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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도회(小刀會)
남쪽으로 2리 밖 강기슭의 초막, 장추산은 어두운 초막 안에서
묵묵히 운기행공하여 내상을 치료하고 있다.
체내의 이물질과 독물을 몰아낼 수 있는 수련경지에 도달하려면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사람이라 하더라도 1갑자의 세월, 60년 동
안 고심참담 연마해야 가능하다. 그런데 그는 20여 세의 젊은 나
이로 어엿이 그 불가능한 경지까지 단련한 것이다.
이 초막은 원래 시골 농부들이 천렵을 나와 휴식하는 장소로 쓰
이던 것을, 그가 양주와 진강 일대에서 공작하는 동안 임시로 쓰
기 위해 헐값으로 빌려 둔 거점 가운데 하나다. 갈대로 울타리 벽
을 치고 지붕을 얹은 엉성한 초막이라 고작 비바람이나 겨우 가려
줄 뿐이지만, 3리 안팎에는 민가도 없기 때문에 사뭇 외따르고 호
젓하다.
갈씨 부인 모녀 네 사람은 사방에 나누어 맡아서 경계를 돌고
있다. 그가 상처를 치료하는 동안 호법(護法)을 서 주는 것이다.
경계를 돌면서도 이들은 줄곧 그가 과연 운기행공으로 독룡장의
여독을 몰아낼 수 있는지 의심을 품고 있었다. 더구나 꼬마 아가
씨는 속이 타고 안달이 나서 엄마 이모의 눈을 속이고 풀 방구리
에 쥐 드나들 듯 때없이 초막 안으로 기어들어가 기웃거리곤 했
다.
"엄마, 저 사람한테 진기로 한 팔 힘 좀 보태 드리면 안 돼?"
어느 새 그녀는 또 엄마 곁에 나타났다.
"아주... 아주 힘든 모양이에요.... 진기가 위로 치밀지 못하는
것이 중루(重樓) 현상이 나타나는 것 같아. 식은땀도 부쩍 흘리
고...."
"얘야, 마음쓰지 말아라. 괜히 혼란이나 일으키기 쉬우니까. 네
가 재간을 부린답시고 섣불리 거들었다가는 오히려 일을 망치기나
십상이야."
갈씨 부인은 딸의 어깨를 툭툭 쳐주면서 안심시켰다.
"저 사람은 자신 없는 일에 절대로 목숨까지 걸어가며 모험은
하지 않을 사람이란다. 선천진기로 내상을 치료하는 것은 별로 어
려운 일이 아니지. 허나 몸 안의 이물질을 몰아내는 일만큼은 목
숨이 왔다갔다 하는 큰 모험이야. 털끝만치라도 착오가 생겼다가
는, 죽지는 않더라도 불구자나 폐인이 되고 말 게다. 이물질이 경
맥을 막아 버릴 수도 있고, 또 못 쓰게 망쳐 놓을 수도 있으니까,
그때 가서는 네 아버님조차도 손을 못 쓰실 거야. 아니, 네 아버
님은 운기행공으로 체내의 독이나 이물질을 몰아낼 경지에도 이르
지 못하셨지."
"어마, 진짜 반신불수가 되면 어떻게 해?..."
"내가 보기엔 저 사람은 반드시 성공할 자신이 있는 모양이다.
다른 사람이 도와 준답시고 끼어들거나 손을 댔다가는 커녕 실패
하도록 도와 주기나 십상이야. 그러니 마음 가라앉히고 허튼 생각
일랑 말려무나."
"엄마, 앞으로... 얼마 쯤 더 기다려야 할까?"
"그걸 누가 알겠니? 어쩌면 저 사람 자신도 가늠을 못하고 있을
게다. 얘야, 너무 관심을 쏟으면 도리어 오해가 생길지도 모르겠
구나."
"저는 관심을 가져야겠어요! 정말 저 사람한테...."
"나도 다 안다. 하지만 너는 아직 어려요, 서두를 나이가 아니
야."
"엄마, 전 어쩌면...."
꼬마 아가씨는 한두 마디 말 가지고는 제 속마음을 전하기 어려
운 듯 갑자기 말을 더듬었다.
"어찌 됐든... 저는... 저 사람을 아주... 좋아해요..."
"은혜를 입었다고? 그 보답으로."
"그런 뜻이... 전 그런 뜻이 아니에요."
"됐다. 됐어. 이 어미가 한 마디만 깨우쳐 주마. 사람의 감정이
란 것은 억지로 되는 일이 아니란다. 너도 마음속에 단단히 준비
해둬야겠다. 감정을 거둬들이게 되었을 때, 자칫하면 쓴맛을 보게
되니까 말이다."
갈씨 부인은 의미 심장한 충고를 했다.
"그 말씀이... 무슨 뜻인가요?"
"저 사람은 기껏해야 너를 장난꾸러기 어린 누이동생으로밖에
여기지 않는다. 너는 워낙 나이가 적으니까."
"그럼..."
"생각해 보렴. 저 사람은 양주에서 거추장스러운 것 하나없이
훌쩍 떠나 버리지 않았니? 그것은 너를 어린 누이동생으로 보았기
때문이야. 저 사람은 마음속에 부담되는 것도, 걱정스러운 것
도, 또 미련을 둘 만한 아무 것도 없었단 말이다. 이래도 모르겠
느냐?"
"저는 지금 한창 자라고 있잖아요? 이제 곧...."
"뻔뻔스러운 것, 부끄러운 줄이나 알아라!"
갈씨 부인은 웃어가며 꾸짖었다.
"아무래도 이 어미가 단단히 교육 좀 시켜야겠구나. 어쩌자고
두 번 세 번씩이나 몰래 빠져나가서 닥치는 대로 분란을 일으키는
거냐? 요 사고뭉치야! 이 어미 눈에는 꼭 미친 년 날 뛰듯 하니
이걸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다."
"어머나!"
그것은 딸이 소리친 게 아니었다. 초막 남쪽 경계를 서고 있던
유모 방씨가 느닷없이 외친 소리였다. 또 '어머니' 란 외침은 돌
발사태에 쓰기 위해 미리 약속해 둔 암호이기도 했다.
사면 둘레는 온통 허리까지 차는 갈대풀, 쌓인 눈더미도 아직
녹지 않았기 때문에 시야도 1백 보 거리까지 멀리 내다볼 수가 있
다. 다만 신경을 쓰지 않으면 허리를 바짝 구부리고 살금살금 접
근해오는 사람을 발견하기 어려운데다. 찬바람이 불어닥칠 때마다
메마른 갈대풀이 와수수 와수수 흔들리는 소리에 청각도 시야도
교란을 받기 쉬웠다.
잠깐 사이, 남쪽 10여 보 바깥에 웬 사람이 허리를 펴고 일어섰
다. 뒤따라서 일행인 듯한 일곱 명이 연거푸 모습을 드러냈다. 하
나같이 쥐색 경장 차림에 말갑옷 형태의 소매 없는 가죽 저고리를
걸쳤다.
여덟 사람은 양 쪽을 나뉘어 천천히 초막 앞으로 갈씨 부인이
먼저 허리를 펴고 일어나, 초막으로부터 10보 떨어
진 지점에 우뚝 섰다.
"게서 더 가까이 오지 마시오! 피차 오해가 생기면 곤란하니."
갈씨 부인은 낮은 목소리로 외쳤다.
"여러분, 무슨 일로 오셨소?"
"이크! 여잘세 그려?"
선두가 칼자루를 잡았던 손을 풀었다. 일개 여인 따위에 병기를
들썩거릴 필요도 없다는 투였다.
"뭐 하는 사람이오? 피차 오해가 없도록 성함을 밝히시오!"
"이름을 밝힐 필요는 없소이다. 여러분이 뭣 때문에 오셨는지부
터 먼저 밝혀 주시지 않겠소?"
"북관 대로상에 피살체가 네 구 있었소. 우리는 살인사건을 조
사하러 나온 사람이고, 지금 이 부근에서 살인범을 수색하는 중이
오. 삼경 반야에 이런 곳에 여인의 몸으로 혼자 서성거리다니,
필시 무림계 분이 아닌가 하오만...."
"처음부터 무림계에 몸담아 왔소이다."
"낭자의 방명을 가르쳐 주시기 바라오."
"알려 드리기 어렵소이다."
"흥! 그렇다면 낭자도 혐의가 크군 그래? 노부는 반드시 내력을
캐내야겠소. 성씨는 뭐고 이름은 뭐며, 어디 출신이오? 또 예서
무얼 하고 있었소?"
단번에 주워섬기면서 그는 앞으로 다가왔다. 손을 번쩍 휘두르
자, 동료 일곱이 줄지어 뒤따랐다. 여덟 사람이 다가드는 동안,
분위기는 팽팽하게 당겨졌다.
"귀하의 말투를 들으니, 관헌 같지는 않구료. 오히려 강도 냄새
가 풍기는데 어떻소, 내가 잘못 보았는가?"
갈씨 부인은 천천히 장검을 치켜들었다.
"누군든 더 가까이 다가서겠다면, 노신의 칼날 아래 용서가 없
다고 탓하지나 마시오! 생사는 각자 책임지는 법이니까."
상대측은 행동으로 응답했다. 중간의 세 명이 얕은 기합성을 지
르더니, 장검 석 자루가 일제히 날아들었다.
"이여업!-"
'푸르릇!' 하는 파공음에 이어 검기가 미친 파도처럼 몰려왔다.
검기의 물결은 삽시간에 수만 가닥으로 화해 공기를 찢으면서 한
목표를 노리고 짓쳐들었다. 셋이 모두 내공력으로 어검술(馭檢術)
을 펼쳐가며 여인 한 사람을 향해 집단공격을 퍼부어 대는 꼴이,
무림계 인물다운 풍도나 기백 따위는 눈꼽만큼도 없었다. 보나마
나 좋은 길에 접어든 친구가 못 되는 것이 분명하다.
세 사람의 비열한 집중공격을 받게 되자, 갈씨 부인도 노기가
불끈 치밀었다. 번쩍 치켜들린 장검에서 '우르릉!꽝 하고 풍뢰성
(風雷聲)이 울려나오는가 싶더니, 드디어 첫수 <탁랑배공(濁浪排
空)의 역습이 펼쳐졌다. 장검은 인정 사정없이 석 자루 칼끝 틈서
리를 비집고 육박해 들어갔다.
"쩡그렁! 챙, 챙!"
쇳소리 세 마디가 귓청을 때리고 검광이 미친 듯이 날뛰는 가운
데, 사람의 그림자가 넷으로 쩍 갈라졌다. 단 1초에 승부가 결판
난 것이다.
"가벼운 징벌을 베푼 줄이나 아시오! 다음 차례는 반드시 누군
가 목숨을 잃어 버리게 될 거요."
갈씨 부인은 제 자리로 돌아가서 냉랭하게 쏘아붙였다.
도전자 세 명은 하나같이 바른쪽 겨드랑이를 찔렸다. 허나 상처
는 근육만 다쳤을 뿐, 뼈를 건드리지 않았다.
자그만 상처였으나, 그것만으로도 세 사람의 간담을 뚝 떨어뜨
리기에 충분했다. 그 기세를 미치광이 파도처럼 펼쳐 놓은 검막
(劍幕)으로 봉쇄하지 못하고 수평으로 날아든 단 일격에 셋이 한
꺼번에 찔렸다니, 이럴 수가 있는가? 저쪽에서 만약 사람을 죽이
기로 마음만 먹었더라면, 세 사람은 너나 할 것없이 목숨 부지할
요행따위는 바라지도 못했을 터였다.
나머지 다섯 사람도 기절 초풍을 하기는 매일반, 동료를 구조할
생각도 잊어 버렸고 일제히 덤벼들어 생사 결판을 낼 엄두도 내지
못한 채, 그 자리에 말뚝이 되어 버렸다. 그들은 자기 눈으로 똑
똑히 보고서도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세 명씩이나 되는 고수가
일개 여인의 칼부림 앞에 맞붙기가 무섭게 참패를 당하다니, 이게
어디 가능한 일이냔 말이다!
이때, 갈대숲 멀찌감치서 짬은 휘파람 소리가 울렸다. 그것이
신호였는지 여덟 명이 낭패스런 몰골로 슬금슬금 뒷걸음질쳐 물러
나기 시작했다.
휘파람 소리를 듣는 순간, 갈씨 부인은 더 이상 마음을 풀지 못
하고 침착한 동작으로 장검을 곧추세우면서 정면 수비태세를 굳혀
놓고 온 신경을 기울여 적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휘파람 소리는
이제 곧 강력한 적이 나타난다는 신호였던 것이다.
"휘이!-"
느닷없이 30여 보 바깥에서 한 가닥 섬전(閃電)의 무지개가 솟
구쳐 오르더니 캄캄한 하늘을 가로질러 쏜살같이 날아들었다. 미
파공음에 놀랄 틈도 없었다. 그 무지개의 빛줄기는 섬뜩하리 만큼
기막힌 속도로 눈 깜짝할 순간에 들이닥쳤다.
갈씨 부인의 치맛자락이 펄럭였다. 몸이 꿈틀하는 듯 싶더니 그
와 동시에 검격(劍擊)이 발출되었다. 공격초식은 <경도해랑>(驚濤
駭狼), 창해 유성 가문 비전의 <경도십이검>중에서도 정화로 손꼽
히는 살초(殺招)가 전개되자, 웅혼하기 필적할 데 없는 기세로 신
검합일(身劍合一)을 이룬 역습이 이제 막 눈앞에 들이닥치는 섬전
의 무지개를 맞받아쳐 나갔다.
"쩡!"
첫 접촉에, 일순간 어두운 하늘이 번쩍 밝았다. 맞부딪친 쌍검
에서 무수한 광채가 보는 사람의 가슴이 섬뜩하도록 퉁겨날았던
것이다.
그녀는 전심전력, 평생토록 연마해 온 진재실학(眞才實學)을 아
낌없이 쏟아부어 강적과 맞섰다.
"쨍그렁 !... 쩡 ! 쩡 !..."
사람의 혼백을 찍어누르는 듯 칼울음이 두세 차례 연달아 터지
고, 돌개바람 속에 벼락치는 소리가 울리더니, 한데 엉겨붙었던
쌍방의 그림자가 좌우 양편으로 싹 갈라졌다. 세력은 모두 막상막
하의 팽팽한 맞수, 칼끝에 맺힌 공력도 우열을 가리기 어렵다.
희끗희끗 센 변발 댕기의 노인, 대나무 쪽만큼이나 비쩍 마른
늙은이의 몸뚱이가 비스듬히 날아서 1장 바깥에 훌쩍 내려서기가
무섭게 두 다리로 단단히 뿌리를 박았다. 수증에는 번갯불보다 더
찬란한 장검이 번쩍번쩍 빛을 발하면서 아직도 은은하니 용음을
토해내고 있다.
"누군가 했더니만, 창해 유성의 요부였군!"
말라깽이 늙은이가 무거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경도십이검>이라, 과연 명불허전일세! 여보게 박(博) 영감!
아무래도 자네 얼굴 좀 내밀어야 쓰겠는 걸? 밤이 길면 꿈도 많아
지는 법, 이 요사스런 계집일랑 자네한테 넘김세!"
10여 보 밖에서 두 명의 노인이 어깨를 나란히 걸어나왔다. 한
사람은 백색 도포를, 또 하나는 검정색 도포를 걸친 품이, 차림새
가 괴이하고 생김새 또한 음험한데다 온몸에서 죽음의 냄새와도
같은 귀기(鬼氣)가 서렸다.
"정말 노부를 끌어내야 속 시원한가?"
'박 영감' 이라고 불리운 백색 도포의 노인이 다가오면서 빙글
빙글 너스레를 떨었다.
"창해 유성의 검법도 별로 신통한 구석이 없군 그래. 기껏해야
현문의 연기절학 현천강기나 상대할 때 쓰면 딱 알맞겠어. 노부의
태극신공은 그 따위 현천기공쯤 단 일격에 박살내 버릴 자신이 있
지 !"
"가만 있게, 나 <백독진군>(百毒眞君)은 저 요부를 죽지도 살지
도 못하게 만들어 놓아야겠어 !"
검정 도포의 사내가 얼른 손을 내두르면서 말렸다.
"박 영감! 무슨 경사 났다고 원신진기(元神眞氣)를 낭비하려고
그래? 그건 필부의 만용일세. 이 도사가 새끼 손가락 하나만으로
저것을 뼈가 녹신녹신한 미녀로 만들어 놓을 테니 두고 보기만
하라구! 한 서너 차례 용만 쓰면 너끈할 거야. 난 죽은 계집 따위
필요없거든?"
<백독진군>이라!... 그 별명 넉 자는 갈씨 부인을 그 자리에서
펄쩍 뛰도록 놀라게 만들었다.
독물을 떡 주무르듯 하는 이 늙은 도사는 법명이 흔해빠진 청송
(靑松)이지만 강호상의 별호는 <백독진군>, 천하 온갖 독물을 다
루는 데 원조라고 일컫는다. 그래서 사람들도 청송이란 법명은 모
르고, 설혹 아는 사람이 있다 해도 그 숫자는 별로 많지 못하다.
마도에 속한 자들은 누구나 자신을 '마중지마'(魔中之魔)라고
일컫는다. 제 스스로 명성을 높이고 자기 과시를 하다 보니 '악마
중의 악마'라는 공포적인 허풍을 떨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백독진군> 어른만큼은 확실히 '마중지마'라는 명칭
을 받기에 손색이 없는 분이시다. 이 위인이 일단 독물을 뿌렸다
하는 날이면 사람이고 짐승이고 깡그리 횡액을 면치 못한다. 또
단번에 4, 50명쯤 독살하기란 본인의 허풍이 아니라 진짜 손바닥
에 먼지 털기보다 더 간단하다. 이런 그가 서너 차례 용을 써서
갈씨부인을 상대하겠노라 겸손을 떤 것은 갈씨 부인을 그만큼 강
적으로 보고 있다는 증거였다.
갈씨 부인으로 말하자면 강호상을 오랜 세월 떠돌아 다니는 동
안, 강호 정세에 누구보다 밝았고 식견이나 경험도 굉장히 많이
쌓은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백독진군>이란 위인이 어떤 마귀
인지 너무도 잘 아는 만큼 속으로 놀란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녀는 또 백색 도포 차림의 '박 영감' 이란 늙은이가 어떤 인
물인지 알고 있었다. <백무상>(白無常)은 은박(銀博), 성씨도 야
릇하거니와 '저승사자'라는 별명도 끔찍스러운 인물이다.
밤중에 나타날 때는 으레 괴상한 모양의 은색 도포를 걸치고 대
낮에 외출할 때는 보통 빛깔의 도포 차림이다.
그래서 한밤중에 은색 도포자락이 번뜩 비치기만 해도 강호의
고수 명숙들조차 간담이 뚝 떨어져 꽁무니를 도사릴 정도로 그는
흑도상의 악명 높은 살인마였다. 사람을 죽일 때나 재물을 강탈할
때의 손속은 인간이라고 할 수 없으리 만큼 잔혹스러웠고 모질었
다. 그 솜씨는 좌도 방문의 인물이나 녹림의 비적 패거리가 살인
약탈하는 수법과는 근본적으로 그 질이 달랐고 희생자의 참혹스러
움도 비할 바 아니었다.
"산 사람이 필요하다구? 그야 무조건 넘겨 드리지! 자네 <백독
진군>께선 채음보양술(採陰補陽術)을 즐기는데 어느 계집인들 마
다하겠나? 그저 치마 두른 말뚝만 봐도 군침을 질질 흘리는 작자
니까 말씀이야. 흐흐흐!"
<백무상> 은박 영감은 야릇한 웃음기를 띠어가며 대꾸했다.
"하지만 노부도 현천신강의 위력이 어떤지 맛을 좀 봐야 할 게
아닌가? 그러니 나에게 팔다리 근육이나 풀 기회는 달란 말일세."
"좋아, 그럼 3초만! 어떤가?"
"3초라? 좋아, 딱 알맞네. 그 정도 싸우면 패하더라도 이 은박
의 체면에 재를 뿌리는 셈은 아니겠지!"
"잔소릴랑 걷어치우고 어서 시작이나 하라구!"
"알았네, 이여업! "
괴이한 기합성 한마디, 백무상의 수증에서 염왕령(閻王令) 한자
루가 흉맹스럽게 쳐나아갔다.
이 외문의 중병기는 겉모양새가 안령도와 별로 다를 바 없다.
다른 점이 있다면 끝부분이 흡사 염라대왕이 죽은 목숨을 끌어들
일 때 쓰는 영패(令牌)처럼 날카로운 삼각형으로 생겼다는 것이
다. 그래서 병기의 명칭도 염왕령이다.
갈씨 부인의 병기는 장검, 무게로 따져서 상대방의 염왕령보다
절반 남짓이나 가볍다. 게다가 남자의 왁살스런 뚝심과 맞겨루어
야 하니, 이치로 따져서 도저히 적수가 되지 못한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맞받는 수밖에 달리 선택할 길이 없다. 만약
백무상이 첫 돌격에서 빗나갈 경우 곧바로 초막 안까지 돌입할 공
산이 크다. 초막에는 장추산이 운기행공으로 독물을 몰아내느라
정신 못 차리고 있을 터, 잔혹스런 마귀 백무상의 눈에 띄었다가
는 죽음만 있을 생 살아날 기회라곤 전혀 없다. 그래서 그녀는 첫
공격을 맞받아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쏴아아!-쩡그렁 ! 챙, 챙!..."
강철이 맞부딪쳐 울리는 소리, 잠력의 기류가 터지는 폭발음이
초막 일대 어두운 하늘을 뒤흔들어 놓았다. 장검 한 자루, 염왕령
한 자루가 미친 듯이 얽혀 있는 잠깐 사이에, 광소성(狂嘯聲)이
고막을 찢어발기는가 하면 뒤미처 무시무시한 금속성이 거푸 두
차례 울리고 불티가 사면팔방으로 흩날리는 가운데, 한밤중 때아
닌 회오리바람결에 메마른 갈대 숲이 전후 좌우로 어지러이 춤을
추었다. 그 다음 찰나, 급작스레 돌개바람이 멎고 뇌성벽력도 뚝
그쳤다.
갈씨 부인은 연속 3, 4보나 밀려갔다. 두 다리 아래가 허전하게
들뜨고 몸뚱이도 삽시간에 반 척이나 줄어든 것처럼 보였다. 장검
끝으로 땅을 짚고 선 품이 이제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휘청거렸
다.
<백무상> 은박도 다섯 걸음 뒤로 밀려나간 채, 무릎 한 쪽을 꿇
고 앉아 있다. 육중한 염왕령을 거머쥐고 있기조차 버거운 듯 한
곁으로 비스듬히 기대어 놓고, 거친 숨결을 헐떡헐떡 몰아쉬면서
온몸으로 뜨거운 김을 안개 피우듯 무럭무럭 쏟아내고 있는 것이
다.
"보라구! 태극신공이 현천강기를... 상대할 만하지?"
<백무상>은 목소리도 싹 변했다. 그는 힘겹게 몸을 일으키면서
<백독진군>을 돌아보았다.
"창해 유성의 개세절학이란 것도 과장이 좀 심하군.... 여봐,
늙다리 도사 나한테 3초만 더 기회를 주게!"
"안 돼 !"
<백독진군>이 한마디로 거절했다.
"기회를 더 줘 봤자, 양패구상이나 당하기 십상이야. 그렇게 되
었다간 내 손해가 너무 크거든? 자네는 별도로 치더라도, 저렇게
어여쁘고 혜근(慧根)이 두터운 재목을 또 어디 가서 찾아낸단 말
인가? 자넨 한 쪽으로 비켜서게!"
이때, 갈씨 부인의 곁에 이모 양벽아, 유모 방씨, 꼬마 처녀 갈
패옥이 모습을 드러냈다. 갈씨 부인이 운기조식을 하는 동안, 두
자루의 장검, 한 자루 비수가 방어진을 형성하고 그녀를 엄호했
다. 그러나 이들의 눈빛은 이롭지 못한 정세를 느끼고 불안하게
흔들렸다.
"모두들 여기 발묶여 있을 수는 없어."
갈씨 부인은 허탈한 목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방씨 아주멈, 패옥을 데리고 빠져나가요. 어서!"
"엄마, 난 안 갈래!"
갈패옥이 이를 악물었다.
"죽게 되면 우리 다 같이 죽어요! 나는...."
"으하하핫!..."
맞은편에서 <백독진군>이 광소를 터뜨렸다.
"이게 또 웬 떡이냐? 흠흠, 잘 걸려 들었군! 오늘 재수가 좋은
날인 모양이야. 이봐, 꼬마 아가씨l 누구 마음대로 죽어? 사람의
생사는 바로 내 손아귀에서 노는 거야. 염라대왕도 이 <백독진
군>과 다투지는 못해요! 흐흠, 하나같이 포동포동하게 잘 생겼구
먼. 내 눈에 아주 쓱 들었어. 내가 점찍어 놓은 이상, 너희들의
죽을 시한이 3경으로 정해져 있더라도 염라대왕의 저승사자가 와
서 네사람의 혼백을 뽑아가지는 못할 거야. 알겠나? 으하하
하!..."
네 여인의 등 뒤에 돌연 장추산이 우뚝 모습을 드러냈다.
"늙다리 도사, 그거 참말인가?"
기력이 철철 홀러넘치는 목소리가 귓청을 울렸다. 그는 갈씨 부
인을 앞질러 휘적휘적 걸어나갔다.
"도사님께선 진정인 모양이나, 이 뇌신은 도무지 믿을 수가 없
는데? 염라대왕은 너 하는 짓을 어떻게 참견 못하더라도, 신령님
은 천하에 독을 뿌리는 방자한 악귀, 인두겁을 쓴 악마를 용납하
는 법이 없지. 요망스런 도사, 이제 그대의 때가 왔네!"
"이크! 뇌신?..."
곁에 섰던 <백무상>이 실성을 터뜨렸다.
뇌신, 그 이름은 확실히 사람의 간담을 뒤흔들어 놓을 위력이
있다.
<백독진군>은 콧방귀를 뀌었을 따름이다. 그러나 역시 꺼림칙스
러운 바가 있는지, 더 이상은 감히 다가들지 못한다. 소문에 듣자
면, 뇌신의 패도적인 병기 뇌주는 그 위력이 1백 보 이상, 투척한
거리가 바로 살상 범위가 된다고 했다. 또 이 뇌주에 얻어맞으면
팔다리 한 짝 건지기는커녕 사지육신을 산산조각으로 날려보낼 수
밖에 없다고 했다. 그러니 혼백인들 어디서 찾겠는가? 과연 뇌주
의 폭발 위력은 소문만 듣고도 뭇 사람의 간담이 철렁 내려앉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것이 분명하다.
"흥, 뇌신이라? 허나 이 <백독진군>의 하는 일에 뇌신이라도 참
견할 수 없지 !"
그는 버럭 악을 썼다. 자꾸만 주눅이 드는 자신감을 일깨울 작
정에서였다.
"네가 무슨 신령님이라도 되는 줄 아느냐? 너도 똑같이 피와 살
로 뭉쳐진 인간의 몸뚱이에 지나지 않을 터, 내 <내독신장> 앞에
배겨날 듯..."
장추산이 재빨리 말끝을 가로챘다.
"흐흐흐 ! 뇌신의 눈에 띄었을 때, <백독진군>의 목숨은 이미
절반쯤 날아간 줄이나 알면 되네! 지금 나는 바람을 등지고 서 있
지. 바람결에 독을 뿌릴 기회도 없고 바짝 육박해 들어와서 내 입
에 독주머니를 처박을 기회도 없을 거야. 왜냐? 소인은 10장 바깥
에서도 그대를 쳐죽일 수 있지만, 그대는 3장 거리를 벗어나서 이
몸을 독살할 능력은 없을 테니까! 어떻소, 우리 서로 위치를 바꿔
드릴까? 그래야만 바람결에 독을 날려보낼 수 있지 !"
"큰소리 작작 지껄여라! 나도 10장... 어어... 3장 바깥에서...
으왝! ... 3장 바깥에서... 어억?... 아이쿠, 아얏!..."
최후의 일성은 애절한 비명, 날카로운 외마디 비명으로 화해 뭇
사람들의 고막을 찔렀다. 잠시도 쉬지 않고 휘청거리던 몸뚱이가
돌연 비비 꼬이더니, 혼신의 기력을 다 쥐어짜내어 돌아섰다.
그리고 흔해빠진 종약술(從躍術)도 쓰지 못하고 흡사 유령이라도
마주친 듯 두 다리를 뽑기가 무섭게 정신없이 내뛰기 시작했다.
"으와아!..."
아닌 밤중에 바람개비 돌리듯, 두 팔을 마구 휘두르면서 띔박질
하는 몸뚱이가 이리 비틀 저리 비틀, 영락없이 술 취한 주정뱅이
귀신의 꼬락서니다.
<백무상> 은박과 나머지 동료 여덟 명은 <백독진군>이 뇌신에게
댓거리를 하는 도중 때없이 '어어, 으왝! 어억, 아이쿠!' 소리를
섞어가면서 몸뚱이를 비틀어댔을 때만 해도 어리둥절 쳐다보기만
했을 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영문을 똑똑히 알 수가 없
었다. 그러다가 <백독진군>이 몸을 빼쳐 죽을 둥 살 둥 비틀거리
면서 도망치는 광경을 보았을 때야 그들도 비로소 깜짝 놀라 아연
실색하고 말았다.
방금 뇌신이 뭐랬던가? 10장 바깥에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다고
했다!
현재 쌍방간의 거리는 4장 남짓, <백독진군>은 손 한 번 써보기
는커녕 오히려 두 다리야 날 살려라 도망쳤다. 달아나는 꼬락서니
도 낭패막심, 어딘가 상처를 입은 형국이 분명했다.
그것은 상대방을 유인하기 위해 거짓으로 꾸며낸 태도가 아니었
다. 또 <백독진군>이란 마귀는 상대방과 맞붙기도 전에 스스로 패
배를 자인하고 물러날 위인도 결코 아니다. 분명히 그것은 무형의
손길에 중상을 입었다는 얘기다.
소리 소문도 없이 제일 먼저 일약 3장 거리를 훌쩍 날아 도망친
자는 바로 <백무상> 은박이었다.
나머지 여덟 명이라고 모두 바보 멍텅구리일 리 있겠는가? 그들
도 허수아비에 놀란 오리떼처럼 화르르르!... 눈 깜짝할 사이에
흩어져 날아갔다.
"당신, 괜찮아요?"
꼬마 아가씨는 놀랍고 기뻐서 까무라칠 지경이라, 손에 날카로
운 비수를 쥐고 있는 것도 잊어먹고 장추산을 덥석 끌어안았다.
"괜찮아, 선천진기가 좀 더 정순해진 느낌이 드는군."
장추산은 그녀의 손목을 잡아끌고 갈씨 부인에게 다가갔다.
"백모님, 볕 일 없으십니까?"
"별 이상은 없소?"
갈씨 부인은 칼을 거두면서 씁쓰레하니 웃었다.
"과연 <백무상>의 태극신공은 우리 현천기공의 강적이더군. 난
하마터면 기문을 깨뜨릴 뻔했다우. 아 참! 뭘 썼길래 <백독진군>
이란 놈이 그토록 기겁을 해가지고 도망치게 만들었소? 진짜 요술
이라도 부린 거요?"
"초막 기둥에 못이 몇 개 박혀 있길래 그걸 뽑아 썼습죠. 선박
에 쓰는 것이라 겨우 세 치도 안 되게 짧아서 유감이었습니다. 보
통 상대 같으면 그걸로도 4장 거리에 죽일 수 있겠으나, <백독진
군>과 같은 고수는 태극기공으로 몸을 감쌌기 때문에 격살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지요."
"언제 어딜 때렸소? 난 낌새도 못 챘는데...."
"그자가 말하고 있는 기회를 노렸습니다. 첫번째 한 대로 하음
혈을 명중시켜서 충맥(衝脈)이 일주천하는 기로(岐路)를 끊어 놓
았고, 그 다음에는 구미혈(鳩尾혈), 좌우 기문혈(期門穴), 마지막
으로는 전력을 다 쏟아 신궐혈(神闕穴)을 꿰뚫었습니다. 제 짐작
이 틀림없다면, 그놈은 허리띠에 철경(鐵鏡)따위의 호신물을 붙이
고 있을 겁니다. 타격의 감각으로 보아서 쇠못이 그 호제경(護臍
鏡)을 관통한 것은 분명합니다만, 배꼽까지 뚫고 들어갔는지 그것
만큼은 판단이 서지 않는군요."
"암기를 잘 쓰시는 모양이로군!"
아니올시다. 저는 암기 따위를 쓰지 않습니다. 또 뇌주도 본래
살인용이 아니고요. 그러나 <백독진군>처럼 바짝 접근해서 인명을
살상하는 고수와 상대하자니까, 부득이 암기로 습격할 수밖에 없
었습니다."
"그놈이 죽을까?"
"죽을 정도는 아닐 겁니다. 따라서 저도 앞으로 그자의 암습을
조심해야겠지요. 발사한 쇠못은 넉 대, 모두 혈도를 다치기는 했
습니다만, 깊이가 얕아서 상처도 한계가 있을 겁니다. 허나 목숨
을 건져도 두 번 다시 채화음적(採花淫賊)노릇은 못하게 되었으
니,그나마 다행입지요.... 백모님, 고맙습니다. 그렇게 달려오셔
서 구해 주셨는데, 인사가 늦어 송구스럽습니다. 게다가 지금 또
위험을 무릅쓰고 그자들을 막아 주신 것도..."
"여봐요, 장씨. 새삼스레 무슨 인사요?"
갈씨 부인은 얼른 그의 말을 막았다.
"당신도 내 딸 아이를 구해 주지 않으셨소? 난 그 인사치레도
못했는데!"
"백모님은 소패를 뒤밟아 오신 겁니까?"
"아무렴! 요것이 객점을 살그머니 빠져 나가길래, 어딘가 당신
을 찾으러 나간 줄 눈치챘소. <신조냉표>란 자가 습격대를 보낼
때부터 그 다음 일은 우리 모두 다 아는 얘기일 테고.... 난 한
발 늦었다우. 요 깜찍한 것이 벌써 그놈들을 뒤따라 성 북쪽으로
나간 뒤에야 겨우 꼬리를 잡았으니 말이오. 다행히도 제때에 따라
잡았길래 망정이지, 하마터면 우왕좌왕 헤매다가 큰일 날 뻔했지
뭐요? 하지만 당신과 요것이 천지회 사람들에게 붙잡혀 갈 줄은
정말 생각지도 못했소."
"아마... 천지회 사람들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장추산의 한마디가 일행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아니라구? 그 사람들은 분명히 신분을 밝혔는데?"
"저도 처음에는 그렇게 믿고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헌데.."
"어떤 점이 의심스럽던가요?"
"천지회에서는 어떤 형식의 당(堂)을 개최하든, 특히 외부인의
죄상을 다루는 형당(刑堂)과 유사한 외법당(外法堂)이 열릴 경우
에는, 누구도 배후에 숨어서 진행 업무를 조종하지 않습니다. 천
지회 소속원들은 그 신분이 명나라 유신(遺臣)의 자제들인 만큼,
조직과 계율이 아주 엄격하고 또 대의명분으로 내세운 기치도 떳
떳합니다. 따라서 강대한 잠재세력을 보유한 비밀 방회가 될 수
있습니다. 저를 잡아 닥달하면서 심문자가 배후의 지시를 받아 움
직이는 따위, 흑도 조직에서처럼 또 다른 실력자가 암암리에 회의
분위기를 통제하는 그런 방식은 천지회 사람들에게 절대로 통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천지회 형제들간에 서로 의심하게 만들고 이
반(離反)하는 악덕의 나쁜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일리 있는 말씀이오."
"그래서 저는 그들이 비록 옷차림새나 하는 짓거리가 똑같아도,
진짜 천지회 사람이 아닐 것이라고 의심을 품게 되었지요. 천지회
의 내막에 대해서는 저도 맹물은 아닙니다. 몇몇 인물과는 낯설지
도 않고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강경하게 맞설 생각은 없었는
데,나중에 가짜라는 확신이 서게 되면서부터 생각을 바꿨던 것입
니다."
"하면 그들의 정체를 어떻게 추측하고 계시오?"
"아직은 떠오르지 않습니다. 언젠가는 반드시 밝혀질 날이 있겠
지요. 아, 참! 소패, 혹시 그 강변 숲 속에서 마대자루 하나 못
보았소?"
"사람을 담은 것 말이죠?"
갈패옥이 되물었다.
"그래, 바로 그거야!"
"그 사람, 죽었어요."
그녀는 한숨을 내쉬면서 얘기를 계속했다.
"사냥개들이 먼저 그 마대자루를 찾아냈죠. 그리고 뒤따라 온놈
들이 암기를 마구 쏘아서 벌집을 만들어 버렸고요. 사람을 끌어
낼 때 보니까, 이미 가망이 없더군요. 난 처음에는 당신인 줄
알고 당장 뛰쳐나가 생사 결판을 내려고 했어요. 그런데 뒤미처
누군가 고함을 지르지 않겠어요? 당신이 아니라고 말이죠. 목소리
가 얼마나 큰지, 그 바람에 저는 가무라칠 뻔했어요. 지금 생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예요.... 당신, 당신은 그것도 모르
고...."
"진정하라구."
장추산은 꼬마 아가씨의 어깨를 툭툭 쳐 주었다.
"이제 위험은 다 지나갔어. 나도 소패가 얼마나 고마운지 몰
라."
"그 죽었다는 사람이 누구요?"
갈씨 부인이 물었다.
"소도회에서 제명당한 반역도입니다. 육일도 육전, '안경의 육
씨' 라고도 알려진 인물로, 강호에서 암기를 잘 쓰는 10대 직업살
수 중의 하나입니다."
"뭐라구요? 어째서 그런 인물과 함께 어울렸소?"
"그자는 <신조냉표>가 저를 유인해 죽이려고 내보낸 인물이었습
니다. 처음에는 그자의 정체도 몰랐으니까요.... 아이쿠! 3경이
거의 다 되었군. 저는 강을 건너가야 하니까, 여러분은 속히 성내
로 돌아가시죠."
"잘 하시네! 당신 또 혼자서 내뺄 작정이죠? 그렇게는 안 될
걸!"
꼬마 아가씨가 펄쩍 뛰었다.
"난 꼭 당신을 따라다니겠어요! 안 데리고 가면...."
"이 계집애야, 소란 좀 그만 부려라!"
갈씨 부인이 호통쳐 꾸짖었다. 그리고 장추산을 돌아보았다.
"아우님, 풍랑도 사나운데 야반 3경에 어떻게 강을 건너려는 거
요? 피치못할 일이 아니거든, 공연히 위험을 무릅쓸 게 아니라 내
일 아침 날이 밝거든 가면 안 되겠소?"
"내일이면 의롭지 못한 재물 5만 냥이 물거품으로 변합니다."
"뭐라구, 의롭지 못한 재물? 5만 냥테미나?..."
"그렇습니다."
"무슨 얘긴지 말씀 좀 해보시오."
"양주부 관고에서 지출된 비밀 자금올시다. 만주족 황제 영감은
정말 가증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우리 한족 백성을 송두리채 잡아
먹을 속셈인지, 각 지방 세금은 지방에서 쓰도록 땡전 한 푼 안
남기고 모조리 서울로 올려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지방에서는 길
하나 제대로 닦고 싶어도 어디서 돈을 끌어내겠습니까? 황제는 민
생복리를 위해 쓸 돈이라곤 한 푼도 안 내놓고, 교묘한 수법으로
한족 출신을 지방 관원으로 내세워 민원의 방패막이로 삼았습니
다. 그러니 무지한 백성들이야 지방관을 원망하지, 어디 황제를
미워할 리 만무하지요. 어떻습니까? 아주 지독한 솜씨가 아닙니
까?"
"대충 짐작이 가오만...."
"현재 양부주 곳간에서 은화 5만 냥의 비밀자금이 지출되었습니
다. 아마 지방 형편과 관부의 법규를 아는 사람은 믿으려 하지 않
을 겁니다. 그러나 저는 믿기 때문에 직접 가서 조사를 하려는 것
입니다. 육일도의 친구 중에 양주부 창고지기로 있는 자가 하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일을 알게 되었지요. 저는 육일도의 목숨과
맞바꾸는 조건으로 정보를 얻어냈습니다. 은화를 감춘 장소를 알
아내기만 하면 그 즉시 풀어 주기로 약속했는데, 안타깝게도 엉뚱
한 놈들 손에 죽이고 말았습니다. 한 번 약속한 일은 반드시 지키
는 것이 제 신조인데, <신투>도 죽게 만들고 또 이제 와서 육일도
마저 죽었으니...."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풀잎 초리가 흔들리더니, 잿빛 옷차림의
그림자 하나가 벌떡 일어났다.
"오해 마시오! 적이 아니라 친구요!"
회색인은 다급하게 소리쳤다.
허나 장추산은 벌써 유령처럼 회색인의 신변에 나타나고 있었
다.
거리는 4,5장, 갈씨 부인조차도 그가 어떻게 접근했는지 똑똑히
보지 못했다. 오히려 눈앞이 침침한 듯한 느낌뿐이었는데, 그는
이미 5장 거리 밖에 유령같이 나타난 것이다.
"저 사람, 변화술도 부릴 줄 아나?"
속으로 깜짝 놀란 갈씨 부인, 저도 모르게 가벼운 찬탄이 나왔
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을꼬?"
그녀는 장본인도 놀라고 있는 줄은 까맣게 몰랐다. 사실 장추산
으로서도 어리둥절하게 놀랄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괴한 쪽으로
이동해야겠다는 생각이 단 한 번 꿈틀거렸을 뿐인데 몸뚱이는 벼
락같이 옮겨가고 있었으니, 이런 경우는 자신도 처음 겪어 보는
일이었다. 동작이 마음 먹은 대로 옮겨갈 수 있다는 것은 행동과
신의(神意)가 하나로 일치되었다는 뜻이다. 이것은 무공을 연마하
는 사람에게 있어서 몽매(夢寐)간에도 추구하는 경지, 추구해도
얻지 못하는 이른바 통현(通玄)의 경지요, 현문의 방술가들이 소
위 '지행선'(地行仙)이라고 부르는 성취 면에서도 감히 꿈꾸지 못
하는 것이 바로 이 경지다.
그도 물론 느낌이 좀 있었길래 방금 갈패옥에게 '선천진기가 정
순해진 것 같노라'고 귀띔했는데, 이런 상상의 경지에 이르기까지
정순해졌으리라곤 전혀 생각도 못했었다.
그 무서운 독룡장의 일격을 맞고난 직후, 장독이 체내 기경팔맥
(奇經八脈)에 깊숙히 스며들어 생사의 갈림길에 서게 되자, 그는
위험한 줄 뻔히 알면서도 자구책으로 원신(元神)의 정수를 써서
기경팔맥을 씻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이 생사현관을 관통시
켰을 줄이야 누가 상상이나 했으랴? 이리하여 그는 매미가 껍질벗
듯 단 한 차례 대겁(大劫)에서 벗어난 것과 똑같은 효력을 얻었
고, 도행(道行) 역시 3할이나 깊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현문에서는 겁난(劫難)을 매우 중요시한다. 일겁을 건너띈 결과
는 두 가지 극단적인 현상으로 나타난다. 그 하나는 수도의 기초
가 완전히 파괴되어 처음부터 다시 수련해야 하고, 또 하나는 죽
음의 경지에서 부활하여 도행이 과거보다 3할씩 더 깊어지는 것이
다.
하나는 퇴보, 하나는 전진, 그 차이는 하늘과 땅처럼 크다. 그
가 겪은 겁난은 다행히도 후자에 결과를 가져다 주었다. 그것은
탈태환골(脫胎換骨)과 같아서, 장본인조차 어리둥절할 정도로 심
오한 경지에 들어간 것이다.
회색인이 한 찰나만 늦게 외쳤더라면, 아마 목청에서 소리도 나
오지 못한 채 그를 맞아들여야 했을 것이다.
"친구라니, 무슨 친구?"
장추산은 얼음보다 더 차갑게 물었다. 손바닥은 언제든지 내뻗
어 이 불청객을 공격권 안에서 제압할 수 있도록 가슴 앞에 곧추
세웠다.
"생사로 맺어진 친구요!"
회색인은 침착하게 응답했다.
"나는 당신을 모르겠는데?"
"갈 소저를 구출할 때, 덤으로 사람 하나 더 구하지 않았소?"
"아하, 그게 당신이었군!"
장추산의 목소리에 적의가 싹 풀렸다.
"이 늙은이는 윤가요, 윤소소(尹蕭蕭)라고 부르지."
"그럼, 웅(熊), 윤(允), 강(江)의?..."
장추산은 찔끔하면서 물었다.
"맞소, 둘째 윤가외다."
"소도회의 세 분 조사(祖師) 가운데 둘째란 말씀입니까? 그 <풍
소소혜 역수한>(風蕭蕭兮 易水寒)이란 별호를 쓰시는?..."
"바로 이 늙은이요. 참말 부끄러운 노릇이지! 내 평생토록 남을
암습하는 짓으로 밥먹고 살아왔는데 한때 부주의로 그런 꼴을 당
하다니, 얼마나 창피스러운지 모르겠구료. 이 윤소소가 멍청하게
남의 접인부향을 맡고 벌렁 자빠져서 까무라쳤으니, 누가 들으면
웃을 거요."
"원, 천만의 말씀을 다하십니다."
"어디 그뿐이오? 잇따라서 참혹스런 앙화가 터져 이 늙은이의
가슴을 짓찧는구료. 삼차하 탑만 사건으로 우리 소도회의 정예들
이 거의 일망타진을 당하고 말았소. 천지회 강녕 총단에서 우리측
과 회맹하러 온 요인들도 불행하게 전멸당했고 말이외다. 이 원수
는 저승에 가서라도 잊기 어려울 거요. 미안하오, 내 그 사건의
내막을 정탐하느라고 그대가 목숨 살려준 은혜에 사례하는 것도
늦었구료."
"마음 쓰지 마십시오. 저도 선배님을 꼭 구출하려고 생각한 것
은 아니었으니까 말입니다. 어쩌다가 보니 그렇게 되었습지요. 허
허허!..."
장추산은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계면쩍게 웃었다.
"선배님, 소도회와 천지회 간에 무슨 일을 추진하고 있었는지
저로선 아무 관심도 없습니다. 또 두 조직에 관해서는 아는 바도
한계가 있고 말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이 후배는 방회 조직을
맺는 일에 털끝만큼도 간섭하기 싫고 입맛도 당기지 않습니다. 저
는 양주를 떠나고 나서야 일부 소문을 들었습지요. 한데 뜻밖인
것은 제가 이 진강부에 도착하자마자, 어떤 사람이 두 회의결맹
정보를 관부에 팔아먹은 주범으로 저를 지목했다는 겁니다. 바로
엊저녁에 천지회 측은 아홉 원로를 심판석에 앉혀 놓고 법당을 열
어 이후배의 죄상을 따졌습니다. 정말 무슨 영문인지 지금 생각해
도 어리둥절하기만 하군요. 윤 선배님, 혹시 선배님도 제게 따질
일이 있어서...."
"아우님, 오해 마시게."
"참말이십니까?"
"우리 소도회는 벌써 오래 전부터 강호상에 극도로 신비한 인물
들이 나타나서 암암리에 관부측과 내통하고 만주족 사람들을 상대
로 큰 장사판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네."
"무슨 장사 말입니까?"
"청나라 조정이 최고의 현상을 내건 것은 두 가지, 하나는 고변
(告變)이고 또 하나는 만주족과 한족의 차별을 둔 글을 써서 책으
로 발간해 전파하는 행위일세. 고변에는 군사를 모아 반란을 일으
키는 행위, 천명을 빙자한 유언비어를 전파하는 행위, 비밀결사를
조직하는 행위가 다 포함되네. 그러니까, 우리 소도회와 천지회는
청나라 조정의 흑색 명부에 으뜸가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셈이
지."
"토벌대상 치고는 영광스럽군요. 허허허!"
"알다시피 육일도는 우리 소도회의 반도(叛徒)일세. 그놈은 옛
날부터 삼교구류의 쥐새끼들과 아주 친하게 사귀어왔지. 그놈이
알아낸 정보, 양주부 관고에서 은화 5만 냥이 지출되었다는 소식
은 확실히 근거가 있네. 노부의 추측으로는, 그 은화더미가 삼차
하밀고사건과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있네. 어떤가, 장씨 아우님도
노부와 동행해서 그 내막을 캐볼 의향은 없나?"
"그건 좀...."
"이 늙은이가 하늘에 두고 맹세하겠네. 이렇게!..."
"윤 선배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장추산은 자기 발 앞에 무릎 꿇고 하늘에 맹세하려는 윤소소를
얼른 가로막아 일으켜세웠다.
"제가 믿지요, 선배님의 진심을 믿겠습니다. 자, 그럼 이 길로
강을 건너기로 합시다. 가서 할 일은 배 안에서 상의하기로 하
고...."
"노부가 강변에 사람을 대기시켜 놓았네, 쓸 만한 쾌속선도 한
척 있고."
"그럼 떠나시죠."
"나는요?"
꼬마 아가씨가 펄쩍 뛰면서 악을 바락 썼다. 또 억지 떼를 쓸
판이다.
"너는 어머님과 성내로 돌아가서 쉬도록 해."
장추산은 딱 부러지게 거절했다.
"당신... 당신, 날 쫓아보내고 혼자 떠날 생각은 꿈도 꾸지 말
아야 해요!"
"장씨 아우님, 이 애를 데리고 가도록 하구료. 경험을 쌓게 하
는 것도 좋을 듯 싶은데...."
갈씨 부인이 말했다.
"당신이 우리 애를 잘 돌보아 주리라 믿소. 또 이 계집아이는
눈치 빠르고 판단력이 제법 뛰어나서, 신바람만 났다 하면 당신
하는 일에 큰 도움을 줄 수도 있을 거요."
"요 도깨비를 데려가서 액땜을 하란 말씀입니까?"
장추산은 짐짓 우거지상을 지어 보이더니, 꼬마 아가씨의 볼을
꼬집었다.
"넌 남한테 공갈 협박에 바가지 씌우는 데 전문가로군. 좋아,
데리고 가지! 허나 얌전히 따라와야 해! 너 그 덜렁대는 성미를
못 고치면, 조만간에 큰 재앙을 일으키게 될 거다. 알았어?"
"고치고 있잖아요? 그것도 안 보이남?"
꼬마 아가씨는 뽀로통해져서 종알거렸다.
"내 성격이 막돼먹었다는 것쯤은 나도 아는데...."
"알았으면 됐어. 그만 하기가 다행이로군!"
장추산은 다시 말투를 진지하게 고쳐 타일러 주었다.
"사람은 어차피 자라면서 철이 드는 법이야. 한 살을 더 먹었으
면 그만큼 사람 노릇도 할 줄 알고 세상 살아가는 경험과 식견도
늘어나게 되지. 제 목숨 가지고 장난하는 사람은 자기 성격상 결
함을 더욱 억제할 필요가 있어요. 내가 네 어머님한테 승낙을 받
아놓았으니까, 반드시 내 말 잘 들어야 해! 알겠나? 엉뚱한 짓을
저질렀다가는...."
"알았어요, 알았어! 시키는 대로 말 잘 들으면 될 거 아녜요?"
꼬마 아가씨는 그의 설교가 지겨워 얼른 말을 끊어 놓았다. 그
녀에게는 그저 '추산 오빠'를 따라갈 수 있게 된 것만 마냥 기쁘
고 즐겁다.
보라구, 억지떼를 써서 안 되는 일이 있남?...
"참말 딸년은 낳아 놓고 보면 남이라니까!"
갈씨 부인은 의미가 있는 듯, 없는 듯한 말을 중얼거렸다.
"집 떠나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 내 앞에서 한 번도 말을 고분
고분 들어먹지 않던 것이... 여봐요, 장씨 아우님. 모든 걸 잘 부
탁드리겠소!"
"알겠습니다. 백모님. 제가 무사히 돌아오는 한, 소패도 안전하
게 제 곁에 있을 겁니다."
장추산은 정중히 말했다.
말투는 평범했으나, 그 속에 숨겨진 뜻을 갈씨 부인이 못 알아
들을 리 있겠는가?
만에 하나 자신이 무사히 돌아오지 못할 경우, 소패의 생사 안
위에 대한 기대도 버리라는 의미가 담긴 것이다.
"무슨 뜻인지 알겠소. 조심하시오."
갈씨 부인은 사랑하는 딸을 끌어안았다. 장추산에게 던지는 목
소리도 어딘지 모르게 남다른 느낌이 들었다.
양주의 부호는 매우 많다. 그중에서도 갑부로 존경받는 부류는
관염(官鹽) 도매상으로 큰 돈을 버는 소금 장수들이다.
양주부의 염세는 1년에 1백 20만 냥, 그런데도 한 푼 에누리없
이 몽땅 서울로 올라간다. 전조 명나라 당시 양주의 매년 세액은
고작 30만 냥, 그 중에서 지방 사업비로 10분의 2를 남겨두고 24
만 냥이 중앙에 납부되었다.
양주에서 관염 도매상을 하는 거부로 모두 열두 집이 있다. 또
이들이 세액의 8할 남짓을 부담한다.
이 열두 가문의 염상들은 해마다 1백만 냥을 지불하고 여기다
또 활동비, 은화 주조 손실비용, 통과세, 기부금 따위 각종 명목
을 붙여서 가외로 한 집마다 매년 15, 6만 냥을 더 지불하기는 통
상관례가 되어 있다. 당시 은화의 값어치는, 너댓 냥이면 기름진
옥토를 2백 평쯤 살 수 있으니까 얼마나 거액인지 알 것이다.
열두 가문의 상점과 소금 창고는 모두 양주성이 아니라 의진현
(儀眞縣)에 있었다.
소금 운반선은 염하(鹽河)로부터 양주에 이르러 운하와 합류,
여기서 삼차하를 거쳐서 상운하로 들어가는데, 의진현 아래 강구
(江口)에 일단 정박하게 마련이다. 강구의 지명은 십이우, 현성
동남쪽으로 10여 리 떨어진 곳으로 상운하에 접어드는 입구도 된
다. 그래서 소금 운반선은 이곳을 집산처로 삼았고, 열두 가문 중
열 집의 소금 창고와 하역장도 십이우에 몰려 있게 된 것이다.
선창과 부두는 민간용, 조운선박용 두 군데로 나뉘어져서 하나
의 작은 왕국을 이루었는데, 이곳은 염운사(鹽運司)의 통제 아래
놓여 운영되고, 또 현성 남문 강구에 주둔 중인 기병영(奇兵營)에
서 군대를 내보내 지원하고 있다.
기병영이란 지방의 수비를 맡은 만주 팔기병(八旗兵) 군영이다.
이 부대에는 수륙 양면으로 전투 능력을 갖춘 정예 6백 명이 유격
통령(遊擊統領)의 지휘를 받아가며 주방(駐防) 임무를 맡고 있다.
하지만 이런 군무보다 더 중요한 임무는 염상이나 선박으로부터
상납금을 뜯어내는 일이다.
물론 그들이 직접 염치없게 얼굴을 내밀고 손을 벌이는 법은 없
다. 지방의 명사들이나 토박이 건달 패거리를 중간에 끄나풀로 끼
워 놓고 필요할 때마다 이용하는 것이다.
따라서 진짜 억만장자 부호는 양주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의진
현, 그것도 십이우에 몰려 있고, 양주성은 그저 그들이 따로 지점
을 설치하거나 연락소를 두고 흥청망청 번 돈을 뿌리고 향락이나
즐기는 마당판에 지나지 않는다.
부두에는 소금 창고가 숲처럼 늘어 세워져 있고, 노동자들이 밤
낮으로 하역 작업을 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3경 반야가
다되어서도 들락날락 움직이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 틈에 3, 40명
쯤 섞여 들어가더라도 누구 하나 눈여겨 보지도 않는다.
부두에 정박 중인 운반선은 호북(湖北), 호남(湖南), 강서(畺
西)각 지방에서 몰려든 것이라, 알아듣지 못할 온갖 사투리가 잡
탕으로 뒤섞여서 바로 제 곁에 누가 얼씬거려도 뉘 댁 노형이 무
슨 얘기를 지껄이는지 모른다. 또 하루에도 수백 척이나 되는 크
고 작은 선박들이 들락거리는 터라, 설혹 낯선 사람을 보았다 치
더라도 누가 누군지 알 길이 없거니와 또 한창 바쁜데 신경 써서
물어보기도 귀찮은 판이다.
4경이 거의 다 지날 무렵, 쾌속선 한 척이 서쪽 부두에 살그머
니 뱃머리를 갖다 대고 닻을 내렸다. 이 배에 주의를 기울인 사람
은 아무도 없었다. 바로 이웃 배 선원들조차도 그 흔한 인사 한마
디 건네지 않고 게으름뱅이처럼 갑판 돛줄 무더기에 팔베개 베고
기대 앉은 채 꾸벅꾸벅 졸기만 했다.
부두 서쪽 끄트머리에 기대어 세운 커다란 소금 창고는 웬 일인
지 창고문이 단단히 잠겨 있고, 하역꾼들이 드나드는 기척도 보이
지 않았다. 일찌감치 가게문 걸어닫고 하루 영업을 끝낸 모양이
다.
창고 안 회계실에는 호롱불이 환히 밝혀진 가운데, 몸집이 사뭇
우람한 사내 10여 명이 추위를 막느라 화롯불을 쬐면서 한창 술판
을 벌이고 있다. 한곁 계산대에는 두툼한 장포(長袍)에 마고자를
걸친 중년인 세 사람이 앉아서 장부와 거래 문간을 뒤적이고 있
다. 하루 매상을 계산하는지 얼굴 표정이 자못 엄숙하고 진지하
다.
계산실 바깥 근처 벽에는 마대자루가 50개나 쌓여 있다. 겉모양
이 장방형으로 생긴 것을 보면 소금자루가 아니라 그 안에 나무
상자가 들어 있다는 것을 금방 알 만했다.
창고 안에는 소금자루가 산더미처럼 쌓여서 어느 구석에나 온통
쩝쩌름한 소금내가 코를 찌른다. 소금자루는 계산실 벽에 치쌓인
마대자루보다 거의 두 세 배나 크다. 그러니 마대자루에 담긴 것
은 결코 소금이 아니라는 얘기다.
장한 10여 명은 모두 병기를 지니지 않은 비무장인데, 중년인
셋은 장검 한 자루, 단도(單刀) 두 자루를 차고 있었다.
여느 창고나 마찬가지로 이 소금창고도 사방 어느 쪽에서든 화
물을 들이고 내갈 수 있게 문이 동서남북으로 설치되었다. 그리고
문걸이에는 통나무 빗장을 질러서 그것을 때려부수지 않고서는 안
에 들어갈 수 없다.
습기와 강바람에 수십 년씩이나 찌들 대로 찌든 육중한 창고 문
짝을 때려부수고 돌입하기란 말처럼 그리 쉬운 일도 아니겠고, 또
설혹 때려부순다 하더라도 그 소리에 기병영 수비대 병력은 둘째
치고라도 수천 명씩이나 되는 부두 노동자들이 몽땅 놀라 달려올
터, 진짜 떼강도 짓이라면 창고문을 파괴하기도 전에 붙잡혀서 목
을 날려보내기 딱 알맞을 것이다.
창고 지붕에는 천정을 따로 덮지 않았다. 그걸 아는 전문가라면
지붕 위에 기어 올라가서 기왓장만 들춰내더라도 창고 안에 숨어
들어가기란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 더 쉽다.
소금자루는 대들보에 거의 맞닿을 정도로 높이 치쌓여 있기 때
문에 지붕 위에서 뛰어 내리더라도 다칠 염려 하나 없이 거뜬하
다.
흑두건으로 얼굴을 가리운 10여 명의 괴한들이 바로 지붕 위 기
왓장을 들추고 소리 소문도 없이 내려왔다. 먼지 한 톨 날리지 않
고 숨소리 하나 내지 않은 채 침입하는 동작으로 보건대, 하나같
이 전문가 중에서도 전문가들이다.
계산실 근처 공간은 그리 넓지 않았다. 거기에도 소금자루가 무
더기 무더기로 가지런히 쌓여 있고, 중간 통로의 폭은 불과 8척,
짐꾼들이 소금자루를 떠메고 겨우 드나들 만큼 비좁다. 계산실 앞
쪽도 고작 2장 남짓한 활동공간이 있을 뿐, 10여 명의 건장한 사
내들은 바로 거기에 걸상을 늘어 놓고 술을 마시거나 쉬거나 눈을
붙이고 졸고 있었다.
거래장부 계산을 다 마쳤는지, 중년인 세 사람은 계산대 안쪽
커다란 탁자 앞에 앉아서 희미한 등잔불 아래 고개 숙이고 무엇인
가 한창 속삭이고 있다.
그 중 한 사람이 뻣뻣해진 허리를 펼 양으로 일어나서 기지개를
켜다가 우연치 않게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그리고 계산대 너머
창문 바깥을 내다보았다. 소금더미 사이, 캄캄한 통로에서 너댓
명의 복면객이 생선꿰미 엮듯 줄줄이 걸어나오는 모습이 눈길을
끌었다.
또 다른 통로에서도 두세 명이 이제 막 소금자루를 딛고 뛰어내
리고 있는데, 착지 동작이 침착 냉정한 데다 발 밑에서 소리 하나
내지 않는 품이 흡사 유령이나 귀신이 떼거리로 나타나는 듯 싶었
다.
"이잇?..."
중년인이 깜짝 놀라 외쳤다.
"웬 사람들이냐!"
계산실 바깥쪽에 웅기중기 앉아 있던 장한 10여 명이 그 외침에
소스라쳐 일어났다. 그 중 서너 명은 벌떡 일어서기가 무섭게 양
가죽 저고리 안싶에 감춰둔 비수를 꺼내 잡았다. 이들은 서너 명
씩 3면으로 나뉘어 엄중한 방어진을 형성하고 침입자들이 다가오
기를 기다렸다.
지붕을 뚫고 내려온 침입자는 모두 열네 명, 그 가운데 네 사람
만이 옷차림새가 다를 뿐이다. 이들 복면객은 주인 쪽에서 싸울
태세를 갖추고 늘어 선 것쯤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태연히 창고
문한 곁에 기러기 날개 벌이듯 포진했다. 발자국 소리는커녕 숨
쉬는 기척도 내지 않고, 맞은편에서 엄중한 태세로 기다리고 있는
10여 명의 장한의 모습을 보고도 못 본 척 무시해 버릴 뿐만 아니
라, 중년인이 호통쳐 묻는 말에도 응답이 없었다.
계산실에서 중년인 세 사람이 화닥닥 쫓아나왔다. 그 중 한 사
람은 겨드랑이에 초문대(招文袋) 주머니를 하나 꿰어차고 뛰쳐나
왔다.
"당신들, 도대체 뭣 하는 사람들이야?"
장검을 차고 초문대를 끼고 나온 중년인이 엄한 소리로 물었다.
"뭣 하러 여기 들어왔소?"
"우리가 뭣 하러 왔든 상관 마시오!"
흑두건 복면 속에서 장추산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물건은 다 준비해 놓으셨겠지?"
"이잇? 당신네들... 당신네들 어째서 반 경(更)이나 일찍 왔
소?"
중년인이 사뭇 기분 나쁜 투로 항의했다.
"우리 시각을 딱 맞춰서 넘겨드리기로 약속되었을 텐데, 당신네
들은 너무 일찍 왔소. 시각이 빠르면 물건을 넘겨드리지 못하오!"
"귀하, 이런 일이 어디 제때에 맞춰서 처리되는 것 봤소? 만약
에 시간을 지킨답시고 어물거렸다가 정보라도 새나간다면 어쩔 테
요? 그 때는 당신이 책임지겠소, 아니면 날더러 책임지라고 할 거
요? 잔소리일랑 그만 걷어치우고 물건이나 내 놓으시오!"
"안 되오! 그건...."
"그럼 좋소, 우리 그냥 돌아갈 테니까 나중에 무슨 일이 생기든
지 그 결과는 일체 귀하께서 책임지구료!"
낚시 바늘에 걸린 물고기도 성급하게 낚아채면 놓치기 쉬운 법,
일단 줄을 슬슬 풀어 주고나서 지친 다음에 다시 당겨야 하는 것
이다. 장추산은 낚싯줄을 느긋이 풀어 주면서 빈정거렸다.
"흥! 어쩌면 당신네 쪽에서 김이 새어나갈지도 모르겠군. 반 경
시간 차이에 어떤 놈이 무슨 날벼락을 터뜨릴지 알꼬? 에이, 우린
모르겠소! 자 그럼 이만 실례!"
"노, 노형!..."
중년인이 다급하게 불러세웠다. 뻗대던 말투가 애원조로 바뀌었
다.
"그렇게까지 빡빡하게 나올 게 뭐 있소? 저도 분부를 받들어 일
을 처리하는 몸이라, 만에 하나 누설될까 봐 그래서 그런 거지 뭐
딴 뜻은...."
"그건 당신네 사정이지, 내 문제는 아니외다."
"노형...."
"나도 명령을 받고 일하러 온 몸이오. 조금이라도 지체했다가
변고라도 나면 안 되겠길래 서두른 거 아니오? 한데 귀하께서 융
통성을 보이지 않으니 어쩌겠소? 그냥 떠날밖에! 훗날..."
"우리 반 경 시각만 기다립시다! 안 되겠소?"
"반 경이 아니라 1각도 못 기다리오. 자, 이만 실례하겠소!"
단도를 찬 중년인 둘이 귓속말로 뭔가 상의하더니, 장검을 찬
동료의 귀에 다 데고 몇 마디 건넨 다음, 마지막에 가서 단호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좋소!"
드디어 중년인이 마지못해 양보를 하고 말았다. 그는 손가락으
로 벽에 치쌓인 마대자루 50개를 가리켰다.
"물건은 모두 저기 있소. 먼저 수량을 확인해 보시고 나서 우리
규정대로 인계 인수 절차를 밟읍시다."
"오, 고맙소! 그럼 마대를 풀어 놓고 검사부터 해야겠군."
"아이구, 맙소사! 당신, 우리 골탕먹이려고 작정했소?"
중년인이 펄쩍 뛰었다.
"이 물건은 염운사 창장대사(倉場大使)가 사람을 시켜 보내온
거요. 나는 부성에서 인수인계 절차만 책임지고 파견되었을 뿐,
나나 여기 데리고 온 사람들은 이 마대자루에 손가락 한 개 건드
려보지도 않았단 말이오. 그러니 이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누가
알겠소? 노형은 이걸 열어서 검사하실 모양이나, 내가 이 안에 무
슨 물건이 얼마나 들었는지 모르는데 어떻게 대조를 하겠소? 노형
은 지금 말 한마디로 사람을 죽였다 살렸다 하실 판이오?"
"당신, 부성에서 왔다고?"
"틀림없소. 나는 형방 역자소(譯字所) 소속원이외다. 만성 수비
부(滿城守備府)의 통역 연락관 책임을 맡고 있소. 그저께 이곳에
도착해서 해질 무렵에야 이 창고에 들어와 이 물건을 인계받았고
또 오늘 5경 3각 정시에 창고를 열어서 당신네한테 인계하기로 예
정되었단 말이오."
"됐소! 당신들도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모양이구료. 자, 그럼
물건을 넘겨 주시오."
중년인은 초문대 속에서 절반으로 쪼갠 나무 패 한 개와 역시
두 쪽으로 찢은 종잇장을 꺼냈다. 얼핏 넘겨다보니, 나무 조각에
는 괴상한 만주어 글씨가 꼬부랑꼬부랑 새겨져 있고, 뽕나무 껍질
로 만든 종잇장에도 만주족 문자가 쓰여 있었다. 그는 이 두 가지
를 계산대 위에 펼쳐 놓았다.
"먼저 신물(信物)을 대조해 봅시다."
중년인이 손을 내밀었다.
"가져오신 걸 꺼내 맞춰보시지요."
장추산은 황소눈만 멀뚱멀뚱, 아무 대꾸도 못한다. 어디서 무슨
신물을 가져왔겠는가 말이다.
그는 모른다. 관청에서 물건을 교부하거나 군사를 동원할 때는
미리 나누어 간수한 신물을 대조한다. 그 표지는 관인이나 서명이
찍힌 나무 조각을 둘로 쪼개어 한 쪽은 발령자가, 한 쪽은 수령자
가 보관했다가 일이 생겼을 때 서로 맞추어 확인한 다음에야 명령
을 받드는 것이다. 또 문서도 두 쪽으로 찢어 미리 한 쪽을 보내
놓고 파견관이 나머지 한 쪽을 가져가서 맞추어 신분을 밝힌 다음
에야 쌍방간의 일을 처리하도록 되어 있다.
"안 가져왔소."
없으니 안 가져왔을밖에, 그는 염치불구하고 뻗대었다.
"물건만 넘겨주면 그만이지, 뭐 이렇게 번거로운 절차가 필요하
오?"
"맙소사, 당신 내 목을 떼려고 작심했구료! 신물이 없으면 날더
러 돌아가서 어떻게 복명하란 말이오? 당신 혹시...."
"쓸데없는 소리!"
"아이쿠, 이제 봤더니 순 날강도일세!"
"도적이다! 가짜로 물건을 받으러 온 놈들이야!"
단도를 찬 중년인이 버럭 고함치면서 칼을 빼들었다.
"이놈들 잡아라! 생사 불문이다!"
그가 장추산에게 돌진해 가면서 칼을 쳐들었을 때였다. 장추산
의 오른쪽에서 있던 복면객이 바른손을 번쩍 휘둘렀다. '휙!' 하
고 섬전의 무지개가 번뜩 하다가 사라졌다.
그것은 자그만 유엽비도, 소도회 형제들이 암살할 때 전문적으
로 쓰는 비장의 무기로, 지근거리에서 빤이면 번개보다 더 빠르고
백발 백중의 명중률을 자랑한다.
유엽비도는 중년인의 오른쪽 어깨우물 견정혈에 뚫고 들어갔다.
치명적인 요혈은 아니더라도 일단 얻어맞았으면 우반신의 활동능
력을 잃어버리게 된다. 견정혈을 노린 겨냥은 정확하기 짝이 없어
서, 내출혈을 일으킨 피가 허파로 스며들지 않기 때문에 몇 달 치
료만 잘 하면 불구자 신세를 면할 수 있다.
"으악!..."
중년인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면서 칼을 놓쳤다. 그래도 돌진하
던 기세를 잃지 않고 달려들었다가 복면객이 쪼개 친 일장에 맞고
서야 까무러쳤다.
짧은 순간, 일대 혼란이 일어나고 여기저기서 '꽈당! 꽈당!' 하
는 소리와 더불어 여덟 명이 거꾸러졌다.
장검을 뽑아 든 중년인은 단 한 번 공격으로 장추산에게 칼자루
쥔 손목을 거머잡히고 또 한 손에는 목줄기를 움켜잡힌 채 번쩍
치켜들려, 이제 목을 비틀어 죽일 거위 새끼처럼 대롱대롱 매달린
신세가 되었다.
"캐드득, 캑캑!..."
숨통이 막혀 버둥거리는 몸뚱이를 장추산이 지푸라기 털듯 휙
내던져 버리자, 복면으로 얼굴을 감춘 갈패옥이 냅다 발길질을 날
려 더 멀찌감치 날려보냈다. 중년인은 숨통이 트이기도 전에 기절
해버리고 말았다.
윤소소를 포함한 열두 명의 복면객은 처음부터 단지 유엽비도를
써서 상대방을 가볍게 다치거나 손바닥과 주먹으로 쳐서 기절시키
기만 했을 뿐, 비수를 휘둘러가며 흉악스레 날뛰는 장한들과 목숨
걸고 싸울 뜻을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 나머지 장한들과 중년인도 모조리 쓰러졌다.
"자, 이제부턴 정말로 물건 받으러 오는 분들을 환영할 준비나
합시다!"
장추산이 명령을 내렸다.
"여기 누워 계신 친구들일랑 결박지워서 으슥한 데다 처박아 놓
고, 우두머리 노릇을 한 세 분은 나중에 끌어다가 문초해 보는 것
이 좋겠소."
복면객들은 다급하면서도 일사불란한 솜씨로 포로들을 깨끗이
정리했다.
윤소소가 마대자루를 하나 풀어헤쳤다. 과연 그 안에는 염운사
주소소를 거쳐 새로 녹여 만든 관은(官銀) 상자가 들어 있었다.
뚜껑을 열고 보니, 50냥 짜리 은화 덩어리가 스무 개 차곡차곡 포
개 앉아 있었다.
상자는 모두 50개, 한 상자당 문은(紋銀)이 1천 냥씩 담긴 셈이
다. 문은은 관은이라고도 부르는데, 소위 관청에서 무게를 정확히
달아 주조하여 통용시키는 은화다. 무게가 정확한 만큼 세금으로
내는 데 누가 시비를 하랴마는, 관청 사람들은 민간 주조용이나
똑같이 가외로 소모비용을 징수한다.
창고 뒷문이 열렸다. 복면객 12명이 두 다리에서 비파소리가 나
도록 날랜 걸음걸이로 은화 상자 50개를 떠메다가 쾌속선에 옮겨
실었다.
얼마 후, 소금창고에는 다시 무거운 정적이 찾아들었다.
길거리 순찰을 도는 야경꾼의 5경 초시를 알리는 딱딱이 소리가
들려왔다. 부두에는 하역꾼들이 여전히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들락거리고, 정박한 배 몇 척 갑판에서 향불 연기가 모락모락 피
어오르는 걸 보니 출항 준비를 끝마치고 하늘에 순조로운 항행을
기원하는 모양이다.
5경 3각, 동 트기 직전 으레 그렇듯이 하늘에는 또 한 차례 어
둠이 덮였다.
멀리서 절간의 새벽 종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와, 여명의 정적을
깨뜨렸다.
먹구름장이 무겁게 드리우고 바람결도 아직 캄캄하다.
짐꾼 차림을 한 열여섯 명이 큰댓자 걸음걸이로 휘적휘적 다가
와서 문제의 소금창고 앞에 늘어섰다. 짐꾼 하나가 앞으로 썩 나
서더니, 창고문 고리를 잡고 두드리기 시작했다.
"쿵쿵쿵!... 쿵쿵!... 쿵쿵쿵!"
처음의 세 번, 그 다음 두 번, 마지막으로 다시 세 번..... 도
합 여덟 차례를 세 마디로 끊어 두드리는 암호였다.
창고 안에서 누군가 육중한 통나무 빗장을 빼는 소리, 이어서
창고문이 무겁게 열렸다.
"들어오시오."
문을 연 사람이 한곁으로 썩 비켜섰다.
호롱불 빛이 환하게 밝은 것이 사방 둘레에 모두 여덟 개나 켜
놓았다.
계산실 밖에서 장추산과 윤소소는 동료 두 사람을 거느리고 서
서 손님을 맞아들였다.
"신물을 맞춰봅시다."
장추산은 계산대 위에 나무 쪽패와 절반 짜리 문서를 꺼내 놓고
한마디 덧붙였다.
"정말 시각을 딱 맞춰 오셨구료."
짐꾼 열여섯 명이 모두 들어섰다. 이들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소
금 창고 안을 둘러보았다.
선두의 짐꾼이 품속에서 반 토막짜리 나무 패와 또 다른 종잇장
절반 쪽을 꺼냈다. 짝을 맞춰보니 영락없이 딱 들어맞는다.
"물건은?"
짐꾼이 물었다.
장추산은 신물을 뭉뚱그려 한데 거두어넣고 나서, 벽 아래 쌓아
놓은 소금자루 50개를 가리켰다.
"바로 저것이오. 나는 인계 인수 절차를 마쳤으니, 여러분이 가
서 수량이 맞는지 검사해 보시오."
그는 선두의 짐꾼 곁을 바짝 따라붙으면서 능청스레 말했다.
"우리 측에서 세어본 대로 50개가 똑 맞소, 이제 여러분 차지
요."
짐꾼 열 명은 더 생각해볼 것도 없이 다가가서 소금자루를 움직
여 쳐들기 시작했다. 털끝만큼도 의심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소금 한 부대라면 무게가 1백60근, 몸집이 실팍한 장사라야 어
깨에 떠멜 수 있을 테고, 보통 장정은 둘이서 맞들어야만 동료의
어깨에 메어 지고 나갈 만큼 묵직하다.
"잠깐만!"
선두 짐꾼이 발걸음을 멈추더니 동료가 낑낑 떠메려던 소금자루
를 손으로 눌러 막았다. 새매처럼 날카로운 눈초리에 당장 의심의
구름이 감돌았다.
"뭔가 잘못 됐어! 내가 지시받기로는 자루 한 개의 무게가 6,
70근밖에 안 된다던데. 이건...."
"분량이 더 많아도 불만이시오?"
장추산은 실망스럽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지시대로 인계할 물건은 바로 이것 50자루외다. 가져가시
든 말든 좋을 대로 하시구료. 난 모르는 일이니까...."
"아니오, 내 생각이 그저 그렇다는 것이지, 딴 뜻은...."
상대방이 자루에 담긴 내용물을 무엇인지 모른다면, 은화 5만냥
과 전혀 상관없는 인물일 테고 또 적어도 처음 인수 인계 절차를
맡았던 역자소 관원과 다를 바 없이 이번 일의 내막을 명확히 알
지못하는 하수인에 불과할 것이다. 넘겨받을 물품 내용도 모른다
면 허수아비들이나 다를 바 없다. 그래서 장추산의 실망은 매우
컸다. 가만 보아하니, 정체를 알지 못할 이 상대는 기사건건 주도
면밀하게 안배할 줄 아는 범죄의 전문가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는 속으로 긴장하면서 짐꾼들의 거동을 유심히 살폈다. 이제
정말로 소금자루를 떠메고 나가는 날이면, 그의 실망은 더욱 커졌
으리라.
일행 가운데 제일 뒤쪽에 처져 있던 짐꾼 하나가 느닷없이 동료
들 틈을 헤집고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손바닥으로 소금자루를 탁
탁 쳐보았다.
"흠, 진짜 소금이로군!"
그 짐꾼은 사나운 눈초리로 장추산을 흘겨보았다.
"그렇소. 어쩌면 소금일지도 모르오."
장추산은 사면에 꽉 들어찬 소금더미를 빙 둘러 가리키면서 말
했다.
"보시오, 여기 있는 게 모두 소금자루가 아니오? 이게 아니면
소금 창고에 도대체 뭘 가지러 오셨소?"
"귀하는 정말 소금을 넘겨주실 작정이오?"
"내가 꼭 소금이라고는 말하지 않았소."
장추산은 태연스레 받아넘겼다.
"어차피 난 이 자루 안에 무엇을 담았는지 모르니까 말이외다.
난 그저 지시대로 여기서 이 자루 50개를 넘겨드리기만 하면 임무
가 끝나오. 이 안에 도대체 무슨 물건을 담았길래 그러시오? 나도
좀 알고나 넘깁시다."
"잡놈의 새끼!"
짐꾼은 다짜고짜 욕설부터 퍼부었다.
"어라? 이 양반이 누구한테 욕을 하는 거야?"
장추산은 능청을 떨면서도 속으로 긴장했다.
"말할 테니 똑똑히 들어라! 도대체 누가 시켜서 이 어르신을 골
탕 먹이는 거냐? 물건을 바꿔쳤지? 점잖게 말로 할 때 불어!"
짐꾼은 장추산의 멱살을 바짝 움켜쥐고 으르렁거렸다.
"수비부 참령(參領) 도도(多鐸) 장군께서 친히 말씀하셨다. 여
기서 넘겨받을 물건은 은화 5만 냥, 이 상금을 내리시기로 약속하
셨단 말이다! 잘 봐라, 네놈의 눈에 이것이 은화냐 소금이냐?"
"아이구, 아이구 숨 막혀라! 이 손 좀.... 놓으쇼!..."
장추산은 돼지 멱따는 소리로 비명을 질러댔다.
"그건 나하고 상관... 상관 없는 일이오!..."
버둥거리면서도 일순 그의 눈빛은 바로 곁에 있는 윤소소에게
흘러갔다. 이제 뭔가 한 가닥 잡혔다는 눈짓이었다.
짐꾼은 계속 호통을 쳤다.
"이 잡놈! 그래도 모른다고 잡아뗄 거냐? 수비부 군영에는 애당
초 돈이 없으니, 양주부 관고에 지령을 내려서 지출하도록 했어.
부고(府庫)에도 5만 냥이나 되는 거액이 없을 터, 그래서 양주 지
부 대감이 염운사를 중간에 내세워 이곳 10대 염상더러 우선 세금
조로 조달해 바치게 한 다음, 나중에 공제조치를 취하게 했단 말
이다! 이런 절차를 거치느라 닷새나 시간이 걸려서 이제 겨우 5만
냥을 마련했는데, 누가 그걸 빼돌린 거냐?"
"빼돌리다니요?"
"염상이 돈을 조달할 책임을 맡았기 때문에 우리도 여기서 넘겨
받기로 약속했던 거다. 이놈아, 어서 자백하지 못할 테냐? 어디서
사고가 터진 거냐? 양주 부고에서? 염운사에서? 아니면 염상들이
꾸민 짓이냐? 어서 말해!"
"사고는 내 몸에서 터졌소."
드디어 장추산이 자백(?)했다.
"이제 봤더니 노형께서 내막을 훤히 알고 계시는군 그래? 5만냥
은화가 어디서 무엇 때문에 어디로 굴러가는 것인지 모르는 것이
없는 분 같소 그려! 하기야 내막을 맹탕 모르는 사람더러 그 막대
한 돈을 운반하라고 보냈을 리 없겠지. 안 되겠군, 내 당신을 관
가에다 고발해야겠소!..."
그 다음에는 '푹! 퍼벅!' 둔탁한 음향과 더불어 두 대의 단충권
(短衝拳)이 짐꾼의 아랫배를 연달아 들이쳤다. 왼손은 아직도 멱
살을 움켜쥔 상대방의 손아귀를 붙잡은 채로 말씀이다. 그러니 제
깟 놈이 안 넘어가고 배겨낼 도리가 있겠는가?
"어흑!..."
짐꾼은 숨막힌 외마디를 지르더니, 반사적인 동작으로 왼손의
검지와 중지를 곧추세워 그의 칠감대혈(七坎大穴)을 찍었다.
혈도를 찍히는 찰나, 장추산은 온 몸뚱이가 부르르 떨리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바로 호체기공이 흔들리는 현상이었다. 놀랄 만한
점혈수법, 강력한 잠력으로 보건대, 이 짐꾼 나으리께선 고수 중
에서도 고수가 틀림없다.
그 순간, 사면 팔방 소금더미 뒤에서 번개 벼락치듯 기습이 쏟
아져 나왔다.
"퓽!- 휘리릭!-"
섬전(閃箭)의 무지개와도 같은 유엽비도의 무더기가 광풍 폭우
몰아치듯 한꺼번에 발사된 것이다. 목표는 계산실 앞쪽 공터에 한
덩어리로 웅기중기 몰려 있던 짐꾼 10여 명, 이들은 어디 움치고
뛸래야 뛸 데 없이 고스란히 비도의 집중표적이 되고 말았다.
"으아악!..."
"우왓!... 아이쿠!..."
칼 맞은 짐꾼들이 미친 듯이 비명을 지르면서 거꾸러지는 동안,
이쪽에서도 결판을 내고 있었다.
"퍽!"
그의 오른 팔꿈치가 흉맹스럽기 짝이 없는 <패왕촌>(覇王 )의
일격을 퍼부었다. 그야말로 산이라도 무너뜨릴 듯 무지막지스런
공격이 늑골 부위에 강타를 한 대 먹인 것이다.
"으왝!..."
짐꾼은 더 견디지 못하고 소금자루 물 속에 녹아들듯 스르르 주
저앉고 말았다. 아마 못해도 갈비 몇 대쯤 부러졌을 테고 내장도
손상을 입었을 것이다.
"자, 선배님께 인계합니다."
그는 문제의 짐꾼을 윤소소에게 밀어주었다.
"선배님, 어디서부터 실마리를 풀어 추적하실 생각입니까?"
윤소소는 응답 대신 먼저 짐꾼의 혼혈에 일장을 먹여놓더니, 그
자리에 무릎 꿇고 장추산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아우님의 그 의기, 하늘에 닿을 지경이오!..."
노인장의 얼굴 주름살을 타고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2백 13명의 남녀 노소, 구천지하에서라도 아우님께 감사드리면
서 편히 눈을 감을 것이오...."
"어르신, 고정하십시오!"
그는 다급한 손길로 윤소소를 부축해 일으켰다.
"그럼 후배의 혐의는 이것으로 씻겨진 셈입니다. 예서 한 걸음
더 실마리를 따라 조사해 나가시면 필경 그 재앙을 일으킨 주범도
찾아내실 수 있겠지요. 이 후배도 여러분의 성공을 빌겠습니다."
"아우님!..."
장추산이 갈패옥의 손목을 잡아 끌었다. 단 두세 번 신형을 번
뜩였을 때는 이미 창고 문 바깥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제2권 끝
첫댓글 고맙습니다.
즐감했습니다.