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이야기-수필가 이규철의 세계, 가을 나들이
윤회하는 계절같이 정확한 건 없다. 유난히도 뜨겁게 달구던 여름철이 언제인 듯 계절은 가을로 접어들어 마냥 짙어만 간다. 높푸른 하늘이 시원스럽고 먼 산엔 단풍이 곱게 물들어 수려한 운치로 번지면서, 마냥 유혹의 손짓으로 추심(秋心)을 일깨워 흔든다.
창가에서 밖을 조망하니 이곳 아파트단지 내 녹지공간의 짙푸르던 나무 이파리들도 어느덧 울긋불긋한 단풍으로 물들어 만추(晩秋)로 달리는 계절 감각이 짙게 내 마음을 사로잡으며 바깥나들이로 들뜨게 하는 늦가을에 섰다.
몇 일째 서재 언저리에서 뒤뚱거리며 바깥 유혹을 잊으려고 서가에서 뽑아든 일본 여류작가 소설 빙점(氷点)으로 유명세가 붙은 북해도(北海道) 출신의 미우라 아야코(三浦 綾子)의 소설 ‘살아있는 목마’ 재탕으로 탐독하며, 무료함을 달래고 있던 해질녘에, 전화벨 소리가 내 귓전을 울렸다. 수화기를 들어 올리자 낯익은 둔탁한 목소리가 “선배님이세요! 저 H입니다. 내일 시간 어떠세요?” “글쎄 별론데...!” “그런 됐습니다. 내일 10시까지 차로 모시러 가겠습니다. 자유로를 거쳐 일사에 들려, 귀순자 김용씨의 냉면집에서 냉면을 들고 호수공원을 거닐다 오시지요!” “좋도록 합시다.” 나는 뜻밖의 내 처소 지척에 살고 있는 H씨의 가을 나들이 권유에 귀가 번쩍 띄었다.
얼마 전 TV를 보아하니 귀순자 김용씨가 일산 호수공원 언저리에서 ‘모란각’이란 음식점을 열어 냉면과 순대 등 북한식 고향 맛으로 성업 중인데, 많은 이산가족들이 그곳을 찾아 고향의 맛을 즐기며 향수를 달랜다는 소식을 접한바 있어 나도 한 번쯤 찾아볼 생각이었다.
내가 유난히도 냉면을 즐긴다는 사실을 잘 아는 H씨가 모처럼의 나들이 길을 일산으로 정한 것은 참으로 다행스런 선택이라 생각되었다.
일산으로 달리는 길가엔 솔바람에 춤추는 억새풀이며, 논두렁 밭두렁엔 황금의 물결이 넘실대는 풍요로운 가을 들판을 조망하는 기분은 상쾌하기 그지없었다. 능곡과 원당을 지나 일산 신도시 어귀에 이르니, 길가의 꽃가게 앞에 흐드러지게 핀 노오란 국화 화분들이 가을 정취를 한껏 돋보이게 하며 가을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돌아오는 길에 저 탐스런 국화 화분 하나를 가져오리라 생각했다.
정발산 언저리를 지나니 바로 일산 호수공원이 지척에 있었다. 우린 길가에 잠시 차를 세우고 지나는 노인에게 ‘모란각’으로 가는 길을 물었다. 노인은 H씨에게 소상하게 약도까지 그려주는 친절을 베풀었다.
호수공원 뒤편을 서행으로 돌아드니 아담한 5층 건물 지척에 ‘모란각’이란 입간판이 서있었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모란각’ 문 앞을 바라보니 ‘영업은 12시부터’라는 안내문이 나붙어 있었다. 가게 안에선 한참 손님맞이 준비를 서둘 듯 종업원들의 부산하고 바쁜 움직임을 엿볼 수 있었다. 12시까진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우린 호수공원에 들려 산책으로 시간을 때우기로 했다.
드넓은 공원엔 중앙에 호수가 자리하고 널따란 잔디밭 곳곳에 정각이며 놀이동산을 짜임새 있게 조성해 놓았고, 잔디밭 사이사이엔 아름다운 꽃들이 산책길을 눈부시게 했다. 호숫가엔 물고기가 노닐고 쟁반 같은 초록색 이파리 사이로 보랏빛 수련(水蓮)꽃이 수줍은 꽃망울을 터뜨려 물위에 두둥실 떠있었다.
나는 실로 오랜만에 보는 희귀한 수련에 매료되어 호숫가 바윗돌에 걸터앉아 한참 동안이나 자리를 뜨지 못하다가, 그 수련을 카메라에 담고서야 자리를 뜨면서 몇 번이고 뒤돌아보곤 했다.
‘모란각’ 문을 밀치고 들어서니 널따란 시강 안엔 어느새 빈자리가 없이 손님들이 들어차 있음을 보고, 과연 듣던 대로 소문난 냉면집이라 생각하며 빈자리를 살피는데, 종업원 아가씨가 마침내 식사를 마치고 비운 자리로 우리를 안내하고 주문을 받았다.
벽에 걸린 주문 판을 보니 냉면, 순대, 만두 외 몇 가지가 더 있었는데, 우린 냉면 위주로 순대와 만두를 곁들여 먹었다. 냉면을 유난히 즐기는 나는 지난날 나의 고향이던 북녘의 관북지방의 원조 함흥냉면이나, 또한 평양 수학시절엔 관서지방을 대표하는 평양냉면도 즐겨먹던 나의 단골 메뉴였다.
그래서 나는 냉면 맛엔 일가견을 지닌다고 자부할 정도로 냉면과 익숙해 있다. 순 녹말을 재료로 하는 함흥냉면은 아주 질기고 담백한 맛으로 사시사철 즐겨 먹게 되고, 메밀에 녹말을 약간 섞은 재료로 만드는 평양냉면은 부드럽고도 쫄깃하며 시원한 맛으로 역시나 사시사철 먹는 북녘에 관북 관서지방의 각각 토속적 특색을 지닌 냉면이다. 이 냉면이 북녘에서 이산가족들과 함께 남쪽으로 내려와 오늘의 별미음식으로, 전국적으로 보편화된 음식의 한 장르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서울의 대표적 함흥냉면은 중구 오장동 냉면집을 들 수 있고, 평양냉면은 을지로 언저리에 있는 ‘우래옥’이라 할 수 있다. 나는 이 두 냉면집을 번갈아 자주 들리며 냉면을 즐겨 먹는 편이다.
그런데 나이 탓이랄까 식성이 변한 탓인지 모르겠으나 역시나 북녘의 고향에서 먹어본 원조 냉면 맛을 진솔하게 느껴보지 못했다는 게 나의 솔직한 독백이다. 역시나 일산의 ‘모란각’의 냉면도 고향 맛이라곤 하나, 호수공원을 낀 좋은 자리에 있고, 또한 업주가 널리 알려진 귀순자이고 보면, 많은 이산가족들이 이심전심으로 향수를 달래고저 많이 찾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자유로를 타고 바람을 가르며 서울로 돌아오는 길은 실로 상쾌하기 그지없었다. 달리는 속도감이 일상에 찌든 권태감과 시름 같은 것을 밀어내고, 천근 무거운 짐을 벗어 던지듯 한 기분에 사로잡히게 됐다.
임진강 강심에서 떼 지어 노니는 백로의 하아얀 나래짓도 정겨웠고, 먼발치에 펼쳐진 가을 들녘의 목가적 풍경이며, 드높은 파아란 하늘과 따사롭고 맑은 햇살이 눈부셨다. “아! 가을이야 말로 계절의 압권이로다!” 절로 탄성이 내 맘속에서 새어 나왔다.
내 처소로 무사히 돌아온 나는 오늘의 가을 나들이를 주선한 H후배에게 새삼 고마움을 느끼면서도 아쉬웠던 것은, 가을 경치에 넋을 놓은 탓으로 일산 신도시 어귀의 꽃가게에서 사오려던 탐스럽게 핀 노오란 국화꽃을 못 사온 것이다. 그 그윽한 국향(菊香)의 연민을 오래 가슴에 담고, 깊어가는 이 가을을 건강하고 보람차게 보내야겠다는 마음을 새삼 다져보는 가을 나들이였다.//
위의 글은 장인어른께서 사시던 지역인 양천구에서 발행하는 문예지인 ‘양천문예’ 1997년 제 8호에 ‘가을 나들이’라는 제목으로 기고하신 한 편 수필의 그 전문이다.
전문을 가감 없이 그대로 옮겨 적은 것은, 이 글이 장인어른의 생전 글로써는 마지막이어서,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낙엽 따라 가듯 세상을 뜨셨다.
이 글을 읽으며, 나는 또 한 번 두 눈시울을 뜨겁게 적셔야 했다.
그렇게 좋아하시는 냉면이었음에도, 장인어른 살아생전에 마음 편하게 제대로 챙겨드리지 못했던, 내 막심한 불효가 너무나 후회스러워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