되었다. 그동안의 병원생활 등을 이야기하다 시간이 흘러 누나가 밥을 떠 먹이고 나는 맛있게 받아먹고 2층으로 올라갔다. 식후 매일 먹는 약을 먹고 Tv를 보다가 수면제 등을 먹고 잠자기 시작했는데 잠자리가 불편하여 잠을 이룰 수가 없어 집사람에게 방바닥에 이불을 펴달라고 하여 잠을 청하였으나 결국 밤새 뜬눈으로 아침을 맞았다. 그렇게 오고싶었던 집인데 하룻밤이 힘들었다. 아침을 먹고 병원에 가자고 했다. 도저히 불편하여 안되겠다며 이야기하니까 병원이 그렇게도 좋으냐고 누나는 노발대발하였다. 버스도 타지 못하겠고 결국 아는 사람 개인택시를 불러 병원으로 향했다. 택시기사 아저씨는 연료비만 받고 열심히 운동하여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만나자면서 병실에까지 짐을 들어다주고 떠났다. 나는 항상 신세만 지고 산다. 병실에 들어가서 병실에 누우니 마음이 푹 놓이고 속까지 후련하다 집사람은 나를 보고 병원 체질이란다. 옆 환자들은 나를 보고 전부 부러워한다. 그렇게 첫 외출은 끝이 났다.
이튿날 회진 때 병원마다 다니면서 물리치료 받을 곳을 알아보았는데 핫-팩 등 노인위주로 물리치료실이 되어 있어 운동치료는 거의 할 수 없는 시설이라면서 어느 정도 호전될 때까지 좀더 치료받을 수 있도록 해 주십사 하고 말씀드리니 과장님은 흔쾌이 승낙을 해주시면서 환자 분은 이제 운동 외는 없으니 열심히 운동하면 한 것만큼 성과가 있으니 열심히 운동하라고 당부까지 해 주셨다.
일과는 매일 반복되었다. 오늘 체중을 제어 보니 67Kg까지 늘었다. 몸 상태는 양팔의 움직임이 제법 좋아졌다. 앞뒤로 팔을 흔들면 머리까지 손이 올라갔다. 얼마 만에 내 손으로 머리카락에 손이 닿아보나 신기할 뿐이었다.
이제 얼마후면 설날이다 외출을 나가면 첫 외출처럼 불편을 겪지 않으려면 더욱 열심히 운동해서 외출을 가야 된다는 각오로 하루하루 운동이 계속되었다. 어느새 이틀 전으로 다가왔다. 마침 6촌 동생이 병원으로 갈 테니까 같이 가자고 했다. 외출 허락 받아 기다리고 있으니까 동생부부가 병원현관 앞으로 와주었다. 약2시간 후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부모님과 마을 어른들이 고생이 많다며 반겨준다. 밥도 내 손으로 먹지 못하지만 걸어서 집으로 갔다. 집에 들어서니 현관문을 열어야 되는데 열 수가 없으니 뒤따르던 아들이 열어주어 들어갔다. 방에 들어가려니까 문을 옆으로 밀고 들어갈 수 없어 도움을 받아 들어갔다.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부모님은 양손에 한 분씩 잡고 만져주시며 눈물이 고이셨다. 거실에 앉아 있어도 불편하고 나는 침대에 가서 누워있었다. 좀 누워있으니까 저녁때가 되어 어머니가 밥을 먹여주시고 나는 받아먹었다. 나는 침대에 누워있고 가족들은 거실에서 밀린 이야기하느라 정신이 없다. 밤10시쯤 집사람보고 약 먹여 달라고 하여 먹고 잠을 잤다. 아침에도 어머니가 밥을 먹여주었다. 조금 있다가 바람도 쐴겸 마을 뒤 농로를 걸어보기로 했다. 아들을 앞세우고 약 300m쯤 가다가 다리가 아파 돌아왔다. 옛날 어릴 적에는 지게에 나무를 한 짐 해서 지고도 뛰어다니던 길이건만 홀몸으로도 다리가 아프니 옛날처럼은 안되겠지만 50%라도 됐으면 한이 없겠다 싶었다. 휠체어 타고 밖에 한번 나갔으면 하는 것이 목표였건만 이미 벌써 목표는 달성했건만 욕심은 끝이 없나보다. 까치설날은 이렇게 지나갔다. 저녁식사 후 작은방 거울 앞에서 제자리달리기를 약10분간 뛰고 나니 몸에 땀이 약간 나서 땀을 닥은 후 잠자리에 들었다.
자고 일어나니 설날이다. 아침 일찍 부모님께 나를 제외하고 세배를 하였다. 나는 절을 할 수 없었다. 엎드렸다 일어날수가 없기 때문이다. 얼마 후 큰집부터 차례를 지내고 나서 오후가 되니까 누나네가 세배를 오고 이웃집 친지들이 부모님께 세배를 하러와서 나를 보고 전부다 애처로운 눈으로 고생이 많다고 위로 해준다. 나는 생각한다. 반드시 열심히 운동해서 다음에 만날 때는 정상인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다짐했다. 오후 늦게 누나네와 같이 거창으로 갔다. 집 앞에 도착하니 주차해 놓은 프라이드 승용차가 눈에 들어온다. 이미 5개월이 넘게 시동도 안 걸어 주고 방치해 놓아 다시 사용 할 수 없을 것 같다. 집에 가서 잠을 자는데 첫 외출 때보다는 훨씬 잠자리가 나아졌다.
오늘은 2월6일 이제 병원에 들어가는 날이다. 사과와 한과를 구입해서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갔다. 병실에 들어서니 병실환자들이 설 잘 쉬고 오냐며 반겨주었다. 병실을 평소 휴일과 다름없었다. 한편 사과와 한과를 설에도 쉬지 못하고 고생하는 의사와 간호사에게 조금 주고 병실에서 나누어 먹었다. 설에도 집에 가지 못하는 환자들을 보니 나는 이분들보다는 다행이다 싶었다. 병원에 입원한지도 오래됐지만 내가 지금까지 만난 환자들이 입원 후 이 병동에서만 약 100여명은 될 것이다. 대개 연세가 많은 분들은 나를 보고 우리들은 이제 살만큼 살았으니 젊은 사람이 참 큰일이라며 위로해 준다. 그 중에서 나이가 나보다 조금 많은 한 사람이 있었다. 그분은 대구의 어느 한방병원에서 치료를 하다 이 병원으로 오게 되었단다. 내가 이비인후과 치료받으러 다닐 때 침대 카에 누워서 보니 그 때 그 분의 부인이 복도에서 언어 연습과 걸음연습을 시켜주고 하더니 내가 좀 걸어다니니까 만날 수 있었다. 그분은 발병 전에는 경남일원에 시장을 다니면서 철 장사를 하던 이로서 대구시내에 2층 짜리 집도 있고 딸 아들과 4식구 행복하게 살다 이렇게 된 것이었다. 이분은 평소 지병인 당뇨병 합병으로 뇌졸중(중풍)이 온 것이다. 어느 집과 마찬가지로 딸이 밥을 해먹고 학교에 다니고 있단다. 입원한지 약 3개월이 되어서 조금씩 걸어다니는데 그때 큰 형님이 중풍으로 쓰러져 이 병원으로 온다면서 갑자기 퇴원 수속을 밟아 퇴원을 해버렸다. 겨우 지팡이 짚고 걸어다닐 정도다. 그 날밤 그분 형님은 중환자실로 입원을 했다. 한 병원에 형제가 같이 입원해 있다는 것이 쑥쓰러워서 먼저 퇴원한 것 같았다. 3형제 중 2명이 한 해에 중풍이 온 것이다.
2월 10일 오늘부터는 두 손까지, 손목까지는 힘이 전달되니까 두 손으로 물건을 잡을 정도가 되었다. 매일매일 반복되는 재활운동으로 아주 조금씩 발전을 한다. 2월 셋째주말 대구의 퇴원한 모씨가 연락이 왔다. 일요일날 달성공원에 가서 운동도 할 겸 바람 쉬러 가자는 것이다. 주일날 외출을 허락 받고 평리동으로 우리는 갔다. 평리동에서 만나 택시를 타고 달성공원으로 갔다. 공원 앞에서 내려 공원으로 걸어 들어갔다. 입구부터 병원보다는 완전히 다르다. 길도 울퉁불퉁하고 모든 것이 불편하다. 공원에 들어서 조금 걷다가 벤치에 쉬다하며 힘들게 구경을 하는데 중풍환자인 듯한 환자들이 간혹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모습이 보인다. 공원을 한바퀴 도는데 이렇게 많이 걸어 본적이 없어 아주 힘들게 돌아 나와 인근 식당으로가 점심을 먹고 모씨는 집으로 가고 우리는 병원으로 들어왔다. 이렇게 하루가 갔다. 이렇게 공원에도 나올 수 있는 것이 꿈만 같았다. 이제 사람 구실을 제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느 날 하루는 내가 평소에 쇼핑을 좋아하는 터라 근처에 모 할인점에 가기로 하고 병원을 나섰다. 할인점까지는 1㎞가 넘기 때문에 상당히 힘들었다. 도착하여 앉아서 좀 쉬고 싶은데 아무리 둘러보아도 앉아 있을 곳은 없었다. 체면도 없이 주변의 쌀포대 위에 나는 앉아 있기만 하고 집사람만 필요한 것을 사가지고 왔다. 좋아하던 쇼핑은 못하고 힘들게 운동만 하고 병원으로 왔다. 병원 내와 바깥은 천지차이다. 병원에는 복도에 양쪽에 손잡이라도 있고 외래진료시 대기하는 긴 의자라도 사이사이 있어서 쉬다 걷고 쉬다 걸을 수가 있지만 바깥에는 장애자의 편의시설은 거의 전무한 실정이다. 아무리 건강한 사람도 어느 누구나 어느 한 순간에 장애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두가 인식한다면 이러지는 않을 텐데...
세월이 흘러 3월 중순이다. 오늘이 재활의학과 진료를 시작하는 날이다. 이제까지 물리치료실만 운영하다가 재활의학과를 증설하는 것이었다. 서울연세대학병원에서 전문의 자격을 받아 이 대학병원 전임강사로 부임해서 온 것이었다. 이때까지 신경과 처방에 따라 물리치료를 하다 재활의학과 처방에 따른다는 것인데 차이는 느낄 수가 거의 없었다. 그렇다고 병실을 옮기는 것이 아니고 단지 진료만 받는다. 매일의 일과는 거의 같았다. 발전이 있다면 밥을 비벼주면 내가 힘겹게 수저로 떠먹을 수 있는 것이 큰 발전이다. 병원생활도 이제 재미있다. 시간이 흘러 3월 하순이다. 이제 퇴원 할 날이 가까워진다. 퇴원을 걱정하고 있는데 누나가 와서 돈 6백만원을 주는 것이었다. 무슨 돈이냐고 물었더니 너 외에 우리 6남매가 돈을 모아 차 구입하는데 쓰라며 가지고 온 것이었다. 운전을 할 수 있는 날이 올지는 모르지만 열심히 운동하여 운전하는 모습을 보여 달라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듣고 다짐을 하였다. 반드시 운전하는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말이다. 생각을 해보니 퇴원을 해도 통원치료는 계속해야 하니까 집사람이 운전을 하더라도 치료가 한 두 달에 끝나는 것도 아니고 버스를 타고 다니면 불편함도 문제이지만 경비가 너무 많이 들기 때문에 장애자용 차를 구입하기로 하였다. 전에 휠체어를 처음 탈 때에도 임대해 놓고 타지도 못하고 약 일주일 동안 바라만 본 과거가 있지 않은가. 며칠 후 거창에 자동차 대리점에 연락을 하니 오후에 왔다 장애자용 LPG승용차로 하고 기어를 작동하지 못하니까 자동기어로 하고 시동을 걸지 못하니까 시동 리모콘을 설치하기로 하고 계약을 했다. 운전도 하지도 못하면서 기분이 좋아 잠이 오지 않았다.
어느 듯 3월 마지막 날이다. 드디어 긴 병원 생활을 마치고 퇴원하는 날이다. 참으로 어느 날 갑자기 병마가 찾아와 죽음을 생각하다가 이렇게 멀쩡하게 내 힘으로 걸어서 나가게 되었으니 병원 의사선생님, 간호사, 물리치료사 등 병원 관계자들과 가족들, 나를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오전에 물리치료실에 가서 물리치료 후 실장에게 퇴원한다고 하니 실장이 앞으로 치료는 어떻게 할건지 물었다. 그래서 여기 물리치료 외는 계획이 없다고 하니 실장이 내가 지금 대학원 공부를 하고있는데 교수님께 부탁해준다고 하더니 전화를 하여 교수와 통화를 하고 나서 나에게 4월4일 월요일 오후에 대구대학교 물리치료학과로 가보라고 했다. 인사를 하고 병실에 와서 퇴원준비를 하고 있으니까 퇴원결정 되었다면서 원무과로 가서 계산 후 약을 받아 짐을 챙겨 나오는데 신혼부부 살림만큼은 짐이 많았다. 하기야 병원생활이 7개월 5일이니까 짐이 많을 수밖에 없다. 한편 거창에서 나를 퇴원시키기 위하여 김진옥 반장이 현관 앞에 와있다고 연락이 왔다. 간호사와 학생간호사가 짐을 날라주어 승용차에 싣고 거창으로 향했다. 거창에 도착해 누나네와 친구들 이웃집식구들과 퇴원시키려온 김반장 식구와 군청 친구(박준옥)와 같이 식사하면서 병원생활 이야기 등을 하면서 마치 전쟁에서 승리하고 개선한 장군처럼 기뻤다. 식사 후 집으로 와서 Tv를 밤 깊도록 보다가 수면제도 먹지 않았는데 잠이 들었다. 7개월 넘게 먹은 수면제인데 이제 먹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밥 먹고 있으니까 자동차대리점에서 연락이 왔다. 차가 도착했다는 것이다. 집사람과 같이 택시를 타고 갔다. 차 문을 열어보니 잘 열리지 않았다. 등록해서 인계한다고 오후에 연락하면 오라고 해서 집으로 와 있으니 연락이 와 바로 갔다. 차를 운전해서 집으로 와야 되는데 일단 운전석에 앉았다. 직원에게 운전석을 맞추어 달라고 하여 집사람보고 리모콘으로 시동을 걸고 손 브레이크를 풀어달라고 하여 두 손으로 자동기어를 넣어 출발을 하니까 출발이 되는 것이었다. 정말 만세를 부르고 싶을 정도로 기뻤다. 전조등 및 히터는 작동은 안되지만 그래도 좋다. 집 앞에 주차해 놓고 내일은 어디로 가볼까 생각하니 잠이 오지 않는다. 이튿날은 합천 집에 가보았다. 병원에서 집에 그것도 직접운전을 해서 간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도 못했다. 집에 도착하니 부모님과 마을 어른들이 대견해 하면서 이만해도 한걱정 들었다며 기뻐하신다. 이렇게 온 것이 꿈을 꾸고 있는 것 같다.
오늘이 4월4일 월요일이다. 대구 병원에 가서 물리치료를 받고 오후에는 대구대학교로 갔다. 물리치료학과 배성수 교수 실을 물어 힘겹게 계단으로 3층까지 찾아 올라갔다. 교수님은 우리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발병은 언제고 각 부위 힘 정도를 파악하더니 겸임교수인 황보각 선생에게 인계해 주었다. 치료대에 눕게 하고 일대 일로 문리치료실장과 같이 1시간 정도 치료를 해주었다. 둘째 날 오전에는 병원에서 하고 오후에 4층 치료실로 갔다. 도착하니 황보 선생은 기다리고 있었다. 걷는 자세 교정과 스위스 볼(재활용 공인데 지름이 1m크기의 공을 말함)을 굴러주면서 발로 차보라면서 중심 잡는 운동을 시켜 주었다.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 1개월에 20번 대구에 왕복하니 가스를 넣어도 연료비가 상당하였다. 운전은 매일 하니까 자동으로 손 운동이 되는 셈이다.
4월 29일 오늘은 대구에도 안가니까 운동삼아 산나물 채취하러 누나와 같이 가기로 하였다. 인근 삼봉산으로 올라가는데 손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니까 풀에 미끄러져 하도 많이 넘어져 셀 수가 없을 정도였다. 막상 고사리와 산나물이 있는데도 손이 힘이 없어 보고도 채취가 안되니 걷는 운동으로 만족해야 했다. 집사람과 누나는 산나물을 많이 하였다. 집에와 늦은 점심을 먹으니 밥이 꿀맛이다. 대구에 가지 않는 날은 항상 산으로 갔다. 운동도 되고 공기도 좋으니 일거양득이었다.
오늘부터는 대구대학교에 가니까 스위스 볼을 던져주면 받는 연습도 하고, 집에서는 매직으로 글씨연습을 하고, 지도해 주는 대로 노래방에 가서 DDR도 열심히 하였다. 이렇게 하여 두 달 넘게 하고 나니 이제 큰 싸인펜으로는 글씨를 조금씩 쓸 수가 있었다. 6월 어느 날 병원재활의학과 진료를 받으며 서울에도 여기처럼 재활치료를 똑 같이 받는지 상담해보니 상당한 차이가 있다고 하여 의뢰서를 써달라고 하니 흔쾌이 의뢰서를 교수님의 스승인 문재호 교수님 앞으로 써주셨다.
서울까지는 운전이 불가능할 것 같아 버스로 다음 날 서울영동세브란스병원으로 향했다. 서울 가서 동생 집에서 잠자고 새벽 5시 30분에 병원으로 출발하였다. 7시 이전에 접수를 해야 당일 진료가 가능하다고 하여 접수를 하고 나서 구내식당에서 식사를 하는데 이제 식사는 젓가락으로는 안되지만 숟가락으로는 할 수 있었다. 도움 없이 식사를 하고 나서 재활의학과 외래진료 실 앞에서 3시간정도 기다려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 이곳에는 진료방법이 좀 달랐다. 사전에 레지던트가 예비 진료를 하고 진료카드를 만들어 놓으면 다른 레지던트가 진료카드를 보고 교수께 보고를 하면 문재호 교수는 듣고 대구에서 제자가 보내준 환자라고 반갑게 맞아주면서 사지 힘 등을 검정하고 입원을 결정하여 오는 6월5일날 오후에 입원하기로 예약 후 거창으로 왔다.
오늘이 기다리던 6월5일 입원 날이다. 08시 30분 서울행 여객버스를 타고 영동세브란스 병원에 집사람과 같이 도착했다. 어느 병원이나 마찬가지로 입원하게되면 가슴사진 찍고 심전도검사 후 정해진 병실로 들어가니 3인 실이었다. 대학병원은 처음에는 2~3인 실에서 며칠이 지나야 6인 실로 옮길 수 있는 것이었다. 중요한 것은 2인 실은 보험 외에 칠만원 3인 실은 오만원을 별도로 더 지불 해야된다는 것이다. 이 병원은 아직까지 Tv를 보면 30분에 100원을 넣어야 볼 수 있었다. 병실에 있으니까 담당의사가 와서 병실에서 할 수 있는 운동과 준비할 운동기구(완력 기 모래주머니 소형 아렁)등을 알려 주었다. 운동기구 등을 준비하고 나니 저녁밥이 나왔다 밥 한끼에 육천오백원이란다 병원 밥으로는 아주 잘 나왔다. 식사 후 바깥에 가서 걸어다니다 와서 잠을 잤다. 이튿날 아침에 일어나니 현충일이라 물리치료도 없고 하루종일 개인생활로 보내야 한다. 오후에 서울친구(국가보훈처 임성현)가 병 문안을 왔다. 대구에서 보고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집으로 가고 하루가 넘어갔다.
7일 아침 일어나니 담당의사가 식사 후 물리치료실로 내려오라는 것이다. 그래서 식사 후 물리치료실로 갔다. 얼마 후 문재호 과장이 회진을 돌았다. 여기는 대구와는 다르게 담당의사가 교수에게 보고하면 교수는 열심히 운동하라면서 지나갔다. 회진이 끝이 난 것이다. 대구대학교와 같이 운동치료사가 약30분 정도 일대 일로 해주고 나서 기구를 몇 가지하고 작업치료를 하는 것이다. 작업치료는 말만 들었지 처음이다. FES해주고 콩으로 양손을 문질러 주고 다른 그릇으로 옮기라는 것이다. 크기가 다른 나사를 풀었다 조였다 하고, 찰흙으로 엿가락처럼 손바닥으로 밀어내어 가위로 잘라서 손가락으로 새알 같이 만들기도 하고, 찍찍이를 붙이고 떼고, 손가락사이로 작은 봉 옮기기 등을 하고나면 전기온열치료실로 가서 다리 등을 핫 팩과 전기(Est)를 하여 풀어주고, 점심을 먹고 또 오후에도 똑같이 하는데 전기온열치료실에서는 핫 팩과 전기를 하고 나면 수치료를 해주어 다리 등을 확 풀어주니 치료법이 아주 좋은 것 같았다. 좀 더 일찍 이런 병원으로 와서 치료를 받았다면 하고 후회를 해보기도 했다. 수도권과 지방의 차이인지 모르겠다.
그 날밤 근전도 실로 검사 받으러 오라고 해서 갔더니 레지던트가 검사를 하는데 대구에서 받는 것보다 아파서 참을 수가 없었다. 3시간 동안이나 검사를 받아도 끝이 없어 그만 하자고 하여 병실로 왔다. 한편 집사람은 이제 밥도 거의 혼자 먹지 문리치료실에도 혼자 다니지 세수와 샤워 양치질 대변 후 처리 및 양말 신는 것 등만 해주니 많이 수월해졌다. 이만해도 정말 살 것 같다. 이 병원에 입원하고 나서 하루 하루가 조금씩 발전하는 것이 보이는 것 같았다. 오늘은 토요일이다 아침 담당의사 회진 때 외출이 되는지 물어보니 교수가 허락하면 된다고 하여 회진 때 담당의사가 보고하니까 사고 치지 말고 잘 갔다 오라면서 허락을 해주었다. 서울에서 직장 생활하는 막내 동생을 병원에 오라고 하였다. 찾아 갈 수 없어서가 아니라 양손에 힘이 없어서 전철을 타면 멈출 때 넘어지기 때문에 부축을 양쪽에서 해주어야 되기 때문이다. 동생이 와서 함께 인천에 있는 동생 집으로 갔다. 병실에서는 에어컨을 계속 가동하지 않기 때문에 작은 선풍기가 필요하여 인근 마트에 가서 선풍기와 필요한 것을 사 가지고 왔다. 저녁은 가까운 식당에서 영양 밥과 약간의 반주와 같이 맛있게 먹었다. 집으로 와 작업치료사가 가리켜준 대로 화투놀이를 해보았다. 일반적으로 치는 것은 되지만 끝나고 가리는 것은 안되었다. 선은 다른 사람이 해주고 하는 수밖에 없었다. 손 운동은 좀 되는 것 같았다. 다음날 늦은 아침에 일어나 아침 먹고 동생은 교회에 가고 Tv를 보다 하고있는데 막내 여동생 내외가 왔다. 저녁 먹고 놀다가 전철을 타고 병원으로 들어갔다. 도착하니 21시였다.
병원 일과는 항상 거의 반복되었다. 토요일이면 외출 나가고 일요일에 들어오고 개미가 쳇바퀴 돌듯하다.서울 병원에는 희귀병 특히 근육병 환자도 많고 나와 동일병명의 환자도 있었다.그는 나보다 일곱 살 연하인데 20년 전에 이 병이 발병하여 치료를 하였는데 다시 재발을 했다는 것이다. 그는 서울시 공무원이었다.전에 왔을 때 하체는 이미 3급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간호는 부인의 직장생활로 모친이 하고 있는데 호흡까지는 안 오고 나보다는 소약하지만3개월이 됐는데 아직 서지는 못하고 벨트 메고서는연습과 작업치료를 받고 있는 중이었다.
2000년 6월 20일 화요일이다. 의약분업으로 외래진료 및 전공의(레지던트)들은 진료를 거부하여 입원환자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고 하나 이번 주에 퇴원을 해야 할 것 같았다. 23일날 퇴원을 하기로 하고 예약을 하려니까 진료를 하지 않아 예약도 못하고 퇴원을 했다. 며칠 지나 전화 예약을 하니 6월 30일로 예약을 받았다. 29일날 김천행 버스를 타고 김천서 열차를 타기 위하여 서울에 가서 동생 집에서 자고 아침 일찍 병원에 갔다. 10시쯤 진료를 받으니 7월3일 입원 허락을 받았다. 7월3일을 기다려 당일 아침에 또 서울행 버스를 탔다. 병원에 도착하여 원무과에 예약을 확인하니 전번 담당의사가 다른 곳으로 가면서 후임자에게 인계가 안되었는지 기다리라고 하더니 한참이 지나서 이번에는 2인 실에 배정되었다. 하루에 병실료가 칠만원이니 정말 부담이 크다. 여기도 입원하면 매일 반복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오늘은 2000년 7월 11일이다. 삼복 중 초복이었다. 점심때 초복이라고 삼계탕이 나왔다. 맛이 좋았다. 밖에 있으면 영양탕은 한 그릇할 것인데 병원이니 할 수 없다. 이제 계속되는 작업치료 덕분인지 싸인펜으로 글씨를 쓸 수 있고 젓가락도 나무젓가락은 사용이 되었다. 많은 발전이다. 대변 후 마무리가 아직 어렵다. 양치질은 두 손으로 하면 된다. 거의 혼자생활이 가능할 정도다. 오늘은 중복이다. 서울의 친구가 연락이 왔다. 병원 앞에서 중복이라고 영양탕이나 한 그릇하자면서 저녁을 먹지 말라고 하였다. 기다리고 있으니까 오후 7시쯤에 친구가 왔다. 친구와 같이 병원 앞에서 보신탕과 약간의 반주와 같이 맛있게 먹고 들어와 잠을 잤다.
22일 토요일 이제 또 3주가 되어 퇴원을 해야 되었다. 대형병원은 걸어다닐 수 있는 환자는 3주 이상 입원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제 서울입원도 끝인가 보다 운동치료사와 전기온열치료실 및 작업치료사들과 실습생(치료사)인사를 하고 퇴원을 했다.
7월 25일 대구 신경과 외래가 있는 날이다. 진료실에 도착하니 또 차트가 없었다. 정말 연구대상인가보다 외래진료 시에 흔히 있는 일이었다. 나의 질병에 대하여 연구하는 의사가 많이 있나보다. 한참을 기다려 진료를 받고 약국에 약을 수령하여 재활의학과에 접수를 하여 진료를 받으며 입원 할 수 있는지 물어보니 입원 승낙해 주었다. 내일 오전에 입원하라고 하여 이튿날 바로 짐을 챙겨 입원을 하니 신경외과 병동이었다. 서울에서와 같이 치료받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하니까 교수는 그렇게 처방해 주었다. 그런데 물리치료실에서는 처방대로는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집사람은 집으로 보내고 혼자서 생활을 하는데 어려움이 조금 있었다. 여전히 대변 후 처리가 어렵고 양말을 신는 것이 제일 어려웠다. 젓가락질은 나무젓가락으로 하면 되었다. 전번에 입원해 있을 때보다 추가된 것이 있었다. FES치료가 추가되었다. 최근에 구입을 한 것 같다.
토요일은 외박 나가고 평일의 생활은 항상 비슷하였다. 오전에는 물리치료실에서 오후에는 서울에서 배운 작업치료기구 등으로 보냈다. 기구는 나무판에 크기가 다른 각각의 나사를 고정시키고 조이고 풀고를 반복하고, 콩 문지르기, 옮기기, 찰흙이용과 팔굽혀펴기 연습 및 소형 아령 등으로 하루에 두세 차례 반복하면서 하루를 보낸다.
병원생활을 오래하니까 보고 듣고 해보고 하니 책으로 배우지는 않았지만 웬만한 물리치료사 정도는 되는 것 같다. 같은 병실에 있는 환자들에게 도움도 많이 주었다. 하루는 물리치료를 받고 병실에 올라오니 전에 중환자 실에서 옆에 있던 환자가 지금도 의식이 없는데 갑자기 더 악화되어 중환자 실로 입원해 일반병실로 들어갔다면서 보호자를 만난 것이다. 한편으로는 반갑지만 나는 혼자 서도 입원해 있는데 아직 의식도 없으니 애처롭다. 입원한 병실로 가서 지난 생활을 이야기하다 헤어졌다. 지금도 의약분업 때문에 전공의 파업은 계속 중이다. 신경과 병동을 지나는데 나의 주치의인 이동국과장님과 교수님들은 전공의가 없으니까 직접 환자 차트정리를 하고 있었다. 과장은 나를 보고 언제 입원했는지와 그간의 치료 등 힘을 테스트하면서 열심히 운동하라고 격려해 주셨다. 오늘은 2000년 8월 2일 수요일이다. 평상시와 같이 일과를 보내고 저녁시간에 옆 침대 환자 간병인이 김치찌개를 해서 병실에서는 별식으로 먹었다. 병원 생활을 오래하니 할인점에 쇼핑도 가고 병원생활이 재미도 있었다.
8월 8일 오늘은 우리 집 이사를 하는 날이다. 손을 못쓰기 때문에 나는 아무 도움도 못되어 우리 직원들에게 연락을 하여 도움을 받아 이사를 하였다. 저녁때 이사를 무사히 했다며 연락이 왔다. 내일 내가 퇴원한다고 인근횟집에 가서 회를 사가지고 와서 맛있게 먹었다. 오늘 퇴원이다 통산 4번째 퇴원이지만 나 혼자 하는 퇴원수속은 처음이었다. 교수님의 승낙 받고 원무과 확인 입원비계산하고 병원을 나서 거창 이사한 집으로 도착하니 정리도 아직 되어 있지 않았다. 우리가족은 매년 여름휴가철에 한번씩 2박3일정도 야영을 한다. 올해도 오늘부터 계획이 되어 있었다. 이사 정리는 미루고 대병으로 출발을 했다. 계곡에 도착해서 텐트치고 이럭저럭 하루가 지나갔다. 텐트에 잠을 자려니까 딱딱해서 못 자고 동생 집에 내려와 잠을 잤다. 남자들은 돌아가면서 밥도 하고 재미있게 3일을 보내고 또 내년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오늘이 2000년 8월 27일 발병한지 첫돌이 되는 날이다. 기념이라도 하듯 4식구가 식당에서 간단한 외식을 했다. 이제 내일 마지막으로 대구에 입원하는 날이다. 이제 이 생활도 너무 지루하다. 언제 끝이 날지 기약이 없다. 3주정도 입원 후 퇴원하여 그때부터는 병원에는 2달에 한번씩 약만 처방 받고, 집에서 매일 오전에는 수영장에 가서 수영하고 오후에는 인근 작은 산에 등산을 하는 일을 계속 반복하였다.
그때즘 마침 대병중학교 동창회에서 창녕 하왕산 등산을 한다고 연락이 왔다. 화왕산 같이 제법 높은 산을 이런 몸으로 오를 수 있을까 걱정되었지만 친구들에게 고마운 마음도 전하고 관심과 염려 덕분으로 이만큼 회복되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어 참석하기로 하였다. 늦가을 어느 일요일날 창녕으로 모여 산행을 시작했다. 내 몸이 걱정되었지만 정작 산행을 시작하니 다른 친구들도 바쁜 일과 등으로 운동을 하지 않은 관계로 나보다도 산행을 못하는 친구가 많았다. 친구들은 하나같이 나를 보고 이제 사람 다 됐다고 박수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정상에서 점심을 먹는데 쌀쌀한 날씨 관계로 손이 굳어져 친구들의 도움으로 점심을 먹었다. 나는 항상 많은 분들과 친구들의 도움으로 여기까지라도 온 것이다. 정말 감사할 뿐이다.
11월 어느 날 운동의 강도를 조금 높이기 위해 헬스장에 가보고 등록을 했다. 2~3개월은 물리치료보다 약간 높여 오전에는 런닝머신 위주로 하고, 오후에는 수영을 하고 하루 하루를 열심히 보냈다.
2000년 한해도 저물고 2001년의 새해를 맞이했다. 이제 복직은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하루도 쉬지 않고 열심히 운동한 결과 3월초 복직원을 신청하여 3월6일 복직을 하게 되었다. 지금 현재는 발병 전의 그 직에 그대로 재직중이며 아직까지 양손 및 하체의 일부 장애가 있지만 동료직원 여러분들의 도움으로 별 무리없이 맡은 바 임무를 성실히 수행해 나가고 있다. 그리고 운동은 틈나는 대로 꾸준히 해나가고 있다.
지금도 담배는 생간이 난다 지금3년이 지났건만 담배 중독이 얼마나 심한지 실감하지만 굳은 의지한테는 침투하지 못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열심히 생활하고 있다. 이제 두서 없는 글을 마치고자 한다. 서두에서 밝힌 바와 같이 나는 지금 덧 인생을 살고 있다는 생각으로 살고 있다. 병마와 싸우면서 수없이 다짐하였던 그 맹세들을 되새기면서 겸허한 마음으로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에 감사하면서 살아가고자 한다. 부디 지금도 나와 비슷한 병으로 고통과 절망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분들과 그 가족들에게 조금이라도 위안과 희망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끝’
“인터넷“ 질병정보에 알아보니 아래와 같다. Guillain-Barre syndrome (길레인-바레 증후군)
1. 어떤 병이며, 어떤 증상이 생기는가?
길레인 바레 증후군은 계절에 관계없이,나이에 관계없이, 성별에 관계없이,지역에 관계없이, 그리 드물지 않게 발생하는 질병이다.
길레인 바레 증후군의 발병1-3주 전에 가벼운 감기나 장염이 선행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병은 일종의 자가면역질환입니다. 자가면역질환이란. 쉽게 이야기하면,
자기자신의 일부를 외부 항원으로 잘못 인식하여 이에 대한 항체(자가 항체라
합니다)가 생겨 자신의 일부를 공격하여 질병이 생기는 것입니다.
즉 외부 항원에 대한 항원항체 반응이 일어나 외부 항원을 제거하는 것이
정상적인 면역기전인데. 외부 항원이 아닌 자신의 일부를 외부 항원으로 잘
못 인식하면서 면역반응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길레인-바레 증후군은 말
초신경에 발생하는 자가면역질환으로, 전신의 말초신경의 마비가 일어나는
병입니다.
주된 증상은 빠르게 진행하는 사지의 마비 증세입니다.
처음 증상은 보통 사지의 저림 증상이 생기면서, 사지의 마비 증세가 시
작되어, 수일에서 1-2주에 걸쳐 마비 증세가 심해집니다. 처음에 흔히 사
지에 저림 증세가 나타나는 것이 흔하나, 저림 증세 없이 마비증세가 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지 마비는 보통 상지보다 하지에서 먼저 시작됩니다.
사지 마비의 정도는 사람마다 다르나, 심한 경우는 사지의 완전마비와 더
불어 호흡근육까지 마비되는 아주 위험한 경우까지 진행될 수 있습니다.
사지 마비 이외에도 자율신경마비의 증세나 안면신경마비의 증세도 일어
날 수 있습니다.
2.어떻게 치료하는가?
이러한 증상이 발생하면, 지체 없이 신경과가 개설되어 있는 종합병원을
방문해야 합니다.
진행이 빠른 경우는 수 일 내로 호흡까지 마비되어 인공호흡기 보조를 받지
못하면 호흡마비로 사망할 수도 있기 때문에, 이병은 응급질환에 속합니다.
이 병의 주된 치료는 면역억제 치료입니다. 치료는 증상이 발생한지 2주
이내에 시작되어야 효과를 볼 수 있으며, 3주 이후에 치료를 하는 것은 효과
를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가급적 빨리 치료를 시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호흡이 마비될 경우를 항상 대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입원 치료 중 호흡기능을 면밀히 관찰하면서,필요한 경우 인공호흡기
까지 사용하게 됩니다, 따라서 길레인-바레 증후군의 치료는 인공호흡기가
준비되어 있는 병원에서 치료해야 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3.회복은 되는가?
길레인-바레 증후군은 수 일에서 1-2주 정도까지 점점 심해지다가, 그
진행을 멈춥니다. 일단 진행을 멈추면, 그 후부터는 아주 서서히 회복되는
경과를 취합니다. 일단 회복되는 경과를 보인다면 다시 증상이 악화되지는
않으며, 이 단계부터는 회복을 돕는 재활치료를 집중적으로 하게 됩니다.
회복 기간은 처음 마비정도에 따라 다르나, 아주 길게는 1년 이상에 걸쳐
서서히 이루어집니다.
대부분의 경우, 완전히 또는 가벼운 후유증 정도만 남기고 회복됩니다.
그러나 약 10% 정도의 환자에서는 심한 후유증이 남아 정상적인 보행이
불가능하기도 합니다. 후자의 경우는 대개 아주 증상이 빠르고 심하게 진행
하였던 경우로 호흡 마비까지 왔던 경우가 많습니다.
4.증상이 의심되면 환자들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증상이 의심되면, 지체없이 신경과 전문의로부터 진찰을 받아야 합니다.
가능한 빨리 진단되고 빨리 치료를 시작할수록, 치료의 효과를 더 기대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길랑-바레 증후군
질문- 저는 길랑-바레 증후군을 앓고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퇴원 한지 2개월인데 아직 조금밖에 회복이 안되었습니다. 보통얼마나 지나야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한지요? 현재 상태는 7세 정도의 힘밖에 안됩니다. 제나이는 29세입니다 지금현재 직장도 그만둔 상태입니다. 얼마나 지나야 되겠는지요? 자세히 설명 부탁드립니다.
답변- 회복의 속도는 개인마다 다름니다. 같은 길랑- 바레 중후군이라고 병의 성격이 다를수 있고 회복의 속도도 다릅니다. 보통은 수주나 수개월에 회복에 회복되지만,1년이상 걸리기도 합니다.그러나 2년이 지나서까지는 더 이상 회복을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열심히 물리치료(운동)을 하시면서 기다리는 수 밖에 없을 것 같군요.
수기록을 마감하면서 의료진 도움 주신분
주치의:대구가톨릭대학병원 신경과 주임교수:이동국 현)과장
〃 :서울영동세브란스병원 재활의학과 주임교수:문재호 현)과장
도움주신분:대구가톨릭대학병원 신경과 오희종교수 현)대구성모병원원장
〃 재활의학과 이중헌교수 현)전임강사
〃 신경과 배준석의사 현)전공의4년차
〃 문리치료실 최현임실장 현)문리치료실장 〃 〃 김창호치료사 현)운동치료사
대구대학교 문리치료학 배성수교수 현)대학원교수
〃 〃 황보각겸임교수 현)부산전임강사 서울영동세브란스병원 문리치료실 이선실치료사 현)작업치료사
차트협조:대구가톨릭대학병원 중환자실 최진영간호사 현)사직
이하 많은분이 있으나 현재 연락되는분만 기록
대구가톨릭대학병원 저의 주치의인 이동국 과장님의 수기록을 읽고 E-Mail로 보낸 답변서 입니다.
황해만님
대구가톨릭대학병원 신경과 이동국입니다.
보내주신 수기록 잘 읽었습니다.
눈물겨운 병상기록을 보고 느낀 점이 많습니다.
수기록을 통해 환자뿐만 아니라 보호자의 심정도 이해를 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신경과 의사와 간호사들도 모두 읽어보라고 권했습니다.
손 기능 장애는 남았지만 이젠 무서운 병마는 사라졌으니
앞으로 희망을 가지고 살기 바랍니다.
날씨도 추워지는데 몸조심하고 더욱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만날 것을 기대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대구 가톨릭대학병원 신경과 이동국 드림
재활의학과 문리치료실 실장이 수기록을 읽고 멜에 답장글이 이렇게 왔습니다.
<건강한 나날을 기원합니다>
황해만님!
아련히 잊혀질 것 같았던 황해만 님의 이름 석자만 불러보는 것만으로도 전 가슴에 전율을 느낍니다. 소방관으로서 몸서리치는 아픔 속에서 또렷한 기억을 더듬어 병상수기를 쓸 수 있었던 것처럼, 황해만님이 이렇게 건강을 찾아 일어설 수 있었던 가장 큰 까닭은 아마 황해만 님의 정신력이 보여준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두손을 모아 진정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언제까지나 건강한 나날만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돌이켜보면 저의 손과 마음에 황해만 님의 굳어진 몸 구석구석이 닿을 때마다 그저 포기한 인생을 달래줄 뿐 아무런 힘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투병생활의 수기를 읽고 난 소감을 부탁해 오다니 한편으로는 너무도 반갑고 또 한편으로는 기적의 힘이 내 가까이에도 함께 한다는 생각에 정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저의 작은 힘이 황해만님께 그토록 큰 힘이 될 수 있었고, 물리치료라는 미명아래 마음만 가득한 체, 저의 물리치료 수기법을 충분한 시간동안 해드리지 못한 적이 많아 오직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건강을 다시 찾은 것만 해도 그저 감사히 여길 뿐입니다. 인간의 한계는 과연 없나 봅니다. 똑같은 동작을 반복하고 또 반복하면서 참고 또 참아내며 의료진의 치료와 처치의 손길이 무성의할 때 조차도 어떤 섭섭함도 표하지 않고 오직 다시 설 수 있다는 일념 하나로 드디어 해내셨습니다. 정말 장하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습니다. 지구촌 한 구석에서 의연히 다시 일어선 인간 승리 그 자체입니다. 99% 자기자신의 정신력이 빛나고 있습니다. 저희 의료진은 거기에 비하면 1%의 도움일 뿐입니다. 가슴뜨거운 박수를 보냅니다.
황해만님!
이제 손에 남아있는 장애마저도 떨쳐버리고 일어서지 않으시렵니까? 제가 곁에서 도와드리지는 못한다 해도 아마 황해만님은 기적을 이룬 정신력이 있기에 기필코 해내고야 말 것입니다. 그렇게 믿겠습니다. 부디 완쾌하시어 장애를 가지고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강인한 정신으로 쾌유할 수 있는 귀감이 되시길 바랍니다. 병마와 싸우는 모든 이들에게 희망이 되어 주시기를 다시 한번 기원하며, 나날이 건강 속에서 행복하십시오. 틈나면 저희 물리치료실에 오셔서 커피한 잔 사주실 거죠? 우리나라 최고의 소방관으로서 말입니다. 사는 날까지 황해만님의 정신력, 잊지 않고 살께요.
대구가톨릭의료원 재활의학과 물리치료실 기사장 최현임 드림
전직 간호사 현재 거창 구급대원이 수기를 보고 빼빼로 데이날 보내온 답장글
황해만반장님!!
오널 빼빼로 데이인거 알줘? 자 선물
(111111111111111111)^^v
반장님 수기록 읽고 눈물이 나서 읽기를 멈춘게 한두번이 아니예요
반장님이 많이 아팠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렇게 심각했을 줄은 몰랐거든요..
그 수기를 읽고 나서 참 대단하신 분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어떻게 그렇게 예전의 이야기를 하나도 안 잊고 기억하고 계실까..물론 그 많은 시간동안 있었던 이야기를 다 적지는 않았겠지만 수기를 읽어본 사람은 반장님의 투병생활을 훤히 알고 정말 공감이 가도록 글을 적으셨더라구요...
글구 이렇게 재기 하신 반장님이 무척 자랑스럽습니다.
제가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은 중환자실에서 베개가 불편한데 아무리 눈짓을 보내두 아무도 몰라 많이 불편하셨다는 내용있죠?
저두 병원에서 의식이 있는데도 인공호흡기를 착용하고 있는 환자를 본 적이 있거든요.,,그런 사람들에게 "제가 너무 무심히 대했었구나"하는 후회가 되더라구요,,,
원인불명의 투병속에서 벗어난 사람은 대부분 예전의 모습을 뒤돌아보길 꺼려하는데 반장님은 담담히 글을 쓰시고 또 반장님과 같은 병을 앓고 있는사람에게 희망을 주시겠다는 의도를 정말 존경하구요..
앞으로 항상 건강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술은 좀 줄이시구,,,
그럼 소방서에서 뵈요....
예쁜 소녀가 ^*^
첫댓글 정말 고생이 많았습니다. 병마와 싸워이긴 님에게 찬사를 보냅니다.
이젠 세월이 마니지나서 그때를 잊어버리고 술고마시고 운동도 열심히 합니다....감사합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네이브에서 많은 활약을 하고잇습니다만.....다음은 간혹들어옵니다....기회가되면 자주뵈입시더....감사요...
정말 수고 많았슴니다 누구나가 올수 있는 병마가 겁이 나군요 수기록 읽고 휴지 제컷을 버려서요 고추농사도 잘 지어시군요 건투를 빕니다
앞대명이 동명이네요....취미로 조금짓고있습니다....직장땜시 많이는 무리고요.....감사합니다...꾸우벅
힘든 병마와의 시간 잘 이겨내셨네요. 이제 앞으로는 좋은 일로만 가득하길 기원합니다.^^
님응원에 감사할따름입니다.....님도 항상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기원합니다...
항상 건강하시구..하시는일 뜻대러 다 잘 될꺼라 믿어여..긍정적인 생각이 늘 도와줄꺼에여...꾸벅..
관심에 감사합니다.....일이면일 운동이면 운동 열심히 하는것외는 없는것 같습니다.....안녕히
읽어 가면서 감동적입니다. 새벽 소리내 울고 싶지만 잠든사람들 때문에...
힘든 병마와 승리에 힘찬 박수보내드립니다.
읽어주심에 감사합니다....차트를보고 그냥정리를 했는데 산님감사합니다....
정말 화이팅입니다, 글을 보면서 눈에서 눈물이 글썽이더군요,, 정말 장 하십니다,,
그러나 담배는 과감하게 끊으세요,,,^^ 저도 40년간 피워오던 담배 과감하게 끊어 버렸습니다,,
조첨지님 담배는 중환자실에서부터 지금까지는 안피우고 있습니다.....감사합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관심에감사합니다
참 좋은글 잘보았읍니다 건강을되찿아 하시고자 하는 일 성취 하시길 기원합니다
바우골님 감사합니다.....
눈물이 앞을 가려 읽을 수가 없었네요 ... 강한 정신력을 존경 합니다 . 이제 건강하게 잘 지내시길 바랍니다 !
두서없는글 감정이 풍부하신가봅니다....댁님 감사합니다....여름외는 운동도하고 열심히지네고 있습니다....여름에는 농사일땜에 피곤해서 운동을 쉬고있습니다...다시한번감사합니다....지역이어디십니까?
길레인 바레 증후근 .... 님에 글을 읽고나니 정말 옛날일이 어제처럼 생각나네요 남편도 그병에 걸려 님과 같은 고생을 했답니다 대학병원 응급실을 몆번이나 갔다가 해줄게 없다며 그냥내 보내더군요 나중에는 침 잘 놓는다는 돌팔이 침 놓는 사람도 찿아가고 환자가 움직일수 없어 힘 좋은 친구가 업어서 데리고 다녔는데 한방병원 응급실을 찿았더니 마침 그분이 이런환자 경험이 있는지 바로 입원 보험적용안되는 약 처방 .. 24시간 주무르고 맛사지를 해쥐야 잠을자더군요 그때겪은 고생은 .....
애구.... 화가 나려고 하네요 하여간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는 사람만 아는병 ....
그렇셨군요
그래도호흡까지안오면고생을적게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