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교란
양주 분방 소속원들이 줄지어
속속 달려왔다. 모든 사람들은
하나같이 경계태세를 단단히 갖
추고 늘어섰지만, 바람 소리에
풀잎흔들리는 기척만 나도 한바
탕씩 소동을 부릴 정도로 불안감
에 휩싸였다.
앞서 침입한 자가 대담하게도
미끼로 내세운 보초를 납치해 달
아났을 때, 진짜 무공이 뛰어난
사람으로서 멀리까지 추격해 나
간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
리고 다리 걸음이 시원치 못한
사람은 애당초 어느 방향으로 뒤
쫓아야 할지 몰랐기 때문에 추격
해 봤자 헛수고인지라, 한 1, 2
리도 못 나가서 이내 철수해 돌
아오고 말았다.
총방에서 파견되어 온 세 사람
은 끝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오
두막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6,
70여 명의 제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불안감에 가슴을 조여야 했
다. 침입자는 단 한 놈, 그것도
정체나 내력이라곤 눈꼽만큼도
모르는 자와 목숨 걸고 싸워야
할 판인데, 상대방의 무공이 까
무라칠 정도로 막강하다는 평판
이 전염병처럼 나돌고 있다. 그
런데도 두렵지 않다면, 그것은
사람들 속이는 얘기밖에 더 되겠
는가?
이들 불가일세(不可一世)의 영
응호걸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
가운데, 실제로 영웅호걸이라 일
컬을 만한 인물은 몇몇 안 된다.
그 나머지는 진짜 죽음의 위협에
맞닥뜨리게 되었을 때, 영웅호걸
의 간판을 헌신짝 내버리듯 펭개
치고 도망칠 것이다.
용기란 것은 괴상해서 때에 따
라 빛나기도 하고 사그러들기도
한다. 사그러들 때에는 걷잡을
수 없다. 용기를 잃어버리는 시
간이 길면 길어질수록 하찮은 일
에도 놀라는 일이 많아지고 가슴
속 두방망이질도 빨라지게 마련
이다.
4경쯤 되어서, 이번에는 강기
슭에 정박시켜 둔 세 척의 쾌속
선이 말썽을 부리기 시작했다.
세 척 가운데 위치한 선박 고물
쪽 선실 안에서 불빛이 번쩍거리
는가 싶더니, 뒤미처 화룡(火龍)
의 혓바닥이 선실 지붕을 뚫고
하늘 높이 치솟았다. 불길이 삽
시간에 배전체를 휩싸더니, 이내
걷잡을 겨를도 없이 번져서 좌우
양 곁에 닻을 내린 두 척으로 옮
겨붙었다. 물구비 하만은 때아닌
화재로 수면과 어두운 하늘까지
온통 시뻘겋게 물들었다.
[불이야, 불!...]
선상에 잠복하고 있던 패거리
들이 불길을 잡느라 미친 듯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동안, 강기
슭 오두막 쪽에서도 허겁지겁 응
원군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강변과 기슭에서 일대 혼란이
벌어지는 사이, 오두막 뒤편에는
흰 그림자가 나타났다.
오두막과 도합 다섯 채, 명색
이 농사꾼의 거처라곤 해도 건청
방같은 세력이 분당을 설치할 정
도로 큰 건물이라, 한 채마다 10
여칸이 훨씬 넘는 대청을 갖추고
있다. 그러니 6, 70명 인원의 능
력으로 이 다섯 채를 사면팔방
물샐 틈 없이 지킨다는 것은 그
자체 부터가 무리였다.
흰 그림자의 손아귀에는 강철
제 단도(單刀) 한 자루가 쥐어져
서 맞은편 강변 화재의 불빛을
받고 섬뜩하도록 눈부신 광망을
쏟아내고 있었다. 아마 그 근처
에 얼씬거리는 사람이라도 있었
다면, 번쩍거리는 칼빛이 바로
제 심장을 푹 찔러드는 줄 알고
서 간담이 뚝 떨어졌을 것이다.
이윽고 그 칼날 아래 처참한
살육이 벌어졌다.
[이야-앗!]
하늘이 들썩거리도록 우렁찬
기합성 한 마디가 길게 울리더
니, 흰 그림자는 칼과 혼연일체
를 이루어 흡사 광풍 폭우 휘몰
아치듯 첫번째 오두막 안으로 돌
진해 들어갔다. 농가 뒤뚤, 칼바
람이 스쳐지나가는 곳마다 허공
에 피보라가 흩날리고 팔다리,
살점이 가로 세로 퉁겨 날으기
시작했다. 그것은 찰나간에 발생
한 도륙이었다. 뒤뜰 모퉁이에
잠복해 있다가 침입자를 저지하
려고 뛰쳐나온 경계 매복초 네
명은 앗 소리도 지르지 못한 채,
거센 돌풍에 휩쓸린 낙엽처럼 삽
시간에 거꾸러지고 말았다.
첫번째 농가 뒤뚤에 돌입한 침
입자가 흡사 양때 속에 뛰어든
호랑이와도 같이 설쳐대는 동안,
오두막 안의 패거리들은 그때까
지도 무서운 강적이 이미 집 안
에 덮쳐든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다가 참변을 당했다.
몇몇은 자기가 누구한테 당하
는지 그 영문도 모른 재 칼날에
찍혀 죽었다. 또 침입한 적의 숫
자가 단 하나라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실내는 캄캄 절벽, 그
어둠 속에서 움직이기만 하면 에
누리 없이 비정한 칼바람이 날아
들었다. 숨 한 모금 내쉬거나 손
가락 한개라도 까딱거린 자는 차
례로 죽음의 재앙과 맞닥뜨려야
했다. 마지막으로 거꾸러진 사람
도 변변한 저항 한 번 못해 보고
얼떨떨한 상태에서 죽음을 당했
다.
불은 첫번째 오두막에서 일어
나, 잠시 후에는 두번째 오두막
으로 연소(延燒)되었다. 불길이
지붕을 뚫고 솟구쳐 나와 기왓장
을 퉁겨 날리는 동안, 이번에는
세번째 오두막이 화염에 휩싸였
다. 그리고 다시 넷째 오두
막....
화광이 충천하는데도 불을 끄
려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
저 사면팔방 종횡무진으로 출몰
하는 흰 그림자의 칼바람에 휩쓸
려 풍지박산이 되고 있을 따름이
다. 머리터럭이 곤두서도록 참담
한 외마디 비명 소리, 귀신의 통
곡처럼 애절한 신음 소리와 아우
성이 온천지를 뒤흔들고 있는 것
이 전부였다.
마침내 흰 그림자도 불바다를
탈출했다. 핑자국으로 얼룩진 단
도를 질질 끌면서 오솔길 따라
남쪽으로 향하는 사람 백정, 휘
적휘적 내딛는 그의 발걸음은 다
급하지도 게으름을 부리지도 않
고 조금 전에 아무런 일도 없었
다는 듯이 태연스럽기만 했다.
건청방의 추격대 다섯 명이 헐
레벌떡 그를 따라잡은 것은 1리
밖 지점에서였다. 추격자들의 도
검이 일제히 표적을 겨누고 덮쳐
들어 갔다.
흰 그림자도 후딱 돌아섰다.
정면상대 자세로 칼을 치켜드는
품으로 보아 그 역시 추격을 기
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너희들을 깡그리 죽여 없애고
싶지는 않아!]
흰 그림자의 호통 소리가 고막
을 때렸다.
[몇 놈쯤 살려 두어야만 증언
을 할 테니까. 하지만 이렇게 뒤
쫓아 왔으니 인사치레는 해야겠
지? 배웅나온 기념으로 한 사람
이 팔뚝 한 개씩 남겨두셨으면
고맙겠어!]
기세 사납게 달려들던 추격자
다섯 명이 멈칫 서더니, 감히 공
격을 하지 못하고 반원형으로 에
워싸기만 했다.
[너!...네놈은 참말 지독한 놈
이로구나!]
정면에 마주 선 중년 사내가
처절하게 외쳤다.
[우리 그 숱한 형제들을 개잡
듯 몰살해 버리다니... 백정이라
도 차마 그렇게는 못할 거다! 도
대체 네놈은 누구냐?]
[장삼이지.]
[네놈은...]
[물으나 마나, 피빛은 피로 받
아낸 거지!]
[이 모진 놈아! 몇 푼 값어치
도 안 나가는 천덕꾸러기 좀도둑
하나 때문에 이 숱한 형제들의
목숨을 핏값으로 받아 낸단 말이
냐?]
[계산을 잘못 하시는군. <신
투> 이백록은 이 장 아무개의 눈
에 꼭 드는 인물이었으니, 천덕
꾸러기 좀도둑이라고 불러선 안
되지설령 그가 좀도둑이라 하더
라도 당신네들한데 그를 핍박해
죽도록 만들 권한은 절대로 없
어!]
[우리 건청방은...]
[나도 알아. 당신네 건청방은
분방만도 30개 이상, 인원수도 3
천 명 아래로 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 게다가 무림 고수들도 구
름처럼 많아서 강호상에 그 위엄
을 떨치고 있다는 것쯤 모를 리
없지 ! 이쪽은 장삼, 나 하나뿐
이야. 그렇지만 내 쪽에는 시간
이라는게 있어. 몇 년 몇 달이
걸리든, 해가 훤히 떠 있는 대낮
이든 캄캄한 밤중이든, 나는 당
신네들을 한 사람 한 사람씩 저
승으로 보내 염라대왕을 만나뵙
게 해 드릴 수가 있단 말씀이얘.
언제까지냐구? 당신네 그 더러운
기업을 잔뿌리째 다 뽑아 버리고
나면 나도 손을 털겠지 !]
[이 발칙한....]
[개수작 말아! 일이 이쯤 되었
는데, 나하고 시비를 더 따질 텐
가? 피차 막돼먹은 사람 백정인
데 뭘 망셜이나? 자아, 덤비라
구!]
장삼은 매섭게 질타했다.
[이놈을 그저 단칼에 푹!...]
[좋았어, 아무렴 그래야지!]
[예끼!...]
중년 사내의 장검이 막 공격해
들어가려 했을 때, 이쪽 칼빛이
먼저 번개 벼락치듯 번쩍 들이닥
쳤다. 중년 사내는 제 앞가슴에
와 닿는 칼끝을 뿌리치려고 어지
러이 장검을 휘둘러 쳤다. 그 순
간, 눈앞까지 들이닥쳤던 도광이
번뜩 사라지더니 돌연 아래로 뚝
떨어지면서 비스듬히 훑고 지나
갔다.
칼날은 상대방의 지체 한 부분
을 소리없이 가르고 지나쳤다.
[으아악...]
놀람과 고통으로 범벅이 된 외
마디 소리, 그와 동시에 팔뚝 한
개가 칼자루를 거머쥔 채 주인의
몸뚱이에서 뭉텅 떨어져나갔다.
[으와아!...]
뒤미처 동료 두 사람이 머리통
을 감싸안고 획 돌아서기가 무섭
게 미친듯이 아우성을 지르면서
내뛰기 시작했다.
제일 빠르게 도망친 사내가 단
걸음에 30보 남짓을 치달리고 나
서 이만 하면 한숨 돌릴 만하겠
다고 생각했다. 평소 다리 걸음
이 빠른 덕분에 선두로 위험한
지경을 빠져나온 것이 얼마나 다
행이냔 말이다.
그게 잘못이었다. 엉겁결에 흘
끗 뒤돌아보는 찰나, 그의 눈 언
저리에 칼빛이 번뜩 비치는가 싶
더니, 등줄기에 척추뼈가 몽땅
부서져나갈 만큼 저릿저릿한 충
격이 들이닥쳤다.
[따악!]
[으헉 !...]
칼등으로 호되게 얻어맞는 순
간, 그는 아픔보다 먼저 숨통이
꽉막히고 두 눈알이 다 빠져나오
는 듯한 느낌을 받으면서 앞쪽으
로 털썩 고꾸라졌다.
무지막지스런 발바닥이 등판을
찍어누르고, 얼음보다 더 차가운
칼끝이 피비린내를 풍기면서 코
끝에 와서 닿더니, 뒤미처 서슬
푸른 칼날이 목덜미에 찰싹 달라
붙었다.
[당신 목숨을 내가 알고 싶은
정보와 맞바꾸면, 우리 서로 공
평한 거래를 하는 셈이 되겠지?]
흰 그림자 장삼의 목소리가 고
막을 쑤시고 들어왔다.
[날... 날 놓아 줘 !... 놓아
줘 !...]
사내는 칼을 내던지고 움쭉달
싹도 못한 채로 돼지 멱따듯 비
명만 질러 댔다.
[나는 자백을 받아 내야겠어.]
[내가... 내가 뭘...]
[당신네 분방주, <번강사>는
어째서 당구에 없었지?]
[그, 그건...]
[허튼 소리를 지껄여도 괜찮
아. 허나, 목숨이 당신 것이라는
사실만큼은 기억해 두라구. 제
목숨이 필요 없다는 데야, 누가
뭐라겠나?]
[그는... 분방주는 지금 부성
(府城)...부성에 있소!]
[그 친구는 당신네들이 죽든
말든 상관 없단 말인가? 오늘밤
에나 장삼이 자기를 찾아온다는
걸 뻔히 알고 계셨을 텐데.....]
[난... 난 그저 분방주가...
분방주가 귀빈을... 귀빈을 만나
서 함깨 성내에 들어갔다는 것밖
에 모르오! 그리고... 또 총방
책임자 어른 몇 분도 같이 있다
는 얘기만...]
[아하, 귀빈이시라! 그분은 어
디 계시답디까?]
[난... 정말 모르오! 난....]
[좋소, 이만 꺼지시오!]
목덜미에서 칼날이 떠났다. 등
줄기를 찍어누르던 압력도 사라
졌다.
사내는 몸뚱이에 힘을 바짝 주
고 용기를 내어서 고개를 외로
꼬아 뒤돌아보았다. 보니, 눈송
이만 펄펄 흩나릴 뿐 백설이 건
곤(乾坤)한 지면에는 사람의 그
림자라곤 반쪽도 찾아볼 길 없
다.
[으와아,... 맙소사!...]
사내의 입에서 미친 듯한 아우
성이 터져나왔다. 엉금엉금 기어
서 일어나기가 무섬게 그는 다리
야 날 살려라, 죽을 힘을 다 뿐
아 내닫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달리는 걸음걸이가 온전할 리 없
을 터, 그는 대여섯 차례나 연거
푸 고꾸라지고 엎어지고 데굴데
굴 굴러가면서 필사적으로 도망
쳤다.
이른 아침부터, 회양객잔에 투
숙했던 손님들이 줄지어 계산을
마치고 부지런히 길을 떠났다.
장추산은 양주 부성에 며칠 머
물기로 한 단기 투숙객이라, 점
원들도 일부러 찾아와서 귀찮게
굴지 않았다.
점원들은 귀찮게 굴지 않는데,
엉뚱한 녀석들이 귀찮게 건드린
다.
이레 동안 지긋지긋하게 몰아
치던 눈보라도 그쳤으니, 앞으로
며칠은 쾌청한 날씨를 기대해 봄
직도 하다. 겨울철이라 여전히
춥기는 하겠으나, 쾌청한 날씨는
사람들을 대문 바깥으로 끌어내
어, 앞서보다 더 큰 눈보라가 불
어닥치기 전에 답설심매(踏雪尋
梅)를 즐길 여유를 만들어 줄 것
이다.
강풍은 좀 심했어도 요 며칠
동안 내린 서설(瑞雪)은 별로 많
은 편이 아니었다. 이제 얼마 안
있어 세밑에 내릴 폭풍설은 지금
까지 보다 몇 배나 세찰 것이 분
명했다.
객사 뜨락에 쌓인 눈더미는 게
으름뱅이 점원 녀석들이 다 쓸어
내지 못한 탓으로 이미 팡팡 얼
어붙어 여기저기 빙판이 되었을
뿐더러, 밀가루처럼 보숭보숭하
던 족감도 없어지고 무심한 사람
의 발에 밟힐 때마다 버석버석
눈얼음 부서지는 소리만 내고 있
다.
[으랏차!....이여업 !... 야
앗!...]
이른 아침부터, 웬 녀석들이
눈얼음 덮인 객사 안뜰에서 진법
연습을 하는지 손님들의 단잠을
다 깨워 놓기 시작했다. 시끄럽
게 토해내는 기합성이나 주먹질
하는 외양으로 보건대 모두들 외
가공력을 익힌 모양인데, 주먹을
내지를 때마다 바람 소리가 '휙
휙' 나는 것을 듣자니, 이들의
공력도 제법 맹렬하고 강한 듯
싶었다.
부지런히 권법 단련을 하는 사
람은 모두 넷, 종복 차림새를 하
고 있었다. 복도 기둥 곁에 벗어
놓은 낡은 양가죽 외투를 보건
대, 그것은 어느 대부호의 하인
들이나 입는 옷가지와 형식도 똑
같을 별만 아니라 몸에 걸친 회
청색 겉저고리의 모양새도 대갓
집 호원무사(護院武士)의 격식과
똑같은 것이었다.
음양쌍살이 앞서 쓰던 객실의
주인이 어느 신분 좋은 손님으로
바뀐 게 분명했다. 복도 끝에 서
있는 풍채 좋은 젊은이 등뒤에는
또 스무 살 남짓 들어보이는 젊
은 시중꾼 둘이 모시고 섰는데,
하나는 장검을 하나는 단도(單
刀)를 한 자루씩 차고 있었다.
주인인 듯한 청년의 모습은 한
마디로 걸출한 인재였다. 나이는
23, 4세 가량, 흡사 아침 해가
갓 떠오를 때처럼 화사한 얼굴에
부리부리한 범의 눈매와 검미(劍
眉)가 돋보이는 것이, 그 영기발
발한 기품만으로도 보는 사람올
주눅들게 만들고도 남았다. 한마
디로 이 청년은 온 몸으로 불가
일세의 호매한 성품, 천하를 눈
아래 깔아뭉개는 기백을 모두 갖
춘 준걸이라 할 만했다.
허리춤에는 보검 한 자루, 게
다가 장식이 으리으리한 비수도
한자루 찔러넣고 있었다.
[여봐, 자세를 더 낮춰 ! 옳
지, 주먹질도 더 힘차게 내지르
라구!.]
청년은 쉴새없이 호령을 했다.
주인이 하인들의 무예 연습을 감
독 지도하는 거야 누가 뭐라겠는
가마는, 객점에 묵고 계신 딴 손
님들은 정말 시끄러워 견딜 수가
없다. 귀청이 떨어질 정도로 벼
락같은 기합성, 호통 소리 한마
디 한마디씩 울릴 때마다. 담보
가 콩알만한 손님들은 소름이 쪽
쪽 돋아나고 몸서리를 쳐야 했
다. 아직도 늦잠을 즐기던 게으
름뱅이 나그네는 잠결에 폭도나
비적이 쳐들어온 줄 알고 벌떡
깨어났다가는 도로 이불 속으로
몸뚱이를 쳐박고 벌벌 떨었다.
공연히 방문 밖에 머리통을 내밀
었다가 눈먼 칼부림이나 주먹질
에 얻어터지면 나만 손해 아니난
말씀이다.
진작에 단잠을 겐 장추산도 점
점 이맛살이 찌푸려지기 시작했
다. 꼭두새벽부터 소동을 부리는
녀석들 때문에 기분이 몹시 상한
것이다.
방문을 활짝 열여붙이고, 그는
복도로 나섰다.
하인 넷은 두 사람씩 짝을 이
루어 맞서고 있었다. 주먹질 발
길질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품으
로 보자면 영락없이 장난삼아 하
는 짓 같은데, 팔과 다리에는 엄
청난 힘이 실렸을 생만 아니라
상대방의 신체 요혈을 인정사정
두지 않고 사납게 공격하는 걸
보면 사뭇 위험스럽기까지 했다.
공격하는 쪽이든 방어를 하는
쪽이든, 그 손매와 눈초리, 심법
과 보법에 엄격한 법식을 갖춘
것을 보면, 장추산은 이들이 어
느 고인의 문하제자라는 것을 한
눈에 알아차렸다. 공격도 맹렬하
지만 수비도 그 못지 않게 엄밀
했다.
이들은 어느 쪽이나 막상 막
하, 쌍방이 펭팽한 균형을 유지
하면서 고래고래 기염을 토해가
면서 한창 거리낌 없이 신바람나
게 싸우고 있는 것이다.
길다란 복도 맞은편에 장추산
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부터, 젊
은 주인은 소리치던 입을 꼭 다
물고 멀찌감치서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화살 골처럼 날카로
우면서도 부리부리한 눈매, 정광
이 번뜩이는 한 쌍의 눈초리가
사람의 넋을 잡아 흔드는 기세와
위력을 지녔다.
허나 장추산의 눈길은 그것을
못본 척 무시해 버리고, 뜨락에
서 호통치고 질타하는 하인 녀석
들에게만 못박혀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잔뜩 찌푸린 눈쌀에
차츰 쌍심지가 돋아나고 칼날처
럼 뻗은 눈씹 양 끝마저 곤두서
기 시작했다. 이린 잡놈의 자식
들! 여기가 제 집 안마당인 줄
아나? 세상에 이런 불한당 같은
녀석들이 어디 또 있는가!... 그
는 비로소 청년 쪽을 흘끗 바라
본 다음, 서슴치 않고 휘적휘적
안뜰로 내려셨다. 저 젊은 친구
가 주인 녀석인 모양이로군! 헌
데 주인이란 작자가 말릴 생각은
커녕 오히려 부채질이나 하고 있
다니, 이럴 수가 다있나? 생김새
나 옷차림새로 보아선 무림계 명
문 자제 같은데, 이런 놈일수록
투견(鬪犬)처럼 싸우기나 좋아하
고 수양 면에선 딱지가 덜 떨어
지게 마련이지! 오냐, 좋다. 내
손으로 뜯어말릴 때 어떻게 나오
는지 두고 보기로 할까?...
장추산이 뜨락으로 내려서자,
근처에 기웃거리고 있던 구경꾼
들이 기겁을 해가지고 와르르 복
도 안쪽으로 몰려 들어갔다. 여
느 사람같으면 이런 자리는 될
수 있는 대로 멀찌감치 피하는
게 상수다. 공연히 남의 일에 끼
어들었다가는 무망지재(無妄之
災)나 당하기 십상이요, 한두 대
쯤 얻어터지는 건 별도로 치고
자칫 잘못하면 아까운 목숨마저
날려보낼 위험성도 다분한 것이
다. 그런데 이 철딱서니 없는 백
면서생은 나중에 어딜 가서 원통
함을 하소연하려고 왁살스런 싸
움판에 다가서는지 알다가도 모
르겠다.
[어이 ! 거기 뭣하러 내려가시
나? 옳아, 시끄럽게 굴어서 그런
모양이로군! 안 그렇소?]
멀찌감치 서서 지켜보고 있던
젊은 주인이 돌연 그를 향해 소
리쳤다. 수작을 건네는 첫마디부
터 비우호적인 것은 물론이다.
[어째서 집에 안 돌아가시오?]
장추산의 반문도 곱지 않은 것
이 비우호적이다.
[집에 돌아가라구?]
젊은 주인이 그 말뜻을 모르고
되물었다.
[그렇소. 집에 가서 싸우든 말
든, 그거야 당신 아버지 어머니
가 꾸짖거나 말 일이고, 우리는
당신네더러 '시끄럽다. 조용해
달라'고 얘기할 건덕지가 하나도
없지! 허나 이 여관에서는 손님
들 귀좀 깨끗하게 해줄 수 없겠
소?]
대꾸하는 말씨에 꼬집는 기미
가 사뭇 짙게 깔렸다. 유막 노릇
을 하는 도필리(刀筆吏) 신분을
가장하고 있는 만큼, 말투가 천
박스럽거나 속되지 않으나 도발
적인 의미까지 담긴 것은 물론이
다.
젊은 주인은 천연덕스레 응수
했다.
[당신을 끌어내려고 일부러 그
런 거야.]
[일부러 그랬다?... 날 끌어내
려고?]
이번에는 장추산이 어리둥절할
차례다.
[바로 그거요! 당신이 비적들
을 쫓아 버리고 또 음양쌍살 같
은 마녀들을 데리고 노는 걸 봤
거든? 정말 대단하더군! 아마 당
세 청년 영웅들 가운데 출류발군
(出類拔群)이라고 일컬어도 찬사
가 모자랄 판입디다. 그래서 나
도 당신의 풍채를 한 번 보고 싶
었는데, 백문(百聞)이 불여일견
(不如一見)이라더니 과연 그 소
문을 능가하는 듯 싶소이다.]
[흐흠, 그러셨던가?]
[내 성은 남문씨(南門氏), 이
름은 영유(永裕)이외다.]
[호오, 남문 영유 형이셨군!]
그는 찬탄을 하면서도 얼굴빛
이 달라졌다.
[남문 영유라!... 천하 4대 공
자의 한 분, 강호상에 명성이 파
다하게 드날리시는 영락 공자(永
樂公子)를 여기서 뵙다니, 정말
뜻밖의 영광이외다. 흐흠, 남문
형의 지란옥수(芝蘭) 같으신 풍
채를 보건대, 과연 명불허전(名
不虛傳)일세 그려! 영락 공자께
서 강호천하를 두루 유람하면서
도를 행하신 지 어언 다섯 해,
그 성망과 영예는 하늘의 해라도
꿰뚫는다는 소문입디다.]
[나한테 아첨 떠는 거요?]
영락 공자가 복도를 따라 다가
오면서 빙글빙글 야릇한 미소를
던졌다. 그 역시 호의를 품은 웃
음이 아니었다.
[방금 한 말은 충심에서 나온
찬사요. 내 천성이 본래 남의 비
위를 맞추지 못하거든?]
그 역시 빙긋 웃어가며 대꾸했
다.
[천하 4대 공자님 가운데, 남
문 형이 유일하게 협의문(俠義
門)자제요 또 명문 출신이시니,
그 명망도 요행으로 얻은 게 아
닌 줄믿소.]
[과찬의 말씀을!...]
영락 공자가 드디어 그 곁에
이르렀다. 젊은 시중꾼 두 사람
도 주인 등뒤에 1보 간격을 두고
바짝 따라붙어 섰다.
[장 형, 주제넘게 굴었던 점일
랑 용서하시구료. 한데 어느 문
하출신인지?...]
[가전의 무예를 좀 익혔소. 남
보기에 웃음거리만 될 정도외
다.]
[음양쌍살로 말하자면 무림계
에서도 손꼽히는 고수명숙, 무공
도 높을 뿐더러 심보가 악랄하기
로 소문이 나서 뭇 사람들을 떨
게 만드는 풍운 인물이라 당세
천하 남북 양대 문파의 원로급
선배조차 그 살성들을 섣불리 건
드리지 않는 판인데, 장 형께선
여보란듯이 그 마녀들의 분통이
터지도록 장난감처럼 주물러서
얼굴도 못들게 내쫓아 버리지 않
았소? 그것도 캄캄한 밤중에 말
이오. 이 남문 아무개가 5년 동
안 강호 천하를 두루 행도(行道)
하면서 무림계 원로명숙을 적지
않게 보아왔고, 기이한 절예를
지닌 고수들의 소문을 숱하게 들
어 왔지만, 어떻게 된 셈인지 노
형 장추산의 이름 석 자는 전혀
들어 본 적이 없구료. 장 형의
별호는 어떻게 되시오?]
[유막 장추산.]
그는 천연덕스래 대답했다.
[하기야 날더러 도필객(刀筆
客)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더
군. 내가 근무하던 유막에선 '장
도필' (長刀筆)하면 친구들도 모
두 알아듣지! 이만하면 제법 명
성도 날리는 셈이 아니겠소? 강
호에서 쓰는 별호 따윈 지금껏
붙여 주는 사람도 없거니와 나
역시 남들이 한다고 엄벙덤벙 붙
이고 다닐 생각도 없소. 하기야
이 강호 천지에나 같은 사람과
교분을 맺은 사람도 거의 없으니
까....]
[문무 겸비하신 장 형, 참으로
강호만세에 이름 드날릴 분이 아
니신가?]
영락 공자는 멸시가 담긴 눈초
리로 흘겨보면서 중얼거렸다.
[혹시 모르지, 장 형도 공자의
명칭을 얻어 우리 4대 공자의 반
열에 한 분이 더 늘어날지 누가
알겠소? 그럼 당대 강호상에 광
채도 한결 빛날 테고.]
[나는 재산도 권세도 있고 신
분 지위도 갖춘 몸이외다. 그런
내가 뭣이 아쉬워서 강호 귀신
잡배들 틈에 낄 필요가 있겠소?]
장추산의 어투에도 가시가 단
단히 박혔다.
[남문 형처럼 무림 명가의 자
제분이나 강호상에서 영웅 패자
로 일컬음을 받아야 당연하지...
당세 강호의 오화팔문(五花八
門), 삼교구류(三敎九流)를 아울
러 포용하시고 표객 호원무사의
영업을 하시는 분의 자제이니,
강호 무림계의 주도권을 장악할
뿐만 아니라 그 주류로서 강호상
에 으뜸가는 지위를 차지하셔야
옳지 않겠소?]
[흐흥, 과찬의 말씀!...]
[남문 형이 강호에 출도한 이
래, 온 천하를 통틀어 남북 일대
에 적수를 만나기 드물었을 데고
그 위엄과 명망을 가는 곳마다
크게 떨치셨을 테니, 우귀사신
(牛鬼蛇神) 온갖 시정 잡배 가운
데 어떤 놈인들 그 위명에 굴복
하지 않을 것이며 두려워하지 않
겠소? 허나, 나 같은 위인이야
그저 관가 아문에서 붓방아나 찜
고 소매자락에 먹물이나 묻히는
일개 도필리 신세라, 강호 동도
(同途)에 속하지도 못할 테고 만
세에 이름 드날릴 가망성이라곤
영영 없을 거외다. 그러니 남문
형께서 나 같은 사람의 이름 석
자를 들어보지 못하시는 것도 당
연한 일이겠소... 하하하! 남문
형, 당신 눈에는 내가 4대 공자
님 축에 들어 보이시오?]
두 사람은 코골이 맞닿을 정도
로 가까이 서서 가시돋힌 수작을
주고 받았다. 헌걸찬 몸매나, 뛰
어나게 늠름한 자태 어느 면에서
도피아 쌍방은 기울지 않고 똑같
았다. 다른 점을 꼬집어서 말한
다면, 영락 공자의 오기발발한
풍도가 장추산애 비해 더욱 돋보
이고 기질면에서도 영응다운 기
백이 3, 4할 정도 많아 보인다는
점이다.
영락 공자 남문영유의 집안은
전대부터 안휘성(安徽省) 완산(
山) 천풍곡(天風谷)에 자리잡고
있다. 그 아버지는 협의도에서
원로명숙으로 추앙받는 천풍거사
(天風居士) 남문존신(南門存信),
천풍곡에 영락장(永樂莊)이란 장
원을 짓고 들어앉았으므로 모든
사람들이 영락 장주라고 부르는
인물이다. 소문에 따르면, 영락
거사는 소림 문하의 직계 속가제
자라고 한다. 그래서 무림계의
명문으로 일컬음을 받고 협의도
에서 명성이 쟁쟁한 풍운인물로
손꼽히게 되었으며, 강호 천하
백도(白道)의 인사들도 그에 대
해 사뭇 큰 존경심과 숭모의 정
을 표하고 있었다.
존경심과 숭모의 뜻이라... 듣
기에 따라서는 귀가 간지러울 정
도로 좋은 말이지만, 그 말뜻을
뒤집어 본다면 두려움과 공포의
의미도 다분히 담겨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리라.
존경과 숭모, 그리고 경외(敬
畏), 이 양자는 서로 상충된 개
념을 지니고 있다. 또 그것들이
어느 한 사람을 똑같이 좋은 면
으로 인식하는 개념도 전혀 아니
다. 존경과 숭모란 그 사람이 남
에게 권위를 인정받는 밑천이요,
경외란 개념은 당사자가 모든 사
람들에게 유익한 스승이 되고 절
친한 벗이면서도 언제든지 위압
할 수 있는 폭군으로서의 실력도
소유했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
양자는 완전히 같은 개념으로 인
식되어서도 안 되거니와 또 함께
꼬리를 물고 따라다닐 수도 없는
것이다.
영락거사는 불문(佛門)의 속가
재자라곤 하나, 일단 그의 장검
이 살인을 저지르는 날에는 불문
제자다운 자비심이라든가 수양
따위는 좁쌀 반 톨만큼도 비치지
않고 오로지 폭력으로 적을 굴복
시키는 난폭스런 면모를 유감 없
이 드러낸다. 그러니 어느 누가
감히 그에게 존경심과 숭모의 정
을 바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섣
불리 불경스럽게 대했다가는 그
칼날에 목이 탱겅 날아갈 판이니
그야말로 재미 적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어쩌면 뭇 사람들의 존
경심과 숭모는 당사자에게 표하
는 것이라기 보다 차라리 칼날에
바쳐지는 것이라고 해야 옳은 표
현일지 모른다.
장추산의 말투에 날카로운 가
시가 돋혔는데도, 영락 공자는
전혀 개의치 않는 기색이었다.
허나 그 눈빛 속에는 육식조(肉
食鳥)의 그것과 같은 음험하고도
흉악스런 광채가 번들번들 빛나
고 있었다.
[장 형, 당신 보기에는 우리집
하인들 무공 솜씨가 어떻소?]
영락 공자는 화제를 바꾸었다.
[대단해, 정말 대답합디다!]
장추산은 엄지 손가락을 우뚝
세워보이면서 찬탄했다.
[7할 공력을 쓰면서 그 잠력
(潛力)으로 3척 바깥의 적에게
타격을 가할 수 있다는 점, 또
방어하는 측에서 그것을 정면으
로 맞받으면서도 말타기 자세와
기민한 동작에 손톱만한 영향도
받지 않는다는 점... 이런 것을
보면 영락장의 <백보신권>(百步
神拳)이 과연 명불허전이요, 또
그 값어치가 천하에 으뜸이라는
걸 알 만했소. 한데, 저 네 분은
혹시 강호상에 소문이 자자한
<영락사대금강>(永樂四大金剛)이
아니시오?]
그의 마음속에는 벌써부터 모
든 것을 내다보고 있었다. 영락
사대금강이 서로 편을 짜서 방금
까지 요란스럽게 대련한 것은 바
로 자신에게 시위(示威)할 의도
임이 분명했다. 그리고 진짜 실
력은 꽁꽁 감추어 두고 단지 3,
4할 정도의 힘만 써보였다는 사
실도 간파하고 있었다. 이제 그
가 '7할 공력을 썼다'고 한 말은
자기도 문외한이 아니라는 것을
내보인 것이었다. 또 3, 4할의
공력을 굳이 '7할' 이라고 말한
뜻은 자기 실력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표시한 것이기도 했다. 뻔
히 알면서도... 그의 목적은 단
하나, 상대방이 그런 견해를 믿
어 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에
서였다. 왜냐? 장추산은 누구에
게도 진재실학(眞才實學)을 드러
내 보이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렇소, 저 네 사람이 바로
사금강이오!]
영락 공자는 의기양양하게 대
답했다.
[저 사람들은 층성심도 굳세지
만, 모든 일을 처리하는 능력도
아주 듬직하고 깔끔하다오. 또
강호 정세에 아주 밝은 데다 눈
치 빠르고 기민해서 못 해내는
일이 거의 없을 정도로 유능한
사람들이외다.]
[아무렴, 그래야지요! 맹장 밑
에 약졸은 없는 법 아니겠소?]
[일대 일로 단독 대결한다면,
우리 사금강은 무공 면에서 음양
쌍살을 상대할 수 있소. 다만 그
마녀들이 산백소혼장이란 암기로
나올 경우에는 필승할 자신이
없을 뿐이오. 장 형은 그 미향독
물(迷香毒物)을 장난감처럼 다루
던데, 흑시 그 방면에 전문가는
아니시오?]
[미안하지만, 나도 거기에 대
해서 맹물이외다.]
그는 솔직히 대답했다.
[숨을 멋고 호흡을 정지하는
길밖에는 딴 좋은 도리가 없을
거요.]
[그럼... 장 형은 음양쌍살의
암기를 어떻게...]
닌백소혼장의 가장 큰 결점은
바로 비행할 때 사람의 혼백을
뽑아 버릴 듯한 괴성마음(怪聲魔
音)을 낸다는 거요. 그 내막을
미리 아는 사람이 호흡을 멋기만
하면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을
수 있소. 또 멀찌감치 5장 바깥
에 떨어져 있을 때는 절대적으로
안전하오.]
그는 전문가다운 말투로 대답
했다.
[쌍살이 직접 만든 이 암기는
너무나 정교하고 또 다시 만들기
가 여간 어렵지 않소. 그렇기 때
문에, 마녀들도 그것을 회수할
자신이 없을 경우에는 결코 함부
로 발사하지 않소. 그러니까 생
각보다 그리 무서운 것은 아니지
요.]
[정말이오?]
[정말이오. 내가 뭣하러 거짓
말을 하겠소? 당신네 <백보신권>
만큼이나 결점 투성이라니
까!...]
[뭐라구?]
[화내지 마시구료, 남문 형.]
그는 빙그레 웃었다.
[백보신권으로 상대방과 맞섰
을 때, 공력을 3할 내지 4할씩
고르게만 쓴다면 혹 모를까, 그
렇지 않고서는 오래 버티지 못할
데니 말이오. 가령 결정타를 먹
이려고 전력으로 일격을 가한다
면, 아마 세 차례 공격을 골낸
다음부터 진기가 막히고 공력이
이어지지 않을 거요. 그렇게 되
면 자기 스스로 붕괴역진(崩壞亦
盡)의 지경에 빠질 테고, 또 그
건 아주 위험한 일일 테니 말이
외다. 남문 형, 내말이 틀렸소?]
[전문가의 고견 탁론이시라 과
연 대단하구료! 아주 탄복했소.]
영락 공자는 찬사를 보내면서
손을 앞으로 불쑥 내밀었다.
[장 형의 무공도 그만큼 고명
하신 모양인데, 어떻소, 저 친구
들한테 몇 수 가르침을 내려 주
실 수 없을는지?]
이때쯤 되어서, 사대금강도 이
미 대련하던 손길을 멈춘 상태였
다. 이들은 뜨락 한가운데 서서
혼들흔들 팔다리의 근육을 풀어
가며 툭 불거져 나온 눈망울로
장추산을 노려보고 있었다. 가뜩
이나 괴상야릇하게 생겨먹은 눈
매에 적의가 그득 담긴 것을 보
건대, 장추산이 백보신권의 결점
을 비평하는 말씀을 듣고서 울화
통이 불끈 치밀었던 모양이다.
[이거, 미안하구료.]
그는 영락 공자의 도전을 한마
디로 거절했다.
[내가 비록 기공이나 권법을
몇 해 배우기는 했어도 아무런
의미 없이 남과 대련하는 짓을
가장 싫어하오. 모처럼의 분부를
따르지 못하는 점, 남문 형께서
부디 용서해 주시오.]
이쪽에서 도전을 안 받겠다는
데야 제가 어쩔 셈인가? 허나 예
상은 깨끗이 빗나갔다.
[만약 내가 고집을 부린다면?]
[남문 형, 고장난명(孤掌難鳴)
이란 말도 못 들어 봤소? 손바닥
하나만 가지곤 소리가 나지 않는
법이오!]
[하하! 장 형의 그 말씀, 전문
가답지 않소 그려!]
[무슨 뜻으로 하는 말씀인가?]
[어느 한쪽이든 싸울 의사만
있다면 반드시 뜻있는 대결을 이
루게 된다. 이 말씀이외다. 또
그 방법이야 얼마든지 있지. 여
보, 장형! 세상에 이빨 부러지고
목구멍으로 핏덩이를 삼키도록
얻어맞으면서 참는 사람이 몇이
나 될 듯 싶소? 아마도 거의 없
을 거요. 더구나 무공을 익힌 사
람 치고 그 정도 수양을 닦은 자
는 봉모인각(鳳毛麟角)일 거요!]
영락 공자의 말뜻은 이제 맑은
하늘 대낮보다 더 명백하다.
건너편 객실 복도에 언제부터
나타났는지, 한 손님이 난간에
기대어 서서 이쪽 광경을 하염없
이 지켜보고 있다. 흘끗 스쳐보
던 장추산의 눈시울이 가늘게 떨
렸다. 이건 또 웬 남장여인이
냐?... 속된 기미라곤 눈꼽만큼
도 찾아볼 길 없는 말끔한 선비
차림새, 이 추운 날씨에도 박꽂
처럼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음
띤 입술이 앵두만큼이나 붉은 데
다. 옥같은 얼굴에 발그레하니
홍조를 띤 두 뺨이 아리따움과
건강미를 한꺼번에 드러내 보이
고 있었다. 한창 젊은 나이, 쓱
빠진 몸매와 준수한 태도, 지혜
로 뚤뚤 뭉쳐진 듯 부리부리한
눈망울을 반짝반짝 빛내면서 가
짜 도련님은 이쪽 광경을 마냥
쳐다본다.
옷차림새는 어떤가? 검정 여우
털 마고자에 앞섭을 겹쳐 여미는
만주 복식의 비취색 장포를 걸치
고 허리춤에 정교하게 수놓은 쌈
지를 찬 모습이, 조정 벼슬아치
가문에서 유람 나온 도련님의 기
개가 완연하다.
[장 형 !...]
갑자기 그 젊은 도련님이 외쳐
불렀다.
[저 사람은 당신 성미를 건드
려서 손찌검을 하도록 유도하고
있어요! 웬지 알아요? 당신 정체
와 내력을 알아내려고 하는 수작
이죠.]
멀리서 외치는 목소리인데도
은방울 흔들듯이 짤랑짤랑 맑고
또렷하게 울리는 것이 사뭇 듣기
좋았다.
장추산에게는 사뭇 뜻밖이 아
닐 수 없었다. 장 형이라니? 도
대체 신참이나 고참이나 막론하
고 이 여관에 찾아드는 손님마다
모두들 자기 성명을 알고 있으
니, 이게 어디 우연이요 공교롭
다고만 할 수 있는 일인가? 그는
속으로 경각심을 드높였다.
[이건 또 어떤 놈이 씨부렁거
리는 거야? 너, 뭣하는 놈이냐?]
영락 공자가 휙 돌아보더니 버
럭 호통을 쳤다.
그와 때를 같이 해서, 안춘 소
저가 후원 문턱을 딛고 들어섰
다.
아직도 남장 차림새, 하지만
어디서 돈벼락이라도 맞았는지,
엊그제와는 전혀 다르게 눈이 번
쩍 뜨이도록 성장(盛裝)을 했다.
뒤이어 나타난 사람은, 왈가닥
꼬마 처녀 갈패옥 소저다.
안춘 소저가 젊은 도련님을 손
가락으로 가리켰다.
[저 선비가 누구냐고요? 강남
일지홍(江南一枝紅), 당세 강호
상에서 가장 신비로운 여걸 셋
중 한 분이지요. 또 강남일지홍
노천향(路天香)으로 말하자면,
남장을 하고서 강호 천하를 누비
면서 사춘기에 접어든 뭇 처녀의
애간장을 얼마나 녹였는지 모른
답니다.]
안춘 소저는 젊은 도령의 신분
을 한마디로 헤쳐 놓고서 영락
공자를 향해 돌아섰다.
[영락 공자님, 오늘 당신네 백
보신권이 진짜 상극과 마주쳤네
요. 강남일지홍은 일신에 사문유
공(邪門柔功)을 지녔기 때문에,
강절륜하다는 백보신권 같은 현
천강기(玄天 氣)로도 저 여인을
다치게 할 수 없을 겁니다. 그러
니까 내 말씀은 애당초 저 여인
을 건드리지 말라는 거예요. 그
래야 신상에 이로울 테니 말이
죠.]
[어라! 그대가 내 성미를 건드
려 보겠단 말씀이로군?]
강남일지홍이 교태 어린 미소
를 지으면서 물어왔다.
[참말로 날신하게 생긴 가짜
도련님일세. 하지만 나는 그대의
간장을 녹여 줄 방법이 없으니
어쩐다? 가짜 도련님, 내 신분을
알았으니 더 장난칠 생각도 말아
야 할 거야.]
[나도 그대를 건드리고 싶은
생각은 없어. 그러니 그쪽도 내
성미를 안 건드리는 게 좋을 거
야.]
안춘 소저는 싸느란 웃음 섞어
쏘아붙이더니, 장추산이 있는 쪽
으로 걸어갔다.
그를 향한 얼굴에는 어느덧 냉
소가 스러지고 그 대신 매력적인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장 형, 화나셨어요? 저런 사
람들하고 시비를 따질 것 없어
요. 눈보라도 그쳤으니까 우리
성 밖에 나가서 눈구경이나 하
죠.]
영락 공자가 가만 듣고 보니,
이쪽이나 저쪽이나 모두 빼어나
게 아리따운 여인들이다. 이리
둘러보고 저리 훑어보고 한참 두
리번 거리는 동안, 그의 눈망울
에는 이제껏 서슬 시퍼렇던 노기
가 스러지고 그 대신 이루 말 못
할 흐뭇한 기뿜이 배어나왔다.
[잠깐!...]
그리 멀지 않는 곳에 발걸음을
멈춘 갈패옥 소저가 버럭 소리쳤
다. 무엇 때문애 심통이 났는지,
이 왈가닥 처녀의 눈초리는 강렬
한 적의를 품고 있었다.
[당신이 말한 '저런 사람들'속
에 나도 포함된 거야?]
발끈하는 왈가닥 성미를 그대
로 드러내면서, 갈패옥은 안춘
소저에게 곧바로 대들었다.
[분명히 말해! 거기 나도 포함
시켰는가 아닌가?]
그녀도 아름답기는 하다. 허나
역시 나이가 어렸다. 또 차림새
와 생김새도 막 자란 들망아지와
다를 바 없어서, 강남일지홍이나
안춘 소저와 같은 성숙된 처녀
에 비해 한 수쯤 떨어지는 것을
어쩔 수 없다.
두 처녀가 비록 남장은 했어
도, 갈패옥으로서는 그 얼굴에
한창 무르익은 화사한 성숙미를
도저히 따라잡지 못하는 것을 어
쩌겠는가?
[요 아가씨야, 넌 또 뭘 믿고
열외로 빠지려는 거냐?]
영락 공자는 시침 뚝 때고 금
시초면의 갈패옥에게 면박을 주
었다. 거기에는 간접적이나마 안
춘 소저의 비위를 맞추려는 의도
가 역력히 드러나 있었다.
[여긴 너 따위 꼬마가 나설 데
가 아니야. 그러니 나가서 눈사
람이나 만들고 놀려무나.]
[그놈의 개 주둥아리에 사람
다치겠네! 여봐 방금 뭐라고 그
랬지?]
한푼도 에누리 없는 답례가 날
아갔다.
그 댓거리를 듣는 순간, 영락
공자의 얼굴빛이 대번에 싹 변하
더니, 이마애도 지렁이 같은 힘
줄이 불끈 돋아났다. 눈에 차지
도 않는 풋내기 계집아이한테 개
숫물을 흠뻑 뒤집어쓸 줄이
야!...
<영락 사대금강>의 이름은 항
렬에 따라서 음운(陰雲), 폭우
(暴雨), 신뢰(信賴), 경전t폼폼)
으로 붙여져 있다. 또 항렬이 낮
을수록 무공 수준은 반대로 높은
것이 특징이다. 셋째 신뢰와 막
내 경전으로 말하자면, 그 출수
의 강맹함이나 지독스러움이 맏
이 음운이나 둘째 폭우에 비해서
두 배 이상 격렬하다. 무림계 일
류급 고수로서 이들 손에 목숨을
날려보낸 자가 얼마나 많은지 모
른다. 강호 친구들이 그들의 이
름만 들어도 간담이 뚝 떨어질
만큼, 영락사대금강의 명성은 지
진과도 같은 강렬한 위력을 갖추
고 있었던 것이다.
그 중 폭우가 젊은 주인의 분
부도 기다리지 않고 갈패옥이 서
있는 곁에 불쑥 다가섰다. 그리
고 툭 불거져나온 눈망울을 사납
게 부라리면서 무시무시한 표정
을 짓고 엄포를 놓았다.
[요것아, 네 손바닥으로 네 따
귀를 때려라! 이만해도 우리 소
장주님의 위엄을 범한 죄값 치고
가볍게 징벌하는 거야. 어서!]
갈패옥은 경멸스런 눈초리로
폭우를 흘끗 홀겨보더니, 그 조
그만 입술을 비죽거리면서 영락
공자 쪽으로 홱 돌아섰다.
[이봐요! 저 미친 개 짖는 소
리 좀 그치게 할 수 없어?]
그러나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뻗친 영락 공자는 폭우를 향해
호통쳤다.
[요년을 쳐라!]
[예엣!]
폭우도 응답 한마디와 동시에
앞으로 썩 나서더니, 번개같이
손을 내뻗어 아가씨의 뺨따귀를
후려쳐 가면서 또 한 손등마저
훌떡 뒤채기가 무섭게 그 아랫배
에 일격을 내질렀다. 상단과 중
단을 동시애 공격해 나갔으니,
이건 둘 중 어느 부위를 맞더라
도 한 군데는 도저히 피할 길이
없을 터였다.
따귀는 그렇다 치더라도 하복
부 공격만큼은 음독하기 이를 데
없는 행동이었다. 폭우는 아가씨
보다 키가 훨씬 크다. 그렇기 때
문에 왼손으로 내지른 번장(反
掌)의 공격부위는 실제로 하복부
가 아니라 처녀의 젖가슴에서 약
간 쳐진 늑골 부위가 되고 말았
다. 남자가 여자와 대결할 때,
강호에는 두 가지 묵계가 있다.
여인의 신체부위 중에서 두 군데
는 절대로 건드려선 안 된다는
규칙이 바로 그것이다. 추운 날
씨 탓에 처녀가 두툼한 옷을 껴
입어서 한창 무르익은 유방 곡선
이 보이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역시 강호인으로서 그부위 증에
한군데를 공격했다는 사실은 금
기(禁忌)를 크게 어긴 행위였다.
멀쩡한 사내가 다 큰 처녀의 젖
가슴을 노리고 손을 뻗치다니,
설령 그 여자가 불공대천지 원수
라 할지라도 이럴 수는 도저히
없는 일이었다. 폭우는 결국 키
가 큰 죄로 아차 하는 사이에 그
금기를 범하고 만 것이다.
곁에서 지켜보던 장추산이 버
럭 소리쳤다.
[이 비열한 잡놈을 봤나! 무슨
짓을 하는 거야?]
그는 이 왈가닥 처녀가 충분히
대응할 줄 뻔히 알면서도 순간적
으로 노기가 치밀어 폭우를 꾸짖
었던 것이다.
[팟!]
무엇인가 터지듯 날카로운 타
격음에 공기의 흐름이 사납게 소
용돌이쳤다.
[아앗!...]
다음 순간, 폭우의 몸뚱이가
뒤로 1장 남짓 주르르 미끌어져
나가더니 중심을 잡느라 허둥거
렸다. 미끄러운 빙판에 발을 헛
딛고 쓰러질 뻔한 것이다. 염치
없이 앞가슴을 내지르던 읜 팔꿈
치가 축늘어진 것을 보면, 아가
씨의 번장(反掌)에 착실히 얻어
맞은 게 분명했다. 뒤미처 갈패
옥이 바락 악을 쓰면서 질풍같이
덮쳐들었다.
[내 이놈의 개다리를 몽땅 분
질러 놓고 말테야!]
[폭우, 물러나라!]
영락 공자가 제때에 호통을 쳤
다.
풋내기 계집아이한테 생각지도
않은 역습을 당한 폭우, 놀라움
과 분노를 못 참고 이제 막 기마
자세를 취하고 백보신권으로 반
격 하려다가 주인의 호통을 듣기
가 무섭게 선뜻 측방으로 피해
갈패옥의 돌격권에서 벗어났다.
같은 찰나, 셋째 신뢰가 장추
산의 면전에 불쑥 나타나더니,
공격자세를 취하면서 사납게 으
르렁거렸다.
[개자식, 누구더러 욕하는 거
야?]
뒤이어 또 한 사람이 움직였
다. 안춘 소저가 번뜻 몸을 날려
신뢰의 우측방에 들이닥친 것이
다.
[너야말로 개자식, 죽어 마땅
한 놈이다!]
안춘 소저의 봉목(鳳目)에 살
기가 드리워지고 차디찬 번갯불
이 번뜩였다.
[우선 그 개이빨부터 몽땅 부
러뜨려 놓아야겠군!]
지금 그녀는 남장을 하고 있
다. 위엄을 드러내니 진짜 사내
보다 더 서슬 퍼런 살기가 온 몸
에 철철 배어나온다. 또 방금 한
말도 그저 지나가는 농담이 아니
었다. 말끝이 막 떨어지기도 전
에, 그녀의 손바닥은 전광석화와
도 같이 번득이더니 현기증이 나
도록 재빠르게 신뢰의 귀쌈을 후
려치고 있었다. 그 따귀를 얻어
맞았다가는 신뢰의 읜뺨과 이빨
은 필경 참담한 재앙을 당할 터,
그리고 오늘이후 강호상에서 두
번 다시는 영웅 패자로 일컬음도
받지 못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허나, 신뢰도 영락장 사대금강
으로서 부끄럽지 않는 인물이거
니와, 또 얼굴부위는 좀처럼 남
의 손에 얻어터지기 쉬운 자리도
아니다. 귀쌈이 날아들자, 그는
반사적인 동작으로 손을 쳐들어
가로막는 것과 동시에 질풍 같은
속도로 잽싸게 뒤로 물러났다.
임기응변 능력도 극히 민첩한 데
다 상대방의 공격을 봉쇄하는 동
작도 노련하기 이를 데 없었다.
엉겁결에 손을 막 치켜들었을
때, 안춘의 공세가 들이닥쳤다.
[따악!]
신뢰는 팔뚝에 일장을 얻어맞
는 순간, 흉맹스럽기 짝이 없는
잠력 한 가닥이 어깨를 통해 몸
뚱이로 끼쳐드는 느낌을 받고 깜
짝 놀랐다. 놀라운 실성을 터뜨
릴 겨를도 없이, 무서운 충격에
팔목이 퉁기면서 자신의 얼굴을
힘차게 후려때렸다.
[으와앗!...]
그제서야 신뢰의 입에서 알아
듣지 못할 괴상한 외마디 소리가
터져나왔다. 허공에 붕 떠오른
몸뚱이가 1장 바깥으로 날으더
니,가까스로 균형을 잡고 내려섰
다. 그는 재차 반격할 요량으로
쌍수를 내밀었으나 오른 팔뚝이
축 늘어진 채 말을 듣지 않는 것
을 깨닫고 그만 얼굴빛이 핼쓱하
게 질려 버렸다.
안춘 소저도 놀라기는 마찬가
지, 상대방이 방금 그 일장을 막
아낼 수 있으리라곤 생각도 못했
던 것이다. 울화통이 불끈 치민
그녀는 즉시 몸을 솟구쳐 질풍같
이 신뢰에게 덮쳐가면서 재차 일
격을 날려보냈다. 이 일장은 손
바닥을 세워 짓누르듯이 치는 수
법으로, 그 힘도 후려때리는 경
우와는 생판 달랐다. 그것은 정
면에서 강공대 강공으로 맞셨을
때 뚝심이 강한 쪽이 이기는 사
나운 초식이요, 중궁(中宮)을 딛
고 강력한 공세로 상대방의 전투
력을 억누르는 것이라, 공격해
들어가는 기세나 속도 면에서 실
로 무서운 위력을 담고 있었다.
신뢰는 미처 몸뚱이의 중심도
잡지 못하고 오른팔도 쳐들지 못
하는 상태에서 그 무시무시한 재
공격 앞에 고스란히 노출되고 말
았다. 피하려 해도 마음만 앞
설 변 몸이 움직여 주지 않고 막
아 내고 싶어도 진력을 꼴어올릴
수 없으니, 이것 참말 야단났
다!... 그는 그만 두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어차피 한 대는 얻
어터져야 할판이라면 깨끗이 맞
아 줄 각오를 한 것이다.
안춘의 일장이 막 격중되려는
찰나였다. 한 곁에서 큼지막한
손바닥이 비스듬하게 쭉 뻗어나
오더니, 중간에 끼어들어 안춘의
일장을 보기 좋게 차단해 버렸
다. 영락 공자가 적시에 구원의
손길을 뻗친 것이다.
[팟!]
납덩이처림 묵직한 폭음이 메
아리치는 가운데, 매섭게 뻗어나
가던 강풍 기류가 사방으로 흩어
졌다.
영락 공자는 측방으로 3보나
물러나면서 발걸음이 흐트러졌
다.
안춘 소저도 충격을 받고 붕
뜬 자세로 8척 거리를 밀려났다.
몸뚱이가 바로 서기는 했지만,
안정을 잃고 휘청거렸다.
이런 경우를 가리켜서 반 근
여덟 냥(半斤八兩)이라던가? 좌
우간에 쌍방의 장력은 막상 막
하,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는
팽팽한 맞수를 이룬 셈이었다.
[좋아, 내 일장을 다시 받아봐
라!]
안춘 소저가 버들잎 같은 두
눈썸을 곤두세우고 소리쳤다. 재
차 돌진해 들어가면서 일장을 후
려때리는 눈초리에 살기가 듬뿍
늘어나고 있다.
[안 될 것도 없지 !]
영락 공자도 어금니를 으드득
갈아붙이면서 단단히 기마자세를
취하고 쌍권을 정면으로 쑥 내밀
었다. 얕잡아보던 상대에게 세
걸음씩이나 밀린 수치심이 분노
로 바뀐 것이다.
[위이잉 !... 철썩 !]
쌍방이 모두 정말로 노했으니,
이제는 피차 가슴속 깊이 묻어
둔 진재실학(眞才實學)을 몽땅
끄집어내게 되었다. 안춘의 장력
이 미친 파도처럼 흉흉하게 날뛰
고 영락 공자의 권풍은 태산이라
도 무너뜨릴 지경이다. 초면임에
도 불구하고, 두 남녀는 흡사 불
공대천지 원수라도 만난 듯 무섭
게 어우러져 싸웠다. 교묘한 재
간 따위는 쓰지도 못하고 쓸 필
요도 전혀 없었다. 여기서는 오
로지 뚝심과 뚝심이 맞겨루는 마
당이라, 생사가 판가름나거나 양
패구상을 당해야만 끝장나게 마
련이다. 피차 극도의 분노를 품
고 손을 쓰는 만큼, 전후 좌우로
이동해가는 속도 역시 놀랄 정도
로 재빨랐다. 그러니 곁엣 사람
이 뜯어 말리고 싶어도 도저히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피아 쌍방의 몸 밖으로 발출되
는 내공력은 지독스럽기 짝이 없
었다. 그렇다고 어느 한쪽이 두
드러지게 밀리는 기미도 전혀 보
이지 않았다. 쌍방의 공력이 접
촉한 직후의 기세가 서로 똑같이
수그러드는 것을 보면 공력을 연
마한 수준도 거의 차이가 없는
듯 싶었다. 두 남녀는 어느 쪽도
상대방을 어떻게 해 보지도 못하
고, 맞부딪치기가 무섭게 이들의
공력은 기류로 화해 사면팔방 흩
어져 날릴 따름이었다.
[뻥!... 철썩!]
기류가 용솟음치고 난 뒤, 손
바닥과 주먹이 찰싹 맞붙었다.
[퍽!]
음울한 폭음이 울리고 나자 한
덩어리로 겹쳐졌던 두 그림자가
싹 갈라섰다. 세력도 막상 막하
인지라, 쌍방은 동시에 8척 거리
를 물러나서 주저앉았다. 그래도
두 사람은 즉각 몸을 일으켜 세
웠다.
안춘 소저의 얼굴에 돌연 창백
한 기미가 떠오르더니, 숩 한 모
금 깊숙히 들여마셨다가 토해냈
다. 눈망울의 광재가 흐려진 것
을 보건대 살기도 적지 않게 사
그러든 모양이었다.
영락 공자의 얼굴빛은 그보다
더 하얗게 질린 상태, 딱 부릅뜬
호랑이 눈은 여전하지만, 경악에
찬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
다.
그 틈을 타서 장추산이 냉큼
끼어들었다.
[됐소, 됐어 ! 여러분, 우리
다 같이 객지에 나선 외로운 몸
인데 화목을 다칠 필요가 뭐 있
겠소! 또 피차간에 원수진 일도
없고 말이오.]
장추산이 나서서 말리자, 이제
막 사대금강의 둘째인 폭우를 몰
아붙이려던 갈패옥도 '흥!' 하니
콧방귀를 뀌면서 공격을 중단했
다.
[공연히 끼어들지 말고 저리
물러나 있으라구!]
영락 공자가 소리를 질렀다.
뭐가 옳고 그른지 판단할 이성도
잃었는가, 그는 좌절당한 화풀이
를 장추산에게 덮어씌웠다.
[여긴 너 볼일이 없어 ! 네가
끼어들 자리가 아니란 말이다!]
강남일지홍 노천향은 어느 편
도 들지 않고 방관자의 입장에서
중립을 지키고 있었다. 한데 구
경하는 위치가 공교롭게도 싸움
판 오른쪽이었다. 그 자리는 구
경꾼이 영락 공자의 모습을 똑똑
히 관찰할 수 있는 지점이었다.
해말간 눈망울 한 쌍이 처음부터
바느질 하듯 영락 공자의 얼굴
모습에서 발치 끝까지 낱낱이 누
벼가는 동안, 그녀의 입가에는
차츰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뜯어봐도 싫증나지 않는
얼굴, 가을 바람에 옥수(玉樹)와
도 같이 우뚝 선자태, 영기 발랄
하신 이 무림공자에게 가슴 설래
도록 자꾸만 마음이 쏠리는 것을
어쩌란 말이냐?...
쌍방의 재간이나 면모로 본다
면, 강남일지홍과 영락 공자는
확실히 옥녀금동(玉女金童)이라
일컬을 만하다. 재간과 면모가
서로 어울리면 첫눈에 마음이 쏠
리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
니다. 물론 이 첫눈이 그녀의 운
명을 정반대로 바꾸어 놓을 줄은
꿈에도 몰랐겠으나, 여하튼 강남
일지홍은 자신이 이제 어느 편에
나서야 할지 그것만큼은 분명히
결단을 내리고 있었다.
[장 형, 방금 남문 공자가 하
는 말씀을 들었죠?]
갑자기 강남일지홍은 장추산을
향해 미소를 건네면서 물었다.
늦가을 날씨처럼 싸느란 기미
가 짙게 배인 미소였다.
[학문을 익히는 선비 양반이라
면, 사서삼경을 펼쳐 놓고 토론
할 친구분이나 찾아가는 게 좋을
거예요. 안 그래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장추산은
흠칫 놀라고 말았다. 이 아리따
운 아가씨꼐서 웬 변덕을 부리는
거냐?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영락 공자에게 적대감을 품고 있
더니, 어째서 급작스레 마음이
달라졌는가 말이다.
[그게, 그게 무슨 말씀?...]
그는 되물으려다가 입을 다물
었다. 무엇인가 머리 속에 퍼득
떠오른 것이다. 아하, 그렇구나!
어째 변덕을 부리는지 대충은 알
만하다. 앞서 영락 공자의 태도
를 꼬집었을 때, 무림계 인사를
직접 빗대어서 풍자한 것이 이
아가씨의 비위를 건드렸음에 틀
림없다. 내 말에 자존심이 상했
으니 내 역성을 들어줄 리 만무
할 터, 그래서 영락 공자 편으로
기울어지고 나한테 안면몰수를
할밖에 더 있겠는가?
여자의 감정이 바뭐는 것은 참
말 종잡을 수 없다. 특별한 정세
변화를 겪지 않고서도 적방으로
부터 금방 우군으로 바뭐는가 하
면 동맹군이 금방 배신하여 적편
으로 돌아서는 것이 여자의 전형
적인 변덕이다. 남자의 머리로
그 변덕을 헤아리고 이해한다는
것은 애당초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 그만큼 여인들의 정서는
여름철 하늘바뀌듯 변화무쌍하기
때문에 그걸 알아보느라 애써 봤
자 골치만 지끈거리기 십상이다.
남정네가 이런 면에서 태도를
돌변하기란 상당히 어렵다. 적어
도 남자다운 자존심이 그런 반복
무상(反復無常)의 변덕을 허락하
지 않는다.
허나 이런 생각은 여인의 질투
심을 소홀히 넘겨 버리고 있었
다. 안춘과 갈패옥이 나타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녀는 분명
히 장추산을 편들었다. 그러다가
두 처녀가 장추산 쪽에 분명히
서자, 강남일지홍의 태도는 돌변
했다. 이제 장추산을 도발한 말
투도 실상은 그에게 던진 것이
아니라 바로 안춘과 갈패옥에게
향한 도발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
었다.
이상한 노릇이지만, 상대방의
감정 변화가 격렬할수록 그에 대
한 인상도 좋든 나쁘든 한결 깊
고 선명하게 찍히는 법이다. 따
라서 그는 강남일지홍에 대해 아
주 깊고 또렷한 인상을 받고 있
었다. 그 인상은 안춘이나 갈패
옥에게서 받은 것보다 더욱 강렬
한 것이기도 했다.
[노 소저, 내가 남문 형의 말
을 모른 척 무시하겠다는 건 아
니오. 왜냐하면, 남문 형은 애당
초 나를 점찍어 놓고 이 판을 벌
인것이니까 말이외다....]
생각의 정리가 끝나자, 장추산
은 온화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말이 길어질수록 그 안에
는 사람을 다칠 정도로 예리한
칼날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나 장추산은 그런 속셈을 전
혀 두려워하지 않소. 또 저 사람
도 일단 내 거친 성미를 건드리
면 자기 쪽에 참담할 정도로 엄
청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사
실을 잘 알고 있소, 남문 형은
아주 똑똑한 사람이니만큼, 그런
바보 같은 짓을 저지르지는 않을
거요. 자신에게 유리할 때 즉각
손을 거두는 것, 이거야말로 남
문 형의 위명을 강호 천지에 두
루 떨치게 만들어주는 밑천이요,
또 그의 성공을 보장해 주는 증
명서나 다를 바 없으니 말이외
다.]
그는 잠시 뜸을 들이고 나서
말을 이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끝을 내면,
남문 형은 내 성미를 촉발시킬
수 없게 되오. 내가 손찌검을 해
야만 내 근본 내력을 파헤치고
내 무공 조예를 간파해 낼 터인
데, 여기서 좌판을 걷어치우면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다. 이
말씀이오. 그러나 내 쪽에선 반
대로 저 사람의 무공 조예를 이
미 한 가닥이나마 간파해냈소.
이제부터 저 사람이 염치와 체면
불구하고 진짜 실력을 깡그리 드
러내 보인다면 혹 모를까, 그렇
지 않고서는 남문 형의 목적을
달성할 가능성은 절대로 없을 거
외다!]
[그럼 제가 당신의 근본 내력
을 파헤쳐 보아야겠군요.]
강남일지홍이 싸느닿게 웃어가
며 도전했다.
[당신이 첫수를 내밀기만 하
면, 나는 당신의 무공 내력과 가
문을 알아낼 수 있을 거예요. 또
그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간파할
수 도 있고 말이죠.]
[당신에게 정말 그련 능력이
있을런지....]
그때였다. 강남일지홍의 왼손
바닥이 앞으로 쓰윽 내밀어지더
니 조용히 흔들어붙였다. 무심결
에 잘못 내민 듯 가볍게 흔들어
보인 동작이었다.
거기서는 기류의 격탕도 없었
고 별다른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러나 돌발적인 상황이 벌어진
것은 틀림없었다. 그녀의 장심에
서 느닷없이 괴상한 공력 한 가
닥이 불쑥 뻗어 나오더니, 장추
산을 향해 물밀듯이 덮쳐갔다.
그것도 한 순간이 아니라 면면부
절(綿綿不絶), 끊일 줄 모르고
계속 이어나가는 것이다.
[으앗!...]
바로 곁에 서 있던 영락 공자
의 몸뚱이가 저도 모르게 앞뒤로
두 차례나 휘청거렸다. 제일 가
까운 곳에 있던 안춘 소저도 '이
크!' 소리를 지르면서 두 발짝이
나 밀려나갔다.
갈패옥은 얼굴빛이 싹 변하더
니, 기마자세로 발바닥을 지면에
딱 붙이고 서서 버렸다. 쌍수로
중단 하단의 문호를 엄호한 태세
는 보상장엄(寶像莊嚴), 바로 그
것이었다.
강남일지홍을 빼 놓고, 모든
사람들의 발 밑에는 하나같이 미
끄럼타기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
다. 몸뚱이는 저마다 기마자세로
안정을 유지하고 있으나, 잔뜩
굳어진 표정은 전심 전력으로 운
공하여 항거하는 기색이 역력했
다.
장추산 역시 말타기 자세로 두
발을 지면에 뿌리박았으나, 몸뚱
이는 한 치 한 치씩 뒤로 천천히
미끄러지기 시작해서 2장 남짓이
나 물러나서야 비로소 멈출 수가
있었다. 미끄럼이 정지했을 때,
불그스레 윤기가 돌던 얼굴빛은
종잇장처럼 창백하게 바뀌어 있
었다.
결국 이 기괴한 무형 잠력은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영향을 끼
친 셈이었다.
[이게 무슨 사문 잠력이야?]
갈패옥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버럭 악을 썼다. 유일하게 미끄
럼 폭이 제일 짧았던 사람인데도
이 왈가닥 처녀는 누구보다 먼저
호들갑스래 발작을 일으킨 것이
다.
영락 공자는 아무 소리도 않은
채 강남일지홍의 시선을 빨아당
길 듯 노려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 눈빛은 순식간에 골
백번은 더 바뀌고 있었다.
[적멸대진력(寂滅大眞力)이 아
닌가 몰라!]
안춘 소저가 창백한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그 말투도 놀라움과
두려움에 떨려 나오고 있었다
[적멸대진력?...]
갈패옥이 다시 묻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불문도겁(佛門度劫)의
상승선공(上乘禪功)이라, 외부로
부터 침입하는 마귀도 쫓을 수
있지. 아마 금강불괴의 법체라도
부술 거야....]
강남일지홍은 뭇 사람들의 질
린 기색이나 쑥덕공론은 못 들은
척 무시해 버리고 날카로운 눈초
리로 오직 한 사람 장추산의 움
직임만 바짝 뒤쫓으면서 마치 도
둑을 문초하는 관헌처럼 그의 얼
굴표정이 어떻게 변하는가 그것
만 유심히 살펴보았다.
이윽고 장추산이 굳어진 몸을
풀면서 '푸우!'하고 긴 호흡을
뱉아냈다. 눈빛은 오랜 여행길에
지친 나그네처럼 피로감에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어디 다친 데나
없는가 보려는 듯 버거운 몸짓으
로 팔다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결국 장내에 있는 사람들 증
그의 내공력 수준이 가장 뒤떨어
진 다는 사실이 증명된 셈이었
다. 비록 알지 못할 잠력이긴 하
지만 그 혼자서 2장 바깥으로 미
끄러졌다면, 안춘이나 갈패옥보
다도 5, 6배 남짓한 거리를 밀려
났다는 얘기요, 또 그만큼 화후
가 떨어진다는 얘기가 되는 것이
다.
[어때요, 나도 당신이 손을 쓰
도록 몰아붙일 자격이 있죠?]
강남일지홍은 얼굴에 노기를
엷게 띤 채 그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난 무섭소, 당신...]
장추산은 쓰디쓴 웃음을 지으
면서 감당 못하겠다는 듯 한 발
짝뒤로 물러섰다. 그는 상대방이
다가서는 대로 계속 물러나면서
이렇게 말했다.
[노 소저, 당신 그 기묘한 절
학은 참말 불가사의하구료. 아마
도 불가능을 가능한 것으로 변화
시키는 경지에 다다른 것 같소.
나처럼 평범한 사람이 아니더라
도 그 잠력 앞에서 음쭉달싹도
않고 버텨낼 자는 다시 없으리
다. 노 소저, 이 장추산을 너무
몰아붙일 게 아니라 앞으로 조심
하셔야겠소.]
[뭘 조심하란 말이에요.]
[노 소저의 무공이 지금보다
더 뛰어나더라도, 자신의 생사화
복은 보장할 수 없을 거요. 그
무시무시한 잠력을 운공하지 않
을 때는 보통 사람이나 전혀 다
를 바 었지 않소? 그때는 무공을
익히지 않은 사람과 똑같이 다치
기 쉽고 피 흘리기 쉬운 혈육지
체를 면치 못한단 말씀이오. 이
제 당신은 세상을 놀라게 할 만
한 초인적인 무공을 드러내 보였
소. 그러니 앞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공개적으로나 암암리에
당신을 해치러 들겠소?]
[당신도 날 해치려 들 거예
요?]
[나는 아니지!]
[할 능력은 있고요?]
[만약 내가 마음만 먹는다면
반드시 해 낼 거요.]
그는 딱 부러지게 대꾸했다.
[큰 길거리를 지날 때 사람들
틈에서 치명적인 암기를 한 대
먹이는 것쯤이야 그리 어려운 일
도 아니겠고, 미향을 써서 거꾸
러뜨리거나 침상에다 독사, 독거
미, 독전갈을 숨겨 놓아도 효과
는 있을테고, 또 독초를 남몰래
음식에 넣어서 쓰러뜨릴 수도 있
겠고... 이런 걸 어떻게 다 막으
려오? 하루 열 두 시진을 꼬박
운공해서 방어할 수 있다고 생각
하시오?]
[당신이 그런....?]
[나는 지금 당신을 깨우쳐 드
리고 있는 거요, 노 소저.]
그는 복도 쪽으로 슬금슬금 물
러나면서 말을 이었다.
[당신과 나는 이날 이때껏 아
무런 교분도 맺지 않았소. 또 당
신과 명분이나 이익을 다툰 것도
아니고 말이오. 그러니 공연히
화를 낼 것도 없지 않소? 나는
비겁하게 누구를 암습하지는 않
소. 다른 사람한데나 경계를 하
라 이 말씀이오, 아가씨 !]
그는 재빨리 자기 방으로 뛰어
들었다. 그리고 광 소리가 나도
록 거세게 방문을 닫아걸었다.
강남일지홍은 그의 방문에 눈
길을 못 박은 채 멍하니 서 있기
만 했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오만스럽던 얼굴빛이 조금 달라
졌다.
[일지홍!...]
왈가닥 처녀가 느닷없이 소리
쳐 그녀를 일깨웠다.
[나도 병기를 써서 당신의 기
공절학을 시험해 봐야겠어!]
갈패옥의 손아귀에는 어느덧
비수 한 자루가 쥐어 있다. 거울
처럼 밝은 칼빛, 서리찬 광채가
사방으로 쏘아져 나가는 비수였
다.
[방금 당신은 급살맞게 절학을
펼쳐 시위하지 않았나? 만약 내
가 한 순간이라도 늦게 운공해서
몸을 보호하지 못했더라면, 죽지
는 않았을 망정 크게 다쳤을 거
야! 그런 살상수법을 함부로 쓰
다니!...]
[꼬마 아가씨, 나한테 그런 말
할 자격이라도 있나?]
강남일지홍의 얼굴이 다시 험
상굿게 바뀌었다.
[내 신공절학을 억지로 받아
낼 수 있다고 착각하지 말아. 하
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
니, 별 것도 아닌 풋내기가 이
강남일지홍에게 도전을 해? 정말
죽고 싶어 환장을 했구만!]
[당신이야 비겁한 수단으로 암
습은 곧잘 하겠지....]
[흥, 광망스러운 것!]
강남일지홍은 코방귀를 뀌더
니, 살기등등하게 다시 일장을
쳐냈다.
무형 무질의 잠력이 또 한 차
례 조수처럼 밀려들기 시작했다.
느낌으로 보건대, 이번 것은
앞서보다 두 배나 강맹한 장력이
틀림없다.
갈패옥도 지체 없이 수중의 비
수를 떨쳤다. 칼끌을 정면으로
곧장 내뻗자, 뿐어나오던 광채가
삽시간에 두 배로 강렬해졌다.
[쉬이익 ! 쉬이익 ! ]
비수의 칼끝 앞에 들이닥친 잠
력이 귀를 찌르는 듯 괴이한 소
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
에 갈패옥의 비수에서도 '채르
릉! 채르릉!' 하니 맑은 용음(龍
吟)이 울려 퍼졌다. 이때껏 잠잠
하던 기류가 '쏴아!' 하고 물결
치기 시작했다. 기류의 파동 속
에서 그녀는 두 걸음이나 밀려났
다.
[어엇?...]
강남일지홍의 입에서 믿을 수
없다는 듯 놀라운 실성이 터져나
왔다.
[네 비수가 진짜 신통력을 지
녔구나! 내 절세신공을 어엿이
쳐서 흐트려 놓다니... 좋아, 네
가 얼마나 더 버틸 수 있는지 보
기로 하지!]
그녀는 기마자세를 바짝 당기
고 쌍장을 갈라 내밀어 공격태세
를 완벽하게 가다듬었다.
곁에서, 안춘 소저는 줄곧 냉
정한 눈초리로 지켜보기만 했다.
그녀의 마음은 오직 하나, 강남
일지홍의 공력이 과연 불문의 상
승선공 적멸대진력인지 아닌지
증명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일념
뿐, 두 처녀간에 누가 지고 이기
든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첫번
째 공격에서 기류의 파동이 생기
고, 갈패옥이 비수를 휘두를 때
마다 휘파람 같은 날카로운 소리
가 울리자, 그녀는 속으로 실망
하고 말았다. 이건 그녀가 상상
했던 적멸대진력이 아닌 것이다.
'적멸' (寂滅)의 현상은 결코 나
타나지 않았다. 기류의 파동은
만뢰구적(萬 俱寂)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또 한 곁에서, 영락 공자의 눈
초리는 여전히 쉴새없이 바뀌고
있었다. 두 번째 공방전이 격돌
하기 직전, 그는 무엇을 보았는
지 시립한 경호원 두 명에게 낮
은 목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가자!]
경호원이 손을 번쩍 들어 신호
를 보내자,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던 사대금강이 조용히 철수
했다.
[우리는 물러가겠소! 이런 명
분 없는 싸움, 개인적인 결투에
말려들고 싶지 않으니까...]
영락 공자는 세 처녀를 향해
큰소리로 외치더니, 재빨리 복도
에 올라섰다. 그리고 창황한 발
걸음으로 자기 방을 향해 걸어가
기 시작했다.
그의 목표는 장추산이었다. 목
표가 사라진 마당에서야 곱게 물
러나는 것이 명분도 서고 이치에
도 맞는다. 철딱서니 없는 아가
씨들이야 다투거나 말거나, 내
알 바 뭐냐?...
[이얍!]
강남일지홍이 매서운 기염을
토하면서 공격위치를 바꾸더니,
한 걸음 선뜻 내딛어가며 다시
일장을 후려쳤다.
왈가닥 처녀도 이번만큼은 섣
불리 맞받을 수 없는지, 신형을
틀어 측방으로 회피동작을 취하
면서 비수를 비스듬히 베어냈다.
비수의 광채가 사라지는 듯 싶다
가는 어느 결에 불쑥 나타나더
니, 상대방의 잠력을 바깥쪽으로
길게 끌어내기 시작했다.
[슈우욱! 슈우욱! ]
[재르릉!... 채르릉!...]
사뭇 휘파람 소리 같은 잠력의
파동에 용음이 뒤섞여 울리는 찰
나, 그녀는 전광석화처럼 상대방
의 정면으로 비수를 휘두르며 덮
쳐들었다.
[이야앗!]
측방으로부터 몸뚱이가 맞붙을
정도로 바짝 파고드는 동안, 비
수의 칼날은 정면에서 눈부시도
록 찬란한 무지개를 토해냈다.
비수가 무지개를 토해낼 수 없
음은 물론이다만, 공격할 때의
속도가 너무 빠르기 때문에 비수
자체의 광채가 시력을 빨아들이
면 서 지나치는 곳마다 진상(眞
狀)이 순간적으로 무지개와도 같
은 환상을 펼쳐냈을 뿐이다.
허나, 비수에서 뿜어나오는 검
기(劍氣)는 과연 대단한 것이었
다. 1장 바깥에 서서 관전하던
안춘 소저가 그 얼음같이 차가운
한기에 몸이 짓눌리는 듯한 느낌
을 받았으니, 그와 맞서 싸우는
강남일지훙의 입장에선 엄청난
압력이 아닐 수 없었다. 이 무서
운 한기는 갈패옥이 비수에 신공
을 얹어 상대방의 절세기공을 꿰
뚫고 들어가 단번에 결판을 내고
야 말겠다는 각오의 표현이었다.
어떤 절세기공이든 몇 차례나
계속해서 쓸 수 없는 법, 한 번
쓸때마다 내공진력은 한 푼 두
푼씩 소모되기만 할 뿐 끝없이
이어지지 않는다.
강남일지홍 자신도 절세기공을
몇 차례 써야만 기력이 고갈되는
지 당연히 알고 있다. 그렇기 때
문에 싸움을 마냥 끌고만 나갈
형편이 아니었다. 그녀는 갈패옥
이 교묘한 유투술(遊鬪術)로 정
면 공세를 회피하고 측방의 허점
으로 뚫고 들어오는 것을 용납하
지 않았다. 이른바 피실격허(避
實擊虛) 전법에는 연속 타격만이
효과를 거두는 법, 그녀는 야무
진 기합성을 터뜨리면서 쌍장으
로 연달아 두 차례의 공격을 퍼
부었다.
[이얍!-]
과연 그 효과는 있었다. 상대
적으로 실전 경험이 모자란 갈패
옥은 꼼짝었이 그 수에 넘어가고
말았다. 무시무시한 잠력이 그것
도 쌍장으로 한꺼번에 날아들자,
그녀는 어마 뜨거라! 황급히 공
격초식을 거두어들이고 측방으로
몸을 틀어 반 바퀴나 빙그르 돌
아나갔다. 그리고는 다시 허점을
찾아 역습해 들어갈 태세를 취했
다.
피아 쌍방이 쓴 것은 모두 허
초, 표면상으로는 전력을 다 쏟
아낸 것처럼 보였으나, 실상은
어느 쪽에서도 진력을 발출한 것
이 아니었다.
싸움판의 형세는 즉각 이동하
면서 간간히 맞부딪는 유격전으
로 바뀌고 말았다. 이 싸움은 어
느 한쪽이 참을성을 잃어버리거
나 기진맥진할 때까지 질질 끌어
가다가, 혼신의 일격으로 결정타
를 먹여야만 승부가 나게 마련이
다.
영락 공자는 자기 방 문턱에
서 있었다. 싸움터에서 물러난
후방으로 들어가는 대신에 지금
껏 쌍방의 대결을 줄곧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노 소저, 마냥 돌아다니기만
할 게 아니라 유공(柔功)을 써서
꼬마 아가씨를 바짝 끌어들이라
구!]
그는 버럭 고함쳐 강남일지홍
을 일깨워 주었다.
[바짝 육박하도록 만들어야만
결정타를 먹일 기회가 있에. 유
투술은 상대방에게만 유리하단
말이야. 미꾸라지처럼 빠져 달아
나는데 무슨 수로 잡겠나? 담벼
락 모퉁이로 바짝 몰아붙이라구!
그렇지 않으면 반나절을 끌어도
정신이 헷갈리고 쓸데없이 공력
만 소모될 뿐이야! 노 소저, 알
겠소?]
강남일지홍더러 바짝 육박해
들어가서 강공으로 상대방을 오
도가도 못하게 외통수에 몰아넣
으라는 귀띔, 실로 지당한 말씀
이다.
[저런 야비한 자식!]
안춘 소저의 입에서 욕설이 터
져나왔다.
[흐흥!]
영락 공자도 욕을 얻어먹고 약
이 올랐는지 냉큼 복도 아래로
내려섰다. 그러나 두어 발짝 내
딛고서는 무슨 생각이 났는지 다
시 휙 돌아서더니, 휘적휘적 걸
어서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그와 때를 같이 헤서, 담 모퉁
이와 복도 낭하, 후원으로 통하
는 협문 쪽에서 괴한들이 일제히
모습을 드러냈다. 인원수는 모두
여섯, 여느 가난뱅이 농사꾼이나
다를 바 없는 옷 차림새로 낡아
빠진 양가죽 외투 차림에 두 눈
만 내 놓고 바람막기 모자를 푹
눌러 쓴 괴한들이 한꺼번에 들이
닥치더니, 밭에 씨를 뿌리기라도
하듯 양손을 쉴 새 없이 휘두르
면서 뜨락 한가운데로 휘적휘적
걸어 들어왔다.
[뭣하는 놈들이냐!]
안춘 소저가 야무지게 질타했
다. 첫눈에 심상치 않은 조짐을
본것이다.
[함부로 들어오지 마라! 네놈
들...]
두 마디째 호통을 치는 순간,
그녀는 머리가 어찔해지는 느낌
이 들고 토할 듯 구역질이 났다.
[앗! 이게...]
그녀는 깜짝 놀랐다. 허나 반
사적인 행동을 취하기도 전에 하
늘과 땅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
다. 다음 순간, 머리통은 천 근
무게, 두 다리는 구름을 딛듯 푸
석푸석 들뜨는가 하면 의식도 가
물가물 흐려졌다. 그녀는 해엄치
듯 양손을 허우적거리다가 앞으
로 털썩 고꾸라졌다. 그리고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의식이 스러지는 찰나, 그녀는
강남일지홍과 갈패옥이 동시에
경악성을 지르는 소리, 그리고
몸뚱이가 꽈당꽈당 넘어가는 소
리를 들었다.
마지막으로 귀에 울린 것은,
영락 공자의 방문이 거세게 닫히
는 소리였다.
장추산의 방 안에는 긴장된 분
위기가 감돌았다.
상석에는 풍채 좋은 중년의 부
인 셋이 자리 잡았는데, 이들은
바로 왈가닥 처녀 갈패옥의 어머
니 양씨(楊氏)와 둘째 이모 양벽
아(楊碧娥), 그리고 젖엄마 방씨
(方氏)다.
남의 가문에 시집간 여자는 관
례적으로 남한데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 그래서 처녀 적
이름은 출가하면서부터 잃어버린
것처럼 되고, 아무개 집안의
딸 누구라는 명칭으로 불리울 기
회도 별로 많지 않을 뿐더러 그
저 남편의 성씨를 따르는 경우가
보통이다. 그래서 장추산도 양씨
의 호칭을 갈씨 부인으로 불렀
다.
방 안 또 한쪽에는 안춘 소저
의 하녀 두 사람이 불안한 눈으
로 허공을 우러른 채 걱정스런
기색으로 앉아 있었다. 중년 하
녀 이름은 안삼(安三), 서동 차
림의 몸종은 소도(小挑)다. 중년
하녀의 이름자가 사뭇 괴상한 것
이, 남자라면 호 모를까 통상 여
자들은 형제 자매의 항렬을 따져
서 이름 붙이는 경우가 거의 없
다시피 한데, 이여인은 항렬대로
천연덕스레 '셋째' 란 이름을 대
고 있는 것이다.
장추산은 마음 속으로 이 여인
의 본색을 어느 정도 간파하고
있었다. 차림새나 일상적인 행동
거지는 안춘 소저의 하녀임에 분
명했지만, 이 아낙의 무공은 화
경(化境)에 도달했을 뿜만 아니
라 경공술을 펼쳐 날으는 속도
초진발속(超塵拔俗)의 수준에 이
른다. 그렇다면 이 중년 아낙의
진정한 신분은 절대로 하녀일 수
없을 터이고, 또 안삼이란 이름
도 자연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
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물어보기도 뭣하
고 또 감히 질문을 던질 엄두도
나지 않았다.
[저는 안채에 들어가 세수를
하던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바깥
에서 여러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
가 어렴풋이 들려오더군요. 가슴
이 철렁 하는 것이, 뭔가 심상치
않다 실어 곧바로 뛰쳐나가 보았
습니다만...]
장추산은 잔뜩 굳어진 기색으
로 정중하게 말을 이었다.
[한 발 늦어서 아무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이웃 방에
서 나오던 점원을 하나 붙잡고
물어 봤습니다. 정체를 알 수 없
는 사람 아홉 명이 쳐들어왔다더
군요. 객점에 투숙한 손님이냐고
물었더니, 절대로 아니라는 겁니
다. 모두들 허름한 양가죽 옷을
입은 농사꾼 차림새였다고 합니
다. 그들이 이 객점 손님 몇 분
을 등에 걸머지고 지붕 위로 사
라지는 뒷모습을 똑똑히 봤다는
얘기도 했습니다.]
그는 갈패옥이 쓰던 비수를 꺼
내 탁자 위에 놓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둘러가며 쓴
웃음을 지었다.
[따님의 비수가 눈더미에 떨어
져 있더군요. 실수해서 떨어뜨린
게 아니었습니다. 정신을 잃기
직전, 일부러 눈더미 속에 깊숙
히 꽂아 감추어 둔 것을 찾아냈
으니까요. 그걸 보면, 침입자들
이 사전에 주도 면밀한 준비를
갖추고 남모르게 잠입해서 매복
해 있다가 짧은 순간에 미혼약물
을 살포했다는 얘기가 됩니다.
그리고 돌발적으로 나타나서 손
님을 납치한 다음 재빨리 사면팔
방으로 분산해 사라졌을 겁니
다.]
숨을 한 모금 돌린 다음, 그는
몇 마디를 덧붙였다.
[갈 소저와 안 소저는 평소 면
식도 없는 처지인데, 어째서 함
께 납치되어 갔는지 모르겠습니
다. 혹시 두 집안에 똑같이 원한
을 품은 자가 꾸민 짓이 아닐까
요? 여러분께선 과거에 무슨 원
수를 맺은 사람이라도 없으신지
기억을 더듬어 보십시오. 그쪽을
추적해 나가면 필경 소득이 있을
듯 싶군요.]
[강남일지홍도 잡혀갔습니다.]
중년 하녀 안삼이 무겁게 업을
열었다.
[처음에 저는 그 여자가 음모
를 꾸며서 이런 간계를 저지른
게 아닌가 싶길래, 그 여자 방으
로 가서 짐보따리와 유품을 뒤져
봤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납치자
들의 일당이 아니란 사실만 알아
냈을 뿐입니다. 조반을 들려던
중이었는지, 탁자 위에 아침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으니까요.]
[영락 공자 쪽은 이 늙은이가
직접 찾아가서 알아보았소.]
갈씨 부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사람 일행은 모두 방 안에
다 있었소. 방문과 창문도 빗장
을 질러 단단히 잠겨 있었고 말
이외다. 게다가.문 밖에는 방풍
난방용휘장을 두툼하게 쳐 놓았
으니, 바람 한 점 통하지 않는데
바깥에서 무슨 소리가 나더라도
어떻게 들리겠소? 그래서 영락
공자 일행은 어떤 패거리가 침입
했는지 까맣게 모르고 있습디다.
장 대협, 보다 시피 이 객점 안
에서는 실마리 하나 단서를 잡을
수 없으니, 참말 어쩌면 좋을지
막막하구료.]
[청천 백일하에 공공연히 객점
에 쳐들어와서 사람을 납치해 가
다니, 그놈들이 얼마나 대담하고
광망스런 무리인지 알 만합니다.
절대로 등한히 보아선 안 될 무
서운 조직의 패거리가 분명합니
다.]
장추산은 걸상을 밀어내고 일
어섰다.
[방 안에 가만 앉아서 탁상공
론이나 추측을 해보았자 아무 쓸
데가 없습니다. 우리 각자 패를
나누어 단서를 찾아봐야겠습니
다. 시간이 없으니, 빠르면 빠를
수록 좋습니다. 지붕 위에 눈이
쌓여 있을 테니까, 놈들도 흔적
을 안 남기고 달아났을 수야 없
겠지요. 저는 저대로 즉시 수색
을 시작할 데니, 여러분이나 저
나 무슨 소식이라도 얻거든 곧바
로 이곳에 다시 모여서 의견을
나누기로 하지요.]
[옳은 말씀이오! 지체할 일이
아니외다.]
중년 하녀 안삼이 먼저 동의를
하고 일어섰다.
[저는 밖에 나가 도와줄 사람
을 찾아봐야겠습니다. 그럼 먼저
실례!...]
잠시 후, 장추산은 객점 후원
우측 담모퉁이 꼭대기에 모습을
드러냈다. 담장 머리를 따라 지
붕 위에 이르기까지 밟아 나가는
동안, 그는 점원의 말이 옳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 자신의 추측
도 상당히 정확했다. 침입자들이
모두 답설무흔(踏雪無痕)의 경공
신법을 지닌 절정 고수일 수는
없을 터, 또 설령 그렇다 치더라
도 오랜 시간 그 신법을 구사한
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 추리는 과연 들어맞았다.
지붕 위에는 그들이 철수할 때의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 있었다.
그는 추적에 있어서 전문가였
다. 그렇기 때문에 납치자들이
남긴 흔적 가운데서 무거운 짐을
떠멘 자의 발자국을 별로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가 있었다. 기절
한 사람의 몸뚱이는 깨어나 있을
때보다 두 배쯤 무거운 법, 수색
의 전문가라면 누구나 그리 애를
쓰지않고서도 정확히 가려낼 수
있는 것이다.
발자취는 10여 채의 민가를 가
로질러 뻗어 나가다가, 마지막에
가서는 자그만 골목 아래로 뛰어
내렸다.
재미 적게도, 골목에 쌓인 눈
바닥은 행인들의 무심한 발길에
짓밟혀 어느 게 먼저요 나증 것
인지 가려내기가 쉽지 않았다.
그는 발자취가 헝클어진 부근
의 민가를 돌아다니면서 닥치는
대로 행인을 붙잡고 물어봤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 운수 좋게
도 어느 영감님의 입을 통해 세
사람이 골목에서 빠져나왔다는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그것
도 세 사람 모두 죽은 시체 같은
물건을 자루에 담아서 떠메고 사
라졌다는 것이다.
반시진이 지나서, 북관(北關)
을 빠져나온 그는 야주성 교외
동북 쪽 눈 덮인 구릉지대로 접
어들었다.
첫댓글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