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객뇌신(俠客雷神) 2권
지은이 / 운중악
옮긴이 / 임화백
1
습격
성 밖 동남쪽 모퉁이를 감돌아 흐르는 운하 기슭에 길상암(吉祥
庵)이 자리 잡고 있다. 이 절의 이름은 훗날 지주사(智珠寺)로 바
뀌는데, 당시만 하더라도 30여 명쯤 되는 비구니들이 이 절에서
수행(修行)을 하고 있었다.
또 비구니라곤 하지만 이들 수도자 가운데 절반은 삭발하지 않
고 머리를 기른 부녀자들이었다. 이른바 '대발고행' (帶髮苦行)을
한다는 것이다.
운하 양 기슭에서 고기잡이를 하거나 사공 노릇을 하는 친구들
의 눈에는 이 길상암이 거룩하고 청정한 불문도량(佛門道場)이 아
니라, 세상에 온갖 추악하고 더러운 구더기가 득시글거리는 쓰레
기통으로 보였다. 비구니들도 고된 수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속세
인간이 누리는 향락을 맛보고 있다는 것이다.
소문대로 길상암은 불문의 청정한 성지(聖地)가 아니었다. 또
비구니도 세상 이목을 가리고 저들끼리 남몰래 향락을 맛보는 게
아니라, 아예 공공연히 사내들을 끌어들였다. 그러니 생각이 있는
난봉꾼들은 부처님, 보살님께 분향을 올리고 참배한다는 핑계를
대고 찾아가기만 하면 되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길상암은 보살님
을 모독하는 매음굴, 신령한 부처님께서 벼락을 때려 죽인다 하더
라도 외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마녀들의 소굴이었다.
사실 양주 일대에서 풍류객이 놀아날 환락장은 쇠털보다 더 많
다. 부성 안팎, 동서남북에 걸친 스물네 군데나 되는 다리 근처에
나가서 어딜 둘러보든 모두가 광릉춘(廣陵春)이요, 강녕부나 진회
하(秦淮河) 일대의 이름난 꽃떨기보다 한수 높은 품격을 지닌 절
색의 요화(妖花)들이 발길에 채일 정도로 수두룩하다. 강물과 운
하에 떠 있는 유람선들도 진회화방(秦淮花舫)보다 더 으리으리하
고 사치스럽게 꾸였을 뿐더러, 하다 못해 나룻배에서 노 젓는 아
가씨들조차 뽀얀 다리 살결을 드러내놓고 하늘거리는 탯거리로 손
님을 유혹하는 판이니, 일패(一牌), 이패(二牌), 삼패(三牌) 기방
( 房)이야 더 말할 나위가 어디 있을손가?
이런 좋은 세상을 외면한 채, 양심 잃어버린 녀석들과 부처님의
반도(叛徒)들은 한사코 청정한 불문성지를 더럽히고 있으니, 인간
들의 심보란 정말 이해할 도리가 없다.
하기야 이것저것 체면 차리고 하늘이나 보살님이 두려워서 그짓
을 못한다면 천하의 바람둥이가 아닐지도 모른다. 속담에 뭐라 했
던가? 오입쟁이들이 꼽는 일곱 가지 별미가 있다고 한다. 일도(一
), 이수(二獸), 삼낭(三娘), 사과(四寡), 오니(五尼), 육(六妓),
칠처(七妻)라 했으니, 첫째는 남의 담장을 넘어가서 겁탈하는 재
미요, 둘째는 끔찍스럽지만 수간(獸姦)이다. 세번째는 처녀요,네
번째는 과부, 그리고 다섯번째 맛이 절간에 들어가서 비구니 여승
후리기다. 기생이나 마누라는 꼴찌로 친다.
오입쟁이는 평생 그 짓을 하다가 죽어서 십팔층 지옥에 떨어진
다지만, 새우젓에 맛들이면 절간에 빈대 한 마리 남아나지 않는다
는 격으로 이 열락(悅樂)에 미친 비구니들은 현세의 지옥에서 버
둥거리다가 죽어서 어떤 지옥에 떨어질는지 모를 노릇이다.
길상암 부근은 명분상으로 시골 벌판이라곤 하지만, 그것은 관
청 기록에만 그렇게 적혔을 뿐, 실상은 강기슭을 따라 적지 않은
민간 가옥이 세워져 있다. 심지어는 별장 형식의 저택도 어엿이
세워져 있다. 이곳은 양주 부성과 거리도 가깝거니와 수륙 양면으
로 교통이 아주 편해서 뭍으로 오는 사람은 가마를 타고, 물길로
오는 사람은 언제든지 배를 이용할 수 있다. 또 길상암 비구니들
이 먼저 터를 닦고 장사판을 벌이는 바람에 더러운 물이 들어서
그런지 모르나, 여하튼 이 지역도 난장판을 이루기는 마찬가지다.
용사(龍蛇)가 떼를 지어 뒤섞이면 우범지대를 형성하는 법. 양
주 일대의 관헌들이 가장 골머리를 썩이는 지역 가운데 하나가 바
로 이곳이요, 또 그들이 국물을 제일 많이 얻어 자시는 곳도 바로
이런 난장구(亂葬區)였다.
길상암에서 북쪽으로 1백여 보 떨어진 지점, 강기슭에 거의 맞
닿는 곳에 광릉원(廣陵園)이 우뚝 솟아 있다. 정자와 누각도 격식
에 맞게 지었을 뿐만 아니라 강변에는 개인 소유의 선착장과 부두
까지 설치되어, 온갖 크고 작은 선박이 드나들고 정박해 있다.
광릉원의 주인 방무릉(方武陵) 나으리는 바로 양주성 10대 부호
향신(鄕紳) 가운데 한 분이다. 그는 내륙과 선박 운수사업으로 가
업을 일으켜, 1백 석(石)짜리 용량의 화물선만도 1백여 척이나 가
지고 강남의 특산품인 능라주단(綾羅紬緞)을 소주(蘇州)로부터 산
동 지역, 더 멀리는 북경에 이르기까지 날라다가 큰 무역을 해서,
날이면 날마다 금은 보화를 삼태기로 퍼낼 정도로 막대한 이익을
본다고 했다. 그러니 양주 10대 부호 중에서도 '큰 나으리' 로 손
꼽힐 만큼 당당한 세력가요 유지라는 평판이 나돌 수밖에.....
이분 방무릉 나으리의 전력(前歷)이 어땠는지 아는 사람은 하나
도 없다. 강호 일대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무림의 고수였다는 사
실, 또 그가 10여 년 전만 하더라도 호도상에서 으뜸으로 손꼽히
는 공포적인 마귀요 살성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더구나 없
다.
방무릉, 아니 <능소객> 방세광의 무서운 행적은 이제 강호 친구
들의 기억 속에서 점점 희미하게 잊혀져가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
가 종적을 감춘 지 어언 10여 년의 세월이 흘렀기 때문이다.
'큰 나으리' 방무릉은 부성 안에도 으리으리한 대저택을 소유하
고 있다. 하지만 그 저택에 사는 식구들은 모두가 평범하게 살아
가는 장사꾼과 늙고 연약한 부녀자들이 전부다.
또 성밖 이 광릉원도 평소에는 장원 대문이 굳게 닫혀서 드나드
는 외부 손님이 거의 없다시피 하다.
이곳을 왕래하는 사람은 모두 물길을 이용한다. 또 오가는 때도
언제나 캄캄한 밤중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 년 사시사철 대낮에는
장원에 출입하는 사람을 보기 어렵다.
<신투> 이백록은 숱한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이 방씨 나으리의
내력을 탐문했었다. 그리고 또 살신지화(殺身之禍)를 당하게 된
까닭이 바로 그것 때문은 아닐런지?... 그건 아무도 섣불리 짐작
할 수 없다.
<신투>는 이미 죽었다. 어쩌면 실종되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사건은 장삼이 은화 3백 냥이라는 거액으로 <신투>를 고용해서
조사한 일이었고, 또 <신투>를 잡아 죽인 건청방 사람들은 엄청난
인명을 장삼의 손에 참담하게 희생당함으로써 그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하지만 이 정도로 사건이 마무리된 것은 아니었다. 풍운은 바야
흐로 긴박감을 더욱 팽팽히 조이고 있었다.
신비의 인물이 숱하게 출몰한 그 반나절 동안, 양주 일대에 얼
씬거리던 온갖 잡배 귀신들이 적지 않게 실종되었다. 강호 친구들
의 인심이 황황해지고 눈치 빠른 정령귀(精靈鬼)들은 잽싸게 발을
빼어 멀찌감치 피신해 달아났다. 이른바 '원주고비'(遠走高飛),
빠르면 빠를수록 좋았다. 배를 타고 뺑소니치는 길은 두 다리로
뛰는 것보다 빠르고 또 편한지라, 반나절만에 양주 인근 나루터의
배삯이 두 배로 뛰고, 그나마 구하기도 힘들게 되었다.
그러나 광릉원은 이런 풍파의 영향을 받지 않는 듯 여느 때나
다름없이 깊은 적막에 잠겨 있었다. 왜냐? '큰 나으리' 방무릉 어
르신께선 강호인도 아니고 또 무공도 할 줄 모르는 부호 향신이
라, 강호의 폭풍이 그분 신변에는 파급되지 않기 때문이다.
여하튼 누가 뭐라거나, 이 어른의 신분은 양주 부성에서 누구든
지 섣불리 건드리지 못할 정도로 막강한 것이다.
오후도 한참 이슥해진 신시(申時: 오후 네 시) 무렵, 자그만 오
봉선 한 척이 강물의 흐름을 따라 하류로 떠내려왔다.
운하는 성 동북쪽으로부터 성곽을 에워싸듯 정동 방향으로 감돌
아 나가서 남방으로 꺾어져 흐르는데, 그 하류 2, 3리 지점이 바
로 길상암 일대의 수역이 된다. 이 수역은 면적이 겨우 10여 장
안팎,물의 흐름도 급하지 않다. 겨울철 갈수기(渴水期)를 맞아서
자연물이 줄어든 탓이다.
양 기슭에는 수양버들이 줄지어 늘어섰는데, 때가 때인 만큼 푸
르른 신록의 잎새는 한 잎도 볼 수가 없고 절반쯤 말라 버린 줄기
와 버들가지만이 헝클어져서 바람부는 대로 무겁게 흔들릴 뿐이
다. 기슭을 따라 흘러오던 오봉선은 차츰 광릉원 사설 부두 쪽으
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인적이라곤 하나도 비치지 않는 텅 비어 버린 선창가 부두에는
갈대로 지붕을 엮은 오봉선 두 척과 유람선 한 척, 그리고 선창에
서 배까지 승객과 화물을 실어 나르는 노가 셋 달린 쾌속선 두 척
이 닻을 내리고 있을 뿐, 강아지 새끼 한 마리 눈에 뜨이지 않는
다.
이렇듯 인적이 드문 교외의 대저택은 바로 남모르게 범죄를 꾸
미고 추진하는 데 가장 신비로운 장소로 적합한 것이다.
광릉원의 선박은 이때껏 건청방 분타 소속 선박과 아무런 분쟁
도 일으켜 본 적이 없다. 광릉원 방씨 댁 사람들도 과주(瓜洲) 식
랑암(息浪菴)에 자리 잡은 대저택 주변에 얼씬거려 본 적이 없었
다. 따라서 어떤 각도에서 정탐하든, 이들 삼자간에 무슨 연관이
있는지 알아 낼 도리도 물론 없다.
과주진 대저택에 들어앉은 백룡 강해로 말하자면, <능소객>과
생사를 같이하기로 맹세한 공범자이면서도, 이 광릉원이 바로 <능
소객>의 또 다른 비밀소굴이란 사실을 까맣게 모른다. <능소객>은
자신과 가장 친밀하고 신임하는 공범자의 눈앞에 감쪽같이 비밀소
굴을 설치했던 것이다. 교활한 토끼가 비상용으로 굴을 세 군데
뚫어 놓고 지낸다더니, 이것만 보더라도 위험에 대비한 <능소객>
의 공작이 얼마나 치밀하고 성공적인 것인지 알 수 있으리라.
결국 정세는 명백하게 드러난 셈이었다. <능소객>은 건청방 세
력과 결탁했을 뿐만 아니라, 건청방의 부하들을 빌려다가 온갖 못
된 짓을 저지르는 데 부려먹었다는 얘기가 된다.
더욱 중요한 것은, <능소객>이 암암리에 <비룡천마> 진백강과
왕래가 있거나 심지어는 <비룡천마>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을
가능성도 많다는 사실이다. <비룡천마>는 <능소객>이 절친한 벗접
인사자를 함정에 빠뜨리도록 뒷받침해 주고 중간에서 이득을 적지
않게 채뜨렸을 가능성도 다분했다.
<비룡천마>는 뇌신의 일격에 부상을 입고 도망쳤다. 그러니 과
주진의 대부호 진천상의 저택에 기어 들어가 죽음을 기다릴 가능
성이 없음은 물론이요, 접인사자의 유언마따나 그 늙은 마귀의 단
서를 잡으려면 오로지 <능소객>의 신변에 기대를 거는 수밖에 다
른 길이 없을 터였다.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세 아가씨를 납치한 범인은 바로 <능
소객>이다. 이치대로 본다면, 그는 피랍자들을 방 많고 설비 좋은
이 광릉원에 데려다 감추어야 마땅하다. 이곳은 외부 사람에게 전
혀 알려지지 않은 비밀소굴이니까.
그러나 이 계획은 변경되었다. 접인사자를 죽이러 보낸 여덟 명
이 실종된 것이다. 그 실종자 중에는 아들 방옥까지 들어 있었다.
뒤따라 달려 보냈던 사람들이 접인사자의 무덤을 발견했노라고
보고했다. 누군가 아들을 포함한 여덟 명을 쥐도 새도 모르게 죽
여 없애고 접인사자의 시체를 안장했다는 얘기가 된다. 물론 아들
이나 심복 부하의 입이 무겁다는 사실이야 믿지만, 혹시 누가 아
나? 잔혹스런 고문에 못 이겨 비밀을 토설한 놈이 없으리라고 장
담은 못할 터, 그렇다면 광릉원의 비밀도 발각되었을 가능성이 많
다고 보아야 한다. 수십 년 해묵은 능구렁이, 교활하기 짝이 없는
<능소객>이 과연 비밀이 누설된 이 광릉원에 계획대로 인질들을
감추어 두겠는가, 아니면 계획을 변경해서 딴 데로 빼돌리겠는
가?...
오봉선은 잔잔한 물결을 따라 천천히 광릉원 부둣가를 향해 흘
러 갔다.
직접 노를 잡고 저어 나가는 장추산의 차림새는 영낙없이 뱃꾼
이다. 어디서 얻어 입었는지 다 낡아빠진 누더기 옷을 걸친 품이
사뭇 그럴 듯해 보여서 여기까지 흘러 오는 동안 단 한 차례도 남
의 이목을 끌지 않았다.
광릉원 사설 선창가는 쥐죽은 듯 고요했다. 허나 그는 배를 멈
추고 주변 상황을 두리번두리번 살펴볼 만큼 멍청한 짓은 하지 않
는다. 공연히 풀섶을 건드려 뱀을 놀라게 만들 필요가 없는 것이
다. 그는 잠시도 머무는 기척을 보이지 않고 천연덕스레 배를 하
류쪽으로 흘려 보냈다.
흐름을 타고 단 한 번 미끄러져 나가자, 배는 이내 길상암 부근
수역으로 접어들었다. 오봉선이 접근한 지점은 물구비를 이룬 만
곡부, 암자로부터 1백 여 보 떨어진 기슭이다. 이 강변도 길상암
의 터전이라, 두 사람이 양팔로 껴안아야 손끝이 닿을 만큼 우람
한 버드나무가 줄지어 늘어서서, 배를 갖다 대고 밧줄을 매어 놓
기 딱 알맞았다.
부성에서 재미 보러 나온 '참배객' 들은 모두 이 강변 남쪽 기
슭 제방에 배를 묶어 둔다. 강둑이라고 해서 인공으로 바위를 깎
아 쌓은 것은 아니지만, 물구비가 후미져 들어간 기슭이라 배를
단단히 대기도 안성맞춤이고, 남의 눈에 뜨이지 않게 상륙하기에
도 편리한 곳이다.
그곳에는 벌써 10여 척이나 되는 배가 정박해 있다. 하나같이
작고 날렵한 쾌속선이었다. 뱃꾼들은 선실에 들어가 누워서 쉬는
중이고, 어쩌다가 들락거리는 녀석들이 있지만 모두들 하인 옷차
림새를 한 심부름꾼이다.
장추산은 배를 강기슭에 바짝 끌어다 대고 밧줄로 단단히 묶은
다음, 큼지막한 보따리를 옆구리에 끼고 총총히 뭍으로 올랐다.
그에게 눈길을 던진 사람은 여전히 없었다. 차림새나 거동이 남의
주의를 끌지 못할 만큼 태연스러웠기 때문이다.
길상암은 중문 셋을 거쳐야만 대전까지 들어갈 수 있다. 암자후
원 비구니들이 거처하는 선방(禪房)에는 높다란 담장이 둘러쳐졌
고, 그 담장 한 모퉁이 어딘가에 비밀문이 뚫려 있다. 담장 바깥
에는 별로 눈에 뜨이지 않는 별채 건물이 허술하게 서 있는데, 겉
으로 보아선 땔감이나 잡동사니를 넣어 두는 곳간처럼 보이지만,
일단 그 문턱을 넘어서면 내부 장식이 으리으리하게 꾸며진 별천
지 세상이 나온다.
이곳이 바로 염굴(艶窟)의 소재지요, 인간 세상의 온갖 즐거움
을 다 맛볼 수 있는 환희의 터전이다. 아무리 색욕에 미친 비구니
들이라 하더라도, 감히 보살님을 모셔 놓은 선방까지 더럽힐 만큼
대담하지 못해서 담장 밖에 따로 이런 소굴을 꾸민 것이다.
암자 주변에는 대나무 숲이 깔끔하게 다듬어져 있어 사뭇 그윽
하고 외진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강기슭을 따라 뻗은 오솔길로
접어들면 이 암자 곁 담장을 지나쳐서 강변 마을까지 곧바로 나아
갈 수 있다. 뱃길이 싫어서 육로로 오는 '참배객' 들의 통로가 바
로 이 오솔길이다.
장추산의 모습이 이 대나무 숲 속으로 사라진 것은 황혼 무렵,
눈이 3척이나 쌓인 오솔길에는 사람의 발자취 하나 보이지 않았
다. 그러니 뱃꾼 한 녀석쯤 대나무 숲 속으로 파고들었기로서니
어느 누가 알아차렸겠는가?
이윽고 날이 저물고 어둠이 찾아왔다. 광릉원은 캄캄한 암흑 속
에 잠겨 침묵을 지키고 있을 뿐, 어느 곳을 둘러보나 사람은커녕
귀신의 그림자조차도 얼씬거리지 않았다.
그리 멀지 않은 길상암에서 저녁을 알리는 북소리도 이미 울렸
고, 이따금씩 찬바람 속에 누군가 손님을 맞이하고 배웅하는 초롱
불빛이 한두 차례 꼬리를 길게 끌며 번쩍거리다가는 스러질 뿐,
눈덮인 밤 처절하리 만큼 고독한 들판은 귀역(鬼域)과도 같이 싸
늘한 적막에 휩싸여 있다.
광릉원 부둣가는 아예 죽음과도 같은 정적뿐이다. 움직이는 것
이라곤 하나도 없지만, 섬뜩하도록 음산한 기운은 주변 어느 곳보
다 더욱 짙게 깔렸다.
2경(밤 열한 시)은 이미 지났다. 부성 종고루(鐘敲樓)에서 3경
정각을 알리는 종소리와 북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오자, 눈 덮인 대
지는 마음 놓고 깊은 잠 속에 혼곤하니 빠져들었다.
북소리의 여운이 가시기 전, 선창가 부두에서 불빛이 반짝 빛났
다. 그리고 이어서 또 한 차례 반짝이고는 다시 어두워졌다.
상류 쪽에서 중형급 오봉선 한 척이 밤물결을 타고 천천히 흘러
내려 왔다. 선수 돛대에 항로(航路)를 밝히는 등불도 없고, 그 대
신 뱃머리 갑판에 큼지막한 향로 한 개가 연기를 모락모락 피워
올리고 있다.
선창이 가까워지자 오봉선은 갑자기 속도를 높였다. 그러나 그
것도 잠시뿐, 좌우 양현(兩舷)에 굵직한 노가 두 대씩 뻗어 나오
더니 힘차고 재빠르게 물살을 거슬러 젓기 시작했다. 선창을 들이
받을 듯 무섭게 미끄러져 오던 배가 다시 평상 속도를 유지하면서
반바퀴쯤 빙그르르 돌더니 부두에 슬쩍 뱃머리를 갖다 대었다. 키
잡이의 솜씨가 자못 날렵하다.
이와 때를 같이해서 죽음의 정적만 감돌던 텅 빈 부둣가에 돌연
20여 명의 그림자가 유령처럼 불쑥불쑥 솟아났다. 이들은 모두 칼
집에서 단도와 장검을 뿐아 잡고 동서남북 네 방향에 늘어서서,
마치 강적이라도 맞이하려는 듯 삼엄한 경계망을 펼쳤다.
오봉선 뱃머리 쪽 선실에서도 뱃꾼 10여 명이 뛰쳐 나왔다. 허
리춤에 도검 따위 병기도 휴대하지 않은 비무장의 뱃꾼 차림새였
으나, 몸놀림이 힘차고도 날렵한 것이 갑판 위에 뛰어 내리는 발
밑에서 소리 하나 나지 않았다.
잠시 후, 선창 건물 뒤편에서 잿빚 옷을 걸친 여섯 명의 사나이
가 걸어 나왔다. 그 중 두 사람은 커다란 마대자루를 하나씩 떠메
고 있었다. 이들은 삼엄한 경계 아래 뱃머리로 뛰어 올랐다. 그리
고 갑판 위에서 기다리고 있던 패거리에게 마대자루를 넘겨 준 다
음 다시 뭍으로 훌쩍 뛰어 내렸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일은 말 한마디, 발자국 소리 하나 내지
않고 진행되었다.
무언중에 인수 인계를 마치자 오봉선은 즉시 뱃머리를 돌려 부
둣가에서 떨어져 나갔다. 배가 항로를 잡고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선창과 부둣가는 다시 텅 비어 버리고 방금 전처럼 싸늘한 정
적 속에 잦아들었다.
경계는 삼엄했지만, 이들의 주의력은 육상과 수면에만 온통 집
중되었을 뿐 부두 아래쪽 물 밑으로 쏠린 것은 하나도 없었다.
하기야 그럴밖에, 이 엄동설한 추운 밤중에 물 한 방울 퉁겨도
얼어 붙는 판이요, 강물도 뼈가 시릴 정도가 아니라 살얼음이 잡
힐 만큼 차가워서 손가락을 담그기가 무섭게 쩍쩍 얼어 붙어 고드
름이 될 지경인데, 어떤 미친 녀석이 이 물 속에 들어가서 꿈틀거
린단 말인가? 사람은커녕 물고기, 용왕님조차도 나들이를 못하고
물밑 동굴 속에 처박혀 잠이나 잘 판이다. 그러니 제아무리 날고
기는 재간을 지녔더라도 사람이 이런 물 속에 출몰한다는 것은 애
당초 불가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질긴 비단으로 짠 검정 잠수복
을 입으면 그런 미치광이 짓도 가능할까 모를 일이지만, 여하튼
잠수복을 입은 녀석 하나가 오봉선 고물 방향타 바로 곁에 찰거머
리같이 찰싹 달라 붙은 채, 배가 떠가는 항적을 따라서 하류 쪽으
로 급히 헤엄쳐 내려가고 있었다.
오봉선이 남문 밖 초관( 關) 부교(浮橋矯)에 다다르자, 세 명의
뱃꾼이 날렵한 동작으로 다리 위에 뛰어 오르더니 다리 널판을 너
댓 개 뜯어 젖혀 놓고 배를 통과시켰다. 고물이 다리 밑으로 벗어
나기가 무섭게 이들은 재빠른 솜씨로 상판(上板)을 도로 끼워 맞
추어 원상대로 회복한 다음, 갑판 위로 훌쩍 뛰어 내렸다. 몸놀림
도 쾌속 민첩하고 눈썰미와 솜씨가 말끔한 것을 보아하니, 이런
불법행위를 전문적으로 해 온 밀수꾼임에 틀림없다.
그 다음 참(站)은 바로 운하의 흐름이 갈라지는 삼차하 다리
밑,여기서 오른쪽으로 접어들면 의진현에 다다르고, 왼쪽으로 배
를 몰면 과주진까지 흘러간다. 양자교 다리 밑을 통과한 오봉선은
곧바로 의진현 방향의 물길에 접어들었다. 항로를 보건대, 이 오
봉선은 강녕부가 목적지요, 과주진에는 별 볼일이 없다는 얘기가
된다.
물길로 해서 도망치는 자는 일부러 양자강을 건너 진강부로 내
뛰는 법이 절대로 없다. 상류 쪽 강녕부로 말하자면 강남 지방에
서도 으뜸가는 항구요, 옛날에 남경(南京) 도성이 자리잡았던 곳
이라, 인구도 1백만을 넘고 물산도 풍부하기 때문에 범죄자들이
숨기에도 안성맞춤이고 납치한 볼모를 감추기에도 딱 알맞은 곳이
라 할 수 있다.
오봉선 뱃머리와 고물 쪽에는 뱃꾼 차림을 한 경계보초가 둘씩
배치되었다. 노꾼 네 사람과 키잡이도 한결같이 눈치 빠른 전문가
인 듯, 이들 아홉 쌍의 눈망울은 잠시도 쉬지 않고 수면과 강기슭
의 동정을 살펴 나갔다. 동서남북 어느 방향에서든지, 이들의 눈
길에서 실 한 오리도 벗어나지 못했고 또 놓쳐 보내는 법도 없었
다.
키잡이도 방향타를 조종하면서 만에 하나라도 추격선이 따라붙
지 않는가 싶어 이따금씩 등뒤의 어두운 항적을 돌아보곤 했다.
몇 번째인가, 또 한 번 때없이 뒤돌아보던 키잡이는 고물 우측
방 갑판 위에 시커먼 그림자 하나가 천연덕스럽게 앉아 있는 모습
을 발견하고 놀라기보다 우선 제 눈을 의심했다. 뭘 잘못 봤는
가,혹시 물귀신이 나타났는가?... 아니다. 몸매의 윤곽이 번들번
들 빛나는 것이 물귀신처럼 소름끼치도록 무섭게 보이지만 그것은
검정색 비단에 기름 먹여 만든 잠수복이 틀림없다!
"이잇?"
키잡이가 외마디 경악성을 터뜨렸다. 허나 경고성을 발하려 했
을 때는 이미 늦었다. 유령같이 덮쳐 드는 검정 그림자, 그 다음
에는 목이 바짝 조여들면서 '우두둑!' 하고 목뼈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고물 쪽 선실 바깥에 앉아서 좌우 측방을 감시하고 있던 뱃꾼
두 명이 소스라쳐 벌떡 일어났다.
"웬 놈이냐!"
천둥 벼락치듯 질타하는 소리에 뒤따라, 내리 쪼개는 일도(一
刀)와 수평으로 찔러드는 일검(一劍)의 공격이 일제히 잠수복을
입은 괴한에게 집중되었다.
"장삼!"
집중표적이 된 자는 태연스럽게 대꾸했다.
장삼!...
일순 공격자들의 칼끝이 멈칫했다. 건청방의 불구대천지 원수장
삼이 오다니 !... 장삼, 그것은 더 이상 평범할 수 없는 천덕스런
이름이었으나, 듣는 사람에 따라선 넋을 잡아 흔드는 마력을 지닌
이름이요, 배짱이 한참 모자란 녀석에게는 온몸의 맥이 탁 풀리고
저절로 까무라치게 만드는 이름, 뭇 사람의 정신에서 투지와 반항
력을 깡그리 뽑아내는 힘이 있었다.
대꾸 한마디에 이어서, 그는 방향타 곁에 놓아 둔 병기를 움켜
잡고 벌떡 일어났다. 그 병기는 원래 키잡이가 쓰던 분수도(分水
刀)였으나 그는 맡겨 둔 제 물건 찾듯 서슴없이 집어 들더니, 그
후리후리한 몸을 길게 솟구치면서 기세 사납게 후려 떨쳤다.
"쨍그렁 ! 챙!"
해맑은 쇳소리가 귀청을 울리고 어두운 밤하늘에 불티가 번쩍
퉁겨 흩날렸다. 그와 동시에 공격자들의 일도 일검은 양 측방으로
퉁겨져 허공 높이 솟구치더니 이내 포물선을 그리면서 추락하여
강물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 주인들의 최후도 비참하기는 매
일반, 무시무시한 도광이 한 차례 번뜩 빛나는가 싶더니 사람의
몸뚱이를 비정하게 베어 나가고 있었다.
"으아악!..."
"끼야아!..."
칼날이 지나간 곳에 뜨거운 선혈의 장막이 펼쳐지고 살덩이가
뭉텅 떨어져 나가 흩날렸다.
"풍덩,풍덩!..."
못쓰게 된 몸뚱이가 연거푸 물보라 속에 파묻히는 소리.
장삼은 이내 고물 쪽 선실 어귀를 봉쇄하고 우뚝 선 채 또 다른
두 사람의 몸뚱이를 쪼개 내고 있었다. 키잡이가 최초로 발한 경
고성을 듣고 달려 오던 뱃머리 쪽 보초 두 명은 어둠 속에서 장삼
이 좌로 한 번 우로 한 번 후려친 칼날에 허리춤이 좌악 갈라져
내장을 쏟아 내면서 거꾸러졌다.
순식간에 다섯 목숨이 무자비한 쾌도 공격 앞에 쓰러졌다. 그야
말로 일도양단(一刀兩斷), 한 칼에 하나씩 빗나감 없이 깨끗하게,
그리고 순식간에 해치운 것이다.
갈대로 지붕을 엮어 만든 다락식 선실, 그 안은 먹물을 뿌린 듯
캄캄 절벽이다.
장삼도 위험을 무릅쓰고 돌입할 생각은 없다. 두 사람의 몸뚱이
를 쪼개 버린 그는 그 자리에서 빙그르르 선회하여 이제 막 우현
(右磁)으로부터 돌격해 오는 또 다른 두 명의 진로를 차단했다.
"위잉 ! "
암기가 날아 오는 소리... 파공음을 듣는 찰나, 그의 몸뚱이는
빛살과도 같이 흐르면서 종적을 감추었다.
환영 같은 윤곽이 다시 나타난 곳은 선실 지붕 꼭대기, 장삼은
칼자루를 고쳐 잡으면서 아래쪽을 굽어 보았다.
"쏴아아!-"
"퓨웅!-퓽!"
그가 서 있던 지점을 암기들이 메뚜기떼처럼 무차별로 휩쓸고
지나갔다. 단 한 발짝만 늦었더라도, 그의 몸뚱이는 최소한 다섯
대 이상 내가 기공을 파괴할 수 있는 절독 암기 앞에 꼼짝없이 노
출되었을 터였다.
갈대 지붕 위에서 칼날이 다시 한 번 푹 가라앉았다. 그 다음에
는 하늘에서 날벼락 떨어지듯 사람의 몸뚱이와 칼이 혼연일체를
이루고 뱃꾼 두 명 사이로 끊어 들어갔다. 일순, 한 덩어리로
엉겨 달려들던 사람의 그림자가 중간에서 싹 갈라졌다.
"으아아!..."
가슴이 섬뜩하도록 참담한 비명소리, 멧꾼 두 명은 칼자루를 내
동댕이치면서 갑판 위에 나뒹굴었다. 쿨럭쿨럭 솟구쳐 나오는 핏
물이 갑판 바닥을 홍건하게 적시고 역겨운 피비린내가 코를 찔렀
다.
"이야압! "
짧은 기합성을 지르면서 그는 갈대 지붕 위를 수평으로 날아 넘
더니 허공에서 옆차기로 돛대를 걷어차 부러뜨렸다. 그러자 돛폭
을 펼치지 않은 돛대가 반대편으로 쓰러지면서 뱃머리 쪽 선실 지
붕 위를 덮쳤다.
"꽈다당!"
느닷없이 돛대에 찍어 눌린 선실 안에서 일대 혼란이 일어났다.
웅성거리는 소리를 듣건대, 그 안에도 적지 않은 무리가 웅크리
고 있음이 분명했다.
장삼의 몸뚱이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칼날을 앞세워 선실 안으
로 돌입했다. 몸과 칼이 한 덩어리로 뭉쳐져 혼란의 와중으로 뛰
어 들기가 무섭게 좌충우돌, 그야말로 굶주린 호랑이가 양떼를 덮
친 격이나 다를 바 없었다.
폭풍우 속 천둥 벼락 떨어지듯, 정을 끊어 버린 칼날 아래 연민
이나 자비심 따위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길 없다.
뱃꾼 차림을 한 일곱 명의 고수와 노를 잡고 있던 네 명은 최초
돌격을 받아 단숨에 넷이 거꾸러지고, 재차 선회하고 났을 때는
칼날의 돌개바람 속에 또 다시 세 명이 목숨을 잃었다.
선실 안은 비좁았다. 더구나 대혼란의 와중에 캄캄 절벽의 어둠
속이라, 그는 필사적인 단도의 위력을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었으
나, 자기 자신도 난마(亂麻)처럼 뒤얽힌 혼란 속에서 상대방이 마
구잡이로 휘둘러 대는 눈먼 칼부림에 부상을 모면할 길이 없었다.
그가 얻어 맞은 것은 모두 합쳐서 일도 일검, 엉겁결에 날아든
장검의 칼끝이 등에서 옆구리까지 잠수복을 길게 찢어 놓았다. 그
러나 칼날은 살갗을 스치고 미끄러졌을 뿐, 다행히 터럭 하나 다
치지 못했다.
왼쪽 어깻죽지를 찍어 내린 단도 역시 잠수복을 찢어 헤쳐 놓기
는 했으나, 호체기공의 반탄력에 퉁겨 오히려 칼날을 부러뜨리고
말았다. 타격을 받은 어깻죽지는 근육이 일단 움푹 오무라들었다
가 이내 원상을 회복했다. 결국 평범한 칼부림으로는 그의 호체공
을 파괴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호체기공을 시원찮게 연마한 사람이 이들 난폭자의 무리속
에 돌격을 감행했다면 그것은 한낱 자살행위나 다를 바 없는 무모
한 짓이다. 그렇기 때문에 강호의 고수 명숙이라도 패거리로 몰린
인파에 돌격을 시도하는 일은 별로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 그런
짓은 통상 무공을 익힌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큰 금기(禁忌)의 하
나로 손꼽힌다. 개미도 떼를 지으면 코끼리를 물어 뜯어 죽인다는
데, 하물며 사람의 떼거리야 오죽하겠는가? 아무리 약한 놈이라도
적의 병력이 하나라도 늘어나면 이쪽의 실력 발휘는 그만큼 거추
장스러운 법. 이판사판으로 전후 좌우에서 아귀처럼 달려드는데야
머리 셋 달리고 팔뚝 여덟 개 달린 팔비나탁(八臂那托) 태자님이
라도 당해낼 재간이 없을 것이다. 그것은 상식을 벗어난 위협하기
짝이 없는 짓이었다.
오늘밤, 그는 사람을 구할 마음이 다급한 나머지, 평소 지니고
있던 침착성도 흔들리고 행동거지마저 필부지용(匹夫之勇)을 부
린감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모험은 용케도 성공을 거두었다.
극히 짧은 순간에 그의 칼날은 고물 쪽으로부터 뱃머리에 이르
기까지 도합 열네 명의 피를 마셨고, 갑판 도처에 몸뚱이가 조각
조각 떨어진 시체를 질펀하게 늘어 놓았다.
"풍덩!... 풍덩...!"
남은 넷 가운데 담보 작은 두 명이 눈치 빠르게 물 속으로 뛰어
들어 도망쳤다. 마지막 남은 둘 역시 달아나고 싶은 생각이 어찌
없겠는가마는 장삼에게 출입구가 막혀 도망칠 길이 없었다. 선실
의 갈대 벽을 뜯어 내고 빠져나갈 수도 있겠지만,무시무시한 칼부
림이 귀신보다 더 빠르게 들이닥칠 것은 보나마나 뻔한 노릇이라,
등판에 애꿎은 칼을 얻어 맞기보다는 일찌감치 단념하는 편이 신
상에 이로울 듯 싶었다.
"다가오지 마라!"
뱃꾼 한 명이 버럭 호통을 쳤다.
"우리는 이 선실에서 포로를 지키는 사람이다! 만약 그 손을 멈
추지 않고 계속 흉악을 떤다면, 우리도 하는 수 없지. 포로들을
몰살해 버릴밖에!..."
"으하하하!..."
그는 칼을 번쩍 치켜든 채 하늘을 우러러 광소를 터뜨렸다.
"뭐가 우스우냐?"
"당신 하는 수작이 우스워서."
"뭘 웃겼는가?"
"귀하 말씀이 무슨 뜻인지 도대체 모르겠으니, 난들 웃을 수밖
에! 포로들을 깡그리 죽여 없애겠다? 그게 이 장삼하고 무슨 상관
이 있단 말이야? 포로가 <신투> 이백록이라도 된단 말인가? 그게
아니라면, 귀하의 말씀은 나한테 씨도 안 먹혀들 개방귀소리에 지
나지 않아!"
"그래, 이 포로는 <신투> 이백록이다!"
뱃꾼도 지지 않고 매섭게 엄포를 놓았다. 이제 상대방의 약점을
잡았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는 선실 한 귀퉁이를 손가락질하면
서 계속 으르렁댔다.
"장삼, 이놈은 네 친구야! 자낼 대신해서 양주 십대 부호의 내
력을 탐지하던 이백록!... 어떤가, 내 말이 틀림없겠지?"
"틀림없네. 그 친구는 이 장삼에게 은화 삼백 냥을 받기로 하고
고용된 사람이지. 양주성 십대 부호 내력을 조사하다가 자네들 손
에 붙잡힌 것도 사실이고 말이야. 또 자네들은 그 친구를 미끼로
삼아 진회루에 삼중 매복을 깔아 놓고 이 장삼을 잡아 뿌리뽑으려
했던 것도 사실이 아니었던가? 흐흐흐! 그러나 자네들은 아마 꿈
에도 생각 못했을 걸세. <신투>를 너무 얕잡아봤거든?"
"얕잡아보다니?"
"그 친구는 진작부터 자신에게 살아날 요행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 그래서 편지에 솜씨를 약간 부려서 일이 틀어진 기미를
나한테 알려 줬단 말씀이야. 또 그 덕분으로 자네들도 참담한 대
가를 지불했지 !"
"편지에다 무슨 수작을 부렸단 말인가? 그건 불가능해!"
"불가능이라? 흐흐흐, 노형 ! 우리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해 봅
시다. 당신 같으면 그토록 위험한 일을 하면서 자기 편지에다 본
명을 똑똑히 적어 놓겠소."
"그럼, 이름이...."
"편지를 당신네도 물론 검열하셨겠지? 으젓하게 '백록'이란 이
름을 적어 놓은 것 말일세. 그게 바로 위험을 알리는 신호였어."
"저런 날벼락을 맞아 죽을 놈!"
뱃꾼은 발을 굴러가며 저주를 퍼부었다. 이미 죽고 없어진 <신
투>에게....
만신네들은 이제 그 대가를 지불하고 있는 거야. 끊임없이 지불
해야 하고.... 날이면 날마다 밤이면 밤마다. 시시각각으로 대가
를 지불해야겠지 ! 나 장삼은 벌써 강호 천하 동업자들에게 선포
했네. 당신네 건청방에 소속된 놈이라면 하나도 놓치지 않고 깡그
리 죽여 없애겠다고 말이야. 분타니 분방이니, 분당 향주 가릴 것
없이 모조리 불태워 없앨 터이고, 선박 한 척, 당구 한 군데 남기
지 않고 모조리 박살내 버리기로 맹세했단 말일세. 알겠나? 오늘
밤이 세번째로 사형선고를 내리는 날이야. 그러니까 자네들은 모
두 죽어 주셔야겠어!"
"장 형.... 우리는 건청... 건청방 소속이 아니야."
뱃꾼의 목소리가 자지러졌다.
허나 그는 도리질을 했다.
"요 며칠 새 보고 들었을 텐데. 이 장삼이 선남선녀(善男善女)
축에 들지 못하는 사마외도(邪魔外道), 인간 도살꾼이란 걸 아직
도 모르시나? 당신네들은 지금 건청방 소유의 배를 타고 계시다는
걸 인정하겠지? 이 배가 부서져야 마땅한 만큼 여기 타고 있는 당
신네들이 건청방 사람이래도 좋고 아니래도 좋아. 잘못 죽이는 게
실수라면 또 실수가 되겠지. 나는 억울한 목숨 일백 명을 오살(誤
殺)할지언정, 건청방 놈은 단 한 명도 놓치지 않을 거야. 이게 바
로 강호의 금과옥조(金科玉條)가 아니겠나? 당신네 건청방도 이런
강호 규칙을 준수했으니까, 안면몰수하고 <신투>를 억울하게 죽음
속으로 몰아 넣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도 모자라서 온갖 희생과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 장삼을 해치려들지 않았는가 말일세.
이 점은 당신도 승복하시겠지? 나는 노형이 뉘신지 몰라. 하지만
원망할 건 하나도 없는 줄 아네."
"그건.... 장 형!..."
"당신은 방금 저 포로가 <신투>라고 말했어. 그러고도 건청방
소속이 아니라고 뻗댈 참인가? 이랬다 저랬다 두서없는 말을 날더
러 믿어 달라니, 그거 좀 무리한 요구가 아닌가?"
"정말 아니라구! 우리는 강호의 의리를 보아서 건청방을 응원하
러 온 사람들이야. 자, 우리도 최선을 다하고 기진맥진했으니까,
건청방에서도 우리 고충을 이해해 주겠지! 여기 <신투>를 넘겨 드
리고 떠날 테니, 우리를 놓아 주게! 장 형, 어떤가?"
"그건.... 생각 좀 해 봐야겠는데."
그는 잠시 망설이는 척했다.
옛말에도 '욕금고종'(欲擒故縱)이라 하지 않았던가? 잡아야 할
놈은 일부러 놓아 주어 기운을 뽑아 놓고 손쉽게 잡으라는 제갈공
명의 말씀이다.
포로가 <신투> 이백록이 아니라는 것쯤 그도 빤히 알고 있다.
앞서 잡아 족쳤던 포로의 입을 통해서 <신투>의 죽음이 여러 차례
판명되었으니까.
그런데도 무얼 더 생각한단 말인가? 물어보나 마나, 목전의 형
세를 저울질해서 어느 쪽이 가장 유리한지 고려해 보겠다는 의도
다.
그는 지금 선실 안에 처박혀 있는 포로가 두 명이라는 사실 이
외에는, 그들이 과연 어떤 사람인지는 전혀 모른다. 납치된 아가
씨는 모두 셋, 현재 문 앞에 있는 포로는 단 두 명이다. 그리고
이 배안 어느 구석에 나머지 포로 한 명을 따로 감춰 두었을 가능
성은 거의 없는 듯 싶다. 그래서 그는 이 포로가 납치된 아가씨들
이라고 단정을 내리지 못한 채 머뭇거리는 것이다.
이제 그가 모든 것을 돌보지 않고 뱃꾼 두 명을 죽이려 든다면,
포로 역시 목숨을 날려 보낼 각오를 해야 한다. 포로들이 아가씨
중 둘이든 아니든 간에 그는 경거망동을 할 처지가 아니다.
설령 자신이 찾는 목표가 아니라 하더라도, 그는 이 포로들이
억울한 죽음을 당하게 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간접적인 살인행위
나 마찬가지니까.....
"장 형, 뭘 그리 오래 생각하시오? 설마하니 친구가 죽든 말든
아무래도 괜찮다는 건 아니겠지."
뱃꾼 쪽이 오히려 다급해진 모양이다.
재촉을 받게 되자, 그 역시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
"좋소! 당신 두 목숨과 맞바꿀 테니, 포로들을 이리 끌어내 오
시
오!"
양보란 것은 물결 따라 배를 띄워 보내듯 순리대로 해야 하는
법, 그는 즉석에서 교환하기로 작정했다.
"허나, <신투>의 몸에 딴 수작을 걸거나 이상이 생겼을 때는 알
지? 흥! 당신네 목숨으로 갚아야 할 줄 각오하시오!"
뱃꾼 두 명은 말끝이 미처 떨어지기도 전에 냉큼 돌아서서 선실
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장삼이 또 다른 요구조건을 내걸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서다.
이 무렵, 오봉선은 물결에 쓸려 2, 3리 남짓 표류하고 있었다.
강변 갈대 숲이 빽빽하게 들어찬 양 기슭 너머 황량한 들판은
온통 은빛 세계를 이루었다. 그는 칼을 내려 놓고 뱃꾼 두 명이
사라진 선실 출입구만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이제 대국(大局)을 완전히 장악했으니, 더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다..... 큰 싸움을 끝낸 마당에 마음이 풀리는 것은 인지상정
(人之常情), 그러나 역시 방심하지 말았어야 옳았다.
선실 안으로 기어들자, 뱃꾼 두 명은 서로 눈짓을 한 번 교환한
다음 좌우 양편으로 갈라서서 두 발로 선실 벽을 힘껏 걷어찼다.
벽이라야 갈대로 엉성하게 엮어 올린 것, 억센 발길질 한 번에
'퍼석!' 하고 구멍이 뚫렸다. 다음 순간, 뱃꾼 두 명은 좌우 양
측현(側舷)으로 호랑이처럼 몸을 던져 날렸다. 두 사람은 뱃전 아
래로 미끄러지듯 정확하기 이를 데 없는 동작으로 물 속에 뛰어
들었다.
물보라 소리도 잠깐 들리는가 심더니, 두 사람의 몸뚱이는 형체
도 없이 사라졌다. 그 절묘한 신법도 실로 감탄할 정도였지만, 찰
나간에 벌어진 일이라 누가 설령 낌새를 챘다손 치더라도 미처 제
지할 겨를이 없었다.
"아뿔싸!..."
그는 재빨리 갑판에 내려 놓았던 칼을 집어 들었다. 만약 뱃꾼
몸을 날려 물 속으로 뛰어 드는 걸 미리 알았더라면 그는 칼을 던
져서 허공에 뜬 상태로 한 놈쯤 쳐죽였을 것이다. 그걸 미리 예상
하고 좌우 양편으로 분산하여 선실 벽을 뚫고 미꾸라지처럼 빠져
달아났으니, 이들이 얼마나 경험 풍부한 탈출의 전문가들인지 알
만하리라.
"게 섰거랏!"
그는 산토끼 집토끼 두 마리를 다 놓친 줄 뻔히 알면서도 대갈
일성 호통과 함께 칼끝을 앞세우고 벼락같이 선실 안으로 뛰어 들
었다. 행여 또 있을지도 모를 암기의 습격에 대비해서 그는 정면
앞에 칼바람으로 철통 같은 방어벽을 형성하고도 전신의 호체기공
을 몽땅 끌어 올려 물샐틈없이 보호막을 쳤다.
선실 안은 캄캄 절벽, 포로를 감시하는 사람은커녕 쥐새끼 그림
자도 비치지 않았다. 그는 바닥에 납죽 엎드린 자세로 더듬더듬
마대자루를 찾아 갔다.
손끝에 뭉클 와서 닿는 감촉, 그것은 사람이 들어 있다는 증거
였다. 뿐만 아니라 체온도 느껴지고 꿈틀거리기까지 하는 것이 아
직 살아 있는 게 분명했다. 그는 우선 마대 주둥이를 한 손에 하
나씩 거머쥐고 선실 바깥으로 끌어 냈다.
첫번째 마대 끈을 풀고 사람을 끌어 내다가, 그는 손에 맥이 탁
풀리고 넋이 빠지고 말았다.
맙소사, 잘못 짚었구나!...
애써 구해 놓은 포로, 그것은 얼굴이 넙적하고 귀가 큼지막한
중년 사내였다. 낯선 포로는 손발을 꽁꽁 묶인 채 입에도 걸래쪽
을 둘둘 말아 재갈 물린 탓으로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말없이 중년 사내의 결박을 풀어 준 다음, 두번째 마대 끈
을 풀기 시작했다.
그리고 방금 그 실망은 이내 뜻밖의 기쁨으로 바뀌었다. 이번만
큼은 고생한 보람이 나타났던 것이다.
두번째 포로는 갈패옥 소저였다. 그녀는 벌써 제 힘으로 포승끈
거의 다 끊어 놓고 있었다. 자유의 몸이 되자, 이 말괄량이 처녀
는 분이 뻗쳤는지, 댓바람에 벌떡 일어나려 했다.
허나 오랜 시간 손발을 묶여 있던 터라,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
하고 부러진 돛대 곁에 과당 쓰러지고 말았다. 애처롭다기보다 낭
패 막심한 몰골이었다.
"소패, 조심해!"
그는 황급히 부축해 일으켰다.
"어떤 놈이 아가씨들을 잡아 갔는지 알겠어?"
"흥, 귀신이나 알겠지 뭐 !"
왈가닥 꼬마 처녀는 발을 동동 굴러 가며 욕설부터 마구 퍼붓기
시작했다.
"그 날벼락 맞아 죽을 놈들, 미혼향으로 우릴 습격했단 말이에
요! 손발만 묶었으면 괜찮았지, 깨어나서 문초를 받을 때도 두 눈
꽁꽁 가리고 쌀자루 내던지듯 이리저리 굴리는 통에 정신이 하나
도 없었지 뭐예요? 그러니 무슨 수로 그놈들의 얼굴을 봤겠어요?
한 놈도 못 봤어요! 한 놈도 못 봤어 ! 장 형, 당신은 어떻
게...."
"가만 있어, 내 얘기는 나중에 천천히 돌아가는 길에 하기로 하
고, 우선 이 배를 강기슭에 갖다 대야겠어."
그는 갈패옥의 입을 막고 갑판에 떨어진 삿대를 한 개 집어 들
었다. 수심은 겨우 일 장 남짓인데 삿대 길이는 일 장 팔 척이라,
물 밑바닥을 찍어 가면서 배를 몰아 가기에 딱 알맞았다. 서너 차
례 저어 가자, 오봉선은 이내 부력(浮力)을 되찾고 급한 기세로
강변 쪽을 향해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중년 사내도 손발을 몇 번 움직여 보더니 삿대 한 자루를 찾아
들고 다가와서 함께 도와 주었다.
"그녀들은 어떻게 되었어?"
그는 부지런히 삿대질을 하면서 갈패옥에게 물었다.
"누구 말이에요?"
갈 소저는 금방 생각이 안 나는지 엉뚱하게 반문했다.
"납치된 사람이 모두 셋인데...."
"아이구머니, 우리 엄마가!...."
"아냐, 당신 어머님은 아니야."
"그럼 누구...?"
"가짜 도련님 안춘 소저하고 또 남장여인 강남일지홍 노천향이
함께 붙잡혀 가지 않았나?"
"난 몰라요!"
다른 두 여자를 들먹이니, 갈패옥 소저는 금방 샐쭉해졌다. 이
꼬마 규수께서도 시샘이 대단한 모양이다.
"장 형, 그 아가씨들한테 관심이 많군요?"
"난 아무한테도 관심이 없어 !"
그는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내가 당신들을 구하느라 애를 쓴 것은 딱 한 가지 때문이야."
"그게 뭔데요?"
"나도 현장에 있었다는 죄밖에 더 있겠나? 또 있다면 어떤 놈들
이 나를 암습하려 했는지, 그 음모를 밝혀 내고 싶어서 뛰어 들었
다고도 할 수 있겠지 !"
"놈들이 당신을 암습하다니요?"
젊은 아가씨가 건망증도 어지간히 심한 듯, 금방 자기가 한 말
을 깡그리 잊어 먹고 또 그의 말투 속에 담긴 불쾌한 심사도 알아
채지 못한다.
"놈들의 주 목표는 바로 나였어."
"그럴 리가...?"
"우리, 가면서 얘기하자구."
오봉선이 강뚝에 머리를 쿵 들이받고 기우뚱거렸다. 그는 삿대
를 내던지고 중년 사내에게 당부 말을 건냈다.
"노형, 우리 여기서 작별합시다. 될 수 있는 대로 속히 이 양주
땅을 떠나시는 게 좋을 거요. 건청방의 미치광이들은 절대로 당신
을 놓치지 않으려고 별의별 수단을 다 써서 뒤쫓을 테니까, 부디
몸조심하시오."
"장 형, 고맙소!"
중년 사내는 두 주먹 맞잡아 사례의 뜻을 표했다.
방금 갈패옥이 하는 말을 들어서 그런지, 스스럼없이 '장 형'
이라고 불러 온다.
"위급할 때 이렇게 구원해 주셔서 뭐라 감사해야 좋을지 모르겠
소. 장 형, 이 은혜는 제가 두고두고 잊지 않으리다."
"노형, 마음 쓰실 것 하나도 없소. 어쩌다가 당신이 운수 좋게
구출된 것일 뿐, 저한테 당신을 구해 드릴 마음이 있어서 그런 것
은 아니니까 말이오. 제 일이 아주 급박해서 오래 지체할 수 없구
려. 노형, 이만 실례하겠소!"
"장 형!..."
중년 사내가 아쉬운 손을 내밀었을 때, 그는 이미 갈패옥의 손
목을 잡고 훌쩍 기슭으로 뛰어 내렸다. 그리고는 매정하게 뒤 한
번 안 돌아보고 어둠 속으로 쏜살같이 사라졌다.
어둠 속에서, 남자에게 손목을 잡히자 갈패옥은 찔끔 놀라서 본
능적으로 손을 움츠려 뽑으려고 했다. 그러다간 금방 익살스럽게
입술을 뾰죽 내밀더니 앙큼맞은 미소를 띠고서 오히려 남자의
큼지막한 손을 꼬옥 움켜 쥐었다.
강둑에 홀로 남은 중년 사내가 눈길로 두 남녀의 사라져 가는
뒷모습을 배웅하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젊은 녀석이 장비(張飛)보다 더 성질이 급하군!"
그는 미소를 머금은 채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천성이 대범해서 그럴까, 아니면 데면데면해서 그럴까?... 여
하튼 저렇게 덤벙대는 녀석은 나중에 큰코 다치기 십상일 거
야.... 허어, 정말 놀랐어! 눈깜짝할 사이에 배 안에 있던 초등급
고수 10여명을 깡그리 몰살해 버리다니. 저 놈은 녹록한 하류 잡
배가 아닌게 분명해 그런데 강호상에 어째서 장씨 성을 가진 청년
고수가 있단 말을 못 들었을까? 안 되겠군. 조심해서 뒤를 캐내
보아야겠어! 어쩌면..."
'어쩌면' 이라..... 그게 무슨 뜻을 지녔는지, 그는 더 말이 없
다.
광릉원 건물은 모두 합쳐 10여 채가 넘는다. 그것도 별장 형식
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일반 대부호의 저택과는 사뭇 딴판이다.
설비구조는 주로 휴식을 취하거나 연회 놀이를 벌이기 좋게 만
들어서 누각들이 거의 전부 독립식이고, 중앙 저택만이 삼중문을
거쳐 들어가게꾸며졌고, 커다란 안뜰도 꽃나무가 울창하게 심겨진
휴식터로 되어 있다.
이래서 광릉원은 돌봐 주는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으면 그대로
잡다한 폐원이 되고 말 것이었다.
삼경도 거의 다 지날 무렵, 건물 네 채에서 동시에 불길이 치솟
았다.
지방 치안 규정대로라면, 화제가 났을 때는 반드시 경보종을 울
려서 인근 마을에 구원을 요청해야 하고, 근처에 소재하는 가방
(街坊), 촌락, 이웃집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총출동해서 의무
적으로 화재를 진압해야 한다.
허나 광릉원에는 이런 관행이 통하지 않는다. 구원을 요청하는
경보종도 울리지 않고 순전히 자기네 사람들만 동원해서 불길을
잡는다. 인근 마을에서 자발적으로 불을 꺼 주러 오는 사람들도
대문 가까이 접근하기도 전에 미리 나와서 기다리고 있던 패거리
에게 제지당하고 돌아서야 했다. 전에도 몇 번 화재가 발생했는
데, 이웃 마을 사람들은 번번이 문전 축객을 당한 쓰디쓴 경험이
있는지라, 오늘밤 역시 화광이 충천하는데도 모두들 강 건너 불구
경하듯 바라보기만 할 뿐, 누구 한 사람 자진해서 불 끄러 나서는
이가 없었다. 가 봤자 별 볼일도 없으려니와 공연히 왁살스런 장
원 녀석들한테 재미 적은 공갈이나 당하기 십상일 터, 아무도 그
런 고생을 사서 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광릉원과 지척에 자리 잡은 길상암과 그 이옷들도 마찬가지, 어
떤 집은 대문까지 걸어 닫고 아예 불구경조차 하지 않았다.
여느 때는 사람의 기척이 전혀 없던 광릉원이었으나, 오늘밤만
큼은 수십여 명이나 되는 사납고 용맹스런 장한들이 쏟아져 나와
서 무거운 불쇠스랑이며 소화용 도끼를 휘둘러 가며 불길을 잡느
라 야단법석을 떨었다.
유심히 바라본 사람이라면 이 장원의 부녀자들도 하나같이 뛰어
난 무공 솜씨와 뚝심을 지녔다는 걸 눈치챘을 것이다. 아낙네도
그렇고 어린 소년 소녀들도 지붕이나 담장 위를 평지 밟듯 손쉽게
훌쩍훌쩍 뛰어 오르내리고 있었으니까.
이번 화재는 광릉원의 속사정을 낱낱이 폭로해 놓고 말았다.
언제 나타났는지, 회백색 옷차림에 복면을 한 사람의 그림자 하
나가 높다란 누각 지붕 꼭대기 기왓장 틈서리에 몸을 숨기고 엎드
린 자세로 아래 세상 불구경을 늘어지게 하고 있었다. 불구경이라
기보다 화재 현장의 변화를 유심히 바라보면서 불길을 잡느라 바
쁘게 뛰는 인파 속에서 사냥감을 찾고 있다는 게 차라리 옳은 표
현일런지 모른다.
괴한이 올라붙은 이 거대한 누각 사면 둘레에는 도합 세 명의
칼잡이가 겨드랑이에 단도 한 자루씩 끼어 차고 오락가락 순찰을
돌면서 경계를 서고 있었다. 이들은 아수라장이 된 화재 현장을
보고도 못 본 척, 자기네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듯이 그저 이
누각 근처에 어떤 놈이 다가오는지 않는지 그것에만 온 신경을 집
중시켜 감시할 따름이었다.
광릉원의 가옥은 거의 전부가 목조건물이다. 불에 탈 염려가 없
는 것이라곤 기왓장과 벽돌로 쌓은 담장뿐, 그 나머지 건축자재는
모두 불길을 감당해낼 수 없는 것들이라, 불길에 퇴로가 막히기
전에 재빨리 가재도구와 귀중품을 한 가지라도 더 끌어 내야만 되
었다.
화광이 충천하니, 밤하늘조차 달아 올랐는지 온통 환하게 밝았
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광릉원 일대의 상황이 진짜 실감 있게 똑
바로 보였다.
강변 가까운 단층짜리 가옥 두 채에서도 부산한 움직임을 보이
기 시작했다. 10여 명의 장한들이 잔뜩 긴장한 모습으로 대여섯명
쯤 되는 사람을 끌고 나와서 부둣가에 인접한 작은 가옥으로 데려
가는 광경이 눈길에 잡혔다.
단층집 오른쪽 끄트머리 3, 40보쯤 떨어진 2층짜리 건축물은 벌
써 2층이 불바다로 화해 이제 얼마 안 있으면 단층 가옥 두 채까
지 옮겨 붙을 가능성이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우선 단층 가옥 사
람들과 물건을 일찌감치 철수시킬 필요가 있는 것이다.
제아무리 멍청한 바보일지라도 네 군데에서 동시에 불이 났다면
이것은 누가 불을 잘못 취급해서 일어난 실화(失火)가 아니라, 웬
놈이 마음 단단히 먹고 치밀한 계획을 꾸며서 불을 놓았다는 사실
을 금방 알아챘을 것이다.
장원 내부 도처에 삼엄한 경계망이 펼쳐진 것을 보면, 광릉원의
총책임자도 벌써 외부 침입자의 소행에 경각심을 드높였음에 분명
했다.
불길이 가까스로 잡혔을 때였다. 이번에는 주건물 남쪽 채가 엄
청난 재앙을 당하기 시작했다.
"꽈다당!.."
느닷없이 터진 평음에 천지가 들썩이도록 요동질치고 나무숲 가
옥 지붕 위에 수북히 쌓인 눈얼음이 산사태라도 난 듯 와르르 무
너져 내렸다. 그야말로 천만 개의 폭죽을 동시에 터뜨린 것보다
더 굉장한 폭발 기세였다.
장원 사람들이 넋을 잃고 주 건물 쪽을 바라보는 동안, 두번째
와 세번째, 그리고 네번째의 폭발음이 연속으로 일어났다.
"꽈다당!... 쿵쾅!... 파다당!..."
도합 네 채의 건물이 동시에 폭파되면서 유황(硫黃) 염초(焰硝)
타는 냄새가 매캐하니 뭇 사람들의 코를 찔렀다.
폭발이 일어난 직후, 벽돌과 기왓장, 박살난 기둥뿌리, 서까래
의 나무조각이 캄캄한 허공 높이 솟구쳤다가는 우박 쏟아지듯 와
르르 떨어져 내렸다.
뒤이어 화염이 불끈 솟아오르면서 걷잡을 수 없이 번져 나가기
시작했다. 이번 불길은 앞서 네 군데 건물을 거의 잿더미로 만든
화재보다 더욱 사납고 치열하게 타올랐다.
상황은 이미 조직적인 통제를 벗어났다. 광릉원 전체가 뒤죽박
죽 대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폭발의 횡음이 천지를 뒤흔드는 동안, 누각 지붕 꼭대기에 잠복
해 있던 회색빛 그림자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부둣가에 바짝 붙여 세운 가옥은 전혀 사람의 눈길을 끌 만한
건물이 못 되었다. 얼핏 보아서 그것은 부두 일꾼들이나 거처하는
숙소 같기도 하고 앞뜰에 선박용 잡동사니와 수리도구가 무더기로
쌓여 있는 것을 보면 부두 창고라고 오인할 수도 있었다. 앞뜰이
나 마찬가지로 대청이나 곁방도 난잡하기 짝이 없어 성미 깔끔한
사람 같으면 그 안에 한 발짝도 들여 놓기를 꺼려할 것이다.
하인 머슴이나 거처할 이런 집에 주의를 기울일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다못해 좀도둑조차 거들떠보지 않을 지경으로 난장판이
니....
그러나 앞뜰에 치쌓인 폐품더미 속에는 세 명의 경계보초가 매
복해 있었다. 단층 건물은 문짝도 창문도 단단히 잠긴 채, 그 안
에 누가 얼마나 숨어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장원 건물 네 채와 주 건물 쪽에서 연속으로 일어난 대화재, 대
폭발도 이들의 정서에는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세 명의 경계 매복초는 폐품더미를 살짝 들추고 사면팔방 주변
감시에 온신경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경각심도 최대한도로 높이고
수중의 병기와 암기도 언제 어느 방향으로든지 즉각 쓸 수 있도록
준비태세를 완벽히 갖추었다.
얼마쯤 있자니, 머슴의 옷차림을 한 장한이 겨드랑이 뒤에 감추
어 찬 장검을 들썩거리면서 오솔길을 따라 쏜살같이 뛰어 내려왔
다.
하늘을 찌르듯 길길이 치솟는 불빛에 설광(雪光)이 반사되어 아
까보다 더욱 눈부시게 밝아져 대낮이나 거의 다를 바 없는 터라,
달려 오는 사람이 30보 이내에 접근하자 그 얼굴 모습까지 또렷이
알아볼 수가 있었다.
그쪽을 경계하던 매복초 한 명이 은신처에서 훌쩍 뛰어 나가더
니 그 앞을 정면으로 가로막아 섰다.
"다섯째 형님이셨군!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오?"
보초가 다급하게 물었다.
"불은 누가 지른 거요? 게다가 폭발이 연속으로 일어나다니, 이
게 무슨 날벼락인지 모르겠구료. 다섯째 형님, 침입자는 발견했
소?"
성미 급한 사람 냉수도 못 마신다더니, 질문이 연주포(連珠砲)
터뜨리듯 꼬리를 물었다. 그것은 보초가 외면상으로는 침착하게
안정된 듯하면서도 내심으로는 적지 않게 놀라고 당혹감을 품고
있다는 증거였다.
"말도 말게! 장원이 폭삭 주저앉아 버렸어.... 어떤 놈인지 몰
라도 화공술(火攻術)에 고명한 솜씨를 가진 방화범이 아주 치밀하
게 계획해서 저지른 짓이야! 우리는 어디 성한 데 하나 없이 참담
하게 당했네!"
다섯째 형님이라 불린 자는 숨이 턱에 닿도록 뛰어 왔는지 설명
을 하면서도 헐떡거렸다.
"폭발은 아무래도 군장국(軍仗局)에서 꺼내 온 화약을 쓴 모양
일세."
"군장국이라니! 폭죽창(爆竹廠)의 포약(砲藥)이 아니고?"
"아닐세. 시각 맞추어 폭발시키는 도화선까지 준비해 썼다니
까!... 그걸 보면 정말 무서운 놈이야!"
"대포에 쓰이는 도화선 말이우?"
"그렇다네. 대총관 나으리 말씀으로는, 아무래도 우리가 납치한
화령관(火靈官) 나대덕(羅大德)이란 잡놈과 관련이 있을 듯 싶네.
그 제자 녀석들이 강공책으로 그런 수를 쓰지 않았는가 몰라. 어
쩌면 이 혼란통에 나대덕을 구출하려고 뒤따라 습격해올 가능성이
많네. 그래서 대총관 나으리가 이곳은 안전하지 못하니까 빨리 손
집사에게 통보해서 화령관이란 놈을 뱃길로 빼돌리라는 분부를 내
리셨네. 이번에 당한 빚갚음은 나중에 하기로 하고 말일세."
"알았소. 내가 손 집사에게 통보하지. 그런데 나머지 사람들
은...?"
당시 그대로 두라는 분부일세. 지하감옥에 큼직한 자물쇠를 덧
채우고 자네들 이외엔 어떤 자도 일체 접근시키지 말라고 하셨으
니까, 단단히 조심들 하게. 알았나? 그럼 나는 가네!"
전령 임무를 총총히 끝내자 그자는 후딱 돌아서서 왔던 길로 냅
다 뛰기 시작했다.
전갈을 받은 보초는 즉시 휘파람 신호를 보내 부근 매복초에 통
보한 다음 곧장 오른쪽 곁문으로 달려가서 다시 한 번 손뼉 신호
를 보냈다.
"딱! 딱! 딱!..."
안에서도 손뼉 신호가 울리자, 그는 대문을 열고 들어가는 대신
담장을 훌쩍 뛰어넘어 안으로 사라졌다.
그 지점으로부터 약 30여 보 떨어진 외따른 담모퉁이에 회색빛
그림자가 나타난 것은 다섯째 형님이란 자가 보초와 이야기를 한
참 나누던 도중이었다. 전령이 돌아간 후, 그는 등에 메고 있던
배낭을 풀어 큼지막한 대나무 통 네 개를 꺼냈다. 그것은 관군이
공성전(攻城戰)에서 불지를 때 쓰는 대형 화통(火筒)이었으나, 화
통을 고착시키는 좌판(座板)을 떼어 버린 단촐한 것이었다. 보초
가 담장을 뛰어넘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화섭자를 켜서 준비해
두었던 불심지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나서 벌떡 일어섰다.
고정판을 제거해 버린 화통에 일단 불이 붙으면 아무도 그 그
발사 방향을 종잡을 수 없다. 안정을 잃어버린 화통은 불길을 마
구 뿜어 내면서 지랄병 들린 늙은 쥐 모양 부근 일대를 천방지축
으로 정신없이 날뛰게 마련이라 위험하기 짝이 없다. 여기서 뿜어
내는 화염도 극히 강렬해서 만약 이것을 집 안에 던져 넣었다가는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할 난리가 일어난다. 세간살림은 말할 것도
없고 사람이든 짐승이든 모든 것을 삽시간에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린다. 미쳐버린 화통이 굴러 가는 곳마다 불길이 옮겨 붙을 뿐
만 아니라, 그 기세가 하도 사납고 엄청나서 붙잡을래야 붙잡을
도리가 없다.
화통 한 개의 무게는 고정판을 제거하고 두 근 남짓, 뚝심이 제
법 강한 사람이라면 4, 50보 거리를 투척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
다.
그는 침착한 솜씨로 불심지를 첫번째 화통의 도화선에 불을 당
긴 다음, 재빨리 가옥 안으로 내던졌다.
"푸슈슛!... 쌔액!"
도화선이 타들어 가는 소리, 뒤미처 공기를 찢으면서 날아가는
예리한 폭음, 이어서 두번째와 세번째 화통에 연달아 불이 당겨졌
다.
"슈우웃!- 슈우웃!-"
분사구에서 화염을 뿜어내면서 날아가는 파공음이 매복초의 주
의를 끌었다. 네번째 화통을 막 던져 날렸을 때, 매복초 한 명이
들이닥쳤다.
"이 죽일 놈!..."
보초가 으르렁거리며 돌격해 오면서 연주비도(連珠飛刀)를 발사
했다. 세 자루째 비도가 손끝을 떠났을 때, 그 주인 역시 눈앞에
바싹 들이닥쳐 수중의 장검으로 일격을 퍼붓고 있었다. 공격초식
은 비홍희일(飛虹戱日), 하늘 높이 치솟은 무지개가 태양을 희롱
하듯 슬쩍 내리꽂는 검법으로, 상단 공격은 한낱 양동(陽動)일
뿐, 실제 목표가 중단 하복부에 집중되는 절묘한 검술이다.
"우르르릉!"
수직으로 내리뻗는 칼날에서 은은하게 풍뢰 소리가 울리는 것을
보건대, 어검내공력(御劍內功力) 아주 놀라운 고수인 듯 싶었다.
"흐흠!"
회색빛 그림자가 코웃음쳤다. 그와 동시에 팔꿈치 뒤쪽에서 한
자루 칼끝이 불쑥 나오더니 상대방의 공격을 정면으로 맞받아 후
려쳤다.
"쩡!"
강철끼리 마주치는 쇳소리가 사납게 울리면서 공격자의 장검은
목표에서 빗나가 측방으로 퉁겨 날았다.
"죽일 테다! 용서없다."
두 마디 침중한 호통이 거푸 터지는 가운데 도광(刀光)이 번뜩
빛나더니 번개 벼락치듯 잽싸게 보초의 오른쪽 늑골을 훑고 지나
갔다. 그뿐, 쩍 갈라진 갈비뼈, 길이 일곱 치 남짓 아가리를 벌린
상처에서 내장이 좌르르 쏟아져나와 바깥으로 흘러 내렸다.
"어어억!..."
답답한 듯 목소리가 잦아들면서, 보초는 고개를 외로 꼬고 쓰러
졌다.
"팡! 꽈다당!"
가옥 뜰 안 여기저기서 염화통(焰火筒)이 연쇄 폭발을 일으켰
다. 어두운 하늘에 별빛 같은 불티가 어지러이 튀어 나는가 하면,
불 불은 나무줄기의 시뻘건 화염이 눈얼음 덮인 은빛 가지와 어
우러져 눈부시도록 찬란한 반사광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 동안
에도 분사통은 여전히 미쳐 날뛰면서 간담이 서늘하도록 무시무시
한 불길과 파공음을 토해 내고 있었다. 단층 가옥은 삽시간에 아
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등지 속에 잠자던 닭떼가 활개짓을 푸드득
거리며 날아 오르는가 하면, 으슥한 담장 귀퉁이에 숨어 있던 경
비견이 놀라 왕왕 짖어 대며 꼬리를 도사리고 냅다 도망치기 시작
했다.
매복초 가운데 반응이 제일 빠른 세 명이 회색 그림자를 향해
광풍 몰아치듯 돌진해 왔다.
회색인은 수중의 단도를 가볍게 휘둘러 보이며 오히려 한 발 한
발씩 떳떳하게 공격자 앞으로 다가갔다.
"앗, 장추산!..."
선두로 들이닥치던 자가 경악성을 지르더니 그 자리에 우뚝 멈
춰섰다. 벼락같이 찔러 들던 장검도 중도에서 딱 멎은 채 공격이
좌절되었다.
"고맙소, 노형께서 날 기억해 주시다니."
장추산의 걸음걸이도 딱 멎었다. 그리고 복면을 통해 괴수가 으
르렁거리듯 음침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객점에서 날 암습하려다 실패하고 내 친구들을 대신 잡아간 놈
들은 바로 당신네가 보낸 것이지? 그 정도야 누구나 짐작할 수 있
어. 날 보고 싶다길래 이렇게 찾아 왔는데, 새삼스레 놀랄 것은
뭐요?"
"장추산, 네놈이 !..."
"내가 찾아온 용건은 두 가지 ! 하나는 나 대신 납치당한 친구
들을 구하기 위해서, 또 하나는 당신네가 무슨 까닭으로 기어이
나를 암습하려는지 그 의도를 캐묻고 싶어서요!"
"삐익 !"
셋 중 다른 한 명이 날카롭게 휘파람을 불었다. 셋만으로 벅찬
상대를 만났다고 느껴 장원 쪽에 구원을 요청한 것이다.
"응원군이 오리란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요."
장추산이 상대의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려는 듯 버럭 소리쳤다.
당원 주 건물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제 앞가림하느라 남을 돌볼
겨를이 없을 테니까 말이외다. 아마도 지금쯤 사상자가 엄청나게
늘고 있을 거요."
"거, 거짓말 마라! 네놈이 여기 있는데..."
"좀 전에 대폭발이 일어나지 않았소? 당신네도 귀머거리는 아닐
테니 그 폭음을 똑똑히 들었을 거요. 그 소리가 호랑이떼를 깨우
는 신호였소. 장원 어귀 부근에 웅크려 있던 무시무시한 암펌 네
마리가 한꺼번에 쳐들어갔을 테니, 그걸 어떤 녀석이 막아 내겠
소? 여기 오기 전, 그 암펌들은 발톱을 아주 날카롭게 갈아 놓는
걸 내눈으로 보았는데, 아마 지금쯤은 선불 맞은 호랑이떼처럼 마
구 날뛰면서 대도살극을 벌이고 있을 거외다."
"암펌이라니?..."
"내 짐작이 틀림없다면, 당신네 주인장께서 직접 심복 부하들을
거느리고 나서면 호 모를까, 그 암펌들의 장검 넉 자루 앞에 맞설
자는 하나도 없으리라 생각되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당신네 주
인장은 공교롭게 오늘밤 이 자리에 안 계시는구료. 그러니 광릉원
도 오늘밤중으로 결판날 수밖에 !"
그것은 상대방에게 겁을 주느라 하는 거짓말이 아니었다. 확실
히 그런 암펌이 네 마리씩이나 있으니까.
장원 외곽으로부터 쇄도해 들어간 패거리는 바로 갈패옥 일행
넷이었다. 난공불락의 철옹벽 같은 검진을 형성하고 돌격해 들어
간 장검 넉 자루는 실로 염라대왕께서 띄운 초청장보다 백 배나
더 무서웠다. 한 놈이 얼씬거리면 한 목숨 날려 보내고, 둘이 막
아서면 한 쌍을, 그저 닥치는 대로 도륙해 나가는 것이었다. 인정
사정이라곤 털끝만큼도 없었다. 폭발과 불길을 피해 몰려 나오는
인파한가운데 풍덩 뛰어들기가 무섭게 이들 암펌 네 마리는 무,
배추,호박 썰듯 거침없이 후리고 베어 가면서 무시무시한 기세로
돌진했다. 동서남북, 어느 방향으로 길을 잡든간에 넉 자루 검광
이 스쳐 지나간 곳마다 피보라가 흩날리고, 팔다리에 목 떨어진
시체가 더미더미로 질펀하게 널려 있었다. 독이 오를 대로 오른
암펌들이란 정말 수컷도 다루지 못할 만큼 사납다.
그 중에서도 갈패옥 소저의 맺힌 원한은 태산보다 더 무거웠다.
왁살스런 납치범들에게 하루 낮밤을 꼬박 시달리고 죽을 고생을
했으니, 그녀의 장검이 칼끝부터 손잡이에 이르기까지 온통 선지
피로 뒤범벅이 된 것도 당연했다.
비상신호가 울려 퍼지자, 단층 가옥에도 응원군이 꼬리를 물고
들이 닥쳤다. 이들은 장추산을 중심으로 즉시 겹포위망을 펼치고
조여 들기 시작했다.
"어느 분이 자백을 하시려는가?"
장추산은 매섭게 최후의 통첩을 알렸다.
포위망에서도 누군가 반응을 보였다.
"암기진을 쳐라! 단번에 고슴도치를 만들어 버리자!"
"됐어, 대답을 받은 것으로 하지!"
말끝이 떨어지기도 전, 회색 그림자의 윤곽이 번뜩 하더니 섬전
과도 같은 칼바람이 한 가닥 빛줄기를 그으면서 포위망 속으로 뛰
어 들었다. 목표는 방금 명령을 내렸던 사나이, 칼빛인가 칼날인
가가 몸뚱이에 닿는 찰나 그 형씨의 머리통은 어깨 위에서 붕 뜨
는가 싶더니 곧바로 눈바닥에 툭 떨어졌다.
"죽인다!"
비단폭 찢듯 날카롭게 울리는 장추산의 목소리, 그와 때를 같이
해서 수중의 단도가 술취한 백룡(白龍)이 꼬리 비늘을 뒤채듯 온
하늘에 종횡무진으로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포위망의 그물은 삽
시간에 토막토막 끊겼다. 칼바람이 스치는 곳마다 인파가 쩍쩍 갈
라지고 피보라에 살점이 흩뿌려져 날았다.
화통의 효력은 대단했다. 단층 가옥도 이미 불바다. 거침없이
타오르는 화염 속에서 누군가 고래고래 악을 썼다.
"불길을 잡아라!... 아니, 아냐! 불은 그냥 내버려 둬 ! 절반은
저놈을 잡아 죽이고, 나머지는 포로를 옮겨라!"
18명 가운데 절반이 장추산을 에워싸고 계속 공격을 퍼붓는 동
안, 나머지는 불더미 속에서 마대자루 여섯 개를 끌어 내다 어깨
에 둘러메고 재빨리 담 모퉁이를 감돌아 사라졌다. 이들의 등뒤에
선 처참한 외마디 소리가 쉴새없이 터져 나와 귀신처럼 따라붙었
다.
운수 좋게 포로 호송을 맡은 아홉 명은 마치 그물에서 빠져 나
온 물고기처럼 홀가분한 마음으로 날쌔게 담장을 뛰어 넘어 부두
쪽으로 내뛰기 시작했다.
부둣가에서 10여 보 남짓 떨어진 지점에 다다랐을 때, 이들은
그만 눈앞이 샛노래지고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으흑!..."
어느 틈에 아홉이나 되는 동료들을 처치하고 따라붙었는지, 부
둣가에 낯익은 회색 그림자가 단도를 지팡이 삼아 짚고 공손히 기
다리고 있지 않은가!
선착장에 묶여 있을 배들도 어디로 갔는지 단 한 척도 보이지
않았다. 하기야 장추산의 손에 닻줄을 끊겨 떠내려 간 지 벌써 반
시각이나 지났다는 것을 이들은 꿈에도 알 리가 없었다.
장추산의 발치에서 그리 멀지 않은 부두 끄트머리에 세 구의 시
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부두 쪽 경계 감시를 맡고 있던 매복초들
임에 분명했다. 시체가 뺏뺏하게 굳어진 것을 보면 죽은 시각도
제법 오래인 듯, 입을 딱 벌린 채 두 눈도 휘둥그레 뜬 품이 경고
를 발하기는커녕 자신들이 누구 손에 어떻게 당했는지 모른 채 저
승길로 떠난 모양이었다.
"잘들 도망쳐 왔군! 이 잡놈들...."
장추산이 어금니를 으드득 갈아 붙이고 말했다.
"네 놈들을 모조리 죽여 없애기 전에는 절대로 칼을 놓지 않겠
다! 아니, 꼭 한 놈만 남겨 두지. <능소객> 방세광 어른한테 전할
말씀이 있으니까.... 어떤 놈이 그 행운을 잡게 될지 모르나, 여
하튼 모두 잘 들어 둬 ! 나 장추산은 애당초 방씨 어른과 알지도
못하거니와 아무런 원한도 없는 터, 그런데 어째서 기를 쓰고 나
를 해치려 든단 말인가? 너희들의 주인은 반드시 이 장추산에게
공평한 보복을 받아야 한다고 일러라! 잘 기억해 두었는가?"
갈 길이 막힌 아홉 명은 포로가 담긴 마대자루를 내려 놓고 말
없이 세 방향으로 나뉘어 섰다. 이른바 천 . 지 . 인의 삼재진(三
才陣), 세 명이 진문 하나씩 이루고 그 중심에 장추산을 몰아 넣
는 것이다.
"나는, 광릉원 뒤채를 맡은 손 집사요!"
주진(主陣) 셋 가운데 한 명이 소리쳐 수작을 건네 왔다.
"내가 사실대로 말씀드릴 수도 있소."
"듣겠소!"
"먼저 교환조건부터 얘기합시다."
"말해 보시오."
"우리 안전과 맞바꾸기요."
"그럴 값어치가 있는지 계산 좀 해 봐야겠구료."
"장 형, 잊지 마시오. 우리도 결사적으로 한 번쯤 싸울 힘은 있
소. 당신 손아귀에서 빠져 나가기야 식은 죽 먹기지!"
손 집사의 말도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무공으로 따지자면
장추산 쪽이 초진발속(超塵拔俗), 월등하게 높은 것은 사실이지
만, 이 아홉 사람도 결코 약자는 아니어서 한 사람마다 모두 일류
급 고수의 반열에 그 이름을 올리기에 손색이 없다. 따라서 9대 1
로 대결한다면 공전절후(空前絶後)의 웅후한 실력을 발휘할 것이
분명했다.
장추산도 그 점을 알기 때문에 선뜻 댓거리를 하지 않았다. 선
창가의 한 쪽은 강물이다. 쌍방이 맞붙었을 때 물 속으로 뛰어 들
기란 결코 어려운 일도 아니고 또 그것을 모두 제지하기는 불가능
하다. 그가 순식간에 절반을 죽일 수 있다손 치더라도, 그 틈에
나머지 절반은 물 속으로 뛰어 들어 목숨을 건질 수 있는 것이다.
찰나간에 일류급 고수 너댓 명을 몰살한다는 자체도 어쩌면 불
가능할지 모른다. 게다가 아홉 명이 아홉 방향에서 일제히 개구리
뛰듯 강물로 풍덩! 하는 날이면 그 3분의 1도 처치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이를 어떻게 대처하는가?...
잠깐 머뭇거리던 장추산이 갑자기 목에 힘을 주었다. 안 되겠
군, 이 정도 으름장으로 누르지 못한다면 압력을 더 가해야겠어 !
따도 당신들이 한 번쯤 결사적으로 싸울 능력이 있다는 것쯤 이
해하오. 허나,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도 당신들은 예측할 수 있으
리라 믿소. 짐작은 하셨겠지만, 방금 전 당신네가 남겨 두고 온
사람들은 내 손에 거의 몰살당했소. 그 사람들도 죽기 직전까지는
나하고 한 번쯤 결사적으로 싸워 볼 자신감을 지니고 있었더군!"
"귀하, 너무 핍박하지 마시오! 우리는..."
"좋소, 나도 부득이해서 이런 거니까. 당신 조건을 승락하겠소.
허나 문제는 당신 애기가 반드시 참말이어야 한다는 점이오."
"그건, 믿어 주시오. 이 손 아무개도 세상에 이름 없는 졸개가
아니요. 또 자기 말에 책임 못질 그런 못난 위인도 아니외다. 한
마디 한마디가 모두 거짓이 없음을 보장하겠소!"
"좋아, 당신을 믿겠소! 말하시오."
"우리 주인은 명분상으로는 이름을 감추고 여생의 복록이나 누
리는 지방 향신 부호이지만, 실상은 어떤 인물들에게 암암리에 제
압당한 처지외다. 그자들이 어떤 세력에 속했는지, 그 내막은 주
인의 가슴 속에만 들어 있을 뿐, 이 손 아무개는 하늘에 맹세코
알지 못하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들의 존재가 극히 두렵다는
사실이오. 그렇지 않고서야 우리 주인의 실력으로 어찌 털끝만큼
도 저항을 못하겠소?"
"옳거니, 일리 있는 말씀이로군!"
"나 손 아무개가 아는 바대로 말씀 드리면 이렇소. 어젯밤 삼경
무렵, 우리 주인은 그 인물에게서 급작스런 통보를 받았소. 습격
대를 조직해서 회양객점으로 출동시켜 당신을 잡아 들이라는 요구
였소. 그것도 가능한 한 속히 잡아 오라는 성화 같은 재촉까지 곁
들여서 말이오. 우리 주인께서 직접 변장을 하고 출동하신 걸 보
면, 그 인물에게 얼마나 엄중한 경고를 받았는지 알 만하실 거요.
습격은 하늘이 두 쪽 나는 한이 있더라도 성공시켜야 했소. 그런
데 나중에 어째서 계획이 변경되었는지, 또 당신을 못 잡은 대신
차선책으로 아무 관련도 없는 세 아가씨를 왜 납치하게 되었는지,
그 경위에 대해서 주인은 한마디도 내비치지 않으셨소. 또 내 신
분으로 주인께 이러쿵저러쿵 여쭤 볼 처지도 아니었고 말이오. 그
래서, 나는..."
"그래서 나는 당신 입에서 얻은 게 하나도 없구려. 이거 원, 머
리 속만 더 복잡해지지 않았나? 정말 뜬구름 잡는 얘기로군."
"내 말은..."
"알겠소! 당신네 주인을 찾아 내지 않고선 희망이 없다. 이 말
씀이겠지."
"장 형..."
"납치된 세 아가씨는 지금 어디 있소."
"한 명은 그 신비스런 패거리가 얼마 전에 배편으로 인수해갔
소, 주인께선 어제 점심 때쯤 통지를 받고 미리 준비해 두었던 거
요. 다른 두 여인은...."
"당신들, 그 마대자루에서 멀찌감치 떨어지시오."
장추산이 버럭 호통을 쳤다.
"그건...."
슬금슬금 마대자루 쪽으로 옮겨 가던 손 집사의 발걸음이 움찔
하고 멎었다.
"안 비킬 테요."
"좋소, 분부대로 따르리다."
손 집사는 냉큼 한 곁으로 물러나더니, 손을 번쩍 휘둘러 동료
들에게 양편으로 이동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장추산의 신형이 번뜩 마대자루 앞으로 다가섰다.
바로 그 순간, 아홉 명이 돌연 허공으로 솟구쳐 오르더니 곧장
물 속으로 곤두박질쳐 떨어졌다. 고명하기 짝이 없는 신법, 눈짓
을 교환하지도 않고 일제히 도약한 것을 보건대 이심전심(以心傳
心)으로 묵계가 이루어진 모양이다.
"아뿔싸!..."
장추산의 입에서 실성이 터져 나왔다. 이처럼 위험을 무릅써 가
면서 도망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되고 말았다. 뒤늦게 추격해 봤자 이미 때가
늦은 것이다. 선착장 부두는 강물 쪽으로 다리 버팀목을 받쳐서
널판을 길게 깔아 놓은 것이라, 손 집사의 신호에 따라서 널판 좌
우양측으로 물러난 아홉이 각각 제 방향에서 곧바로 몸을 던졌으
니 뒤쫓아 풍덩! 해 보았자 기껏해야 한 놈쯤 붙잡을까, 나머지는
미꾸라지처럼 빠져 나가고 말 터였다. 또 이들과 동시에 물 속으
로 뛰어들어 한두 명을 잡는다 치더라도, 자기 자신도 팡팡 얼어
붙은 동태 꼴이 되기 십상이다. 그래서는 한참 더 설쳐대야 할 이
쪽에서 밑지는 장사 아닌가?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섣부른 짓을 하다가 마대자루 몇 개를
잃어 버려선 안 된다는 점이었다. 이걸 어떻게 빼앗은 전리품인데
그냥 내버려 들소냐?...
마대자루를 모두 찢어 내고 나서, 그는 또 한 번 속았음 을 깨
달았다. 그나마 운수가 썩 나쁘지 않아서 포로 가운데 강남일지홍
을 발견하기는 했지만, 나머지 다섯 명은 남자 넷, 여자 하나, 그
로서는 전혀 모를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여섯 포로는 한결같이 혼혈(混血)이 찍힌 상태였다. 정세가 긴
박하게 되자 포로를 처리하던 녀석이 결박지우느라 시간을 잡아
먹기 아까웠는지 혼혈을 제압해서 마대자루에 쑤셔 넣고, 죽든 살
든 내 알게 뭐냐, 뒷감당 따위는 생각할 것도 없이 들쳐 메고 나
왔던 것이다.
혼혈을 제압당한 상태에서 시간이 오래 되면 백치가 되거나 전
신 또는 반신마비를 일으켜 폐인이 되고 만다.
그러나 혼혈을 푸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더구나 손만 뻗
치면 사람의 신지를 회복시킬 수 있는 눈더미가 얼마든지 있었다.
혈도를 풀어 주고 나서 갓 피어나기 시작한 사람은 얼굴에 눈을
한 움큼 비벼 주기만 해도 매우 빠른 시각에 의식을 회복한다. 단
지 완전히 맑은 정신을 되찾기 위해선 역시 시간이 좀 걸리지만
말이다.
여섯번째 포로의 혈도를 막 풀어 주고 났을 때였다. 장추산 앞
에 시커먼 그림자 둘이 벼락 같은 기세로 들이닥쳐 왔다. 그림자
뿐만 아니라, 두 자루 장검이 눈부신 칼빛을 사방으로 쏟아 내면
서 눈 깜짝할 사이에 벌써 삼 장 안팎까지 찔러 들고 있었다.
꾸부정하니 웅크린 자세로 앉았던 장추산이 용수철 퉁기듯 벌떡
일어나자, 수중의 단도가 '쩌렁' 하니 용음을 울렸다.
"때 맞춰 잘 오셨구료!"
장추산은 반가운 고함을 버럭 질렀다.
"저도 이 포로를 어디다 넘길까 했는데... 행방은 알아 냈소!
그런데...."
그는 입을 다물었다. 퍼뜩 의구심이 든 것이다. 이 사람들은 어
째서 복면을 했을까? 광릉원에 잠입한 이후 지금껏 그가 본 사람
가운데 복면을 한 자는 하나도 없었다.
등뒤에서 제일 먼저 비틀비틀 일어난 사람은 강남일지홍. 어제
흠뻑 퍼마신 술이 덜 겐 모주꾼처럼 눈동자가 풀어지고 자꾸 도리
질을 하는 것을 보면 정신이 아직도 완전히 피어나지 못한 듯, 그
저 본능에 따라 버둥거려 일어났을 뿐이다.
흘끗 강남일지홍의 피어나는 신색을 바라보느라 그는 잠깐 상대
방에 대한 반응과 생각이 주춤했다. 또 그 일순의 머뭇거림 때문
에 그는 하마터면 크게 낭패를 당할 뻔했다.
상대방이 두건으로 얼굴을 감춘 것을 보고 그는 그들이 결코 광
릉원 패거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적이 아니라 우군일 수
도 있다. 혹시 왈가닥 소저가 어디서 한 팔 힘을 거들어 줄 친구
들을 모셔 왔는지도 모른다. 이런 막연한 기대감이 칼날에 실린
공력을 절반 남짓이나 감소시키게 만들었다.
그와 동시에 주도적인 공격 기회마저 상실했다.
첫 접촉이 너무나 빨랐기 때문에 그는 더 이상 생각하고 분석할
겨를이 없었다. 반응은 거의 본능적으로 나왔다. 전광석화와도 같
은 찰나간의 반응이 생사와 길흉화복을 결정짓고 있었다. 그 의혹
과 머뭇거림의 짧은 순간, 상대방의 칼날은 구름장을 헤치고 번개
때리듯 가차없이 들이닥쳤다.
"쩡!"
그는 엉겁결에 일도로 상대방의 공격을 봉쇄하면서 측방으로 비
스듬히 선회동작을 취했다.
이만하면 우선 급한 불은 끄겠지 !...
그러나 일도 일검이 접촉하기가 무섭게, 심맥이 부르르 뒤흔들
리도록 흉맹절륜한 잠력 한 줄기가 칼끝으로부터 손잡이에 이르기
까지 전해 왔다. 여기에 자신의 반탄력마저 가세하자, 손아귀의
호구(虎口)가 뜨끈하면서 기마자세를 취한 하반신이 허전해지는가
싶더니, 몸뚱이는 광풍에 휩쓸린 듯 걷잡을 수 없게 흔들리고 전
신경맥에서 진기가 새어나가는 현상이 일기 시작했다.
앗, 큰일났다! 죽는구나!...
위기일발의 찰나, 그는 흩어지려던 진기를 끌어모으고 외부로
뻗쳐 나갔던 신의(神意)를 안으로 거두어 들였다. 그리고 전신의
긴장을 탁 풀고 의(意)와 신(神)을 움직여 재빨리 심맥부터 보
호했다.
그는 자기 몸뚱이가 반탄력에 퉁겨 나간다는 사실도 생각하지
않았다. 2장 바깥 눈더미 속에 곤두박질쳤을 때야 그는 눈앞이 캄
캄해지고 온몸 구석구석에 나른하게 퍼지는 허탈감을 느꼈을 따름
이었다.
상대방 역시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으앗!' 하는 경악성 한
마디와 더불어 안정되었던 공격자세가 비뚤어지더니, 측방으로 퉁
겨 팔 척 높이나 떠올랐다. 그는 중도에서 장검을 내던지고 몸뚱
이의 균형을 잡으려 했으나, 그것은 허사였다. 아랫배에 얻어 맞
은 일권의 충격을 흡수하려 팔다리와 허리를 구부리는 동안, 허공
에 붕 떠오른 몸뚱이는 2장 밖으로 멀찌감치 날아가 급속도로 추
락하고 있었다.
두번째 복면객은 한 발 늦었다. 상황이 이토록 급변할 줄 생각
도 못한 것이다. 두 사람이 반대편으로 동시에 튕겨 날아가는 바
람에 그는 단 한 걸음 늦은 차이로 공격대상을 잃어 버리고 말았
다.
그는 방향을 바꾸어 눈더미 속에 거꾸로 쳐박힌 장추산을 공격
하려다가 자기 동료가 물 속으로 풍덩!' 빠져드는 소리를 들었다.
깜짝 놀라는 순간, 방향을 틀던 발걸음도 주춤했다.
"이것들도 잡놈의 새끼였구나!"
낭패스런 몰골이었지만 그래도 허리를 꿋꿋이 펴고 일어나 앉은
장추산,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우면서 걸쭉한 욕설부터 퍼부어 보
냈다.
"앗!..."
복면객의 입에서 나지막하게 놀라운 실성이 흘러 나왔다. 절호
의 기회를 틈타 기습공격을 가하려던 엄두도 싹 가셨다. 장추산과
의 거리는 2장 남짓, 아직 동료를 구출할 시간은 있다! 반사적인
동작으로 널판 끝에 다가들던 그의 발걸음이 다시 멈칫하더니, 손
아귀를 불쑥 내밀면서 재차 도약해 뒤로 물러났다. 손아귀가 뻗친
곳에는 이제 막 휘청휘청 일어서는 강남일지홍이 있었다. 그녀는
아직도 맑은 정신을 찾지 못하고 몽롱한 의식 속에 또 한 번 납치
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복면객은 병아리 낚아채듯 그녀의 몸뚱이
를 덥석 움키자마자 그대로 쏜살같이 달아났다. 물에 빠진 동료는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
물에 빠진 복면객도 다시 떠오르지 않았다. 물 속으로 뺑소니치
는 게 상책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 역시 물에 혼자 남았을 동
료가 죽거나 말거나 아랑곳없이 제 한 목숨 구해 달아났을 게 분
명했다. 그러고 보면 이 복면객 두 형씨도 의리라곤 눈꼽만큼도
없이 서로 이용하고 속여 먹는 교활한 사기꾼들의 단짝이었다는
얘기가 된다.
장추산이 원기를 회복했을 때는, 복면객 두 사람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였고, 사면팔방은 괴괴한 정적만 감돌고 있을 따름
이었다.
그는 곧바로 행동에 들어가지 않았다. 상대방의 칼날을 통해 이
쪽으로 전해 들어온 무서운 잠력, 거기에서 그는 절세의 기학 구
유대진력을 느낄 수 있었다. 강호의 정상급 내공력 중에서도 사문
(邪門)의 비기(秘技), 구유대진력을 누가 단련했던가? 늙은 마귀
천 . 지 . 인 세 사람, <비룡천마> 진백강, 잠교지마, 황등교, 그
리고 구절인마 명귀, 이들 셋만이 그런 절학을 연성했을 것이다.
눈얼음 덮인 숲속 오두막집에서 1대 5로 다섯 마귀와 악전고투
를 벌이던 날 밤, <비룡천마>는 그의 손에 증상을 입었다. 당시
맞겨루어 본 감각을 되새겨 보건대, 이제 그 복면객이 쓴 검술은
의심할 여지도 없이 <비룡천마)의 솜씨였다. 그렇다면 이상한 노
릇이 아닌가?
뇌신의 천뢰찬, 그 날카로운 송곳에 늑골을 세 치 깊이나 찔린
상처가 어떻게 이리도 짧은 시간에 빨리 회복될 수 있었을까?...
상처는 그렇다 치더라도, 또 그 노마는 아직도 멀찌감치 내뛰지
않고 이 양주 땅에서 얼씬거리고 있단 말인가? 아아, 잘못했구나!
양주에서 그놈의 뒤를 추적했어야 좋았을 것을h 그는 이래저래 후
회막급이다.
"아쉽다! 내공력을 한 푼만이라도 거두어 들였던들......"
그는 사납게 발을 굴렀다.
"추적할 기회를 놓치다니, 정말 바보 짓을 했어!..."
지옥의 문턱에서 빠져 나온 다섯 남녀는 이미 정신을 차리고 일
어나서 피가 통하도록 손발을 움직이고 있었다.
"형, 괜찮소이까?"
3, 40대 중년 남자가 걸어와서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괜찮소, 이만한 게 다행이구료."
그는 쓴웃음을 머금고 수증의 단도를 중년 남자에게 건네 주었
다.
"당신네들은 모두... 아니, 이게 어찌 된 거야! 노 소저는."
구출한 사람은 여섯인데, 지금은 다섯밖에 없다. 애당초 구출할
목표는 안춘과 노천향, 두 처녀였다. 이제 여섯 가운데 다른 사람
은 다 있고 가까스로 구출한 강남일지홍만 보이지 않는다. 그 북
새통에 설마 자기한테 고맙다는 인사 한마디도 안 남기고 혼자 뺑
소니를 쳤단 말인가?
"노 소저가 누굽니까?"
젊은 아낙이 다 헝클어진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면서 뜨악한 기색
으로 물어 왔다. 무슨 고초를 당했는가, 얼굴에도 옷자락에도 핏
자국 투성이지만 목소리 하나만큼은 또렷하니 생기가 돌았다.
"내 성은 노씨가 아닌데요..."
"나는 강남일지홍 노천향 소저를 말하는 거요!"
조바심에 들뜬 나머지 그는 버럭 화를 냈다. 하지만 이내 성미
를 누그러뜨리고 목소리를 낮추었다.
"내가 허위단심 여기까지 쳐들어온 것은 그녀를 구출하기 위해
서였소. 방금까지만 해도 여기 있었는데...."
"그 여자라면 웬 복면을 한 사람이 채뜨려 갔소."
다른 장년인이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키면서 대답했다.
"저 쪽으로 내뛰더군요. 나는 땅바닥에 모로 누워 있었기 때문
에 그걸 똑똑히 볼 수 있었소. 난 또 그 두 사람이 노형과 함께
우리를 구출하러 온 사람인 줄로만 알았지 뭐요."
"앗차! 이런...."
그는 저도 모르게 실성을 터뜨렸다.
"여러분, 어서 도망치시오. 빨리!... 나는 그 개놈을 쫓아 가야
겠소! 그 개 같은 놈, 비룡...그 흉악한 마귀 놈... 아이쿠..."
그는 또 한 번 실성을 질렀다. 자기가 실언을 한 걸 깨달았던
것이다. 다행히도 <비룡천마>의 이름을 끝까지 발설하지 않았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신세 망칠 뻔했다. 그는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고 도망치듯 바삐 그 자리를 떴다.
방금 어느 쪽이라 했던가? 오냐, 저쪽이렷다!
그는 복면객이 철수했다는 방향으로 쏜살같이 치닫기 시작했다.
참말로 내가 넋이 빠진 녀석이로구나, 남 앞에서 실언을 다 하
다니 !
<비룡천마>의 은신처를 알아 내고 얼굴을 맞대 본 유일한 사람
은 뇌신뿐이다. 그러니까 <비룡천마>의 이름을 들먹이지 못하는게
당연하다. 왜냐? 그는 강남 충의군 사건의 비밀을 손에 쥐고 있
다. 그렇기 때문에 뭇 사람의 추적대상이 되어서도 안 되고, 강호
상에 그 신분이 공개되어서도 안 된다. 청나라 조정이 그를 비호
할 테고, 또 그 입을 통해서 강남 충의군 사건의 연루자를 다시
추적할 가능성이 다분하기 때문이다.
<비룡천마> 진백강, 그는 반드시 자기 손으로 쥐도 새도 모르게
처치해야 할 대상이다. <비룡천마)도 궁지에 몰리면 강호상에 뇌
신의 진면목을 폭로할 가능성이 있다. 그렇게 되면 장추산은 여태
껏 위장해 온 수십 가지 신분을 깡그리 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
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게 얼마나 번거로울 것이며, 또 새롭게
수십 가지 위장신분으로 기반을 닦는 동안 뇌신을 찾아 보복하러
올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생각만 해도 끔찍스럽고 골치가 지끈거
릴판이다.
강호상에 명성을 떨치는 10대 신비인물, 그들은 너나 할 것 없
이 숱한 원수를 맺고 있다.
이른바 신비(神秘)란 것은 자기 본래의 면목을 감추어 될 수 있
는 대로 원수나 숙적의 칼날을 피한다는 데 의미가 있는 것이다.
뇌신은 그 10대 신비의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강호 친구들은 뇌신이 스스로 보응신령(報應神靈)으로 자부하고
있다는 결 잘 안다. 무슨 공평 타당한 일을 해서 그런 자부심을
지닌 것은 결코 아니다. 뇌신의 손에 죽음 을 당한 사람 중에는
극악무도한 사마외도의 무리나 흑도상의 흉악한 인물도 많았지만,
협의도에 속한 원로 명숙이나 백도 고수도 몇몇은 그 무서운 뇌추
와 천뢰찬, 뇌주 아래 목숨을 잃은 것이 사실이다.
이렇듯 흑백이 불분명한 뇌신의 행동거지는 사마외도의 무리나
별로 차이가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공명정대한 보응신령으로 자
처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면에서 본다면 뇌신은 분명 위선적인 행동으로 명성이나
낚고 구차스래 영예를 추구하려는 사도마군(邪道魔君)의 부류에나
속한다고 할 것이다.
비록 그렇기는 해도 뇌신의 행동에 갈채를 보내고 손뼉쳐 성원
하는 사람들도 숱하게 많았다.
공자님 말씀에 뭐라 했던가? '어진 사람을 보면 어진 점을 배우
고, 지혜로운 사람을 만나면 그 지혜를 배우라'(見仁見智)고 했
다. 사람은 누구나 보는 각도에 따라서 관점이 다르게 마련일 터,
뇌신이 자기를 위해서 통쾌하게 복수를 해주는데야 싫어할 자가
어디있겠는가? 그게 바로 인지상정(人之常情)인 것을....
장추산이 훌쩍 떠나 버리자, 구사일생으로 뜻밖의 목숨을 건진
다섯 남녀는 감히 그 무시무시한 현장에 더는 머뭇거리지 못하고
당장 뿔뿔이 흩어져 제 갈 데로 사라졌다.
성곽 그늘 커다란 버드나무 세 그루 아래, 갈씨 부인 일가족 넷
이 오래 전부터 우두커니 서서 기다리고 있다. 이제 시각도 5경
(새벽 다섯 시)이 다 지날 무렵인데, 기다리는 사람은 아직껏 그
림자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 사람.... 그 사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정말 속 타 죽겠
네!"
갈패옥은 조바심을 견디지 못하고 쉴새없이 오락가락 서성대면
서 어두운 남쪽 길을 눈이 빠지도록 바라보고 투덜거렸다. 가뜩이
나 조그만 입술이 심통 때문에 더욱 뾰루퉁하니 삐져 나왔다.
성벽 아래 작은 오솔길은 성 밖 주민들이 드나드는 유일한 통로
다. 거기서 남쪽으로 3리쯤 가면 바로 남대문이 나오고, 운하의
선착장과 부두에 닿는다. 또 거기에 초관 세무사(稅務司)와 체운
소(遞運所)가 모두 자리잡고 있다.
야간에는 성문이 닫히기 때문에 성 안팎 왕래가 일채 끊기고,
도로상에는 이따금씩 순라꾼의 딱딱이 치는 소리만 들릴 뿐, 오가
는 행인의 발자취가 없다. 길도 한적하거니와 한밤중 설광이 밝
게 비쳐서 인적만 있으면 멀찌감치서도 금방 알아볼 수가 있다.
"뭐가 그리 급하니, 얘야?"
갈씨 부인이 빙글빙글 웃어 가며 딸에게 핀잔을 준다.
"마음 놓고 기다리려무나. 반드시 올 테니까. 내 보기엔 그 녀
석은 담보도 크지만, 마음 씀씀이가 여간 세심한 게 아니더라. 또
무공 수준도 얼마나 깊은지 헤아릴 길이 없는 녀석이야. 그런데
너따위가 그런 사람 안전을 걱정해 준다고 될 일이냐."
"엄마, 그 사람은...."
"그 녀석이 어째서."
"그 사람은 무슨 강남일지홍인가 안춘인가를 구하러 갔단 말이
에요.... 흰. 모두 별 볼일 없는 계집애들인데....."
"하하, 이런 철딱서니 없는 것 같으니! 난 또 뭔가 했더니만 그
런 걸 걱정하고 있었구나."
"엄마, 웃지 마!"
말괄량이 처녀는 발을 굴러 가며 투정을 부렸다.
"그래, 안 웃으마. 그럼 됐니?"
갈씨 부인은 사랑스런 딸의 어깨를 토닥거려 주었다.
"너, 정말 아무 일도 안 당했지?"
"아뇨, 따귀 두 대 하고 발길질에만 두어 차례 걷어 채였어 !"
갈패옥은 새삼 분통이 터지는지, 목소리가 암코양이처럼 갸르릉
댔다.
"그놈들은 제가 창해(滄海) 유성(幽城) 갈씨 가문 사람인 줄 알
고서, 온갖 사탕발림으로 구슬러 가며 엄마한테 편지를 쓰라고 요
구했어요. 엄마더러 자기네들과 만날 약속 시간, 장소를 정하라는
거죠. 저는 딱 부러지게 거절했어요. 그랬더니 놈들은 저를 무슨
주인인가 하는 놈한테 넘긴다고 하더군요. 주인이 알아서 처리할
거라고 말이에요."
"장가 녀석 말을 들어보니까, 광릉원 장주는 <능소객> 방세광이
틀림없는 모양이더라. 그 작자는 벌써 오래 전에 천하영웅으로 일
컬어지던 자였지. 세상 사람을 눈 아래 깔아 뭉갤 정도로 호기만
만한 야심가였는데, 그런 인물이 어째서 딴 사람을 주인으로 받들
어 섬기고 있는지 모르겠구나."
갈씨 부인은 사뭇 불안한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그 주인이란 사람은 <능소객>보다 더 무서운 인물일
게다. 앞으로 우리도 정말 각별히 조심해서 경계해야겠어. 마음
놓고 있다가는 생각지도 않게 재앙을 당할지 모르니까 말이야."
"언니, 그놈들은 벌써 우리 창해 유성 가문에 정면으로 도전한
셈이에요!"
갈 소저의 이모 양벽아가 사뭇 분한 기색으로 말했다.
"뜻밖의 재앙을 막을 길이라곤 딱 하나밖에 없어요. 놈들의 근
본 내력을 낱낱이 파헤쳐서 그 음모를 만천하에 공개하는 거예
요."
"그래요. 그놈들이 어두운 데 숨어서 간계를 부리지 못하도록
깡그리 헤쳐 놓아야 합니다."
유모 방씨도 냉정하게 분석한 의견을 내놓았다.
"그놈들이 아기씨를 겁박해서 편지를 쓰도록 위협한 거나, 손발
꽁꽁 묶어 가지고 마대자루에 쳐넣은 짓은 우리 창해 유성 가문을
안중에도 두지 않겠다는 뜻이 분명합니다. 이런데도 우리가 놈들
의 근본 내력을 캐내지 않는다면, 놈들은 어둠 속에 있고 우리는
밝은 데 노출되어서 언제든지 낭패를 당할 위험성이 곱니다. 그러
니 반드시 그놈들의 정체를 폭로해야 합니다!"
"난 그놈들과 끝장을 보기 전에는 손을 안 놓을 거야!"
왈가닥 소저의 울화통이 또 한 번 불끈 치솟았다.
"호호, 네가 무슨 재주로 어쩌겠다는 거냐? 칼을 들고 길거리에
서서 그놈들더러 썩 나오라고 호통이나 쳐 보려무나."
갈씨 부인이 귀엽다는 듯 빙그레 웃어 가며 핀잔을 주었다.
"엄마, 난 그 방가 놈을 꼭 찾아내겠어!"
"어디 숨었다고 어떻게 찾을래?"
"광릉원으로 쳐들어가지 뭐!..."
"광릉원? 거기는 폭삭 주저앉았는데, 뭐가 있다고 또 찾아 간단
말이냐? 아마 그자는 지금쯤 더 으슥한 데 숨어 있을 게다. 두더
지 같은 놈이라 햇볕을 싫어할 테니까. 안 그래."
"언니, 그놈들도 이대로는 넘어가지 않을 거예요. 우리 손에 소
굴이 쑥대밭이 되었으니 그냥 있을 리 있겠어요."
이모가 단정적으로 말했다.
"우리 창해 유성이 어느 편에 서든 그쪽은 실력이 크게 증강될
거예요. 그러니 우리와 힘을 보탤 마땅한 대상을 찾아야 해요. 또
<능소객>의 행방도 빨리 알아 내야 하구요."
"어젯밤 우리가 잡아서 주리를 튼 놈들은 모두 송사리 떼라, 아
는 게 한도가 있어서 유감이었다. 기껏 토설한다는 것이 자기네
주인이 방무릉 어른이란 것밖에 없지 않더냐? 완전히 헛수고를 했
어..."
갈씨 부인은 신중하게 말을 이었다.
"그것은 앞잡이들을 통제하는 자가 그만큼 음험하고 매사에 신
중하다는 얘기가 된다. 실력도 웅후하고 인원수도 엄청나서 우리
측으로 보자면 그쪽의 기습공격을 막아낼 도리가 없을 듯하구나."
"좌우간에 너희들 모두 명심해 둬라. 오늘 이후로는 절대로 혼
자서 행동하거나 함부로 나다니지 말아야 한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니까. 모두들 잘 알겠지."
멀리서 잿빛 그림자 하나가 탄환 쏘아지듯 '휙!' 하니 날아왔
다.
"엄마, 왔어요!"
갈패옥이 팔짝 뛰어 가면서 소리쳤다.
"어라? 이상하네, 저 사람 혼자만 오잖아? 그럼 인질을 못 구했
나?...."
과연 장추산은 빈 손이었다.
"날이 곧 밝겠소. 갈씨 부인, 우리 성내로 돌아갑시다!"
도착하자마자 그는 사뭇 안쓰러운 기색으로 재촉했다.
"장씨 아우님, 사람은 못 구하셨소?"
갈씨 부인도 걱정스레 물었다.
"몸이 안 좋은 것 같은데.... 괜찮기는 한 거요."
"골탕을 먹었습니다."
대답하는 목소리가 잔뜩 풀이 죽었다.
"가까스로 강남일지홍을 구해 놓았더니, 웬 놈이 불쑥 나타나는
바람에 고스란히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는 선창가에서 포로 여섯을 구출하던 경위를 간략하게 들려
주면서도 언짢은 마음을 이기기 못했다.
"그만 해도 장씨 아우님은 최선을 다하셨소."
갈씨 부인이 따뜻한 말로 위안했다.
"길상을 타고난 사람은 하늘이 돌보시는 법이랍니다. 강남일지
흥을 채간 사람이 누군지 모르나, 어쩌면 악의로 대하지는 않을
듯 싶구려. 혹시 누가 아오? 그녀의 친구들인지.... 내가 알기로
강남일지홍은 강호 사람들과 연줄이 썩 좋거니와 평판도 나쁘지
않은 규수외다. 여기저기 친구도 많고 남과 원한을 맺은 일도 별
로 없고 말이오...."
문제는 그 복면객들이 친구가 아니라 적이라는 데 있습니다."
장추산의 목소리는 불안에 떨렸다.
"강호의 여류 명사가 일단 사악한 마도 인물의 수증에 떨어졌다
면, 그 결과는 아마 무섭게 나타날 겁니다."
"하지만 당신은 애를 쓸 만큼 쓰지 않았소? 또 두 사람이 평소
잘 아는 사이도 아닌데도 말이오. 혹시 무슨 단서라도 잡은 것은
없소."
"강남일지홍에 대해선 지금 형편으로는 아무런 실마리도 잡지못
하고 있습니다. 그 가짜 도련님 안춘 소저라면 단서를 잡아 놓았
습니다만..."
"어떻게 하실 작정이오."
"준비를 치밀하게 해 놓아야겠다는 것밖에는 이 자리에서 말씀
드리기가 좀 이릅니다. 밤새껏 설쳐댔더니만 지쳤군요. 정말 푹
쉬어야겠습니다. 우리 돌아가면서 의논하기로 하지요."
그는 자신이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걸음걸이가 무거운 품으
로 보건대 지친 정도가 아니라 아예 파김치가 다 된 모양이다.
곁에 다정하게 바짝 붙어 걸으면서 갈패옥은 줄곧 샐쭉한 눈초
리로 그의 얼굴을 흘겨보았다. 그가 안춘 소저와 강남일지홍 얘기
를 할 때는 그 얼굴빛이나 눈빛이 어떻게 변하는지, 더욱 밉살맞
은 눈초리로 유심히 살피는 것이다.
첫댓글 즐가ㅁ했습니다.
즐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