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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음모
강남일지홍으로 말하자면 강호 무림계에서도 알아 주는 여류 명
사다. 아리따운 탯거리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요기
(妖氣)가 감도는 여인, 말하는 투나 행동거지도 점잖은 정파 인사
들에게 비방을 들을 만큼 자유분방하고 거리낌이 없는 여인이기도
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대다수 강호 사람들이 그녀를 아무 짓이나
함부로 저지르는 방탕한 여인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녀는 삼교구류의 온갖 잡배들과도 스스럼없이 어울리고 대화
도 곧잘 나누고, 그 말투나 행동거지가 재치 있고 도를 넘치게 짓
궂은 면도 없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대체(大體)를 벗어나거나 윤
리 도덕을 해치는 경우는 전혀 없었다. 또 흑도사마의 무리와 어
울리더라도 당사자에게 진짜 못된 행적이 드러날 때는 가차없이
안면몰수하고 매섭게 응징하는 강단(剛斷)도 지니고 있었다. 그렇
기 때문에 강호상의 평판이 사뭇 좋았던 것이다.
강남일지홍을 음부탕녀(淫婦蕩女)로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
다. 그녀가 번잡스런 예절이나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호기분방한
맛에 길들여진 아리따운 무림의 여왕이요 여걸이라는 사실, 풍류
도 천덕스런 하류에 흐르지 않는 여인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알아
주는 사실이다. 또 그녀와 가까이 사권 사람은 남정네나 여성이나
할 것 없이 모두 봄바람에 멱 감은 듯 상쾌함을 느끼는 것도 사실
이었다.
두번째 피랍자 신세가 된 그녀는 지하감옥에 갇혔다. 두 명의
괴한이 번갈아 문초를 했지만, 그리 깊은 문제를 건드린 것은 아
니었다. 고작 물은 것이라곤 가문의 내력이나 출신, 강호에서 교
분을 맺은 친구가 누구 누구인지, 대략 그런 정도에 지나지 않았
다.
하기야 그녀로서도 남한테 말 못할 비밀은 없었다. 그래서 그랬
는지 혹독한 대우도, 고문도 받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납치범들
에게 있어서 그녀의 존재는 그리 탐탁치 않게 보는 듯도 싶었다.
이제 겨우 강호상에 몇 년 출도한 햇내기 여인에게 기대를 걸어
볼 값어치가 별로 없다고 여겼는지도 모른다.
어느 누가 자신을 구출했는지, 그녀의 머리 속에 남은 인상이라
곤 하나도 없었다. 정신이 막 피어나기가 무섭게 또 한 차례 혼혈
을 얻어 맞고 까무라쳤으니 온 천지가 캄캄 절벽, 그래서 그녀는
아무 것도 모른다.
지하뇌옥에서 그녀는 마침내 의식을 되찾았다. 온전한 정신이
들자, 그녀는 자기가 마구 헝클어진 짚더미 속에 파묻혀 있는 것
을 깨달았다. 푹 썩어 버린 짚더미에서 숨막힐 듯 후덥지근한 냄
새가 풍겨나오는데다 가축의 똥 오줌내에 역겨운 땀내까지 뒤범벅
이 되어 코를 찌르니, 깔끔한 처녀로선 구역질이 일어날 지경으로
참기 어렵다.
"여기가 어디야."
그녀는 당혹스레 고함을 지르면서 벌떡 일어났다. 이때 맞은편
구석에서 누군가 대꾸했다.
"이제 깨어나셨구먼. 하늘이 도우셨소이다."
결코 낯설지 않은 목소리, 그 주인공은 다름 아닌 영락 공자였
다.
밤새껏 무슨 꼴을 당했는지, 어제 아침까지만 하더라도 으리으
리하게 차려 입었던 옷이 말씀 아니게 찢겨지고 더러워지고 구겨
진 채, 그는 맞은편 짚더미에 누워 있었다. 당당하던 기색이 좀
수그러들기는 했어도 영웅호걸다운 기백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이잇? 당신이었군요! 여기가..."
그녀는 뜻밖의 인물을 보고 찔끔 놀라 말을 잇지 못했다.
"여기가 어디냐고 묻는 겁니까? 여기는 시골 농가요. 죄수를 가
두어 두는 임시 감옥인 셈이지."
영락 공자는 태연스레 설명을 해준다.
"흙벽돌로 쌓은 담벼락이지만 얼마나 두텁고 단단한지 모르겠구
료. 생쥐새끼가 제일 싫어하는. 게 이런 담벼락이지! 구멍을 뚫자
면 여간 애를 먹지 않겠는걸. 창문도 작고 문간 바깥에는 파수꾼
이 지키고 있어서 탈출하기가 쉽지 않겠는 걸."
"당신도 붙잡혀 왔군요! 어떻게...."
"노 소저, 아무 것도 기억이 안 나시는 모양이로군요."
"무슨 기억 말이에요."
"잡혀 온 일 말이오."
"그거야 어째 기억을 못하겠어요? 그놈들이 미혼약물을 써서 끌
어다가 이 지하 뇌옥에다 가두어 둔 거죠. 이상하다. 다들 어디
갔을까? 여럿이 갇혀 있었는데...."
"누구 얘기요?"
"남자하고 여자하고 많이 있었어요. 그 중엔 내가 알 만한 사람
도 있었죠. 화령관 나대덕도 있었고, 충소학(衝 鶴)도 있었고...
나를 심문하던 두 놈은 자질구레한 것만 물었어요. 웬 일인지 상
당히 대우를 해주더군요. 천벌을 받아 죽을 놈들! 도대체 그놈들
의 정체가 뭔지 모르겠어요.
"그 다음에는 어땠소?"
"바깥쪽에서 천지가 들썩거릴 정도로 큰 소동이 났던 모양이에
요. 감시하던 놈들끼리 주고 받는 말을 들어 보니까, 웬 사람이
쳐들어와서 놈들의 소굴을 깡그리 뒤집어 놓았다고 하더군요. 좀
있다가는 몇 놈이 들어와서 갇힌 사람들을 하나씩 혼혈을 찍었어
요. 기억은 거기까지밖에 없어요. 한데 당신은 누구에게 잡혀 오
셨어요."
"당신을 잡아 온 주모자는 양주 부성에서 으뜸가는 대부호 향
신, 방무릉 나으리라오."
"뭐라구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방무릉은 무공도 할 줄
모르고 또 강호인도 아닌데, 이런 짓을 저지르다니..."
그녀의 말투는 믿지 못하겠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자가 어떤 내력을 지녔는지 아무도 모르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당신을 납치한 주범이 바로 그자라는 사실이오. 지금 당신
이 갇혀 있는 곳은 성 밖 이삼 리 떨어진 길상암 근처 광릉원이
오. 나는 이곳저곳 수소문을 좀 해서 이 소굴을 알아 냈소. 그리
고 광릉원으로 곧장 쳐들어와서 한바탕 짓밟아 놓고 있었는데, 또
다른 누가 침입해 왔소. 그러니 양쪽에서 난리가 날 수밖에 더 있
었겠소? 내가 이리로 달려오니까, 놈들은 여기 갇혀 있는 포로들
을 몽땅 이끌고 철수하던 중입디다. 그래서 나는 중도에서 놈들을
모조리 때려 쫓아 보내고 포로들을 구출했는데, 그 중에 천만 다
행히도 당신이 끼어 있을 줄은 정말 생각지도 못했소."
"아아,그랬군요! 남문 공자님, 고마워요!"
"아직 얘기가 다 끝나지 않았으니 고맙단 말은 거두셔야겠소."
영락 공자는 쓴웃음을 머금고 말을 이었다.
"나는 상태가 너무 급박해서 당신 혈도를 풀어 줄 겨를도 없이
등에 업고 재빨리 물러 나왔소. 정체도 모를 놈들인데, 언제부터
인가 그 지점에 매복해 있었던 거요. 창황중에 돌발적으로 기습을
당했으니, 어쩌겠소? 꼽짝없이 사로잡힐 수밖에.... 지금 우리 두
사람은 놈들의 포로가 된 형편이라오."
"아이구머니 ! 그럼 또 그 방무릉의 부하들 짓인가요?"
아니오. 허나 얼마 안 있으면 곧 알게 될 거요. 지금 놈들은 매
우 바쁘게 뛰고 있소. 뭔가 중대한 일을 급히 처리하는 모양입디
다. 그래서 아직껏 우리를 본격적으로 문초하지 않는 거요. 노 소
저, 우리는 앉아서 죽기만 기다릴 수는 없소!"
"그래요! 하지만 지금 형편이..."
"여기 작은 창문이 똑똑히 보입니까?"
"보여요, 한데 창문이 아니라 통풍구 같군요."
"어림잡아서 높이가 반 척, 너비가 한 척쯤 되어 보이는데, 당
신 혹시 축골공(縮骨功)을 부릴 줄 아오?"
"그건... 억지로 하면 나갈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당신
은...?"
영락 공자는 그녀보다 훨씬 키도 크고 몸집도 우람하다. 이런
몸뚱이로 한 척밖에 안 되는 너비를 빠져 나간다는 것은 축골공의
화후가 칠 성 이상 연마되지 않고서는 어림없는 일, 애당초 말도
꺼내지 말아야 한다.
"내 걱정은 말고 당신부터 준비를 하시오."
"준비라니, 뭘 준비하라는 거예요."
"창문으로 빠져 나가란 말이오. 내가 뒤를 봐 줄 테니까. 만약
감시꾼이 뛰어 들면 내가 엄호하리다!"
상황은 급박하다. 그녀에게 더 이상 생각할 겨를도 용납치 않을
만큼 다급한 상황이다. 그녀는 즉시 일어나서 창문을 살그머니 열
고 바깥 형편을 두리번두리번 살펴보았다. 바깥쪽은 온통 시들어
버린 대나무 숲, 그 너머 눈 덮인 논밭 경치가 멀리 내다보일 뿐,
사람의 그림자는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고개 돌려 영락 공자에게 손짓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숨 한 모금 깊숙히 들여마시고 기공을 일으켜 몸뚱이를 오그라뜨
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뼈마디에서 '우두둑, 우두둑!' 소리가 울
렸다.
축골공이라, 그것은 문외한이 사람을 놀라게 만드는 헛소리다.
무림계 사람들이 통상 쓰는 명칭은 첩골(疊骨), 뼈마디의 관절을
포개듯 최대한도로 간격을 좁히는 수법이다. 유령도 신선도 아닌
바에야 사람의 뼈를 오그라뜨린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니
까.
잠시 후, 그녀의 몸뚱이는 진짜 뼈대가 오그라든 것처럼 삼분의
일 정도 축소되었다. 키도 낮아지고 몸뚱이 폭도 작아졌다. 그 상
태로 창문 턱에 기어 오르자 마자, 그녀의 상반신이 바깥으로 쏙
빠져 나갔다. 이제 허리를 길게 뽑고 궁둥이의 근육만 바짝 움츠
리면 문제 없다.
바로 그 순간, 그녀는 감방 문짝이 '꽈당!' 하고 넘어가는 소리
를 들었다.
그 다음에는 영락 공자의 무거운 질타성이 울렸다.
"에잇!"
뒤미처 타격을 받은 사람의 참담한 비명소리, 어지럽게 거꾸러
지는 소리가 연달아 귀청을 때렸다.
앗차, 발각됐구나!...그녀는 다급한 김에 도로 물러나려 했다.
감방에 뛰어 내려서 영락 공자와 어깨 나란히 적을 맞아 싸울 생
각에서였다.
"빨리 나가시오! 어서 !"
등뒤에서 영락 공자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여유만만한 음성,그
녀를 안심시키는 말투였다.
"감시꾼 두 놈은 내가 쳐죽였소. 나머지 놈들이 놀라 뛰어올 테
니까, 어서 빠져 나가요!"
그녀는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창 밖으로 훌쩍 뛰어 내렸다.
팔다리와 허리를 쭉 펴서 몸의 원상을 회복하고 흘끗 되돌아보니,
영락 공자는 벌써 그녀 등뒤에 나와 서 있다. 같은 첩골공을 써서
나왔는지, 남자의 키도 삽시간에 길게 늘어나는 중이다.
"뜁시다. 어서 !... 왼쪽으로!"
영락 공자가 재촉했다.
"내가 앞장서서 길을 열 테니, 뒤를 엄호해 주시오!"
"알았어요."
그녀도 정신없이 대꾸했다. 한바탕 급하게 치닫고 나서, 이들은
기복이 심한 구릉지대 눈 덮인 나무숲으로 들어섰다. 경황중에 대
답하고 숨이 턱에 닿도록 뛰는 동안, 그녀는 영락 공자가 어째서
부서진 문으로 나오지 않고 어렵게 첩골공을 써서 뒤따라 나왔는
지조자 까맣게 잊어 먹고 말았다. 그것을 다시 기억에 떠올린 것
은 한참 훗날, 모든 일이 다 끝났을 때였다.
"삐이익, 삐이익 !..."
날카로운 갈댓닢 피리 소리가 울렸다. 그것은 마치 사면팔방에
서 한꺼번에 울려 오는 것 같았다. 강남일지홍은 갈댓닢 부는 소
리가 돌릴 때마다 몸서리를 쳤다. 이야말로 사면초가(四面楚歌),
전후좌우 어디에나 추격대가 포위망을 구축하고 웅성웅성 조여 드
는 기척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그녀는 영락 공자의 등판에 가슴이 닿도록 바짝 따라붙은 채 필
사적으로 내뛰었다. 죽느냐 사느냐, 긴박한 갈림길에 서면 정말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지탱해 줄 견인불발(堅忍不拔)의 용감성
을 가진 사람이 필요한 법이다. 지금 이 시각에 여인의 혼자 몸으
로선 도저히 탈출할 기력도 의지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강남일지
홍이 자신의 운명을 이 남자에게 몽땅 걸었던 것은 더 말할 나위
가 없다.
하늘빛을 올려다 보니, 벌써 유시(酉時:저녁 여섯 시)도 이슥해
져, 한겨울철 짧은 해는 서편에 기운 지 이미 오래고, 밤의 장막
이 내려 덮이기 직전이다. 이때가 도망자에게 있어서 가장 위험한
시기다. 허나 앞으로 반 시각쯤 더 버티기만 하면 날도 캄캄하게
저물어 탈출할 희망이 있는 것이다.
마침내 두 사람은 갈댓닢 소리를 차츰 등뒤에 팽개쳐 버리고,
앞쪽으로 끝도 없이 면면히 펼쳐진 설원(雪原)을 바라보게 되었
다. 그곳에는 드문드문 십여 가호나 되는 아담한 마을이 있고 빽
빽하게 들어찬 대나무 숲, 잎가지가 모두 시든 나무숲이며 꽁꽁
얼어붙은 늪지대와 논밭도 한 폭의 그림처럼 눈에 가득하니 들어
왔다.이런 곳이야말로 도망자에게 있어서 가장 이상적인 은신처였
다.
은신처를 발견하고 긴장이 풀렸는지, 두 사람의 걸음걸이가 점
점 느려지기 시작했다. 이따금씩 등뒤에서 어렴풋이 따라붙던 갈
댓닢 소리가 들리지 않은 지도 벌써 오래다.
"이러다간 지쳐 쓰러지겠는 걸!"
영락 공자가 걸음을 늦추고 투덜거렸다.
"노 소저, 어디 좀 쉴 데를 찾아야겠소. 배도 고픈데 먹을 것도
찾아야겠고... 이대로 계속 뛰기만 하다가는 우리 모두 다리 꺾인
물방개 신세가 되기 딱 알맞을 거요."
"우리 어디쯤 있는 거예요?"
강남일지홍은 아직도 가슴이 뛰는지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물었
다. 그녀의 손은 어느덧 영락 공자의 팔뚝을 단단히 움켜 쥐고,
할딱할딱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온몸에서 뜨거운 열기가 끓
는 가마솥에 김 오르듯 무럭무럭 피어나는 것이 금방이라도 지쳐
쓰러질 것만 같다.
제아무리 무공이 뛰어난 고수라 하더라도 이토록 먼 거리를 경
공신법으로 치달려 오기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더구나 열흘씩이나 계속 퍼부은 폭설 때문에 대지가 온통 눈으
로 뒤덮인 벌판을 죽을 등 살 등 정신없이 뛴다는 것 자체가 무모
에 가까운 짓이려니와, 한 발짝 내딛을 때마다 무릎까지 눈에 파
묻혀서 걸음 을 떼어 옮기기가 여간 어려운 노릇이 아니어서, 그
녀는 여느 때 같은 길을 걷기보다 세 배나 되는 정력을 더 소모해
야 했다.
두 사람은 자기네들이 도대체 얼마나 오래 멀리 도망쳐 왔는지
종잡을 수 없었다. 그저 막연하게나마 자신들의 체력이 거의 다
고갈되어 기진맥진 상태라는 사실만 절실히 느껴졌다.
그렇다고 이 시각에 아무데서나 엎어져 휴식을 취한다면 그 결
과 또한 심각할 것이 분명했다. 왜냐? 열량과 체력을 보충할 음식
도 없는데 쓰러져 누웠다가는 영영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되기 때
문이다.
후줄그레하니 흐른 땀은 속옷을 몽땅 적시고 겉으로 배어 나와
잠깐 사이에 얼어 붙을 테고, 혹시 무쇠덩어리로 두드려 만든 사
람이라면 모를까 동태처럼 딱딱해진 옷을 걸치고 있으면 사람마저
얼음 기둥으로 변하기 십상이다.
"나도 모르겠소. 여기가 어딘지..."
영락 공자는 절망한 듯 연신 도리질을 해 보였다.
"방향을 가늠해 보건대, 우리는 지금 동쪽이나 동북쪽으로 도망
쳐온 것 같소. 땅도 평탄하고 방위를 가늠할 만한 산등성이나 고
개 마루턱 같은 걸 찾아볼 수 없는데다 우리가 감금당했던 곳이
도대체 어디였는지 모르니, 무슨 수로 이 지점을 알아 내겠소?"
"그럼 어쩌죠?"
걸음걸이를 잠깐 늦춘 사이, 강남일지홍 옷섶으로 스며든 추워
에 뼈가 저리고 온몸의 땀이 삽시간에 얼음비늘로 변해 살갗을 뒤
덮었다. 그것은 정말 참기 어려운 고통, 하다 못해 혓바닥마저 굳
어 목소리가 덜덜 떨려 나오는 판이니 이대로 더 있다가는 크게
재미 적은 꼴을 당하기 딱 알맞다.
"여기가 어디든 그게 문제가 아니오. 우선 쉴 데를 찾아서 당장
몸을 녹일 모닥불부터 피우는 게 더 급할 것 같소. 내가 다 알아
서 할 테니까, 노 소저는 걱정마시오."
"난... 배가 고파요. 춥기도 하고..."
그녀는 맥이 쭉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마을에라도 내려가서..."
"안 되오! 마을에는 절대로 가까이 가선 안 되오."
영락 공자는 단호하게 도리질을 했다.
"실 한 오리라도 흔적을 남겼다간, 그걸로 우리는 끝장이오! 지
금 우리 몸에는 쇠붙이라곤 바늘 한 개도 지닌 게 없는데, 추격대
가 쫓아 왔을 때 무슨 수로 놈들을 죽인단 말이오? 괜히 마음만
급할 뿐 어디 쓸 힘이나 있겠소."
"몇 시각이나 됐을까요."
"유시도 거의 다 지났을 테니까, 놈들도 추격해 오지 못할 거
요. 가만 있자, 우리가 하루 낮밤을 꼬박 물 한 모금, 밥 한 톨
입에 넣어 보지 못했군! 이거 정말 사람 죽을 맛인 걸."
"하루 낮 하루 밤이라고요?"
강남일지홍이 새삼스레 물었다. 뭔가 생각나는 것이 있는 모양
이다.
"그렇소, 어젯밤 오경 초에 당신을 구했다가 이내 다른 패거리
들의 손에 떨어졌지. 당신은 그 동안에도 인사불성이었으니까 물
한 모금도 못 마셨을 게 아니오' 그리고 오늘 하루 진종일 죽어
라고 뜀박질을 했으니, 무쇠 몸뚱이를 가진 사람이라도 배겨 내지
못할 거요."
"그래요, 난 지금 두 다리에 맥이 탁 풀리고 춥고 떨리고...."
"저길 봐요!"
영락 공자가 느닷없이 좌전방을 가리켰다. 그쪽에는 펑퍼짐한
야산 등성이, 눈얼음으로 덮인 나무숲 으슥한 구석에 지붕 머리가
드러나 있었다.
"사람이 사는 집 같지 않소?"
강남일지홍의 눈길도 자연 그 손가락 끝을 따라서 헤멨다. 2리
밖, 창망한 겨울 하늘 아래 저녁 노을이 아스라이 비치는 속에서,
그 지붕 모서리는 뚜렷이 눈에 잡혔다.
"하지만... 마을은... 마을은 안 되잖아요?"
사시나무 흔들리듯 와들거리는 몸뚱이를 따라서 목소리도 제멋
대로 떨려 나왔다. 추위와 절망감에, 그녀의 얼굴은 시퍼런 물감
빛깔로 질려 있다.
"마을이든 아니든, 지금 우리 형편으로는 그걸 따질 때가 아닌
것 같소. 자, 힘을 내시오. 우리 몇 걸음만 더 나갑시다!"
영락 공자가 결단을 내렸으니, 그녀로선 따르지 않을 수가 없
다. 하기야 마을이 위험하다고 말한 장본인도 그였으니까.
갈대로 지붕을 엮어 올리기는 했지만, 그 건물은 어느 시골 부
잣집 피서용 별장 같아 보였다. 대문 중문까지 제법 갖춘 규모가
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은 아담한 것이, 대문과 창문이 꼭꼭 닫힌
걸 보면 사람이 살지 않는 텅 빈 집이 분명하다.
"계십니까?... 여보세요! 누구 없습니까?"
영락 공자가 몇 번 소리쳐 부르면서 대문을 두드리더니, 마지막
에는 서슴없이 문짝을 걷어차고 들어 섰다.
대문에는 빗장도 지르지 않았거니와 문고리에 자물쇠도 채우지
않았다. 안쪽에 길다란 걸상 하나를 비스듬히 버텨서 문단속이라
고 해 놓았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곳은 외지고 궁벽한 지역이라
도둑맞을 걱정도 하지 않고 산다는 얘기인지, 아니면 도둑이 넘보
지 못하도록 이 인근 마을의 치안상태가 좋아서 그런지도 모르겠
다.
무례한 길손들은 앞마당을 가로질러 곧장 안채 부엌으로 뛰어들
었다.
"히야! 이것 좀 봐요!"
강남일지홍이 먼저 환호성을 질렀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이제
추위도 잊고 두려움도 깡그리 사라졌다.
부엌칸은 시골집 치고 어지간히 넓었다. 곁채 곳간에는 참숯 가
마니와 장작더미가 쌓였고, 대들보에는 말린 생선꿰미와 소금 절
인 돼지고기가 주렁주렁 걸려 있었다. 뒤주를 열어보니 하얀 쌀도
그득 담겼다. 다른 것은 보나마나, 장작에 쌀에 고기, 소금 기름
까지 골고루 갖춰져 있으니, 기왕 내친 김에 푸짐하게 환갑잔치를
열어도 되겠다.
그녀는 다급한 손길로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잠시 후, 싸느란
냉기가 감돌던 부엌은 봄날처럼 훈훈해졌다.
그녀는 이 집 여주인이나 된 듯 팔소매 척척 걷어 붙이고 음식
을 장만하기 시작했다. 영락 공자는 그동안에 집안을 구석구석 샅
샅이 뒤져 이상이 없나 살펴보았다. 집 안팎이 사뭇 깔끔하게 정
리된 것을 보건대, 요 며칠 전 까지만 하더라도 사람이 머무르고
있었다는 표시가 났다. 아마 큰눈이 내린 직후에 마을로 내려갔을
것이다.
본채 두 칸짜리 안방에는 침대와 이부자리, 모기장까지 갖추어
져 있었다.
세간살림도 규모있게 정돈되고 깔끔한 것이, 여느 농사꾼 집안
에서처럼 구질구질한 냄새조차 풍기지 않는다.
안팎을 한 바퀴 둘러본 후, 영락 공자도 한가롭게 다리참을 쉬
지 않았다. 그는 곳간에서 커다란 가마솥을 한 개 찾아 내어 안방
에 옮겨 놓고 벽돌 셋으로 밑받침을 쌓아서 임시용 화로를 만들었
다. 그리고 나서 등잔불을 밝혔다. 빛이 비추자, 안방 침실에는
따뜻한 기류가 물결처럼 흐르기 시작했다. 어차피 내 물건 쓰는
게 아닌 바에야 아낄 것이 뭐냐? 그는 곳간에서 참숯을 가마니 채
로 떠메다가 화롯불을 듬뿍 피워 놓고 뼛속까지 시린 냉기를 말끔
히 몰아 냈다.
화롯가에 앉아서 그는 땀과 눈얼음에 푹 젖어 버린 옷가지를 불
에 쬐어 말리기 시작했다.
부엌에서 강남일지홍도 문짝을 닫아 걸고 겉옷, 속옷을 훌훌 벗
어 아궁이불 곁에 널어 놓은 다음, 꽁꽁 얼어 붙은 몸뚱이를 녹이
고 있었다. 땀에 찌든 겉옷이야 본래 남장을 했으니 누구에게나
이성의 신분을 간파당하지 않아도 되었으나, 여인의 속곳이나 몸
뚱이만큼은 남의 눈에 뜨일 수야 없는 노릇이다.
창황중에도 푸짐하게 차린 저녁상이 안방 침실로 옮겨지자, 두
사람은 걸신들린 호랑이 늑대처럼 밥상에 덤벼들어 배가 터지도록
아귀아귀 쑤셔 넣기 시작했다. 이윽고 배부르고 몸 따뜻하니, 이
틀동안 겪었던 공포와 위험마저 깡그리 잊었다. 영락 공자는 모처
럼의 포만감을 즐기면서 비로소 입을 열었다.
"짐작컨대, 이곳은 곡정존(曲亭村) 서북편 숲속인 듯싶소. 곡정
촌이라면 나도 잘 아는데, 양주 부성 동북쪽으로 한 이십오 리 쯤
떨어져 있소. 여기서 북쪽으로 더 나가면 소백호(邵伯湖)남쪽 기
슭에 다다를 거요. 그리고 동쪽으로 나가면 조하(漕河)에 다다르
게 되오. 방향은 잡았으니까, 우리 이제 휴식 좀 취하고 나서 부
성으로 돌아갑시다."
"저는 이 일대 지리를 잘 몰라요. 하지만 당신 말씀을 듣고 보
니 생각나는 게 있군요. 조하로 가는 것보다 차라리 촉강(蜀岡)쪽
으로 돌아서 멀찌감치 길을 잡는 게 더 안전하지 않을까요."
강남일지홍은 지칠 대로 지쳐 있으면서도 밤을 도와 부성으로
돌아가자는 제안에 반대하지 않았다. 어떻게 들으면, 영락 공자보
다 더 서두르는 기미까지 보이고 있었다.
"어느 쪽으로 길을 잡든, 안전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요."
영락 공자가 느긋이 말했다.
"우리는 목숨 걸고 쫓기는 도망꾼 신세요. 여기서 보이지는 않
지만, 추격하는 놈들은 지금 꼬리를 바짝 따라붙어 오고 있을 거
요. 그러니까 차라리 관도상으로 떳떳이 길을 잡으면 편안하고 아
무 일도 없으리라 믿소. 문제는 부성에 돌아갔을 때가 재미 적다
는 얘기요. 그놈들이라고 우리가 필경은 부성으로 돌아간다는 것
을 모를 리 있겠소? 아마 지금쯤 양주성 일대 사면팔방에 쏟아져
나와서 매복을 깔아 놓고 샅샅이 뒤져 대고 있을 거요."
"매복이요?..."
"그렇소, 성곽을 중심으로 교외에 이르는 길 으슥한 곳에 그물
처럼 깔려서 활이나 암기로 기습공격을 퍼부을 거요. 그것도 이중
삼중으로 겹겹이 잠복해 있을 테니, 거기서 당신과 내가 살아날
기회는 십분지 일도 안 될 거외다."
"그럼 어쩌지요?"
"나도 될 수 있는 한 빨리 부성으로 돌아가야 할 일이 있소. 우
리 집 시종들도 지금 무척 애를 태우고 있을 거요. 조하 방면으로
접근할 경우, 나는 우리 시종들과 연락이 닿을 수 있소. 연통만
되면 어떤 놈이 가로막아도 무섭지 않소. 내 시종들이 일단 살계
(殺戒)를 펼치는 날엔 칼날에 용서가 없소. 또 내 친구들도 적지
않으니까 모두 팔뚝 걷어 붙이고 나설 거요."
"운하 쪽으로 나간다면 어떨까요."
그녀의 물음에, 영락 공자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내 자신있게
대꾸했다.
"뱃길로 나가도 괜찮겠지! 거기까지는 눈치챌 놈이 없을 테니
까... 또 발각된다 하더라도, 영락 공자에게 공공연히 도전할 미
친놈은 없을 거요. 대낮이라면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소. 걱정
이 있다면 놈들이 밤중에 들이닥쳐 암기로 습격하는 것이 가장 두
려울 뿐이오."
"저도 급히 부성에 돌아가야 할 일이 있어요. 내일 저녁에 중요
한 약속이 있거든요."
"약속?"
"그래요."
"무슨 일인데 그리 중요하단 말이오? 안 가면 안 되는 일이오."
"그래요. 반드시 가 봐야 해요. 안 가면 큰일을 망치게 되죠.
내가 그 자리에 나가야만 일이 쉽고 원만하게 해결될 수 있으니까
요."
"무슨 놈의 약속인데 그리도 융통성이 없단 말이요."
"영락 공자님, 용서해 주세요. 저는 비밀을 지켜야 하기 때문
에..."
"좋소, 어차피 나하고는 상관 없는 일이니까."
"영락 공자님, 미안합니다...."
"내 이름은 영유요! 남문 영유라고 불러 주시오."
영락 공자는 대범하게 껄껄껄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벌써 이틀 밤낮 생사를 같이하고 환란을 함께 겪어 온 우리가
아니오? 이런 사이에 무슨 얼어 죽을 영락 공자님 영락 맹자님을
따지는 거요? 나는 그 따위 번잡스런 허례허식이 딱 질색이오."
"그래도..."
"노 소저..."
"제 이름은 천향이에요."
그녀는 화사하게 웃었다. 수줍음이 서린 탯거리가 사내의 가슴
을 울렁거리게 만들었다.
"당신 성씨가 복성이라서, 잘못 부르면 혓바닥이 삐겠어요...."
"하하! 그냥 영유라고 불러도 좋소. 한데 내가 천향이라고 막
부르면 당신 품격을 너무 떨어뜨리는 게 아닐까 모르겠구료."
영락 공자도 덩달아 웃음을 터뜨렸다. 진솔함이 배어 있는 듯하
면서도 어딘가 풍류스런 멋이 담긴 웃음, 그것은 곤경에 빠진 아
가씨를 건드려 춘심을 발동시키는 데 가장 매력있는 무기라고 할
것이다.
"아니에요. 오히려 제 품격이 높아지는 셈이죠."
강남일지홍은 상대방의 불타는 눈빛을 피하면서 대답했다.
"완산 천풍곡 영락장으로 말하자면 무림계에서 손꼽히는 명문이
요, 백도 정파 사람들과 널리 교분을 맺고 있는 협의도 가문이 아
니겠어요? 그런데 저는 한낱 강호 풍진이나 희롱하는 뜨내기 여인
에 지나지 않고..."
"뜨내기 여인이라니! 그런 망발이 어디 있소? 또 방랑생활을 한
다고 해서 그게 어쨌다는 거요? 나 역시 강호 떠돌이 노릇을 하고
있지 않소? 우리 집안이 백도 정파 사람들과 교분이 많은 건 사실
이오만, 그것은 아버님의 일이지 나하곤 아무 관계도 없소. 이 남
문 영유는 의협이니 뭐니 따지는 일엔 별 홍미가 없고, 또 그럴
자격도 없소. 그런 말 자체를 입에 올리는 것부터 나한테는 사치
스럽다고 생각하오."
"하지만, 영락 장주의 아드님이신데...."
"나는 그럴 재목이 못 되오. 그래서 강호 친구들과도 별로 왕래
가 없소. 남문 영유는 한낱 방랑생활을 즐기는 것만으로 만족하
오. 또 그렇기 때문에 강호 풍파와 시비에 휘말리는 일도 거의 없
었소.당신 보기엔 어떻소? 그 장추산이란 청년도 의리나 협객과는
아주 거리가 먼 사람 같은데, 그런 부담이 없으니 얼마나 홀가분
하오."
"장추산은..."
"아, 천향. 당신, 그 친구하고 정분이 썩 좋아 보이던데?"
"난 에당초 그 사람을 알지도 못해요."
강남일지홍은 솔직히 대답했다.
내음에 호감을 품었던 것은 사실이에요. 당신한테 도전하는 용
기를 보았기 때문이죠. 당신도 물론 아시겠지만, 우리 같은 강호
떠돌이의 성격은 장추산처럼 영웅호걸이나 강자에게 거침없이 도
전하는 사람을 좋아하죠. 모든 일에 강단있고 용감하게 책임질 수
있는 사람, 그런 인물에게 호감이 가는 거야 인지상정이 아니겠어
요."
"아하, 그렇다면 내가 장추산에게 도전받을 만한 영웅호걸이요,
강자란 말씀이로군! 이거 너무 치켜세우시는데? 하하하!"
"영유, 당신은 그래도 무림 명문의 사대 공자님이 아니셔요? 그
쪽에 솜씨 좋은 응원군이 잔뜩 생겼길래, 나도 당신 편으로 돌아
설 수밖에 없었죠."
"고맙소! 천향."
영락 공자는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어 그녀의 손등을 어루만졌
다.
"그건 그렇고.... 천향, 당신 음식 솜씨가 제법이로군. 오늘 우
리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소. 이제 부성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안
전할 텐데, 기운을 좀 더 차리려면 몇 술 더 먹어 두는 게 좋겠
소. 앞으로 뚫고 나가야 할 길이 더 어려우니까 말이오. 부엌에
있는 식칼도 혹시 쓸모가 있을지 모르니까, 당신이 지니고 가도록
하시오."
"그럼 지금 떠나요?"
"날씨가 매우 나쁘구료. 먹구름도 잔뜩 끼고 바람도 세차게 불
어서 방향을 분간하지 못하겠소. 허나 어쩌겠소? 오로지 방향을
잃지 않게 해주십사고 하느님한테 축수나 올리고 떠나야지. 혹
시 누가 아오? 하늘이 도와서 우리를 죽음의 함정에 빠지지 않게
길을 인도해 주실지 말이오."
"정말 그렇게 위험할까요?"
"천향, 내가 지금 농담하는 줄 아시오?"
영락 공자는 정색을 했다.
"그놈들 가운데 녹록한 하류배는 하나도 없소. 게다가 인원 수
가 얼마나 되는지 짐작도 못하는 형편이오."
"아마도 엄청난 고수들을 풀었을 거예요."
강남일지홍도 수긍할밖에 딴 도리가 없다.
마실 내가 허풍을 떠는 게 아니라, 이 영락 공자는 강호상에 발
을 내딛은 이래 아직껏 진정한 적수를 만나 보지 못했소. 이런 내
가 누굴 두려워 하겠소? 하지만 이번은 어땠소? 앗차 하는 순간에
남의 손에 혼혈을 찍히고, 또 누구한테 당했는지조차 모르고 있지
않소? 그래서 말인데..."
"그럼 우리 날이 밝을 때까지 기다려요!"
"그건 좀..."
"적어도 날이 밝은 후면 매복에 걸려들 위험성도 줄어 들지 않
겠어요?"
"대낮이라면 나도 매복 따위에 걸리지 않을 자신이 있소. 당신
과 나, 이런 강호의 경험자가 장님도 아닌데 바보처럼 제발로 그
물에 기어 들어갈 짓을 하겠소?"
"좋아요. 내일 아침 일찍 떠나기로 하죠! 영유, 당신께 말씀드
릴 수는 없지만, 사실 나는 막중한 일을 책임진 몸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하류 잡배들의 암기 습격에 한을 품고 죽을 수는 없어요."
"그렇다면.... 좋소, 나도 캄캄한 밤중에 헤매다가 놈들의 손에
개죽음을 당하기는 싫으니까! 우리 여기서 하룻밤 지새기로 합시
다."
결정을 내리자, 두 사람은 마음놓고 나머지 식사를 계속했다.
한밤중에 영락 공자는 집 주변을 다시 한 번 순찰했다. 그리고
안팎 부근에 경보를 울릴 간단한 장치를 여러 군데 설치했다.
강남일지홍도 방안에서 제법 쓸만한 경보장치를 여럿 만들어 외
부 침입자가 들어설 통로마다 조심스럽게 깔아 놓았다. 시간은 자
꾸 흘러갔다. 그래도 두 사람은 지치는 줄 모르고 흥겹게 손을 합
쳐 밤이 으슥하도록 작업을 해나갔다. 마음이 서로 통하니,고된
것도 잊고 오히려 신바람이 날 지경이었다.
화로에는 숯이 듬뿍듬뿍 얹혔다. 불길이 활활 타오르면서 안방
침실의 공기는 봄날보다 더 따뜻해졌다.
영락 공자는 물 주전자를 화로 곁에 놓았다. 자그만 탁자 위에
는 찻잔과 용정차(龍井茶)를 담은 그릇이 가지런히 갖추어졌다.
침상 이부자리는 물론 한 벌밖에 없다.
"천향, 피곤하겠소. 침상에 올라 편히 쉬구료."
영락 공자의 목소리가 새삼 정중하고 무거워졌다. 그것은 정인
군자다운 태도를 사뭇 역력하게 드러낸 목소리이기도 했다.
"내가 밤새도록 지켜 줄 테니 마음 푹 놓고 자도록 하시오. 기
력을 축적해 두어야만, 우리 내일 도산검해(刀山劍海)를 해쳐 나
갈 수 있지 않겠소?"
안방 침실에 들어선 이후부터 강남일지홍의 기색은 줄곧 불안한
상태가 되어 있었다. 이따금씩 흠짓흠짓 놀라는 기미도 보였고,
뭔가 알지 못할 막연한 감정에 들떠 수줍은 탯거리도 보였다. 강
호여인들은 본디 예절이나 관습에 대범하다. 성격도 활달하기 때
문에 남녀유별 따위를 일부러 따져 가며 처신하는 법도 별로 없
다.
그러나 외로운 남녀가 호젓하게 한방에 들어앉은 상황이라면 얘
기가 달라진다. 엄격한 도학군자(道學君子)께서 가르치지 않더라
도 이럴 때 지킬 것이 무엇인지 모두 알면서도 고민하는 것이 젊
은 남녀 관계다.
고우주(高郵州)에서 남쪽으로 삼십 리 떨어진 곳에 노근사(露筋
祠)라는 사당이 하나 세워져 있다. 그것은 당나라 시절에 열녀로
추앙받은 어느 시누이와 올케의 정절을 기리는 사당이다.
여인은 한밤중 길을 가다가 낡은 신당(神堂)에 들게 되었는데,
들어서고 보니 그 안에 남자 한 사람이 먼저 묵고 있는 것을 보고
황급히 도로 나왔다. 그리고 바깥 마당에서 노숙을 할망정 남자와
는 한방에서 묵지 않으리라 맹세했다. 당나라 시절의 모기떼가 얼
마나 극성스럽고 무서웠는지 모르나, 여하튼 이들 시누이와 올케
는 밤새도록 모기떼에 물어 뜯겨서, 아침 나절 행인에게 발견되었
을 때는 온몸의 뼈와 근육이 드러나도록 처참한 몰골로 죽어 있었
다는 것이다.
그러니 당시 예교(禮敎)가 어느 정도로 엄격했는지 알 만할 것
이다. 남녀 칠세 부동석은 누구나 지켜야 할 금기였다. 그런데 다
큰 청년 남녀가 혼례도 올리지 않고 한방에서 함께 묵다니, 이
런 일은 당나라 시절뿐만 아니라 그로부터 1천여 년이 흐른 청나
라 때에 이르기까지도 변함없이 용납 못할 패륜적 행위였다. 어쩌
면 당나라 이후 송대에 들어서서 이런 풍습은 더욱 엄격해졌다고
도 할 수 있었다.
위급할 때는 임시방편도 통하기는 한다.
허나, 이런 임시방편에 대한 해석이 구구각색이다. 보는 사람에
따라서 견해도 제멋대로요, 한계도 애매모호하다. 따라서 결함도
많고 사람들이 요모조모 피하고 형식만 갖추어 악용할 수 있는 약
점도 숱하게 지닌 것이 사실이다. 세상만사 마음 먹기에 따라서
안되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오늘밤, 이들 두 남녀는 임시방편을 따랐다.
영락 공자는 줄곧 성인군자다운 태도를 잃지 않고 있었다.
군자다운 태도를 지킬수록 그에 대한 강남일지홍의 호감도 점점
강렬해지고 있었다. 난세의 역경을 어엿이 해쳐 나가는 이분에게
마음이 기울어진 지 벌써 오래, 그녀의 감정은 자신도 억제 못할
깊은 수렁으로 자꾸만 빠져들 뿐, 도저히 헤어 나올 길이 없었다.
두 남녀 사이에 대화가 끊긴 지도 한참 되었다.
말은 없어도 두 쌍의 눈길은 멀뚱멀뚱 상대를 바라보느라 하염
없다. 보면 볼수록 준수한 얼굴 모습, 군자다운 태도, 남아대장부
의 헌걸찬 몸집... 그녀는 술 취한 듯 점점 더 깊이 빠져든다. 이
제는 가슴속 깊은 곳에서 끓어 오르는 정념의 불길을 억누를 기력
도 없고 또 그럴 생각조차 나지 않는다.
그녀는 본디 세상물정을 볼 것도 많이 봤고, 들어 봤다. 또 어
떤 때는 어떻게 처신해야만 자연스러운 것인지 너무나 잘 아는 여
인이다. 그녀는 강호상에서 굴러먹을 대로 굴러먹은 떠돌이, 방랑
생활에 닮고 닮은 여인이다.
"나도 밤새 지킬 테예요."
그녀는 발딱 일어섰다. 화롯불 곁에 선 그녀의 두 뺨에 발그레
하니 달무리가 지고, 손은 어디다 놓아야 좋을지 모른 채 화로 곁
을 방황했다.
"당신... 당신도 무쇠로 두드려 만든 사람이 아닌데, 어떻게 밤
을 꼬박 지새워요? 제가 절반 시각을 먼저 지킬 테니까, 침상
에...올라 쉬세요. 내일 모든 희망이 당신 한 몸에 달려 있는
데..."
"천향, 마음 놓으라니까."
영락 공자는 미소를 머금은 채 일어났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
녀의 손을 잡았다. 화롯불 열기 탓인가, 뜨겁게 달아오른 자그만
손이 파르르 떨었다.
"자아, 이리로..."
그녀는 손목을 잡아 이끄는 대로 침상머리로 끌려 갔다.
"천향, 내가 누군지 모르시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진짜 무쇠
덩어리 몸을 지녔단 말이오. 하하!. 대장장이 망치질에 골백 번
두드려맞고 풀무질 화덕 속에 던져져서 1천 번이나 단련된 무쇠덩
어리, 모진 세상 풍파를 숱하게 겪어 온 남아 대장부가 이까짓 피
로쯤 견디지 못한대서야 말이나 되겠소."
"....."
침대 곁에서, 그녀는 죄 지은 어린애 모양 고개를 떨군 채 다시
들지 못한다.
"내 걱정일랑 마시오. 조금 있다가 한 반 시간쯤 좌공운기(坐功
運氣)를 하면 피로도 회복되고 호랑이 용처럼 펄펄 될 수 있으니
까. 천향, 내 말 듣고 푹 자라구! 알았지."
마지막으로 그는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톡톡 건드렸다. 손끝에
와서 닿는 감촉이 불에 덴 듯 뜨겁다.
그는 아예 그녀의 허리 뒤로 손을 돌려 넣고 사뿐 안아다가 침
상에 눕혔다. 그리고 두어 발짝 물러나오더니, 손길 닿는 대로 휘
장 고리를 벗기고 활짝 쳐 주었다.
엄동설한에 모기가 어디 있다고 휘장을 쳐 준단 말인가? 그것은
단지 시간을 골기 위한 수작, 상대방으로 하여금 결단을 내릴 시
간적 여유를 주기 위한 지연전술에 지나지 않았다.
술책은 그대로 적중했다. 휘장 자락을 막 펼쳐 놓았을 때, 그의
손목은 이미 뜨거운 손길에 붙잡히고 있었던 것이다.
영락 공자가 흘끗 얼굴을 돌렸다. 거기에는 애정의 물기가 철철
넘치는 두 눈망울이 마주 바라보고 있었다.
불같이 달아 오른 두 뺨, 호수의 물결처럼 일렁이는 눈빛, 반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무엇인가 목타게 바라는 듯 뜨거운 숨결이 활
활 쏟아져 나왔다.
"천향!..."
영락 공자의 목소리가 떨렸다.
"영유!..."
낮으면서도 끈적거리는 유호의 목소리, 수줍은 듯하면서도 요염
하기 이를 데 없는 눈초리가 사내의 가슴속 깊숙히 잠재워 놓은
욕정을 불끈 일깨웠다.
"천향!..."
그녀는 땀내가 솔솔 풍기는 몸뚱이를 절반쯤 일으켰다. 그리고
격렬한 몸짓으로 우람한 사내의 품속에 던져 넣었다.
누구 쪽에서 용을 썼는가? 사내의 발밑이 허청거렸다. 어쩌면
쌍방이 동시에 힘을 주었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두 사람은 몸을
가누지 못하고 침상 위에 포겐 자세로 쓰러졌다.
쌍방은 너나 할 것 없이 분수처럼 터져나온 정욕을 억누르지 못
하고 격렬하게 상대방을 껴안았다. 그리고 미친 듯이 상대방의 뜨
거운 입술을 서로 찾아 헤매었다.
두 생명이 휘황찬란한 빛을 발하면서 약동하는 가운데, 실내에
는 뜨거운 열탕의 격류가 겨울철인데도 열락에 도취한 두 남녀의
옷가지를 훌훌 벗어 던지게 만들 정도로 한 여름철 태양보다 더
뜨겁게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집 바깥은 여전히 엄동설한, 뼈가 시릴 만큼 차디찬 냉기와 피
비린내를 짙게 풍기는 괴한들의 그림자가 부근 여기저기서 유령처
럼 표연히 출몰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림자들은 절대로 대문 근처에 접근하지 않았거니와 출
몰하는 동작도 아주 신중하고 조용했다. 마치 이 집을 수호하는
유령과도 같이... .
같은 시각, 길상암 서남쪽 들판에는 회색빛 외투를 걸친 괴한의
그림자 하나가 아주 조심스런 동작으로 길상암을 향해 접근하고
있었다.
그 앞쪽에선 또 하나의 백색 그림자가 개구리 뛰듯 훌쩍훌쩍 도
약하여 눈 덮인 밭고랑을 한 단계 한 단계씩 넘어가고 있었다. 몸
을 솟구치는 순간에는 흰 그림자의 윤곽이 번뜩 비치면서 단숨에
그 전방 오륙 장 거리를 전진하다가 포복동작을 취했을 때는 땅속
으로 스며든 것처럼 흔적 하나 남기지 않는 것이 영락없는 허깨비
요, 바람결에 흩날리는 유령처럼 쾌속하기 짝이 없었다.
흰 그림자가 마지막 밭두덩으로 뛰어 들어 포복자세를 취했을
때, 그 우측방에서도 회색빛 그림자가 꿈틀 움직였다.
"나예요!..."
흰 그림자가 낮은 목소리로 다급하게 소리쳤다.
허나 그 순간, 회색빛 그림자는 먹이를 노린 표범처럼 상대방을
덮쳐 내리고 있었다. 이 세상에 어떤 생물도 표범보다 더 빠르게
먹이를 덮치는 놈은 없다고 하지만, 그는 표범보다 세 배나 더 빠
르게 덮쳐 갔다. 그러니 목표가 된 토끼가 무슨 수로 배겨낼 수
있으랴? 꼼짝도 못하고 찍어 눌릴밖에... .
만약 흰 그림자가 일순간이라도 늦게 외쳤던들, 그 결과는 목숨
으로 배상할 뻔했다.
목표의 등줄기를 왁살스럽게 가로타고 앉아서 두 다리로 허리를
바짝 조인 채, 회색빛 그림자는 이제 막 그 뒷덜미에 칼끝을 박아
넣으려다가 그 외침을 듣고 소스라쳤다.
"아니, 이런!..."
그는 재빨리 칼끝을 거두고 흰 그림자 곁으로 미끄러져 내렸다.
그리고 눈밭에 몸을 찰싹 붙인 자세로 상대방의 어깨를 뒤채었다.
"이게 무슨 장난이야? 뭣 하러 왔어?"
그는 책망하듯 나지막하게 물었다.
그는 장추산, 두번째로 길상암을 정탐하러 침투하는 중이다. 어
젯밤, 그는 갈씨 부인에게 가짜 도련님 안춘의 행방에 대해서 실
마리를 잡았노라고 얘기했었다. 그러나 더 자세한 설명은 일부러
삼갔다.
말은 않았지만, 실상 그는 엊그제 이틀 동안 강남일지홍의 행방
을 수소문하던 과정에서 광릉원 측 인물 다섯 명을 사로잡아 닥달
한 끝에 귀중한 소식을 적지 않게 얻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정보에 따라서 가능한 상황판단을 세우고 또 행동에 옮길 계획도
은밀히 결정해 놓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안춘에 대해 극도로 호감을 품고 있었다. 호감 정도가 아
니라 참된 애정까지 싹트고 있었다. 스물네 해의 생명을 유지하면
서 천하를 두루 떠돌아 다닌 지 10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의
마음 문을 열고 들어간 이성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허나 지금에
와서 그의 가슴 속에는 안춘의 모습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는 바
야흐로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이 의기투합한 이성의 벗을 받아들
인 것이다.
그는 자신의 계획을 갈씨 부인에게 한마디도 털어 놓지 않았다.
혈혈단신 혼잣몸으로 출몰하면서 일을 처리하는 것이 그의 행동
방침이요, 또 그 원칙을 철두철미하게 지켜 왔다.
그런데 요 꼬마 처녀 갈패옥이 한 발 앞서 이곳에 나타나 기다
리고 있을 줄이야 정말 상상치도 못한 일이었다. 말 한마디는커녕
내색도 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이 침투지점을 정확히 알아 가지고
기다렸는지, 그로서는 정말 도깨비한테 홀린 것보다 더 놀랍고 당
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가 창해 유성 갈씨 문파의 이 왈가닥 처녀에 대해 품고 있는
인상이라곤 기껏해야 짓 고 고집세고 머리통에 아무런 계획도 없
이 저 하고 싶은 대로 아무데서나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는 장난
꾸러기 야성녀에 지나지 않았다.
또 이런 꼬마 처녀는 어릴 적 소꿉장난 동무처럼 머슴애인지 계
집애인지 행색이 애매모호한 기질을 지니고 있는 터라, 그녀에게
서 이성의 감정 같은 것은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그러길래 장
추산은 갈패옥을 어린 여동생쯤으로만 생각하고 대할 따름이었다.
어린 시절, 그의 뒷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닌 소꿉동무는 굉장히
많았다. 그 중에는 사내아이도, 계집아이도 있었다. 사내든 계집
애든, 아무런 차이도 분별도 없이 그저 천진난만하게 어울려 놀기
만 했을 뿐 성별 따위는 깡그리 잊었다.
이 말괄량이 처녀 갈패옥은 바로 그 시절 소꿉동무 가운데 하나
와 똑같았다. 곧잘 어울려 사이좋게 놀다가 심술이 터지면 싸우기
도 하고 말다툼도 악다구니처럼 잘하는 계집애가 있었다. 고집이
얼마나 센지, 한 번 심술을 부리면 동네 어른이 뜯어 말려도 막무
가내였다. 또래 중에 자기보다 나이가 많든 적든, 머슴애든 계집
애든 가리지 않고 싸워 대는 골치덩어리, 정말 어느 쪽이 사내아
이고 계집애인지 모를 만큼 선머슴이나 다를 바 없는 말괄량이 소
녀였다.
그 기억을 떠올리면서 장추산의 얼굴에 희미한 웃음이 번졌다.
지난 세월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물론 모르지 않는다.
허나 갈패옥의 장난기 서린 얼굴을 바라보는 동안 그는 그 따뜻하
고 아름다웠던 동심의 세월 속을 해매고 있었다.
"당신이 왔는데, 나라고 어째 못 오겠어요."
꼬마 처녀는 그에게 싸움이라도 걸듯 사납게 대들었다.
"이봐, 내 생각은.."
"당신 고 마음 속에 무슨 진귀한 보물덩어리가 숨겨져 있는지
내가 모를 줄 알아요? 흥, 어림없죠!"
그녀는 손가락으로 거침없이 그의 가슴팍을 콕콕 찔러 대면서
종알거렸다.
"당신은 객점에서 줄곧 딴청을 부렸지만, 나는 당신이 속으로
무슨 꿍이를 품고 있는지, 또 무슨 생각을 어떻게 바꿨는지 금
방 눈치챘단 말이에요."
"제기랄! 요 아가씨가 내 뱃속에 들어갔다 나오기라도 한 모양
이로군. 이봐, 회충이라도 되는 거야."
"누가 아니랄까 봐! 당신 그 두 여자를 구하러 온 거 맞죠."
"족집게 무당 흉내일랑 그만 내라구. 내가 그 일에서 손을 뗀다
고 말한 적이 없으니까 당연하지!"
그는 피식 웃었다.
"하지만 눈치 빠른 도깨비는 틀림없어."
"똑똑하기도 하구요."
앙큼스런 처녀는 제 가슴을 탁탁 두드려 가며 자신있게 받아 넘
겼다.
"꼬마 도깨비, 내가 이리로 잠입한다는 걸 어찌 알았노."
그는 왈가닥의 머리통에 알밤을 두어 대 먹이면서 탄복했다.
"똑똑한 머리통이로군. 정말 깜찍스런 도깨비 머리통이라니까!"
"그쯤 누가 몰라요? 길상암에는 나도 와 봤지만 이 방향에서 접
근하기가 제일 어렵죠. 침투로에 엄폐물이라곤 하나도 없으니, 가
장 힘들기도 하고 말이죠. 허나 당신은 어려움이라든가 힘든 걸
마다할 사람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당신은 제일 어려운 방향으
로 접근할 테고, 또 이쪽의 경계 감시도 길이 쉬운 쪽보다 허술하
겠죠. 어때요, 내 말이 틀렸나요?"
"요 놈의 도깨비 !"
그는 도깨비 잔등에 철썩 소리가 나도록 한 방 안겼다.
"어머님하고 이모도 오셨나?"
"아뇨, 나 혼자 몰래 빠져 나왔죠."
깜직스런 도깨비가 혀를 낼름거렸다.
"엄마나 이모는 애당초 당신과 아무 상관도 없는 여자들을 뭣하
러 구해 주느냐고 반대하시는 입장이에요. 하지만 나는...."
"그래 아가씨 생각은 어때? 역시 반대인가?"
"나는... 아이, 말 안할래요!"
웬일인지, 이 고집통의 도깨비가 발뺌을 다 한다.
"그놈들이 아무 까닭도 없이 간계를 부려서 날 함정에 빠뜨렸으
니까, 나한테도 그 주모자를 찾아 가서 앙갚음할 떳떳한 사유가
있지 않겠어요?"
"아냐, 너무 위험해, 어서 속히 여길 떠나라구!"
그는 정색을 하고 타일렀다.
"당신은 위협하지 않은가요, 뭐 ! 당신 나보다 무공실력이 얼마
나 더 강하다고 생각해요?"
도깨비 목소리가 두 배는 높아지면서 앙탈을 부리기 시작했다.
"날더러 이 판에서 물러나라구? 홍! 우리 여기서 먼저 한바탕
싸워 봐요! 그래서 누가 떠나고 누가 쳐들어갈 사람인지 결판내자
구요!"
그녀는 엉금엉금 기어 일어나더니, 진짜 한판 붙어 볼 기세로
앙증맞은 주먹을 쓰다듬는다. 허나 금방 솥뚜껑 같은 손아귀에 덥
석 붙잡히고 말았다.
"알았어, 좋아! 마음대로 하라구. 그럼 됐나?"
그는 진저리를 치는 시늉을 하면서 양보하고 말았다. 속으로는
우스워서 죽을 노릇이다. 요놈의 말괄량이 아가씨, 성미가 정말
불벼락이로군!
"갈씨 가문의 현천신강(玄天神 )은 무림계에서도 알아 주는 연
기내공(鍊氣內功)이라지? 이그, 난 무서워!"
"방금 뭐랬죠? 날 데려 간다고 승낙한 거죠."
"승낙한다고는 안 했어..."
"당신 생각이 바로 승낙이죠! 안 그래요?"
한 발짝도 물러나는 법없이 딱딱 못박아 다짐을 둔다.
"남한테 뒤집어 씌우기도 명수로군!"
"뭐라 해도 난 상관없어요. 당신만 따라 가면 되니까! 안 데려
가면..."
"안 데려 가면 어쩔 텐가?"
"당장 일어나서 큰소리로 고함칠 거예요. 도둑이야l 자객이다!
하고..."
"맙소사! 이런 악다구니를 봤나? 그 목소리 좀 낮추지 못하겠
어?"
그는 골치가 지끈거려 절레절레 도리질을 했다. 어릴 적 소꿉동
무라도 이런 개구쟁이는 처음 봤다.
"그럼 승낙한 거죠? 아니네요."
그녀는 너무나 좋아서 눈바닥에 데굴데굴 구르고 싶을 정도다.
"추산 오빠, 난 당신이 날 데려 가서 세상 물정 좀 보여 주실
줄 다 알고 있었단 말이에요. 고맙습니다."
앞서는 당신이라고 부르더니, 이제는 아예 '추산 오빠'라고 부
른다. 한데 그렇게 부르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고 천연덕스러운
데다 천진난만하게까지 들리니 이상한 노릇이다. 그는 곤혹스러움
이나 꺼림칙한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철부지 적부터
줄곧 함께 놀아온 동무나 어린 누이동생을 대하듯 자연스러운 생
각이 들 정도였다.
"으음, 그건..."
"말했죠? 당신 승낙한 거예요! 추산 오빠, 어때요 괜찮죠."
도깨비는 인정사정 없이 파고 들었다.
"나도 벌써 고맙단 인사를 드렸으니까, 딴소리 하면 안 돼요!"
"알았어, 알았다구! 요... 요 개구쟁이, 생떼만 쓰는군!"
그는 씁쓰레하니 웃었다.
"그 대신 분명하게 다짐을 받아야겠어. 지금부터 일체 내 말대
로 행동할 것, 함부로 나서도 안 되고, 또 화난다고 마구 날뛰어
도 안 되고, 또..."
"대체 그놈의 또 자는 몇 개나 남은 거예요? 지겹지도 않아요?"
왈가닥 처녀는 배시시 웃어 가며 그에게 살짝 몸을 기대었다.
"내 언제 말을 안 듣겠다고 그랬어요? 주산 오빠는 나보다 경험
도 풍부하시고 아는 것도 많으니까, 분부 말씀을 당연히 따라야
죠. 자, 그럼 출발하기로 할깝쇼."
"좋아, 가자구!"
그는 절레절레 고개짓을 내두르면서 도깨비의 볼을 꼬집었다.
손가락 끝에 닿는 것은 보숭보숭하고도 차가운 감촉이었다.
"내가 앞서 갈 테니, 내 신형이 사라진 다음에 잠시 기다렸다가
뒤따르도록 해요. 무슨 이상이 있나 없나 충분히 살펴보는 건 물
론 이고!"
"좋아요, 당신이 대장이고 난 졸병이니까!"
그녀는 소리 안 나게 키득거렸다.
장추산은 먼저 부근의 상황을 잠시 둘러보는 듯하더니, 급작스
레 전광석화처럼 움직였다. 그야말로 유성이 꼬리를 이끌고 떨어
지듯 눈 깜짝할 사이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길상암은 신분이 특수한, 그리고 상궤(常軌)를 벗어난 성격의
소유자만이 드나드는 매음굴이다. 또 그런 단골손님을 받아 들여
야만 그것을 운영하는 주인의 본뜻과 목적에도 부합될 뿐더러, 정
상적인 도덕성을 지닌 다른 사람의 주목을 끌지 않을 수 있는 것
이다. 평범한 활동으로 특별한 목적과 목표를 엄호할 수 있고, 또
합법으로 불법을 엄호하는 것이 가장 안전한 수단이다.
비구니 암자에 설치된 매음굴에 드나드는 부류는 모두가 사회
각 계층에서 그렁저렁 뒤섞여 사는 특수한 인사들이다. 이런 부류
로 말하자면 큰일을 맡겨도 해낼 재주가 없고 가능하면 큰일을 건
드리지도 않으려니와 작은 일을 소신껏 처리할 배짱도 없다. 큰일
을 해내지 못하는 위인이라면 하다 못해 말단 관리조차도 이런 부
류의 신상에서 무슨 실마리를 찾아 볼 헛수고도 하지 않게 마련이
다. 그렇기 때문에 길상암은 남에게 주목을 처음부터 끝까지 받아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외부 사람은 전혀 모르지만, 선방(禪房) 깊숙한 곳에는 또 다른
밀폐식 건물 한 채가 은밀히 감추어져 있다. 그 위치는 일반 손님
이 드나드는 매음굴에서 북쪽으로 치우쳐서 암문 두 개를 통해야
만 드나들 수 있는데, 바깥쪽으로는 부근의 광릉원과 지하통로가
맞뚫려 있기도 하다.
매음굴은 별실과 복도 화원 뜨락이 벌집처럼 얽혔는데다 내부시
설도 복잡하기 짝이 없고 비밀 통로가 동서남북 가로세로 거미줄
같이 깔려서 외부인이 그 안에 들어서면 방향을 잡기가 힘들 정도
다. 그래서 단골손님조차도 자신이 어느 곳에 들어 앉았는지 캄캄
절벽이다. 그러니 또 다른 신비스런 밀실이 또 있다는 사실을 알
아차릴 길이 없다.
손님들은 이 밀실에서 자기네들의 모든 상황을 손바닥 들여다보
듯 낱낱이 파악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모른다.
밀실 조종자는 아무 때나 사람을 보내 두 개의 암문을 통해서
매음굴 어느 객실 출입 통로를 봉쇄할 수도 있고, 여기저기 은밀
하게 뚫어 놓은 감시 구멍을 통해 중요한 곳을 염탐할 수도 있다.
매일 밤, 이곳에 환락을 찾아오는 손님은 그리 많지 않다.
주인 쪽에서도 손님이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자칫하면 통제
기능을 잃어버릴 수도 있고, 또 몇몇 중요한 손님에게서 필요한
정보를 얻어 내기만 하면 목적이 달성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곳
을 찾는 사람은 대개 단골손님이고 또 그렇기 때문에 통제도 한결
쉬워지는 것이다.
오늘밤도 예외는 아니어서 이삼십 명의 단골손님이 염굴(艶窟)
에서 점철되는 봄기운을 만끽하고 있었다. 내부는 주지육림으로
질탕한데, 바깥은 천지가 팡팡 얼어 붙은 엄동설한이다.
단골의 객실이야 그렇다 치고, 밀실에도 별유동천(別有洞天),
세외의 황홀경이 무르익어 가고 있다.
널찍한 대청은 당상 당하로 나뉘었는데, 당상에는 다리 짧은 호
상(胡床)을 반원형으로 늘어 놓은 휴식처와 관람석이 마련되었고,
당하에는 붉은 주칠(朱漆)을 입힌 반질반질한 무도장이 차려졌다.
또 한곁에는 악공과 가희(歌姬)들의 자리가 배정되었다.
당상의 관람석과 당하 무도장, 악공 가희 좌석 사이에는 모두
구름 무늬의 비단 휘장을 둘러쳤고, 매미 날개처럼 앓은 명주 장
막이 관람석을 가리웠는가 하면, 한 군데씩 주렴(珠簾)을 늘어뜨
려 서로 드나드는 출입문으로 삼았다.
노골적인 구경보다 반투명 장막을 통해 은은히 내다보는 맛이
별다른 흥취를 자아내고, 신비스러움과 춘정을 한꺼번에 돋우어
주기도 한다.
대들보에는 화려하게 꾸민 궁중용 장식등을 아홉 줄 나란히 늘
어 놓아 밀실의 분위기를 한껏 밝혀 주고, 여기에 또 특제품 주마
등(走馬燈)을 다섯 개 가설했는데, 마필의 도형 장식 대신 여인의
나체를 그려 놓은 것이 달랐다. 사면 벽에는 다섯 가지 색채 그림
이 배경으로 칠해져서, 주마등이 빙글빙글 돌아갈 때마다 오색 광
채를 반사하여 진짜 신선들의 선궁(璇宮)을 연출하고 있었다.
난방시설도 놀랄 만한 것이, 스무 개나 되는 밀폐식 화로를 네
귀퉁이에 골고루 배치해서 홑옷만 입고서도 한여름 삼복더위를 느
낄 정도요, 바지 저고리를 몽땅 벗어 던지고 알몸뚱이가 되지 않
고서는 오래 견디지 못할 지경이었다.
휴식처와 관람석에는 똑같은 모양의 길다란 식탁이 가지런히 놓
였고, 술과 요리, 겨울철인데도 신선한 남방 과일이며 과자 접시
가 그 위에 푸짐하게 널려 있었다. 한마디로 밀실의 호화스러움이
나 사치는 일국의 황실 인척도 감히 누려 보지 못할 정도로 극진
하기 이를 데 없었다.
물론 이런 시설이나 사치는 국법의 정도를 넘는 것이었다. 하지
만 이들은 어쩌다 실수해서 관에 적발되더라도 대수롭지 않게 넘
겨졌다. 풍류장이라면 어디나 호화사치하게 마련일 터, 설사 국법
에 저촉된다 하더라도 그 죄는 별로 무겁지 않거니와 또 관헌들이
란 대개 뇌물에 약해서 눈감아 주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허나 어느 지방의 향신 달관(鄕紳達官)이나 평민이 이런 시설을
했다가 적발되는 날이면 문제는 다르다. 게다가 또 악을 원수처럼
미워하고 토호세력의 억제를 자기 본분으로 여기는 지방관에게 걸
려 들었다 하는 날에는 그 집 주인은 패가망신하기 십상이요, 온
가족 남녀노소가 모조리 형장으로 끌려나가 삼문이 멸족당하는 신
세가 되게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광릉원으로 통하는 지하도에
는 교묘한 기관장치가 설치되어 필요한 때는 언제든지 봉쇄할 수
도 있고, 최악의 경우 파괴할 때에도 지하통로가 뚫려 있었다는
흔적을 남기지 않을 정도로 치밀한 준비가 되어 있어서 만약의 사
태가 광릉원에까지 파급되는 일은 절대로 없다.
시각도 벌써 2경이 거의 다 지날 무렵, 교외엔 인적 끊긴 지 오
래다.
당상의 관람석은 모두 삼십여 자리, 보드라운 융단으로 푹신하
게 덮은 장의자(長椅子)마다 매미 날개처럼 앓은 비단 한 겹만 걸
친 알몸뚱이 처녀들이 눕거나 앉아서 과자를 씹으면서 무도장에
한창 벌어지고 있는 춤과 연극을 내다보고 있다. 무슨 장면이 그
리보기 좋은지, 이따금씩 호들갑스레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중앙 좌석에는 얼굴 모습이 맹수처럼 사납게 생긴 다섯 중년인
이 회색 도포 한 겹만 입고 앉아 있었다. 변발 댕기를 목덜미에
빙 둘러감고 버텨 앉은 몸집이 한결같이 우람하고 건장한데다. 얼
굴에서 배어 나오는 강인한 표정과 매서운 눈매는 아무도 감히 거
슬러보지 못할 광망이 번뜩였다.
다섯 중년인 곁에는 나체의 여인이 하나씩 꿇어 앉아 시중을 들
고 있었다.
가무(歌舞)가 한창 무르익는 대목이어서 그런지 중년인들의 눈
길은 온통 노래꾼과 무희들에게 쏠려 있을 뿐, 곁의 여인을 손길
닿는 대로 떡 주무르듯 희롱할 기미는 아직껏 보이지 않는다.
오른쪽 상석에는 열두 명의 처녀들이 넋 빠진 기색으로 늘어 앉
아 있다. 이들 역시 알몸을 다 가리지도 못할 잠자리 날개옷을 걸
쳤는데, 무슨 수심이 그리도 많은지 눈앞에 벌어지는 연극을 보는
눈치도 아니고, 상다리가 휘도록 차려진 음식에 손가락도 대지 않
은 채 망연자실 앉아 있기만 했다.
그 중 한 사람이 바로 안춘 소저였다. 건강하고도 아리따운 몸
매, 홈이라곤 한 점도 찾아볼 수 없는 완숙미를 갖춘 그녀의 몸뚱
이는 벌써 오래 전부터 다섯 중년인의 주목을 골고 있었다. 그러
나 봉황의 그것처럼 부리부리한 그녀의 눈망울에서는 원한이 가득
맺힌 독살스런 불길이 활활 용솟음쳐 나오면서 이따금씩 자신의
몸매를 핥는 다섯 중년인 눈초리를 맞바로 흘겨보고 있었다.
열두 미녀의 한 곁에는 쪽진 머리타래가 희끄무레하니 쉰 중년
의 여도사가 옥색 도포 차림을 하고 앉았는데, 등뒤에 시립한 두
명의 비구니들은 속살이 비치도록 앓은 먹물빛 비단 장삼을 걸치
고 서서 또렷또렷한 눈망울로 무도장을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었
다.
악공들 역시 모두 아리따운 아가씨였다. 이들은 밀실의 음탕스
런 분위기와는 달리 옷차림도 가지런하고 말쑥한데다 머리타래는
궁녀식으로 틀어 올렸고, 옥색 저고리 검정 치마에 황금 노리개와
옥장식으로 화려하게 꾸였다. 악기는 현(絃)이 위주요, 금관이나
목관 악기는 보조로 쓰이는데, 궁(宮) 상(商) 각(角) 치( ) 우
(羽) 다섯 기본음에 반음 셋이 어우러져 조화를 이룬 선악(仙樂)
이 뭇사람들의 마음을 듬뿍 취하게 만들고 있었다.
가희들은 모두 열두 명, 한결같은 절색 미녀들이 저마다 목청을
돋우어 이중창을 뽑내는데, 구성지게 흘러 나오는 노랫가락은 백
낙천(白樂天)의 장한가(長恨歌) 후반부였다.
금궐 서상에서 옥경을 두드리니, 소옥을 시켜 쌍성에게 아뢰노
라...
(金闕西廂叩玉磬 轉敎小玉報雙成...)
무도장에는 주인공 태진선녀(太眞仙女)로 분장한 반라의 무희가
옥탑(玉榻)에 비스듬히 모로 누웠는데, 옥색 홑적삼 한 벌만 걸친
뱃거리가 흐느적거릴 때마다 춘정이 철철 흘러 넘쳤다.
구소옥(句小玉)과 동쌍성(童雙成)으로 분장한 무희는 진짜 선녀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절세 가인이요, 태진선녀 못지 않는 반라
의 몸매가 투명한 비단 옷자락 사이로 슬쩍슬쩍 드러나면서 뭇 사
내의 가슴을 설레이게 만들었다.
임공도사(臨 道士)로 분장한 중년 사내는 선풍도골(仙風道骨)이
완연한데, 춤추고 노래하는 인물 증에 그만이 유일한 남자다.
한나라 천자님께 가르침을 내리노니
구화의 장막 속에 놀란 꿈이요.
베갯머리 밀어 내고 일어나서 옷자락 끌며 배회하니
주렴 은박이 영롱하게 열리고,
구름타래 머리 절반쯤 빗끼고 새잠 들려니
다듬지 못한 화관이 당하에 떨어지네...
(耳道漢家天子使 九華帳裏夢魂驚
攬衣推枕起徘徊 珠箔銀屛拖 開
雲髮半偏新睡覺 花冠不整不堂來...)
노랫가락이 이에 다다르자, 태진선녀는 기쁨에 놀란 듯 베개를
밀치고 발딱 일어나서 덩실덩실 춤을 추기 시작한다. 처량한 노랫
가락 가운데 숨 막히도록 요염한 미태를 보이는데, 손짓 발짓 한
번 옮겨 딛고 놀릴 때마다 연인으로부터 문안을 전해 듣고 기뻐하
는 표정이며, 놀라면서도 원망과 슬픔 섞인 찹잡한 기색으로 머뭇
거리는 몸짓이 실로 천연덕스럽기 이를 데 없다.
태진선녀의 옷자락이 날렵하게 돌아가는 바람결에 장막과 휘장
이 펄럭펄럭 휘날리는 것은 어디 으슥한 구석에서 다른 사람이 조
종하고 있음에 분명하지만, 그 광경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겐 자신
이 봉래궁(蓬萊宮) 비단 숲 속에 휘감겨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
도였다. 노랫가락은 쉬지 않고 울려퍼졌다.
바람결에 선녀님 옷가락 흩날려 들춰지니
예상우의 춤이런가,
옥같은 얼굴 쓸쓸히 난간에 기대어 눈물 흘리노니,
한 가닥 배 꽃에 봄비 내리듯...
(風吹仙袂飄飄擧 猶似霓裳羽衣舞
玉容寂寞淚欄干 梨花一枝春帶雨...)
춤추기야 어려운 일도 아니고, 마음이 기했고 흥에 겨워야만 일
어나서 춤추게 마련이다. 그러나 태진선녀로 분장한 무희는 연인
과 생사를 모른 채 여러 해 동안 이별한 슬픔을 나타내기 위해서
눈물을 머금고 춤을 추어야 하는데, 이는 정말 무공으로 치자면
노화순청(爐火純靑)의 지경에 이르는 수양과 단련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이 아리따운 무희는 정말 그 수준이 화후에 이르러 상
석에 자리 잡은 중년의 다섯 귀빈을 완전히 매료시켜 술취한 듯
넋을 빼놓고, 장탄식이 저절로 나오게 만들고 있었다.
정을 머금은 눈길로 사군왕을 바라보노니,
이별은 한 번인데 소식과 모습은 아득하고녀!...
(含情凝 謝君王 一別音容兩渺茫...)
이때였다.
"그만 됐다. 멈춰라!"
상석에서 눈이 툭 불거져나온 중년인이 갑자기 고함을 치면서
손바닥을 세 번 쳤다.
홍도객(鴻都客)으로 분장한 도사가 깜짝 놀라 궁둥이를 들썩이
고, 태진선녀도 팔다리를 벌린 채 뻣뻣이 굳어졌다.
"총관, 왜 그러십니까."
머리 희끄무레한 여도사가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그러나 중년
인에게 향한 눈초리는 냉막하고 무뚝뚝한 것이, 감정이라곤 손톱
만큼도 찾아볼 길 없었다.
"나는 죽을 둥 살 둥 안타까운 대목은 김 빠져서 못 보겠소."
총관이란 작자는 얼굴에 심통이 뻗쳐서 한마디로 차갑게 대꾸했
다. 보나마나 비극을 싫어하는 속물임에 틀림없다.
"구진도고(九眞道姑),이 춤판은 정말 멋지게 짜셨구려. 이번에
데려온 미녀들도 성공적으로 훈련시켜야 할 텐데, 다른 재간은 얼
마나 가르칠 수 있을지 모르겠소. 채음보양술(採陰補陽術)이라든
가 하는 것 말이오."
"총관께서 이미 훈련시킨 아이들을 데리고 직접 시험해 보시지
요."
"나도 그럴 생각이야. 하하하!"
총관은 손가락으로 안춘 소저가 있는 쪽 열두 명을 가리키면서
흐뭇한 웃음을 터뜨렸다.
"저 아이들을 단시일 안에 잘 훈련시켜야 하오. 나는 가능한 한
빨리 연락 책임자로 내보내고 싫으니까. 아시겠소?"
"빈도, 최선을 다해 가르치겠습니다."
"그럼 됐소. 만약 감당할 재질이 없는 아이는 단심주(丹心酒)를
한 잔씩 먹여 가지고 여의노니에게 넘겨서 적당한 데 쓸 수 있도
록 하시오."
"분부대로 하오리다."
"너, 이리 좀 오려무나."
총관은 태진선녀로 분장한 무희를 손짓해 불렀다.
"하하하! 다른 재간이 얼마나 좋은지 내가 시험해 봐야겠구나."
그는 안춘 소저 쪽을 흘끗 바라보면서 징그러운 웃음기를 질질
흘렸다.
"그래야 다른 동생들도 배워서 견식을 넓히지 않겠니?"
"예예!..."
무희는 한마디로 응답했다. 부슬비 맞아 떠는 배꽃처럼 슬프던
얼굴 표정이 삽시간에 활짝 피더니, 봄꽃보다 더 화사한 미소가
어리고, 요염한 미태가 찰찰 흘러 넘친다. 그녀는 머리 위 거추장
스런 화관은 냉큼 벗어 던지고 타래머리를 구름처럼 풀어 내린 다
음, 얇은 옥우예상(玉羽霓裳)을 팔랑팔랑 흩날리면서 가냘픈 탯거
리로 총관을 향해 돌아섰다. 단 한 번 살포시 돌아서는 동작에 옷
자락이 나비처럼 훨훨 날아 마루바닥에 떨어지고, 허리까지 늘어
뜨린 검은 머리가 장막으로 변해 알몸뚱이를 가리는데, 주마등 오
색 광채가 돌아가는 불빛 아래 머리카락이 등뒤로 다시 돌아가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눈이 아찔하도록 아리따운 몸매가 드
러났다.
이쯤 되면 사내들의 넋은 하늘 바깥 구만리 장천으로 훨훨 날아
가거나 격탕을 이기지 못하고 지옥 속으로 쿵 떨어지게 마련이다.
그녀는 절묘한 걸음걸이로 주렴을 슬쩍 들추더니 총관 앞으로
춤을 추어 가며 다가서기 시작했다.
구소옥과 동쌍성으로 분장했던 무희들도 사뿐사뿐 춤을 추면서
맵씨 좋은 손길로 어깨에 걸친 옷매듭을 풀고 스르르 흘러 내렸
다.
상석에 앉아 구경하던 나머지 중년인 네 사람은 무희들이 다가
올 때까지 참을 수가 없는지, 곁에 시중들고 있던 나체의 미녀를
끌어당겨 왁살스럽게 품어 안더니, 손길이 위에서 허리로, 그리고
쉬지 않고 더듬어가며 다시 아래 쪽으로 미끄러져 내리기 시작했
다.
"으흐흐흐!..."
"으하하하! 이걸..."
음탕한 웃음소리가 노랫가락을 대신해서 숨가쁘게 대청 안에 쩌
렁쩌렁 울려 퍼졌다.
첫댓글 즐감했습니다.
즐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